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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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9. 越境과 月經(김문학) 댓글:  조회:10663  추천:45  2010-10-15
《신조선족》월경론 49. 越境과 月經김문학越境이 모두다 밝고 명쾌하고 즐겁고 스브드한것만은 아니다. 생소하고 이질된 他者의 세계속으로 진입하는 越境에는 반드시 月經같은 流血이란 통과의 례를 경험해야만 한다. 기묘하게도 “월경”의 同音인 이 두 단어를 연결시킴으로써 필자는 越境의 月經性的인 피를 동반된다는 고통, 고뇌, 負的面 등을 레토릭으로 구사했다.  女性의 生에 있어서 정기적인 出血을 통하여 성숙되고 완숙을 이루는 하나의 프로세스라 한다면 한개인 및 민족집단에서도 越境하는 月經을 통하여 한층 또 한층 변해가는 모습은 슬픈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사상(事象)이 아닐까.  작년 여름 중국을 방문했을때 조선족 지식인들과의 회식환담중 필자가 “우리 조선족에는 아직 ‘월경문학’이 없다”는 말에 한 기자가 “여성의 生理的月經文學인가?”고 우스개소리로  反問했다. 우리 여럿은 생맥주를 들이키며 킬킬 웃었다.  그뒤 필자는 越境과 月經의 同音語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다시 반추하면서 그 사이의 흥미로운 연결성을 “발견”했다.  사실 필자는 2001년 여름방학, 연변의 일부 지식인들이 “김문학성토전”을 대거 전개하고 있을때 서재에 두문불출하고 일본어로 《天馬의 크로니클(연대기)》란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주제는 “월경”이다.   越境하는 조선족지식인의 생태를 묘사한 장편소설이다. 400字 원고지 1200매의 분량을 써내려가면서 필자는 글쓰기의 배설적 쾌감을 만끽하였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건실한 두 다리와 성기(性器)입니다!”고 소설의 주인공은 호언을 서슴치 않는다.  이 호언의 주인공은 조선족 청년 작가이며 대학교수이기도 한 《馬文海》青年 마문해는 “무국적””세계인””문화박쥐”로 자칭하면서 일본을 거점으로 중국, 한국을 넘나들면서 서양에도 빈번히 출강하러 간다.  그는 이문화의 킬쳐 쇼크를 조우하면서 가슴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경의 식당이 되어 포지티브한 요소로 전환시키며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  소설의 전편에는 성애묘사가 매우 빈번히 나타나는데 그 표현은 감미로운 관능적 묘사로 돼있기도 하다. 지어는 생리월경중인 이성과도 화려한 성애전을 펼치기도 했다.  주인공은 최애(最愛)의 연인 마유미기 자살한뒤 미국에서 온 유대인 유학생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르트르와 버브월과 같은 계약동거였다. 그리고 그의 여성편력은 범지구적 스케일로 전개된다. 여러 종류의 인종, 각양각색의 여자들… 주인공의 손꼽은 여성만해도 26명이나 된다.  평론가 하츠시카세는 이렇게 평한다. “하지만 여기서 ‘성(性)’은 20세기말”에 유행했던 문학의 모험도 아니며 사회적 통념에 대한 안티테제도 아니며 또한 그에 대한 도발과 구제적 장치는 더구나 아니다. 《천마의 크로니콜》에 있어서의 《성애》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의 상징인 동시에 異文化와의 접촉과 지구인으로서의 의식을 상징하는 콘텐츠다. 거기에는 異民族,異文化와의 文化交涉의 쾌감, 流血,위안, 경계를 초월하는 자유와 무위자연이 숨쉬고 있다. 이외에도 소설은 제반 각도에서 일본사회의 편형성과 일본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변인, 디아스포라들의 생활상황과 그들의 희로애락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필자는 “소설은 아마 저자의 반자서전적인 작품일것이다”고 덧붙힌다.   필자의 “반자서전”은 필자에 대한 과찬이다. 90%의 픽션과 10%의 사실을 믹스시켜 만들어낸것이다. 그리고 조선족 작가가 쓴 최초의 일본어 장편소설이다.  필자가 여기서 표현하고 싶었던 욕심은 두가지 動機가 잠재되어있었다. 하나는 조선족의 “越境”소설의 空白을 메운다는 자부심, 또하나는 월경하는 조선족의 생활, 생태, 변용을 文學化해보고 싶었기때문이었다.  필자 자신의 체험 (기쁨 또는 슬픔)에서 出發하여 많은 조선족의 월경생태를 조합시켜 본것이 이 장편소설이었다.  주위에 많은 조선족의 越境에서 산출되는 아픔, 또는 땀흘리기, 피흘리기 눈물흘리기에서 힌트를 받고 우리 조선족의 월경의 프로세스를 形象化했다.  그리고 이제 이 책 《신조선족월경론》은 조선족의 월경을 정면에서 관찰하면서 월경으로 동반되는 조선족의 심각한 변동, 변용 등 영역을 알기쉬운 이론과 字體로 정리하고 싶은 목적에서였다.  기실 조선족을 포함한 인류의 월경은 소설에서 허구화한 주인공같이 그렇게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체험하는 유쾌함뿐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고통과 피눈물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주기적으로 유혈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완숙해가는 여성의 일생 프로세스와 같이 우리 조선족은 이같은 月經의 規境속에서 점차 성숙돼간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越境 이동과 함께 이동의 프로세스에 있는 조선족은 이 越境적 이동, 流動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완성돼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조선족은 완숙한 만족이 아니라 아직도 발전도상민족(물론 발전도상국적 출발성 민족이란 의미가 아니다) 즉 생성과정에 있는 민족, 떨린 민족, 중층적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오늘날 우리 조선족의 특색이다.   월경으로 말미맘은 조선족은 아직 미완성, 不定型이다.  조선족이란 “民族”이 獨自的集團으로서 존재할수 있는것은 이 유동성, 不定型의 특색이 있기때문이다. “신조선족”은 바로 이 不定型에서 생긴 참신한 조선족의 새로운 집단인것이다.     
