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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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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3)
2016년 02월 23일 11시 28분  조회:1952  추천:0  작성자: 김장혁
 


                             7. 시비
     시간이 흐를수록 기준의 상처는 심해져 돌아눕기도 어려워했다. 운신조차 하지 못하고 위방에서 신음하는 아버지를 보자 상순은 분을 참을 수 없어 속에서 뭔가 자꾸 울컥울컥했다.
      밸이 그렇게 센 상순도 온 집안의 목숨과 관계된다는 부모의 말을 듣고 용케도 참았다.
     그는 마당에서 왔다갔다 거닐면서 속궁리를 하다가 피뜩 인삼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분명 지학사한테 괭이에 찍혔는데 법으로 해도 지학사한테 질게 뭔가? 아무리 더러운 세상이라도 법이 있겠지. 어디 한번 법으로 해보자.”
이렇게 마음먹은 상순은 위방에 들어가 자기 의향을 말해보았다.
그러자 창준은 말리였다.
“일본 놈의 세상에 송사를 해 무슨 소용 있다고 그러니?”
기준도 너무 기 막혀 손을 들어 말리었다.
“이 한심한 놈아, 여기 어디라고, 이기지도 못할게 뻔하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
상순은 또 성이 울컥 치밀어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가 발로 땅을 탕탕 굴러댔다.
그때 위방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장하다. 사내란 기를 꺾이고 살아선 안 된다. 헛일 삼아 송사를 해봐라.”
마당에서 의논하는 시할아버지와 시동생을 내다보던 지새금이 정지에서 새된 소리를 쳤다.
“아이고, 우리 소서구에서 못 살고 허망에 나앉겠다. 저 시동생 때문에 언제 지학사네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겠다. 시할아버지는 애들을 말리는 게 아니라 붙는 불에 키질하오."
눈까지 흘기는 지새금을 보고 병완은 꽥 호통 쳤다.
“거 입 다물지 못할까?! 암탉이 꼬꼬댁거리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다.”
지새금은 머리를 푹 떨어뜨리더니 어깨를 들먹이면서 도도도 거렸다.
“에이고, 내 억울해 이 집안에서 어떻게 살겠니?”
“계속 지껄이겠는가?!”
지새금은 입을 딱 다물고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고 흑흑 흐느끼면서 정지에서 쌀을 일어 가마 안에 왈왈 쏟아 넣었다.
(에이고, 분해서 어디 살겠니? 언니하구 아저씨는 나를 뭐 이런 집에 시집보냈어? 흑흑흑. 밥이나 지어 놓고 시집에 달아나야지. 흑흑.)
언니란 아래사랑집 석철의 처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 부부가 지새금을 상우한테 혼사 말을 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고향 운주동 뒷골안 가마골에서 살던 새금의 남동생 지선달마저 함흥촌에 데려왔고 토성안집 바깥에 있는 우물 동쪽에 초가삼간까지 져주었던 것이다. 지새금은 시집살이에서 밸이 날 때마다 쩡하면 본가 집 오라비 선달이네 집으로 달아나군 했다. 본가 집 어머니와 올케와 시집 허물을 한바탕 늘여놓으면 속이 훌 풀리곤 했다.
(에이고, 할아버진 늘 저런 것도 막내 손자라고 역성을 들긴?)
오늘도 그녀는 오라버니네 집으로 가버리었다.
한편 상순은 숟가락을 드네 마네 했다. 그는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주먹을 쥐고 진수해 쪽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싸늘한 부르하통하 강물을 헤엄쳐 건넜다. 토성안집을 피해 지나가 길손들에게 이리저리 물어 겨우 진수해에 있는 조일파출소를 찾아갔다. 조일파출소는 용정에 있는 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속 파출소이었다.
파출소문안은 밑바닥을 일본식으로 자주색 널판을 깔아놓아 꽤나 이색적이고 으리으리해보였다. 보초를 서던 경찰이 총창으로 상순의 앞을 막으면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상순은 알아들을 수 없어 보초를 쳐다보면서 손짓했다.
그때 통역인 조선 사람이 나타나더니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상순은 단도직입적으로 “저 패용천산 앞마을의 지학사란 지주 놈이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었습니다. 지학사를 고발하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뒤이어 사건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그러자 통역은 상순의 아래위를 죽 훑어보면서 대견스레 머리를 끄덕였다.
“조꼬마한 자식이 정말 담대하구나. 너 이름이 뭐니?”
상순은 조선족 사람이니까 도와줄 것 같아 대답했다.
“김진입니다.”
상순은 아버지가 고쳐준 이름을 댔다.
“네 아버지 이름은?”
이번에도 이전에 할아버지가 일러둔 대로 아버지 애명을 불렀다.
“경칠입니다.”
통역이 통역해주자 보초는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
통역이 상순을 데리고 소장 실에 들어가 뭐라고 꼬부랑꼬부랑 말했다.
그러자 일본소장은 상순을 보고 뭐라고 말했다.
통역은 “일본 제국의 2등공민이니까 봐준다네. 그런데 별로 큰 일이 아니니까 관할구역의 분주 소에 가서 말해라고 하네.”하고 통역해주었다.
상순은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진수해조일파출소 소장 실을 나왔다.
통역은 바깥에까지 따라 나와 상순을 말리였다.
“지학사라고 들었네. 진수해에서도 악명이 높더구먼. 주의하게나.”
그러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아무리 세력이 세다 해도 지학사는 어처구니없는 무함을 하면서 괭이로 죄 없는 사람을 찍어놨으니 잘못한 게 아니고 뭡니까?”
통역은 조일파출소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오면서 “해동분주소 소장은 지학사의 친척집 동생이네. 송사를 걸어서 이길 수 있겠니?” 하고 말렸다.
그러자 상순은 통역을 보고 청을 들었다.
“만약 중국 소장이 시비를 제대로 가르지 않고 지학사 죄를 덮어 감추는 날엔 난 파출소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때 좀 도와줍소. 같은 조선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자 조선통역은 상순의 강한 성격과 어린 나이에 하늘을 찌르는 기개에 감동돼 머리를 끄덕였다.
