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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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
2011년 01월 19일 15시 22분  조회:5250  추천:41  작성자: 김광림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광림의 보스턴통신13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3)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

2009년 8월4일 나는 북경을 떠나 연변으로 갔다. 24일에 연변을 떠나기까지 20여일간 체류하면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고 연변각지를 여행했다.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한 후 연변으로 가끔 돌아갔어도 번마다 체류기간이 짧았기에 고향에 가서도 가고싶은 곳을 다 가지못하고 총총히 떠났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연변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연변의 변화도 컸다. 외국에 오래간 있다가 연변으로 가보면  몇가지 큰 변화가 눈에 띄운다.

수선 어느 도시에나 아파트가 많이 늘어났다. 이제는 어지간하면 아파트에서 사는 시대를 연변사람들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연변에서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아파트를 많이 산다고 들었다. 

그 다음 도로가 좋아진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연변의 주요도로가 거의 다 아스팔트나 콩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우고 고속도로가 통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내가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면 언제나 제일 큰 변화를 느끼는것이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 고속도로망이 전국에 널리고 고속철도도 보급돼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차로 연변각지를 달리면서 느낀것이 국도에 콩크리트도로가 쾌 많은데 이런 길에서는 차가 상하로 털렁거리기에 승객들에게는 편하게 승차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콩크리트도로가 보수비용이 적게 들어 도로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경제적이겠지만 승객을 생각하면 아스팔트가 낫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연변의 큰 변화가 자가용차가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연변의 도시에서는 마이카시대가 급속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을 보니 아마 거의 절반은 마이카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의 산업화국가들에서는 마이카가 오래전에 보급되었기에 신선한 얘기가 아니지만 마이카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큰 변화가운데의 하나이다. 

연변각지를 다녀보면 산림이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어 민둥산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들이 울창한 수림으로 덮어있어 좋았다. 듣자니 이제는 산림보호를 위하여 벽돌공장도 운영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연변지역만큼 전지역에 수림이 울창한

곳도 중국에서는 적기에 자신의 고향이 자랑스러웠다. 친척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에 들어있기에 찾아가봤는데 자녀가 없어 의지할 수 없는 노인들을 정부가 무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각지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이 설치되어 있다한다. 이런면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정책이 돋보였다.

그러나 연변도 잘 살펴보면 어두운 그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농촌마다 폐가가 눈에 띄고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줄어드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떠나면서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부재했다. 일본이나 한국을 봐도 산업화과정에서 이농(離農)현상은 다들 생기는 것이지만  문제는 소수민족지역에서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 민족의 공동체기반이 무너져내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연변내의 도시에서도 조선족이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조선족식당에 가봐도 젊은 조선족종업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체 젊은 사람들은 연변에 남아있지 않고 직장을 외지에 나가서 찾는 것이 이제는 사회의 추세처럼 되었다. 그러다나니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노인이나 어린이들만이라는 말이 너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백두산관광을 가면서 연길시 주변의 농촌을 통과했는데 한족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여기의 마을들에는 원래 조선족들이 살았는데 한국에 돈벌러 나가면서 이제는 별로 남아있지도 않다고 했는데 이것이 다른 민족의 눈으로 본 연변의 현실이었다. 원래는 외지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고향을 잘 발전시키고 고향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안착하여 사는 것이 이상적인데 오늘날의 조선족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유골마저 날려보내는 세태에 연변조선족의 애향심이 장구하게 남아있을련지. 부모의 산소라도 남아있어야 고향도 찾아가고 싶고 애착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의 형님집에 거주하면서 아침마다 연변텔레비의 조선말채널을 시청했는데 7시가 되면 아리랑곡이 흘러나와 그런때만큼 반가운 것이 없었다. 또 아침이면 형님네 아파트 밖에서 ‘두비(두부) 삽소’하는 고향 아줌마의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적인 것을 누리면서 사는 삶, 이것인즉 연변에 사는 조선족의 특권이고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연변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연변을 떠나기 직전 모아산(帽兒山)정상에 올라 고향땅을 바라봤다. 급속하게 현대도시로 탈바꿈해가는 연길, 백사장을 적시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 사과배 향기 풍기는 용정의 만무(萬畝)과원, 산마다 일직자로 늘어선 낙엽송과 솔나무, 다시 보니 고향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가 너무 제 고향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연변을 떠나는 날 연길공항은 몹씨 붐볐다. 나이든 조선족 분들이 짐을 가득 챙겨가지고 한국으로 돈벌이 떠나고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배웅을 하고 있었다. 한번 나가면 몇년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걸음이어서 가족 사이의 작별이 애틋했다. 한세기 이전에 찢어지듯한 가난과 망국의 설음을 안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오늘도 또 무거운 짐을 끌고 살길을 찾아 고국으로 향한다. 조선족에게 아리랑고개는 길고도 또 길다.            
 