42    45. “우리”는 엄연한 “他者”-한국과 조선족 댓글:  조회:7104  추천:38  2010-10-14
《신조선족》월경론 45. “우리”는 엄연한 “他者”-한국과 조선족의 “民族”적 상호인식 문제 김문학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方法”으로 필자는 한국인과 조선족은 상호인식에서 同壹屬性,같은 民族-겨레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이란 안일한 관념에 안주하여 모종의 “응석부리기”로 조선족은 한국에 대한 기대가 지대했다. 기대가 큰만큼 돌려받는 失望도 큰 법이다. “통일민족, 겨레”에서 되돌아오는 컬쳐쇼크도 컸을뿐만아니라 그 안일한 인식에서 오는 “응석부리기”는 다시금 “공격하기” 또는 “반발하기”로 전환된다. 한국인측도 마찬가지다. 반세기, 백년이나 이산돼 중국에서 살아온 동일민족, 겨레의 2,3세를 안일하게 여전히 “동포, 교포”라고 생각하여 상대해오다가 이질성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차별로 편향화 되버리는 성향이 강하다. 한국인의 혈연지역주의적 사고는 외국에서 살고있는 조선족까지 “한국인”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작년 한국에서 초청강연을 했을 때 주최측이 필자에 대한 연사소개를 “김문학선생님을 일본에서 살고있는 한국인 교수입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에서 “한국인 교수가 아니라, 재일 조선족 출신입니다”고 소개자의 표현을 정정해주었다. 조선족은 중국에 있을때 보다도 오히려 한국이란 모국, “同壹民族”이라고 인식했던 한국인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자기통일지속성, 즉 아이덴티티를 “중국조선족”으로 다시 귀추하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조선족과 한국인은 동일”민족”으로 안일하게 기성인식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성을 갖고있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것이다. 그 사실을 “감자”라는 식물을 동원하여 관찰하기로 하자. 소년시절에 필자의 할머니가 가꾸던 채마밭에서 감자를 캐던 먼 기억을 되살려 본다. 할머니의 감자농사는 진정 “석과누누(碩果累累)”라는 四字成語로 표현할만큼 언제나 풍작이었다. 그래서 감자수곡철이면 할머니를 도와 감자캐는 일이 즐거웠다. 가지과의 다년초요  塊狀의 지화경이 감자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크고작은 감자 알로 “주렁주렁”달려있다. 그런데 지상경에는 잎이 자라고 꽃이 피는데 꽃에서 감자열매가 열린다. 청포알만한 같이 연두색 색갈이다가 익으면 황금빛에 가까운 황금열매로 변하는데 그 맛은 좀 떫은 감맛에 달콤한 맛이어서 별맛이었다. 지하괴상의 감자와는 同根이지만 이 청포도알 형태의 열매는 모양도 맛도 전연 이질적이다. 말그대로 “同根異果”의 양상이다. 필자는 이 감자와 감자의 지상경에 열린 同根異果의 異質性으로 한국인 “감자”에서 열린 조선족의 “청포도열매”로 인식하는것이 매우 타탕하다고 본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이렇게 이미 “우리”로 이름짓는 “民族”은 엄연한 “他者”로 되어버린것이다. 최근 “民族”을 바라보는 정의의 기준은 많이 변하고 있다. 사실 “民族”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창조된 단어로서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민족”이 전파수용되어 정착된것이다. 영어에는 “민족”에 완전히 상당한 단어는 없고 people, nation, ethnicgroup, ethnics 등과 문맥에 의해 나뉘어 사용된다. 현재 세계에는 191개 국가가 존재하며 민족은 4000~5000종, 언어는 약 7000종 존재한다는 통계가 있다. 민족이랑 보통 일정한 양식화된 민족문화라고 불리는 文化를 共有한 인간의 집단을 말한다. 民族을 인접하는 他民族과의 상대적 독립성을 문화인류학에서는 지금까지 (1)객관적 기준 (2)주관적 기준 (3)객관적 기준+주관적 기준 (4)3세대 경과설이란 이 4개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었다. 좀 더 전개하면 (1)의 경우에는 언어, 종교, 예술 등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문화를 공유함에 포인트를 둘것이다 (2)의 기준은 그 집단의 성원들의 귀속의식, 정체성등 아이덴티티를 중요시 하는것이다 (3)은 (1)과 (2)를 통합시키는 정의법 (4)는 한 집단이 적어도 3세대이상의 지속성을 중요시 하는것이다. 조선족은 이미 4세 5세까지 왔으므로 엄연히 하나의 “民族”으로 볼수 있다. 1980년대전까지만해도 “민족”은 인류학에서 고정된 객관실체로서 포착하는 사고가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을 고정불변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착화시키고 변모, 변용하는 그 내실을 외면해왔다. 또한 고정된 “민족”관념은 내셜내리즘에 이용당하는 면이 컸던것이다. 이같은 폐단을 간파한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은 “민족”에 대한 재정의의 필요성을 감지했던것이다. 캐나다의 우크라이나계 사회학자 Isajiw, w.w.(이사제프)는 민족집단을 27종의 定義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의 리론에 따르면 민족집단의 객관성 속성중 제1위가 지리적 출자 또는 공통적 조상을 들고 있다. 그리고 언어는 제5위로 하락되는데 우리의 상식에서 좀 일탈된다. 특히 아이덴티티(정체성)인 민족의 중요한 팩터인데 제6위에 머물러 있다. 민족에 대한 연구는 “民族學”이라고도 자칭하는데 문화인류학 연구에서도 주요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현재 “민족”은 고정된 정태적인것이 아니라 늘 유동하고 있는 動能的프로세스속에서 사고해야 할 실체라고 인식하고 있다. 어떤 민족의 특징이라고 보이는것도 그 민족재부에서는 지역차에 의해 농담(濃談)이 생기며 계층차도 보인다. 