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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6.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군인 1인당 탄약 300~400발의 량과 기관총 2정, 야포 1문, 그리고 량식을 마차 4대에 만재하는 등의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10월 26일, 27일경에 화룡현과 안도현의 경계인 황구령촌 부근에서 홍범도의 련합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다 그후 11월 7일 다시 그곳을 출발하여 오도양차(五道楊岔)로부터 삼림계곡을 따라 천보산 서쪽 부근을 돌아 니추담구, 연길의 남하마탕 등지를 거쳐 11월 15일경 소삼차구(小三岔口)부근 왕청현 춘양 신선동에 도착한 후 이어 서일총재(徐一總裁)의 지시대로 여러 독립군부대가 집결하기로 한 밀산으로 향했다.
또한 이를 전후하여 안무가 인솔하는 200여명의 국민회의 국민군과 의군부 및 광복단군 등도 이와 비슷한 길을 따라 밀산으로 북상했다.
밀산(密山)은 서일이 벌써 주장한것과 같이 로시야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놓여있기에 가능한 한 큰 회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밀산은 간도처럼 조선동포들이 모여사는 곳이여서 우선 그들로부터 한동안 부족되는 군량도 얼마가량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였다. 하여 다른 독립군들도 그쪽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일찍이 1909년 여름부터 헤이그밀사로 사행했다가 울라디보스톡에 간 이상설과 그곳 한민회(韓民會)의 회장 김학만, 그리고 “히됴신문”의 주간 정순만, 유학자, 이승희 등을 중심으로 하여 씨비리, 특히는 울라디보스톡에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이 북만주의 밀산부(密山府) 지역내에다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이를 추진한바있었다.
그때 그곳은 넓은 황무지가 널려있는 곳이였다. 동포들이 여기저기 몇 세대씩 들어가 개간사업을 벌리며 정착을 꾀하나 자금과 인력부족으로 인하여 유목생활을 면치 못하는 그런 지역이였다.
이상설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먼저 이승희가 나서서 이 지역의 일부 토지를 사들이고 개척을 시작하게끔 했다. 그리하여 이승희는 울라디보스톡에서 700리넘는 그곳을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면밀히 답사한 끝에 마침내 봉밀산(蜂密山)밑에 기름진 터전을 잡아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이였다. 그리고는 1909년 가을 100여호 이민단을 이끌고 이곳에 와 한흥동(韓興洞)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는 또 거기에 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력사를 가르쳤고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동포들의 단결을 도모했다.
新民會의 중요간부였던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 등도 한때 밀산지역을 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하기 위해 힘쓴바 있다.
10여개의 독립군단체의 무장단이 모여들고 보니 그 조직형태와 성장력사는 물론 실력도 저마끔이였다. 전투의 세례를 받은 단체가 있는가 하면 이제 조직된지 얼마안되거니와 전쟁을 해보지 않은채 이름만 버젓히 내건 단체도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러했다.
義軍府ㅡ 1919년 4월에 동만각지에 널려있었던 한국의병들로 조직된 군사혁명단체였는데 이범윤(李範允), 이학신(李學新), 최우익(崔友翼), 김청풍(金淸風), 김현규(金鉉圭), 신립(申立), 지우강(池雨江) 등이 주동이 되어 화룡현 신봉(新鳳) 동명구에 근거를 두고 조직된 기구로서 씨베리야 신한촌에 근거를 두고 무장구입을 알선하고 세계정세를 관망하면서 활약을 했다. 부서는 본부(本部)와 중부(中部)로 나뉘였는데 군대는 5개중대였다.
그런데 義軍府는 이해 즉 1920년 6월에 뜻밖의 큰 화를 입었다. 적색청년(赤色靑年) 300여명이 무장을 하고 신한촌에 있는 義軍府 수뇌들의 숙소를 포위습격하여 이범윤(李範允)이하 85명이 피살되고 총무부장 최우익(崔友翼)만이 동만으로 탈출하여 봉오동에 주둔한 의군부를 왕청현 의란구에 이동하였다가 7월에 다시 연길현 명월구 중간에 있는 마을로 근거를 옮긴다음 다음과 같이 부서를 개편하였던 것이다.