통역은 상순을 보고 진수해 북쪽에 있는 토성 쪽을 가리키면서 “저 북쪽으로 가서 부르하통하를 건너서 한 2 리 들어가면 해동분주소가 있다.” 하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상순은 조선통역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주먹을 쥐고 진수해 북쪽으로 뛰어갔다.
상순은 오던 길로 돌아서서 부르하통하를 헤엄쳐 건넜다. 그가 통역이 알려 준 대로 북쪽으로 한 2 리 가니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과 물으니 마을 복판을 찔러 서북쪽으로 뻗은 길옆의 둔덕 위에 해동분주소가 있었다.
상순은 해동분주소 대문으로 쑥 들어갔다.
그때 권총을 차고 거들먹거리면서 파출소 울안에서 거닐던 한족경찰이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로 여기 왔니?”
상순은 주춤 멈춰서면서 인차 류창한 중국 말로 “지학사가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어놔서 소장을 찾아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손가락질하면서 호통 쳤다.
“네 이놈새끼야,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언감 지학사를 고소한단 말이냐? 살고 싶거든 가라.”
상순은 진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처럼 그 경찰을 꾸짖었다.
“당신은 지학사의 누구기에 지학사 역성을 드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다른 경찰이 상순을 말리였다.
“네 요놈새끼, 언감 우리 소장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그제야 상순은 조금 언성을 낮처 말했다.
“당신은 소장이면 법을 제대로 집행하리라 믿소. 우리 아버지 지학사가 휘두른 괭이에 찍혀 지금 집에 누운 채 운신도 하지 못하고 있소. 지학사를 처리하구 치료비를 받아주오.”
뒤이어 사건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상순은 입술이 말라 터지게 한식경이나 말했건만 한족소장은 코웃음을 쳤다.
“네 지금 세상을 아니? 지학사가 어떤 분이고 네가 누구냐?”
그러나 상순은 굽어들지 않고 소장에게 바투 들이댔다.
“소장은 지학사와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죄인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무사할 거 같소?”
그 말에 소장은 상순을 데리고 소장 실로 들어갔다.
한족소장은 틀스레 사무 상에 앉아 맞은쪽에 빗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헌 옷을 입은 상순의 아래위를 한참이나 훑어보았다.
그는 상순의 집안 형편을 이것저것 묻더니 마지못해 한마디 물어보았다.
“지학사가 괭이로 네 아버지를 찍어놓았다는 증거나 증인이 있느냐?”
“증거와 증인이라는 건 뭐요?”
소장은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붙이면서 허리를 쭉 펴며 턱을 쳐들고 거만스레 말했다.
“말하자면 지학사가 괭이로 네 아버지를 찍는 걸 본 사람이 있는가는 말이다.”
“있소. 내가 바로 증인이오.”
상순의 말에 한족소장은 쓴 웃음을 지었다.
“넌 피해자의 아들이기에 증인으로 될 수 없다. 증인이 없으면 네 아버지를 찍었다는 건 거짓말과 같다.”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더니 한족소장에게 다가서면서 말했다.
“있소. 증인이 있소.”
“누구냐?”
“패용천산 앞마을의 송학정이요.”
“송학정?”
한족소장은 벌떡 일어나면서 놀라했다. 그자는 상순을 쏘아보더니 머리를 숙이고 소장실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한참 후에야 한족소장은 교활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껄여댔다.
“네가 증인을 내 앞에 데려오면 처리하겠다.”
상순은 대번에 “알았소. 내 송학정을 증인으로 데려오겠소.” 하고 말하고는 팔소매로 터진 입술의 피를 쓱 닦으면서 소장 실을 나왔다.
버드나무숲속의 아름드리나무가 봄바람에 아우성치며 몸부림쳤다. 상순은 버드나무숲속을 헤집으면서 소서구로 돌아오는 길에 어떻게 하면 송학정을 증인으로 분주소까지 끌고 가겠는가를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해가 어둑어둑 져가는 것을 보고 그는 소서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자 위방에서 아버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누우려고 애썼다.
“얘, 상순아, 네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 중국 지주를 건드려 놓고 어떻게 살자고 그러니?”
상순은 말라 터진 입술을 감빨면서 말했다.
“어찌 남에게 짓밟히고 가만있겠습니까? 벌레도 디디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뒤이어 그는 낮에 진수해조일파출소와 해동분주소로 갔던 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얘, 내 오줌 약을 발랐더니 아픈 것도 좀 낫는 거 같다. 그래 참구 넘어가자. 옛 말에 맞은 놈은 발편잠을 자구 때린 놈은 발편잠을 자지 못한다구 하지 않았느냐?”
기준의 말에 상순은 펄쩍 날뛰었다.
“아버지, 맞고 가만있으란 말입니까? 억울해 어떻게 삽니까?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살겠습니까? 지학사를 절대 가만 놔둘 수 없습니다. 이제 송학정을 증인으로 나서게 하면 됩니다. 내 분주소 한족소장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진수해조일파출소에 가서 일본 소장에게 고발하겠습니다.”
기준은 앓음 소리를 냈다.
“에이고, 이 답답한 애야, 일본 놈들이 우리를 도울 거 같니? 중국 지주들과 한통속이다.”
기준은 애써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상순과 상우가 양쪽에서 조심스레 부축해 벽에 기대여 앉히었다.
기준은 옆구리가 너무 아파 상을 찡그리더니 겨우 나직이 말했다.
“상순아, 넌 어려서 모른다. 조선에서 할아버지와 나, 큰아버지는 일본 놈들의 경찰국이 무너지게 지었단 말이다. 성칠 큰아버지는 항일유격대 대장이 아니고 뭐냐? 그 형님은 고향에서도 포수대를 영솔해 숱한 일본 놈들을 죽였다. 그래서 일본 놈들은 지금도 우리 일가를 수색해내 몰살시키려고 한다. 네가 일본 놈들의 파출소에 가서 송사를 걸다가 우리 일가가 드러나는 날엔 온 집안이 몰살하게 된다. 황차 지학사는 장지주네 친척이 아니고 뭐니? 자칫하면 우리 소서구에 애나게 일군 황무지 밭을 붙히지도 못하고 쫓겨나겠다. 제발 송사를 그만둬라.”
새금이 도도거렸다.
“생원이, 정말 비오. 제발 싸움을 걸지 마오.”
“그만 말하오! 옛날부터 집안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오.”
상순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아주머니를 쏘아보았다.