민족주의 역시, 어떤 민족이 자신의 민족문화의 중심부분을 자기칭찬함으로써 민족단합에 이용하면서 때로는 그것이 거세찬 사회운동으로 편항되기도 한다. (아야베 츠네오 《알기 쉬운 文化大類學》2006) 이러한 “민족”의 변천의 추세에서 맞추어 보아도 한국인과 조선족의 그 “民族”동일성의 內實은 이미 분화되어 상당히 이질적 “민족”으로, “他者”로 변모를 이른것임을 인식해야 할것이다. 이질성을 인식하는것은 分裂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갈등, 이문화 갭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찾는 길을 의미한다. 요컨데 한국과 조선족이 안일한 “동일민족”의 스테레오타잎의 고정관에서 탈피하여 상대를 서로 이질된 “他者”로서 인식하고 바라보는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가장 아는것도 아마 자기 자신일것이며 그러나 자신이 가장 보아낼수 없는것 역시 자기이다. 그러므로 이질된 가치관과 문화로 “우리들”이라 불리우는 “他者”를 인식함으로써 자기인식으로 전환하는것이다. 그러면 서로의 긴장감이 풀리고 편안해지면서 상호인식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행할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타자를 존중하게 될것이다.    
41    44.“逆發”적 오리엔탈리즘(김문학) 댓글:  조회:6030  추천:56  2010-10-13
《신조선족》월경론44.“逆發”적 오리엔탈리즘김문학“신조선족”이 국내 대도시공간, 특히 海外로의 월경은 異文化와의 빈번한 만남을 의미한다. 異文化와의 만남은 또한 異文化에서 오는 “異文化偏見,偏向”이 반드시 동반되는 법이다. 알기쉽게 실례를 들어 얘기하면 조선족이 고국(조국)인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노동력 수출자로서 살면서 현지 한국인과의 갈등, 한국인으로부터 받는 편견, 차별, 멸시 등은 같은 겨레에 대한 일종의 “異文化偏見,偏向”인것이다. 이럴경우,하나 망각해서는 안될 측기의 사항이 있다. 즉 “한국”대 “조선족”은 기실 “異文化”대 “異文化”의 조우인것이다. 서로 100년의 各自生活圈子에서 獨自的으로 形成된 思考洋式이나 文化자체가 상당히 이질성을 띠고 있었다. “한겨레””핏줄”이란 막연한 동질감, 유대는 이 異文化의 허들을 넘어서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異文化의 허들과 담벽을 놓고도 경고하다. 따라서 異文化에 대한 무지, 몰이해로 인해 처음부터 자기문화 우위의 시각에 서서 異文化를 평하, 경멸하는 태도는 매우 강한 경향성으로 노정된다. 이문화에 대한 타집단에 대한 편견, 편향을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트”는 “서양”에서 바라본 “동양 (동방) ”을 의미한다. 팔레스티나 출신의 미국 비교문학가, 문화비평가 에드워드•사이드(said, Edward W)가 1978년 출간한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문화를 이해할수 있을까? 어떻게 이문화를 표상할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을 책에서 던진다. 그의 물음은 지구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인간, 문건, 문화, 경제의 직접 간접적 교류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 인류사회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띄고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발견”은 지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이드는 여직껏 단순히 《동양학》을 의미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과 (늘)《서양》이라 칭해지는것 사이에 설정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별을 바탕으로 한 사고방식”이라고 재정의 한다. 여기서 “오리엔트”는 협의적으로는 중동지역을 칭하지만 광의적으로는 지역과 상관없이 사용되며 그것에 동반되는 《오리엔탈리즘》 또는 “구종주국” 대 “구식민지”  ”선진국”대 “발전도상국”이라는 양자관계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에 대한 잠재적 우월의식이나 편견, 편향을 가리킨다. 사이드는 이 책에서 푸코의 언설적 개념을 원용하여 서양지식인, 서양인이 비서양지역에 대해 산출시킨 “추진성, 정제성, 적대성, 비합지성…”등 마이너스적 표상으로 획일하게 맞추어 평가절하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기 우월주위에 안주한 서양이 비서양에 대한 획실적인 편견, 평향 그것이었다. 사이드는 그후에도 서양지식인의 같은 맥락의 잠재된 기만, 편견설을 대위법적해독(對位法的解讀)으로 알려진 《문화와 제국주의》(1993)에서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늘 현대 세계사상을 리드해왔다. 사이드는 이문화의 월경적 글쓰기를 구사한 경계를 넘은 위대한 지식인으로서 세계정신사에 남을것이다. 물론 異文化,他者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 완벽한 표상이 이론적으로 至難이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 편향을 없애는것이야말로 상호 이해, 존중의 대안이 열리는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서양인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것은 우리 동양내부,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서양이 우리에게 행사했던 동류의 “오리엔탈리즘”이 엄연히 존재해왔으며 또 지금도 농후한 생채로 우리의 교류를 먹칠하고 있다는것이다. 그것을 최근 문화인류학들은 “역광(逆光)의 오리엔탈리즘”(아오키 타모츠)으로 지칭한다. 