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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노란울금향
김송죽
그날도 나는 강변공원의 벤취에 홀로앉아있었다. 그것은 한백옥으로 만든 <<비파타는 녀인>>석상가까이에 있는 철제의 흰색나는 벤취였다. 아침단련을 시작하면서부터 구역의 조련장에서 로인디스꼬를 추고는 그것이 끝나는 길로 장거리보행을 하여 이곳까지 와서는 담은 몇분이라도 앉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이젠 나의 습관된 소일이며 일과였다. 도도히 흐르는 송화강의 철석이는 소리를 듣노라면 왜선지 잡념과 번뇌가 가셔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어서 나는 좋았던거다.
젖빛안개에 쌓여있는 아침의 강변은 조용했다. 내가 한창 저 아래로부터 웅글진 고동소리를 틀어올리면서 올라오고있는 륜선에 눈을 팔고 있는데 은연중 웬 녀인이 나타나 말을 걸어오는 것이였다.
<<저... 조선분이죠?>>
고개돌려 보니 귀밑머리 희슥희슥한 부녀였다. 여기서 문득 제 동포를 만나고 보니 미상불 반가운 일이라 나는 그렇다고 알려주고는 례모를 차리느라 일어나 그녀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남성의 고유한 호기심을 갖고 슬적 눈빛질해보았다. 미모의 바탕이여서 아직은 그리 역겨울정도아니지만 환갑줄을 넘긴 녀인이였다.
우리는 서로가 초면이지만 별로 거북스러워 함이 없이 벤취에 나란히 앉았다. 대개 이런 경우면 대화가 자연스레 이뤄지는 법이다. 그는 성이 선우씨요 올해 나이 62세, 자기도 한때 아침단련을 했건만 고혈압병이 심해져 지금 치료중이라 자아소개를 했다.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자아소개를 했다. 헌데 내가 내 성명과 나이를 대고나서 내내 촌에서 살다가 아들따라 몇백만 시민이 붐비는 이 대도시로 온지 인제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고했더니 그녀는 웬 일인지 아, 그런가요! 하고 적이 놀래면서 낯빛이 굳어진채 나를 이윽토록 눈밖아보다가 그만 아무말도 없이 일어나 훌쩍 가버리는 것이였다.
아니 왜 저러는거냐? 내가 실례한게 뭐길래?... 나는 그녀의 저돌적인 행동을 도무지 리해할 수 없었다.
이틑날도 나는 로인디스꼬가 끝나자바람 여전히 강변공원으로 가서 그 철제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어제의 그 녀인이 혹시 다시나타나지나않을가 사위를 은근히 살폈다. 어제 그녀가 왜 그같이 리해하지 못할 거동을 피우고 사라져버렸는지 그걸 몹시 알고팠던거다. 헌데 내앞에 다시나타난건 어제의 그 귀밑머리 희슥희슥한 녀인인것이 아니라 미끈한 몸매에 청춘의 생기가 흐르고 있는 30대의 매력있는 아가씨였다.
<<소설을 쓰시는 분이죠?>>
저쪽에서 먼저 물어보는 말이였다.
<<그렇소. 그런데 누구지?...>>
내앞에 나타난 아가씨의 모색이 어제의 녀인을 닮은데가 있는것 같아 나는 속으로 넌 아마 그녀의 딸이겠구나 짚으면서 머리를 갸웃했다.
과연 아가씨가 자기는 내가 어제 여기서 만났던 그 녀인의 딸인데 리향숙이라 부르고 나이는 32살이며 어느 한 보험회사에 출근한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생명부지의 이 젊은아가씨가 나를 알고있는게 이상한지라 다시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리향숙이라했지... 내가 어디서 봤더라?... >>
<<선생님은 절 보신적없어요. 나도 선생님을 처음뵙는걸요. 하지만 저의 어머닌 선생님을 잘알고계셔요.>>
<<뭐라, 아가씨의 어머니가 나를 잘안다!?... >>
나는 경아해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인은 그래서 어제 놀램이 가득한 낯색으로 나를 그토록 눈여겨본거로구나! 그런데 나를 잘 안다면 왜서 한마디 말도 더 없이 그모양으로 훌쩍 가버린단말인가? 대체 누군데 왜서?... 어쩌면 내가 그녀를 어디서 딱 본것같기도하고. 그러나 언제 어디서 봤던지 도무지 생각나지를 않았다. 풀기어려운 의문만 착잡하게 갈마들어 나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이럴 때 향숙이가 입을 다시열어 무지하게 깜깜해진 나의 머리를 틔워주었다.
<<선생님께선 선우미영이란 녀성이 생각안나셔요?>>
나는 아까보다 더 놀랬다.
<<아니, 그러니!... >>
선우! 미영!... 두자성, 두자이름ㅡ 그것이 거대한 굴착기모양으로 우르릉거리면서 내 가슴깊이에 묻어둔지 너무도 오래고 오래서 이제는 퇴색해버린 추억을 다시금 뚜져냈다.