새금은 시동생의 성난 사자 같은 성질을 아는지라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부엌으로 내려가 옥수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상순은 아버지에게 간곡히 말했다.
“이 놈의 소서구에서 살지 못하면 이 넓은 간도에서 어데 가서 살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빚을 지고는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억울하게 살겠습니까?”
기준은 근심스러워서 “네가 파출소에 가서 이름이 뭐라고 했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이전에 아버지가 고쳐준 대로 김진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김경칠이라 하구. 이제 큰아버지를 물어보면 김문칠이라구 하겠소.”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고향은 어디라고 하겠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전에 함흥에서 왔다고 하라 했지 았았습니까? 그래서 저 아래 마을도 함흥촌이라고 달았지 않았고 뭡니까?”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그래도 시름을 놓지 못했다.
“일단 조선 명천에서 온 일본 경찰이거나 조선경찰들이 우리를 면목을 알기에 큰일 난다. 이전에 내 용정에 갔을 때 조선의 똘만이란 경찰이 내 뒤를 쫓는 걸 겨우 꼬리를 떼 놓았다. 제발 송사를 그만 둬라. 괜히 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지 말거라.”
상순은 거친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더니 구들을 탕탕 쳤다.
기준은 막내아들을 계속 말리였다.
“내라구 네보다 성이 나지 않는 거 같니? 네보다 밸이 약한 거 같니? 그래도 온 집안 목숨을 생각해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딘다.”
상순은 성이 나서 “에이!” 하고 소리치더니 바깥으로 화닥닥 뛰어나갔다.
그는 밸을 참지 못하고 발로 땅을 탕탕 구르면서 하늘에 대고 꽥꽥 고함쳐댔다.
이때 소서구로 최경숙과 석철, 석은형제가 기준이네 집으로 올라왔다.
“사돈총각이 어째 이리 야단이오?”
상순은 허리굽혀 인사하고는 “우리 아버지 괭이에 찍혔는데도 송사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고 하소연했다.
경숙은 안사돈과 인사를 하면서 위방으로 들어갔다.
“사돈어른 어떻습니까?”
“아, 아니, 사돈어른이 어떻게? 아저씨 네도 왔구만.”
기준은 아파서 상을 찡그리면서도 상우를 보고 부축하라고 하여 일어나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사돈어른, 편안히 누워있소.”
석철과 석은이도 이구동성으로 문안했다.
석은은 바깥에 서서 주먹을 쥐고 씩씩거리는 상순을 피뜩 내다보고 머리를 되돌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조카, 절대 송사를 걸지 마오. 괜히 말썽이나 일으켜 우리 종친들까지 함흥촌에서 못 살게 만들지 마오.”
기준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고. 근심하지 마오. 우리도 송사를 하지 말라고 저 자식 놈을 꾸짖소.”
기준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상우를 보고 “상순을 불러라.” 라고 했다.
상순이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순아, 네 기개는 장하다. 허나 종친과 온 집안의 목숨을 생각해서 송사는 그만둬라. 알았니?”
상순은 마지못해 “예, 아버지 말씀대로 송사를 그만두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요 막내아들은 밸때기는 세도 어시 말은 잘 듣지.”
경숙이나 석철 형제는 모두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시름 놓겠소. 만약 송사를 계속 하면 여기를 오지 말자고 했습니다. 자칫하면 사돈어른 네 여기 사는 게 일본 놈들에게 드러나는 날엔 우리도 사돈네를 따라서 여기서 살지 못합니다. 일본 놈들의 성화에 살겠습니까? 우리 고향 마을에 선 일본 학교에 드나드는 아버지 옛 제자 류강철이 기억납니까?”
경숙의 물음에 기준은 “기억나고 말고. 그자가 끼무라 국장 놈의 일어통역을 하지 않소?” 하고 기침을 쿨룰쿨룩 했다.
경숙은 기준을 부축해 자리에 편안히 눕힌 후 말했다.
“류강철이 아버지하구 말하는 거 들으니 지금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란 놈이 사돈어른이 어디를 갔는가고 혈안이 돼 찾는다고 합디다. 그 놈들은 사돈어른 네를 붙잡기만 하면 팔촌까지 몰살시키겠다고 독살을 피운답니다. 신설동의 병권 큰 사돈어른을 교살하구서도 살인마수를 계속 뻗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숨어 살면서도 주의해야 합니다.”
기준은 비스듬히 누워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 주의해야지.”
모두들 상순이가 송사를 그만두겠다고 한지라 한시름을 놓고 소서구에서 내려갔다.
오후에 숱한 장지주로 제지주로 숱한 중국지주들이 줄을 지어 소서구 기준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뒤에 장지주네 충국과 리국까지 나무꼬챙이로 길옆의 옥수수이파리를 탁탁 쳐서 끊어놓으면서 따라 왔다.
장지주는 신도 벗지 않고 구들에 털썩 올라와 앉지도 않고 떡 뻗치고 섰다. 그 거만한 상통은 똑 마치 부뚜막 우에 뛰어올라 간 흙투성이 개 같았다.
그는 괭이에 찍혀 앓아누운 기준을 보고 문안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한바탕 위협공갈을 해댔다.
“기준이, 자넨 계속 여기서 살겠소? 말겠소?”
기준은 아프면서도 상우의 부축을 받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았다.
“장 주인, 앉소. 우린 송사를 그만두기로 하였소. 당신들과 등을 져서야 이득이 날게 뭐요?”
제지주가 나서서 송사를 말리였다.
“거 잘 생각했네. 지학사가 누구요? 밭만 해도 몇 백무나 되네. 밭 한 뙈기만 분주소에 줘도 자넨 송사에서 지고 말거네.”
장학산은 우쭐해서 지껄여댔다.
“이 집에 뭘 내밀게 있소?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걸칠게 없는 주제에 내 사촌동생네하구 걸구 들겠는가? 밭 한 짐도 없어 내 밭을 붙이는 비렁뱅이 신세에, 흥!”
이때까지 잠잠히 바깥 문 옆에서 주고받는 말을 듣던 상순은 속으로부터 뭔가 꼭뒤까지 울컥 치밀었다.
그는 씽 사랑방에 달아 들어가 시퍼런 작두날을 뽑아들었다. 그때 상우가 뛰어와서 작두날을 빼앗아냈다.
