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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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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상해 한인지부
2007년 12월 11일 08시 57분  조회:4160  추천:37  작성자: 김성룡

 

20세기 20년대 , 중국은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었다. 공산당을 제치고 중국 정계를 독주하던 국민당은 심각한 파벌투쟁을 겪으면서 중국을 다시 전쟁속으로 이끌어갔다.

장개석은 국민당내의 실력자인 왕정위, 호한민(胡汉民) 치렬한 파쟁을 진행하는 한편 새롭게 나타난 계서, 서북, 섬서 군벌들과의 치렬한 혼전을 치렀다. 장개석이 동북 장학량의 힘을 빌어 당생지(唐生智), 리종인, 풍옥상, 염석산의 공격을 막아낸 전쟁을 중국력사에서는 중원대전(中原大战)이라고 한다. 1930년까지 지속된 중원대전에 쌍방은 백여만 병력을 투입하였고 30만명에 달하는 사상을 빚어냈다. 전투에 능한 풍옥상의 서북군은 전장에서 수차 장개석 부대를 타격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장개석은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강소, 절강 지역의 매판자산계급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막강한 군력과 재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리간, 매수하는 방법으로 적진을 와해시켰고 동북의 장학량을 자기쪽에 끌어들여 혼전의 승권을 잡게 되었다.

국민당 파벌투쟁과 군벌혼전으로 중국 전역의 천백만 인민들이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이때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통하여 전국의 혁명투쟁 정세는 다소 호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피어린 투쟁속에서 탄생한 중국 로농홍군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농촌토지혁명을 전개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은 상악감(湘鄂赢) 근거지, 악예환(鄂豫皖) 근거지, 상악서(湘鄂西) 근거지, 해륙풍(海陆豊) 근거지, 악동(鄂洞) 근거지를 비롯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해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또한 중국의 주요 도시에 공산당 비밀조직을 건립하고 로동자, 학생, 상인들을 발동해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권립 교수) 2 국내혁명전쟁시기는 국민당 반동파의 백섹테로에 무장으로 항쟁할데 관한 우리당의 방침에 따라 많은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남창봉기, 광주봉기, 해륙풍보위전투에 참가하고있을 전국 각지에서 혁명사업에 종사하고있던 많은 우리민족 혁명자들이 상해에로 모였습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은 다시 상해에 모였다. 이들은 계속 민족독립의 방략을 연구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상해에서의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경에 시작 되였다. 혁명 선각자인 신규식이 조선사회당(朝鲜社会党) 조직하고 당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1917 9월에 개최된 세계사회당 대회에 요구하였다. 이듬해 려운형(吕运亨), 조동우(赵东祐) 등이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韩青年党) 조직하였다.

1919년에는 조선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쏘련으로부터 상해에 왔다. 그는 려운형 등과 함께 1920 고려공산당(高丽共产党) 창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도 파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국민당 반동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수차 고려공산당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하였다. 외부적인 탄압과 내부적인 모순이 극대화되여 고려공산당도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감안한 국제공산당에서는 일국일당(一国一党) 원칙을 제기하였다. 이른바 일국일당제란 한나라에는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집단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려운형, 안연흠(安然钦), 김원식(金元植), 현창건(玄昌健), 홍남표(洪南杓) 등이 상해의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다. 이들은 1927 9월에 중국인 3명을 포함해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法南区) 한인지부(韩人支部) 되었다. 한인지부는 상해지부라고도 한다.

 

(권립 교수) 1927 9월에 중국공산당 한인지부가 있었고 특수한 역할을 일으키고있었습니다. 한인지부의 명칭은 상해 법남구 한인지부였습니다. 지부는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중공에 가입하는 시작이였습니다. 이때 여운형, 조봉암, 홍남표, 무정을 핵심으로 건립된 조선단체에는 청년동맹, 반제동맹, 호조회, 녀성구락부 많은 유력한 우리민족 외곽단체들을 갖고있었습니다. 한인지부는 우리민족해방투쟁에 있어서 핵심적역할을 훌륭히 일으킬수있었습니다. 상해의 한인지부는 자체가 상해에 있었기에 중공 특과의 소재지인 상해, 6 3, 4 전원회의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자체가 중국조선족의 중공조직이였기에 특수한 역할을 일으키게 되였던 것입니다.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의 주요 책임자들로는 선후로 려운형, 홍남표, 량명(梁明), 조봉암(曹奉巖), 구연흠(具然钦), 김단야(金丹冶) 등이 있었다.

상해지부는 처음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인 포석루(蒲石楼) 128번지에 위치한 려운형의 집을 활동장소로 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에는 프랑스 조계지 뢰미로(雷米路) 30번지로 옮겼다.