두만강과 백두산 그리고 용정의 유적

연변에서 두만강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용정시 삼합(三合)에서 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인적이 드문 구간을 통과하여 개산툰(開山屯)까지 달려봤다. 두만강폭이 너르지 않아 맞은편의 조선의 마을이 훤히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고 미역감는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두만강변에 가끔 나타나는 중국측의 마을도 대체 조선족마을이기에 서로 너무 비슷하여 국경이라는 의식이 없이 양측을 바라보면 똑같은 민족이 하나의 강을 사이두고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 개산툰에서 도문(圖們) 사이를 차로 달렸는데 이 구간은 두만강 양안의 산들이 험준하고 그 때문에 경작지가 많지 않았다. 조선의 산에는 최고지도자를 칭송하는 문구가 가끔 보이고 역전마다 김일성주석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이 강건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중국에서 60,70년대에 있던 지도자에 대한 극단적인 개인숭
배가 아직도 조선에 남아있는 것이 서글펐다. 중국측의 국경도시인 도문에서는 두만강변에 관광객이 많이 모이고 두만강에 들어가 배놀이도 많이 하는데 조선쪽은 조용하고 나다니는 사람도 그리 보이지 않았다.

도문에서 다시 차로 두만강을 따라 두만강의 최하류인 방천(防川)까지 갔다. 훈춘(琿春)시가지를 지나면서 보니 소문대로 훈춘시 개발이 많이 진척되어 연변의 도시중에서는 연길이외에 제일 번화한 모습이었다. 훈춘시의 권하(圈河)세관을 통하여 조선쪽으로 화물트럭이 건너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길이 600킬로에 이르는 두만강의 많은 구간을 답사하면서 연변의 조선족이 제 모국과 진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중국측도 대체 조선족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어 양측의 차이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이민한지 100여년이 지나도 언어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이 변화가 생기지 않은 근본원인이 바로 모국과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두만강 대안의 조선쪽이 너무 조용하고 활기가 보이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 쪽도 이제는 천지개벽이 일어나 두만강지역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떠오르는 날도 멀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연변에 체류하는 사이 백두산에도 두번 다녀왔다. 운 좋게 처음 갔을 때는 천지가 똑똑히 보였는데 두번째 가니 백두산 정상에 안개가 진하게 끼어 천지가 전혀 보일질 않았다. 날 개인 날 백두산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시야가 확 트이는 가운데 검푸른 수해(樹海)가 아득하게 펼쳐지고 연변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바로 이런 기상을 보면서 키워가는 것이겠다 생각됐다. 백두산을  관광하면서 보니 한글간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7년에 처음 백두산에 갔을 때는 한글간판이 꽤 보이던 생각이 났다. 들으라니 2005년에 백두산(장백산)관할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移管)되면서 한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관이 연변의 관광산업에 불리했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백두산관광을 활성화시켰는지 상세한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런나 중국의 조선족들이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경내에 있던 백두산에서 행정관리권의 이관에 따라 한글이 사라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용정에 새로 복원된 대성(大成)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도 방문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복원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자기의 고향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가슴뿌듯했다. 실지 연변지역은 오래동안 동북아시아의 변방이면서도 잘 알고 보면 유서가 깊은 곳이다. 발해왕국이 여기서 건국됐고, 조선왕조, 청나라의 시조(始祖)들이 여기서 일어섰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의민족의 투혼과 자존이 마지막까지 지켜진 곳도 여기이다.  

