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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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일본의 대지진을 안타깝게 바로보는 심정 댓글:  조회:5524  추천:30  2011-04-16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광림의보스턴통신(16)                                                                                                              일본의 대지진을 안타깝게 바로보는 심정   남의 일이 아닌 일본의 대지진 지난 3월11일에 일본 동북지역의 태평양 앞바다에서 매그니튜드9의 거대 지진이 발생한지 한달이 넘어섰다. 이미 사망자가 13,000여명을 넘었고 실종자까지 하면 28,000여명이 이번 지진에 희생을 당한 셈이다. 사람의 피해만이 아니라 가축, 건물, 산업활동의 피해까지 계산하면 일본 동부지역 전체가 피해지역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도 엄청난 재난이 일본에 닥친 것이다. 처음에 지진이 발생하여서부터 지금까지 일본 동부지역에 강진이라고 볼 수 있는 진도 5급이상의 지진만 410여차 발생했다고 한다. 거기다 쓰나미,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가 겹치면서 트리플악재가 일본을 괴롭히고 있다.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는 아직 도 그 끊이 어디가 될지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오래 지속될 것 같고, 눈에 보이지 않은 방사능에 대처해야 하기에 사회를 공황에 몰아넣고 사람들의 신경을 극도로 지치게 만든다. 나는 일본에서 지진을 여러번 경험한 적이 있고, 가족과 친척들이 일본에 남아있기에 이번 지진이 결코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아 매일 지진에 관한 뉴스를 체크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번 지진을 관찰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번 지진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신속하지 못한 대응방식을 비판하거나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한 도쿄전력의 무능력함을 비꼬는 기사도 보이는데 실지 이처럼 거대한 지진앞에서 어 느 나라인들 완벽한 대응을 하기 어렵고, 방사능사고에 대해서는 어느나라의 기술을 가지고도 단기간에 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진도 5급이상의 지진이면 땅이 크게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당황해지고 피해도 많이 생긴다. 이런 지진이 한달 사이에 410여차 발생하였다고 하니 그 누군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고 신속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장담 못한다. 실지 이번 지진의 피해지역인 이바라키현에 살고 있는 지인과 통화를 해보니 지진이 발생하여 한달사이 수시로 여진이 일어나는데 마치도 배안에서 살면서 수시로 파도가 밀려오는 느낌이고 어지럼증이 자주 생긴다고 한다.   고베지역 지진의 체험    나는 일본에서 21년을 살면서 너무나도 많은 지진을 경험했다. 인간의 감각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지진은 3급이상인데 이런 규모의 지진이 일본 각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3급에서 4급정도의 지진은 땅이 흔들리고 무섭기는 하나 큰 피해없이 지나는 겨우가 대다수이다. 5급부터는 땅이 상당히 흔들리고 집안의 가구가 넘어지거나 집밖의 당장이 무너지고 사람이 상하는 피해가 생긴다. 6급부터는 땅이 세차게 흔들리고 튼튼하지 못한 건물이 붕괴되면서 인명피해가 잘생긴다. 내가 일본에서 체험한 비교적 큰 지진은 1995년의 한신아와지대지진이다. 1995년1월에 오사카남부지역에서 생긴 이 지진은 매그니튜드 7.3이었는데 사망자수가 6,400여명이 이르러 제2차세계대전후의 일본에서의 최악의 자연재해라고 불리웠고,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수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지진이 발생한 당시 나는 도쿄에서 살고 있었기에 집적적인 피해는 없었는데 지진의 피해란 처음판단보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늘어난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도쿄에서 아침에 학교로 강의를 나갔는데 TV에서 고베지역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속보가 나오고 건물들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큰 피해가 생긴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진의 피해가 엄청나다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다쳤다는 보다가 연이어 나왔다. 그 때 일본에서 지진으로 처음 고속도로가 통채로 무너져내려 기술대국의 자존심이 구겨졌다는 보도가 많았다. 그 지진으로 일본에 유학하던 중국 유학생들이 일부 사망해서 중국에서 크게 뉴스가 되고, 지진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원이 일본에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내가 직접 피해가가 되고보니 그리고 일본에서 나는 두차례 지진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다.   2004년10월23일 초저녁에 내가 살고 있던 니가타현의 중부지역에서 매그니튜드6.8의 지진이 일어났다. 나의 집이 마침 나가오카(長岡)라는 중부지역의 중심도시에 있었기에 그 지진의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 지진이 일어난 후 한달사이에 6급정도의 여진이 4차례, 5급정도의 여진이 10여차례 발생하면서 사망자수가 68명이 이르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난하고 16,000 여채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손상을 입었다. 사망자수는 처음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16명이었는데  그 후 빈번히 여진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여 고령자를 중심으로 54명이 지진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지진이 발생한 날, 나는 니가타를 떠나 도쿄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강의가 거의 끊날 무렵에 불시에 교실이 크게 흔들렸다. 아, 또 어디서 지진이 났겠구나 했는데 생각밖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큰 지진이 생겼던 것이다. 서둘러 강의를 마치고 도쿄역에 도착하여 니가타로 돌아가는 신칸센(고속철도)을 타려고 했는데 이미 니가타행 신칸센은 운행이 중지되고 많은 사람들이 니가타로 돌아가지 못하여 도쿄역에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가족이 지진의 중심지에 있었기에 마음이 대단히 다급해졌다. 급히 공중전화를 찾아서 아들애 핸드폰에 전화를 하니 겨우 전화가 통했는데 처음 지진이 일어난 후 밖으로 피해나와 집 근처의 도서관주차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었느냐 하고 물으니 이런 와중에 어떻게 저녁을 챙길수 있는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번 통화를 마치고 나서 다시 통화를 하려하니 지진 후에 전화통화 건수가 급증하면서 패닉이 생겨서 전화회사에서 통화를 제한하였기에 가족과의 통화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그러다니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진지역에 남겨두고 도쿄에서 그대로 머무를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칸센을 타고 니가타의 도중까지 갔다가 종착역에서 기차를 타고 갈 방법이 없는가 물었더니 기차도 운행이 중지되었고, 버스와 택시를 물었더니 모두 다 운행이 중지됐다는 것이다. 즉 지진같은 대재난이 생기면 수선 거의 모든 교통이 파괴되어 외부에서 그 피난지역에 구조를 가려고 하여도, 피난지역에서 빠져나오려 하여도 생각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 헬리꼽터를 이용하여 가는 것인데 보통사람들이 아무리 급하다고 하여도 이런 교통수단을 이용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 때 니가타에 가려고 기차역에, 버스회사,택시회사에 다 전화를 걸어봤는데 자기들 회사의 운행상황은 알려주어도 기차가 안 되면 버스가 통하는지, 버스가 안되면 택시라도 통하는지 이런 교통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즉 교통기관 사이에서 횡적인 정보공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후에 안일이지만 이런 종합적인 교통정보는 일본정부의 도로교통정보센터에 문의하여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외에서는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지 일본에서 재난을 겪어보면 일본에서도 시스템의 허점이 많고 실수를 많이 하고 있었다. 특히 횡적으로 잘 연계하고 상황에 따라서 응급적으로 대처하는데는 일본사회의 대응방식에 문제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니가타에서 지진이 발생한 날 니가타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쿄에서 하루밤을 새우면서 속을 많이 태웠다. 전화통화가 제한되면서 가족과 통화가 거의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다시 도쿄역에 갔더니 니가타행 신칸센은 여전히 운행이 중지되었지만 니가타현의 이웃현인 나가노행 신칸센은 운행이 재개되였기에 나가노현에 가서 다시 기차를 바꾸어타면 지진지역 가까이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가노행 신칸센을 급히 탔다. 그날 오후에 나가노에 도착하여 거기서 다시 니가타행 기차를 바꾸어타고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가 있는 가시와자키(柏崎)에  도착했다. 가시와자키부터 지진의 중심지인 나가오카까지는 교통이 다 차단되어 있었는데 외조카한테 부탁하여 여러 루트를 탐색하다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산길을 발견하여 밤중에 외조카가 차를 운전하여 가족이 있는 나가오카에 들어갔다. 그 때도 나가오카시의 외곽은 전기가 끊어져 캄캄했고 마치도 유령도시와 같았다. 도로에도 경찰차외에는 나다니는 차량이 아주 적었다. 도시 중심부에 도착하니 전기가 통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가보니 가재도구가 마구 뒤엉켜져 엉망이었다. 집에 가족이 보이지 않기에 피난소로 정해진 인근의 학교체육관에 찾아가보니 거기에 수백명의 동네주민들이 피난해 있었다. 가족이 무사하게 있는 것을 확인하고나니 그 보다 더 기쁜 것이 없었다. 그러부터 약 1주일간은 정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전기와 물은 통하고 있었으나 가스가 정지되여 식사를 제대로 해먹을 수 없고 피난소에 가면 주먹밥과 생수외에는 더 제공되는 것이 없었다. 나가오카시의 도심에서는 그래도 전기와 수도가 지진후에 재빨리 복구되었지만 도시 주변과 외곽에서는 전기와 수도가 복구되기까지 며칠정도 걸리고 가스가 완전히 복구되기까지는 10여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가스관은 새거나 폭팔할 위험성이 있기에 전기와 수도보다 복구에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재난구조의 노하우가 축적된 일본이라 하지만 지상교통이 다 파괴된 상황에서 외부의 구조물자는 헬리꼽터에만 의존하게 되고 헬리꼽터로는 대량의 물자를 나를수 없었다. 1주일간 집에서 식사를 제대로 해먹지 못하고 끊인 물로 목욕도 할 수 없었다. 가스곤로가 있어서 가끔 요리를 끓여 먹을 수 있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여진은 수시로 발생하여 마음의 안정도 이룰수 없었다. 정말 지진은 겪어보지 못하면 그 어려움을 다 알 수 없다. 여진이 너무 자주 생기니 심리적인 안정이 동요되여 언제든지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지진신드롬을 겪게 된다. 그 때 외부에서 본격적인 지원이 가능해진것이 차단된 도로가 급히 복구되면서부터인데 그것은 지진이 발생하여 며칠간 지난뒤였다. 그러니 지진이 발생하여 처음 며칠간은 피해지역 주민들이 거의 고립되고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 지진 후에 나는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많은가 관찰해봤는데, 수선 집안에서는 유리제품이 제일 쉽게 깨지면서 사람들이 다치기 쉽다. 6급정도의 큰지진에서는 집안의 옷장같은 가구, TV가 대체 넘어지는데 이것을 방지하려면 벽에다 튼튼하게 고정시켜놓아야 한다. 집밖에서는 콩크리트블록으로 쌓아올린 벽들이 무너져 내리기 쉽고, 묘지, 사찰, 신사같은 곳의 비석이나 돌기둥이 대체 깨져버린다. 그러니 지진이 발생하는 경우, 담벽이나 돌기둥 가까이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건물들의 방진(防震)대책이 잘  되어있기에 웬간한 건물들은 잘 무너지지 않는데 오래된 건물,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 외관미를 너무 추구하면서 창문을 많이 내고 기둥과 벽면이 적은 건물들이 무너지기 쉬었다. 그 때 지진에는 달리던 신칸센이 탈선을 하면서 자칫 대규모 인명피해가 생길 번 했다. 일본에서 지진으로 하여 신칸센이 탈선하기는 그 때가 처음이다. 그 후 신칸센 선 로를 복구하고 신칸센이 정상적으로 운행하기까지 한달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니가타에서 두번째 겪은 지진  2004년에 니가타에서 큰 지진으로 고생했는데 3년 후인 2007년에 니가타의 중부지방에 또 한번 큰 지진이 발생했다. 2007년 7월16일 오전에 내가 살고 있던 니가타현의 나가오카(長岡)에서 집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데 불시에 땅이 세차게 흔들리면서 전선대가 기울어졌다. 가까운 곳의 유리병공장에 쌓아놓은 유리병들이 와르르하면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 처음에는 그 공장에서 사고가 생겼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계속 흔들리기에 아, 지진이구나하고 판단됐다. 생각밖으로 이번에는 내가 거주하는 나가오카가 지진의 중심지가 아니고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가 있는 기사와자키(柏崎)가 진원지가 됐다. 그날은 공휴일이어서 대학교가 휴식을 했는데 이튿날에 대학교에 나가려는데 나가오카에서 가시와자키에 이르는 철로, 고속도로가 다 파괴되어 통과할 수가 없었다.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대학동료의 자가용차로 평소 차들이 잘 안다니는 산길을 통하여 겨우 대학교에 나갔다. 그러나 그런 산길을 통하기도 위험했다. 지진때문에 산도 뒤흔들렸기에 산사태가 발생하기 쉬웠다.  대학교는 정전이 되어 건물마다 컴컴해지고 수도도 끊기여 물을 쓸 수가 없었다. 7월중순 한 여름철에 대학교 직원들이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건물안에서 줄땀을 흘리면서 대학교내 안전체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지진이 발생한 날이 일본의 공휴일이었기에 대학교내의 인명피해는 없었고 건물이 여러 곳이 파괴되었다. 대학교의 나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책장과 문서궤가 여지없이 무너져내려 책과 자료들이 연구실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지진이 발생한 당시 내가 연구실에 있었더라면 아마 크게 상했을 것이다. 그 지진으로하여 니가타현의 중부지역에서 15명이 사망하고 건물 수천채가 붕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지진의 중심지에서는 전기, 수도, 가스가 일주일 넘게 끊겨버려 무더운 날에 대단히 불편한 생활을 했다. 내가 있는 대학교 가까이에 도쿄전력회사의 원자력발전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화재가 발생하고 소량의 방사능이 유출되어 일부 원자로가 지금도 정지된 상태이다. 고속도로, 철도가 한번 크게 파괴를 당하니 그것이 제대로 복구되기까지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니가타현 중부지역에서 2007년의 지진피해를 복구하는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2004년 지진, 2007년 지진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은 공원이나 주차장에 설치한 임시주택에서 몇년씩 힘든 생활을 해 왔다.    두차려 니가타에서 지진피해를 직접겪어보니 이런 긴급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비교적 차분하게 행동하고 물건사재기 같은 소동이 쉽게 안 일어나는 사실도 확인했다. 일본에서는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기에 집집마다 비상식품이나 도구들을 준비해두고 있어 제일 어려운 초기대응을 하기 쉬운 편이다. 2007년 지진때는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 교수들의 연구실의 책장이나 문서궤가 많이 무너져내렸는데 누가 하나 원성이 없이, 또 누구의 도움도 청하기 않고 다 자기 책과 문서들을  재정리했다. 그 때 나의 동료의 오래된 집이 크게 파괴되었기에 내가 가서 가장집물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니 제집의 어지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완곡하게 사양하는 것이었다. 이번과 같은 대규모 자연재해에도 일본에서 외국구조대를 대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런 국민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일본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의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모습을 외부에 잘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또 2007년의 니가타중부지역의 지진 후 일본정부에서 건물의 파괴정도에 따라 보상금을 지불하였는데 떠돈 소문에 의하면 보상금을 타려고 건물피해를 과장하여 신고하는 경우도 쾌 있다는 것이었다. 즉 겉모습은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것 같아도 일본에서도 이런 사회의 뒤모습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지진 때에 가시와자키에 있는 도쿄전력회사의 원자력발전소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방사능이 다소 새나오는 피해가 발생했는데 그 때문에 도쿄전력회사와 지역주민들 사이의 알륵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시와자키의 원자력발전소가 지진이 잘 발생할 수 있는 활성층 지반위에 세워져 지진이 생기면 언제든지 위험하다는 문제이다.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는 대체 지진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번이나 겪어본 나의 지진피해를 돌이켜봐도 이번에 일본동북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은 그 때의 두번 지진보다고 피해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범위도 광범위하다. 규모가 큰 여진이 수시로 발생하는데다 인류사상 아마 제일 어려운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가 겹치게 되었다. 지금 일본은 수십년래의 제일 어려운 자연재해와 악투를 하고 있고, 모두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단기간에 수만명의 생명을 잃고 천문학적인 경제손실을 입었고 이제도 그 끊이 어딜지 모르는 방사능의 공포와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이런 와중에 일본사회에서 큰 사회적 소동이 발생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사상초유의 자연재해와 싸우는 모습이 외국에서도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대규모의 자연재해이고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는 지구전체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일본이 국제사회에 손을 내밀어 같이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가 약해보이고, 방사능사고에 대해서는 아직도 국제사회의 원자력기술자들이 총동원되어 해결책을 찾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이웃나라인 한국과는 공연하게 독도문제를 불거지게 하여 일본을 도우려던 한국의 성의에 찬물을 부어놓은 결과를 만들고 있다. 이런 문제점은 있다하여도 이번만큰은 국제사회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와나서고, 일본도 마음을 열고 국제사회의 물심양면의 원조를 받아들이고 특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사고문제는 국제사회가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2011년4월15일)        
20    일본에서 관찰해 본 중국의 변화 댓글:  조회:5815  추천:45  2011-01-21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4)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4) 일본에서 관찰해 본 중국의 변화최근 중국의 호금도(후진타오)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을 미국과 더불어 초대강국으로 지칭하는G2(Group of Two)라는 신조어가 서방세계에서 회자되다싶이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존재감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30년간 지속돼온 중국경제의 고도성장, 2010년에는 GDP가 일본을 앞질러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됐고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앞질러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 될 거라는 예측도 많이 나오고 있다. 세계최대의 외환보유액, 미국국채의 최대구입자 등 수치도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부상(浮上)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이 글에서는 이런 거대한 수치상의 중국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의 모습과 변화를 20여년간 외국에서 거주하며서 관찰해본대로 적어보겠다. 1976년에 중국에서 모택동의 부인 강청을 비롯한 소위  ‘‘4인방’이 제거되고 문화대혁명이 정식으로 종결됐을 때 중국의 국고가  완전히 바닥이 낮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경제나 사회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던 것이다. 1970년대 말기부터 등소평이 주창한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우선 사회주의 집단농장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개인영농을 허락하면서 농민들의 노동의욕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농촌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다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개인장사가 허락되고, 해외화교나 외국인을 상대로 한 외자유치정책이 실시되어 중국에서 개인장사붐, 외자유치붐이 일어났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한 1988년이 바로 이런 시점이었다.  내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했을 그 당시, 중국사회가 개혁개방정책으로 많이 봐뀌어간다는 인식은 일본에서도 했지만 가까운 장래에 일본을 초과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때는 일본경제가 한창 버불의 절정기에 있었고, 국제사회가 일본을 보는 눈도 대단히 좋았다. 그러다가 1989년에 중국에서 천안문사건이 터졌는데 일본의 대다수 중국전문가들이 이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실패하고 다시 농업국으로 회귀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 무렵 일본의 슈퍼나 옷가게에 가면 되면 중국제복장이 눈에 많이 뛰어 중국의 성장이 결코 멈춰서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슈퍼에 가봤더니 중국제 청바지가 있어 중국도 청바지를 만드는 나라냐고 깜짝 놀랐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그 때이다.   그러다가 1992년에 일본유학 4년만에 중국을 방문했는데 중국출신인 나로서도 중국인들의 마인드가 너무나도 바뀐 점에 놀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돈 얘기를 하고, 사람들 사이의 인사가 돈 잘 버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중국조선족사회에서는 한국으로 돈벌이 나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1989년의 천안문사건이 중국인들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이 사건 이전에는 사회주의적 의식이 아직 깊이 남아있었고 정치에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천안문사건이후 중국인들 의식속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꺼져가고 경제일변도로 바뀐 것 같아 보였다.  그 다음에도 90년대에 중국을 몇차려 방문했는데 가 볼 때마다 많이 바뀌고 있었고, 사회전체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 때부터 농민들이 농촌을 많이 떠나고 농촌에 폐가가 생기고 자식들이 떠난 마을에서 노인들이 고독하게 집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값싼 중국제품이 넘쳐날 정도로 많아서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불렀다.  2001년에는 기회가 있어 할빈, 장춘, 연변, 내몽골, 북경을 방문했는데 중국의 도로사정이 획기적으로 좋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중국의 주요도시 구간에는 도속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일본못지 않게 보급돼간 것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북경에서 놀라웠던 것은 가는데마다 주택융자를 해준다는 광고판이 나붙어있어 중국의 도시에서 마이홈시대의 열기를 실감했다. 일본과 한국의 고도성장기가 바로 이런 식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북경에서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나갔는데 호텔보이가 잡아준 택시가 알고보니 정부기관의  공용차였다. 정부기관의 공용차 기사가 새벽에 일어나서 공용차로 택시운전을 하고 그리고나서 아침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는 중국의 공무원들도 부업을 많이 하는 시기여서 합법이던 아니던간에 그런 식으로 수입을 늘려가고 있었다. 2003년에 상해를 방문하니 소문그대로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듯이 상해시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황포강(黃浦江)변의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보면 상해시의 신개발구가 마치 미래도시처럼 보이고 국제대기업의 광고가 황포강변에 많이 나붙었다. 신기하기도 하구나, 도대체 중국에 무슨 매력이 있길래 국제대기업들이 이렇게 많이 진출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나 서울에 가봐도 상해처럼 국제기업들의 광고가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 이미 상해의 번화거리는 도쿄나 서울보다 더 활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 갈 때마다 상대적으로 좋은 모습을 많이 봤지만, 동시에 국영기업의 직원들이 대량으로 해고되여 살길이 막막하다든가, 가난한 사람들은 설이 다가와도 고기도 구경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들렸다. 농촌에서는 자녀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도 보게 되었다. 미국에서 발견하는 중국의 존재감재작년에 미국에 와서 일본보다 다른 시각으로 중국의 존재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1년가 체류했던 UC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의 동아시아연구소에는 중국, 한국, 일본연구센터 등이 있는데 수적으로도 중국연구자가 많고 연구활동도 중국에 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번에 하버드대학교에 와보니 여기도 역시 동아시아연구하면 중국연구가 중심이 되고, 연구활동에 있어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버드대 케네디행정스쿨에는 중국의 관료들이 연수차 많이 다녀가는데 중국인 스스로 케네디행정스쿨을 중국의 제2중앙공산당학교라고 농담조로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 전략적으로 중국의 행정관료들을 미국의 명문대학교에 불러서 연수시키면서 지미파(知美派)를 키우고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하는것으로 보인다. 단지 미국의 대학교에서의 연구나 연수에서 중국이 두드러지는 것만이 아니고 미국의 미디어에서는 중국에 관한 화제가 거의 끊기지 않고 있다. 미국정부에서도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부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중국과의 관계설정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중국인들이 미국에 와서 투자한다거나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은 이제는 신선한 화제거리도 아니다. 미국의 관광지들을 다녀보아도 가는데마다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다닌다. 중국인들이 미국에서도 활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내부의 눈으로 보는 중국의 실상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날로 커져가는데 비하면 실지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두가지 실례를 들고 싶다. 하나는 해외에 나와있는 중국인들이 중국에 귀환하기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일본에 유학한 중국인들이 공부를 마치고 가능하면 일본에 남으려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미국에 와보니 여기서도 중국인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나서 될수록 미국에 남으려고 한다. 왜서 일까 생각하는데 단지 경제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전체의 환경과 관계된다. 사회의 공평성과 투명도, 안전한 식품, 자녀들의 교육환경, 의료문제 등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이나 미국같은 나라들과 비하여 너무나 차이를 많이 느끼기에 귀국하기를 주저한다. 서방의 민주주의를 체험했던 유학생들이 아직도 통제사회인 중국에 가서 새초롱에 들어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또 하나는 중국에서 관료들이나 부유층가운데 자녀들을 해외에 거주시키거나 변상적인 방법으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하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신분보장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니 안전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그만큼 중국의 엘리트들이 중국의 장래에 확신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중국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모순도 너무 많다. 가까운 문제로는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농촌에서의 토지강제징수문제가 농민들의 불만을 크게 사고 있고, 때로는 농민들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물가와 주택가격의 급등에대한 도시주민들의 불만도 크다. 빈부격차의 확대, 관료들의 부패, 심각한 환경오염, 식품안전에 대한 불안감, 민족관계 등 오늘의 중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도 다 해결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GDP가 세계2위로 됐다고 하지만 국민 1인당의 GNP는 4천불미만으로 아직도 세계하위권에 속한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위상이 제고되고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과 국민의 행복지수는 꼭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사회라고 말했듯이 중국같이 과도한 인구를 가진 나라는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참으로 힘든 과업이다. 그러기에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올리거나 영향력을 늘이는 일보다 국민들이 보다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 순위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2010년1월19일)