필자는 그것을 원용하여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일본이 과거 대만을 위시로 조선반도, 만주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행사한것은 그 슬러건이나 발상이 그 얼마나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피식민지 민족에게 남긴 상처, 민족의 드라우마와 함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었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고루하고 후발적인 정체성, 비합리성, 우매성, 미개성…”등 일본지식인과 대중의 표상으로 점찍혔던 “조선”과 “지나(중국)”을, 그들은 그대로 서양인이 동양인에게 행사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답습했던것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의 만남은 또 비슷한 편견, 편향으로 노정되었는데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후발성, 미개성, 비위생성…”등 일본인이 과거 조선인에게 표상했던 같은 표상으로 “조선족”을 평하,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과 조선족의 갈등은 사실 이문화에 대한 몰이해, 편견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팩터적 비중이 큰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인에게 행사하는 이문화 편격 역시 똑같은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이란 리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한국인에 대한 조선족의 표상은 대게 ”깍쟁이, 인심 박하고 인정 사정 없다. 같은 겨레. 민족인데도 정을 느낄수 없다…”와 같은 부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것은 결국 한국인에 향해진 조선족의 역발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의 김용택교수의 담론에 의하면 조선어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해”란 제목의 글을 쓰게 한 결과 2/3학생이 한국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2009년 9월) 10년전 조선족이 한국의 차별대우속에서 “옛날 일본왜놈보다 더 고약한 한국놈”하는 표상이 있었는데 필자는 《조선족개조론》에서 그 표상에 대해 이문화이해의 시각에서 비판은 가창력이 있다. 비판하기는 쉬우나 이해하기는 어려울까? 조선족이 이제 세계의 이문화지역공간으로 침투하면서 비판도 좋지만 안일한 비판을 속으로 삭혀 하나의 이문화이해의 “청명한 청주”로서 걸러내는 방법도 습득해야 할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방법이다.
40    43. 고래싸움에 새우등은 안터진다(김문학) 댓글:  조회:6593  추천:57  2010-10-12
《신조선족》월경론43. 고래싸움에 새우등은 안터진다김문학우리말 속담에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것이 있다. “남의 싸움에 제3자가 피해를 입는다”는 뜻으로 서로 문화가 다른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싸움에 중간에 낀 조선반도가 피해를 입은 비유구로도 사용된다. 이제 시각을 달리해서 이 속담의 고래를 異文化와 自文化로 설정하고 새우를 우리 자신의 개인으로 가정한다면 自他文化속에 끼인 개인의 상황적인 체험을 적극적으로 평가할수 있다. 개인은 누구나 自文化 말고도 많은 他文化의 고래들에 포위되어 살고 잇는것이 오늘 글러벌 21세기의 역사적 상황이다. 신조선족이 국내 생소했던 관내, 연해지구, 또는 남방文化속으로 들어가서 삶을 영위하는것 그리고 해외에서 생활하는것 또는 관광여행일지라도 주위에는 이미 異文化의 고래들과 맞서서 “격투”해야 하는 경우에 조우하게 되는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에전같은 발상이라면 이 고래와의 “격투”는 부정적 의미로 규정되었으며 그속에서 개개인을 새우같이 등이 갈라터지는 피해를 입는다고만 생각했을것이다. 고향을 떠나 조국을 떠나 “고래”싸움에 돌진하는 異文化체험을 冒險과 함께 슬픈 이미지로 각인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인간이 오늘같이 自文化와 異文化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강도가 높아진것은 전례없는 글로벌 세계의 文化現象이기때문이다. 文化가 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 환경일뿐만아니라 하나의 가치관체계이기도 하기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나서 자란 익숙한 자문화의 틀을 벗어난다는것은 그만큼 쉽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알수 있는 自文化를 깡그리 떨쳐버릴수 없는것은 그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 역시 비슷한 향수를 안고 살고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대학교수로 학자로 문명비평가의 얼굴로 생활한지도 20년이 되었다. 제아무리 異文化속에서 몸을 깊숙히 담그고 “세계인””코스모폴리탄”으로 자처한다하더래도 그 다나네기(양파)같은 중층의 피상을 박취하면 역시 중책에는 자신이 한국인도, 일본인도 중국인과도 異質된 “조선족”의 원초적인 아이덴티티가 반거하고 있는것이다. 아마 이같은 이문화의 경계로 살아본적이 없는 인간은 필자의 체험적, 文化적 아이텐티티와 향수에 대해 몰이해 할것은 뻔하다. 제아무리 일본요리요, 프랑스요리요 하면서 그속에 익숙됐다하더라도 필자는 역시 가끔 먹고싶은것이 바로 할머니가 끓여주던 추어탕에 어머니의 손맛인 감자장조림이고 연변의 아릿다운 아줌마가 따스한 손으로 전해주던 그 감자떡이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시합에 어느쪽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을 잘 받군하는데 그 질문조차 필자에게는 우습꽝스럽다. 왜냐면 필자는 무조건 한국을 응원하기때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팀을 그토록 침식을 잊고 응원에 열올리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당신은 ‘친일파’자격이 없네요.”하면서 농을 걸군 했다. 