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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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의 여성관ㆍ연애론
2012년 11월 17일 21시 26분  조회:5005  추천:55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7. 나의 여성관ㆍ연애론


 
남자는 두뇌로 사고하지만 여자는 자궁으로 생각한다.
남성은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같이 노출된 채로 소리를 낸다.
여성은 화원 속에 감춰진 미궁(迷宮)같이 미스터리의 세계다.

그리고 그 미궁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영원한 고향이다. 그래서 인가. 남자에게 있어서 그곳은 항원의 매력이고 유혹이며 신비의 궁전이다. 그 신비의 미궁을 찾아 남자는 영원히 미쳐있다. 화원을 침범하고 그 기나긴 촉촉한 복도를 거쳐 자신이 왔던 흔적을 남기려고 낙서를 한다. 물론 잘된 낙서는 작품으로 결실되고, 잘못된 낙서는 쭉정이로 사라진다.

그때만은 남성은 성난 남성이 된다. 성난 무소의 뿔처럼 충천(沖天)한다. 작품 탄생의 흰 먹물을 뿌리고 나면 그 찰나에 시들어 든다. 말랑말랑한 찰떡같이 우리 노래에 있듯이 “고개 숙인 옥경이”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은 어떠할까? 대조적으로 그녀들은 항상 미궁으로 통한 복도는 촉촉한 감촉으로 젖어 있다. 이는 영원한 감수성의 天國이다.

그런 감수성의 유연함은 샘물과 같이 생명을 탄생시킬 化力이 있으며, 그 사색 역시 유연하고 촉촉하다. 그래서 남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촉촉이 감싸주는 유연한 보자기의 부드러움에는 이기지 못한다. “以柔克剛”의 역할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 여성은 남성을 포근히 감싸주는 보자기와도 같다. 그 보자기의 모양은 예쁘다. 꽃 같이, 이파리 같이 아리땁고 종소리 같이 은방울같이 감미로운 美聲을 낸다.

세상의 動物들은 죄다 수컷이 화려하고 예쁘지만 인간은 여성의 용모와 스타일이 더 아름답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조화력인지, 여성 그 자신의 조화력인지 모르겠다.

<<벌거숭이 원숭이 (裸猿)>>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동물 행동학자 디즈몬드ㆍ모리스는 동물이 주위의 위험성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무까지나 돌맹이나 풀색 같은 색깔내지 모양으로 몸을 변신 하는 것으로 적을 “속이는” 천성을 지적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인간의 여성이 아름다운 입술과 매력적인 유방은 기실 제각기 발정한 성기와 커다한 엉덩이의 이태(異態)라고 한다. 성기와 엉덩이는 4각(脚)으로 걸어 다니는 암원숭이와 수컷을 유혹하는 중요한 신호 장치였다. 그런데 인간이 직립하여 보행하기에 뒤에 감춰진 성기는 가리워진다. 대신 인간의 여성의 입술과 유방이 성기 대신의 구실을 한다고 한다. 逆說的으로 여성의 매력은 “기만”으로 이룩됐다는 견해다. 그러나 그 “기만”은 역시 아름다운 덩어리이기 때문에 남성은 영원히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生物的, 動物的적인 유물시각으로부터 나는 여성과 남성의 異質性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이질 되기 때문에 “異性”이라 칭하지 않은가. 여성과 남자의 복잡한 이성적 코드를 푸는 작업은 아무래도 物体로서의 異質性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그 위의 形而上學的인 담론은 모래성 같이 순간에 무너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여성과 남성의 세계는 그 생물적 기초로 두고 긴 세월동안 육성되어온 심리, 정신적 문화의 세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性”에 대한 최초의 감성적 인식은 유년시기로부터 낳아 길러준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통해서 시작 되는 것이다. 어렴풋하고 막연하나 그 성의 이질적 性 을 느낀다.

어머님은 병약한 체질이었으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이며 똑똑하고, 독서를 별로 안 하셨지만 비평적인 기질을 가지셨다. 그리고 아량이 넓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그런 관찰력이 뛰어나신 분이셨다.