“어째 이래니? 넌 욱 하면 왜 작두날을 휘두르니? 참아라, 참아!”
그러나 상순은 분해 눈물을 흘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어떻게 참소?”
그때 충국이 사랑방을 들여다보고 지껄였다.
“개새끼, 네 감히 작두날을 뽑아들고 달려들겠니? 죽지 못해서.”
그 말은 붙는 불에 키질을 한 셈이었다.
상순은 이번엔 괭이를 쥐고 씽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상우가 상순의 손에서 괭이를 빼앗아내고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발 이러지 말라.”
“야, 어디 분해 살겠소?”
상순은 몸부림치며 야단쳤다.
“참아라. 참아!”
상순은 한참 후에야 겨우 꼭뒤까지 치미는 노기를 용케도 가라앉혔다.
그는 장학사네를 보면 눈이 불이 활활 일어 천지꽃산을 넘어 패용천산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산정에 올라 버드나무숲속에 거만하게 높다란 토성 안을 내려다보면서 소리쳤다.
“지학사, 이 놈아! 내 네놈을 가만 놔둘 거 같으냐? 내 유격대에 들어가 꼭 네놈을 내 손으로 처단 할테다!”
상순의 고함소리는 산울림에 의해 멀리멀리 메아리쳤다.
“지학사 놈아! 우리 아버지를 찍은 네 놈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발로 너럭바위를 탕탕 굴렀다.
“사람이 어찌 시비 지고 사는가!”
상순은 고함치며 돌멩이를 주어 절벽 아래에 힘껏 뿌렸다. 뒤이어 그는 커다란 돌을 절벽아래로 굴렸다. 돌멩이는 상순의 성난 사자 같은 밸 때기를 담기나 한 듯이 델 델 굴렀다.
그는 노기가 풀리지 않아 연속 육중한 바위 돌을 내리굴렸다. 커다란 매돌 같은 바위 돌들은 내리 굴다가도 비스듬히 경사진 절벽 너럭바위 돌에 부딪쳐 하늘 공중에 튕겨 올랐다가 더 무섭게 산 아래로 날아 내려가 퉁퉁 떨어졌다.
8. 송사
한참 후 상순은 패용천산에서 내려가 칼산 사이에 난 산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나갔다.
(지학사가 또 물도랑을 터지어 놓고 우리 탓이라면 어찌 하겠니?)
그는 이런 근심을 하면서 어느덧 지학사네 밭과 자기네 논밭사이에 뺀 물도랑 옆의 오솔길에 들어섰다. 물도랑을 따라 서남쪽으로 올라가면서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물도랑은 터진데 없었다.
(다행이구나. 시비곡직이 없는 지학사 놈이 또 무슨 꿍꿍이를 칠지 누가 아니?)
그때 동쪽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강냉이 밭에서 누군가 기음을 매고 있었다.
“아! 저게 송학정이 아닌가!”
(저 사람은 그날 아버지가 자학사에게 괭이에 찌힌 걸 보았다. 저 작자를 증인으로 내세우면 되겠는데. 저 놈은 감히 지학사와 엇서면서 증인으로 서지 않을게야.)
상순은 금방 집에서 아버지와 친척들 앞에서 송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일을 까맣게 잊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어떻게 하면 송학정을 증인으로 내세우겠는가를 한참이나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송학정에게 스적스적 다가갔다.
송학정은 상순을 못 본 척하면서 계속 자루 긴 호미로 기음을 매나갔다.
상순은 미리 궁리한대로 다짜고짜로 송학정의 멱살을 틀어지고 따지고 들었다.
“네놈이 어째 내 아버지를 괭이로 찍었니?”
송학정은 억울해 어망 결에 변명했다.
“내 언제 찍었니? 지학사가 찍었지.”
“뭐라고? 네 놈이 자기 찍고서도 지학사한테 떠밀어? 죽고 싶으냐?”
그러자 송학정은 멱살을 틀어쥔 손을 풀면서 소리쳤다.
“이걸 놓고 내 말을 들어라.”
상순은 멱살을 놓아주었다.
송학정은 이렇게 말했다.
“그날 내 다 보았다. 지학사가 괭이로 물도랑을 터지어놓았어. 그러고도 네 아버지가 터지어 자기 밭에 물이 들어가게 했다고 걸고 들었어. 그 놈은 네 아버지를 괭이로 세 번이나 찍어놓았다.”
“네가 찍지 않고 지학사가 찍었다는 걸 증인으로 나서서 증명설 만 한가?”
속학정은 호미로 땅바닥을 짚고 서서 살기등등한 상순을 겁기 띤 눈으로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증인을 서서 증명하겠다.”
그런데 송학정은 인차 뒤로 물러섰다.
“이제 생각해보니 증인을 서는 날엔 지학사 성화에 이 마을에서 못살고 나앉는다. 증인을 못 서겠다.”
그러자 상순은 “그럼 네가 찍은 게구나. 증인을 서겠니? 우리 아버지를 찍은 죄를 쓰겠니?” 하고 바투 들이댔다.
송학정이 얼떨떨해 멍청히 서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자 상순은 멱살을 틀어쥐고 끌었다.
“분주소로 가자, 이 놈 새끼 찍은 게 분명하구나.”
그러자 송학정은 “아니다. 지학사가 찍었다. 증인으로 나서 증명하겠다.”라고 하며 멱살을 놔라고 했다.
“그럼 좋다. 이 길로 가자.”
상순이가 쥐어 끄는데 송학정이 뻗치면서 말했다.
“내 말을 듣고 가자. 어제 해동분주소 지소장이 지학사 네 집에 와서 술을 가득 처먹고 가더라. 권총을 차고 우리 집에 와서 절대 증인으로 나서지 말라고 하더라. 증명을 서는 날엔 여기서 살지 못할 줄 알아라고 을러메더라. 지학사도 증인으로 나서는 날엔 수하를 시켜 죽여치우겠다고 하더라. 내 증면을 서도 이 송사는 이기지 못할게 뻔하다. 너나 내나 그저 못 살고 나앉겠니? 가지 말자.”
그 말을 듣자 상순은 더욱 약이 올랐다.