인간은 나서자란 익숙한 자문화에서 빠져나오기도 어렵거니와 또한 異文化와 간단없이 조우하고 격투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多重적 운명에서 빠져나오기는 더구나 어려운것이 아닐까? 이문화 자문화의 고래싸움에 우리의 등은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문화의 “충동”. “격투”를 통해 완성되는것은 새우가 고래로 변모되는것이다. 자문화와 이문화의 방대한 물을 흡수하는 거대한 문화의 고래로, 망명 작가 에리히 아우얼바는 “미숙한 인간은 한곳만 사랑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전 세계를 다 사랑하며 완숙한 인간은 아예 사랑의 불을 끈다”라고 말했다. 자타문화속에서 바야흐로 形成되는 신조선족의 이같은 완숙한 “인간상”은 기대하고 싶다. 그러자면 신변의 이문화속에 적극 침투하여 들어가서 이문화를 발견하고 체험하고 우수한것들은 수용해야 한다. 해외에 와서도 “고래싸움”을 피하고 이문화를 외면하고 “우리끼리”만 돌돌 뭉쳐다닌다면 이문화체험의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것이 된다. 일본에 사는 신조선족을 보면 물론 아직 計量的 통계는 없지만 중국에서 온 한족이나 한국인들보다 일본사회에 더 근접거리에서 침투하면서 살고있는 양상이 실감난다. 본디 “월경”민족으로서 월경 레슨에 익숙한 연유에서 보다 적극적인 적응상태를 노정하는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의미 중대하다. 신조선족의 우수한 일본어 역시 문화접촉을 스무드하게 보장할수 있는 文化武器이며 일본의 우수 문명을 흡수하는데 同時性팩터를 제공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9    42.”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 댓글:  조회:7709  추천:60  2010-10-11
《신조선족》월경론 42.”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1) 김문학 조선족 지식인으로 최초로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지역감정문제를 공론화한것은 필자가 “조선족개조론”에서 였다. 조선족 사회안의 “이질성 요소를 문화적 통합의 시점에서 조선족을 활성화시키자”는 합리적인 제언을 했는데도 연변 일부의 지시인들의 반발은 필자를 적대시하는 적개심으로 에스컬레일트했다. 필자의 뜻을 오독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감정적 반발의 빌미로 삼으려 했는지 알바없지만 역시 조선족 일부의 사고의 고루성과 시야의 폐쇄성을 노정한 대목이기도 하다. 하여 저자로서는 본의가 왜곡당한것과 연변의 현실은 예상했던것보다 더 참혹하다는 점을 재발견돼 마음이 무척 아팠다. 10년후 다시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것은 조선족사회내부구조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연변과 안쪽의 조선족 집단사회의 이질성인식은 미결된 인식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기때문이다. 재차 言明해두지만 필자는 그어떤 연변에 대한 추호의 혐오나 폄하의 뜻이 있는것이 아니며 안쪽 출신이라해서 안쪽만 예찬, 두둔하는 편향적 사고의 지식인이 아니다. 단지 조선족 공간을 이탈하여 해외에서 오랫동안 他者化시켜 바라본 우리의 모습을 인식 규명하자는 일념뿐이다. 이점을 부디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연변인”과 “안쪽인”의 異質性의 규명은 우선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연변사람은 어떤 성격이고 안쪽사람은 어떤 기질이고 하는 이미지는 상당히 일반인들속에 형성되고 있는것은 기성 사실이다. 물론 일반론적인 이미지는 실체험속에서 걸러낸것과 또는 사실과는 어긋나는것들도 옥석혼효의 양상을 나타낸다.  문화인류학에서 국민성, 민족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하는 연구영역으로 “심리인류학” 및 “문화와 퍼서 널리리”에 관한 연구방법이 있다. 결국 연변인과 안쪽인의 성격연구는 국민성이나 민족성의 하속영역에 속하는 도민성(道民性=조선 팔도 도민의 성격기질)과 직결돼 있으므로 그 도민성과 견부시켜 관찰해야 한다. 즉 연변사람은 다수가 조선 함경도(함경북도) 출신의 후손이며 안쪽사람은 더 광범위하다.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소수의 경기도와 강원도)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연변사람들의 함경도측에서 보면 이 여러 도는 모두 안쪽에 위치하고있기에 “안쪽사람”으로 불리운다. 실제로 연변의 변경오지에서 보아도 안쪽사람들은 중국대륙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것이다. 그럼 조선족의 水源인 조선8도 道民性으로부터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의 국민성(민족성)에 있어서의 지역차, 조선반도속의 문화구조나 민속 및 사고양식의 지방差를 “道民性”이라 칭하고자 한다. 道民性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은 國民性 또는 民族性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 문제와 동일하기에 동일方法으로 사고하는것이 타당하다. 흔히 선천적 인자와 후천적인 환경이 국민성 형성에 영향주는 인소라 하는데 결국 이 양자가 복잡하게 얽히여 개개인의 성격을 형성시킨적은 자명하다. 그러나 무수한 개인으로 이뤄진 집단, 민족을 비교할때 개인차는 서로 상살(相殺)돼버리는 까닭으로 각 집단, 민족사이의 선천전 차이는 묵살되고 오히려 후천적인 문화나 사회적 영향의 차이쪽이 더 압도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는것이 문화인류학자들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方法에 따르면 조선반도의 (한국•조선인)과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족 2,3,4세의 사고양식이나 행동양식은 조선인이란 유전인자를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이질적인 양상을 노정한다. 