19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 댓글:  조회:5386  추천:41  2011-01-1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3)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3)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2009년 8월4일 나는 북경을 떠나 연변으로 갔다. 24일에 연변을 떠나기까지 20여일간 체류하면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고 연변각지를 여행했다.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한 후 연변으로 가끔 돌아갔어도 번마다 체류기간이 짧았기에 고향에 가서도 가고싶은 곳을 다 가지못하고 총총히 떠났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연변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연변의 변화도 컸다. 외국에 오래간 있다가 연변으로 가보면  몇가지 큰 변화가 눈에 띄운다.수선 어느 도시에나 아파트가 많이 늘어났다. 이제는 어지간하면 아파트에서 사는 시대를 연변사람들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연변에서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아파트를 많이 산다고 들었다. 그 다음 도로가 좋아진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연변의 주요도로가 거의 다 아스팔트나 콩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우고 고속도로가 통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내가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면 언제나 제일 큰 변화를 느끼는것이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 고속도로망이 전국에 널리고 고속철도도 보급돼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차로 연변각지를 달리면서 느낀것이 국도에 콩크리트도로가 쾌 많은데 이런 길에서는 차가 상하로 털렁거리기에 승객들에게는 편하게 승차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콩크리트도로가 보수비용이 적게 들어 도로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경제적이겠지만 승객을 생각하면 아스팔트가 낫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연변의 큰 변화가 자가용차가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연변의 도시에서는 마이카시대가 급속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을 보니 아마 거의 절반은 마이카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의 산업화국가들에서는 마이카가 오래전에 보급되었기에 신선한 얘기가 아니지만 마이카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큰 변화가운데의 하나이다. 연변각지를 다녀보면 산림이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어 민둥산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들이 울창한 수림으로 덮어있어 좋았다. 듣자니 이제는 산림보호를 위하여 벽돌공장도 운영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연변지역만큼 전지역에 수림이 울창한 곳도 중국에서는 적기에 자신의 고향이 자랑스러웠다. 친척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에 들어있기에 찾아가봤는데 자녀가 없어 의지할 수 없는 노인들을 정부가 무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각지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이 설치되어 있다한다. 이런면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정책이 돋보였다. 그러나 연변도 잘 살펴보면 어두운 그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농촌마다 폐가가 눈에 띄고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줄어드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떠나면서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부재했다. 일본이나 한국을 봐도 산업화과정에서 이농(離農)현상은 다들 생기는 것이지만  문제는 소수민족지역에서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 민족의 공동체기반이 무너져내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연변내의 도시에서도 조선족이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조선족식당에 가봐도 젊은 조선족종업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체 젊은 사람들은 연변에 남아있지 않고 직장을 외지에 나가서 찾는 것이 이제는 사회의 추세처럼 되었다. 그러다나니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노인이나 어린이들만이라는 말이 너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백두산관광을 가면서 연길시 주변의 농촌을 통과했는데 한족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여기의 마을들에는 원래 조선족들이 살았는데 한국에 돈벌러 나가면서 이제는 별로 남아있지도 않다고 했는데 이것이 다른 민족의 눈으로 본 연변의 현실이었다. 원래는 외지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고향을 잘 발전시키고 고향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안착하여 사는 것이 이상적인데 오늘날의 조선족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유골마저 날려보내는 세태에 연변조선족의 애향심이 장구하게 남아있을련지. 부모의 산소라도 남아있어야 고향도 찾아가고 싶고 애착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의 형님집에 거주하면서 아침마다 연변텔레비의 조선말채널을 시청했는데 7시가 되면 아리랑곡이 흘러나와 그런때만큼 반가운 것이 없었다. 또 아침이면 형님네 아파트 밖에서 ‘두비(두부) 삽소’하는 고향 아줌마의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적인 것을 누리면서 사는 삶, 이것인즉 연변에 사는 조선족의 특권이고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연변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연변을 떠나기 직전 모아산(帽兒山)정상에 올라 고향땅을 바라봤다. 급속하게 현대도시로 탈바꿈해가는 연길, 백사장을 적시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 사과배 향기 풍기는 용정의 만무(萬畝)과원, 산마다 일직자로 늘어선 낙엽송과 솔나무, 다시 보니 고향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가 너무 제 고향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연변을 떠나는 날 연길공항은 몹씨 붐볐다. 나이든 조선족 분들이 짐을 가득 챙겨가지고 한국으로 돈벌이 떠나고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배웅을 하고 있었다. 한번 나가면 몇년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걸음이어서 가족 사이의 작별이 애틋했다. 한세기 이전에 찢어지듯한 가난과 망국의 설음을 안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오늘도 또 무거운 짐을 끌고 살길을 찾아 고국으로 향한다. 조선족에게 아리랑고개는 길고도 또 길다.               두만강과 백두산 그리고 용정의 유적연변에서 두만강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용정시 삼합(三合)에서 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인적이 드문 구간을 통과하여 개산툰(開山屯)까지 달려봤다. 두만강폭이 너르지 않아 맞은편의 조선의 마을이 훤히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고 미역감는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두만강변에 가끔 나타나는 중국측의 마을도 대체 조선족마을이기에 서로 너무 비슷하여 국경이라는 의식이 없이 양측을 바라보면 똑같은 민족이 하나의 강을 사이두고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 개산툰에서 도문(圖們) 사이를 차로 달렸는데 이 구간은 두만강 양안의 산들이 험준하고 그 때문에 경작지가 많지 않았다. 조선의 산에는 최고지도자를 칭송하는 문구가 가끔 보이고 역전마다 김일성주석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이 강건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중국에서 60,70년대에 있던 지도자에 대한 극단적인 개인숭배가 아직도 조선에 남아있는 것이 서글펐다. 중국측의 국경도시인 도문에서는 두만강변에 관광객이 많이 모이고 두만강에 들어가 배놀이도 많이 하는데 조선쪽은 조용하고 나다니는 사람도 그리 보이지 않았다. 도문에서 다시 차로 두만강을 따라 두만강의 최하류인 방천(防川)까지 갔다. 훈춘(琿春)시가지를 지나면서 보니 소문대로 훈춘시 개발이 많이 진척되어 연변의 도시중에서는 연길이외에 제일 번화한 모습이었다. 훈춘시의 권하(圈河)세관을 통하여 조선쪽으로 화물트럭이 건너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길이 600킬로에 이르는 두만강의 많은 구간을 답사하면서 연변의 조선족이 제 모국과 진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중국측도 대체 조선족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어 양측의 차이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이민한지 100여년이 지나도 언어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이 변화가 생기지 않은 근본원인이 바로 모국과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두만강 대안의 조선쪽이 너무 조용하고 활기가 보이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 쪽도 이제는 천지개벽이 일어나 두만강지역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떠오르는 날도 멀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연변에 체류하는 사이 백두산에도 두번 다녀왔다. 운 좋게 처음 갔을 때는 천지가 똑똑히 보였는데 두번째 가니 백두산 정상에 안개가 진하게 끼어 천지가 전혀 보일질 않았다. 날 개인 날 백두산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시야가 확 트이는 가운데 검푸른 수해(樹海)가 아득하게 펼쳐지고 연변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바로 이런 기상을 보면서 키워가는 것이겠다 생각됐다. 백두산을  관광하면서 보니 한글간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7년에 처음 백두산에 갔을 때는 한글간판이 꽤 보이던 생각이 났다. 들으라니 2005년에 백두산(장백산)관할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移管)되면서 한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관이 연변의 관광산업에 불리했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백두산관광을 활성화시켰는지 상세한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런나 중국의 조선족들이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경내에 있던 백두산에서 행정관리권의 이관에 따라 한글이 사라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용정에 새로 복원된 대성(大成)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도 방문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복원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자기의 고향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가슴뿌듯했다. 실지 연변지역은 오래동안 동북아시아의 변방이면서도 잘 알고 보면 유서가 깊은 곳이다. 발해왕국이 여기서 건국됐고, 조선왕조, 청나라의 시조(始祖)들이 여기서 일어섰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의민족의 투혼과 자존이 마지막까지 지켜진 곳도 여기이다.   남북의 만남의 장소연길에서 체류하면서 연변대학교 근처에 있는 호텔앞을 지나는데 한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길시의 어느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줄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조선(북조선)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종업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조선식당으로 여러번 찾아갔다. 손님은 한국사람이 많은 편이고 그리 붐비는 식당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반식당에 비하면 종업원들의 태도가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했다. 의아스러운 것은 그 식당 입구에 일본식 등롱(燈籠)이 한줄로 쭉 걸려있었는데 이런 인터리어는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궁금했다. 혹시 일본식 등롱인 걸 모르고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에는 조선에서 경영하는 식당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어디나 한국손님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연길의 서점에 가보면 한국과 조선의 서적, 영상물, 음반들을 한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사실 해외에서 남북의 출판물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런면에서 연변에는 남북의 정보가 다 모이고 여러형태로 남북의 교류가 여기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10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학술희의에 참가했는데 이 회의는 연변대학교와 한국과 조선의 학술기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고 남북양측에서 학자들이 많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역시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남북을 이어놓는 가교적 역할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1월17일)
18    김문학 그는 누구인가? (김광림) 댓글:  조회:5520  추천:42  2010-10-03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6)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2)                       4. 김 문학 그는 누구인가?   김 문학이를 제대로 평가하자면, 김 문학이가 어떤 작가이고 또는 어떤 학자이고 그의 저서들은 어떤 성질의 작품이며 가령 학술저서라고 한다면 어떤 유형의 학문분야의 저서들인가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먼저 해명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김  문학이가 쓴 저서들을 중심으로 이런 분석이 진행되어야 하며 그의 이력서 등 자료도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활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먼저 김 문학의 저술활동의 경과를 간단히 추적해보겠다.     필자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김 문학이 제일 먼저 저서로 사회에 내놓은것이《仮面世界与白色世界-日本文化与朝鲜文化的比较》(金良基원저, 遼寧教育出版社, 1989)인데 이 책은 본인의 창작이 아니고 재일교포학자인 金良基선생의《김치와 오신코-일한비교문화고》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다. 김 문학은 1985년에 동북사범대학 일본어전공을 졸업하고 요녕사범대학에서 6년간 강사로 있다가 1991년에 일본에 유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이에 사회에 내놓은 책은 거의 한권의 번역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족 문예지나 또  한어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했을 수 있으나 책의형식으로 나온 것 같지않다. 그 다음 김 문학이 책으로 내놓은 것이 한어로 쓴 《裸戀》(1993)이라는 산문집이라고 김 문학이 조글로에 공개한 저서리스트에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중국의 어느 출판사에서 나오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정보가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다.    김 문학이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책을 많이 내 놓기 시작한 것이 1997년에 한국에서《벌거숭이3국지》(창공사)《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 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를 내면서부터이다. 그 후부터는 이 책들을 일본에서 번역하고 새로운 책들을 다수 출간하였다. 그러고 보면 1997년이 김 문학이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한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김 문학이 출판한 책의 수량인데 김 문학 본인은 조글로에서 58종의 책을 냈다하고 일본에서 출판한 책들에서는 저자소개에서 수년전까지는 30여종이다가 2,3년사이에 50여종을 냈다고 나오는데 필자가 대체적인 통계를 해본데 의하면 약 40종에 가까운 것 같다. 필자가 아직 존재를 잘 모르는 저서들도 있을 수 있다.이 가운데는 같은 내용의 책을 한국에서 그리고 중국조선족출판사에서 낸 것이 있고, 같은 내용의 책을 한국, 일본, 중국에서 서로 번역하여 낸 것이 많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원저들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히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더라도 현재의 중국조선족출신치고는 이처럼 많은 저서를, 그 것도 중국, 한국, 일본에서 두루 출판했다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평가해주는 사실이고 재능도 상당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저서를 많이 낸 김 문학을 우리는 어떤 작가 또는 학자로 평가해야 하는가? 이 점은 김 문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해답하기 전에 김 문학의 저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보고 싶다. 여기서 특히 설명을 달지 않은 책들은 일본어로 된 저서들이다.  (1)동아시아비교문화론-《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 《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 책은《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을 재판한 것으로 보인다) (2) 중국문화론-《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이 책은《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의 서로 다른 출판사의 재판인 것 같다)  (3) 중국,일본소개서-《칼을 품은 중국인》(한국에서 《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을 일본어로 번역 한 책 같다), 《일본문화의  수수께끼》(한국에서 낸 책),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한국에서 낸 책) (4) 한국비판서-《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 《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 만닥치라》(이상의 책들을 다시 정리하여 중국에서《丑陋的韓國人》이라는  제목으로 2005년에 山东人民出版社, 大地出版社에서 출판하고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출판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1999)가 이 책들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일본에서 낸것과 중국에서 낸 것과는 완전히 같은 내용같지 않다.)《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공저)  (5)중국비판서-《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 책은 한국에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  책의 한국어판인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책을 중국에서 출판했다는   정보는 없다) , 《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 《역검정 중국력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超克」하는 방법》(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국비판서이면서 한국비판도 했고 또 도처에 일본예찬을 한 성격이 복잡한 책이다),《조선족대개조론》(중국에서  조선어로 낸 책) (6) 일본비판서-《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 》(이 책이 일본에서 나온 것이 2007년이고  2008년에 중국에서《新丑陋的日本人》(金城)으로 번역되었다.   (7) 명언집, 소설,산문-《현명한 인생술-보통인의 명언이 가르친다》, 《천마의 이야기》(소설), 《裸戀》(한어로 냈다고 하는 산문집)   (8)번역-《仮面世界与白色世界-日本文化与朝鲜文化的比较》(金良基원저,遼寧教育出版社, 1989), 《日本人的缩小意识》(李御寧원저,張乃麗譯,金文學審稿,山東人民出版社, 2003),《韩国人的心,这就是韩国人》(李御寧원저,張乃麗譯,  金文學審稿, 山東人民出版社, 2007),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번역, 조선 총독부지음,북타임,2010)    이상 김 문학의 저서를 약간 빠뜨린 것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조선어 저서들을 종합하여 분류해본 결과이다. 이런 종합한 결과에 의하여 분석해보면, 김 문학은 문화평론가, 사회비평가, 번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한편, 산문집 한편도 있다. 그러나 번역이 실지 그리 많은 것은 아니고, 아직까지 소설이나 산문에서 사회에서 확실하게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결국 문화평론가, 사회비평가가 현재까지의 김 문학의 저서에 대한 제일 합리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문화평론가, 사회비평가로서의 김 문학의 진가는 어떤 것이고 동아시아 사회에서 어떤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김 문학의 몇권 정도의 동아시아문화론은 김 문학의 문화평론가로서의 지위를 확립시켜주는 것이고 독특한 점이 보인다고 판단한다. 그 독특함이란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을 다 아우르는 비교문화론적 저서들이 그리 많지 않기에 내용의 심도를 둘째치고더라도 일단 이런 저서들을 여러권 쓰고 그 것들을 동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출판했기에 김 문학하면 사람들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또는 중국문화,한국문화,일본문화 어쩌고 하는 소위 비교문화적인 책들을 냈다고 기억하게 된다. 필자는 일본의 어느 큰 서점에서 김 문학의 어느 동아시아문화론 저서가 '아시아를 이해'라는 좋은 책 시리지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이런 책들이 동아시아의 문화계 또는 학술계에서 어떤 정도의 평가가 나오는가 알아볼 필요도 있는데 그 객관적 기준이 이런 책들이 어떤 문화상, 또는 학술상들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김문학이 동아시아문화론 저서로 아직 어느나라에서 어떤 확실한 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했다는 정보는 없다. 본인이 조글로에 올린 저서리스트에 보면 일본과 중국에서 “일본국제기금교류상”, “연변일보문학상” “요녕신문문학상” “장백산모아모드 문학상”등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일본국제기금교류상”이란 일본에 오래 있는 나도 구체적으로 무슨 상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 “일본국제교류기금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 상은 상당한 성과나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고 그 상의 수상자리스트에서 김문학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나머지 중국에서 받은 상들은《조선족대개조론》,《한국인이여 상놈이돼라》등 저서에 의하여 조선족문학상을 3개 받은 것이 아닌가 추축된다.       김 문학의 동아시아비교문화론 그리고 중국문화론도 학술적인 견지에서 보면 국민성비교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필자는 솔직히 김 문학이 아주 정력을 넣어서 쓰고 있는 국민성비교가 학문적 방법론이나 과학적 정신이 결여된 것이 많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취미성, 화제성은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학술저서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도 좋고 어느 정도의 성향을 보여주는 국민성이 있기는 하나 그 것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대와 사회의 발전단계에 따라 바뀌기 쉽고 어떤 법칙처럼 나타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특히 현대사회는 국경을 넘은 민족간의 교류가 아주 많아 정지된 시각으로 국민성을 판단하기 점점 더 어렵다. 예를 들면 김 문학은 중국은 대륙근성, 한국은 반도근성, 일본은 섬나라근성으로 국민성 분석을 하기 좋아하는데 현대의 많은 한국인, 일본인들의 활동공간이 이미 그런 반도, 섬나라는 지리적 환경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런 정지된 시각으로는 한국의 삼성이나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의 국제적인 활동을 전혀 분석해낼 수 없다. 또 상대적으로 국토가 그리 크지 않고 단일민족인 한국과 일본을 다민족국가이고 국토가 거대하고 풍토가 서로 많이 다른 중국과 단순하게 국민성비교를 하는 자체가 학문적결과를 도출해내기 어렵다. 김 문학은 조글로에 올린 글에서도 일본총독부가 조선인들의 성격을 분석한 자료를 보고서 놀랐다고 하지 않았는가. 김 문학은 조선인들의 성격이란 성급한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료에서는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의 성격이 悠長하다고 나와서 본인의 생각과 다르더라고 쓴 것 같다. 결국 조선인도 시대에 따라서 국민성이 다르게 나오는 것이 자명하다. 국민성 연구는 학문분야에서 심리인류학이라 불리우는데 그 대표적인 연구가 미국의 인류학자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1948)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2차세계대전중에 집필한 것이어서 저자가 일본을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그대신 미국내의 일본인이거나 전쟁포로들을 상대로 대량의 설문조사, 면접등을 하면서 과학적인 방법에 근거하여 일본론을 쓴 것이다. 그러더라도 필자의 이해로는 국민성연구가 현재의 문화인류학에서는 그리 주목받는 분야가 아닌 것 같다.  김 문학의 중일한 삼국의 국민성에 관한 언급들을 보면 일부 문화인들의 글에서 착상을 빌려오는 경우는 많으나 자신이 동아시아 삼국에서 사회조사를 진행하고 대량의 사람들을 면접하면서 그런 실증적인 연구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리얼리하게 다가오는 결론을 보여주는 경우는 겨우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내용이 취미성, 화제성은 있으나 그런 내용에서 진실로 도움이 되는 지식을 습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비교문화론이라 학문에 대하여서도 언급해보자. 한마디로 비교문화론이란 너무 막연한 분야이다. 인간의 문명한 삶을 다 문화라 지칭한다면 무릇 인간과 관계되면 문화란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정신문화, 생활문화, 거주문화 등 문화란 이름을 단 개념을 거의 무수하게 사용한다. 이럴진대 이런 방대한 문화를 비교한다는 것은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 명확해야 하고 초점이 잘 맞추어져야 설득력 있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또는 중일한비교문화론이라는 것도 막연한 비교이면 취미성, 화제성이나 추구하다가 말장난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협소한 풍문으로도 비교문화론으로 학위논문을 탔다는 소문을 아직 못 들었고, 미국에 와보니 비교문학, 대조언어학 등 학문분야는 있어도 비교문화라는 구체적인 학문분야는 없다고 들었다. 내가 일본의 동경대학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에서 공부했는데 거기서 공부하면서도 비교문학은 구체적인 학문분야로 인정되고 그런 내용에 대하여 학술논문을 많이 쓰고 있었으나 비교문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학술논문을 보지 못했다. 이 정도로 학계에서도 비교문화론이란 정체성이 애매한 분야이고 오히려 문화평론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김 문학이 동아시아비교문화론을 지향하면서 잘 거론하는 두 인물이 있는데 한명은 중국의 林 語黨선생이고, 한명은 한국의 李 御寧선생이다. 두분 다 중국, 한국의 언어, 문학, 문화연구의 대가들이고 중국론, 한국론에서 잘 알려져 있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너무 가벼운 비교문화론을 마구 써냈다고는 보기 어렵다. 林 語黨선생은 필자가 그분의 글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李 御寧선생의 한국론이나 문화론은 수선 사용하는 한국어가 화려하고 현란하여 대뜸 언어의 대가라는 점을 느낀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아주 풍부하다. 그런데도 이분의 한국론이나 비교문화론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적지 않은 관점들이 오랜 시간의 考驗에 견디기 어렵고 그 때 그 때의 읽는 재미로 끝날 때가 많다.  한가지 사례를 들면 1965년에 한국에서 낸 《흙속에 저바람속에》가 이 분의 한국론의 대표작인데 한국이 아주 가난하고 산업화에 막 들어서기 직전에 쓴 글이어서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보는 눈이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많이 보이고 그리 낙관적이 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이책이《恨의 문화론-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 으로 번역되었는데 번역서의 이름대로 한국인의「恨」의 정서가 이 책의 한국인론의 키워드였던 것이다. 그러나 李 御寧선생도 현재의 한국인론에서는 이런 개념을 거의 쓰지 않고 있고, 한국의 젊은 세대들한테 「恨」의 정서가 그렇게 어필되는 개념이 아니다. 한류붐을 이루는 문화콘텐츠에도 밝고 명랑한 것이 주축이지 결코 어둡고, 슬픈 이미지의 「恨」의 정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恨」의 정서란  어디까지나 일제식민지의 억압, 조선전쟁의 비극을 거치면서 두드러진 정서이지 한국인의 역사속의 영원한 정서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낙관적이고 華奢함을 즐기는 풍류의식도 한국인의 역사속에서「恨」의 정서 이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또 하나 사례를 들어보면 일본에서 문화인들 사이에 일본은「나무의 문화」, 「서양은 돌의 문화」라는 개념을 쓰는 분들이 많은데 내가 미국에 와보니 이런 개념이 아주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주택을 나무로 많이 짓고 있어서「나무의 문화」라는 개념이 설득력이 있는데 미국에서도 단독주택은 대부분 목조건물이다. 「서양은 돌의 문화」라는 개념은 서양의 궁전식 건물이나 성곽을 이미지한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옛날 성곽은 거의다 돌로 지은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주택과 미국의 주택, 일본의 성곽과 서양의 성곽을 비교해보면 너무 쉽게 일본은「나무의 문화」, 「서양은 돌의 문화」라는 단정하는 것은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김 문학이 이런 개념을 인용하여 동아시아비교문화론에서 일본은「나무의 문화」,「중국은 돌의 문화」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중국에서는 돌로 지은 건물보다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북경의 자금성, 만리장성까지도 돌보다 거의다 벽돌로 지었다 볼 수 있다. 이러고 보면 한두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어느 특정민족의 문화를 재단한다는 것은 항상 편향성을 면치 못하고 이런 분야는 실사구시적이고 과학성이 요구되는 학문활동보다 비평론적인 성격이 강하다.   김 문학의 중국문화론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사랑과 욕망의  중국4000년사》(이 책은《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의 서로 다른 출판사의 재판인 것같다)를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데 하나는 「混」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중국인의 행동원리를 분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성문화를 해설한 책이다. 중국인의 행동원리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混」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 개념이 의미하는 중국인의 행동심리는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책을 아직 내가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이 책에 대한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混」이란…적당하게 속이면서 재주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바보, 가짜천국, 계약불이행, 인명경시 등은  당연한 것, 그러한 교활하고 강한 중국인과 잘 거래하는 방법이란」소개가 나오고, 이 책의 목록도  1장 일본인이 중국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   2장 유아기부터 성장할 수 없는 중국인   3장 신체편중으로 정신을 잊어버린 나라   4장「混」이라는 행동원리   5장 한자가 결정지은 중국인의 사유방법   6장 비적이라는 폭력원리     종장 중국 및 중국인의 숙명 (대체 이상의 뜻임)   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중국인의 행동심리를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부각시키고, 「유아기부터 성장할 수 없는 중국인」「비적이라는 폭력원리」이라는 소제목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과연 학문적인 정신으로 쓴 중국문화론일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김 문학의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중국소개서, 일본소개서를 보면 거의 어느 책마다 들어있는 것이 에로스, 즉 성적담론에 관한 얘기이다. 이런 내용들이 책의 취미성, 화제성을 보태주는 요소는 되지만 반면으로 김 문학의 문화론의 격을 떨어뜨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한번 동경의 서점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라는 책의 제2장 「일중한삼국의 뒤면 (불륜삼국지 얼굴, 가슴, 그리고 발 등)에 나와있은 내용같은데 일중한삼국 여성들의 제일 느끼는 성감대가 얼굴, 가슴, 발의 어느 쪽인가 하는 비교가 들어있었던 같고, 일중한 남녀가 이불안에서 하는 서로 다른 행위의 특징을 저자는 다 파악해낼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서 출판한 《일본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도 일본여성들의 은밀한 곳의 사이즈가 10대,20대, 30대가 서로 어떠하다는 내용들이 들어있어, 이 책을 돌려본 어느 조선족 여자유학생이 아주 불쾌하더라는 감상을 나한테 들려준 적이 있다. 이런 나의 기억이 혹시 틀렸다면 나는 김 문학에게 대단히 미안하다. 그러나 틀린 기억같지는 않고 이런 내용들이 결과적으로 김 문학의 학자로서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중국소개서, 일본소개서를 제외하면 김 문학에게는 적지않은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 지금까지는 1책으로 확인됨)가 아주 눈에 띄우고 있고, 수량적으로도 이상의 책들과 비슷하다.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를 김 문학은 비교론적인 한국문화론, 중국문화론, 일본문화론이라 부르고 싶겠지만 필자는 핵심내용은 어디까지나 사회비판,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에 있기에 사회비판서라고 분류하고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을 사회비평가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하다고 본다. 