그런 어머님은 한번 도 체벌을 하신적도, 강제로 공부하라고 횡설수설 하신 적이 없다.

아버님은 대조적으로 건강하셨으며 40대에도 20ㆍ30대와 같이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회 때 단거리를 달리셨다. 독서를 즐기시고 과묵하셔서 변재는 무디었으나, 글씨는 달필이셨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리고 實容하셔서 너그럽고 타인 탓을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누구나 좋아하는 “老好人”의 타입이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큰 결점은 언어설복력이 약한 탓이어서 그랬는지 타이름 대신 작은 일에도 손을 대고 하셨다.

그런 것이 나나 동생들에게는 꽤나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님과 할머님께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곤 했다. 할머님과 어머님이 그런 아버님을 말로 몰아 부칠 때 나는 쾌감적인 위안의 보상을 느끼곤 했다.
모택동의 전기를 보면, 소년시절 때 맹호 같은 아버지의의 질타가 두려웠던 모택동의 “모성의존증”(mother complex)이 보인다. 아버지의 꾸지람이나 체벌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등 뒤에 서서 불만의 눈초리로 쏘아 보면서, 어머니의 구원을 얻었다.

실제로 성년의 모택동의 자백에도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했고 어머니의 등 뒤에서 숨는 자신의 모친착종(母親錯綜)증상에 대해 기탄없이 얘기했다.

나는 성년이 된 다음에도 역시 어머니를 이탈하지 못하는 정신적 “모성의존증” 증상이 약간 보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동성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의례 여성, 모성에서 그 “공격받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어머니의 모성과 같은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처럼 간주된다.

거물 원세개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수많은 공격을 받고 그 억울함의 상처가 아플 때면 사랑하는 애첩의 유방에 머리를 묻으면 아이처럼 흐느끼는 드라마의 신을 보면서 나는 심히 감명을 느꼈다.

동양 남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어머니와 아내와 이성의 3자 역할을 한다는 말은 이래서 생긴 것이다.

남자는 약자이다 제 아무리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을 하고 제 아무리 도도히 호언장담을 해도, 제 아무리 고고한 품성을 자랑해도, 제 아무리 청운의 뜻이 있다하더라도 워낙 남자는 약자이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다. “상식”이라는 내용에 일정의 회의도 없이 “여자는 약자, 남자는 강자” 라는 착각에서 살고 있다.

사실 생물학적 지견에서 보아도 나약해 보이는 여자가 더 강하다. 의사들의 고백에 따라도, 여성은 “아픔”에 대해 남자보다 월등 강하다고 한다. 여자가 “아픔”에 대해 약해 보이는 것은 작은 “아픔”에도 남자보다 빈번히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진짜 크고 깊은 대통(大痛)에 있어서 여자는 오히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감수하며 그 인내력은 남자보다 수십 배 강하다.

출산의 산고는 남자들은 모르지만, 진통 속에서 3천g의 아기를 그 가냘픈 여체가 낳는 것은 남성은 상상하지 못한다. 십 개월의 임신기, 출신의 진통, 1년의 보육, 그 고통의 연속과 복잡함을 겪고도 여성은 또 다음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본질적인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강하다. 남성이 강한 것은 순발력 체력뿐이었지 이는 지속적 생명력과 무관 하다” 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강한 이유는 (1) 여성은 아픔에 둔감한 것 (2) 출혈 상처에 강한 것, (3) 환경 적응력이 우수한 것 이 3점을 들고 있다.

대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성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여자가 없었다면 우리 남성들의 생활은 처음엔 원조에서, 다음엔 열락(悅樂)에서, 마지막엔 위안에서 탈락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내가 이 말에 동감인 것은 어머님의 강인한 생활력과 사랑에서, 그리고 나와 결혼한 아내들과 연애를 해온 복수의 여성을 통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 보다 더 실감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교과서를 지니지 않은 선생님이시다. 여성을 통해 교과서적 지식이 아닌 삶의 방법, 정신적 에토스의 강인함, 관용 등살아 있는 철학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지식인”으로서의 나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런 공격의 그물망에 포로 되지 않고, 그 그물망을 나의 여가를 즐기는 테니스 라케트로 즐기는 지혜와 여유는 모두 어머님의 母校와 함께 여성의 아픔에도 견딜 수 있는 생명력 넓은 부드러운 감성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남성은 사회적으로도 스트레스에 약하고 굶주림, 아픔, 추위 따위의 생리적 스트레스에 여성보다 훨씬 약하다. 여성의 염색체는 두 개의 X가 서로 보완해 주며 생명유지를 위한 중요한 유전자가 많이 구비돼 있다고 과학연구 결과가 있다.