“나쁜 놈 새끼들이, 벌써 짜고 들었구나. 어디 두고 보자. 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상순은 주먹으로 하늘공중을 마구 찌르며 을러멨다.
“무서워 말고 가자. 내 뒤에는 몇 백명 군대가 있다. 저까짓 지학사나 분주소 소장 놈이 다 뉘 아들이라더냐?”
기고만장한 상순을 이기지 못해 송학정은 호미를 옥수수 밭에 파묻어놓고 상순에게 끌리다 싶이 하여 그 길로 해동분주소로 내려갔다.
어린 옥수수는 야들야들한 이파리를 봄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야들야들한 옥수수이파리라고 하여도 모난 이파리에는 선뜩선뜩한 날이 서있음을 지학사가 알았으랴? 분주소 소장이 짐작이나 하였으랴!
상순은 송학정이 변심할 가봐 단숨에 끌고 분주소로 달려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 나래라도 돋았으면 학정을 훌 안고 훨훨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송학정이 달아나기라도 할 가봐 손을 꽉 잡고 버드나무숲을 헤치고 가시덤불을 헤집으면서 호박 길을 반달음 쳐 해동분주소로 찾아갔다.
그를 본 지 소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왔는가?”
확실히 오려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예. 증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증인?”
상순의 당돌한 말에 한족소장은 적이 놀라면서 믿기지 않는 눈길로 상순과 송학정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상순은 소장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대답했다.
“이 송학정이 바로 증인이오.”
송학정이 뭐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송씨야!”
“예!”
송학정은 한족소장을 겁기 띤 눈으로 흘끔 쳐다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네 거짓말만 해봐라. 목이 날아 날 줄 알아라. 지학사 어른이 어떤 어른이라고 네가 감히 거짓말을 하려고 드니?”
한족 소장은 분명 겁을 먹이고 있었다.
“난 종래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소장은 사무 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나 꽥꽥 고함쳤다.
“여기 어디라고 네놈이 횡설수설한단 말이냐?”
상순은 괘씸해났다.
“소장, 그게 뭐요? 남이 데려온 증인을 겁을 먹여 말두 못하게 할 예산이오?”
상순은 옆에 선 송학정을 보고 을러멨다.
“겁나 말구 어서 본 대로 말해라.”
송학정은 때를 벗으려고 제대로 말했다.
“확실히 지학사가 괭이로 김진의 아버지를 찍었습니다. 그날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그러오?”
소장은 입을 헤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바투 들이댔다.
“증인이 있는데도 지학사를 처리하지 않겠소?!”
지 소장은 함구무언이었다. 침묵으로 상순의 진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상순은 입술이 말라 터지도록 따지고 들었다.
“그래 괭이로 사람을 찍은 게 죄가 없는가?”
그때 송학정은 소장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런 말을 불쑥 했다.
“소장님, 미안합니다. 전번에 소장하구 지학사 어른이 우리 집에 와서 증인으로 나서지 말라고 했는데 이래서.”
그러자 소장은 더는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너 이놈, 내 언제 너를 찾아간 적이 있느냐? 지학사가 찾아갔으면 갔겠지. 법을 집행하는 내가 어찌 그런 말을 하였겠느냐? 아무래나 주둥이를 놀리다가 네놈의 혀 바닥을 잘라버리지 않는가!”
그때라고 상순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래 만주국 법에는 사람을 찍어놓은 놈을 치죄하지도 않는가? 소장이 치죄하지 않고 어디 견디는가 보기요. 흥!”
상순은 담대하게도 피 터진 가래를 땅바닥에 퉤 뱉었다.
그 소리에 지 소장은 잔등에 식은땀을 쭉 흘리었다.
상순은 연 며칠 입술이 말라터지고 발바닥이 달아 떨어지게 날마다 소장을 찾아가 도리를 딱딱 따져가면서 턱밑에 들이댔다.
“당신 지학사의 검은 돈을 얼마나 얻어먹었는가?”
“당신이 죄인을 놔두면 이제 진수해조일파출소에 찾아가서 상소하겠소. 그래지 않아도 전번에 진수해조일파출소에 찾아갔을 때 통역이나 일본 소장이 해동분주소에서 제때에 처리하지 않으면 찾아오라고 하더구먼. 어디 당신이 질질 끌다가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는가 보기요.”
소장은 더는 지학사의 죄를 비호할 수도 없고 더 질질 끌 수도 없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판결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해동분주소에서 조사한 결과 패용천산촌 지학사는 민국 24 4 25일에 패용천산 앞에서 괭이로 함흥촌의 김경칠을 찍어 륵골 세대나 부러뜨렸다. 사실을 송학정이 증인으로 나서 증명했다. 지학사는 사흘 내에 김경칠에게 치료비로 40원을 줘야 한다.
 
해동분주소
민국 24 5 7.
 
결국 진짜 하루 강아지가 범을 이긴 격이 되고 말았다.
상순은 소장에게 요구를 제기했다.
“소장님, 수고스러운 대로 치료비를 분주소에서 받아서 우릴 주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절로는 총을 든 사병들이 지키는 그 놈의 집으로 가서 돈을 받지 못하오.”
소장은 시끄러워하면서 한마디 툭 내쏘았다.
“그 놈 새끼, 점점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어 한다더니. 흥!”
상순이 “그래 치료비를 받아주지 못하겠단 말이요?” 하고 캐고 들려고 하자 소장은 시끄럽다는 듯이 손을 쳐들어 바깥으로 손사래를 쳐댔다.
“가라, 가! 보기도 싫다. 수하경찰들 보고 치료비를 받아오게 할 테니 며칠 후에 와서 가져가라!”
상순은 분주소를 나오면서 “진작 이렇게 나올 게지. 농번기에 발바닥이 달토록 찾아다니게 할게 뭐요?” 하고 나와 버렸다.
지 소장은 열대여섯살 밖에 안 되는 놈 새끼한테 당한 느낌이 들어 못들은 척 했다.
상순이가 나간 다음 지소장은 왼손으로 머리를 떡 받치고 사무 상에 마주 앉아 있다가 건너 칸에 대고 꽥 소리쳤다.
며칠 후 상순은 분주소에 가서 한족소장에게서 판결서와 함께 치료비로 40원을 받아 천에 꽁꽁 싸서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돌아섰다.