그외에 알려진 책들가운데는 소설 한편이 있고, 산문집 한책,번역서가 약간이 있어 문학자, 번역자로서의 얼굴도 김 문학이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들 가운데서 김 문학이 학술저서 58종을 낸 국제적인 대학자로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기에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고 객관적인 자료로서 김 문학의 학계, 또는 문화계에서의 평가를 짚어보고 싶다. 김 문학이 일본에서 시간강사로 소속해 있는 후쿠야마대학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한데 의하면, 문예평론지나 학술잡지에 게재한 논문이 4개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이 중국조선족문화, 문학비평, 중국조선족문학과 재일조선인문학의 비교연구, 동아시아의 天女전설에 대한 비교문학적연구 등 이다. 저술활동이 화려하게 전개되는데 비하면 실지 문예비평지나 학술잡지에 게재된 논문수가 적고 저서들에서 전개한 동아시아국민성비교, 비교문화론같은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김 문학의 현재 일본대학에서의 지위인데 일본에서 출판된 저서들에서는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 후쿠야마대학의 시간강사, 또는 강사로 나오는데 아마 정확하게는 시간강사가 아닐가 생각한다. 전임강사이면 소속된 대학교의 홈페이지에 꼭 나오는데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의 홈페이지에서는 확인이 안되고 후쿠야마대학의 홈페이지에서는 시간강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동경의 방송대학의 객원교수라고도 후쿠야마대학의 홈페이지에 나오는데 그 대학의 객원교수일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이러고 보면 김 문학은 아직 일본의 대학에서 아주 안정된 교수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그 것은 수많은 저서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의 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방증이 된다. 물론 운수가 좋아서 실력이 없어도 빨리 좋은 대학의 교수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운이 트지 못하여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 대학교의 자리가 학계의 유일한 평가기준은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인터넷 백과사전 Wikipedia의 김 문학평가도 참고자료가 된다.   일본어판 Wikipedia의 김문학소개   김 문학 (남성,1962년-)은 중국조선족3세의 작가,비교문학자. 중화인민공화국 심양 출신. 1985년 동북사범대학 일본문학학과 졸업, 1994년 同志社대학 석사과정 수료, 2001년 히로시마대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吳大學 사회정보학부 강사.저서에《벌거숭이3국지》, 《한국국민에 고한다!》,《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 등이 있다.   조선민족인데 한국인과 중국조선족의 민족성의 차이에 대하여 쓰고 있다.    한국어판 Wikipedia의 김문학소개   김문학(金文學, 1962년~ )은 재중 조선족 3세인 작가로 비교문학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선양 출신이다. 1985년 둥베이 사범 대학(东北师范大学) 일본문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도시샤 대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1년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구레 대학사회정보학부 강사이다. 형제인 김명학과 함께 일본에서 동아시아문화를 비교하는 글을 펴냈고, 일부는 한국에서도 출판되기도 했다. 이상의 인터넷 백과사전 Wikipedia의 일본어판, 한국어판은 어디까지는 담담하게 김 문학소개를 하고 있다. 김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는 불만도 나올 수 있는 소개이지만 현재로서는 일본과 한국의 인터넷백과사전의 상대적인 객관적인 평가가 이런 내용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소속대학의 이름이 원래는 구레대학이나 현재는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이라는 것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이상 분석한 내용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김 문학은 문화평론, 사회비평에서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고, 조선족출신으로는 거의 전후전무할 정도로 다산작가이며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활동하는 문필가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런 활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동아시아의 문화계나 학계의 평가는 확실히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의 대부분 저서들은 엄밀함 의미로서는 학술서라고 보기 힘들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김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점이 글쓰기를 굉장히 좋아하고 문인을 천직으로 여길 정도로 문화활동에 관심이 크고, 고서수집이나 유묵수집 등 문화적 취미가 강하며 문필활동에서 장인정신이 아주 강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솔직히 많은 조선족 문인들이 따라배울 점이라고 판단한다.                                         설명: 필자가 쓰고 있는 이 연재는 문필가로서의 김 문학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그 실상을 알리자는 데 주요목적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 과대포장된 이미지가 일부 실추될수도 있고, 인간적인 면, 사상적인 면에서 가감없는 비판이 가해질 수 있으나 그런 비판에 대하여 혹시 김 문학씨나 주변의 분들이 김 문학죽이기, 헐뜯기라고 너무 일찍히 단정하기 말고 인내성있게 연재가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기 바란다. 혹시 있을 저서의 제목이나 출판년대 등에 틀린 내용이 있어 수정이 필요하면 그런 수정에는 흔쾌히 동의하겠다.  참으로 이 연재는 필자로서도 쓰기 힘든 글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그 것도 얼굴을 아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쓰고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하기란 필자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갈등을 겪어야 한다. 누구에게 덕담을 건네주거나 칭찬을 하기는 쉽지만 조금이라도 비판을 하기에는 비판하는 측도 너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김 문학이 분명 조선족 지식인 사회의 찬반양론의 와중에 있는 인물이고 많은 사람들이 김 문학을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심정인 점을 고려하면 서로 마음이 아프고 뼈를 깍아내는 것 같은 고통이 있더라도  한번은 꼭 지나야 할 통과절차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것을 통하여 김 문학이가 한단계 더 발전이 있고, 조선족지식인 사회도 소모적인 논쟁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필자에게는 그 이상의 바램이 없다. 분석대상의 객관화를 위하여 글에서 김 문학선생, 김 문학씨 등 경칭을 생략하고 김 문학이라 호칭한다.  이 점도 부디 양해를 바란다.                                                  2010년10월2일  
17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해체신서 댓글:  조회:6052  추천:42  2010-09-30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5)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1)                                     1.   머리 말   김 문학은 조선족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특이한 존재이고, 찬반양론을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후 조선족 사회는 급속한 개방화, 국제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김 문학은 일본을 주요활동거점으로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일본, 한국, 중국에서 적지 않은 책들을 출판했고 그 때문에 조선족의 국제화의 제일 상징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족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중국어, 조선어 (또는 한국어), 일본어 능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많은 책들을 출판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일부 조선족들에게는 경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같은 조선족들 사이에서도 김 문학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적인 경향으로 하여 친일파, 또는 매국매족적인 인물로 매도를 당하기도 한다.   김 문학의 저서가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를 많이 일으킨 것은 1999년에 한국에서 출판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 2001년에 중국에서 발표한《조선족대개조론》등 인 것 같다. 그러다가 금년 봄부터 김 문학이 조글로에 나타나 글을 발표하면서 조선족 사회에서는 김 문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다시 쟁점화되고 있다.   금년 8월에 조글로사이트에는 김 문학을 공개적으로 변호하는 글을 여러차려 발표한 사람도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운영하는 조선족사이트에서 김문학옹호론을 열렬히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년 8월부터 연변대학 김 관웅교수가 김문학의 2004년에 일본에서 출판한 저서《친일파 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을 비판하는 일련의 글을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 올리면서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 대한 비판에 나서고 있다. 조글로에서 보면 김 문학의 글이 올라오거나 김 문학을 변호하는 글이 올라오면 반대론을 펼치는 댓글이 꽤 많이 올라오고 있는데 이 것은 그만큼 김 문학의 어떤 점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런 가운데서 필자가 느낀 점은 조선족 지식인 가운데서 아직 김 문학의 저술활동의 전체적인 상황, 특히는 일본에서의 저술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찬반양론이 서로 초점이 잘 맞지 않으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에 오래 체류하면서 김 문학의 일본에서의 저술활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입장이기에 8월20일 경에 조글로에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를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에 대해서는 댓글도 꽤 올라왔는데 필자가 그 글을 올리면서 김 문학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점( 특히 저서의 표제사진을 올린 것이 저작권침해문제에 해당하지 않겠는지 하는 우려가 있었다) , 또 김 문학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평을 하자면 그에 대한 비판도 동반해야 하는데 나의 대학교 1년 선배되는 분을 쉽사리 비판하기에는 인간적인 고민이 많았기에 결국 그 글을 조글로에서 내렸다. 그 때문에 김 문학변호를 열심히 하던 사람으로부터 필자를 비난하는 글이 조글로에 올라오게까지 되었다. 그런 비난이야 못 들은 척하면 그 뿐이지만 그후의 조글로, 또 기타 사이트에서 진행되는 김 문학논쟁을 보면서 이번 기회에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김 문학에 대하여 확실하게 시비를 가를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여러가지 고민을 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김 문학의 저술활동을 소개하고 김 문학의 저서들의 내용과 특징을 잘 총괄하여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김 문학의 좋은 점과  비판받을 점이 잘 구분되고 김 문학에 대한 평가가 조선족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갈 수 있다면 여러가지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각오하고 김 문학평가에 한번 나서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는 먼저 김 문학의 저서 (주로 일본어저서)를 연대별, 내용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그러고나서 이런 기본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필자의 김 문학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려 한다.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는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 명언집,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한국어( 또는 조선어) 저서, 중국어저서까지 시야에 넣으면 이상의 분류외에 번역, 수필, 조선족비판서 등 내용이 첨가된다. 이 문장에서는 주로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를 소개하는데 그 과정에서 먼저 김 문학의 저서를 연대별로 제목을 배렬하여 소개하고, 그 다음 내용별로 나누어 제목, 목록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아마존닷컴에 나와있는 저서에 대한 상품설명, 출판사 및 저자의 설명, 판매랭킹, 필요에 따라서는 저서에 대한 독자의 코멘트도 번역하여 올렸다. 그리고 꼭 필요한 저서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주 간단한 해설도 달았다.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같은 시비가 되는 책은 목록을 가능한 상세하게 번역하여 독자들이 잘 판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기본적이고 풍부한 기초자료가 있으면 그 다음 절차로 김 문학의 저술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설득력있는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일본어판 아마존닷컴에서 찾은 것이다.       한가지 더 설명하고 싶은 것은 혹시 있을 지 모를 저작권침해문제를 우려하여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에 한해서 제목과 목록을 완전한 번역보다 그런 뜻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런 방법은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교수의 조언에 따르는 것인데 궁색하게 느껴져도 이해해주었으면 고맙겠다. 혹시 저작권문제에 관하여 김 문학씨 또는 독자들로부터 불합리한 점을 지적받는다면 그런 점은 흔쾌히 고칠 생각이다.이 문장의 전체적인 내용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1.머리말2.김문학 저서소개3.김문학 일본어저서의 내용별 분류4.김문학 그는 누구인가?5.김문학이 욕 먹는 이유6.황우석과 김문학 그리고 맹신7.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문학 2. 김문학 저서 소개 (일본어편)(1) 책 제목:《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東方出版    출판년도:1998,5(2) 책 제목:《칼을 품은 중국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김 명학공저, 번역:하치스가 미츠히코  출판사: 現代書館    출판년도:1995,5(3) 책 제목:《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김 명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2,4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12)(4) 책 제목:《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2(초판2002)(5) 책 제목:《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이라는 뜻    저자: 이토 테리,류 희준,김 문학 공저  출판사: 실업의 일본사    출판년도:2002,6(6) 책 제목:《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白帝社  출판년도:2003,11(7) 책 제목:《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4,2(8) 책 제목:《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일본僑報社  출판년도:2004,6(9) 책 제목:《현명한 인생술-보통인의 명언이 가르친다》이라는 뜻  편집: 김 문학 출판사:가리바북 출판년도 2005,6(10) 책 제목:《천마의 이야기》(소설) 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가리바북  출판년도:2005,9(11)책제목:《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12) 책제목:《역검정 중국력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 이라는》뜻    저자: 이자와 모토히코, 김 문학 공저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8, 2(祥伝社의 초판본은    2005,9에 출판)(13) 책제목:《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6,12(14) 책 제목:《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7,12(15) 책 제목:《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청춘출판사  출판년도:2007,2(16) 책 제목:《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7,6(17) 책 제목:《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南南社  출판년도:2007,6(18)책 제목:《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8,10(19)책 제목:《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 이라는》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한국어,조선어편)(1)《벌거숭이3국지》(창공사,1997)(2) 《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 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 1997)  (3) 《중국의 에로스 문화》(우석,1998)(4)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5) 《한국인중국인일본인-비교문화에서 삼국인을 찾는다》(우석,2000)(6)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우석,2000)(7) 《조선족대개조론》(2001)(8) 《중일한삼국인 여기가 다르다》(한국한일문화센터,2002)(9) 《일본문화의 수수께끼》(공저)(10)《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11)《조선인의 사상과 성격》(번역, 조선총독부지음,북타임,2010) (중국어편)(1)《仮面世界与白色世界-日韓文化比較考》(金良基원저번역,遼寧教育出版社,1989)(2)《裸戀》(산문집,1993)(3)《中国人留学日本百年史》(上下)(공저,遼寧教育出版社,1997)(4)《日本人的縮小意識》(李御寧원저번역, 山東人民出版社, 2003)(5)《丑陋的韓國人》(金文学编者, 宋义淑译者, 山东人民出版社, 2005)(6)《中、日、韓文化比較体驗記》(中信出版社,2006)(7)《新丑陋的日本人》(作者金文学,译者汪培伦, 金城, 2008)(8)《中國人日本人韓國人》(作者金文学,译者金英兰,吕文辉, 山东人民出版社, 2008) 3. 김문학 일본어저서의 내용별 분류 (동아시아비교문화론)(1)책 제목: 《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東方出版    출판년도:1998,5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북데이터베이스에서) 삼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중국조선족유학생(히로시마대학대학원)작가가 삼국의 문화를 처음으로 동시비교) (「MARC」데이터베이스에서)외관적으로는 거의 분별할 수 없는 중일한 동양삼국인에 대하여 저자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그 생활양식, 사고패턴, 행동양식, 언어, 사생관, 미의식 등 여러분야에 관한 비교를 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493,271위 60186위 ─   비지니스,경제373위 ─   아시아,아프리카20617위 ─   사회학개론 목록1 벌거숭이 삼국지2 문화의 삼국지3 에로스의 삼국지4 맛과 멋의 삼국지5 역사의 삼국지 (대체 이상의 뜻임) (2)책 제목:《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白帝社  출판년도:2003,11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다타미,의자, 온돌의 앉은 방법에서 보아낼 수 있는 일중한문화의 차이란? 생활속의 가까운 화제로부터 넓혀가는 비교문화론! 동아시아삼국인의 머리속이란?(「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인,중국인,한국인 과연 이 삼국인에게는 무엇인가 동질성과 이질성이 있는 것인가? 왜 서로 다른 문화를 구축했는가? 저자의 개인체험에서 얻은 관점을 적은 가까운 화제로부터 넓혀가는 비교문화론. Amazon 상품랭킹: 책 – 673,296위 1286위-일본인론28409위-사회학개론   711위-문화인류학일반 목록제1장 일본인은 언제나 깍쟁이다(재미있는 이름의 해프닝, 삼국의 언어감각 등)제2장 중국인은 인습을 탈피할 수 없다! (불륜삼국지 얼굴, 가슴, 그리고 발 등)제3장 한국인은 허풍쟁이! (남북인가 동서인가? 다타미, 의자,온돌에 앉은 기분 등)제4장 삼국인의 표면과 뒤면  (情과 義와 理, 푸는 문화와 조이는 문화 등) (대체 이상의 뜻임) (3) 책 제목:《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청춘출판사  출판년도:2007,2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이기에 알 수 있는 일본, 중국,한국 문화의 미묘한 차이의 심층이란? Amazon 상품랭킹: 책 – 449,046위  109위-청춘신서 901위-일본론18677위-사회학개론 목록서장 왜서 일중한삼국은 이렇게도 다른가제1장 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제2장 나무의 나라 돌의 나라 흙의 나라제3장 조화로운 나라 싸움의 나라 정의 나라제4장 사람, 신, 자연으로부터보는 사고양식의 차이종장 일중한은 다르기에 서로 잘 나간다 (대체 이상의 뜻임) (4)책 제목:《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7,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미인의 기준이란? 얼굴? 다리? 가슴? 앉은 것은 다타미? 의자? 온돌? 수박에는 사탕? 소금? 한자 한문자로 표시하는 義? 理? 情? 가까운 화제로부터 분석하는 중일한 문화의 차이. 보기에는 비슷해도 머리속은 이렇게도 다르다. Amazon 상품랭킹: 책 – 511,218위   389위-아시아아프리카21381위-사회학개론  253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제1장 삼국문화의 표정(재미있는 이름의 해프닝, 삼국의 언어감각 등)제2장 일중한삼국의 뒤면 (불륜삼국지 얼굴, 가슴, 그리고 발 등)제3장 일중한 여기가 크게 다르다 (남북인가 동서인가? 다타미, 의자,온돌에 앉은 기분 등)제4장 일중한 국민성의 격차(情과 義와 理, 푸는 문화와 조이는 문화 등)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은《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白帝社  출판년도:2003,11)을 祥伝社에서 재판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문화론) (1) 책 제목: 《칼을 품은 중국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김 명학공저, 번역:하치스가 미츠히코 출판사: 現代書館    출판년도:1995,5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  (「BOOK」데이터베이스에서)약진하는 중국의 허허실실…중국조선족3세형제가 홀딱 벗긴다. (「MARC」데이터베이스에서)  거대하다, 위생이 전혀 되지 않았다, 중국 여자가 너무 귀엽다, 대륙의 저력은 무한… 그러한 중국, 중국인에 대하여 실상을 홀딱 벗긴다. 일중한 삼개국에 정통한 저자가 비교문화적인 시점에서 독특하게 분석한다.Amazon 상품랭킹: 책 – 1,266,743위 50993위-사회학개론 1827위-각국경제사정-중국  605위-지역연구-중국 목록제1장 대류기질,대륙의저력제2장 중국인의 처세술제3장 중국은 드넑고 볼 곳이 많다제4장 바람기 중국인, 바뀌는 중국의 모습제5장 여성상위새대-중국남녀사정제6장 중국인의 금전감각제7장 중국인과 잘 거래하는 비결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은 한국에서 출판한 《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 1997)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 같다. 원제목이 아니고 《칼을 품은 중국인》이라고 번역된 점이 주목된다. 책 내용은 중국에 대하여 그리 나쁜 것이 아닌데 일본에서는 자극적이고 중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가 나오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점이 김문학이 금후 일본에서 어떤 방향의 책을 출판해나가는가 하는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문화론보다 동시대의 중국에 대한 소개서이다.      (2)책 제목: 《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일본僑報社  출판년도:2004,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중국인에 있어서 성이란 무엇인가? 중국을 철저하게 이해하려면 정치,사회, 예술 등만을 볼 것이 아니고 그 저변에서 숨쉬는 남녀관계부터 성까지 보아낼 필요가 있다. 중국성문화를 파헤친 시도.  Amazon 상품랭킹: 책 – 834,645위 해설: 이 책은 뒤에서 소개되는《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 》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인 것 같다. 즉《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 》이 책의 재판인 것 같다. 일본어판 아마존닷컴에는 책 목록이 보이지 않는다. (3)책제목:《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   출판사/저자의 내용소개  일본인의 무던한 중국관을 근본으로부터 뒤엎는다! 이자와 모토히코씨 추천. 재일한국계중국인이기에 쓸 수 있은 진실한 중국론. 문화대국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실태. 도적천국, 공공도덕심결여, 서비스정신 전혀 없다. 일본인이 옛날부터 존경해온 중국인의 실태를 용서없이 통렬하게 파헤쳤다. 중국조선족3세이고 일본에도 정통한 저자가 처음으로 쓴 통렬한 중국비판.일본역사추리작가 이자와 모토히코의 책 소개일본인의 중국관을 수정하게 만드는 기분좋은 책이다.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공자,노자 등 위대한 사상을 창출해낸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경도심이 있고, 거기다가 일중전쟁에 대한 속죄의식이 겹치어 중국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은 오늘의 일본에서는 정보로서만 전해지는 중국의 암흑면을 그것도 문화적인 암흑면을 용서없이 파헤친 것이다. 일본인의 애매하고 무던한 중국관을 근본으로부터 수정을 요구하는 책이다. 21세기에 걸쳐서 중국과의 관계가 일본의 최대의 외교과제로 될 가능성이 있기에 국민필독의 책이다.Amazon 상품랭킹: 책 – 127,158위 11345위-투자, 금융,회사경영론 144위-각국경제사정-중국 121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1장 문화사막 중국의 현실2장 중국문화의 병근을 파헤친다3장 원래부터 중국은 문화의 나라인가?4장 분서갱유와 문화대혁명5장 아아 슬픈 지식인6장 중국인에 있어서 맨즈(面子)란?7장 중국인의 극단적인 이기주의8장 중국국민병진단 (대체 이상의 뜻임)해설: 이 책은 한국에서 출판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을 일본어로 낸 것 같다. 아무튼 일본의 일부 출판계에서는 이런 중국비판서가 주목을 받는다.(4)책 제목: 《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8,10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混」이란 …적당하게 속이면서 재주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바보, 가짜천국, 계약불이행, 인명경시 등은  당연한 것, 그러한 교활하고 강한 중국인과 잘 거래하는 방법이란. Amazon 상품랭킹: 책 – 379,777위  15646위-사회학개론437위-각국경제사정-중국203위-지역연구-중국 목록1장 일본인이 중국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2장 유아기부터 성장할 수 없는 중국인3장 신체편중으로 정신을 잊어버린 나라4장「混」이라는 행동원리5장 한자가 결정지은 중국인의 사유방법6장 비적이라는 폭력원리종장 중국 및 중국인의 숙명 (대체 이상의 뜻임) (5)책 제목: 《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10,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 내용소개: 纏足48秘技・男根이 소생한 환관, 사람고기가 정력제!? 《金瓶梅》를 낳은 중국, 맹자, 장자, 진시황부터 모택동,최신중국사정까지 많은 자료를 해독하고, 모아놓은 중국 4000년 성의 역사. 거기에 보이는 것은  난숙한 중국역사 그자체이며 중국인의 기질, 가치관이다.한국계중국인으로서 태어나 비교문학자인 저자이기에 쓸 수 있은 적나라하고 장대화려한 밤의 역사는 일본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벼운 기분이나 흥미위주로 읽는 것도 좋고, 중국의 역사나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비지니스에 활용하는 것도 좋다. 놀라움과 발견의 연속.Amazon 상품랭킹: 책 – 173,882위  149위-祥伝社黄金文庫    책 표지의  선전문구: 중국역사는 밤에 만들어졌고, 경제발전의 파워는 호색에 있다! ●  황제의 첫날밤의 증거는 피가 묻은 횐색 비단●  纏足이라는 이름의 에로티즘●  사람고기가 정력제!●  미인경합대회의 원조 수나라 양제●  3000명의 남자첩을 거느린 則天武后●  경이적인 性交秘術「屋中術」이란?●  모택동과 여인들~근대중국사,유명인들의 성●  공산당정권하 공적으로 인정되는 섹스산업 목록제1장 호색의 전통제2장 영웅호걸, 호색의 향연제3장 중국의 에로스문학과 성표현제4장 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제5장 에로스의 군대제6장 중국, 성문화혁명 (대체 이상의 뜻임) (한국비판서)   (1) 책 제목:《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김 명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2,4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1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조국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의 너무나도 통렬한 한국비판. 감정이 과다하고 허영심, 오만한 국민성, 이상할 정도의 차별, 융통성이 없는 경직화한 사회의 실태가 하나하나 칼도마에 오른다… 중국인으로서 민족적으로는 한국인, 일본문화연구자, 일본에 온지 8년, 일중한삼국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저자만이 가능한 비교문화론적 시점.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코멘트:일본인을 찬양하고 한국인을 죽도록 내리깍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상에도 있지만 어떤 냄새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진실의 한국민족의 특성이 렬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본인에게도 결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앞에서는 누구도 성인군자처럼 보입니다. 그처럼  문제투성이 민족입니다. 허영심, 거짓말, 이기적, 질투심, 우줄렁거림, 감정을 억지하지 못하는, 폭력적…. 