군무총장ㅡ 최우익(崔友翼)
산포대장ㅡ 조상갑(趙尙甲)
총사령관ㅡ 허재욱(許在旭)
산포대서무ㅡ 량재묵(梁在黙)
참모관ㅡ 박인(朴仁), 강도천(姜道天), 이석(李析), 고평(高平)
서무장ㅡ 이을(李乙)
군법원장ㅡ 허승완(許承完)
외교장ㅡ 김종환(金鍾煥)
재무장ㅡ 김종헌(金鍾憲)
군량장ㅡ 이헌구(李憲求)
헌병대장ㅡ 최상운(崔尙雲)
군기감독ㅡ 강문주(姜文周)
통신부장ㅡ 지우강(池雨江)
전위대참모비서ㅡ 이희선(李喜璿)
전위대서무비서ㅡ 이탁수(李卓洙), 조정태(趙鼎泰)
모연대ㅡ 이희수(李喜洙), 황용운(黃龍雲)
로씨야대표ㅡ 림동환(일명 림의택)
활동지대는 화룡, 왕청, 훈춘 각지였고 재정은 동포들의 의연금으로 충당되였다. 조직후 14개월의 시일을 경과하는 동안 군사세력이 강하여져 6개 대대의 편성을 보게되였다. 중부참모장 고평(高平)은 왜적에 대한 항쟁과 여러 반동세력의 퇴치를 위하여 7월에 서일(徐一)을 찾아와 북로군정서와 동맹을 체결하고는 왜적과 그 기관을 맹렬히 박멸하려들었는바 용정 국자가에 있는 왜적과 주구에게 경종을 울림으로써 의군부의 중부는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의군부는 이같이 실력이 커짐에 따라 완전한 독립군을 편성하고 이름을 朝鮮獨立軍이라 고치는 한편 전국의 다른운동단체에와도 련락을 취하였다.
이때 온 만주의 사정을 보면 왜적의 공세외에 동북군벌의 몰리해로 인한 간섭과 방해가 매우심하였다.
8월하순 중국군대가 왜적의 사촉을 받고 습격하리라는 정보를 받자 참모부의 발의로 즉시 150명을 뽑아 그들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동북쪽에 매복시키였다. 로야령(老爺嶺)에서 중국군을 만나게 되였는데 독립군은 되도록 힘껏 양보하여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마찰은 피면하려 했다. 그러나 까닭없이 습격하는 중국군대를 그대로는 놔둘수 없어서 부득불 역습하게되였는데 쌍방은 손해가 적지 않았다. 의군부본부에서는 이런 급보(急報)를 받자 최우익(崔友翼)이 직접 3개중대를 거느리고 나섯다. 그러자 허세를 자랑하던 중국군은 물러나서 왜군과 싸우게되였다. 싸움은 치렬했다. 날이 저믈어 쌍방은 서로 공격을 멈추었는데 군대를 정리할 때에야 비로소 최우익(崔友翼), 이을(李乙), 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이 희생된 것을 발견했다.
의군부 중부에서 독립하였다해도 다만 자유행동을 할 수 있게 된데 불과하고본부와 중부는 항상 제대로 련락을 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로야령(老爺嶺)싸움에서 최고전략가 최우익(崔友翼)이 그같이 전사하게 되여 본부와 중부는 내부를 강화하고 있던 중 北路軍政署가 밀산으로 후퇴하게 되니 따라서 온 것이다.
都督府ㅡ 다른 하나의 독립군 도독부(都督府)역시 3.1독립선언이 있은 후에 일어난 단체로서 본부를 왕청현 석현(石峴)에 두고 최진동(一名明祿)삼형제가 주동이 되어 활동한 단체였다. 독립군 500여명에 장총 500여정을 갖고 있었으며 군복은 중국군인의 복장색갈과 같은 회색을 착용하였으므로 중국군인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府長에는 함북온성출신이며 중국군대에 다년간있었기에 전투경험이 있는 최진동(崔振東)이였고 사령관은 이봉남(李鳳南), 부사령관은 이원(李園), 참모장에 김호석(金浩錫)이였으며 군인은 4개중대로 나뉘여있었는데 그 4개중대 중대장에는 각각 이천오(李千五), 강상모(姜尙模), 강시범(姜時範), 조권식(曺權植)이였다. 봉오동전투때는 고지 하나를 맡아서 일군과 맛다든적이 있으며 경신년토벌때는 왕청현 라자구를 경유하여 동년현의 동삼분구로 가던 도중에 라자구 로무주거우북쪽 북방사태봉 아래골에서 일본토벌군과 만나 싸우려하다가 라자구에는 동포가 수천호 거주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화가 미칠가 념려하여 불타는 전의(戰意)를 억제하고 동녕현 동삼분구로 이동하였다가 서일을 따라 여기 밀산(密山)으로 온것이다.
東間島國民會軍ㅡ 6월에 있은 봉오동싸움에서 이긴 東間島國民會軍의 통솔자 홍범도(洪範圖)는 남만주 西路軍政署의 통솔자 이청천(李靑天)과 안도현 삼림지대에서 회견한 결과 홍범도(洪範圖)부대 600명, 이청천(李靑天)부대 400명이 합하여 한 개의 부대를 편성하고 총사령관에 홍범도(洪範圖), 부사령관에 이청천(李靑天)이 되었는데 청산리에서 대첩을 한 북로군정서가 보급과 증원군을 얻지 못하는 리유도 있지만 당지의 주민에게 안전을 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행군하여 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홍범도(洪範圖)역시 백설을 헤치면서 밀산(密山)으로 이동했고 군인이 200명되는 안무(安武)의 光復團도 이리로 온 것이다.
