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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족 이야기1
일본에서의 조선족 단체의 활동
김광림
나는 1988년에 일본에 유학왔다. 25살 나이에 일본에 와서 이제 사십대 마감에 들어섰으니 20여년 넘어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일본생활중에서 나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 것이 90년에 여러 조선족단체의 설립에 참가하여 많은 우리민족의 훌륭한 분들과 만나고 의미있는 일들을 같이 한 것이다.
아마 일본에서 거의 처음으로 조선족의 규모가 큰 단체활동이 시작된 것은 동방학우회 모임부터 일 것이다. 1990년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과 북경에서 온 조선족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학자모임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이 생기면서 도쿄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자주 모여 친목회를 했다. 이 모임이 생길 때 지금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에서 활약하시는 김 호웅선생이 통지가 가능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그 편지글에 ‘자! 백의동포들이여! 우리 손잡고 뭉칩시다!!’ 하는 글귀가 참으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때는 유학생, 학자들마다 전화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편지로 통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메일로 손쉽게 모든 통지를 할 수 있는 지금이 신선같은 시대이다.
이 모임의 보람찬 활동가운데의 하나가 1990년 여름에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고려학회에 참가한 것이고, 또 하나 같은 해 여름에30여명의 유학생,학자와 가족들이 같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모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그 때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아침녁에 부산항에 도착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했는데 그 때 같이 한모임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들중에서 중국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조선족에 인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자꾸 하게 됐다.
그런데 이 동방학우회는 성립되어서 1년 정도 활동이 많았지만 초기의 골간들이 일본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면서 활동이 차츰 뜸해졌다. 이 모임이 1년만에 활동이 뜸해진 또 하나의 이유가 일본에서 활동하시던 한국의 유력한 인사가 연변대학교에 일본유학장학금을 후원해주면서 동방학우회를 부추겨 세운 면이 있어 꼭 조선족의 자체의 힘으로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 때 이분이 모임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식사를 대접하면서 결국엔 경제적으로 장기적인 후원을 하기 여려워졌다. 그러다니 자연히 모임이 오래가지 못했다. 순수하게 자신들의 실력으로 만든 단체가 아니고 보면 결국 이런 결과가 도래하게 된다.
동방학우회 모임이 뜸해지면서 1992년 여름경에 일본에 유학, 또는 연구하던 연변대학교 교수들이《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기적으로 공부모임, 친목모임, 여행을 조직했는데《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는 그 때부터 오늘 이때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연변대학교라는 틀속에서 활동하기에 일본에 있는 조선족전체의 모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일본에 연변대학교 출신자들이 많기에 이 모임이 끈끈하게 이어져오고 있고, 참가자가 꽤 많은 셈이며, 봄이면 야유회, 연말이면 망년회를 하고, 연변대학교에서 관계자들이 찾아올 때 같이 잘 모이고 있다.
1995년경부터 도쿄의 고락쿠료라는 중국유학생, 학자전용회관에 들어있던 조선족 여러명이 같이 모이면서 《천지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차츰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중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98년 봄부터 《천지클럽》과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멤버들이 손잡고《천지클럽》을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때《천지클럽》이 내건 슬로건이 <교류, 협력, 공동발전> 이었는데 30대 초반에서 중반되는 조선족들이 이 모임의 골간이 되어 일본속에서 명실상부한 조선족 단체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 때도 초기에는 온라인 시대가 아니어서 많은 통지를 편지나 엽서로 했는데 그 때의 통지문들이나 회의기록문들을 지금 다시 읽어봐도 다들 얼마나 진지하게 《천지클럽》을 키우려 했느지 생생한 감동이 아직도 전해진다.
나는 초창기의《동방학우회》와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모임에 참가하다가 1998년에《천지클럽》의 확대, 발전기에 같이 참가하면서 이 모임이 조선족 사회에서 아주 신선하고 희망적이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사회에서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조선족단체를 키우려는 의지가 명확했고 조선족들이 모이면 술이나 마시는 기풍을 없애려고 술모임을 거의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모일때마다 참가비 500엔을 거두어 일부수익금을 중국의 조선족 청소년들의 장학금에 쓰기로 했다. 《천지클럽》은 1998년경부터 수년사이 좋은 활동들을 진짜로 많이 조직했다.
정기적인 교류회, 취직,성공경험교류회, 무도회, 야유회, 망년회 등 모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부터 꽤 오랜 기간 도쿄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서의 역할을《천지클럽》(이후《천지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이 톡톡히 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나로서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천지인문이》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모두들 무보수로 밤늦께까지 잡지를 같이 만들고 때로는 자기들 돈을 들여가면서 잡지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의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욕이 다들 대단했고, 순수하고 좋은 내용의 잡지를 2년정도 유지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중국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는데 이 모임은 주로 학자, 대학원생들이 모이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규모가 큰 학술모임도 자주 하고 있다.
나는 2000년 봄부터 니가타의 대학교에 조교수로 취직을 하면서 도쿄지역의 조선족 모임에 자주 참가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부터 조선족단체가 다양하게 생겨나고,《쉼터》같은 온라인중심의 활동이 많아졌다. 이제는 조선족 모임들이 진짜 많아졌고 다양해지고 있으며 저마다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최근에 조선족 페이스북 사용자들로 만들어져가고 있는《3NEW》네트워크에 주목하고 싶다. 아직 어떤 모임으로 발전할지 더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내가 1998년경에 체험해 본 확장, 발전기의《천지클럽》같은 그런 신선한 느낌을 이 네트워크에서 받고 있다. 그리고 온라인시대의 총아답게 그때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선족의 글로벌네트워크가 형성하여 가고 있어, 일본, 한국, 미국등의 조선족을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3NEW》의 첫페이지에 백두산천지 사진이 붙어있다. 우연한 일치인지, 《천지클럽》과《3NEW》는 모두 백두산천지를 자신들의 싱징으로 하고 있었거나 있는 것 같다. 1998년부터 나는《천지인문》잡지를 편집하면서《천지클럽》이 백두산천지처럼 ‘높고, 맑고, 깊기’를 바라는 엣세이를 쓴 적이 있다.
《3NEW》에도 같은 소망을 보내보고 싶다. 즉 천지처럼 높은 기개와 자존, 젊은 사람들의 모임답게 천지처럼 맑고 깨끗함, 천지처럼 깊은 사고력과 지혜를 지닌 모임으로 거듭나기를《3NEW》바라면서 자그마하지만 나도 이 모임에 도움이 되고 싶다. (2011년12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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