또한 엄밀히 말하여 같은 조선족이라해도 연변과 안쪽사이에도 여러가지 양상의 이질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편 인류학자들은 “민족과 국민간에 있어서 선천적 인자의 차이에 대하여 그 선천적 이질성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인류학자 W•코털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생후 1개월의 신생아를 미국과 일본의 비교관찰한 결과, 그 행동차이가 보이는데 미국 영아가 잘 울고 잘 움직이는데 반해 일본 영아는 줄곧 비교적 얌전하고 온순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후천적 영향이 거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선천적인 차이가 이처럼 미일 양국간에 존재한다는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1946년 미국의 유명한 문화인류 학자이며 《국화의 칼》의 저자인 루즈베네딕트가 동아시아 국민성 연구를 진행하는 “현대문화연구”프로젝트를 무어 “문화성격설(cultur-and-personality) ”이론을 구사했다. 프로이트의 리비드 발달단계의 의거로 연구한 결과 중국인은 토이렛트 트레닝(排便訓練)양식에 있어서 미국인과 달리 엄격한 훈련이 결여했다. 즉 “開裆褲”로 불리는 “짜개바지”을 입혀 언제 어디서를 불문하고 멋대로 배설행위를 방종시키는 양식이 정착돼있다는것이다. 이렇게 “독립자족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때문에”중국인은 언제나 성인이 되어서도 가래침을 맘대로 배설하는 비위생적, 비신자적 비근대적 습관이 보전됐다고 해독했다. 대만의 유명한 문명비평가이며 역사학자인 손융기(孫隆基)의 《中國文化的深層結構》는 미국 인류학자들의 이 중국문화성격설을 원용하게 전개한것이다. 이같이 유년기의 훈련, 환경이 국민성, 민족성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고 소중한 연구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국민성, 민족성 형성에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있은 “문화-퍼서낼리티론”또는 “심리학적인류학”영역에 있어서 기후, 풍토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 대표적 인류학자인 크라이드•글랙크 혼(Clyde Kluckhohn)은 “기후, 지형, 천연자원””물질文化가 획득하기 쉬운 상황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이 성격 형성에 큰 인자(因子)로 들고 있다.( Kluckhohn&Mowrer 1944) 동아시아에서 문화인류학연구는 미국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류학연구가 최고수준과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미국보다 월등 유니크한 “기후풍토론”을 활발히 전개한다. 유명한 철학자 문화연구자인 와츠지테츠로(和辻哲郞)의 명작 《風土》(1935)는 세계적 사이즈에서 풍토를 (1)몬슨형 (2)사막형 (3)목장형으로 유형화하여 문화양식과 민족성격의 이질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壹郞)도 풍토와 국민성에 관한 연구를 펼쳤으며 사바다 토요유키(鲭田豊之)는 《육식과 사상과 草食의 사상》에서 동서양문명의 이질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 소후에 다카오(祖父江孝男)교수는 《문화와 패서널리티》《현민(縣民)성》등 저서에서 국민성과 현민성에 관해 기후풍토의 연관성을 전문 연구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특히 일본 국민성의 지역차를 현민성으로 논술한 그 업적은 특기 할만하다.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2) 한국인의 성격기질=국민성을 최초로 분석한 인물은 그 유명한 춘원 李光洙의 《민족개조론》(1922년)이다. 그뒤 1960년대 윤태림이 《한국인의 성격》,1965년 최재석의 《한국인의 사회와 성격》 1987년 김재은의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양식》과 에세이 형식으로 쓴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1963)와 김용운, 김열규, 이규태, 최봉영, 최준식 등의 한국인 국민성론도 흥미롭다. 심리인류학, 서양의 심리학이나 비교문화론, 민속학 등 분야에서 한국인론 내지는 국민성론 文化論이 전개되었으나 여전히 공백영역이 남아있어 이 공백을 후학들이 메우는 연구작업을 지속해야할 사명은 중대하다. 한국 인류학계에서나 논단, 문단에서 퐁토와 국민성을 밀착시킨 연구는 산발적이며 미약한것은 유감이다. 더구나 국민성의 차이를 “道民性”으로 연구하거나 논하는것 역시 지극히 산발적인 형태로 흔적을 보이지만 너무 박약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 8道의 “도민성”이 최초로 탄생된것은 필자의 지견으로는 1925년 7월호 《개벽》잡지에 게재된 《各道人의 心性(적성)》이라는 글이 아닐까 한다. 함경• 평안도 사람은 성질이 強硬勇悍하여 軍人에 적합하다 전라도 사람은 技術에 장하여 美術工業에 적합하다 충청• 경기도사람은 智諜辯才에 長하여 政治에 적합하다 경상• 강원도 사람은 淳厚質樸하여 文學의 재능이 있다 황해도 사람은 理材에 秀하여 商業에 這하다 이 8도 道民性 이미지는 4字表現으로 표상화되어 고착화 된다. 平安道-猛虎出林(맹호출림) 鹹鏡道-泥田鬪狗(이전투구) 黃海道-石田耕牛(석전경우) 江原道-岩下老佛(임하노불) 慶尚道-泰山橋嶽(태산교악) 全邏道-風前細柳(풍전세류) 忠清道-清風明月(청풍명월) 京機道-鏡中美人(경중미인) 필자는 이 도민성 표상은 조선조시기(1413~1895) 500년에 가까운 시일에 전래한 八道制를 단위로 지역성을 징표화했다고 추찰한다. 특히 조선조시대 중,후기의 성행해온 풍수지리사상 함께 결합되어 형성된 “조선지리인문사상”에서 이 도민성 표상이 축출된것으로 본다. 이같은 지식을 집대성한것이 李重煥(1690~1751)의 《擇裏志(택리지)》이다. 李瀷(이익)과 혈연관계가 있는 이중환은 24세에 과거급제하여 병조좌랑의 벼슬에 오르는 지식인이었으나 당쟁에 말려들어 유배생활후 방랑생활을 보낸다. 