홍범도의 大韓獨立軍과 東間島國民會軍과는 어떤 관계였는가?
간도 방석곡에 기독교가 있어서 교회당을 세웠는데 國民會는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1919년 3월 12일에 용정에서 독립선언서발표식을 거행하였다. 명동(明東)을 근거지로 삼고 명동중학교를 설립한 다음 용정에 있는 서전서숙(西傳書塾)의 정신에 립각하여 현대교육을 실시하였는데 한국, 중국, 로령 지역에서 류학생이 모여들었다. 학교는 비록 중학이였으나 학생은 대부분이 성인이였다. 이 학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아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아울러 애국정신앙양에 주력하였는데 이 학교 교장은 국민회장이 겸하였다.
회장은 종성사람인 목사 김약윤(金躍潤)이였고 중앙집행위원은 구춘선(具春先) 외 4명이 있였다.
이 國民會는 간도에 있는 30여개의 독립단체를 단합하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끌어다 國民會의 직할군단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국민회는 행정구역이 8개지방부에 경호원 50명, 홍범도무장군 90여명, 자체의 군인 500명에 무기 500정, 군무위원은 이원(李園)과 안무(安武)였다.
大韓正義軍政司ㅡ 합병전(合倂前)부터 국내에서 왜적과 혈전 끝에 허다한 동지를 잃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안도현 내도산(內島山)의 밀림에서 포수생활로 재거(再擧)의 날을 기다리던 구한국군인과 의병들이 3.1운동이 일어나자 大韓正義團 臨時政府를 조직하고 총재로 이규(李圭)를 선거하였는데 장소는 안도현 합남갑산과 함북무산에서 약 35리되는 곳이였다.
1. 중국보위단의 명칭밑에 500명이 주둔하였고
2. 소사하훈련소에서 부락청년단원 240여 명이 교련중에 있었고
3. 화전현 길상하에 100명이 주둔하고
4. 그외 포수 100여명이 사냥에 종사하고있으니 전 병력이 8~9백명이였다.
군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권고에 의하여 1919년 10월 23일, 대한정의군정사라 개칭하고 총재 이규(李圭)의 명의로 조직구성을 임시정부국무원에 보고하였다. 세밀한 조직을 가진 군정서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두만강을 건너가 여러차에 왜헌병대, 경찰과 관공서(官公署)를 습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2월에 안도현 북하구현에서 김좌진부대와 이청천부대와 합류하여 대한의용군을 만들었다.
大韓新民會ㅡ 소재지 동만. 종교파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단체로서 무장단원이 50여명이였으며 단장은 김규면(金圭冕).
血誠團ㅡ 애국청년 혈성단이라고도 하는데 이해 1920년에 방금조직된 청년독립단체로서 단장 김국초(金國礎)가 서일을 찾아와 자기들은 청산리전역을 겪은 북로군정서와 운명을 같이하겠노라고 태도를 표시한 것이다. 이 단의 소재지는 북만의 오운현 배달촌(烏雲縣 倍達村)이며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단 장ㅡ 김국초(金國礎)
부 단 장ㅡ 김태일(金泰日)
서 기ㅡ 정태룡(鄭泰龍)
서무부장ㅡ 이선구(李善九)
통신부장ㅡ 정봉남(鄭鳳南)
사교부장ㅡ 차종철(車鍾轍)
재무부장ㅡ 진명국(陳明國)
野團ㅡ 야단은 3.1운동직후에 북만의 중동선(中東線) 일대에 세력을 뻗히고 있는 청림교도(靑林敎徒) 들로서 조직된 단체인데 단장은 청림교주 신포(申砲)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의 청년교도들에게 군사훈련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였다. 무기는 없고 군복만 수천벌을 장만하고있었는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이 무려 2,000명에 달했다. 청림교의 다른 한 교주 김광숙(金光淑)역시 주요간부였다.
光復團ㅡ 이해에 갖조직되였다. 근거지를 안도현에 두고 있었는데 간부는 김성극(金星極), 홍두식(洪斗植)이며 군인은 150명이였다. 무기는 장총과 권총을 합하여 100정 정도 갖추고 있었다. 안도현 내도면(內島面)에는 광복단의 분단이 있고 분단장 이승국(李昇國)은 단원을 훈련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였다. 1920년 1월 단원 김명권(金明權), 서봉근(徐奉根), 오운흥(吳雲興)은 평남덕천군에서 사업하던 중 그달 27일 밤에 태극면 영창리산속을 지나다가 태극주재소 왜순사를 사살하고 권총 한자루를 얻었는데 얼마못가 2월 5일에 평북 강계에서 왜적에게 잡히였다. 7월 1일, 광복단군인 15명이 장백현 18도구 태양동에서 軍備義勇隊영에 갔었는데 의용대원들은 사격련습을 하러 백두산으로 가고 참모 림경식(林景植) 한사람만 남아있었다.