소장은 상순의 세 귀 눈과 딱 벌어진 넓은 가슴을 눈 박아 쏘아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죄꼬만 새끼, 십여 년 소장 질 하면서 처음 본 무서운 놈이야.)
상순은 치료비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40원을 몽땅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식솔들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기준은 놀라워 하면서 “이건 어데서 난 돈이냐?” 하고 물었다.
상우도 숱한 지전을 놀라운 눈길로 내려다보면서 구들에 주저앉았다.
“지학사를 상소해 받은 아버지 치료비입니다.”
“뭐라니? 네가 끝내 상소했단 말이냐?”
“예, 난 지학사를 이기고야 말았습니다.”
상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욕을 먹거나 맞을 까봐 볼을 붙들고 한쪽으로 피해 앉았다.
“이놈 새끼,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이렇게 담대하냐? 그래 정말 상소해 이긴 돈이냐?”
기준은 애숭이 막내가 그 어마어마한 지학사를 상소해 이겼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상우도 미덥지 않은 눈길로 상순을 뚫어지게 보면서 따지고 들었다.
“너 밸 때기 더러운 게 혹시 지학사네 돈을 빼앗아 온 건 아니야?”
그러자 상순은 호주머니에서 판결서를 꺼내 보였다.
“보오. 이게 판결문입니다.”
상우는 글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기준은 한어를 조금 알아보는지라 뻘건 도장이 박힌 해동분주소란 글씨를 매만지면서 보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판결서 옳구나! 아이고.”
그는 아픔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놀란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옆구리가 아파 오만상을 찡그렸다.
상우는 아버지 손에서 판결서를 받아 쥐고 들여다보더니 “40원”이란 글씨를 알아보고 환성을 질렀다.
“아버지, 옳습니다. 여기 40자가 있습니다.”
뒤이어 상우는 상순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그래 이게 모두 40원이냐?” 하고 물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우는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을 바라보면서 “정말 장하구나. 어쩜 내 이런 동생을 두었을까?” 하고 말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뒤이어 그는 상순을 안고 구들에서 삥삥 돌다가 아예 업고 집안을 맴돌았다.
상순이가 송사를 건다고 “시동생 때문에 집안이 망하겠다”던 새금도 조개턱을 쳐들고 혀를 끌끌 찼다.
“시동생은 정말 골기 있는 사내대장부야. 어쩜 악질 지주와 송사에 이겨서 소 반 마리 값을 벌어온단 말이오?”
사련은 막내아들이 송사에서 이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상순은 어머니 손을 잡고 정색해 말했다.
“정말입니다.”
그러자 사련은 상순의 손을 잡고 앉으면서 “얘, 송사하던 과정 이야기를 죽 해라. 어디 들어보자.”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순은 말라터진 입술을 감빨고 나서 송사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얼음 우에 박 밀듯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상순이가 장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기준은 위방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근심에 찬 말을 했다.
“너무 좋아하지 말라. 지학사가 송사에선 졌지만 무슨 보복을 할지 아니?”
상순은 벌떡 일어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랬다간 내 지학사 놈 새끼를 목 주래를 베버리겠습니다. 이번엔 치료비를 받아냈지만 아버지 찍히운 걸 생각하면 속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위방에서 기준이가 혀를 끌끌 차는 목소리가 들리었다.
“에이, 씨는 속이지 못한다고. 이 울뚝 밸에 저 아들놈이구나.”
그 말에 사련과 새금은 손으로 입을 싸쥐고 키득거렸다.
바깥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봄 우뢰가 꽈르릉 무섭게 울리더니 쏴 하고 소낙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상우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봄농사가 잘 되라고 봄비가 내리는구나!”
뒤이어 초가 육간 벼 짚 추녀 끝에서 숱한 실 폭포처럼 비 물이 흘러내렸다.
 
 
 
 
 
 
 
 
 
 
 
 
 
 
 
 
 
 
 
 
 
 
13 장백산기슭의 항일유격대
1. 중국 형제민족들과 단합해야
황야에 일군 밭에서는 허벅지를 치는 시퍼런 옥수수들이 이파리를 나풀거리고들 서있었다. 야들야들하던 옥수수이파리들은 이젠 시퍼런 날을 세우고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늘과 범이 새끼를 칠 야산들에 도전이나 하는 듯이 선들선들 칼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 날, 상순은 천지꽃산 중턱의 상우지에서 상우와 나란히 나가며 기음을 매면서 물었다.
“형님, 난 지금도 이해되지 않소. 인삼 아저씨는 왜 이번 일에 삐치지 않았을까? 고까짓 지학사 사병 일여덟이 무서워서 자라목처럼 움츠린단 말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홰홰 가로 저었다.
상우가 사위를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너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양.”
상순은 천천히 호미질을 하면서 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었다.
“유격대원들한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인삼 삼촌은 조선에서도 한다하는 지주였단다. 우리 들어오기 전에 벌써 중국에 들어와 지주 장학산의 양아들로 들어갔단다. 그 덕에 함흥촌에 저렇게 덩실한 토성 안 팔간 집을 짓고 산단다.”
“글쎄 말이오. 어째 삐치지 않나 했더니 원래 장학산이나 지학사 같은 지주들과 한 통속이었구먼. 그런 줄도 모르고 도와 달라한 게 우둔하지.”
상순은 어느 날 오후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일하지 못하게 되자 벼 짚단을 벌려 거꾸로 쓰고 토성안집으로 찾아갔다.
대문을 다급히 두드려대자 안에서 심부름꾼으로 가장한 유격대원이 나왔다.
“무슨 일이냐?”
상순은 “아저씨를 찾아왔소.” 하고 말하면서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상순이가 마루에 올라가 발을 비 물에 대고 씻을 때 위방에서 너부죽하게 생긴 인삼이가 나왔다.
“어허, 악질지주와 송사를 걸어 이긴 우리 집안 영웅조카가 왔구먼. 어서 위방으로 들어가자.”
“예.”
상순은 바지에다 발을 쓱쓱 문질렀다.
그러자 인삼이가 바삐 “걸레를 가져오라 할게.” 하고 심부름꾼을 불러 걸레를 가져오게 했다.
상순은 걸레에 발을 닦고 위방에 들어가 아래 자리에 앉았다.
“넌 정말 담대한 애야. 어찌 감히 지학사와 송사를 거니?”
