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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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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회 홍군동정기념관 (하편)
2014년 09월 22일 19시 33분  조회:4247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산서성의 오지에 자리잡은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에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이 전시되여있다. 그리고 현지의 당사 연구일군들이 당시 홍군의 동정과 도강 작전을 지휘한 양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양림의 묘소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일이다.

중국혁명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홍군동정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가 양림, 그는 희생된후 현지인과 홍군전사들에 의해 매장되였지만 지금 그 구체적인 위치를 알고있는 사람은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석루현 당사연구원 리명생과 류원(오른쪽 첫번째와 두번째)

 

홍군동정기념관에서 석루현 당사연구판공실 리명생(李明生)연구원과 류원(劉源)연구원이 우리에게 홍군동정과 양림에 관련해 이야기 해주었다.

(리명생) “당사에서 홍군의 동정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있습니다. 홍군의 동정은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중국혁명사에서 큰 전환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동정을 통해 홍군은 크게 장대되였고 항일통일전선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황하의 하구나루터는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요새입니다. 편벽한 곳이기 때문에 도하작전후 쉽게 발을 붙이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때는 2월이였습니다. 황하에는 크고 작은 얼음이 흘러내렸습니다. 홍군의 도하장비를 본다면 현지인들이 만든 나무배였는데 큰 배에는 80명이 탈수있었고 작은 배는 20여명이 탈수있었습니다. 홍군 주력부대는 세 개 나루터를 리용해 도강했습니다. 양림이 소속된 15군단은 하류의 하구나루터로 도강했는데 전투가 가장 치렬하게 진행되였습니다.”

(류원) “홍군은 2월 20일밤에 도하했습니다. 섭영진의 손목시계를 표준으로 작전을 개시했는데 밤사이에 도강을 끝냈습니다. 75사 223퇀 제1영이 선견대로 확정되였습니다. 양림은 수영을 잘하는 40명 용사들을 뽑아 5개의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필사적(양림)은 당시 사 참모장이였는데 제1영에 와서 40명 용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상급 기관의 지도자가 일선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필사적은 선두부대로 가장 먼저 황하를 도하하고 또 선두부대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필사적은 치렬한 접전에서 희생된 것이 아니라 전투가 끝나 전장을 둘러볼 때 또치까안 숨어있던 적의 총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필사적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함이 유감입니다.”

석루현의 리명생연구원과 류원연구원은 동정 전투경과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가 있었지만 양림의 생애나 기타 투쟁경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다만 양림이 지휘한 도하작전 경과에 대해서 자상히 알고있을뿐이였다. 그들은 양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와 자료가 있으면 기념관에 제공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홍군동정기념관을 참관한후 답사팀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에 모여 답사코스를 검토하였다. 석루현 선전부 일군과 태원의 리세박주임이 함께 현지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석루현에서 우리는 양림이 희생된 곳과 황하 도하작전 전적지를 답사해야 했다. 그곳은 석루현 전산향(前山鄕) 하가와촌(賀家窪村)에 있었다. 계획대로 한다면 하가와촌을 보고나서 곧추 섬북 연안으로 가야했다. 우리가 계획을 설명하자 선전부 일군들이 모두 난색을 표했다.

우선 하가와촌까지 가려면 100여킬로메터의 험한 산길을 가야했고 다음으로는 다리가 없기때문에 황하를 건너기 어렵다는것이다. 그리고 황하를 건넌 다음 나루터로부터 섬서성 청간현(淸澗縣)까지 역시 수백리 험한 산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차만 있으면 어떤 길이라도 다 갈수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가와에는 하구 나루터가 있으니 나룻배로 강을 건널수 있고 거기에서 다시 청간현을 거쳐 연안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단순하였다.

하가와촌까지 산길은 석루현으로 올 때보다 더욱 험하기때문에 승용차로는 도저히 갈수 없다고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전에 차가 망가져 버린다는것이다. 게다가 석루현 선전부 일군들은 하가와까지는 안내할수 있지만 섬서성 경내로 갈수 없기때문에 더 안내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강을 건넌 다음 하구촌(河口村)에서 청간현으로 가는 차를 구할수 있을는지도 문제되였다.