남북의 만남의 장소

연길에서 체류하면서 연변대학교 근처에 있는 호텔앞을 지나는데 한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길시의 어느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줄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조선(북조선)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종업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조선식당으로 여러번 찾아갔다. 손님은 한국사람이 많은 편이고 그리 붐비는 식당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반식당에 비하면 종업원들의 태도가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했다. 의아스러운 것은 그 식당 입구에 일본식 등롱(燈籠)이 한줄로 쭉 걸려있었는데 이런 인터리어는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궁금했다. 혹시 일본식 등롱인 걸 모르고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에는 조선에서 경영하는 식당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어디나 한국손님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연길의 서점에 가보면 한국과 조선의 서적, 영상물, 음반들을 한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사실 해외에서 남북의 출판물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런면에서 연변에는 남북의 정보가 다 모이고 여러형태로 남북의 교류가 여기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10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학술희의에 참가했는데 이 회의는 연변대학교와 한국과 조선의 학술기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고 남북양측에서 학자들이 많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역시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남북을 이어놓는 가교적 역할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1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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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8 ]

8   작성자 : 코리아 타운
날자:2011-01-25 12:03:19
봉헤찌로에서 브라질 전체 의류 거래의 60%를 취급한다고 합니다.
7   작성자 : 코리아 타운
날자:2011-01-25 11:57:38
KBS 다큐멘타리 3일에 나오는 브라질 한인교포들 얘기에서 쌍빠울로시 봉헤찌로에서 브라질 교포들이 운영하는 의류가게가 2500개고 고용된 브라질 사람이 거진 50 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봉헤찌로는 브라질 정부에 의해서 작년에 공식적으로 코리아 타운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6   작성자 : 십년하동 십년하서
날자:2011-01-21 10:42:54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어디서 사는냐인 것같다. 먼저 나라를 놓고 말하면 중국, 일본, 한국, 일본, 미국 등등 요즘 세계는 열려있어 자기가 택하면 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이 요즘 크게 발전해 나가나 미래는 알 수없는 것이다. 예상대로 더 크게 발전해 나갈지 아니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가 사람들이 일본일본을 외치던 바로 그때가 정점이 되어 지는 해의 나라가 된 일본처럼 침체에 빠질지 아무도 모른다. 80년대에 일본의 휘황찬란한 번영을 보고 지금의 침체를 예상할 수없었다. 학자들은 일본이 미국을 제끼고 일등국이 되리라 믿었다. 1998년 한국의 금융위기를 보고 한국이 이렇게 크게 재기하리라고는 기대 못했다. 한국은 용이 되려다 미꾸라지가 된 가망이 없는 나라로 알았다. 한동안 스페인이 잘 나가니 많은 나라가 부러워하며 스페인을 본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스페인은 거진 망하기 직전이다. 한동안 아일랜드가 잘 나가니 이를 셀틱호랑이라 하며 경제 기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이랜드는 지금 거덜난 나라이다. 심지어 1900년대 초반에 쏘련 경제가 잘 나갈 때 쏘련으로 이민을 간 미국인들도(약 만명) 있었다. 이태리가 어려울 때 아르헨티나로 수많은 이태리 사람들이 이민을 갔으나 지금 이태리가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이민갔던 많은 이태리인들의 자손들은 지금 이르헨티나 빈민촌에서 근근히 살고있다. 김광림 선생같은 해외 조선족 엘리트들은 지금 중국의 소란스런 발전으로 내가 지금 뭐하나하고 마음이 흔들릴 수가 있으나 십년하동 십년하서(十年河東 十年河西)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5   작성자 : 김 광림
날자:2011-01-21 06:49:19
위의 샹그릴라님, 좋은 조언 고맙습니다. 생활이 힘들더라도 사는 곳에서 열심히 하는라면 그곳이 샹그릴라가 될 수 있겠지요. 해외에 오래살다보면 방황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4   작성자 : 거사
날자:2011-01-20 10:43:23