오늘의 일상적인 반일폭동은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발로입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663,992위   212위-한국,북조선 171위-祥伝社신서27988위-지역연구-사회학개론 목록1장 어른의 나라 일본, 미숙아의 나라 한국     -너무나도 유치하고 감정적이고 왜서 온나라가 떠들어 대는가      어른의 나라 일본과 어린애 나라 한국   왜 한국인은 감정을 억제 못하는가   어린애 나라라고 비판하는 일본을 원숭이흉내내는 우스꽝스러움      한국인의 처참한 싸움 모양새     외국인이 실증내는 한국인의 제나라자랑      공자도 진시황도 조선민족이라는 해괴망측     김치가 절대로 세계적 식품이 될수 없는 이유     한국인은 한사람이면 호랑이,세명모이면 고양이     외견상 범같아 보이기는 한지만     일중한3국에서 일본만이 다른 문화의 나라     한국인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     재능발휘를 막는 획일적인 문화풍토     몰개성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일본     애국심을 고무하기전에 해야하는 일      속옷에까지 태극기를 장식하는 이상사태     애국심이 이데오로기가 된 한국     한자배척에서 보는 편협한 국수주의   2장 동방예의지국이라 듣고서 기가 막힌다        -서비스정신 영점, 제멋대로 정 밀어붙이기      왜 서비스정신이 보이지 않는가      중국과 전혀 다르지 않는 한국의 서비스 수준      한국인이 서비스정신을 붙태울 때      한국인이 중국에서 얻어맞는 이유      북경의 골프클럽은 한국인출입금지      너무 우줄렁거려 맞고 매너를 지키지 않아 맞는다      한국인은 정말 정이 두터운 민족인가      심야12시의 갑작스러운 전화      숨이 꽉 막히는 과잉접대      두마디에 형제처럼 영원히 지내자고 하면서      저절로 머리좋다고 우줄렁거리는 바보      한국인의 피속의 과잉한 승부심       무엇이든지 아는체하면서 결국에는 큰 창피를 한다         3장 차별대국 한국의 알려지지 않은 실태       -신체장애자, 외국인,못 생긴 여자는 왜 차별 받는가       한국사회의 비극의 근원이란       내귀를 의심하게 하는 폭언       한국인의 몸에 푹 젖어있는 우리라는 개념       한집안외는 타관사람이라는 차별병       남=타관사람이라는 한심한 차별       왜 신체장애자가 차별의 대상이 되는가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세계 유일한 나라       미인이 아니면 깔보는 사회       너무 쉽게 성형미용을 하는 한국여성       성형해야 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고 의식구조       너무나도 차거운 외국인 차별실태       중국조선족에 대한 믿기어려운 학대       북조선망명자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화교가 한국에서 받은 수많은 보복  4장 이렇게까지 융통성이 없는 경직한 사회     -일본에 뒤떨어지는 진정한 이유       한국을 부패시키는 원흉       왜 한국인보다 일본인과 비슷하다고 불리우고 싶어하는가       중국것은 무엇이든지 섭취해온 한국       한국은 정말 민주주의사회인가       실은 발언자유가 없는 나라       택시운저수의 흉상스러운 얼굴       다케시마를 둘러싼 일한양국의 대응의 차이       왜 한국은 일본보다 독창성이 없는가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모방부터 시작하여 그 이상의 것을 창조해내는 일본       반성모르는 우줄렁꾼의 비극       IMF위기로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한국       왜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우치는가       반성을 모르고 쩍하면 다른 사람 탓을 한다   5장 왜 문화가 망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고서점,독서사정,이문화수용에서 보는 일한비교       문화국가라고 듣고서 억장이 무너지는 욕설대국       한국인이 쉽게 입에 담는 씹할이란          김포공항 입국심사에서 받은 보복       책을 읽지 않는 문화민족       전차속의 독서사정 일한비교       문화국민이라 자화자찬하는 불가사의       고서점에서 보는 일본과 한국       먼지와 손때로 어지로운 서울의 고서점       고서를 중히 여기는 일본과 마음대로 구는 한국      흉내 카피문화의 나라한국       한국인의 일본비판의 정석       나쁜 것은 흉내내지 않는 일본, 무엇이든지 모두 흉내내는 한국     6장 외견뿐이고 내실이 없는 나라        -속발하는 사고를 불러오는 놀라운 종이호랑이문화         날림공사를 하는 풍토         지진오기전에 인재로 망하는 나라한국         왜 다리가 떨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졌는가         기술자를 천대하는 한국의 풍토         양반이 나라를 망친다         육체노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란         일하려하지 않는 식당주인         장인을 존중하는 일본과 기술자를 천시하는 한국         외견에만 신경쓰는 한국인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         화면이 보이지 않는 초대형텔레비           왜 한국여성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가         너무나도 시대에 되떨어진 유교정신         부끄러워서 죽어도 못하다고 하는 사장         7장 일본이 없으면 살 수없는 가련한 나라        -옛날에는 중국에, 지금은 일본에 사대주의가 지배한다         일본인는 정말 축소지향인가        일본이 한국보다 작다는 불가사의한 착각        설득력이 없는 학설로서의 축소지향        워크맨의 발명은 일본인의 유연성의 발로        일본은 없다는 책은 한국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편견과 착오뿐인 한국의 대베스트셀러        조선통신사시대부터 이어져오는 터무니없는 일본멸시        선구자 오선화의 비극        한국에서 매국노라고 욕먹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모자라는 냉정한 시점         언제면 일본에서 졸업하겠는가        일한전에 져도 국치라고 떠든다        중국에는 용서해도 일본은 용서못한다        지나친 일본의식은 지금 없애야 한다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이 중국에서《丑陋的韓國人》(金文学编者, 宋义淑译者, 山東人民出版社, 2005)이란 이름으로 번역된 것 같다. 한국에서 원서의 내용 그대로 출간 또는 번역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2) 책 제목:《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2(초판2002)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먼저 낸 책《한국국민에 고한다!》로 일한양국에서 대반향을 일으킨 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에 의한 통곡의 조국비판 제2탄. 한국의「반일」과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에 수술칼을 들이댄다.(「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일한관계, 특히 한국의 역사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의「반일」이라는 「어리광」의 구조, 내셔널리즘, 폭력, 차별대국의 실태를 폭로, 비판한다. 《한국국민에 고한다!》의 속편.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코멘트:전번에 나온《한국국민에 고한다!》의 출판에 의하여 자기 민족 동포들로 부터 친일파( 한국에서는 매국노의 의미)라는 모자를 쓰게 된 저자가  이번에는 異論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반일내셔널리즘의 병리에 칼을 들이댔습니다. 전번에 나온《한국국민에 고한다!》와 같이 한국인을 알기위한 기본도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책과 같이 읽어보기를 권장합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195,666위53위-한국,북조선7859위-사회학개론165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1장《한국국민에 고한다!》일으킨 한바탕의 소동    하루밤 사이에 나는 인생이 바뀌었다    친일파, 매국노라는 매도의 태풍    중국에서도 대반향, 문화혁명시기라면 나는 총살당한다    친일파사냥 캠페인의 언어도단    중세의 마녀사냥과 비슷한 광기    항일과 친일로 이분하는 의미없는 짓    식민지시대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한국인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왜서 출간되었는가    김완섭씨 독불장군의 반란    왜 일본과 한국에서 이처럼 반응이 다른가    친일파 수괴 이광수의 영혼의 외침    민족개조론이 일으킨 미증유의 대소동    왜 조선에는 비판을 받아들이는 풍토가 없는가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이광수의 정신  2장 반일이나는 어리광의 구조   -이것이 있는한 한국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낮에는 반일, 저녁에는 친일하는 한국인    일본인에 막상막하라는 한국인의 입치레와 속내    눈치라는 자기방어 기술    다른사람에게 부탁하기전에 먼저 자기자신에 반성을     대국일본에 어리광부리는 한국인    일본인에 대한 쌍욕질은 열등감의 표출    대국일본에 어린애처럼 어리광부리는 한국인    일본에만 책임을 지우는 부당성    한국에 지금도 남아있는 식민지근성    대히트한 일한역사SF영화    전후에도 일본이 경제침략한다는 해괴망칙    결국은 식민지의식에 안주하는 한국인    반일문학이라는 엉터리책들    대베스트셀러-황태자비피랍사건    대량생산되어 인기를 누리는 반일문학의 계보    자위행위에 탐닉하는 한국인의 가련함 3장 한국을 뒤덮는 내셜낼리즘이라는 도깨비 -월드컵에서 부각된 세계속의 한국의 이질성    2002년월드컵, 열광적인 한국과 냉정한 일본의 차   유명문화인이 신문에 기고한 문장의 웃음거리 붉은악마의 에너지와 내셔낼리즘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의 우익화와 민족주의   한국의 내셔낼리즘은 왜서 비대해졌는가 내부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체질   왜 국산마늘을 사야하는가 글로벌사회의 고아가 되지 않기위하여   한국의 애국은 정의이고 일본의 애국은 우익이라는 불가사의 한국을 지배하는 우리와 남의 절대원리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대오해 한신대지진에 쾌재를 부른 한국인   일한동조론과 천황발원의 파문   근거가 없는 우월론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 일한동조론을 주장한 한국의 지식인들 월드컵4강부터 경제4강에로라는 망상  4장 폭력,왕따, 차별대국 한국  -왜 전근대적체질에서 해방받지 못하는가   폭력대국 한국의 알려지지않은 실감   처음 조국땅을 밝은 날의 충격   재외동포에 대한 비인도적차별과 학대 왜 교사가 책상에 몽둥이를 감추고 있는가   왜 나라를 버리는 국민이 속출하는가    왕따라는 소수자를 배제하는 논리   일본의 이지메와 한국의 이지메의 차이는   나라를 망치는 윤리도덕이라는 이름의 악마   왜 전직대통령이 꼭 단죄를 받는가   아무렇게나 해석이 가능한 윤리와 도덕 일본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근거란   내홍의 나라 한국, 조화의 나라 일본   한국을 불행하게 하는 몇가지 시스템 공론에 의한 소모전이 내부파괴를 가져온다 한국인이 상대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   한국이 슬프다하는 유서    일본을 차별사회라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 자살자에게 채찍질하는 야박한 보복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폭행의 실태  5장 21세기판 한국인개조계획  -지금이야말로 북안적역사관을 세우자일한병합을 둘러싼 세계의 상식  구미의 학자의 이론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  일한병합은 과연 피할 수 있었는가  일본통치의 35년간을 4기에 나누어 검증한다   한국국민의 역사관개조론  한국에서 허용되는 역사관은 하나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일본의 교과서사정  항일캠페인으로 하여 한국이 얻는 것은   역사에 말살된 소리없는 민중들  식민지체험자의 소리를 발굴하는 귀중한 사업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있은 양호한 관계  자료가 증명하는 식민지시대 역사의 진실  지금 경청해야하는 박정희의 국민개조론  박대통령의 근대화는 식민지정책의 재활용이었다  개조해야 할 점으로서 올린 한국인의 악덕  박대통령과 매국노 이광수의 불가사의한 일치  안중근의 신화를 넘어서  안중근이 일한합볌을 결정하게 한 역사의 아이러니  일로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쾌재를 부른 안중근  왜서 병합반대론자인 이토히로부미를 쐈는가  사형을 앞둔 안중근의 최후의 말  안중근이라는 우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로 향하자    (대체 이상의 뜻)   (3) 책 제목:《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이라는 뜻    저자: 이토 테리,류 희준,김 문학 공저  출판사: 실업의 일본사    출판년도:2002,6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 (「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과 한국, 이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리는 일한관계에 대하여 테리 이토가 두명의 한국인과 토크논쟁을 벌인다 속마음으로 나누는 새로운 일한관계가 보여진다. Amazon 상품랭킹: 책 – 851,055위 5920위-외교,국제관계 1607위-일본론론 2549위-국제정치형세 목록일본과 한국은 사이좋지 않아도 괜찮다.일본인이 과연 한국인과 친하려고 할까?여기가 이상해 한국인정치가들이여 和韓절충 김치나 먹어라!언제까지 사죄하면 용서받겠느냐?야망의 대국 중국은 日韓의 적이냐 친구이냐일본경제부활을 위하여 「38度線」쓸모가 있다! “세련”이 이기냐 “용속함”이 이기냐 홍수같은 日韓문화대결일본이 한국을 못 따라가는 18(?)가지 이유너무 깊어도 못쓴다  한국식 “情”의 진실멍청하다고 해도 일본은 「우직한 사나이가」되자!日韓대결은 복수극으로 한국이 압승!?허세와 오기로 사나이를 보여주는 한국판「사내는 슬퍼」일본인이요 제힘으로 남근(불알)을 세우라!여기가 이상해 한국인「한국미인」이 日韓관계에 혁명을 일으킨다!!日韓관계의 미래는 「여자」가 틀어지고 있다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은 2002년에 있은 한일월드컵에 의하여 일본내에서 한일관계가 좋아지는 분위기에 찬물을 붓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한반도의 분단을 일본경제부활에 쓸모가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기에 한국에서도 비판이 나왔고, 「일본이 한국을 못 따라가는 18(?)가지 이유」라는 내용도 일본이 성형에서는 한국 못 따라 간다 등 한국 꼬집기를 나열한 것 같다. (중국비판서) (1) 책 제목:《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4,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왜서 중국에서 기괴한 반일폭동이 속발하는가. 그리고 일본인은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서 알아채지 못하는가.「친일」때문에 일본에 대한 쓴소리와 모국 중국에 대한 비판으로 중국에서 출판을 거부받은 문제의 책.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1:한국계3세이고 중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10년이상 체류하는 자가 아니면 쓸 수없는 내용이고, 일본인의 집필자가 중국을 비판하기보다 수배의 설득력과 무게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4년전에 쓴《중국인민에게 고한다》와 같은 주장을 썼는데 이번에는 주해에서 일어난 집단매춘사건에 대한 비판도 들어간 최신판이다.집단매춘사건은 물론 일본인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돈이라면 무엇인든지 좋다고 하는 중국의 옛날부터의 열악한 인생관의 상징이라고 저자는 정곡을 찌른 지적을 하고 있다. 한국의 종군위안부문제도 같은 문제이다. 중국인 저자에 의한 야스구니신사참배에 관한 중국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코멘트도 신선하여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라크에서 일본인피랍으로 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개선을 보이고 있는 애국심에 의하여 중국정신의 추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저서가 최근 늘어나는데 그 중에서도 이책은 특출하기에 무엇인가 한책을 권한다면 나는 단연히 이 책을 권장하겠다.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2:지금 이전처럼 중국예찬이나 일본의 전쟁전을 모조리 부정하는 일을 많이 없어지고 다양한 의견이 (일본)국내에서 나오고 있다. 만주건국 등 일본이 중국에서 한 행위를 단순한 침략이라 단정하는 입장으로부터 일정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 또는 자위를 위한 부득히 한 반격 등 여러 의견이 교착하고 있다. 그런 중에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재일중국인학자인 저자가 일본이 대륙에서 한 행위와 현재의 중국의 반일을 논평한 이 책은 이런 의론에 파장을 던져준다. 저자의 시점은 전쟁전의 일본에 대하여 아주 호의적이다. 만주건국도 그대로 진전되면 동양에 미국같은 이상국가가 만들어졌을 거다, 중국의 근대화도 일본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지 관념적인 반일에 대한 반대론이 아니고 학자답게 많은 문헌과 실제 그 시대에 살았던 중국인을 취재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점이 설득력이 있다. 이런 논점들은 거의 다 (일본)국내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지만 실제 중에서 자란 필자가 지적하니 놀랍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이하 내용이 길기에 생략함). Amazon 상품랭킹: 책 – 496,667위 3108위-외교,국제관계 1339위-국제정치형세목록 (이 목록은 연변대학 김관웅교수가 번역한 것을 재차 수정한 것이다) 프롤로그 : 친일파 중국인으로서의 고발제1장 중국에 있어서의 "憎日"의 심층심리- 이상하기 그지없는 "반일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리유는 (1) 일본인이 모르고 있는 "日本鬼子"일본인 "賣春"사건으로 보는 중국인들의 과잉반응우호국을 "鬼"라고 부르는 奇怪千萬한 나라馬立誠씨는 왜 《인민일보》를 쫗겨났는가(2) 국책으로서의 "反日憎日"인터넷에 올린 치열한 반일 선동문반일 프로파간다는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눈을 감고 싶은 중국 역사교과서의 왜곡(3)모택동, 등소평 시대의 대일관계에서 배우라일본에서 강도질한 중국인 류학생의 변명공산당군대와 일본군대가 손을 잡았다는 새로운 사실 모택동은 일본에 "감사하다"고 말한 적 있다. 중국이여,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 (4) 궁극의 역사카드 "남경대학살"南京攻防戰의 책임은 중국에 있다왜 中國軍隊가 中國兵士들을 총격했을까"30만명"설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사상자수가 뻥튀기 된 정말 중국다운 이유자국내의 대량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중국정부제2장 일본은 사죄해서는 안 된다 - 自虐史觀, 당당하지 못한 외교에 대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 (1) "사죄"는 죄악이다 일본인에게서 잃어버린 당당한 자존심중국은 "약자 같은 어린애"짓을 그만두라 인근 국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사죄하지 않는 중국(2) "패전국 •日本"을 위한 변명미국에 의해 척추가 부러져버린 일본인의 정신구조 "승자=정의"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 戰後의 일본인들이 정말로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3) "日本의 전쟁에 긍지를 가지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가져온 아시아에 대한 대공헌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비렬한 중국과 한국(4) "야스구니(靖國)"라고 하는 일본문화야수구니신사에 낙서를 한 대학생은 "반일영웅"죽은 자를 채찍질하는 문화와 적과 제편을 같이 제사 지내는 문화중국과 한국 이외의 외국에서도 참배하고 있는 사실 제3장 일본점령하의 중국의 진실-일중전쟁 15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것은 어떤 쪽인가(1) "滿洲國"의 위대한 유산현대 중국이 완전히 부정하는 "滿洲國"孫文이 획책했던 "滿洲賣却"계획中華人民共和國은 滿洲國의 複寫-擴大版(2) "滿洲國"은 "滿足國"이였다 新京의 도시계획으로부터 보는 일본의 의욕과 공헌일본이 만주에 투입한 막대한 자본西洋의 識者가 보아낸 滿洲國의 眞價滿鐵시대의 기차는 지금보다 빨랐었다(3) 日本占領區는 "樂園"이였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점령구"러브레타를 출간하여 인세수입으로 살았던 노신 너무나도 대조적인 "해방구"의 실태(4) "日本鬼子"의 진짜 모습"三光政策"이란 것은 일본에는 없는 중국의 전통興亞觀音에 기탁한 마쯔이이와네(松井石根) 大將의 념원 日華事變이후의 8년은 1년의 전투와  7년의 경제건설 제4장 新中國의 씨를 뿌린 일본 -明治이후 오늘까지 日本이 中國의 스승이였던 사실 (1)孫文과 일본 그리고 일본인일본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없었다孫文과 중국혁명에 한생을 다 바친 미야자키도우덴(宮崎滔天)孫文이 주창했던 日中협력과 아시아의 단결(2) 일본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현대중국어일본어로부터 중국어에 수출된 대량의 단어들 중국문단은 일본류학생들이 만들었다지금도 진행중에 있는 일본문화의 수입 (3) 실현되지 못한 "伊藤博文首相" 초청계획"伊藤首相" 초청계획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故宮의 보물들을 지켜준 이들은 일본군대였다"敎育勅語"의 정신은 중국에서 지금도 살아있다(4) 남아서 新中國建設을 도왔던 日本人들 戰後의 中國內戰에 參戰했던 日本人들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본인 의사와 간호부들의 일하는 자세中國空軍의 기반을 다져준 하야시야 이찌로우(林弥一郞)소좌 國共兩軍의 싸움은 "日本遺産"을 쟁탈하기 위한 전쟁제5장 "日中友好"를 해체하라 - 强要와 迎合의 "友好"로부터 진정한 관계의 구축에로 나아가야 (1) "自虐"의 日本人과 "超愛國"의 中國人 일본의 교육 붕괴는 세계의 웃음거리自國의 國旗를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로부터 輕蔑을 당한다(2) 東京裁判과 文化大革命 文化大革命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였는가 이미 증명되고 있는 東京裁判의 不當性洗腦政策의 呪術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日本의 悲劇 (3) 중국은 일본을 절대로 추월하지 못한다대두하는 "中國威脅論"과 "日本沈沒論"중국에서의 自然破壞 실태의 이모저모 집단賣春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중국의 敵은 중국 內部에 있다 隣國로서의 日本이 진짜 무서운 점 (4) "日中友好"론은 왜 위험한가언제나 뒤틀리는 일밖에 없는 허위적인 "友好"관계일방적인 규탄과 일방적인 迎合으로 점철된 30년 民主主義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리해할 수 없는 것들좋은 말만 하면서 영합하는 것은 “간사한 친구”이다 (대체 이상의 뜻) (2) 책제목:《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6,12 출판사/저자로부터의 내용소개: 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 거침없고 용서없는 중국비판과 친일때문에 일본에 대한 쓴소리 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문제의 책 끝내 문고화! 「어쨌든 중국인이라는 것은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싫어하는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거울로 하라고 소리높이 웨치면서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중국입니다. 그리고 조만해서는 사죄하지 않는 문화권에 분류할 수 있습니다. 」 「문고판 서언」에서)책표제의 선전문구●일중한에 정통한 신세대문화인에 의한 「일중관계」론●왜 일부 일본인은 그렇게까지 사죄하려하는가 ●우호국을「鬼子(꾸이즈」라고 부르는 중국의 해귀망측●야스구니신사라는 일본문화를 알려고 하지 않는 중국의 오만한 내정간섭●일본의 전쟁이 미친 아시아에 대한 공헌●중국의 국책으로서의 「반일」프로판간다는 언제 시작됐는가●웃음거리 「중국위협론」、중국은 절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언제까지나 어리광이질 하는 중국의 가소로움●「自虐」의 일본인과「초애국」의 중국인(「BOOK 」데이터베이스에서) 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 거침없고 용서없는 중국비판과 친일 때문에 일본에 대한 쓴소리. 일중한에 정통한 신세대문화인에 의한  새로운 「일중관계」론 Amazon 상품랭킹: 책 – 173,770위 397위-일중,태평양전쟁 440위-국제정치형세 150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 ( 이책은《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뜻의 책)을 祥伝社라는 같은 출판사에서 제목만 바꾸어 문고본으로 출판한 것이기에 내용이 완전히 같아 목록을 렬거는 것은 생략한다.  (3) 책제목:《역검정 중국력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이라는 뜻   저자: 이자와 모토히코, 김 문학 공저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8, 2(祥伝社의 초판본은 2005,9에 출판)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이렇게 날조, 왜곡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나라에 왜서 불평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중국역사교육의 실태를 폭로하고 중국인과의 역사논쟁에서 지지않기 위한 반격매뉴얼을 공개한다. 출판사/ 저자로부터의 내용소개이런 나라가 역사인식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가!책처음부터 결론이 있는 날조, 왜곡천지이런 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에 일본이 뭐라고 불평을 들을 필요가 없다.Amazon 상품랭킹: 책 – 39916위   30위-중국사125위-학습지도 51위-祥伝社黄金文庫책표제의 선전문구 ●중국의 교과서에는「元寇」의 기술없음●티벳의 지위를 둘러싼 놀라운 역사왜곡●중학교의 교과서에는 일로전쟁도 기재없음●공산당은 절재적 「선」, 일본과 국민당은 절대적 「악」이라는 도식 ●지금도 「조선전쟁은 미국침략」이라는 확신범적 틀린 記述●공산당에 수천만에 이르는 자국민학살에 대해서는 침묵●90년대 이후에 강화되는 「반일애국」의 편향記述●중국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과 날조의 전모를 폭로한다목록제1장 중국에서의 「역사교육」이란-중국에 사실을 전하려는 의사가 처음부터 없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어느쪽인가,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의 개념은 이렇게 다르다 등)  제2장 국정교과서의 역사기술을 검증한다-공산당에 유리한 것이라면 어떤 엉터리도 통한다(고대로부터 근대까지 근대의 서막부터 만주사변까지 등) 제3장 교과서외에 보는 중국역사교육의 실태-급증하는 애국반일교육시설과 영화, 음악을 사용한 프로판간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의 괴상함, 9,18사변박물관 등)제4장 중국인 취급매뉴얼-중국인과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일( 나는 왜서 쇄뇌교육에 물 젖지 않았는가, 일본군국주의를 반성하라고  요구받았을 때 등) (4) 책 제목:《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南南社  출판년도:2007,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 」데이터베이스에서)당신의 중국인관과 일본인관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획기적인 일중상호 대반성! 강대중국의 허약한 실상, 섬나라 일본의 유연한 문화력. 중국외교부가 제일 주목하는 책.Amazon 상품랭킹: 책 – 847,224위 12205위-정치입문       445위-아시아, 아프리카103506위-비지니스, 경제 목록 제1장 유연한 일본문화력   유연한 일본인과 일본문화     「일본인론」의 정설에 대한 비판     유연한 일본문화와 정신구조     「온화한」 제국     일본인의 이문화수용시스템     외유내강적 파워     보따리문화의 관용성    「문명의 충돌」을 환충시키는 일본적 문명     양자선택의 원리보다 공생의 원리     일본의 힘 왜 일본은 오늘도 중국과 한국의 근대화의 스승이 될 수 있었는가   백년전부터 중국, 한국은 일본근대화를 모방하고 있었다   중일 「사제관계」의 역전   반일감정의 심리적원천-일본에 대한 내심상의 탄복과 표면상의 불복의   갈등심리     중국근대화에 공헌한 일본인     田岡嶺雲과 王國維     왜 일본을 유학처로 골랐는가     일본이 없었더라면 중국의 근대화도 없다     21세기 중국의 「일본화」 섬나라일본의 문명적우수성   「문명의 해양사관」이라는 획기적인 사관   섬나라일본은 초일류강대국이다   통합하기 어려운 대륙중국   중국사회의 취약성   중국의 블랙홀적인 위험성   섬나라근성으로 이긴다   대륙중국의 결정적 약점은 무엇인가   일본의 자유력과 행복력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숙명   내분이 많은 반도국가   일본은 왜서 언제나 불사신의 행운이 넘치는가   역사를 움직이는 운명의 역학  자연, 풍토가 국가의 운명을 만든다  일본의 지정학적 행운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본은 독립된 문명권이다  일본은 왜서 일로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  「대동아전쟁」을 세계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일본은 왜서 분렬, 분단에서 벗어날수 있었는가  「무산된 일본분할점령안」  중국은 왜서 배상요구를 포기했는가  조선전쟁의 特需  히노마루는 다시 솟는다   제2장 경직된 중국의 취약성  중국한국의 경직이념의 위험성  중국과 한국의 경직이념 사회  중국대륙과 조선반도의 문화적 근친성  일중한근대화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일본은 나무의 문명, 중국은 돌의 문명  중국,한국은 이념의 사회, 일본은 무이념의 사회  한국문화는 중국대륙의 복사판이다  혼합적「무절조」의 나라 일본  왜서 중국, 한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모자라는가  일본인은 관용한 민족이다  중국한국의 경직이념의 위험성 조화로운 일본과 싸움의 중국  조화를 존중하는 일본 조화로운 문화의 결정적인 약점은 무엇인가 싸움은 중국인의 전통적행동원리 정은 한국인의 생활양식 너무나도 영합하는 일본인 일중한인간관계의 동심원의 차이 일중한 집단주의의 이질성 일본식집단주의의 강점 왜서 중국,한국에는 욕설이 많은가 일본의 조화적인 사회구조    정치동물 중국인 한국인과 비정치동물 일본인 정치운동이 많은 중국, 한국 정치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와 정치이념이 아주 박약한 사회 일본인은 비정치적 동물 두개의 거대한 격차사회 중국    부인도 적이라는 중국인의 처참함 부인인즉 적이라는 중국식 사고 內訌이 많은 조선반도    중국의 붕궤는 경직문명의 필연성 「중국강대국가」라는 착각 약소대국-중국 중국인은 통합하기 어려운 민족이다 외화내빈의 실상, 수많은 내부모순 일당독재와 민주시스템의 차이를 고찰한다 중국의 「반일」은 또 「우호」로 돌아온다 올림픽후 10년내에 붕궤하는 원리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    일중국민성의 우렬비교 일중국민성의 비교로 미래를 점친다 중국은 과연 「잠자는 사자」인가 유연한 일본인과 경직된 중국인 혁신적인 일본인과 보수적인 중국인 정직한 일본인과 사기적인 중국인 단결심이 강한 일본인과 內訌력이 강한 중국 높은 소질의 일본인과 낮은 소질의 중국인 차분한 일본인과 떠들어대는 중국인 내향적인 일본인과 외향적인 중국인 자기반성적인 일본인과 남의 탓만 하는 중국인 《僞惡醜일본인》과 《추한 일본인》의 백년의 격차 공적정의감의 일본인과 사적정의감의 중국인 백년에도 변하지 않는 중국의 국민성 결점    중국의 반문명의 전통적 체질 반문화지향의 중국사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국민성 대륙적 호전성 內訌과 自害의 역사 백년전의 반일투쟁과 「일중관계신사고」 「반일」은 중국, 한국의 발전을 저지하는 두터운 장벽 일본을 이용하는 중국  한국인은 왜서 「반일」을 하는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환상  해외동포에 대한 비인도적 차별과 학대  국민85%가 체벌에 찬성  내셔널리즘적폭력주의+대일폭력  한국의 감정적비민주주의  「아시아의 내홍」의 위험성  일본에 대한 질투와 콤플렉스  대국 일본에 어리광부리는 한국인의 약체성  대일폭력과 어리광의 이중카드 깔보임당하는 일본과 일본인  바보가 돼버리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속임당하기 쉬운 국민  자기선전을 잘 못하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평화에 취해있고 우울증적인 일본인  내향적이고 외교를 잘 못하는 일본인  조화로움의 마이너스적 장벽  「반일」은 즉 일본인의 마음속의 벽이기도 하다 중국, 한국의 역사왜곡  역사관, 역사교육의 일중한의 차이  중국, 한국의 역사교육에 있어서의 왜곡, 날조의 실태  중국에 있어서 역사는 정책의 이용도구  「僞造田中上奏文」도 중국에서는 사실이 된다  일본점령구와 해방구의 실태비교  점령구는 문화도 경제도 번영했었다  「三光政策」의 문제  한국의 역사교육의 실태  일본식민지지배과 근대화  伊藤博文의 전정한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대일순응역사의 중요성   제4장 아시아의 內紛을 超極하는 방법 세계사적 역사관을 수립하라  역사관은 불일치한 것이 정상이다  역사인식은 동일할 수 있는가  전후일본의 공산주의적 「반일사관」을 비판한다  국제적시야에서 역사를 보는 눈  「당신은 당신의 얘기를 하고 나는 나의 얘기를 한다」는 논리 일중한은 아시아를 위하여 역사문제를 포기해야 한다  「역사의 사체」에 매달리는 중국, 한국  「역사」를 버려야  일중한에 도움이 된다  「역사문제」의 분쟁해결방법은 무엇인가  「미래지향」의 발상에서 탈피하라  70년전에 뜨거운 화제가 됐던 「동아시아공동체」  21세기 「동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중국한국의 빈약한 내실  중국,한국의 실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중국인식이 너무나도 무던한 일본인  빈부의 차와 부패로 쇠망한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중국적 시스템  만연하는 전근대적 「중국병」  실제로는 중국, 한국이 역사를 중히 여겨야 한다 반복하고 반복하는 자기주장 전술  內藤湖南은 말했다  왜서 일본인은 이렇게까지 연약해졌는가  일본은 미국의 매춘부인가  날지못하는 새가 돼버린 일본인  중국에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  「우호」라는 달콤한 환상에서 해방돼야 한다 교육입국 일본의 대전략  전후의 일본교육은 세계의 비상식  꾸지람을 상실한 일본  일본의 아름다운 전통, 우점을 젋은 세대에게  일본은 아직도 아시아 여러나라의 본보기  여유로운 교육이라는 환상  일본인의 당당한 정체성을 회복하라 일본의 국민성개조안 내향성+해양성, 외향성을 유연한 일본에 강한 역학을 더한다 젊은이는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국경을 의식하고 다른 나라를 인식하는 일본인이 되라 세계의 상식으로 세계와 거래하라 (대체 이상의 뜻)    (일본비판서)  책 제목: 《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7,1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지금까지 일본국내에서 유행한 일본론이란 자기애적일본론,또는 自虐적인 일본론의 양극단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자기비판적인 일본론을 전개했다. 외국의 입장에서 본 무책임, 자의적, 정서적 일본비판과는 다른 일중한을 철저히 비교연구한 신일본인에 의한 일본론.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중국에서 한국계3세로서 태어나 최근 일본인으로서 귀화한 저자만이 쓸 수 있는 일본을 사랑하는「독설일본론」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옛적의 좋은 시대를 실제 체험하고, 또 일본의 전통문학도 자주 읽어보고 있습니다.제가 읽어본 감상으로서는 원외국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객관적인 시야에 감동한 점이 20%정도, 옛적의 일본을 사랑하는 좀 우익적인 의견이 80% 정도로서 당당치 못한 일본인보다 일본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극단적인 사례가 눈에 띄웁니다. 전차안에서 다들 죽은 듯한 눈을 한다, 학생의 수업태도가 최악이다 등 일부 눈에 들어오기 쉬운 극단적인 사례가 일반화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풍조가 있겠지만 현재의 일본인 전체가 그렇게 부패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만불손이라 생각되는 곳은 일본에 대한 애정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말인데 그래도 역시 극단적인 사례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입니다. 여러가지 극론이 있지만 일본을 사랑하는 원외국인이 쓴 귀중서적입니다. 일본이 세계에서 인정되기 위하여 이러한 책이 많이 사회에 나오고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538,894위  1057 위-일본론22609위-사회학개론 목록제1장 일본인의 초상화제2장 국제화를 좋아하면서 국제화가 안되는 일본인제3장 돌연이변한 일본인제4장 어른이 되지못하는 노인의 나라 일본제5장 잘사는 나라의 행복하지 못한 일본인제6장 미국 팬티를 입은 일본인제7장 타락하라! 일본인제8장 일본에 미래가 있는가 (대체 이상의 뜻)(명언집, 소설) (1) 책 제목:《현명한 인생술-보통인의 명언이 가르친다》이라는 뜻  편집: 김 문학 출판사:가리바북 출판년도 2005,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살아가는 목적보다 살아가는 기술! 허무한 노력보다 살아가는 기술! 돈도 여자도 남자도 빠른 놈이 차지하고, 운명을 바꾸는 한줄기의 밧줄, 아첨의 테크니크 등 모든 분야의 저명인이나 무명인의 살아숨쉬는 인생술을 수록.해설: 김문학의 인생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김문학의 많은 저서가운데서 이 책은 한번 읽어보고 싶다.  (2) 책 제목:《천마의 이야기》(소설) 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가리바북  출판년도:2005,9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 (「MARC」데이터베이스에서) 국경을 넘어선 연애 이야기, 연애는 물론 정치,이데오로기, 자유주의,공산주의와는 일체무연. 이 세상 모든 주의를 넘어선 주변인의 연애.해설: 이 소설은 김문학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일본에서의 고독한 유학생활중의 일본 여인과의 짝사랑 얘기인 것 같다. 