책제목이 말하듯이 사대부가 진정 살만한 곳(可居地)을 찾아 방랑했던것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인문지리서로 추앙받는 이책은 별명《조선八域志》인데 8도의 지리, 생리(生利),인심(심성) 산수설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생리와 인심은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도민성 입지를 말하기도 한다. 그는 정치, 경제와 문화 제영역에서 많은 유니크한 지견을 피력하였으며 인간은 지리적 환경의 제한을 받으므로 그 지리적 환경을 잘이용하는것이 그의 기본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발로된 “조선지리인문사상”은 오늘의 시대에도 역시 유효한 팩터들이 많이 존재한다. 다양한 지리환경에 따른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가거지가 존재할수 있다는 이궁환은 모종의 의미에서 풍토론적인 “도민성”론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라고도 볼수 있다. 이제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道民性을 좀 구체적으로 지리풍토와 연결시켜 관찰해보자. 먼저 함경도의 《泥田鬪狗》를 보면 문자 그대로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열악한 지리환경에서 억척스럽게 불요불굴의 투지로 투쟁하는 완강한 투쟁정신을 말한다. 마이너스적으로 표현하면 기가 세고 내부의 내홍(內讧)적인 싸움이 잦다는것이다. 토지의 대부분이 고원이나 산지여서 산악지방의 완강한 투쟁력과 생활력이 이같은 악렬한 환경을 배경으로 자연히 생성된것이리라. 李朝의 시조인 李成桂 역시 함경도 출신으로서 고향사람들의 성격을 숙지하고 있는데에서 자신의 부하에 함경도사람은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지방은 또한 조선시대 조선의 범죄자들을 정배시키고 이수시킨탓으로 도민의 民度가 상대적으로 저하하며 지식수준이 낮은 농민의 지역이었다. “맹호출림”으로 불린 평안도 호방한 기질과 신출귀몰의 행동력이 높이 평가된다. 압록강의 남측, 대동강 유역 이북, 서측은 황해에 향한 지역으로 역사상 단군신화 강림한 지역이기도 하여 지리풍선적으로도 평양은 현대 조선의 “성지”이기도 하다. 또한 압록강을 사이두고 대륙과 인접해있어 대륙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여 외래문명을 먼저 접하군 했다. “南男北女”란 말에서 북녀는 평안도 여성을 가리키는데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았으며 강계미인, 평양기생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석전경우”자갈밭에서 땅을 경작하는 소로 비유된 황해도는 인내성, 근기가 강한 기질로 유명하다. 황하에 연하에 황해도가 아니라 황주와 해주라는 두 도시이름 복합시킨 이름이다.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그 字결합에서 온것이다. 경상도는 “태산교악”으로서 큰 산에 높은 봉우리를 상징적으로 경상도의 도민성을 나타낸다. 낙동강지역은 곡창이기도하다. 신과의 발상지인 경주, 또 하나의 중심이었던 상주가 합하여 “경상”을 이룬다.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그 자신들도 서로 “문둥이”로 칭하며 타도인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권력지향이 강했다. 자존심 강하고 문화의식도 강하다. “풍전세류”의 전라도는 바람앞의 버들같이 처세에 능하여 “머리좋고 성격나쁘다”는 이미지 또한 강하다. 앞에서 말한것과 뒤에서 행동하는것이 다르다는 자기방위술이 뛰어났다고도 평한다. 기름진 땅으로 말미암아 중앙의 수탈도 빈번했으며 “한(恨)”이 유달리 발달된 도민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는 위에서 든 4자표현으로 맡기면서 여기서는 약하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족을 도민별로 分類하면 주로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와 황해도가 주종을 이루고 그외는 산발적으로 좀씩 혼재해 있기때문이다.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3) 위의 문화인류학적 “도민성”을 배경적 이해로 하여 이제 연변인과 안쪽인의 성격기질과 文化적 異質性에 대하여 관찰分析하기로 하자. 우선 注目해야 할것은 “연변”과 “안쪽”이라는 구별화로 사용하는 단어와 같이 그의 발상, 이해에는 연변은 함경도 출신이고 그들이 시점에서 조선의 여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 등이 안쪽(즉 지리적으로 남쪽)이라는것이다. 그 지리적 인식은 그대로 중국에 월경하여 정착하면서 적용된다. 함경도가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변의 변경을 택한것은 지리적 조건의 요소가 무엇보다 지대했듯이 평안도인이 요녕성을 택한것도 역시 그 같은 상황에서였다. 경상도의 출신이 요녕과 길림, 그리고 흑룡강의 평원 기름진 땅을 선탁한것도 본국에서의 지리환경적 경험을 그대로 적응시켜 택했다고 이해해야 할것이다. 조선족이 대체로 개혁개방전에는 요녕성, 길림성, 연변, 흑룡강성 이 4지역에 집합공간을 이룬 배경에는 본국에서의 “도민”별로 고향의식으로 형성된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대로 본국의 도민성과 직결된 형태를 노정하기마련이었다. 이민초기 “경상도촌과 평안도촌을 통혼, 통상은 물론이요, 통행까지도 불능했던 유혈의 창사가 끊이지 않았다”(《東光》1931년 25호)는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강열한 지역관념으로 결속된 조선족 문화의 여러공간의 이질성을 자연히 보전해왔다. 