게다가 여성의 몸은 쓸 때 없는 소모가 없고, 작은 에너지로 생명유지가 가능하게끔 돼있다고 한다. 또한 여성은 성이나 신체에 리듬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리듬은 달(月)의 리듬으로서, 발신원은 체내 시계이며, 그곳에서 정보를 받아서 난소가 달의 리듬을 갖는다고 한다.

태양계에서 사는 생물로서 달의 리듬을 지닌 여성이 유순하고도 강한(柔剛)의 자연체 구조를 이룬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약해 보이나 기실은 강한 여자와 강해 보이나 기실은 약한 남자.

여자와 남자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 같다고만 인식하는데서 여자와 남자는 오해가 생기고 충돌이 생긴다.

여자는 “自然”이고 남자는 “文化”라는 서양의 말도 있다. 남성우월주의의 발상이지만, 결국 자연에 적응하는 가운데 육성된 적을 양식이 곧 문화가 아닌가. 그리고 보면 이 말에는 여자가 남자를 훈육시킨다는 진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자연과 文化의 대조만큼 이질적이다. 화성인과 목성인인 만큼 다른 것으로 나는 본다. 좀 과한 표현이지만 이질화된 두 세계이다.

30년대 활약한 귀재 이상의 지교였던 역시 일류의 문장가인 이태준(李泰俊ㆍ1904-?)은 명작 <<무서록>>에서 이렇게 이성을 말하고 있다. 참 재미있는 비유로 남녀의 이질성을 설명하고 있다.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처럼 최대, 그리고 최적의 상이물(相異物)은 없다. 같은 조선 복색이되 우리 남자에게 여자의 의복은 완전히 이국복(異國服)이다. 우리가 팔 하나 끼어 볼 수 없도록 완전히 이국복이다. 같은 조선어 이지만, 우리 남자에게 있어 여자들의 말소리는 또한 먼 거리의 이국어(異國語)이다. … 우리에게 여성은 완전한 이국(異國)이다.”

그러면서 이태준은 “같이 아는 정도라면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우리 남성은 늘 더 신선하다” 라고 고백한다. “다른 것끼리가 즐겁다” 라는 이유를 밝힌다.

“이성끼리 쉽사리 석탄같이 열이 생기고, 동성끼리는 돌맹이어서 마찰이 잘 생긴다” 라고 한다. 따라서 “남성끼리의 십년 정보다 이성끼리의 일 년 정이 더 도수를 올릴 수 있는 석탄화 작용” 이라고 갈파한다.

이태준의 말들은 나의 심정을 대변 한 것 같아서 좋다.

남자에 대해 여자는 자기인식의 거울이다. 적어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험을 통해 “여성이 자기 발견의 계기와 경상(鏡像)이 되었다. 마치 달린 것과 감추어진 것. 불룩 나온 것과 민민한 것, 화원과 검... 이러한 차이로부터 남자와 여자는 서로 상대의 他者성에 눈 뜨며 자신을 있는 것과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기술은 삼가 하지만, 농담 적으로 말해 문자 그대로 나는 여성의 덕분에 남성으로 설 수 있었다. 좀 노골적인 치졸한 표현이긴 하나, 나는 여성들에게 더욱 사랑 받기 위해, 대장부 남아로서 출세해야 되고 더 좋은 글도 써야 하겠다는 원동력(原動力)이 생기기도 했다.