그때 왜경 6명과 중국경찰 70명으로 된 수색대가 갑작스레 사격련습장을 습격하였기에 싸움이 붙은것인데 12명이 희생되고 2명이 부상당하는 것으로 패전하고말았다. 10월 10일에는 광복단무장대원 둘이 함남 운흥면에서 사업중 오산리에서 혜산경찰서원 4명의 습격을 받았는데 일본인 경사 1명을 사살하였다.
대장 김성윤(金性潤)은 혼자서도 국내에서 꾸준히 사업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여든 여러 독립군부대들은 대일방략을 연구한 끝에 일치하게 힘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오직 각개 분산되지 말고 한데뭉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서일이 처음부터 줄곧 바라는 것이 그것이였다.
그리하여 北路軍政署를 위시한 大韓獨立軍, 間島大韓國民會, 大韓新民會, 都督府 , 義軍府, 血誠團, 野團, 大韓正義軍政司, 光復軍團 등 10개 단체는 통합하여 大韓獨立軍團을 창립하기에 이르었다.
총 재ㅡ 서 일
부총재ㅡ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
총사령ㅡ 김규식
참모장ㅡ 이장녕
려단장ㅡ 이청천
총병력ㅡ 3,500여명.
밀산에 모인 10개단체를 놓고 전적(戰績)을 따질것 같으면 두말할 것 없이 방금 청산리대첩을 거둔 북로군정서가 제일이였다. 그러나 싸움차수를 따지면 홍범도부대가 제일많아 겨룰자가 없었다.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계릴라전을 하여 수차나 적을 타격함으로써 그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것이다.
10개의 군사집단이 하나로 합치니 병력수가 서일이 시종 바란것과 같이 한 개의 려단정도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 실력을 보면 거의가 보잘나위없어서 아직은 군력(軍力)으로는 내놓고 자랑할바가 못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야만적인 대학살에 증오와 복수심이 가슴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고 있었던 군인들의 사기는 충천하고 있었다.
병력은 모두 3,500명. 이 부대를 大韓獨立軍團이라 이름지었다.
이같이 편성 한 후 大韓獨立軍團은 우선 왜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를 찾아 호림역에서 약 5리가량되는 쏘련(로시야)의 이만시를 향하여 우쑤리강을 건넜으니 때는 1921년 1월. 이동 할 때의 총지휘는 이청천(李靑天)이였다. 우쑤리강을 건널 때 쏘련국경을 지키는 한 개 중대 崗木陽의 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두시간가량의 악전고투 끝에 그 수비대를 점령하여 무기를 빼앗고 이만시로 들어갔다. 이것을 “호림사건”이라도 한다.
이만시는 하바롭스크(伯力)주와 니유리구스리키주와의 사이에 있으며 만주와는 우쑤리강을 국경으로 두고있는 도시인데 그때 교포가 약 300호였으며 산업이 발달하여 전략적으로 보아 독립군양성에 적당한 곳이였다.
엄동설한에 동복을 입지 못하고 3일이나 걸려서 겨우 쏘만국경선을 넘어 이만시에 도착한 독립군은 거의가 동상에 걸려 고통을 많이 받았다. 그때 자유시에 주둔한 박일리야부대에서는 이 독립군을 자유시로 데려다가 자기가 령솔하는 군대에 혼성편대를 만들고 독립군간부들로 하여금 훈련시켜줄것을 요구하여왔다. 그리하여 김좌진을 자유시로 먼저 특파하여 그곳정황을 관찰케하였다.
그가 돌아와 보고한데 의하면 그곳에 주둔한 군인은 약 4,000명가량되는데 대부분이 동포2세(얼마우자)라 나이 많은 자와 무식자가 많아 도저히 훈련시킬 수 없다, 군인양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자유시로 갈것을 거부하고 이만시에 그냥 주둔하면서 둬달가량 자기 훈련에 열중하였다.
박일리아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적계홍군(赤系紅軍)을 시켜 여러 독립군을 무장해제를 시켜가지고 자유시로 데리고갔다. 이 일이 발생하기 직전에 그 어떤 예감이 들었다 할까, 김좌진(金佐鎭)은 전군이 되돌아올때 까지 기다리기로 언약하고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이만에서 만주의 밀산으로 되돌아갔다. 서일총재가 내놓은 방략(方略)대로 둔전병제(屯田兵制)를 할 타산이였던 것이다.
서일은 명지한 처사를 한 그를 칭찬했다.
이때는 만주땅이 안전했다. 중국인민의 강력한 성토와 항의에 의하여 북경정부가 일본정부와 반복적인 교섭을 한 끝에 “경신대토벌”에 동원되였던 일본군대는 5월에 하는 수 없이 만주에서 철거하였던 것이다.
한편 쏘련에 그냥 남은 조선사람의 부대들은 항일공동전선을 형성한다는 명의하에 고려혁명군을 편성했으니 그 정황은 이러했다.
