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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2)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2)
너무나도 많이 변했던 북경
2009년 8월1일 곤명에서 5일간의 국제회의 일정을 마치고 북경에 가서 3박을 하면서 친척과 지인들을 만났다.
곤명을 떠나 북경에 도착한 첫 인상이 마치도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발전도상국에서 선진국에 온 것 같았다. 북경공항부터 크고 화려하여 이제는 어느 나라의 공항에 비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공항에서 차로 시내에 들어가면서 보니 2003년에 마지막으로 가본 북경과 비해도 엄청나게 변했었다. 교통이 사통발달한데다가 보통 길이 너르고 도로 양측에 호화로워보이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도시가 여유로움과 풍요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이제는 북경이 국제대도시중에서 어느나라에도 못지않고 북경이나 상해만 보면 중국을 발전도상국이라 할 사람이 오히려 적을 것 같다. 2005년에 일본에서 상해에 다녀왔는데 그 때 상해의 번화하던 모습을 보다가 일본에 돌아가서 도쿄의 우에노역에 내리니 마치도 어느 지방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토록 북경이나 상해는 변화가 빠르고 도시가 활기가 있었다.
근년에 북경의 모습이 엄청나게 바뀐 것은 2008년에 개최된 올림픽과 관계가 깊다. 도쿄와 서울이 올림픽을 통하여 도시가 크게 탈바꿈 한 것처럼 북경도 올림픽 덕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2010년에는 상해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으니 상해의 변화도 엄청날 것이라 예상된다.
북경에 도착한 후 먼저 ‘새 둥지’라고 불리우는 북경올림픽주경기장을 보러 갔다. 때마침 큰비가 쏟아져 가까이에 다가가 보지 못하고 차로 그 주위를 둘러봤는데 소문대로 규모가 어마어마한 경기장이었다. 경기장주변에는 중국 전통건축물의 특색을 지닌 고풍스러우면서도 호화스러운 호텔이 여러개 들어섰다. 저녁에는 북경에 있는 지인의 초대로 세계최대급쇼핑센터라는 골덴리소수쇼핑몰(金源時代購入物中心)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이 쇼핑센터의 규모도 가히 놀랄 정도였다. 부지 면적이 68만 평방미터라니 서울 여의도의 8배, 일본 도쿄돔의 15배가 되는 셈이다. 이 쇼핑센터에는 식당만 100개가 넘고 백화점, 슈퍼, 스포츠센터, 영화관 거의 모든 상업시설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식당에 가봐도 대체 어느 식당이나 규모가 큼직큼직하여 이 큰데 손님이 다 모일 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면 쇼핑센터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이처럼 큰 곳을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와보니 규모가 큰 상업시설이 꽤 보이기에 대륙국가들의 스케일이 큰 것은 공통점것이라 납득이 갔다. 중국의 고도(古都)인 서안에서 본 진시황병마용(兵馬傭)박물관도 보통크기의 체육장 3개 정도였기에 일본이나 한국에 비하면 역시 대륙국가의 스케일이 크다는 실감이 갔다. 스케일이나 센스, 상업적 수요에 따라서 규모가 큰 시설을 짓는 것이 흠점은 아니지만 현재의 중국에서는 질보다 양을 많이 따지고 국가의 위세를 과시하는 모양으로 대표적인 건물들은 세계최대규모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꼭 규모가 커서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친 규모는 자원낭비, 환경파괴가 뒤따르기에 좋다고만 볼 수 없다.
북경의 도시의 외모가 거창하고 화려한데 비하면 치안에는 문제가 있는것 같았다. 내가 찾아가 본 고층아파트에는 건물마다 경비원이 있고 아래층들에는 창문에 쇠창살을 해넣고 문도 보통 열쇠를 이중으로 잠근다고 들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에 비춰보면 아파트마다 경비원이 있는 것이 이상해보였고 그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는 방증인 것 같다.