남자는 아마 출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에베레스 정상을 정복한 힐러리 경이 “왜 산에 오르냐?” 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 라고 답했던 것처럼 출세주의는 무조건 등산 같은 남자의 삶의 방식이다. 남자는 아무튼 그대로 두어도 뭔가 길과 계단을 선택하여 오르기를 하는 생물이다.

남자가 높은 곳을 바라고 오르는 “등산”타입이라면, 여자는 높이가 아닌 평면의 서로 횡적 비교 하는 나열식 동열(同列)을 즐기는 평지(平地)타입이다. 출세보다도 평지에서 걸어가는데서 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스트레스의 덩어리인 남자에 비해 유연한 동열지향의 즐거움은 참 부럽기만 하다. 여자의 감성적 지혜에 남자의 고놀적인 출세주의적인 이성(理性)은 때로는 오히려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무 높은데 오르려다 떨어지거나 하면 남자들은 많이 다친다.

그리고 실의의 슬럼프에 빠지기에 십상이다. 다만 남자는 그런 것들을 짐짓 여자 앞에서 감추거나 티를 안내려고 할 뿐이다. “남자대장부”라는 소제지에 붙여도 먹을 수 없는 알량한 자존심, 강박감 때문에.

“여자는 단지 일종의 天便, 여장부, 妖女, 女獸 혹은 인간전형이 아니라, 무한하게 열린 것을 기다리는 인간 실존으로서, 남성은 부단히 그 미지의 자기를 열어가는 무수의 열쇄이다.”

일본의 작가 武田泰淳의 말이다. 때로는 작가의 싶은 문학적 체험담은 학자의 연구보다 투철하고도 명징한 결론에 닿기도 한다.

여자에 의해 남자가 성장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남자에 의해 “개발”되고 성적으로도 성숙된 여성으로 성장된다.

여성과 남성은 생리적으로 성의 구조가 이질 될 뿐 아니라, 그에 비롯된 성차, 성애, 연애 및 결혼에 대한 감성, 인식도 이질적이다.

여성은 일단 성적 쾌락을 알았다면 그 성교시의 쾌락은 남자의 수십 배나 된다고 한다. 마치 귀 구멍이 가려울 때 손가락으로 후비면 시원하고 기분 좋은 것은 귀 구멍이냐 손가락이냐 하면 당연히 귀 구멍이다. 이것을 알면 남녀의 성적 쾌락의 차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성은 솔직히 성감 그것을 쾌락으로 빠져 느낀다. 그래서 여성들은 성교 때 눈을 감고 그 무비의 쾌락의 절정을 즐긴다. 그러나 남성은 눈을 뜬 채 여성의 쾌락을 느끼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 하려한다.

여자의 성감과 달리 남자의 성은 육체적 쾌감보다도, 오히려 자신에 의해 여성에게 쾌락을 안겨준다는 정복감, 탐험의 스릴 따위에서 쾌감을 더 느낀다.

조물주는 그래서 성의 쾌락을 남자보다 수십 배의 절정을 준 동시에 그에 대한 “벌”로서 출산의 고통을 부여해 주었다. 사실 곰곰이 살피면 성교시 여성의 절정에 달한 절교는 분만 시의 그 절교와 거의 똑같다.

나는 서양의 영향 하에 근년대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권리 신장을 외치는 “페미니즘”의 여성들은 왕왕히 성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 성의 무지에서 오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만일 그녀들이 좋은 남자에게서 성적 쾌락을 느끼고 만족했다면 적어도 그렇게 까지 페미니즘에 신경을 안 쓴다고 여긴다.

성차를 무작정 팽창, 확대시켜 성차별, 성천시로 불려도 결국 여성과 남성의 이질성을 무시한 愚를 법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생리적으로 이질 된 남녀에게는 서로의 능력이 있는 만큼, 결함도 있기 때문에 서로 상호 보완이 되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양극을 이루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사랑이란 애정에 대해서도 여자는 애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심정, 염원이긴 하나 너무 감성적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은 자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남성은 영원한 사랑을 여자처럼 깊숙이 믿는 편이 아니다.