제1련대ㅡ 독군부부대(최진동, 이재욱)
합동민족련대
제2련대ㅡ 니항군부대(박일리아)
독립군단
제3련대ㅡ 자유대대(오하묵, 최고려)
국민회군(안무, 김광, 김규찬)
대한독립군(홍범도, 이청천, 이병채)
경비대ㅡ 이만군(김뾰똘)
다반군(최니꼴라이)
그런데 원 니항군이 이름을 바꾼 싸할린의용대는 부대편성에 관한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설복코저 1921년 6월 27일 오후 군인대표회의를 열고 토론하고 권고하였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이 중도파탄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날 밤에 고려혁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싸할린의용대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키로 결정지었다. 28일 새벽 1시, 오하묵이 령솔하는 자유시지방수비대(전 조선인보병자유대대)와 쏘련홍군 제29련대가 싸하린의용대가 주둔하고있는 스랍스크를 외선포위했다. 그리고는 쏘련홍군 제29련대 련대장이 아침5시부터 싸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수뇌자들과 10여시간이나 교섭했으나 허사였다. 이렇게 되자 이날 오후 4시경에 총공격령을 내렸다. 오하묵의 지방수비대와 쏘련홍군 제29련대의 4개중대는 쏘련홍군 제2군단에서 증원한 장갑차 2대와 30여정의 기관총화력의 엄호밑에 600여기의 기마대까지 앞세우고 스랍스크를 돌진했다.
막기 힘든 력량이였다. 싸할린의용대는 전투가 시작된지 불과 한시간도 못되여 혈로를 뚫고 퇴각하여 마침내 흑룡강에까지 이르렀다. 어디로 더 퇴각한단말인가?...부대는 괴멸되도만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사변인 것이다.
이청천, 김창환, 오광선 등 10명은 이에 3일 앞어 자유시를 탈출하여 흑하(黑河)로 건너갔기에 다행히 화를 면한것이다.
약 3,000명의 독립군은 자유시로 들어가서 박일리아, 박그리고리 등이 령솔하는 4,000여명과 혼성려단을 편성하고 독립군간부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중대장, 소대장으로 되어 군사훈련에 힘썼다. 한데 한달가량 훈련시켰어도 도저히 될것 같지 않아 이청천(李靑天), 김창환, 오광선을 비롯한 그 10여명은 다른데다 수용지를 정하고 독립군을 빼낼 목적으로 밤에 자유시를 탈출하여 자유시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도시 흑하(黑河)를 향해 흑룡강을 건넜던 것이다. 이같이 국경을 건넌 그들은 오광선(吳光鮮)을 烏雲縣 우루깡으로 특파하였다. 그곳은 교포가 약 20여호 사는 곳으로서 사관학교로 사용하기 위하여 전에 지어놓은 큰 건물도 한 채 있었던 것이다. 오광선(吳光鮮)은 그곳을 수용지로 정해놓고 흑하로 되돌아왔다.
한편 오하묵(吳夏黙)은 박일리야로부터 령도권은 빼앗았지만 자기의 부대를 훈련육성시킬만한 인물이 없어 고심한건데 이청천(李靑天) 등 독립군령도자가 흑하로 탈출하였음을 탐지하고는 급히 서둘렀던 것이다. 그는 치따정부수뇌 가란다쓰와 함께 흑하로 가서 이청천(李靑天)을 래방했다. 그리하여 1921년 7월 독립군과의 공동작전 밎 협조에 관한 협정이 성립된 것이다. 이 협정이 성공하게 된 것은 물론 일찍부터 고국을 떠나 공산군에서 활약하고있었던 오하묵의 공이 큰 것이다. 이 협정에서 독립군은 쏘련홍군을 도와 아직도 각지에서 활약하고있는 백계군을 격멸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게되였다.
1. 세계평화를 위하여 치따정부는 한국의 노예상태를 해방함을 목적으로 함.
2. 쏘베트는 조선독립을 위한 독립군양성에 원조하고 보호함.
3. 쏘베트는 령내에서 자치와 자유로운 행동을 인정함.
4. 독립군양성을 위하여 무관학교를 건축하여 주기로함.
5. 치따정부는 한국군인 양성기간내에 한하여 자기의 무기를 무상으로 화부(貨付)키로 함.
대포 60문, 기관총 150정, 소총 6000정, 군복 7000착, 포알 3000발, 소총탄알 백만발, 전마 50필.
6. 한국독립군은 4년 훈련후 일본정벌을 개시하되 량국이 합작하여 즉시 전투할 것.
이 협정을 마친 후 독립군은 쏘련의 물자원조를 받아 군관학교설립차 바이깔호를 넘어 이르쿠스시에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고려혁명군단을 조직하여 오하묵이 단장이 되고 고려혁명군단학교 4층건물 두채를 크게 짓고 이청천(李靑天)이 교장이 되고 교관으로 김창환(金昌煥), 김승빈(金承彬), 송무영(宋武英), 강남일(姜南一), 안병무(安秉武) 등 독립군간부가 책임을 지며 오광선(吳光鮮)이 학도대장이 되어 사관을 양성하는 한편 쏘련을 위하여 열심히 홍군(紅軍)과 함께 백파군토벌에 종사하였다.