상해지부는 1929 10, 류호 한국독립운동가동맹(留沪韩国独立运动家同盟), 1930 2 상해한인청년동맹(上海韩人青年同盟), 1931 12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韩人反帝同盟), 중국혁명 호제회(互济会) 상해 한인분회(韩人分会) 비롯한 외곽단체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31 12, 강소성 당위원회 법남구(法南区)위원회 한인지부의 홍남표와 조봉암, 장태준(张泰俊) 의해 상해 한인 반제동맹이 설립 되였다. 그들은 조계지의 명원(鸣垣) 소학교에서 설립대회를 가지고 강령, 규칙, 결의를 채택하였다. 조직은 상해 반제련합회에 가담하여 중국인민과 함께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하였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쏘련과 중국 쏘베트 지역을 옹호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살포하였다.

상해 한인 반제동맹은 이듬해 홍남표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세력이 많이 약화 되였다. 그러나 다수 공산주의자들은 계속 혁명을 견지하면서 강습반, 독서회 형식으로 반제사상과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기관지 <반제전선(反帝战线)> 출간하였다.

그후 1933, 중국의 반제대동맹이 해체되면서 한인 반제동맹은 상해 한인 독서회로 개칭하였다. 독서회는 매주 한두번씩 집회를 가지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혁명 호제회 상해 한인분회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조봉암이 1931 2월에 설립하였다. 호제회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혁명자들의 단합을 추진하고 혁명대중들을 직접 도우면서 기관지 <혁명지우(革命之友)>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상해지부와 외곽단체들은 당시 상해에 있던 중국공산당 림시 중앙정치국(临时中央政治局) 정신과 요구, 포치를 조선혁명가와 조선주민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조직하고 홍군을 지원하는 각종 의연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권립 교수) 상해지부에서는 중공의 지시에 따라 1930 전후로 동북의 혁명을 돕기 위해 홍남표 동지, 김시명 동지를 동북에 파견하였습니다. 홍남표는 아성에 가서 중공 아성현 위원회를 세우고 적지 않은 우리민족 혁명자들을 당에 받아들였습니다. 례하면 1931 9.18사변 전후로 상해지부에서는 동북조선족의 반일무장투쟁을 지휘하기 위해 많은 우리민족 군사인재들을 동북에 파견하였습니다. 화룡현 군사부장으로 있던 방상범 동지, 화룡현 약수동 쏘베트의 창시자인 신춘 동지, 동북항일련군 3련의 전신인 주하유격대의 창시자의 한분인 리계동 동지, 녕안현위와 5군의 창시자의 한분인 번경유 동지, 많은 혁명가들을 동북에 파견하여 동북의 우리민족 반일무장투쟁을 도왔습니다.

 

상해지부는 조선이주민들이 비교적 많이 집중된 동북의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선후로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동북에 파견하였다. 광주봉기를 겪은 상해에 모였던 박근만, 박근수 형제도 동북으로 파견되였고 오성륜도 동북에 가서 동북항일련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이때 공산주의자였던 김규광은 상해에 남아 예리한 필봉으로 공산주의 리론을 선전하였으며 공산주의리론 연구를 깊이 하였다. 행동을 중시하는 다른 공산주의자 김산은 북평의 지하당 조직을 일떠 세우기 위해 단연 북평으로 떠났다.

한편 상해지부는 우수한 조선혁명가들을 홍군에 파견하였다. 중국혁명에 열망하는 조선청년들은 상해지부의 파견을 받거나 자원적으로 홍군 중앙쏘베트 지역으로 들어갔다.

 

(권립 교수) 20세기 30년대 초에 상해지부에서는 중앙쏘베트를 지원하기 위해 무정, 최정무, 장운선, 한용을 비롯한 조선족혁명가들을 모택동이나 주덕이 령도하는 중앙근거지에 파견하였습니다.

 

상해지부를 거쳐 홍군의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조선혁명가들은 무려 30여명이나 되는데 가운데서 무정(武亭), 최정무(崔政武), 장운선, 한용(韩容-‘金) 등이 비교적 유명하였다.

상해지부는 1933 , 중국공산당 림시중앙정치국이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옮겨 때까지 우리민족의 해방과 중국공산당의 발전에 특수한 기여를 하였다. 상해지부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였고 당의 로선을 조선민족에게 선전하였다. 그리고 중국 동북에서의 조직 발전에 기여를 하였고 쏘베트지역 홍군의 발전, 장대에 적극 동조하였다.

외부적인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에 상해지부는 1934년부터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치렬한 혼전을 거듭하고 중국혁명이 저조기로부터 다시 활기를 보이기 시작하던 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까지 존속된 상해지부는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상해지부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혁명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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