16    16. 나의 가족사 찾기(3) 댓글:  조회:5779  추천:40  2010-08-1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16)                                                 나의 가족사 찾기(3)     140년의 가족사    나는 자신의 가족사를 찾으면서, 수선 제일 힘을 넣은 것이 1869년경에 조선 함경도 회령에서 두망간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아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무엇이었고, 두만강을 건너기 전 회령에서 무엇을 했으며, 가족관계는 어떠했으며, 그들의 선조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함경도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거의다 찾아보고, 회령과 간도지역의 향토사를 많이 찾아봤지만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구한말정부의 北墾島視察使 李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를 시찰하면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 속에서 당시 생존해있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를 찾아내고 가족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책들은 현재 행방불명이 되어있다. 또 중화민국, 만주국 시기에 작성된 간도지역의 호구부에 혹시나 나의 할아버지대의 가족관계가 기록되어 있을 수 있으나 이런 호구부들이 확실히 존재하는지 똑똑치 않다. 조선의 함경도 회령에 혹시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호적이 남아있지 않는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로서는 찾을 방법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가난에 찌들리다 함경도 지역의 대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거너 간도로 이주한 평범한 백성의 기록이 그리 쉽게 나오겠는가하는 의문도 든다. 그리하여 족보나 향토사를 통하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전의 가족사를 찾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고, 나의 가족에서 전해내려오는 구전, 자료, 사진 등을 통하여 두만강을 건넌 뒤의 약 140년간의 나의 가족사가 어떠했으며, 한 가족사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생각해보련다. 나의 형제들과 일가친척에 남아 있는 가족사에 관계되는 자료, 사진들을 모으면서 나는 또 한번 비애를 느끼게 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나의 집과 친척집들에 액틀에 넣어 벽에 걸어놓은 낡은 사진들이 꽤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낡은 사진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다.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조선전쟁에서 받은 메달이나,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받은 표창장같은 것이 집안에 적지 않게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거의 다 없어졌다.  1980년대부터 중국 조선족사회가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동북지역에서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주하면서 옛적의 오붓하던 가족공동체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가족들이 갖고 있던 낡은 사진이나 자료들이 잘 보관되지 못하고 대부분 소실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대혁명시기에 소실되는 조선족의 가족사 자료보다 현재 소실되고 있는 자료가 더 많은 것 같다. 거기다가 조선족 사회의 세태가 낡은 것을 되도록 버리고 사망한 가족의 유골도 남지고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세대 나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에서 살고 있었는데, 1869년 경에 조선 함경도 六鎭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달라자(大砬子)라고 불리우는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智信에 정착했다고 한다.  1869년이면 기사(己巳)흉년때인데 이 시기에 함경도 六鎭지역에는 역사상 보기 드문 대기근이 발생하여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지역에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해이다.   1869년경에 고조할아버지가 어린아이인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가문의 구전으로는 가족관계도 확실치 않다. 아마 고조할아버지는 그 당시 중년이고 대기근으로 회령에서 가족이 대부분 사망하여 살아남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넌 것으로 추정된다. 달라자촌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데 그 당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농사밖에 더 있었겠는가. 증조할아버지는 달라자촌에서 회령의 같은 동네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배씨성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1945년 광복직후까지 생존했고, 오래동안 과부로 있었다는 것을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비교적 젋은 나이에 달라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두만강을 건너서부터  1885년에  청나라가 간도지역에 越墾局을 설치하여 조선이민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까지 초기의 조선이민들은 불법월경자의 취급을 받았고, 조선에 쫗겨가거나 숨어서 사는 극히 불안한 생활을 해왔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하여 고향인 회령에 매장했거나 또는 달라자에서 회령으로 귀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한 것 같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대에는 살길을 찾아 조선에서 간도로 건너왔으나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들의 법적인 지위도 극히 불안정했다고 생각된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중국에서 정착하지 않았다는 것이 방증된다.      할아버지 세대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나의 할아버지이고, 작은 아들이 나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1887년경에 달라자에서 태어났고, 작은 할아버지는 1894년에 달라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3대가 독자라고 하는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외에 중국에 다른 친척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 구전이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는 20세기 초기에 달라자를 떠나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백초구진 鳳林村(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왜서 고향인 달라자를 떠나서 봉림촌으로 이주했는지 이유가 똑똑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광복전의 간도지역의 조선인 농민들의 생활상으로 보아 소작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즉 본인들이 소유한 땅은 없고 남의 땅을 소작짓는 농사군들이니 소작받기 쉽고, 소작료가 낮은 땅을 찾게 되고, 그러다니 새로 개척되는 마을을 찾아서 왕청현쪽으로 이주한 것 같다. 봉림촌에서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자식들도 대부분 거기서 나서 자라다가 1930년대 후반에 형제가 갈라져 할아버지 가족이 왕청현 西崴子村으로 이사하고, 작은 할아버지 가족이 왕청현  동광진 新興村으로 이사했다. 이들 형제가 또 다시 이사한 이유도 아마 땅의 소작과 관계가 있은 것 같다.    할머니는 고향이 달라자촌 부근에 있는 七道溝 (오늘의 용정시 元東村)라고 하는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이 대체 간도의 초기이민들인 것을 보면 할머니네 가족도  조선의 함경도 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간도로 건너온 것 같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는 구한말에서부터 조선이 나라가 망하고 일제지배를 거쳐 광복을 맞는 시대, 그리고 중국의 청나라말기, 민국, 만주국을 거쳐 해방을 맞는 시대를 살아왔다. 평범한 백성의 삶이었지만 이런 시대상을 그들의 삶에서 읽어 낼수 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돈벌이로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가서 목수일을 몇년간 했고, 일설에 의하면 연해주에서 미국땅인 알라스카까지 건너가서  노무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익힌 러시아가 예상치 않게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1945년에 소련군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주하면서 러시아통역이 필요했는지 소련군 장교가 가끔 찾아와서 통역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재의 도문시 석현진 永昌村에서 일본군이 도망가면서 남긴 군복을 입고다니던 촌민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일본군으로 오해받아 위험에 처했을 때 할아버지가 통역을 잘 해서 무사히 풀려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48년에  왕청현 西崴子村에서 밭일을 하다가 일본군이 페기한 세균무기에 감염되어 불시에 세상을 떠났다.    작은 할아버지는 1970년에 왕청현 동광진 新興村에서 사망했는데 광복전에는 소작농이었고,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땅을 분배받고, 큰아들이 1946년에 왕청현 廟嶺에서 왕청현민주동맹의 자치군으로서 토비와 싸우다가 희생하여 열사가족 칭호를 받고 본인도 노동모범으로서 정부에서 표창도 받은 분이었다.    나의 가족은 할아버지 시대에는 기본상 중국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본인들이 간도에서 태어나서 간도에서 사망했고, 자식들도 다 간도에서 자랐던 것이다. 회령에 매장한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후에 왕청현으로 이장해온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정착할 의사가 강했다고 보여진다. 그래도 조선측과의 연계는 끈끈했던 것 같고, 그분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회령에는 친척도 남아있어 왕래를 했던 것 같다. 나의 나이 든 외삼촌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광복전에는 간도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호적이 조선으로 되여있어 호적증명은 조선의 원적지에 가서 받아왔다고 한다. 광복전에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가족의 호적이 회령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 세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일곱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큰 아들이 1903년에 처음 정착지인 달라자촌에서 태어난 외에 다른 자녀들은 모두 왕청현 봉림촌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형제들은  조선의 구한말에서부터 일제지배를 거쳐 광복을 맞고 또 남북이 분단되는 시기, 중국의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 만주국, 국공내전을 거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시대를 살아왔고, 특히 중국의 국공내전과 조선전쟁에는 여러 형제들이 참전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가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였고, 전쟁후에는 형제들이 중국과 조선에 갈라져사는 이른바 이산가족의 삶을 살아왔다.      나의 큰아버지는 왕청현 鳳林村에서 살던 젊은 시절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의 반일유격대에 참가했으며 겨울에 사고로 한쪽 다리가 절단되면서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도 젋은 시절에 조선인들의 반일유격대의 식량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1943년에 만주국의 동원하에 개척민으로 흑룡강성 密山縣으로 이주하였다가 거기서 광복을 맞고 1948년에 부모가 있는 왕청현 西崴子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흑룡강성 密山縣에서 광복을 맞은 후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운동에 가담하고 국민당계의 토비들과의 싸움에서 연락원을 하다가 위험한 고비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노동모범으로 선발된 적도 있었다. 일본이 망하고 광복을 맞이하면서 나의 아버지 형제들은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선 나의 작은 할아버지의 맏아들이 1945년에 왕청현민주동맹의 자치군에 참가하였는데 1946년 에 왕청현 廟嶺에서 있은 국민당계 토비들과의 싸움에서 희생했다. 나는 처음에 민주동맹과 자치군이란 어떤 성격의 단체인지 잘 알지 못했는데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이 단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에 중국 동북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이 패망한후 연변지역에서는 급속하게 공산당 계열의 조직이 형성되었고, 1945년 10월에 연변의 조선인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東北延邊人民民主大同盟이 성립되고 연변지역의 각현에 동맹조직과 자치군이 설립되었다. 東北延邊人民民主大同盟은 연변지역에 중국공산당의 지방권력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단체의 주요멤버들은 1946년에서 47년 사이에 정풍을 통하여 지방정권에서 배제되고 해방후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설립에도 그들이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서 이 단체의 주요멤버들이 정풍을 당하고 지방정권에서 배제됐는지 지금까지의 조선족 역사관련의 문헌들에서는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자기의 가족사 찾기가 조선족 역사의 가려진 그늘을 보게 된셈이다.    나의 가족에서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삼촌, 오촌삼촌 (작은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큰누님이 조선의용군, 동북민주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부터 1950년 사이에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조선전쟁에 참가하였고, 1953년에 조선전쟁이 끊난후 삼촌과 오촌삼촌은 조선인민군 장교로 조선에 그대로 남고, 큰누님만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의 어머니의 선조는 조선 함경도 富寧郡에서 살았는데 외할머니네 가족은 간도에 비교적 일찌히 이주하여 현재의 용정시 개산툰진 子洞村에서 살았고, 외할아버지는 富寧郡에서 함경도 甲山을 거쳐 1911년경에 현재의 도문시 월청진 楡基村의 친척집을 찾아왔다가 거기서 외할머니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간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나의 가족사를 찾아보면,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1967년경에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했고, 할머니네도 함경도에서 비교적 일찍히 간도로 이주한 집안이고, 어머니네 집안도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한 집안이다. 연변에서 오래 산 조선족의 가족사를 보면, 대체 함경도 지역에서 이민온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형제들중에서도 둘째백부가 국공내전에 참가하였고, 그 공로를 이전받아 해방후에 농민으로부터 현재의 도문시 석현진에 있는 제지공장에 노동자로 배치받았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아직도 잘 모르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일제의 지배를 직접 경험하던 세대인데 1940년대에 조선에서 실시된 창시개명이 우리 가족에도 적용된 적이 있는지 전혀 들은바가 없다. 조선에서는 강제적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이 그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어떻게 실시되였는가 하는 점이 똑똑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 하나, 나의 가족에서는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했다거나 일본군에 참가하여 전쟁에 나갔다는 얘기가 전혀 들리지 않느다. 이것도 만주국의 조선인들사이에서는 적은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혹시 내가 이 시대 역사를 너무 몰라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광복을 맞고나서 동북지역에서 토지개혁운동이 일어나고 국공내전이 발생하면서 나의 가족에서는 삼촌과 오촌 삼촌2명, 큰 누님까지하여 4명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그중 1명이 전사), 조선전쟁시에는 3명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들이 어떤 동기로 전쟁에 참가하였고, 이들이 이 전쟁에 대해여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가족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정작 알고 싶을 때에는 당사자들이 다 고인이 되어버렸다.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국공내전시기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약 6만3천명이 중국공산당측의 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전사자가 3천5백여명 된다고 한다. 동북의 조선인들이 아직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확정되기 이전이고, 조선족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기에 조선인의로서의 의식이 농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중국의 혁명에 참가할 수 있었는지, 이부분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판에 박힌 설명보다 좀 더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나의 가족에서는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아버지 형제들이 중국과 조선에 나뉘어져 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산가족으로서의 삶은 살아왔던 것이다. 또 나의 아버지 세대까지는 조선식의 생활방식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식의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형제들 세대    나의 부모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우리 형제들 세대의 특징은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1958년의 대약진운동,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등 중국의 굵직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분분 직접 참여하였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나의 4명의 형제들이 홍위병으로 북경에 가서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대 중국이 소련과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사이가 좋았을 때에는 나이든 형제들은 소련의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고, 외국어도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    나의 형제들 세대에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에 중국정부가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다수의 형제들이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했었는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도시에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서 이제는 농촌에 남아서 농업에 종사하는 형제가 하나도 안남았다. 나의 사촌, 외사촌 형제들까지 시야에 넣으면,  1980년대에 우리 가족이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 이전에 다수가 농촌에 살던 형제들이 도시로 이주하였고, 직업이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고, 이제는 고향인 연변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나갔거나, 특히는 한국에 나가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형제들 세대는 중국의 시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의식형태 교육을 많이 받아왔고, 부모들 세대에 비하면 중국화가 진척되었다. 그러나 조선식의 생활방식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의식은 강하게 남아있었고, 형제들 중에 조선민족외의 이민족과 통혼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과의 교류가 급속하게 증가되는 추세하에서 연변에 사는 형제들은 집집마다 한국 TV나 연예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있고, 민족의식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자녀들의 세대  나의 형제들의 자식의 세대에 이르러 제일 큰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부모들의 고향인 연변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다. 내가 일본에 유학하고 정착한 관계로 조카들의 다수가 일본에 나가게 되고, 또는 직업을 찾아 중국의 연해지역에 나가 있다. 조카들 가운데 연변에 남아있는 것은 대학교에 다니는 조카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나의 사촌, 외사촌 형제들 자식들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다들 일자리를 찾거나, 보다 좋은 생활을 추구하여 중국의 연해지역이나 해외로 나가 있다. 이러다니 고향땅인 연변에는 나이든 형제들만 남게 되어, 우리 가족의 경우만 보아도 진짜 공동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추세속에서 나의 자녀들 세대에는 과연 중국조선족 공동체가 제대로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기능할 지 의문이 생긴다. 나의 형제들 세대까지는 이민족과의 통혼은 전혀 없었는데 자녀들 세대부터는 하나 둘씩 이민족과의 통혼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연변땅에 모여서 옛적처럼 친척들이 오손도손 모여서 살 가능성도 거의 없어보인다.    고조할아버지가 기막힌 대기근을 피하여 어린아들인 증조할아버지의 손목을 끌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와서 쫓겨다니고 숨어지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할아버지대에는 소작농으로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어렵게 이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 아버지대에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 땅의 주인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정착한 땅을 겨우 몇세의 후손에 이르러 너무나 손쉽게 떠나버린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2010년8월13일)   *그 사이 제 어설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과 미안을 표시합니다. 제가 여기서 공부와 연구로 바쁘게 지내면서 원고들을 빠르게 올리지 못하여 실망을 끼쳐드렸습니다. 저는 7월말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보스턴에 옮겨와서 미국에서 2년째에는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런관계로 다음기 연재부터는 <버클리통신>에서 <보스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은 미국의 한국어신문에도 연재하는 관계로 한국의 표기방식에 맞추어 썼는데 부디 양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 광림 올림-    
15    15. 행방불명의 호구조사책 52책 (김광림) 댓글:  조회:5480  추천:45  2010-07-0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광림의 버클리통신(15)                        나의 가족사 찾기(2)  행방불명의 호구조사책  52책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 10여종을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가문의 선색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인 회령에서  1930년에 발간된  『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에 김해김씨의 세가문이 18세기 중엽에 경기도 양주에서, 또는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도로 이주하고 19세기 중엽에 다시 간도로 이주하는 거의 200년간에 걸치는 상세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중 한 가문의 이주사가 나의 가문의 구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와 아주 흡사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세 가문이 간도에 이주하여 살던 곳이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南坪鎭 일대이고, 나의 가문이 간도로 이주한 곳이 오늘의 용정시 智信鎭일대인 것이 결정적인 차이이고,  1930년 당시 족보에 기록된 간도에 이주한 이 세가문의후손들의 이름이 당시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들과 일치하지 않았고, 가족구성도 잘 맞지 않았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회령에서 발간된 『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가 총 18권으로 편찬되었다고 서문에 나오는데 현재 한국에서 찾아낼수 있는 것은 總編과 甲券 모두하여 5권뿐이어서 나머지 乙券, 丙券, 丁券, 終編 13권은 소재가 불명하다. 나의 가문의 기록이 그 족보의 실종된 부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는데 혹시나 조선 평양의  중앙도서관같은데 한국에서는 찾아낼수 없는 13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족보전문가들한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조선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후 족보를 봉건시대의 유물로 간주하여 모아서 다 태우려 했는데 어느 유명한 역사학자가 김 일성주석한테 귀중한 민족의 문화유산을 없앴을 없다는 간청을 하여 중앙도서관의 지하실에 다 남겨두었고, 그러나 일반인에게 공개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편 족보에는 모든 가문이 다 기록됐을 것이라는 것도 일종의 족보에 대한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족보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족보의 편찬과정에서도 돈이 필요하고 인맥과 정보가 필요하다. 고 한다. 1930년에 아무리 회령에서 김해김씨들이 모여서 족보를 편찬하였다 하더라도  간도에 살면서 돈이 없었거나 족보를 편찬한다는 정보를 모르고 있었거나 또는 족보편찬자들과 아무런 인맥이 없었으면 아예 족보에 올려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서 발견한 자료 그리하여 나는 족보를 통하여 가족사를 찾는 노력을 일단 접기로 하고, 함경도 회령지역과  간도 지역의 향토사, 호적관계 자료를 많이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과정에서 간도의 초기의 조선이민에 관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이 부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호적에 관계되는 자료를 찾아보려고 일본, 중국에서 가능한대로 많은 노력을 해 보았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호적에 관계되는 자료가 남아있다면 아마 1900년대부터 1950년대 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조선, 중국, 일본측의 간도에 대한 인구조사, 호적관계 자료를 찾아낼수 있는 범위내에서 많이 찾아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주목한 것이  구한말정부의 北墾島視察使 李 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를 시찰하면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을 구한말정부의 內部에 제출했다는 기록이었다. 이 기록의 설명에 李 範允일행이 북간도 지역의 약 10만명의 조선인들에 대하여 호구조사를 하였다고 하니 52책의 호구조사책에는 당시 북간도에 거주하던 수천 가족 이상의 호구부가 들어있을수 있고,  혹시 그 속에  나의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그 때에 이미 타계했던 것 같다)의 호구부도 들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52책의 호구조사책을 백방으로 찾아봤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의 국경문제 연구가 梁 泰鎭선생이 1992년에 편집한 『「1902年」間島邊界戶籍案』이라는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1902년에 구한말정부의 宮內府에서 만든것으로 보이는데 서간도 지역의 1,420 가족의 호구부가 여기에 들어있었다. 구한말의 호구부는 호주의 고조할아버지까지 4대 조상을 기록하고 외가집은 외할아버지를 기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가문의 뿌리를 확인하는데는 아주 유효하다. 나는 이 자료를 보고나서 정말이지 감탄하게 되었다. 서간도이면 현재의 중국 길림성 통화지구 일대인데 거기에 오래전부터 살고있는 조선족들이라면 이 자료를 활용하면 자기들의 가족사를 많이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梁 泰鎭선생은 이 자료를 편집하면서 이 자료가 어디에서 출처했는지 밝히지 않았고 자료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달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 자료는 서간도 지역의 호구자료이기에 북간도에 살고 있던 나의 가문과는 직접 연관이 없었다. 그래도 잘하면 이런 호구자료를 더 발굴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     나는 작년 5월에 한국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가서 함경도와 간도 지역의 향토사, 호구관계 자료를 찾아봤다. 간도지역에 대해서는「간도」라는 키워드를 입력하여 찾았는데 어쩐지 새로운 자료들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 함경도 지역을 같이 조사하던 김에 키워드를「회령」이라고 입력해봤다. 그랬더니 회령에 관계되는 자료목록중에 ≪會寧郡對岸古間島田結摠數成冊≫이라는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여지껏 찾아본 간도에 관한 자료중 이런 이름의 자료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자료는 1901년에 회령군에서 작성한 것으로 1책23장으로 구성되었고, 필사본이었다. 그래서 함경도의 다른 군들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만들었을 수있었다고 생각되어 간도와 두만강을 사이두고있는「무산」「종성」「온성」「경원」을 키워드로 입력해보왔더니 거기에도  1901년에 함경도 무산군, 종성군, 온성군, 경원군에서 두만강 대안의 간도에 대하여 토지와  호구조사를 한 자료들이 여러개 발견되었다. 즉 여기에 그 자료이름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茂山郡各社對岸間島居民戶數墾土結數成冊≫ ≪咸鏡北道鐘城郡對岸古間島田今春入種民名成冊≫ ≪穩城郡越便島居民地方遠近田野墾闢直檢繕冊≫≪慶源郡越便居韓民戶摠人口及田結地方檢査成冊≫ 그리고 더 나가서「변계」라는 키워드로 입력해봤더니 ≪咸北邊界成冊≫≪邊界戶籍案≫≪邊界戶籍成冊①≫≪邊界戶籍成冊②≫등자료들이 떠 올랐고, 그런 과정에서 ≪간도에 관한 종성군향청공문서≫라는 자료도 발견하였다. 이 몇가지 자료도 1902년에서 1903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 때 찾은 자료가 종류로 모두 10종이고 규장각도서관에서 원본자료를 복사하여 모으니 한 박스가 꽉 찰 정도가 되었다. 이 10종의 자료중 ≪邊界戶籍案≫은 1992년에 梁 泰鎭선생이 자료집으로 발간한적이 있는데 나머지 9종의 자료는 내가 여지껏 어디에서 본적이 없었고, 이 자료들이 활자로 발간되었거나 학계에서 활용됐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자료들을  작년8월에 중국 연길에서 개최된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제2회학술대회에서 공개했는데 조선족 사학자가운데서 반응이 좋았고, 나도 자기가 여지껏 공개안된 자료를 발굴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자기의 가족사를 찾아보려고 단순하게 시작했던 일이 조선민족의 함경도 지역으로의 이주사, 간도, 만주로의 이주사를 새로 공부하게 되고, 이 지역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발굴하게 되고, 족보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가족사를 찾아보자는 노력에 의하여 조상들의 陰德을 입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구한말의 北墾島視察使 李 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지역에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호구책이 발견된다면 나의 가족사 찾는데도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오래전부터 연변에서 살던 조선족들이면 자기 가족사를 찾아보는데는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호구책은 이미 소실됐을 가능성이 크나 혹시나 한국의 어느 도서관, 정부의 문서관에서 발견되지않은채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0년7월3일)    