고려군의용대는 광복단군대지만 청천부대, 청룡대, 군정서, 싸라한군대, 의군부, 혈성단,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최고수령은 이청천(李靑天), 이계(李繼), 채영(蔡英), 최진동(崔振東), 오하묵(吳夏黙), 조욱(曺昱)강국모(姜國模), 김창환(金昌煥), 오광선(吳光鮮), 강남일(姜南一) 등이였다.
독립군은 내심으로는 독립전쟁이 아닌 남의 나라의 내란에 참가하는 것을 회피하려하였으나 장래에 쏘련의 원조를 받기 위하여 백파군과 투쟁하면서 근 2년간세월을 보내는 기간 쏘련군도 고려혁명군관학교와 고려의용군안에 붉은편성대를 넣어 열심히 지도와 공산주의선전에 주력하였다. 그러는 중에 쏘련대표 카라한과 일본공사 요시사와는 북경에서 캄챠카도연안의 어업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고 두나라지간에 어업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요시사와는 이 기회에 카라한에 “쏘련령토내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조선사람의 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두나라지간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해산시킬것을 요구하였다.
이때는 쏘련도 혁명직후라 약한 국력으로는 일본을 당해내지 못하겠거니와 한국독립군의 존재가 대내적으로 위험하니 불리한 형편을 피하느라 회의석상에서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약속하게 되어 사태는 갑작스레 악화되였던 것이다.
쏘련에서는 고려군관학교 학생과 교관 및 간부를 쏘련륙군대학이나 공산대학으로 가게하고 잔여부대는 북씨베리아탄광으로 끌려가 강제로동을 당하여 자연스레 소멸되였다. 이청천(李靑天) 등 몇사람은 이는 협정의 위반이라 극력 항의하다가 옥에 갇히여 하루에 검은 빵 두 개로 연명하는 몸이 되었다.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했다. 하여 6개월만인 겨울에 마침내 오광선(吳光鮮)이 파옥탈출에 성공하여 바이깔호의 얼음판을 건너 쏘만국경을 따라 약 두달만에 밀산에 도착하여 이곳에 돌아와서 둔병제를 실시하며서 독립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김좌진(金佐鎭)과 이만에서 여러사람을 만나 이 사실을 전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임정(臨政)에서는 파리에 가있는 김규식전권대사(독립군의 김규식이 아님)에게 알려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며 영문(英文)으로 외국신문에 이 사실을 전하는 한편 임시정부와 각 애국단체에서는 쏘련공사에게 항의를 제출하는 동시에 전보로써 최고수령이였던 레닌에게 이청천(李靑天) 등의 석방을 교섭하였다.
국제법으로 보아 외국의 혁명자를 마음대로 처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석방되였다.
1921년 1월, 밀산에서 독립군 3,500여명이 쏘련의 이만시로 들어간 뒤 자유시사변에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일크스크로 가서 근 2년간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7,000여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켯건만 하루사이에 쏘련공산당에 빼앗긴것은 그야말로 통분한 일이였다.
왜서 독립군에는 이같이 큰 피살사건만 련이어 생겨났던가?
그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는 감정과 주의주장의 분렬이요, 둘째는 국제문제의 책임회피였다. 여기에 일부의 불신한 자들의 정권욕이 큰 작간을 한것이다.
서일은 사망전에 자유시사변에 대한 “성토문”문과 “조사보고”를 앞에 펼쳐놓고 다시다시 보면서 깊이 사색 한바있었다.
<<1921년 6월 28일, 로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쏘련군과 교전한 결과 전사자 272명, 행방불명 250여명, 익사자 31명, 포로 수천명을 낸 큰 싸움이 있었다. 이 대한의용군에 참가한 단체는 싸할린군대, 이만군대, 로령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혈성단 등으로서 중령에서 넘어간 독립군 3000여명이며, 로령에서 살던 우리교포로 입대한 이가 4000여명 도합 7000여명이 박일리야, 박그레고리가 령도하였고, 이청천, 이종, 채영, 최진동, 안무, 조욱, 오광선, 강일남 등 15명이 참모부원으로 있었으나 이청천 등 중령에서 넘어간 간부들은 사건발생 3일전인 동년 6월 25일 자유시를 탈출하여 흑하(黑河)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로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韓族會는 全大韓民議會라 고치고 그 수령으로 문창범(文昌範), 김하석(金夏錫), 원세훈(元世勳) 등은 자기의 세력발휘를 위하여 大韓義勇隊의 존재를 악마와 같이 생각하던 바 이들의 음모와 오하묵과 박일이아와의 불화가 이 참극을 연출하였다. ...>>
《빌어먹을 자식들의 빌어먹을 정권욕!》
서일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식들이길래 그모양으로 놀아먹었느냐했다. 생각하면 이가 갈리도록 격분할 일이였던 것이다.