상순은 춰주는 인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까짓 지학사가 사병 일여덟을 기른다고 그렇게 무섭습둥? 이번에 아저씨 집안일에 나서지 않은 게 의문스럽습니다.”
인삼은 세 귀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를 쏘아보는 상순의 독기어린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얘야, 넌 아직 어려서 모든 거 너무 단순하게 본다. 지금 우리 조선 유격대에서는 한족들과도 합작해 공동의 원수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한다.”
상순은 더욱 이해되지 않아 외면하기까지 했다.
“쳇, 들을수록 아리숭하구만. 그래 지학사 같은 지주들과도 한편이 돼야 한단 말이오?”
“그렇다. 우리 주적은 일본 놈들이다. 일본 놈들은 우리 조선을 강점하였고 중국 대륙을 한 치 한 치 다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다. 정의적인 중국 사람들은 이미 일본 놈들의 침략야심을 간파하고 무기를 들고 그들과 싸우기 시작한지 오래다. 우린 조선 사람 뿐만 아니라 일체 단합할만한 중국의 한족과 몽골족, 만족, 회족 같은 다른 민족들을 몽땅 단합해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한다.”
상순은 눈이 휘 동그래 물었다.
“그래 지학사는 우리 적이 아니요?”
인삼은 담배를 꺼내 붙여 물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물론 우리 가난한 백성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지주 지학사도 우리 적이다. 그러나 잠시 주적 일본 침략자 놈들을 중국과 조선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선 중국 지주들을 단합해 일본 침략자들과 싸워야 한다. 일본 놈들을 몰아낸 다음에는 지주들을 청산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 줘야지. 그때 지학사 같은 놈들을 처단해도 늦지 않다.”
상순은 그렇게 엄청난 도리를 단번에 터득할 수 없어 그저 도리머리 질만 했다.
“지금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해. 중국 지주들까지 건드려서 원수를 만들어서야 어떻게 일본 놈들을 치겠느냐? 우린 패용천산촌의 지학사를 잠시 놔두고 소서구 장학산이나 조개덕의 조덕림 지주 같은 중국 사람들과도 단합하여 일본 놈들을 쳐야 한다. 그들이 물론 너의 집에서 소작료를 많이 받아가 괘씸하지만 참아야 해. 그들도 일본 놈들이 진수해에 기어든 걸 좋아하지 않고 있어. 이제 일본 놈들이 우리 여기까지 기어들면 우리보다 그들이 자기 땅을 빼앗길까봐 사병을 데리고 싸우지 않는가 봐라. 우린 일본 놈들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과 단합해 먼저 일본 침략자 놈들부터 쳐 부셔야 한다. 알만하니?”
상순은 그래도 들을 뿐 시원히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그는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어째도 아버지가 괭이에 찍혔는데도 나서지 않은 아저씨 좋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어놓은 악질지주 지학사와 어떻게 단합합니까? 쳇.”
상순은 더는 들을 말이 없다고 여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얘야, 내 우리 마을을 둘러보니 넌 나이가 어려도 역빠르고 애들의 왕 노릇을 하더구나. 그래서 구구히 말하지만 꼭 명심해라. 일본 놈을 치기 위해선 개인 원수나 감정을 접어 둘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상순은 도리머리 질 했다.
“난 모르겠소. 자기 아버지를 찍은 원수도 놔두란 말이오? 난 절대 그러지 못하오.”
인삼은 바깥으로 휭 하니 나가는 상순을 뒤에서 따라 나오면서 똑똑히 말했다.
“넌 내 말을 알아들을 날이 꼭 있을 거야.”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씨엉씨엉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상순은 토성안집의 높은 토성을 피뜩 올려다보면서 두덜거렸다.
“장지주 양아들로 들어가면서라도 토성안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쳇, 어째 일본 놈들의 양아들로 들어가서 파출소에서 한자리 하지 못하는가? 참, 세상의 일은 알고도 모를 일이야.”
상순은 비를 맞으면서 할아버지네 집으로 들어갔다.
병완은 상순을 보자 만면에 춘풍이 흘렀다.
“어이구, 우리 막내손자 오는가? 어서 올라오라.”
상순은 비 물을 대충 닦고 위방으로 올라갔다.
창준과 상훈이 온 집식구들은 비가 내려 일하러 가지 못해 모두 집에 있다가 상순을 반겨 맞았다.
병완은 상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봐라, 그래도 손자 넷 가운데서 내 성질을 닮은 건 이 막내손자 밖에 없어.” 하고 치하했다.
상훈은 머리를 떨어뜨렸다. 상길은 입이 뿌루퉁해 못 마땅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곁눈질했다.
눈치 챈 병완은 “상훈과 상우는 마음이 어질고 착하지. 상길은 우리 집안의 하나 밖에 없는 수재야. 우리 막내손자는 기개 있어. 지주와 송사를 해서 이긴 장한 손자야.” 하고 돌아가면서 치하해주었다.
창준은 희죽이 웃으면서 “아버진 훌륭한 손자 넷이나 뒀습니다. 허허허.” 하고 맞장구를 쳤다.
뒤이어 창준은 상순에게 “비 오는 날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여기까지 내려왔니? 아버진 좀 괜찮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머리를 숙이더니 대답했다.
“인삼아저씨네 집에 갔습니다. 아버진 진수해에 가서 약을 져다 대접하고 오줌찜질을 하니 좀 낫습니다. 그런데 조의 말이 뼈가 제대로 잇자면 한해 넘어 고생해야 한답니다.”
병완과 창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상순은 뒷말을 이었다.
“난 인삼아저씨 어떤 줄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병완이 묻자 상순은 금방 있은 일을 죽 이야기고 나서 이렇게 불평을 토로했다.
“내 보고 아버지를 괭이로 찍은 지학사 새끼를 용서하랍구마. 아무리 일본 놈을 치자고 그런 악패지주와 손을 잡으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상훈과 상길이도 이구동성으로 “건 안 될 말이지.” 하고 동을 달았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놓고 부시를 쳐서 불을 붙여 뻑뻑 빨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삼조카의 말이 옳아.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개인 원수는 뒤로 미루고 일본 놈들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 일본 놈들을 대적해야 한다. 우리 조선 사람들의 힘만으로 백만 대군이나 되는 관동군이나 조선에 있는 몇 백만 일본군을 몰아 낼 수 있니?”