20대에는 믿었으나,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임에 따라 애정이 영겁불변으로 지속한다는 착각에 눈을 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은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몽테뉴는 “결혼은 새조롱과 같아서 밖에 있는 새들은 들어가고 싶어 하나, 안에 있는 새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필사적이다” 라고 갈파했다. 같은 말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격언도 있다.

“영원한 사랑의 생명은 불륜에 있다.” 라는 말도 역시 이를 두고 한 말 일 것이다.

사랑이 일종의 열병이라면, 그 열병은 오로지 결혼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혼 후 사랑은 식고 남는 것은 일상의 냉철과 지극히 평범한 안정이다. 대체로 4년, 내지 7년에 결혼은 파탄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남자의 성은 한 특정된 이성에 고착돼있지 않다. 성감의 농도가 박약하기에 특정적 파트너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없다.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여성을 상대로 하는 정적 긴장감에서 흥분하고 쾌감을 느끼고자 한다.

그래서 “여성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족하지만, 남성은 본능에 맡긴다면 곧장 아내에 대한 배신으로 직결된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남편의 그런 “배신”은 꼭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의 “배신”만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다하더라도 성적으로 “외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히 있다. 창녀와의 일이 그렇다. 창녀의 직업이 인류의 최고(最古)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남자들은 그래서 “일부다처제”를 창출해냈던 것이며, 요즘도 “불륜은 남자의 앞가슴에 단 훈장이다” 라고도 한다.

물론 일부일처제의 현시대에 무모하게 “불륜”을 정당화 시킬 생각은 추호만큼도 없다. 일탈한 귀재 근대의 학자 고홍명은 “일부다처제”를 수호하는 명언을 남겼다. 서양의 여성기자가 그에게 일부다처제의 이유를 질문했을 때 한 답이다.

“차 항아리가 하나고 찻잔이 여럿인 것은 있어도, 찻잔이 하나고 차 항아리가 많은 것 봤어요?”

그 영국 여기자의 답이 또 걸작이다. “그럼, 한 찻잔 안에 여러 숟가락을 넣어서 잘랑잘랑 소리 안 나는 거 봤어요.”

일부다처제속의 처첩들의 옥신각신 시기와 싸움을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지금 같은 시대에 “일부다처제”는 지구위에 지극히 개별적 민족을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변상적인 양식은 제도가 아닌 실제 행위를 남자들 (지위, 관리, 부유를 장악한 남자)가운데 실존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세상이란 늘 이렇게 수평면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수평면하의 진실이 병행되었다.

황차 사랑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영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즉 문화의 하나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이래라 저래라 제3자가 간섭할 바는 아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부딪치는 큰 문제 중에 이성과의 만남, 사랑은 탈락시킬 수 없는 덕목이다.

나는 욕심 같아서는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많은 여성을 만나고, 또 사랑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성은 동성에게서 배울 수 없는 많은 他者적의 것을 가르쳐 주고 또 나 자신의 향상을 밀어주는 에너지로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자신을 이성의 거울로 비추어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복사꽃”이라 하겠다. “復數(복수)의 사랑을 꽃 피우며” 자신을 완성해가는 자기동일성의 확인과 그 작업의 프로세스.

앤소니 기든스는<<친밀성의 구조변동>>에서 이성과의 사랑은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만들어 가고, 동일성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규범이라” 라고 했다. 서로 상대의 정체성, 이질을 승인하면서 공존(共存)의 감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사랑이다.

두달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門)의 기자가 인터뷰중, 나에게 문득 “좋아하는 여성의 타입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깊은 사색 없이 나는 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야마구치모모에(山口白惠合)라고 말했다. 썩 미인은 아니더라도 청초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보이는 여성이 좋다. 너무 완벽한 미인에 나는 주눅이 들고 위압감으로 기가 못 필 것 같다. 왜냐하면 10층에서, 아니 18층엣 떨어진 메주같이 생긴 내가 어찌 완벽한 미인과 언감생심.....