상해의 독립신문이 자유시사변에 대해서 기재한 것을 보면 이러했다.
<<1921년 흑하에서 우리 군대들이 충돌하여 많은 군인이 죽고 상하고 또는 포로가 된것에 대하여 천지가 캄캄하고 신인(神人)이 공노(共怒)할 일이며, 우리 민족으로 가장 비분을 금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제 본사의 위촉을 받은 특파원이 그곳을 가서 이 사건의 내용을 비교적 공정하고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낸고로 이것을 본보에 내여 동포에게 널리 알린다.
ㄱ. 각파의 관계
이번 조사에 있어서 힘껏 주선(周旋)하여 주고 친히 목격한 사실을 거침없이 알려준 적파동지(赤波同志)의 노력에 대하여 감사하며 당시 흑하사변의 관계자이고 책임자의 한 사람인 <코라소세고브>와 <노마츠끼>는 외국사람이면서도 그 사변의 책임자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한다.
(1), 원동공화국의 성립 경신(1920년) 9월경에 왜군이 上兩津市를 다수당에게 양여하고 치따시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상량률시를 점령한 다수당은 <모쓰크바>중앙정부의 사명으로 <치따>시에다 원동공화국을 조직하고 원동 각국으로 하여금 통상을 체결한 후 이 완충국을 경유하여 자국내지의 경제공황을 조정코자 함이 무산혁명사업을 <코라소세고브>에게 위임하였으니 <코라소세고브>는 이러한 2중사명을 띠고 원동으로 나와 <치따>를 점령하였다. <코>씨는 이에 <모쓰크바> 중앙정부에서 위임된 二大使命을 리행(履行)키 위하여 정치면으로는 공화정부를 구성하며 주의면으로는 遠東部(달부로)를 조직하였다. 간부위원은 6명으로 성립되였는데 그 <달부로>는 동양무산혁명사업을 지도하며 지배하는 최고기관이였다.
(2), 원동부내의 한인부는 이상 소개한 바와 같이 <코>씨는 동양사업을 착수첫걸음으로 우리 韓人들과 악수하게 되어 우리 韓人으로 하여금 무산혁명만을 지배한 최고기관으로 간부 5인을 두게 되었는데 朴愛, 金震, 桂奉宇, 張道宗, 朴義琬이였다. 이리하여 辛酉(西紀 1921년) 1월부터 조직사업을 준비한 결과 각기 자파별로 대표소집에 분투하였다.
(중략)
(6), <치따>파와 軍政議會는 이상 말한바와 같이 조직면에 있어서 각기 파별로 대표소집운동을 끝낸 결과 이파(伊派)는 국내 북경, 상해, 할빈 등지에서 대표를 얻고 치따파에서는 로령각지에서 일어나는 한인 붉은군대와 남북만주로부터 건너오는 독립군들을 합하여 그 수가 2,000명에 달하였다. <코>씨의 政略및 국제교의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목밑에 자유시에서 철도선을 떨어지기 25리되는 <코라스노야로워>라는 촌락에 이들 군대를 주둔케하였는데 < 싸할린군대>라는 것이 이 군대이며 이 군대가 참변을 당한 군대이였다.
이 군대는 전부가 <치따>측에 복종하는 군대이고 저 니항에서 무수한 왜적을 무찌른 정의군대였다. <치따>측에서는 이 군대를 통솔하는 한편 주의면으로 교도할만한 기관인 군정의회를 조직할 필요를 인정하여 3월초에 자유시에 도착하자 <코나스노야로워>에서 먼저 군대대표자회를 열고 5~6일 계속하여 회의한 결과 15인으로 군정의회를 조직하였다. 그후 곧 흑하로 오니 <치따>파 소집발기에 의하여 로령각처로부터 모여온 대표가 30여명이며 <싸할린>군대안에서 모인 대표가 11명 합 40명대표가 회집하였으나 흑하에서는 대표자회의관계가 절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리유는 <스마야츠끼>가 3월 1일부터 동양비서부를 伊市에 두고 자기는 최고위원이 되어 추상같은 명령으로 露人聯合共産黨을 거쳐 흑하에서 개회하는 것을 절대반대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하나의 기만수단으로 각방면대표를 伊市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주의환경에 따라 <치따>파는 그 계획을 실행치 못하고 불가피 <치따>로 향하게 되었는데 마치 이때에 할빈, 상해, 북경, 원동 등지로부터 많은 대표가 와서 <치따>에는 40여인의 대표가 모이였다. 8명의 중국대표들과 합하여 두 번 회의한 결과 伊派 <치따>派 는 전적으로 부인하고 新韓共産黨 籌備會를 발기하자고 론의되였으나 <스마야츠키>의 강력한 주장에 끌리여 부득이 伊市에로 가게 된 것이다.