14    14. 오리무중속의 100년전의 가족사 (김광림) 댓글:  조회:6133  추천:51  2010-07-01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14)         나의 가족사 찾기(1) 오리무중속의 100년전의 가족사              나는 중국조선족 5세이다.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조선 함경도 六鎭 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1869년경에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로부터 나의 가족은 중국에서  7세대에 이르는 140년간의 가족사를 영위해왔다.140년간의 가족사이면 국가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근현대사에 해당하고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그던데도 나의 가족사는 증조할아버지 이전의 역사는 약간의 구전만 남아있을뿐이다. 조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에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살았고, 1869년 기사(己巳)흉년 때 대기근과 돌림병에 마을사람들이 줄줄이 죽어가는 와중에 고조할아버지가 어린아이인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달라자(大砬子)라고 불리우는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智信에 정착했다고 한다. 간도이민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달라자촌은 1870~90년대 간도로 이주한 초기 조선이민들의 주요집거지였고, 청나라에서 조선정부와의 협의에 의하여 1885년에 이 마을에 통상국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청나라가 간도에서 조선이민들을 관리한  시초였던 것이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달라자촌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우리 가문에는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구전에 의하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살다가 고향인 조선 회령에 묘소를 두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1869년경에 회령 오산동 같은 마을에서 이민온 裵씨성의 여인과 결혼했는데 이 증조할머니는 광복직후까지 생존해 계셨다고 한다.  증조할머니가  과부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아마 달라자에서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두만강을 건너서부터  1885년에  청나라가 간도지역에 越墾局을 설치하여 조선이민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까지 초기의 조선이민들은 불법월경자의 취급을 받았고, 조선에 쫗겨가거나 숨어서 사는 극히 불안한 생활을 해왔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하여 고향인 회령에 매장했거나 또는 달라자에서 회령으로 귀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문은 할아버지때에 아마 20세기 초기로 추정되는데 달라자에서 汪淸縣  百草溝村 鳳林洞으로 이사하였는데 할아버지대부터는 가문의 구전이 그래도 많이 남아있어 가족사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다.  그런데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자꾸 생기는 욕구가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어떤 분들이었고, 그들이 간도로 건너오기전 회령에서 어떤 생활을 해왔고, 그 이전의 가족사는 어떠 했는가 알고 싶어진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그 이전의 가족사를 알수 있는 방법은 족보를 찾아보는 것과 함경도 회령과 간도 지역의 향토사와 호구관계 자료를 철저히 찾아보는 것이다. 우리가문은 김해김씨라고 알려져왔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이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이라는 것외에는 가족사를 알아볼수 있는 그렇다할 선색이 거의 없다. 구전에 의하면 함경도 청진지역인지 또는 다른 지역에서 관리를 하던 어느 선조가 19세기의 어느 난에 연루하여 다른 연류자들이 대부분 사형에 처해지는 와중에 함경도 무산지역으로 정배살이를 한 것 같고, 그러다가 회령에서 살게 된것 같다고 한다. 연대를 보면 그 선조는 나의 고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해당하고, 그 분이 연루된 난은 연대와 지역을 봐서 아마 ‘홍경래의 난’인것 같다. 부끄럽기도 우리 가문에서는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김해김씨라는 것 외에는 이름이 전혀 알려져있지 않고, 족보상의 돌림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1967년의 중국의 문화대혁명때까지  가문에 족보가 남아있어 가족사의 선색을 알수 있었는데  큰아버지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족보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었던 사촌형이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알길이 없어졌다.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회령의 鰲山洞에 같이 살던 김해김씨 종친중에 현재의 조선의 지도자 김 정일장군의 어머니인 김 정숙도 들어있어, 김 정숙의 가계를 잘 찾아보면 우리 가문의 족보도 추적할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김 정숙 가계를 찾아보았는데 조선이 혁명가족에 족보를 들이대는 일도 없거니와 김 정숙 가문도 극히 가난하고 간도에 이주하여 부모가 일찍히 돌아가면서 부모의 성함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실정이다. 그리하여 2007년 여름에 연구차 서울에 갔던 김에  김해김씨중앙종친회를 찾아 가문의 족보에 대하여 자문을 구했고, 그들의 조언으로 부천에 있는 족보전문도서관을 찾아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 10여종을 조사했고, 함경도 회령과 간도 지역의 향토사, 호구관계 자료를 철저히 찾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전의 가족사를 명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가족사 차원을 넘어 간도에 이주한 초기조선이민의 토지, 호구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하게  되었고, 조선반도 내에서의 함경도지역으로의 이주사, 간도지역으로의 이주사에 대하여서도 족보를 통하여 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족사찾기가 결국 나의 학문적인 지평을 넓혔다고 할수 있다.     족보가 알려주는 사실   나는 2007년 여름에 부천의 족보전문도서관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 10여종을 조사했다. 나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함경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했기에 이시기에 함경도 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를 조사하면 혹시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들의 명함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선색으로 하여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명함을 찾아내고 그 이전의 선조들까지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들에서는 간도로 또는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가족관계가 수두룩하게 나와 있었다.   특히 내가 새삼스레 감탄한 것은 1930년에 회령에서 발간된 『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에 김해김씨의 세 가문이 경기도 양주에서 살다가 강원도 통천으로 이주해 오랜기간 정착했다가 다시 함경도 갑산, 무산을 경유하여 간도로, 또는 양주에서 함경도 명천, 경성을 거치면서 간도로 이주한 사실이다. 이 세 가문이 경기도 양주에서 또는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도로 이주한 것이 대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엽이고, 함경도에서 다시 간도로 이주한 것이 19세기 중엽이다. 그들이 양주에서 또는 통천에서 함경도로 이주한 이유는 족보의 기록을 보면, 관리로서 파견을 받았거나 또는 유배를 받은 것이고 그 후손들이 또 다시 간도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 세 가문의 족보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내가 보기엔 기록이 거짓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30년대의 거의 200년이 되는 세 가문의 이주사를 아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족보를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족보의 기록이 때로는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거나 어떤 학문적인 연구에 굉장히 도움이 될때가 있다. 조선반도의 기록물들가운데서 아마 장르로서는 제일 많은 것이 족보인 것 같은데 이 족보들은 조선 또는 한국의 아주 중요한 문화적인 유산이라 볼 수 있다.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10여종의 김해김씨 족보들을 조사하면서  많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여러갈래의 김해김씨의 파조가 이 지역에 이주하고 정착한것이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조선왕조가 함경도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회령에서 발간된『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이외의 다른 김해김씨 족보들에는 파조가 김해김씨의 어느 파계라는 기록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현재의 남한의 족보들과 현저히 다른 점이다. 각 파조들이 새로운 개척지인 함경도로 이주하고 그 후세들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족보를 만든 경우가 다수이니 김해김씨라고는 알고있어도 구체적으로  어느 파계의 누구의 후손이라는 것은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가문의 경우, 김해김씨라고는 전해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파계인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마 함경도 지역의 족보의 특성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함경도 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통하여 초기에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서 많이 이주한 사실, 초기에 간도로 이주한 이민들은 주로 함경도 六鎭지역 출신들이라는 사실, 족보에 나오는 간도의 지명에 「○○洞」, 「○○坪」,「 ○○里」라는 중국에서는 보기드문 조선식의 지명과 「가마골(釜洞)」, 「애기골(子洞)」등 우리 민족 고유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찾은 조사한 이유는 나의 가족사를 찾자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는데, 대량의 족보를 조사한 결과 학문적인 사실을 적지않게 발견하게 되었고, 그 조사연구를 토대로 하여 2008년 10월에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두만강국제학술포럼에서 논문발표를 하게 되었다. (2010년6월29일)
13    13.미국에서 느끼는 중국,한국,일본 댓글:  조회:5551  추천:34  2010-05-0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3)                   미국에서 느끼는 중국,한국,일본   달라지고 있는 중국의 위상    국제사회에서 동아시아의 존재감이 급속하게 높아지고 있다. 세계에서 사람, 물자, 정보가 많이 모이는 미국에서 동아시아의 나라들이 각각 어떠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지 관찰해보는 것은 동아시아의 금후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음직하다.   미국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은 극히 크다고 할수 있다. 미디어에서는 중국에 관한 보도가 눈에 띄우고 있고, 국제정치에서 미국과 중국의 2극체제라는 의미의 「G2」라는 생소한 용어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제품은 여기에서도 일상생활에 보편화되어 중국제품없이는 기본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곧 잘 들린다.       미국에는 350만명을 넘는 중국사람들이 살고 있고, 중국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각지에 차이나타운, 중국계쇼핑센터가 설치되어 있고, 미국에서 중국레스토랑이 없는 도시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중국 유학생수도 인도다음으로 많다고 하는데 약 60만명이 되는 외국 유학생중에서 중국 유학생이 8만명 이상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IT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연구개발자중에는 인도인과 중국인이 제일 많다고 한다.              나는 금년 2월에 미국서부지역을 여행하면서 중국에서 온 여행객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고 정말 감개스러웠다. 내가 방문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니언, 로스안젤스, 샌디에고 등 도시와 관광지의 어디에도 중국 단체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고, 마침 설기간이었기에 라스베가스의 호텔과 시내 도처에 중국식의 붉은 초롱을 내걸고 한자로 쓴 춘련을 붙혀놓았다. 중국계 여행사 관계자들의 얘기에 의하면 미국의 뉴욕, 위싱턴 같은 도시에 가면 더 많은 중국관광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여년전만해도 중국인의 외국여행이 극히 드물었는데 이제는 세계의 거의 어느나라에도 중국인들이 여행을 다니는 시대가 도래했고, 중국하면 돈이 많고 잘사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국제사회에서 퍼지고 있다.       그런데「Made in China」라는 상품이 도처에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고유의 브랜드상품이 아직까지는 적은 것도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중국경제발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의 산업화는 이제부터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약진하는 한국의 모습  미국에서는 한국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일반핸드폰은 약 절반정도가 삼성, 엘지의 제품이고 일본메커의 핸드폰은 찾기조차 어렵다. 일본 핸드폰메커 제품은「가라파고스현상」이라고 불릴만큰 국내시장에 몰려있다가 해외에서는 완전히 한국회사들에 선점을 당하고 있다. 단지 최근에 애플과 구글의 스마트폰이 인기를 끌면서 핸드폰시장에서는 한국회사들이 다소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텔레비,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도 일본제품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던 시대는 사라지고, 한국제품이 일본제와 비슷하거나 오하려 그 이상의 시장점유률을 보여주고 있다. 자동차도 한국차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어, 거리를 다녀보면 현대, 기아의 간판이 붙은 차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수는 약 7만명이라 하는데 수자상으로는 인도, 중국에 이어 세번째이지만, 한국의 인구규모로 말하면 상당히 많은 수자라 할 수 있다.  미국에는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지고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이 약 140만명 있고, 한국인 특유의 민족성과 단결력을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로스안젤스에는 한국의 시가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거대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2007년7월에 미국 하원에서「종군위안부문제의 대일사죄요구결의」가 가결된 배경에도 한국계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다만 한국요리는 상당히 좋은 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미국에서 중국요리나 일본요리처럼 보급되지 않고 있다. 요리도 결국 국가의 이미지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한국요리(한식)의 세계화는 이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일본     중국, 한국이 미국에서 존재감을 키워가는데 비하면, 일본의 존재감은 오히려 약간 축소되고 있는 느낌이다. 때마침 도요타자동차의 리콜문제가 클러즈업하여 일본제품의 안전신화가 문제시되고 있다. 미국에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비교적 단결하고 모국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비하면,  일계인(日系人)이라 불리우는 2차대전이전에 미국에 이민하여 정착한 일본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모국과의 관계가 느슨하고 자체적인 네트워코가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다.    일본학생들의 미국유학도 2000년대에 들어서 감소되어가고 있다. 최근에 하버드대학교 총장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른 아시아 나라의 학생들이 하버드대에 많이 유학하는데 비하면 일본유학생은 손꼽아 헬수 있을 정도로 적다고 지적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의 대학가에서 중국과 한국에 비하면 일본유학생수는 현저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의 저력도 만만치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거리를 달리는 승용차를 보면 일본차가 유난히도 많아, 10대의 승용차가 있다면 아마 5, 6대는 도요타, 닛싼, 혼다 등 일본차들이다. 최근에 도요타자동차의 리콜문제가 발생하여 일본차의 이미지가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동차만큼은 어느나라도 일본의 아성을 쉽게 허물기 어려울 것 같다. 카메라, 프린터 등 광학관련제품을 보면 일본제의 우세는 자명하고, 일상생활에서 잘 관찰안되는 전자부품, 정밀기기에서도 일본산업의 파워는 아직도 막강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일본요리가 건강식품으로 아주 환영을 받고 있어, 때로는 중국요리이상의 취급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인,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짝퉁 일본레스토랑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요리라 하여도 별 것은 아닌데 나라의 이미지가 좋으니 요리의 인기도 동반상승하는 것이다.    현재는 많이 식어있지만 80년대경에는 미국에서 일본의 존재감이 크게 늘어나고 일본이 상당한 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말 속담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싶이 미국내에서 중국과 한국의 존재감에 다소 가리워지는 면이 있지만 여전히 선진국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파워는 결코 무시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미국에서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의 존재감을 살펴보면서, 동아시아를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존재감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느낀다.  동아시아 국가사이가 보다 더 가까워지고, EU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해나갈 때 이 지역의 가능성은 더욱 열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2010년5월4일)  
12    12.미국에서 살아보니(2) 댓글:  조회:5242  추천:40  2010-05-0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2)                   미국에서 살아보니(2)   인재가 모이는 나라   미국에 와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가운데 하나가 이 나라에 인재가 많이 모여 온다는 사실이다. 내가 방문학자로 미국에 와 있는 사이, 중국, 한국, 일본의 최고의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왔거나,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취직한 엘리트들을 아주 많이 만났다. 내가 방문학자로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에는 중국출신의 유학생이 500여명이 된다고 하는데, 그 중 100여명 이상이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청화대학교의 졸업생들이라고 한다. 이 대학교의 한국유학생은 600여명이 되는데 대학원생들은 다수가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한국과학기술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외국에서 미국에 인재가 많이 모여온다는 것은 객관적인 수치로도 증명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이 약 60만명이 공부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의 유학생수에 비하여도 그 수자가 월등히  많은 것이다. 외국 유학생수 제2위인 영국의 유학생수가 약 32만명으로 미국의 절반수준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외국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나서 미국에서 취직하거나 정착하는 비율도 높다는 것이다. 내가 본 어느 자료에 의하면, 80년대 이후부터 일본과 독일에 유학하여 이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유학생의 약70%가 미국에서 취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외에서 공부한 인재들도 미국에 와서 취직하고, 정착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취직하고, 정착한 사람들은 만나보고 그들의 모국의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이 미국에 유학와서 결국 미국의 인재가 되어가는 상황이기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손쉽게 해외의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에 유치하고 미국을 위하여 공헌하게 하고있는 셈이다.  해외인재들이 미국에 많이 모이는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있다고 생각된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의 화학연구실에 포스터닥으로 와있는 일본인 젊은 연구자를 만났는데, 그가 얘기하는데 의하면 같은 분야의 일본이나 중국의 연구실 설비는 꼭 미국만 못한 것이 아니거나 더 훌륭할 수도 있는데  미국의 실험실에는 세계 정상급 과학자가 많이 있고, 그런 사람들 밑에서 좋은 성과를 낼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두뇌가 우수한 인재들을 불러들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서울대학교를 마치고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실리콘밸리의 IT기업에 취직하게 된 유학생을 만났는데, 그가 하는 얘기에 의하면 미국의 기업에서는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창의력을 잘 발휘할수 있는데  한국의 기업에서는 수직된 인간관계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이유중에는 미국의 자유로운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에 끌리우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안젤스대학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유명한 연구소에 취직한 30대 초반의 한국유학생을 만났는데, 그가 받는 월급이 9천불 정도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 나이가 40대후반이고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10년을 했는데도 월급이 5천불이 약간 넘는데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한 초임금이 나보다도 훨씬 많다니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미국에는 특히 과학기술분야의 해외인재가 많이 모이는데 그만큼 이런 분야의 임금이 다른나라들보다 높고 그것이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팁과 고속도로    미국에서 잘 적응되지 않는 것이 팁문화이다. 팁은 서양사회에서 보통 존재하는 사회관습이라 하지만 특히 미국에서는 팁이 광범위하게 요구되고 있다. 식당, 호텔, 택시, 미용원 등 거의 모든 서비스업종에서 팁을 받고 있다. 즉 누구한테서 서비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팁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팁은 보통 지출한 비용의 15%를 내야 하는데, 팁까지 포함하면 미국의 서비스분야의 물가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나자신은 여지껏 동아시아에서 살아오면서 팁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팁에 대한 당혹감이 적지 않아,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거나 적당히 주어도 될 것을 많이 주는 일을 번복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아시아계 이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팁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소 다혹감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서는 너무 많은 서비스분야에서 팁을 받는다는 불만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타보면 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미국에는 고속도로가 워낙 많은데 미국전체 고속도로중에서 6.4%의 도로에서만 요금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 대부분 고속도로가 무료이고,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가까운 길을 가는 경우에도 손쉽게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고, 고속도로가 마치도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국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금년 2월에 나는 관광버스를 타고 일주일간 미국 서부지역 관광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버스가 고속도로에서 요금을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여행다녀온 사람들중에 미국의 좋은 점으로 고속도로가 무료라는 점을 드는  이들이 꽤 많다.   의외로운 보수성과 어두운 구석들    대체 미국하면 개방적이고 글로벌화한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는데 여기서 살아보면 의외로 보수적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도량형 (Measurement) 제도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도량형에 있어서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미터, 킬로미터, 킬로그램, 섭씨를 사용하지 않고, 인치, 마일, 폰드, 화씨를 사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해외에서 미국에 오게 되면  이 점에서 혼돈이 생기기 쉽고, 특히 매일의 생활과 관계되는 일기예보시에는 화씨를 계산공식에 의하여 섭씨로 바꾸어 이해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미국의 글로벌 수준이 오히려 뒤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2008년 가을에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가 세계적인 경제불경기를 초래하면서 현재 미국의 경제사정은 좋지 못하다. 미국 전체의 실업률이 약 10%에 이르고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아시아계 이민들을 만나보면 불경기를 한탄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시( 인구 약 10만명 정도의 도시) 의 시내 주요도로를 따라서 다녀보면 많은 가게들이 페업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실업률이 높다보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노숙자들을 양산하게 된다. 아침이나 저녁에 시내 거리를 다녀보면 여기저기에 노숙자들이 밖에서 날을 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의 기독교단체의 사회봉사활동으로 두번 노숙자들은 찾아간 적이 있다. 작년 연말에 버클리시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수용시설에 찾아가서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에 참가했는데 그 시설에만 노숙자가 40여명이 있었다. 이런 시설에 들어가면 기본적인 생계문제는 해결되지만 수용인원과 수용기간이 제한되어 있기에 노숙자문제의 근본적인 대책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금년 봄에 또 한번 공원에 모여있는 노숙자들한테 식사를 제공하고 생활용품을 제공하는 봉사활동에 참가했는데 그 공원에만 노숙자가 수십명은 모여있었다. 특히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노숙자중에는 젋은이가 꽤 있고, 그 들중 마약중독자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마약사용자가 제일 많은 나라로 알려지고 있고, 마약때문에 일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볼 수 있다. 버클리시 주변에는 미국에서도 범죄률이 높다고 알려진 Richmond와Oakland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에서는  마약과 총기에 의해 범죄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개방적이고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나라인가 하면, 다른 한면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선진국중에서는 국민의료보험제도가 뒤떨어지고, 총기와 마약의 문제가 심각한 나라이기도 하다.미국 버클리대학에서       2010년5월4일
11    11.미국에서 살아보니(1) 댓글:  조회:4627  추천:32  2010-03-26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1)                   미국에서 살아보니(1)     개방성이 돋보이는 나라  나는 미국에 온지 이제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미국에서 살면서 내가 지금까지 체험했던 중국, 일본, 한국과 비교하면서 이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보고 있다.   미국에서 받는 제일 강력한 인상이 이 나라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존재하고 세계에 대하여 문호가 항상 열려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면 이 나라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인종이 모여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같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버클리지역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 사람들은 수시로 만나게 되고. 그외에도 중남미나 동아시아, 남아시아 지역 출신 사람들을 어디서도 볼 수 있다. 내가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버클리성인학교의 영어교실에는 중남미지역에서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 제일 많고, 그 외에도 세계 여러나라의 출신들이 모여있다. 버클리성인학교는 두가지 점에서 미국의 개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영어공부를 하려고 등록을 하는 때인데, 등록자의 신분증명서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버클리시에 주민등록을 한 사람이든 안 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받아주고 있고, 미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기서 공부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민간단체가 아니고, 분명히 정부가 운영하는 교육시설이 이처럼 개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점이 놀랍기도 하다. 또 하나는 버클리성인학교의 수강생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온 난민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아마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에서 생긴 난민을 거의 다 여기서 볼수 있는 것 같다.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개방성을 넘어서 미국의 도덕성까지 돋보이게 한다. 일본은 선진국들중에서 난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이고 그 때문에 국제사회의 비판도 받고 있다. 미국이 이민으로 시작된 국가이고, 국토면적이 일본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넓으니 해외인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난민문제에서는 미국의 개방성, 도덕성이 일본에 비해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중국의 국제사회의 위상이 높아지고 때마침 미국의 경제위기로 인하여 중국의 존재감이 커져보이는 때인데, 개방성에 있어서는 중국이 미국에서 배워야 할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 단지 경제활동을 개방하여 세계의 기업들이 돈벌기 좋은 그런 나라가 아니라, 진정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에 대하여 개방하고, 절박한 상황에 빠진 난민들이 중국을 안식처로 여기는 그런 때에 중국의 국제적인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개방성을 엿볼수 있는 사례가 더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가면 여기저기에 중국의 국기인 오성붉은기와 대만의 청천백일기가 걸려있다. 중국대륙계단체는 오성홍기를 걸고, 대만계단체는 청천백일기를 거는데, 어느 단체인든 거의 다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들로 구성되었겠는데 이렇게 버젓하게 제 모국의 깃발을 걸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캘리포니아주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Santa Barbara군에 Solvang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1911년에 미국으로 집단이민을 온 덴마크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을이라 한다. 마을 전체가 덴마크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미국속의 덴마크촌이라 할수 있는데 덴마크의 쿠키나 요리로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 마을 도처에 미국 성조기와 나란히 덴마크 국기가 걸려있는데, 덴마크의 특색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모국의  주권의 상징물을 미국속에서 버젓히 걸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미국 사회가 개방이 되어 있고, 관용의 정신이 살아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개방성이 돋보이는 나라가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에 대한 집착이 두드러지는 점이 의아스럽다. 미국에 와보면 정부의 공공기관같은데는 거의다 성조 기가 걸려있고 민간회사나 개인주택들에도 굳이 국가적인 축제일이 아니어도 성조기가 걸려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세계 수많은 나라중에서 미국처럼 국기 가 많이 사용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런 경향은 2001년의 ‘9,1 테러사건’ 이후에 강화됐다는 설도 있지만,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민을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로는 통합이 어려우니 그 대신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국기가 유난히 강조되는 아닌가 생각된다.       일상생활을 통해보는 이모저모    미국에 대하여 좋게 보고 싶은 점이 더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보면 장애자에 대한 배려가 철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버스마다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어, 장애자나 노인들이 훨체어를 타고 오르내릴수 있다. 일본의 공공교통도 장애자나 노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데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버스에 리프트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도 대체로 공간이 크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것은 훨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화장실 사용을 쉽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사용을 권장하는 취지라고 생각되는데 전철에 자전거를 가지고 탈수 있고, 모든 버스마다  앞면에는 자전거를 적재할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져 있다. 이런 면에서는 인권을 중시하고, 친환경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선진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쓰러기수거를 보면, 버리는 것과 재활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하게 나누어져 있어, 일본이나 한국처럼 쓰러기수거가 세분화되어 있는 않은 면도 보인다. 미국에서 반년넘게 살면서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총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국 생활이 짧아서 그렇거니 하는 생각도 하지만 수년이상씩 살고 있는 유학생들도 총에 대한 두려움을 다들 어느 정도 갖고 있다. 내가 미국에 와서도 총기난사사건이 여러번 발생했는데 아마 이 것은 미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 할수 있다. 그 때문에 밤에 나다니려면 항상 무서움이 든다. 오바마대통령이 100년만에 미국의 국민의료건강보험제를 실현했다고 평가받는데 총기 규제에서도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역설적으로 총이 보급돼 있으니 일반민가에서 주택의 보안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도적이 남의 건물에 잘 못 들어갔다가는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 그리 쉽사리 건물에 침입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미국의 공공서비스는 어떤가. 너무 나무람 할 것까지는 보이지 않는데, 일본이나 한국에 비하면 세심함 배려는 모자라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온라인으로 구입했는데 그 것을 배달받는데 한창 신경이 쓰였다. 택비회사에서 처음 물건을 배달해왔을 때 내가 마침 아파트에 없어서 메모를 남겨두고 갔는데 거기에 내일 다시 배달한다고만 적었기에, 어느 시간대에 가져오는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두번 째 배달도 받지 못하고 세번 째에야 물건을 받을 수 있었다. 세번 째에도 손님이 물건을 받지 못하면 자기절로 택배회사에 물건을 찾으러 가야 한다. 같은 경우 일본같으면 손님과 연락을 취하여 손님이 배달받을 수 있는 시간을 약정하여 가져다 주니 이런 번거로움이 거의 없다. 일본에서 배편으로 보내온 서류박스를 배달받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있어 시간이 많이 걸렸다.