내가 중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8년도 여름이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연변에서 북대황건설을 지원한다면서 달려온 한패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중에 뽈을 괜찮게 찬다는 성이 리씨인 청년 E가 있었다. 그와 나는 잘아는 사이가 아니였다. 한데 어느날 반양머리에 준수하게 생긴 그가 느닷없이 나를 찾아와 자기는 연변 도문에 사는 고모댁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사범학교를 다니는 녀학생 하나를 보고 그만 반해버리고말았는데 나더러 자기를 대신해 련애편지를 써달라는 것이였다. 이런 제길할! 제앞코도 못닦는 주제에 싱겁게 그따위짓을 해? 나는 첫마디에 거절해버렸다. 그랬더니 E가 이틑날도 사흗날도 나를 찾아와 애를 먹였다. 그래도 안될것 같으니 나중에는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사정하는 것이였다. 그녀자를 얻지 못하면 자기는 정말 죽고말리라면서. 상사병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사람이였다. 말이 아니게 축가는 꼴을 보니 정말 죽을것만 같아 나는 그만 그럼 써주마고 대답하고말았다.
내입에서 련애편지를 써주리란 대답을 받아내고야 만 그는 녀사범생의 사진을 내놨다. 문학초학자였던 나는 그때 쏘련작가 아델 구뚜이의 <<보내지 않은 편지>>를 읽어본지라 거기것을 인용해가면서 련애편지를 멋들어지게 썼다. 저쪽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그래 나는 다음의 편지를 련속날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그만 사진에 박힌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리고말았다. 그러니 이름이 E것이였지 기실은 내가 그 여자와 련애를 해버린 셈이였다. 열 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고 E는 끝내 목적을 이루어 이듬해봄에 북방을 떠나 연변의 그 처녀한테 장가를 갔다. 먹기는 발장이 먹고 뛰기는 말더러 뛰란다더니 내가 무슨꼴이 됐겠는가.
우리는 10년만에 다시만났다. 그때는 문화혁명이 한창 열기를 뿜어대던 시기였는데 E는 공가(公暇)에 우리 마을에 들렸다가 <<반혁명분자>>로 끌려나와 조리돌림당하면서 공공변소를 치고있는 나를 보더니 난 네덕에 장가를 잘갔건만 넌 신세가 이렇게 됐구나 탄식하고는 내가 몹시 궁금해하던 제 집의 형편을 알려주었다. 내가 쓴 련애편지의 작간으로 약혼이 되자 E는 약삭바르게도 금과(禁果)부터 따먹었다. 그래서 배가 불러진 녀인은 하는 수 없이 학업을 중도이페지 하고 서둘러 그렇게 잔치를 했던거다.
한데 지내고 보니 남편이란것이 허울만좋았지 원체가 판무식쟁이요 자기는 속히워도 대단히 속히운지라 그만 절망하고말았던거다. 선우미영은 타락하여 5년간이나 집도 전혀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어찌하여 아직 장래가 먼 내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각오를 해서 내가 남편의 눈을 티워줘야지 결심하고는 깔고들어앉아 글을 배워주었다. 그래서 남편은 마침내 무식을 면하게 됐고 입당까지 하여 거기 마을서 지부서기로 사업하고있었던 것이다. E는 그때 자기처는 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라도봤으면 한다고 했다. 사실말해 그녀의 전도를 망쳐먹은건 E인것이 아니라 나였다. 하기에 나는 그녀를 만날가봐 무서워했다.
한데 그녀가 인생의 석양을 안고 내앞에 돌연히 나타났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 향숙이는 자기 아버지는 간암으로 10년전에 작고한 것이고 그가 저세상사람이 되자 딸인 자기가 지금 어머니를 모시는중이라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제 여기서 전혀 생각밖에 나를 문뜩 만나고보니 감회(感懷)가 너무도 사무쳐 그만 드러눕고말았노라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럼 내가 가봐야겠군! 그런데 어쩐다?... >>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어떻게 만나야할지 생각이 미처 돌지 않았다.
<<붉은 울금향 한송이만 가져다주세요, 꼭. 그러시면 어머닌 기뻐할거얘요.>>
<<아니 그 꽃을 들고가면 그건 내가... >>
나는 떨떠름하여 말을 더 잊지 못했다. 꽃말에 붉은 울금향은 바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아닌가! 헌데 얘가 왜서 제 어머니한테 그 꽃을 꼭 가져가라는건가?
<<왜요. 감히 그러지 못하겠나요? 선생님은 꼭 그래야해요. 어머닌 얼마나 그리워했다구요!>>
내가 우유부단하니 향숙이가 하는 말이였다. 이거야말로 딸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과부어머니를 짝맞춰주자고하는게 아니고 뭔가. 참 지금의 젊은이들은!...
나는 로친이 있는 사람이다. 과부집문턱이 말이 많다고 소문이나 나면 내가 무슨꼴이 되겠는가. 로맨스 그레이를 하고싶지 않은 나였다. 하여 나는 붉은 울금향은 커녕 감히 찾아가보지도 못했다, 군자의 도덕을 지키느라고.
이러구러 3일이 지나 아침에 강변공원에서 향숙이를 다시만나게됐는데 그 애가 울어서 눈이 부어 있었다. 얘가 왜 울었을가?... 의문이 머리를 때리는데 향숙이가 나보고 하는 말이 자기 어머니는 간밤에 뇌익혈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몹시 악연했던 나는 노란 울금향을 사들고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후회가 그지없이 골풀이치기 시작했다. 내가 왜서 그녀의 생전에 붉은 울금향을 들고 가지를 않았던가? 도덕, 도덕, 무슨놈의 개떡같은 도덕이란말인가?... 나는 그녀앞에 다시한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만 것이다.
2000. 1. 28 <<은하수>>
튤립ㅡ 울금향
꽃말ㅡ 붉은울금향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노란울금향 (끊어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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