현지 상황을 듣고 나서 이번엔 우리가 입을 딱 벌리고 난색을 표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다고 답사를 그만 둘수도 없는 일이였다.

이때 리세박주임이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하가와촌까지는 석루현에서 차를 내여 안내하도록 하고 다시 석루현에 와서 좋은 길로 연안에 갈 방법을 생각하자는것이다. 선전부에서는 산길을 달릴수 있는 짚차(jeep) 한 대밖에 구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리세박주임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석루현에 다시 와서 연안으로 가는 방도를 찾아보았지만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만한 방법은 없었다. 곤난을 극복하고 원 계획대로 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였다. 다만 년로한 최룡수교수의 건강이 걱정되여 최교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뜻밖에 최교수도 하가와촌에서 연안으로 직접 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홍군은 일찍 적과 싸우면서 두 발로 동정을 했는데 차까지 있는 우리가 무엇때문에 연안까지 못가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찍 홍군이 동으로 황하를 건너 동정했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서정》한다며 호기를 보였다.

년세가 많은 분이 이렇게 나서자 모두가 동감을 표했다. 나는 선전부 일군과 함께 실행 가능성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황하는 나루배로 건너기로 하고 황하대안의 하구촌과 련락을 취해 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에게 청간현으로 가는 차도 미리 준비하도록 부탁해 줄것을 청했다.

우리가 원 계획을 고집하니 선전부 일군들도 들어줄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구촌과 련락을 달아 놓고 차를 준비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위대한 서정”계획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길이였는가는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밤늦게까지 검토를 마치고 자리에 들었다. 산간지대이기때문에 석루현의 가을은 추웠다. 의복을 더 껴입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10월 27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 선전부에서 배치한 찦차 한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우리는 임석평부현장을 찾아가 그의 부친인 임협혜(任俠惠) 로인을 만나보았다. 임협혜로인은 일찍 홍군의 동정에 직접 참가한 경력을 가진 분이였다. 86세 고령인 로인은 풍을 약간 맞아 손을 떨고있었고 청각도 좋지 못했지만 머리는 명석하였다.

우리는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질문을 할수 있었다. 로인은 홍군부대가 황하를 건너 석루현에 오자 홍군부대에 입대하였다 한다. 그는 부대를 따라 진격할 때 부대의 고위 간부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삐스티에 대해 알게 되였다고 한다.

로인은 하가와촌에서 희생된 홍군 장령이 삐스티라고 하면서 그는 조선사람이라고 하였다.

임협혜로인에게서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그는 삐스티가 희생된후 홍군은 황하를 건너 그의 시신을 섬북근거지로 가져다 이장하였다 한다. 우리가 양림의 묘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거듭 물었지만 로인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희생자들은 보다 안전한 섬북근거지로 옮겨가 장례를 치렀다고 할뿐이다.

석루현을 떠나면서 우리는 또 전보왕(田補旺)이라는 로인을 만나보았다. 전보왕로인은 당사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분이였다. 그는 양림의 시신을 멀리 수송하지 못하고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無定河) 기슭에 안장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치렬한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있었기때문에 멀리 수송할수 없어 부근 근거지의 안전한 마을에 안장했다는것이다.

 

 


석루현 로홍군 임협혜로인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오른쪽)와 로홍군 입협혜 로인

 


석루현 당사연구실 원 주임 전보왕(오른쪽 세번째)

 

양림의 시신은 하가와촌에 안장했다가 동정을 마친 홍군이 철수할 때 다시 황하대안의 하구촌에 이장하였다. 양림의 전우였던 주사제상장의 회억록을 많이 연구하였던 전보왕로인은 주사제는 양림을 혼자 적후에 둘수 없다고 하면서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인 하구촌에 이장하였다고 했다. 해방후 주사제상장은 양림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이 고장을 찾아왔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기때문에 그 묘자리를 찾지 못했다 한다. 참 유감스러운 일이였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알길이 없었다. 중국공산당내 조선인으로서는 최고급 간부였고 또 훌륭한 군사 전문가였던 양림, 학계에서는 지금도 그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묘소를 찾아 기념비라도 세워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심정은 마냥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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