10    뜻깊게 지낸 추수감사절 댓글:  조회:7119  추천:36  2009-12-2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0)                    뜻깊게 지낸 추수감사절   차고에서 시작한 거대한 사업   11월26일은 내가 미국에서 처음 맞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추수감사절은 미국과 캐나다 특유의 명절이고, 동양에서 추석 또는 중추절(中秋節) 이 그러하듯이 여기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서 명절을 즐겁게 쉰다고 한다. 미국에서 처음 맞는 추수감사절을 혼자서 어떻게 지낼가 은근히 근심했는데 캘리포니아지역에서 활동하는 대만계 기독교봉사단체의 도움으로 UC버클리(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의 중국방문학자들과 같이 추수감사절 하루를 뜻 깊게 지냈다.   추수감사절 아침에 중국에서 온 방문학자 10여명이 Union City  전철역에 모이니 보우(輔友)센터라고 불리우는 대만계 기독교봉사단체의 관계자들이 승용차 3대를 가지고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처음 간 곳이 스탠퍼드대학 근처에 있는 휴렛패커드(HP)회사의 사업의 시초가 된 차고(車庫)였다.   1939에 휴렛과 패커드라는 두 대학생 친구가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에서 단돈 538딸러를 들고 민간주택의 자그마한 차고를 임대하여 음향발진기를 연구제작한 것이 휴렛패커드회사의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지금에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잘 알려진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으니 미국 현대산업사의 하나의 징표라 할수 있겠다. 이 차고는 현재 미국 연방정부의 역사적기념명소로 지정되어 있고,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로 불리운다고 한다.   이 차고를 보고나서 나는 거대한 사업이 꼭 거창하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속담이 있다싶이 작은 출발이 거대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상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시작이 맹목적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거기엔 창의력과 열정이 따라야 하고 성공으로 이어지자면 지속적인 노력이 따라야 한다.   스탠퍼드대학과 UC버클리 캠퍼스   휴렛패커드(HP)의 차고견학을 마치고 나서 우리 일행은 스탠퍼드대학 갬퍼스로 향했다. 스탠퍼드대학은 1891년에 설립되었는데,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과 더불어 Big4로 불리우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이고, 캠퍼스가 크기로도 유명하다. 대학 캠퍼스가 약 8000에이커라고 하는데 알기쉽게 말하면 서울 여의도의 10배 정도이니 그 크기를 상상할만하다.   우리는 승요차로 대학 캠퍼스에 들어섰는데 입구에서부터 본관 건물까지 약 2킬로 정도 되는 공간에 건물하나 없이 나무와 꽃, 잔디가 잘 어우려져 아주 큰 공원에 들어선 감이 들었다. 캠퍼스 진입로 양측에는 남방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종려수가 가지런히 늘어서  캠퍼스의 아름다움을 한결 돋구었다.   진입로를 다 통과하면 커다란 잔디밭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그리 높지 않은 고풍스러운 본관 건물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심에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교회는 기독교의 모든 종파가 집회를 가질수 있는 열려진 종교시설이라 한다.     스탠퍼드대학의 건물들은 대체로 황색 벽에 붉그스레한 색갈의 기와가 특징이고, 캠퍼스 전체가 어딘가 고풍스러움면서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미국의 대학들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캠퍼스라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본관건물 앞 잔디밭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조각상 이 서있었는데 인간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고뇌를 잘 표현한 예술작품이 스탠퍼드대학 캠퍼스의 인문경관을  빛나게 하였다.   스탠퍼드대학 캠퍼스를 보고나서 내가 현재 방문학자로 있는 UC버클리 캠퍼스와 비교를 해보게 되었다. 1868년에 설립된 UC버클리는 스탠퍼드대학과 달리 캠퍼스가 건물의 모양이나 색채가 통일을 이루지 않고 가지각색이고 한눈에 띄우는 특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부지가 너무 크지는 않은데 건물이 많이 들어섰기에 캠퍼스가 어딘가 비좁아 보인다. 스탠퍼드대학 캠퍼스가  계획스럽게 만들어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반면, UC버클리 캠퍼스는 좀 산만해보인다. 그러나 100년이상 되어 보이는 고목들이 두개로 갈라진 자그만한 계곡을  따라 울창하게 들어서 마치도 북미대륙의 원시림속에 캠퍼스가 들어있는 느낌도 들며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이라는 것을 감지시킨다.     스탠퍼드대학 캠퍼스의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조각상이 유명하다면 UC버클리의 캠퍼스입구에 세워진 조각상도 꽤 인상적이다. 스페인의 탐험가 Pedro Fages (1734~1794) 가 1760~80년대에 캘리포니아지역을 탐험하고 개척한 사실을 형상화한 조각상인데, 지구덩어리를 둘로 쪼개여 그 내부를 보여주는 조각상이 인간의 과감한 도전정신을 잘 표현하였다.        UC버클리는 구속이 없는 자유분방함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캠퍼스의  경관속에도 그런 분위기가 녹아 있는 것 같다.                 실리콘밸리에서 말타고 꽃구경   오후에는 실리콘밸리에 소재한 정보통신회사 몇 곳을 둘러보았다. 썬마이클로시스템즈, 인텔, 브로드콤, 야후, 애플컴퓨터 등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글로벌기업의 본사였는데 추수감사절 휴일이여서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하고 회사외관만 구경하였다. 다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의 본사인데 건물들이 5,6층 정도로 그리 높거나 크지도 않았고. 울타리가 없어 외부인들이 회사건물에 비교적 자유롭게 접근할수 있었다. 건물내부를 둘러보지 못하여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외관만 보면 건물들이 명성에 비하여 수수하게 지어졌고. 개방성이 특징이었다.   실리콘밸리에는 수많은 첨단기술업체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이런데서 기술개발을 하는 사람들은 인도인과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외국의 두뇌를 잘 활용하는 미국의 한 모습이 보여졌다.   여러 회사를 견학하면서 차로 실리콘밸리 지역을 달려보니 내가 살고 있는 버클리시보다 거리가 새롭고 환해보였으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들이 눈에 띄었다. 실리콘밸리라는 명성답게 이 지역의 생활수준도 상당히 높은 것 같았다. 우리는 실리폰밸리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공원에도 들렀는데 공원속에 교회가 있고, 교회 앞마당에는 스텐레스로 조형한 성모(聖母)상이 세워져있었다. 스텐레스의 성모상은 처음 보는데 역시 첨단기술도시 다운 조형물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의 열정   추수감사절에 우리에게 스탠퍼드대학과 실리콘밸리 견학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대만계 기독교봉사단체 보우(輔友)센터였다. 보우센터는 중국대륙에서 온 학자, 유학생들에게 저렴한 숙사를 제공해주고 생활상의 편리를 도모해주는 봉사단체인데 1987년에 성립되여 지금까지 많은 선행을 해왔다. 이번 추수 감사절에도 이 단체의 성원들이 서로 분담하면서 10여명이나 되는 중국 방문학자들을 하루 종일 안내해주고 자택에 청하여 점심과 저녁식사까지 대접해주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어 보니 점심식사를 제공해준 분은 중국 광동출신인데 문화대혁명때 강을 헤염쳐 건너 홍콩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분은 아버지가 국민당의 군인이었는데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여 고향인 중경을 떠나 대만으로 갔다고 한다. 듣고 보면 중국 대륙에 좋은 기억만이 있는 분들이 아닌데도 거기서 온 젋은 학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많이 도모해주고 있다. 같은 중국인이라는 동포의 정에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좋은 분들이었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의 자녀교육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미국의 화인(華人) 이민 1세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못하고 막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미국에 정착했지만 자녀 교육에는 남다른 정성을 들였고, 그 때문에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미국의 주류사회로의 진출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자녀 교육에 중시를 돌리는 것은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인들의 공통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2009년11월30일) 
9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댓글:  조회:7062  추천:55  2009-12-2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9)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연변에서 근심하는 조선의 농사 연변은 중국에서도 조선(북한) 정보가 제일 집중되는 지역이다. 길이가 거의 600km에 이르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데다, 연변의 다수의 조선족이 조선에 친척을 두고 있어 인적왕래가 빈번하다. 두만강변을 따라 여행해보면, 강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데다 양측에 다 같은 민족이 살고 있고, 자연경관과 건축양식이 너무 비슷하여 이 강이 과연 두나라를 가르는 국경인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두만강 상류지역은 도랑물 정도로 졻은 곳도 있어 훌쩍 건너뛰어도 국경을 넘을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에게 제일 심각하게 들리는 정보가 조선의 식량난이다. 조선의 식량난은 한해,두해의 일이 아니고 이제는 20여년도 훌쩍 넘게 지속해오고 있는 문제이다. 연변지역에 자연재해가 들면 사람들은 오히려 조선의 농사를 더 근심하곤 한다. 지리적으로 가깝기에 연변에 자연재해가 들면 당연히 강너머 조선에서도 비슷한 자연재해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연재해가 들어도 연변에서는 기근까지는 근심하지 않는데 조선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조건도 비슷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분명 다 같은 민족인데 한쪽은 20여년전에 이미 보릿고개를 넘겼고, 한쪽은 아직도 애달픈 굶주림을 면치못하여 외부의 식량원조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금년은 특히 80년만의 대흉년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조선의 식량난이 더욱 걱정된다.      가족도급제가 바꾼 중국 농촌 20여년전까지는  연변이나 조선이나 식량조건이 그리 차가 나는 것이 아니여서 연변의 농가에서는 겨울에는 강냉이죽으로 하루 두때씩 에우고, 봄에는 양식이 모자라 배급을 받는 도시의 사람들한테 가서 강냉이나 조를 꾸어다 가을에 쌀로 되갚는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경부터 연변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우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부터 나는 연변을 떠나 장춘에 가서 대학교에 다녔는데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집에 돌아오니 올해부터는 강아지에게 남은 밥을 먹이고 있고, 창고에 콩기름이 큰 통 하나에 들어있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어쩌면 1년사이에 이렇게도 큰 변화가 생긴다는 말인가. 정말 믿기 어려운 변화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인민공사(人民公社)의 생산대(生産隊)에서 한 가족이 한해 분배받는 콩기름이 겨우 유리병으로 두병(2kg정도)밖에 안되어 집에 손님이나 와야 기름맛이라도 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양식사정도 항상 여의치 않아 쌀밥을 마음 껏 먹어볼때가 별로 없었다. 1982년의 연변 농촌의 제일 큰 변화는 사회주의 집단농장제인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사실상 해체되고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토지소유는 국유이지만 땅을 가족별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개인이 영농을 할수 있게 한 것이다. 생산책임제라고 불린 이 농업정책으로 중국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보릿고개란 말이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가족별로 영농을 하는 생산책임제가 중국에서 처음 도입된 것은 1978년인데 그해 안휘성(安徽省)성 한 마을의 농민 18명이 인민공사의 집단영농에 의한 피페에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불법으로 시작한 것이 가족도급제에 의한 영농이었다. 이 가족 도급제가 급기야 안휘성, 사천성(四川省)의 농촌에서 보급되기 시작하고 중국 공산당에서도 농촌의 가족도급제 성과를 인정하여 전국 농촌에 보급을 권장하게 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소속되어 있는 길림성(吉林省)은 그 때까지 극좌적인 사상이 남아있어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가족도급제가 수년 정도 뒤늦게 시작됐다. 1981년에 우선 인민공사의 생산대 산하에  몇 가족씩 팀을 이룬 영농을 시험했는데 중국 농촌에서 일어난 가족도급제의 혁명적인 대세를 따라 이듬해에는 김림성 전지역에서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다.    가족도급제가 실시된 첫해 봄에 연변의 농촌에서도 말썽이 꽤 많았다. 인민공사에 집중된 농촌의 재산을 나누어가지는 과정에서 수십년간 이루어놓은 사회주의 성과를 다 말아먹는다든가, 이것이 자본주의 시작이라는 불평도 들렸다. 이런 불평은  대체 인민공사의 집단농장 체제하에서 간부로 일하면서 쉽게 살았던 사람들한테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가족도급제에 의한 개인영농이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생산량으로 나타났기에 가족도급제는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연변에서 가정도급제가 실시되던 수년간 농가 사람들은 한뙈기라도 논과 밭을 더 다루려 애쓰고 서로 경쟁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다. 마침 하늘도 도왔는지 중국의 농촌은 자연재해 없이 수년간 대풍년을 맞이하였다. 이 때부터 농촌에서는 다각경영을 하여 연간수입이 인민페로 만원을 넘기는 부유한 농가 ‘만원호’ 가 속출하기 시작하였고, ‘향진기업’이라 불리우는 농촌기업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창도한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실상 농촌의 체제개혁에서 시작되었고, 그 것이 오늘의 중국을 번영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의 농촌에서는 80년대에 보릿고개 문제를 기본상 해결하였던 것이다.   실패로 끝난 인민공사 그러면 그 이전의 인민공사 체제하의 집단영농은 어떠하였는가? 사회주의 체제하의 중국 농촌에서 합작사란 이름의 집단농장제가 실시된 것이 1953년부터이다. 1958년부터 합작사의 집단농장 체제를 보다 강화한 인민공사가 성립되고 ‘대약진’이라는 극좌적인 사회운동이 수년간 진행되었다. 이 ‘대약진’ 기간에는 농촌의 가정에 식량이 배급되지 않고 인민공사의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하는 극단적인 방식이 실시되었는데 그 당시 중국전역에서 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속촐하였고 연변에서도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철이 들었던 70년대에도 연변의 농촌은 인민공사의 체제하에 전적으로 정부의 방침과 동원에 의한 영농이었다. 봄이면 6월중순까지 모내기를 끊내라는 정부의 지침이 층층의 회의를 통하여 전달되고, 학생들과 도시의 노동자들을 총동원하여 모내기를 도왔다. 그래도 기한대로 모내기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어느 산지가 많은 지역의 다락밭이 전국농촌의 모델로 인정되어 전국적으로 다락밭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 연변에서도 멀쩡한 땅을 파혀쳐 다락밭으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인민공사 체제하의 연변농촌을 보면, 인민공사 본부에 공산당 서기, 부서기 등 생산직을 이탈한 간부가 여러명 있는데다 마을마다 생산대대가 있어 서기, 부서기 등 반전직간부가 또 여러명 있고, 생산대대 산하의 생산대마다 대장,부녀대장,회계 등 간부가 다수 있었다. 농촌의 영농은 생산대 단위로 집단으로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농사 계획은 상부의 지시와 동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다니 정작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의 영농의지와 창의성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여 인민공사는 결국엔 실패로 인정되였고, 1978년경부터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도 중국과 비슷한 집단농장제를 실시하였다가 실패로 인정되어 개인영농제로 바꾼 경험을 갖고 있다. 북부베트남에서는 1960년부터 농촌의  합작사를 시작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룬 후 북부베트남의 집단농장제를 남부에도 실시하였다가 그 실패가 인정되어 1988년부터 전국농촌에서 생산물책임제에 의한 개인영농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 이듬해부터 베트남은 쌀 수출국이 되어 농촌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를 과시하게 되었다.   조선에도 농업체제의 개혁이 필요 중국과 베트남의 집단농장제가 기본상 실패하고 개인영농제가 성공한 실례를 보면, 농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이 땅의 주인이 되고, 농민들의 노동의욕과 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주요한 농사철마다 조선에서는 학생들과 노동자, 군인들이 농사일에 동원된다는 뉴스가 종종 들린다. 정부에서는 해마다 식량생산 얼마라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인민들을 동원시킨다. 그러고도 식량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보고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에서 이미 실패를 인정한 집단농장제를 해체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 식량난의 근본원인이라 생각된다. 결코 비료가 모자라거나 생산설비가 따라 못가는 문제만이 아니다. 과감한 발상전환에 의한 농업체제의 개혁을 조선에 진심으로 바라는바이다. (2009년11월11일)
8    동아시아 대학의 국제화 댓글:  조회:7045  추천:37  2009-12-22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8)      UC버클리에서 생각하는 동아시아 대학의 국제화     UC버클리의 국제화  노벨상 수상자수나 국제적인 대학평가에서 미국은 항상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미국의 고등교육 수준이 높다는 의미인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미국에 와 있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다. 나는 미국 대학들의 높은 국제화 수준이 그 원인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약 60만명 정도의 외국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학자들이 모여오고 있다. 또 미국은 외국에서 모여온 두뇌를 활용하기로도 유명한 나라이다.   내가 방문학자로 와 있는 UC버클리는 미국의 명문대학교중의 하나인데, 이 대학교의 2008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재학생이 35,000명이상 이고 그중에 아시아계의 학생비중이 40% 정도이며, 외국국적 유학생수 2,700여명, 외국국적 방문학자가 약 2,800여명이 된다고 한다. 미국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이라 여러인종의 학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외에 외국국적의 유학생수, 방문학자수가 수천명씩 된다는 것은 놀라울만한 수치이다.     대학의 국제화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유학생수, 외국인 교수・방문학자수가 중요한 척도라 할수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UC버클리는 동아시아의 어느 대학들보다도 국제화에서 앞서 있다고 볼수 있다.  이만큼 세계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오니 대학의 강의가 활기를  띄게 되고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이 수시로 접촉하고 교류하게 된다.      동아시아에서의 대학의 국제화     동아시아의 대학들에서도 국제화는 주요화두이고 여러 방법을 통하여 추진되고 있다.   수선 각 대학들에서 유학생 유치에 공력을 많이 들이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를 보면, 명문대학들은 해외 우수인재의 유치와 대학의 국제평가를 높이는 수단으로 유학생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고, 보통수준의 사립대학들은 학생수를 충원하는 차원에서 해외유학생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유학생들에 대하여 각종 우혜조치를 취하거나 유학생을 많이 송출하는 나라에 대학사무소를 개설하는 경우도 보인다. 이런한 노력에 힘을 얻어 근년에 일본의 외국유학생수가 10만명,  한국의 외국유학생수가 6만명을 넘어섰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발전과 세계적인 중국어붐 덕에 2008년에 22만명을 넘는 외국유학생을 받아들이면서 세계 유수의 유학생 수입국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경우, 유학생의 국적별로 보면 현저한 편향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10만명이 넘는 외국유학생의 80% 이상이 중국・대만, 한국에 집중해 있다. 한국은 6만명 넘는 외국유학생의 3분의 2 이상이 중국출신이라 한다. 중국의 경우 외국유학생의 국적이 다양한 편이나 (중국에 유학하는 학생수가 많은 나라는 한국, 일본, 미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다), 중국어 연수만이 아니고 중국에서 대학의 정규과정을 공부하는 유학생은 아무래도 한국, 일본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미국 대학들의 유학생 국적이 비교적 다양한데 비하면 현저한 대조가 된다. 왜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여기에는 미국 대학들의 교육수준이 높다는 요인외에 영어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이미 영어가 국제공용어가 되었으니 비영어권의 나라들에서도 영어권에 유학을 하면 언어적인 장애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리고 국제공용어인 영어를 잘 배울수 있다는 이점도 생긴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중국, 일본, 한국으로 유학을 할 경우, 해당국가의 언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대학들이 세계에서 널리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바로 이런 언어적인 장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면에서는 영어권의 대학들이 언어적인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영어는 해외유학생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대학들의 교유수준을 높이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국제적인 대학랭킹 평가에서 홍콩이나 싱가폴 대학들의 평가가 중국, 일본,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은 이들 대학들이 영어로 강의를 하고,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기에 국제적인 평가기준에 보다 접근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교육수준, 연구능력에 있어서 중국, 한국, 일본의 대학들의 수준이 낮은것은 아니지만, 국제공용어가 된 영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가지고 있는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언어적인 장벽을 없애려고 중국, 일본, 한국의 명문대학들에서는 영어강의를 늘리려 노력하고 있다. 100% 영어로 강의를 시도하는 대학도 있고, 학부나 전공에 따라 100% 영어강의를 도입하는 대학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대학들에서는 학생들이 해외연수를 많이 나가고 있는데, 이 경우도 영어연수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대학들 사이에서는 학생간의 상호교류 프로그램도 영어로 운영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문과 한자를 매개로 한 필담이 의사소통의 주요수단이였지만, 이제는 영어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동아시아 대학들의 영어강의 실태를 보면, 이공계열이나 경제학, 벌률 등 사회과학 분야는 그래도 실시하기가 쉬운 편이지만 인문과학 분야는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전통을 이루어오고 있기에 영어강의가 쉬운 편이 아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영어강의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비판도 자주 들린다. 그래도 현재의 국제사회의 현실에서는 영어가 의사소통의 필수수단이 되었기에 영어교육을 피해서는 동아시아 대학들의 국제화를 추진하기가 어렵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대학의 영어강의를 늘리고, 국제사회에서 영어로 의사소통하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는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동아시아 대학들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라 할수 있다.     (2009년11월8일)
7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 표기법의 혼돈 댓글:  조회:7574  추천:47  2009-12-1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7)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 표기법의 혼돈 북경올림픽에서 드러낸 혼돈의 극치나는 작년 8월의 북경올림픽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의 중국 지명, 인명에 대한 표기법을 음미해보았다.그 당시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북경올림픽 주경기장을 ‘궈자티위창’, 그 애칭을 ‘냐오차오’라고 불렀는데 과연 이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중국어로는 ‘國家體育場’, ‘鳥巢’ 이니 ‘국가체육관’  ‘새 둥지’ 라고 한국어로 알기 쉽게 풀어서 부룰수 있는데 고유명칭도 아닌 것을 하필 한국 독자에게는 의미불명한 중국어로 불러야 하는가 말이다. 일본에서 같은 명칭을 어떻게 부르는가 관찰했더니, ‘국가스타디움’  ‘새 둥지’라고  풀어서 불렀고, 영어권에서도 ‘National Stadium’, ‘The Bird’s Nest’라고 불렀다. 북경올림픽 기간 이런 식으로 외래어도 아닌 의미모호한 용어를 사용한 나라는 아마 드물 것이다. 한국에서는 1989년부터 현대 중국의 인명, 지명을 중국어 표기에 따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1986년에 당시의 한국 문교부가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중국의 인명에 대하여 1911년의 중국의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한국의 한자음으로, 그 이후에는 중국어 표기에 따라 부르기로 하고, 중국의 지명에 대하여서도 역사적 지명은 한국의 한자음으로, 현재의 지명에 대해서는 중국어 표기대로 부르기로 규정되어 있다. 일본의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구별이 없이 일본어 표기대로 부르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한 이상의 규범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특성과 한국의 한자음의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치 않은 면이 있고, 그 때문에 사용과정에서 혼돈이 잘 빚어지고 있다. 북경올림픽 주경기장을  ‘궈자티위창’, ‘냐오차오’라고 부르는 점이 이러한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한국의 언론 매체에서는 중국의 꼭 고유명사가 아닌 단체명칭이나 시설명칭도 원음으로, 예를 들면 ‘환츄스보’ 라거나 ‘궁런체육관’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환구시보’(環球時報)  ‘노동자 체육관’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기 쉽다. 중국과의 체육경기를 보고할 때도 중국팀의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닌데도 원음으로만 표기하니 독자들이 무엇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하기 어렵다. 이러한 혼돈은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의 표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라 볼 수 있다. 한국은 중국의 한자를 독자적인 한자음으로 수용하여 사용한 전통이 있는데, 현대의 중국 인명, 지명을 너무 지나치게 중국어 원음대로 받아들이느라면 한자음의 전통 가치가 무색해질 우려도 생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젊은층을 상대로 한 “삼국지” 만화에서는 그 속의 인명과 지명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 예를 더 들면, 2007년에 중국에서 달탐사로켓 ‘嫦娥1호’를 발사했을때 한국에서는 ‘창어1호’ 라고 표기했는데, ‘상아’의 전설은 한국의 고전에서도 알려진 이야기이기에  ‘상아1호’ 라고 부를수 있는 명칭이고  그것이 한국사람들에게 알기도 쉽다. 일본에 대해서 인명과 지명을 일본어 원음대로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지나친 현상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단련’ 이라고 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약칭을  ‘게이단렌’이라 하고 ‘시사통신’(時事通信)을 ‘지지통신’ 이라고 일본어 원음대로 부르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일본, 조선, 중국 조선족은 한자음을 고수그럼 일본에서는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일본의 한자음에 따라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 여름의 북경 올림픽 보도에서 보면 일본 TV에서는 중국 선수들의 이름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영문으로 표시하면서도 아나운서는 일일히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고쳐서 불렀다. 국제스포츠대회에서 중국선수는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표시하고 나오는데 일본에서는 그때마다 일본식 한자음으로 고쳐서 부르고 있다. 스피드가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번거로움도 문제가 아닐수는 없다. 일본에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일본에 있을 때는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일본어 한자음으로 익혔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중국어 원음대로 표기하니 이해가 힘들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무조건 중국의 인명, 지명을 자국의 한자음으로 부르는데도 일종의 모순은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을 느끼기에 내가 2005년에 일본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공항에서 중국 광주의 백운 (白雲)공항으로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도착하게 되는 공항의 명칭에 대하여 일본의 한자어 발음인 ‘하쿠인’, 중국어 발음인 ‘빠이윈’ 이라는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었다. 일본의 “아시히신문” 에서는 최근년에는 현대중국의 인명에 관해서는 중국어 표기법에 따르려고 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에서는 아주 소수이다.  조선(북한)에서는 중국의 인명, 지명을 어떻게 부르고 있느가? 조선에서는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한자음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대해서는 ‘베이징’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대 국가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원음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 조선의 항일빨찌산들의 회억록을 읽어보면, 중국 만주의 지명에 대해서 사람에 따라서는 한자음으로, 또는 원음으로 적은 경우도 보인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자로 재듯 하나로 통일하기 힘든 것 같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한자음을 따르고 있다. 1980년대에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도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지만, 혼용을 하면 중국속에 사는 상황에서 조선어의 정체성에 혼돈이 생긴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한글전용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의 언어환경에서는 주류언어인 한어(중국어)에서 수시로 새로온 용어를 받아들이어야 한다. 그 때마다 힘들지만 원음대로 표기하면서 외래어가 아니고 조선어로서 번역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 입장에서 보면, 모국인 한국에서 조선족의 이름을 중국어 발음에 따라 부르고, ‘연변’을 ‘얜뺀’이라 하고, 한국 근대사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용정’마저 ‘룽징’이라 부를때에는 우리가 왜서 조선어를 지켜야하는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보편성이 없는 원음주의얼핏보면 한자문화권외에는 세계에서 원음주의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각 나라마다 철저한 원음주의보다 자기들이 부르기 쉽게 부르고 있다.서양의 예를 들면,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에 대하여 영어에서는 ‘페리스’, 독일에서는 ‘파리스’, 이탈리아에서는 ‘Parighi’ 라고 하여 원음으로 통일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작곡가 ‘모차르트(Mozark’에 대하여 영어에서는 ‘모우자아트’, 프랑스에서는 ‘모자아’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유럽화페인 ‘유로(Euro)’에 대하여서도 영어에서는 ‘유로’이지만, 독일에서는 ‘오이’, 프랑스에서는 ‘외로’, 이탈리아에서는 ‘에우로’ 라고 부른다 한다. 영어에서의 중국의 지명 호칭에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수 있다. 영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북경’을 ‘Peking’, ‘남경’을 ‘Nanking’이라 하고,  ‘청도맥주’라는‘청도’를 ‘Tsingtao’, ‘청화대학’이라는 ‘청화’를 ‘Tsinghua’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현재 중국어 발음과 일치하지 않으나 관습을 존중하여 그대로 부르고 있고, 중국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한국의 한자음으로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는 원음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한 원음주의 표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한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중국어 발음에 따라 부르는데 하필 한국이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상호주의를 포기하면서 중국어 원음에 따라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존재한다.                                 (2009년11월2일)