다큐멘타리 3일을 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쌍파울로 봉헤찌로 패션 거리에서 일하는 브라질사람이 50 만명인데 거의다 한인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랍니다. 대단해요~~
3   작성자 : 이민 성공사
날자:2011-01-20 05:27:01
브라질 교민들의 거의 전설적인 성공사를 들어보면 감탄이 나옴니다.언어를 몰라 단어 100개 암기해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가게를 낼 돈이 없으니 행상으로 물건을 갖고 집집마다 다니며 파는데서 출발 오늘의 성공을 이룬 분들 입니다.브라질 교민들이 미국으로 이민해선 또 엘에이의 자바의류시장(미전국과 중남미까지 상대하는 의류도매시장으로 한인들이 약 50%의 상권을 쥐고 있다)과 봉제공장에서 한인들이 기반을 닦는데 크게 기여 했읍니다. 브라질 교민 출신들은 큰 자본을 굴리며 장사 수완들이 뛰어나고 빈틈이 없는 사업가들이 많읍니다. 중남미와 미국 전역 그리고 심지어 카리브해의 섬나라들까지 한인들이 의류업과 봉제업에서 강력한 네트워크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이 한나라에 들어가면 6개월이면 의류시장을 장악한다고 합니다. 큰 나라인 멕시코도 멕시코 시장이 개방되자마자 한인 상인들이 몰려들어가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했읍니다. 한번은 어떤 사건으로 한 멕시코 한인사업가의 재산이 밝혀졌는데 재산이 약 오천만불(550억원)이었고 여행 중에 멕시코의 한 도시에 갔더니 그곳 멕시코 현지인이 말하기를 그 도시에서 가장 비싼 주택을 한인 사업가가 샀다고 하며 멕시코 한 주에서는 그 주의 제일 갑부가 한인 사업가라 하더군요.
2   작성자 : 따봉! 브라질
날자:2011-01-19 16:53:42
이번 방영된 KBS 다쿠멘타리 3일 "따봉! 브라질 - 패션거리 봉헤찌로의 한인이민 성공기"를 꼭 시청하세요. 애당초 농업 이민이었다는 면에서 조선족들에게 그래도 가장 모델이 될만한 이민성공 사례임니다. 농업이민으로 애당초에 브라질로 갔다가 농촌에서 인구 1100만의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로로 진출 유태인들을 몰아내고 현재 브라질 전국 의류상권을 쥐고있는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1500개의 의류점을 운영하는데 대부분 규모가 큰 도매상이고 공장도 갖고 있읍니다. 브라질 한인 이민자들 앞에서는 돈자랑하지말라고 하고 천만불 이상의 재력가들이 상당히있는 성공한 이민자 집단입니다.
1   작성자 : 샹그릴라
날자:2011-01-19 15:44:28
"북경에서는 지인들을 여러명 만났는데 대체 중국의 발전과 더불어 본인들도 괄목하게 변했다. 북경의 명문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대학교동창생 두명을 만났는데 두명 다 이제는 중국학계에서 중견학자로 자리잡고 있었고, 해외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도 많이 다니고 일본이나 한국에 나가 객원교수도 경험하였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모습이 스스로 초라해보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 교수로 취직하였지만 자그마한 지방대학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직장이 불안하고 학계에서도 별로 활약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급속하게 성장해가는 중국에서 자리를 잘 잡고 본인들도 나라의 발전과 같이 성장해가는 모습이 20년 가까이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러있는 일본에서 별로 발전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김광림 선생의 위의 독백은 겸손으로 받아들이겠읍니다. 서로가 남의 떡이 더 커보이기도 하지요. 북경의 대학교수로 있는 두명의 동창은 김광림 선생을 내심 부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차이는 김광림 선생은 친구들과 떨어져 일본 지방의 대학교에 홀로 있다보니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상대적 비교우위의 만족감을 느낄 수있는 입장이 못되고 또 주변에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외지에서 개인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상대가 없다보니 더 심하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외국 나가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북경의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분들의 문제는 복잡한 인간 관계에 치여서 심신으로 지쳐있어 자기의 환경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불쌍한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그들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읍니다. 그들이 속한 세계의 치열한 인간관계 경쟁속에서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크게 약점을 잡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샹그릴라(지상낙원)은 어디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누구나 고민을 안고 살고 있읍니다. 힘내시고 김광림 선생의 길을 걸어 가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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