(7), 伊市會議의 경과와 음흉악독한 포위망은 벌써 布陣되였다. 40명의 원동대표단은 대표자격부인과 아울러 발언권마저 박탈당하게 될줄을 모르고 伊市로 들어갔다. 韓人部 임원중에서는 張道宗 한사람만 같이가고 그밖에는 모두 남아있었다. 同月20일에 대표단이 伊市에 도착하니 韓人 5, 露人 2로 된 조사반이 각 대표의 위임장을 조사하는데서 원동대표와 <싸할린>군대 대표 1명에게는 전연근거없는 구실로 참석권을 不許하고 원동대표 20여명을 축출하니 다수가 매수된 대표들 뿐이다. 상해에서 대표로 온 安秉瓚, ×××은 <치따>나 <伊市>파의 주장을 부인하고 한 新派를 창설하겠다고하던 안병찬이가 그렇게 쉽사리 매수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그날 안병찬이 임시회장이 되어 가불을 물을 때 伊市派를 그대로 신임하겠다는 자이면 거수하라면서 자기가 먼저 거수하였다. 원래 원동에서 대표의 태반은 조선어를 잘 모르는 이들이였다. 질문도 없이 자기네들이 신임하는 安秉瓚, ×××이 하는대로 거수하였다. 이렇게 억울하게 伊市派에게 실패를 당한 <치따>파는 실패병과 같이 아무런 능력도 없이되였다. <스>씨가 준비하였던 회의안은 하나도 변경이 없이 그대로 통과되고 그 결과 최후책으로 <치따>파의 수령인 朴愛는 8년, 金震, 桂奉宇, 張道宗, 3인은 5년의 禁錮로 각기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상기록은 所謂 고려공산당조직에 대한 분렬상태이고 자유시 軍變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ㄴ. 군대의 충돌
5월달에 伊市에서 열린 대표회의는 고려공산당 중앙간부를 만들어내고 중앙간부에서는 고려혁명 군정의회(치따에서 설립된것과 같은)를 설립하게 되었다. 군정의회는 3거두(가만다스범리, 柳東說, 崔高麗)이 였는데 5월 19일 伊市를 출발하여 6월 초순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싸할린군대는 <클라스야로워>라는 부락에 주둔하고 자유대대는 자유시내에 있으며 서로 적대시하는 판이였다. 군정의회는 이 두 군대의 융합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나 <사칼린대>는 자유시로 오지 아니하고 군정의회의 명령을 불복함으로 군정의회에서는 위협도하여 보고 권고도 하여 보았으나 싸할린대는 반대방면으로 삼림지대를 통하여 극동으로 행군할것을 결정하고 하루동안 행군을 개시하였다.
이 첩보(牒報)를 받은 군정의회는 시기를 잃어서는 안되겠다고 기마대 600명을 파견하여 사면으로 포위한 뒤 통첩(通牒)을 보내여 이에 복종치 않을 경우에는 강제적으로 무장을 해제할것을 경고하였다. 이 경고를 받은 1,400명가량의 싸할린부대는 할수없이 자유시로 왔으나 시내의 주택부족으로 <스람스크>촌에 주둔하게 되었다.
ㄷ. 결론
이상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대개 黑河事變에 대하여 主觀이 각기 다르니 이것은 北京에서 日本公使 芳澤과 쏘련대표 카라한간에 캄차카반도에 대한 어업권문제회이에서 쏘련령토내에 있는 韓人革命團體의 무장해제를 약속한데 있다고 잘라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때의 사실이 증명되는 바이고 또는 우리 혁명인사가운데 파벌적인 시기(猜忌)와 의혹(疑惑)과 마찰(摩擦)이 있었다하더라도 청산리전역의 쓰라린 경험에 비추어 전만주에 걸쳐 상상할 수 없는 왜노(倭奴)의 보복적참화를 당한 우리 민족으로서 다시 흑하사변이 우리 혁명단체에 의하여 감행된 것이라면 도저히 민족적량심으로 용사(容赦)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天理와 人事가 우리 한족에게 까닭없이 惡刑을 주어질 아무런 因果關係가 없을 것임을 부론(附論)한다.
※ 黑河事變을 응당 自由市事變이라 해야 옳은 것이다. 黑龍江을 國界로 하여 남쪽기슭에 있는 것이 중국의 黑河市고 그 마즌켠 북쪽에 있는것이 쏘련의 自由市인 것이다. 자유시를 해란포(海蘭泡), 布拉(블라고), 戈维申斯克(베쒠스크) 라고도 하는데. 사변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성명: 나의 이 력사소설은 전부가 자료로 엮어진 서사시적 대장편이다.
아직 정식출판이 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 누구건 자료를 옮겨쓰는것을 허용치않는다.
이를 어기고 도용이 발견될 시 책임을 추궁할것이며 그 후과를 전부안길것이니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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