6    한류에 대하여 댓글:  조회:7017  추천:35  2009-12-10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6)                   한류에 대하여   미국에서 찾아볼수 있는 한류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붐을 이루어 한류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긴지도 10년이나 되었다. 일본의 대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면서 한류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해온 나이기에 미국에서도 한류가 존재하는지 관심이 있다. 미국의 미디어를 관찰해보고 서점이나 비디오가게 같은데 가보아도 아직 미국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붐을 이루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내의 일본계, 중국계 서점이나 비디오 가게를 가보면, 여기서도 아시아인들 사이에 한국의 대중문화가 상당히 인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노래가 일본과 중국, 대만, 홍콩 것과 섞이어 있는데 한국 것의 비중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류의 시작은 중국   중국의 중앙TV에서 1997년에 한국의  인기 드라마「사랑이 뭐길래」(MBC)가  방송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한류붐이 시작되었다. 「사랑이 뭐길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기에 중국의 여러 지방TV에서 재방송을 하면서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때부터 한국의 인기드라마는 대체 중국에서 방송되였다.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2000년대에 여러차려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 때마다, 호텔이나 친지의 집에서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을 목격하고서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인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류」라는 용어도 중국에서 생긴 것이다. 1999년과 2000년 겨울 사이에 당시의 한국의 인기아이돌 그룹인 CORN, H.O.T,NRG가 연이어 베이징에서 대형공연을 하면서 중국의 대중언론매체에서 추운 겨울철에 「寒流」가 베이징을 기습하다는 표현에  빗대여 「韓流」라고 적은 것이 그 시작이다. 중국대륙에서 시작된 한류붐은 같은 중화권인 홍콩, 타이완으로 옮겨지고, 몽골, 베트남으로 퍼지면서 본격적인 한류현상이 생겨났다.   일본에서 절정을 이룬 한류  한류붐이 절정을 이룬 것은 아마 일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1998년에 한국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호평을 얻었고, 2000년, 2001년에는『쉬리』, 『공동경비구JSA』가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래도 일본에서 한류붐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것이 드라마이고, 이미 잘 알려진봐와 같이  『겨울연가』가 그 시초가 되었다. 『겨울연가』는 2003년 여름에 일본 NHK의 위성채널에서 처음 방영하였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사실 나는 그해 여름에 NHK가『겨울연가』를 방송하고 있는 줄 몰랐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교의 학생들과 과목청강생 시민들을 데리고 그해 9월에 한국으로 연수를 다녀왔는데 한 나이든 남성 시민이 연수도중 줄곧 『겨울연가』가 재미있다는 얘기를 했다. 도대체 어떤 드라마이길래 그런 얘기가 나오는가 궁금하던중 일본에 돌아와서『겨울연가로 배우는 한국어』라는 책이 서점에 보이기에 사다가 보기 시작했다. 그 책은 『겨울연가』의 한국어 대본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해설한 것인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너무나도 재미가 있어서 식사시간을 잊으면서 탐독했고, 한동안 그 책을 손에서 놓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마침 일본의NHK가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그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지상파방송으로 『겨울연가』를 집중방송했다.  내가『겨울연가』를 처음 시청한 것이 그 때이고, 그 집중방송이 일본에서『겨울연가』의 인기를 폭팔적으로 높였고, 한류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상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무렵의 일본의 한류붐은 가히 놀라다고 할 정도였다. 도쿄의 신주쿠에 한국가게가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코리아프라자라는 한국 비디오 가게가 있다.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방송되기 이전에는 그 가게의 손님이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는데 2003년 연말경부터 불시에 일본의 한류팬 여성들이 모여들면서 붐비기 시작했고, 한 때는 이 가게의 매장에 전국각지로 발송하는『겨울연가』의 DVD가 산더미처럼  쌓여었다. 한류붐 덕분에 이 가게가 있는 지역이 근년에 급속하게 팽창하여 이제는 명실공히 코리아타운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겨울연가』는 2003년, 2004년 사이에  NHK에서 3번이나 재방송 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드라마의 주인공 배용준과 최지우가 일본의 국민배우라도 된 듯이 인기를 얻어갔다.   이제는 일본에서 한류붐이 시들해졌다는 분석도 있는데, 일본의 비디오 가게들에 가보면, 한국드라마,영화 코너가 별도로 크게 만들어져있고, 한류붐 이전의 90년대 초중기의 한국드라마까지 발굴하여 판매하는 것을 보면 일시적 유행같은 붐은 표면상 사라졌지만, 한류의 고정팬이 많이 남아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어공부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사이클처럼 도는 대중문화 붐   한류붐이 불시에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나니 한국의 미디어에서 너무 과대하게 보도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이 이 지역에 2차대전이후 여러차려 서로 다른 대중문화의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자유주의 국가에 헐리우드 영화, 재즈음악, 애니메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70년대에 홍콩의 무술, 오락영화,,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영화, 드라마, 가요, 만화, 애니메가 이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한류도 결국 이런 대중문화의 영향과 전파라는 차원에서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한국으로 여행해보면 한국인들의 옷차림이나 건축물들이 화사하고 다채로와 보인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국민성을 지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류는 꽤 오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2009년10월29일)
5    인천대교의 개통을 바라보며 (김광림) 댓글:  조회:5244  추천:36  2009-12-06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5)               인천대교의 개통을 바라보며   한국의 새로운 랜드마크 인천대교가 이달 16일에 개통되어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4년4개월간에 걸친 인천대교의 건설과정에 한국에 자주 드나드면서 이 대교가 만들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나로서도 감회가 깊다. 인천대교의 개통은 한국에 두가지 의미를 가져다준다.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눈에 들어올만한 인상적인 랜드마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길이 21.38km로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긴 다리이고, 사장교의 주탑높이가  238.5m라 하니 가히 웅장한 모습이고,  완만하게 U자형 곡선을 그으면서 서해 바다위를 가로지르는 자태 또 빼어났다 할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할 경우 대체 하늘에서 인천대교가 보인다하고, 인천공항에서 영종대교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경우에도 그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한국에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국가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만리장성이나 천안문하면 누구나 그 이메이지를 쉽게 떠 올리게 되고, 일본도 교토의 사찰이라거나 도쿄타워가 외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년에 서울에 청계천이 복원되고, 서울 도심에 광화문광장이 생기고, 부산에 광안대교가 건설되는 등 한국의 대도시들의 모습이 많이 바뀌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인천대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관문인 인천공항과 인천항 사이에 놓이게 되어 한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제일 처음 볼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이다. 인천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송도, 영종도, 청라에 건설중인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건설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고, 한국이 지향하는 동아시아 물류허브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동아시아 물류허브로서의 가능성 일본에서는 한국의 항공, 물류산업의 급속한 성장세에 충격을 받고 있다.  일본 NHK의 보도에 의하면, 최근년에 매년 약 15만명의 일본인들이 일본의 지방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을 거쳐 유럽이나 동남아로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국내교통편으로 멀리 도쿄나 오오사카까지 가서 거기서 해외로 나가기보다 지방공항을 이용하여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해외로 가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줄이게 된다. 나도 일본 니가타에서 중국으로 여러차려 다녀왔는데 도쿄에 가서 중국항공사나 일본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가기보다 니가타에서 대한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가서 다시 중국으로 가는 것이 편리하고 비용도 저렴하였다. 현재 인천국제공항에서 해외 161개 도시로 항공편이 통하고 있다하는데, 이것은 일본의 나리타국제공항이나 간사이국제공항에 비하여도 이변성이 단연 돋보이고 있다. 2008년 실적으로 보면 인천국제공항의 국제화물취급양은 238만톤으로 세계2위라하고, 환적화물비율도 동아시아에서 제1위라 한다. 인천국제공항은 국제공항협회의 공항서비스평가에서도 2005년부터 연속 4년간 최우수평가를 받아, 공항의 인지도가 한결 높아지고 있다. 일본 지방도시의 승객들이 대량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몰리는 현상에 자극을 받아, 일본에서는 국내선중심인 도쿄의 하네다공항을 24시간 이용가능한 동아시아 허브공항으로 육성하자는 제안이 최근 국토교통대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장기적으로 보아도 일본이나 중국의 지방도시에서 해외나들이 할 경우 인천공항 이상의 대안이 없을 듯 하다. 인천국제공항을 배경으로 송도, 영종도, 청라에 동북아시아 새로운 경제도시를 지향하는 종합프로젝트가 진행중인데 이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는 아직 속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항공, 물류산업에서 보면 인천국제공항은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고,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는 인천항의 장래도 밝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부산항의 발전도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2005년의 일본 5대항구의 국제화물 취급양 전부가 부산항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라는 통계가 나왔고, 그 후에는 일본 4대항구의 국제화물 취급양이 부산항 한 곳보다 적다는 통계도 나왔다. 현재 부산항은 세계 5위의 무역항으로서 동아시아 허부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해가고 있다고 한다. 부산항의 우세도 인천국제공황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일본의 지방항구와 중국 북부지역 항구의 북미, 유럽지역에 대한 수출입 화물이 부산항을 허부항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재는 구상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부산에서 유럽까지 통하는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실현되면, 한반도(조선반도)는 명실공히 항공, 해상, 육상의 동아시아 물류허브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연해지역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신라, 당, 일본 사이의 해상무역을 선도하였고, 그 대표자가 청해진에 거점을 두고 활약한 장보고였다. 조선왕조 시절에는 명나라와 일본사이의 비단과 은 거래가 한반도를 통하여 활발하게 진행된적도 있어 일본의 학자가 그 루트를 실버로드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적인 사례를 보아도 한반도의 동아시아 물류허브로서의 지정학적인 우세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2009년10월26일) 
4    나의 영어공부 댓글:  조회:5542  추천:28  2009-12-02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4)                    나의 영어공부     왕초보인 영어   비영어권에서는 대체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면  중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기 마련이고, 대학교까지 나오면 영어는 꽤 오래배우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이런 상식에 맞지않는 외국어 공부를 했다. 나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기에 중국 연변에서 중등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의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외국어교육으로 거의 일색으로 일본어로 배워주었다. 영어를 가르칠 교원이 없는데다, 일본어를 가르칠 교원은 어느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어가 조선어(한국어)와 언어구조가 비슷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를 잘 알기에 일본어를 배우면, 중국인이나 한국인보다 훨씬 잘 배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계로 나는 중등학교, 고등학교에서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고, 대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전공하였다. 그 덕분에 1988년에 일본에 유학갔을 때 나는 언어장애 를 거의 느껴본 적이 없이 일본에서 순조롭게 적응하였고, 일본인들로부터 항상 일본어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아왔다.   그대신 영어공부에는 너무 소홀했고, 지금 와서는 젊었을 때 영어를 많이 배우지 않을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대학교 2학년에서 3학년사이 제2외국어로서 배웠 는데 그 후에는 대학원 입시공부외에는 영어공부를 지속적으로 안 하다니, 얼마 안 배운 것도 잊어버리기 쉬웠다. 자신의 영어실력이 엉망이라는 자각은 항상 하고 있었으나, 조금씩 하다가 그만두기가 일쑤여서 마치도 다이어트를 수시로 하다가  그만두는 격으로 시간이 지나도 영어가 전혀 늘지 않았다.   나는 2007년 봄에 일본 도쿄의 어느 국제 심포지엄에 갔다가,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사이에서 내가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로는 다 대화가 통하지만, 그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는 내가 끼어들기도 어렵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일본어,한국어,중국어를 다 안다고 하여도 영어를 모르면 국제사회에서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때 절실히 느꼈다.    그 후부터 나는 일본에서 New Concept English라는  교재를 가지고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미국인 강사가 가르치는 영어회화 교실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미국에 왔는데도, 나의 영어실력은 왕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Survival English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이다.   대학교 강의에 나가면 거의다 알아듣지를 못하고, 강연회에 나가도 조크가 나와서 주변에서 와하고 웃을 때도 왜서 웃는지도 몰라서 자기절로 쑥스러워지곤 한다.    아무리 체면이 구겨져도 영어실력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부정못하니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배울 수 밖에 없다.    늦깍이 영어공부   나는 미국에 온 다음 이런 방식으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수선 아침, 저녁으로 일어나거나, 자기전에 TV를 꼭 보고 있다, 아직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광고나 생활정보, 일기예보를 많이 보고 자막이 같이 나오다나니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 잘 알아듣지 못하여도 일단 매일 TV를 보고 있다. 공부가 점점 바빠지니 아파트에서 TV를 볼 시간도 줄어드는데, 그리하여 다른 일을 하면서도 TV를 켜놓고 조금씩이라도 보고 있다.   밖에 나가면 거리, 대학교 캠퍼스, 버스, 전철의 간판이나, 안내문, 광고등을 보고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일단 메모용지에 적어서 전자사전으로 찾아보고 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걸으면서 시간이 나면, 영어회화 CD를 반복하여 듣고 있다. 간단한 영어표현이라도 귀에 못 박힐 정도를 자주 듣느라면 머리속에 들어오게 된다.   낮에는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8차례 강의를 청강하고 있는데, 이 것도 영어공부가 주목적이다. 대체로 아는 내용을 영어로 듣는데 매번 강의마다 새로 배우는 영어 단어가 수두록하다. 그리고 UC버클리의 내가 방문학자로 소속되어 있는 동아시아연구소의 학술세미나에도 자주 나가는데 영어로 하는 강의나 학술세미나에서 아직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고 전체내용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단어는 확실히 늘어나고 있고, 영어로 듣는 시간이 늘어나면 언제가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외국어공부는 수선 많이 듣느라면 귀가 열리고 그 다음 입도 열리는 법이다.   저녁에는 Berkeley Adult School에서 개최하는 영어교실에 가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세시간씩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기초적인 영어, 생활적인 영어를 공부를 한다. 나처럼 영어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Adult School의 영어교육이 너무나도 고맙다. 그러나 같은 영어인데도 대학교 강의에서 배우는 영어와 너무 다른 내용이기에 영어의 다양성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Adult School의 영어교실에서는 영어노래도 자주 배워주는데 노래를 통하여 즐기면서 영어를 배우는 재미도 짭짤하다.   내가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체험했는데 일본의 한류팬 여성들이 한국의 드라마나, 노래를 즐기는 과정에서 한국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이었다. 모든것이 즐기면서 배우는 이상의 효과는 없다. 나도 온 종일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면서 즐기면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나 그러면 학문적인 영어와는 거리가 멀어지니 일단 힘이 들더라도 기초적인 영어, 생활적인 영어, 학문적인 영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다.   40대 중반이 되어 하는 영어공부가 그리 신통치도 않고, 하루 종일 영어와 씨름하다가 저녁에 잘 때가 되면 몸이 해나른해진 것을 느낀다.  그래도 이런 방식 으로 영어공부를 하느라면 일년후에는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겠지 하는 기대감이 부프른다.                                           (2009년10월13일)
3    미국에서 즐기는 아시아적 생활 댓글:  조회:5304  추천:30  2009-11-28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3)          미국에서 즐기는 아시아적 생활   동아시아 식품의 백화점 나는 미국에 올 준비를 하면서 미국에서 어떻게 입에 잘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살겠는가 꽤 근심을 했다. 왜냐하면 나의 주변에서 미국 체험을 해 본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 음식이 별로 맛이 없다는 얘기를 해 왔기때문이다. 그런데 실지 미국으로 와보니 내가 살고 있는 버클리 지역은 완전히 딴 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2분 정도의 지근거리에 Pacific East Mall이라고 하는 중국계의 대형쇼핑센터가 있는데, 여기는 말 그대로 중국인들의 천하이었다. 슈퍼에서 식당, 은행, 약방, 찻집, 서점, 노래방, 여행사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이 중국계 쇼핑센터가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99 Ranch Market라고 하는 슈퍼에는 중화권( 중국,홍콩,대만), 한국, 일본의 식품이 웬간한 것은 거의다  모여있었다. 정말이지 이 슈퍼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에서 이렇게 동아시아 식품을 한 곳에 구전하게 배렬해놓은 슈퍼를 못 보았기 때문이다.       이 슈퍼에는 내가 여지껏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 남방의 음식과 과일이 그득했고, 한국산 참외 같은 과일도 손쉽게 살수 있다. 일본에서 한국산 참외를 사자면 도쿄나 오사카의 한국계 슈퍼에 가야하는데 그 것도 극히 한정된 곳밖에 없다.    나는 이 슈퍼에서 동아시아 식품을 고루 즐기고 있다. 수선 쌀과 차는 일본 것을 구입하고 있다. 일본에 오래 있으면서 일본 맛에 익숙해 있기때문이다. 이 슈퍼에서 인기있는 쌀은 일본 품종을 칼리포니아에서 생산 한 것이고, 일본 녹차도 꽤 인기 있는 것 같다. 요리거리는 중국 것을 사거나,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중국 요리를 사다 먹고 있다. 이 슈퍼에서는 10여종의 중국 요리를 마음대로 골라서 종이팩에 넣어서 구입할 수 있는데, 나는 미국에서 독신생활을 하면서 이런 방식으로 중국요리를 즐기고 있다. 김치나, 고추장, 국거리, 맛내기 등은 한국 것을 사다 먹고 있다.    주말에는 가끔 이 쇼핑센터안의 식당으로 가서 식사도 하는데, 중국계 식당만 해도 여러 곳이 있고, 한국, 일본, 베트남 식당도 있다.    동아시아에 있으면서도 동아시아 식품을 한 곳에서 다 즐기기 어려운데 미국에서 이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놀라움이 아닐수 없다.     일상적인 아시아적 생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약 15분 정도 되는 곳에 일본 식품점과 생활용품점, 식당이 모여있는 곳이 있고, 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 가면 오클랜드에 한국슈퍼, 생활용품점이 있다. 이런 곳에 가면. 일본이나 한국에 간 것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일본적이고, 한국적인 생활환경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San Pablo Avenue라는 큰 거리에 나가면 도로 양옆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세탁소, 맛사지점, 한국 식품점, 일본과 한국의 카라테, 태권도 도장, 일본식 미장원 등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다. 그리고 버클리대학 갬퍼스 주변에는 중국,일본, 한국, 태국,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의 여러나라의 식당들이 즐비하다. 때로는 여기가 과연 미국이 맞는가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미국에 와서 이국적인 위화감을 그리 느끼지 않으면서 아시아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다.     여기의 중국가게에 가면 나에게는 대체로 중국어로 응대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돈 딸러의 중국식 호칭이다. 중국가게에서는 딸러를 중국식으로 왠(圓)이라 하고, 중국 구두어 발음에 따라 콰이(塊) 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센트는 모우(毛)라고 부르고 있다. 우연하게도 미국 딸러와 중국 인민페의 가치가 서로 비슷하여 딸러를 중국 인민페의 호칭으로 불러도 전혀 이상한 감이 없이 자연스럽다. 한국가게에 가도 센트는 한국식으로 전(錢)이라 부르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여기의 중국, 한국, 일본 슈퍼나 식품점에 가보면, 제나라 식품외에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식품을 어느 정도씩 꼭 배렬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보면, 중국 식품점에는 거의다 중국 것, 한국 식품점에는 거의 한국 것만 있는데 식품을 하나만 보아도 미국이 다양한 인종의 나라라는 실감이 든다.                                      (2009년9월23일)     
2    미국의 첫 인상 댓글:  조회:5600  추천:30  2009-11-2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2)              미국의 첫 인상   수수한 외관의 주택들 나는 미국에 온지 이제 20여일 되는데 그사이 버클리의 인근 도시 El Cerrito에서 살면서 버클리,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등 북가주의 제한된 지역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도 미국에 대한 첫 인상은 아주 깊었다.   8월31일에 샌프란시스코공항을 거쳐 El Cerrito 의 아파트에 도착한후, 주변경관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내가 살기로 되어 있는 아파트의 주변은 해안에 가까운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집들이 너무 수수한 외관이어서 어디 창고같아 보였다. 주택가에는 동아시아의 도시에서 보통 보이는 고층아파트가 극히 적었고, 주택도 단층짜리 주택이 아주 많았고, 주택들의 장식미가 전혀 돋보이지 않았다. 나는El Cerrito와 버클리 지역의 주택가를 여러번 둘러봤는데 해안보다 산언덕쪽으로 갈수록 고급 주택가가 널려있었다. 그런데도 대체로 여기의 주택들은 외관의 장식미를 그렇게 추구하지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택속의 정원들도 일본의 정원처럼 아주 아름답게 가꾸어진 것 같지 않았다. 그대신 주택의 실용성을 중시하는 듯 했고, 주택가에 녹음이 많아 삷의 환경은 아주 쾌적해보였다. 버클리힐즈라고 불리우는 산억덕의 주택가를 가보고는 울창한 녹음속에 둘러싸인 쾌적한 환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일본에서 도쿄의 고급주택가를 여러 곳 가보았는데 여기처럼 녹음이 많은 주택가를 본 적이 없다. 주택의 외관은 수수하더라도, 생활의 실용성, 생활환경의  쾌적감은 빼어났다고 볼수 있다. 여기의 주택가를 보고나서 현재 동아시아 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층아파트 건설붐이 과연 옳은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국은 아파트공화국이라고 불리울만큼 전국 각 도시가 아파트천지인데,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삶,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물론 국토가 졻다는 점과 고층아파트가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질서의식과 사회인프라   나는 미국에 오기전에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살고있는 나라이기에 질서의식에서 는 일본보다 많이 뒤지지 않을가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보니 그런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어디를 다녀봐도, 교통매너가 좋았고, 차량들이 보행자우선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쇼핑하러 가게에 가보면 손님이 많은 경우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중간에 꺼어드는 현상을 아직까지 본적이 없다.   해외에서는 미국이 시민들이 총을 소유할수 있는 사회여서 무서운 느낌이 있는데, 의외로 주택들을 보면, 문에 철판을 깔았거나 창문에 쇠창살을 넣는 경우가 적었다. 일반주택들을 보면 방범조치를 너무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미국의 치안이 좋다고만 할수 없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범위내에서는 시민시회의 커뮤니티가 건재한 것 같다.   그리고 사회의 인프라를 보아도 소위 말하는 선진국임을 실감한다. 대체 어디를 가도 물꼭지를 틀면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지같은 비품이 꼭 준비되어 있다. 교통신호가 잘 되어있고, 도로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경우가 적다.   다양한 인종의 나라   미국에 와서 제일 인상 깊은 것이 이 나라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볼수 있고, 서로들 스스럼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에 이 것이 과연 미국의 참된 모습이라고 감탄할 때가 있다.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지만 꼭 하나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고, 각 인종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El Cerrito의 아파트주변에는  중국계의 대형쇼핑센터가 있는데 거기는 말그대로 중국인들의 세상이고, 마치도 중국의 민족자치지역과도 같다. 간판에서부터 상품명, 음식메뉴 등이 모두 영어와 중국어 이중으로 표기되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 일본가게가 집중해 있는 곳이 있고, 얼마안가는 오클랜드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이런 지역에 가보면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쉽게 볼수 있다.   현재 동아시아의 여라나라들에서도 국제화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던데도 미국에 와 보니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국제화에 아직도 충실히 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중국에서는 외적인 국제화만이 아니라 자국내의 민족간의 격차와 모순을 줄여야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단일민족주의를 지양해야 할 과제가 크다.                            (2009년9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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