그리고 청초, 유순에 지성이 겸비된 여성, 일테면 요시나가사유리 (吉永小白合) 아니면 사카이노리코(酒井法子)형, 한국 여성으로 말하면 오연수 아니면 강수연 전도연 쯤이나 될까? 중국 한족여자는 美人일수록 너무 강해서 어딘가 공포감을 느낀다. 그냥 멀리서 보는 것으로 눈요기나 하면 그만이다.

버마재비를 아는가? 그것의 암컷은 수컷과 교미 할때, 수컷의 머리부터 먹기 시작한다. 먹히울수록 머리가 갈기갈기 찢기 우는 수컷은 더 활발한 교미를 하면서 죽는다.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숫 버마재비를 암컷은 무자비하게 먹어치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절(絶)하는 잔혹한 행위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크게 쾌감을 느낀다고 하는 동물행동학자의 연구가 있다.
휘트먼의 시에 “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늙은 여인이여!” 라고 읊은 구절이 있으나, 나는 늙은 여인, 즉 年上의 여인과 사랑 해 본 경험도, 해볼 애정도 없다.

나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年下의 여성이 좋다. 아마 30세의 선비였던 할아버지가 15세의 할머니와 결혼한 것처럼 우리 가족사에서 보면 옛적부터 전승해온 DNA탓일까? 나는 지금의 아내도 12세 연하, 그리고 연애 해 온 여성도 거의 다 10세 연하였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 자신도 명확히 준비된 답이 없다.

연애, 사랑은 확실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고, 마음 따라 발길 따라 가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바람에 부는 대로 책장이 번져 지듯, 번져 진 페이지의 내용을 읽으면 된다.

바람은 글을 몰라도 언제나 책장을 번지니 아 아니 소탈한가!

연애도, 결혼도, 그리고 글쓰기도 어쩌면 이같이 자연의 정해진 숙명적인 것이 있다고 나는 감으로 믿는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문학영역뿐만 아니라 박물학, 물리, 생물, 역사, 고고학, 등 영역에서 많은 실적을 남긴 일류의 대형 “지적거인”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연애의 왕자이기도 했다. 그의 생을 지적 창조와 함께 연애의 행각이 울긋불긋한 색깔로 장식된 생이기도 하다. 83세에게도 19세의 아가씨를 추구했던 그는 문화와 성호(性豪)를 경비한 희대의 천재였다.

나는 성공한 인물에서 공통성을 발견한다. 비범한 지적창조, 많은 방대한 작품, 일탈한 성격, 병약 아니면 변태, 그리고 범인을 초월한 성욕, 성적능력, 물품의 성능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진짜 性能이다.

성(性)이란 文字그대로 살아있는 마음이 아닌가. 마음이 살면 인생이 산다. 삶의 에너지가 자연 왕성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성인류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지적인 일을 하고 있는 인간일수록 상옥이 강하다는 것이다. “발정기에서 해방된 원숭이”로서의 인간은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대뇌신피질의 정신에 활동에 영향 받기에, 쾌락을 위해서만 이라도 성적 욕망이 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며 체험적으로 납득이 간다. 지적 창조의 짜릿한 쾌감은 어딘가 꼭 성적 쾌감과 유사한데가 있다.

그런 ‘幸福’을 중국인들은 ‘性福’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괴테는 자신의 풍부한 성편력 체험으로 이런 격언을 남겼다.

“영원의 여성은 우리를 인소하고 간다” 라고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참 멋있는 명언이다. “남존여비”의 유교적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나는 이것이 나의 연애, 여성관의 굵은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고백한다.

“원래 여성은 기실 태양이었다” 라고 한 여성이 있다. 1911년 일본의 신여성의 등장을 선고한 기백 있는 명언이다. 신여성 지식인의 대표인 히라츠카라이데우가 여성잡지《靑踏(청답)》창간호 권두언에다 쓴 말이다.

그렇다. 여성은 태양이다. 인류의 고향이다.

이 태양의 따사로운 빛 발아래서 나는 영원히 아이, 미성년의 소년이다.

나는 양광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으면서 죽을 때까지 홀로서기(獨立)한 지적 少年이고 싶다.

전세계 남성들이여, 태양의 밑에서 일치 단합하여 우리의 여성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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