병완은 막내손자가 귀담아 듣는 것을 바라보고 뒷말을 이었다.
“인삼 아저씨한테서 항일의 도리나 글도 배우고 주먹치기나 총 쏘는 재간도 배워 둬. 내 언제 인삼 조카에게 부탁할게.”
상순은 다른 형들과는 달리 주먹치기나 총에 대해 각별한 흥취가 있었다.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말씀이 할아버진 젊어서 씨름이나 싸움을 아주 잘했다고 합디다. 고향 명천에서 한다하는 일본 놈들의 개다리 한길수란 놈과 씨름해 이겼다면서요. 그 놈과 싸우다가 왼 눈깔을 빼놓은 적이 있답디다.”
병완은 자손들 앞에서 겸손하게 나왔다.
“그게 다 옛날이로다.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를 하지도 말아라. 이젠 힘도 없고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해. 허허허.”
창준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닙니다. 아버진 아직도 근력이 대단합니다. 애들에게 씨름재간을 물려줍소.”
상순은 할아버지 가래 같은 손을 잡구 졸라댔다.
“할아버지, 유격대에 가자고 해도 싸움재간이 있어야 갈게 아닙니까? 날 씨름재간 배워 줍소.”
병완은 곰방대를 빨면서 상순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다.
“내 부탁 하나 들으면 배워 주마.”
상순은 “예. 내 뭐든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다가앉았다.
병완은 눈을 크게 뜨면서 똑똑히 말해두었다.
“그 울뚝 밸을 고쳐라.”
상순은 입을 딱 벌렸다.
“할아버지!”
“어째 고치지 못하겠니?”
상순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할아버지, 다른 부탁은 다 들을 수 있어도 그건 힘듭니다. 타고 난 성질을 어떻게 고칩니까?”
병완은 고집을 썼다.
“네 애비부터 욱 하면 울뚝 밸을 쓰는데 일을 망칠 때가 많았다. 소 궁둥이를 작두로 찍고 화로 불을 지붕에 던지다니?”
상순은 머리를 숙이며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건 잘못했습니다. 그럼 씨름재간 배워줍지?”
병완은 “그 밸 때기를 고쳐라. 그 밸 때기에 또 누굴 둘러메치라고 씨름을 배워줘?” 하고 뒤로 허리를 쭉 펴고 상순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상순은 “성질을 고쳐 보겠습니다. 그런데 성질이야 몇 십 년 고쳐도 고쳐지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쨌든 고쳐라. 내 앞에서 다신 그런 일을 하지 말라.”
상순은 씨름재간을 배우고 싶어 “예, 꼭 고쳐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병완은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면서 “너 그 울뚝밸만 고치면 재목으로 될 수 있는 애다. 전도가 창창하다.”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상순은 좋아서 할아버지 주글주글한 가래 같은 손을 매만지면서 싱글벙글 했다.
“언제 비 오지 않는 날에 내려오면 배워줍소.”
“그래, 그래.”
상순은 좋아서 상길을 따라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창준은 애들이 내려가자 병완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계시잖는데 얼마나 고독하겠습니까? 옛말에 효자불여악처라 하지 않았습니까? 후 어머니를 모셔 오깁소.”
병완은 움찔 엉덩이를 들며 자리를 움직이기까지 했다.
“거 무슨 소리냐? 늘그막에 후처라니? 너 어미 돌아간 지 언제라고, 되지 않는 말을 다신 꺼내지도 말아라.”
그러나 창준은 계속 권고했다.
“엄마 삼년제도 지났기에 일없습니다. 고독한데 말동무라도 하시요. 저 석은 아저씨 네 집에 와있는 어금이 시형도 재혼했답니다. 말짱 처녀장가를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이 어리냐?”
창준은 말을 꺼낸바 하고는 뒤 말을 이었다.
“저 상우네 처가 집에 가마골에서 홀로 난분이 왔답니다.”
병완은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제 쉰 밖에 안 된답니다.”
창준의 말에 병완은 의연히 함구무언한 채 애꿎은 곰방대만 뻑뻑 빨았다.
며칠 후 기준까지 내려와서 후 어머니를 모시자고 아버지를 권고했다. 그리하여 병완은 마지못해 두 아들을 앞세우고 토성안집 동쪽에 자리 잡은 노친을 가서 만났다. 쉰 살 밖에 안 된 그 노친은 보통 키에 통통하게 생겼는데 아직 젊었다. 정말 맏며느리 하옥이나 둘째며느리 수월과 나이도 비슷했다. 다만 셋째며느리 사련이보다 좀 이상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최금단이라고 부르는 그 노친은 셋째며느리 사련과 같은 개성 최씨란다. 더구나 사련의 맏사위 경인이네와도 십여 촌 되는 노친이었다.
그날로 그 노친을 집에 데려다가 위방에 들었다. 그러다나니 병완은 노친을 잃은 지 세 해 되도록 가셔지지 않던 우울한 기분에서 다소나마 해탈됐다.
본가 집 아버지 기색이 좋아진 것을 보고 곱순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 이젠 새 엄마하구 편안히 삽소. 농사는 오빠하구 조카들이 지으면 됩니다.”
병완은 하얀 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고맙다. 너나 빨리 아들을 낳으렴.” 하고 염려했다.
사실 곱순은 시집간 지 십여 년이 되도록 딸 상금을 하나 낳고는 단산이 돼 적이 근심됐고 사위 김범호가 아들을 보려고 후처를 할까봐 슬그머니 걱정이 끝없이 앞섰다.
(웬 일일까? 이전에 병권형님이 전주 김씨와 우리 영월 김씨는 모두 경주 김씨네 후대라면서 곱순이 정혼을 반대하였다. 그 말을 듣지 않아 그런가? 전주 김씨와 우린 몇십 촌 되겠는데 집안 혼사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 궁합이 맞지 않을까?)
      황야의 곡식들이 따뜻한 여름을 맞아 소리치면서 자라고 있었다. 꽃나비가 한들한들 춤추면서 꽃잎사귀에 날아 내린다. 꿀벌이 꽃 이파리 속을 앵-앵 날아다니면서 꿀을 채집하느라고 분주히 서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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