북경에서 3일간 머무르면서 도시 외곽에도 가봤는데 식수(植樹)를 많이해서 어디가도 수림이 우거져 있었다. 1980년대부터 북경주변에서 식수를 대대적으로 한다고 들었는데 이제와서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서는 지인들을 여러명 만났는데 대체 중국의 발전과 더불어 본인들도 괄목하게 변했다. 북경의 명문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대학교동창생 두명을 만났는데 두명 다 이제는 중국학계에서 중견학자로 자리잡고 있었고, 해외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도 많이 다니고 일본이나 한국에 나가 객원교수도 경험하였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모습이 스스로 초라해보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 교수로 취직하였지만 자그마한 지방대학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직장이 불안하고 학계에서도 별로 활약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급속하게 성장해가는 중국에서 자리를 잘 잡고 본인들도 나라의 발전과 같이 성장해가는 모습이 20년 가까이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러있는 일본에서 별로 발전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망경에서 생각해본 한중관계
북경에서는 3일간 망경(望京)에서 숙박했다. 잘 알려져있다싶이 망경(왕징)은 중국내에서 한국인들이 최대로 모여사는 곳이고 북경에 사는 조선족도 여기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니 연변을 제외하면 중국내의 최대의 코리아타운이고 한국인과 조선족을 합쳐서 최대 약 10만명이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을 둘러보니 말 그대로 코리언의 세계이고 한국것이 들어와 있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화된 지역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가 한국식 레지던스호텔이었는데 방내 비품이 거의다 한국제품이고, 텔레비를 틀면 한국방송이 나오고, 텔레비옆에는 북경거주 한국인들이 발행하는 잡지가 놓여있어 오히려 한국의 호텔들보다도 더 한국적이었다.
현재 중국에는 약 100만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중화권인 홍콩과 대만을 제외하면 외국인이 중국에 거주하는 수자로는 한국인이 제일 많을 것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수가 2005년의 통계에 약11만명으로 나오는데 그 이후에도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 같지 않다. 그러고보면 일본인보다 9배정도는 더 많은 것이다. 중국속에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가 거의 없지만 한국은 이미 북경, 청도, 연태 등 도시에 코리아타운이 들어섰고 중국의 조선족까지 합치면 중국속에서의 코리언의 존재감은 일본인보다 훨씬 크다. 망경의 코리아타운을 보면서 통일신라시기의 당나라 연해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신라방(新羅房)이 생각났다. 그때 신라인들은 당시의 세계최대강국중의 하나인 당나라에 진출하여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사실상 주도했다. 북경의 지인한테서 들으니 한국인들은 중국사회에 깊게 파고들고 중국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는데 일본인들은 어쩐지 중국인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하기 쉬운 것은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앞서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가깝고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한가지 현재의 중국에 200만 가까운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이 중국과 접근하고 교류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인적자원이었다.
이미 잘 알려져있다싶이 2003년에 한국의 대중수출은 양적으로 대미수출을 초과했고, 이제는 대미, 대일수출보다 대중수출이 더 많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장기적으로 흑자를 내는 많지 않은 나라가운데의 하나이다. 1990년대부터 20년정도 중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해가는 과정에서 한국은 중국의 발전을 최대한 잘 활용한 나라이다. 1997년의 IMF위기의 단기간의 극복이나 2008년의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를 잘 넘기것도 중국의 경제성장을 잘 활용한 것과 관계가 깊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장기간의 정체상태에 빠지면서 한국에 비하면 중국의 발전을 그리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고, 정랭경열(政冷經熱)이라는 말이 생겨나다싶이 양국의 외교적인 관계에서는 마찰이 자주 일어났다.
한국의 장점은 아직도 세계최강인 미국과의 외교적, 경제적관계를 잘 유지하면서그러면서도 지금까지는 중국과 뚜렸한 대립을 피하면서 관계를 잘 발전시켜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세계최강의 대국들인 미국도, 중국도 동시에 잘 활용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인 것 같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는조선(북조선)이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하고, 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평형을 유지해나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반도(한반도)의 남북관계가 잘 풀려야 하고 궁극적인 통일을 지향해가면서 그 통일이 조선반도와 중국 양측에게 서로 윈윈게임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지혜를 짜야 한다.
예술촌으로 봐뀐 공장
북경의 망경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예술촌으로 알려진 ‘789예술구’이 있어 찾아가봤다. 원래는 ‘789연합공장’이라 불리우던 군수, 방직공장이 이전을 하면서 비게된 공장의 넓은 공간을 예술가들이 창작에 활용하면서 어느사이 유명한 예술촌으로 거듭났다. 꽤 넓은 공간에 170여개의 갤러리나 아틀리에가 모여있다고 하고 유명해져가는 과정에서 아트샵, 카페같은 것이 많이 모이면서 종합오락공간으로 변모해가고 있다고 한다. 전시된 작품중에는 전위적인 것이 많아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의 반항적이고 거침없는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유리창에 둘러싸여 관람자들의 구경거리가 된 천안문, 미국의 마돈나를 옆에 끼고 싱글벙글하는 모택동, 이런 작품들속에서는 기존의 권위나 우상이 형편없이 깨여져가고 있었다. 한때는 용도폐기될번 했던 공장터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창조적인 사고에 의하여 세간의 주목을 끄는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이런 변화는 중국의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닌 문화적인 활력도 보여주고 있었다.
(2011년1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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