함경도 출신위주인 연변인들은 보통 기타 도민을 “안쪽사람”이라 칭하고 또는 평안, 경상, 전라 할것없이 함경도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조선족을 통칭 “남선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북선”인 자신들과 “남선”지역의 사람들과는 통혼불허로까지 상식적으로 행사하면서 철저하게 “이질성”을 고집해 왔다. “우리”와 다른 “그들”로서 서로 담을 쌓고 그 他者를 순전히 他者로만 보고 모종의 편견, 편파적 성향으로 타자를 차별화한것은 중국에 이민, 정착하는 과정에 강열한 “도민성”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시킨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도 유전된 “연변사람””안쪽삶”의 대조적인 지역문화가 남아있으며 나름대로 연변같은 소분지文化안에서는 그 토착적 도민성을 동질된 함경도가 집단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고착화시킨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족 안쪽, 즉 산재지구의 마을을 보아도 그 지명, 출명은 조선반도 출신 “도”의 명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테면 안도현에는 강원툰,  전북촌, 경남촌이 실재하며 강원도 원주군에서 온 원주툰, 그리고 매하구지역의 경기도촌등 등이 그렇다.(김경일《중국조선족문화론》1994) 그리고 또 한가지 注目해야 할 사항은 조선족은 그 월경초기부터 거이 知識계층이 아닌 순농민위주였다. 그들이 찾은것은 땅을 개간할수 있는 농경지였지, 도시가 아니었다. 고차의 지식인같이 필담으로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들과 대담을 하면서 교류할수 있는 수준도 능력도 그리고 발상도 있을수 없었다. 토지, 농경지를 찾아 같은 도민출신끼리 군집해 살면서 농사를 짓는것이 그의 전부 생활양식=문화였다. 이질된것은 연변지역의 산악지역 위주의 척박한 땅인데 비해 안쪽사람들은 흑룡강의 동북부의 평원, 요녕은 요동, 요남평원 등 기름진 평야의 땅을 택한것 따름이다. 연변의 함경도 사람들이 척박한 연변땅을 개척하는데 동원된 에네르기는 당연히 그 “이전투구”의 완강한 투쟁력이었다. 연변인에 대한 연변외의 조선족들에게 각인된 표상은 “깍쟁이에다 억척스럽다”는것이다. 생산량이 빈약한 경제조건하에서 “깍쟁이”나 “인심의 박함”은 그 당연한 현현일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포지티브하게 해석하면 “억척스러운 완강한 생활력”일것이다. 그것은 연변인의 최대의 특징적 장점이다. “이전투구”의 해석대로 따르면 그들에게는 진흙밭에서 싸우는 투쟁심을 인간에게 행사했을때는 무비의 개싸움, 소모전이 전개된다. 戰時에 혁명정신이 강한 반면 평상시에는 그런 인간의 내홍에 집작하는 면이 문화대혁명이나 최근까지 진행되온 문단, 논단 내부의 전근대적 방식의 투쟁이 그것을 극명적으로 노정시켰다. 한국에서 신조선족 칼럼니스트로 월경의 글쓰기를 벌이고 있는 김정룡씨는 연변출신으로서 “연변사람, 안쪽사람 뭐가 다를까?”등 “延邊人論”과 니카 유순호씨의 “연변인론”은 연변사람의 ”전근대적 투쟁기질”을 까밝히고 있는것은 흥미롭다. 조선족사회를 이질성으로 他者化시켜 보는 관점은 필자와도 어딘가 통하는데도 있다. “안쪽사람”의 문화, 성격기질을 좀 더 多洋하게 노정된다. “안쪽사람”이라 통괄하는 명칭에는 경상도 위주의 흑룡강성, 평안도 위주의 요녕성과 또 경상도+평안도+전라도+황해도+경기도 등 형태의 다양성을 노정하기 때문이다. 진취심이 강하고 강력한 독자적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흑룡강성 조선족은 경상도의 “태산교악”기질답게 개방성으로 국내의 월경,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신문 역시 “흑룡강신문”이 가장 개방의식을 뜬 조선족의 최전선을 질주한다는 평이 있다. 문단에서도 그들은 개방성을 바탕으로 조선족 文壇의 최전선에서 개혁의 깃발을 들고 있다. 요녕성 조선족들은 “맹호출림”의  성격기질로 모험하는 정신을 발양하여 조선족기업을 제일 많이 개척형성하면서 “대륙문화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한족과의 처세와도 능하며 그 맹호적 파워”를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요녕성은 문화적인 영역에서는 그 정보적 입지적 우세가 있음에도 큰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것은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키는 성향이 강하여 문학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숫적으로 적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연변에 비해 요녕성이나 흑룡강성 출신은 실질적 실리 중시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전공을 文理別로 보아도 연변출신이 文科人文科學을 선택연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반해 안쪽출신은 理工科,經濟상학전공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안쪽사람의 진취심, 행동력의 그림자로서는 성급하고 계획성과 원견력이 좀 결여된 단점도 안고 있다. “하면 된다”는 좋으나 “어떻게 할것인가”하는 소심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는 연변을 “小盆地형 文化”란 표상으로 규정지었는데 좀 더 전개시키면 연변 소분지의 사고, 또는 “泥田思考”로 칭하고자 한다. 소분지속의 흙밭에서 왕성한 생활력과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고패턴이다. 좁은 공간에서 그이전(泥田)에  초점을 맞추어 내부에서 행사하는 사고양식과 생활방식이다. 대조적으로 안쪽은 “平原형문화”, 즉 “平野思考”고 칭하고자 한다. 분지나 이전보다 월등 넓은 공간에서 시야도, 사고도 넓은 공간으로 향하며 비교적 개방성을 띤 사고양식, 생활양식이다. 이 같은 조선족이 海外로 나가면서 다시금 “海洋型문화”,즉 “해양성思考”로 또 탈바꿈을 하게 된다. 물론 海洋성은 비유의 명칭으로서 더 넓은 개방성 사고와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21세기의 조선족은 이 3가지 文化型을 이루며 전례없는 生活文化圈을 형성하고 있다. 또 하나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것은 조선족은 두가지 패턴의 “소용돌이사회”로서  특징 지을수 있다고 본다. 미국 정치사회학자이며 대사관 직원으로서 한국에 20년 체류한 경험을 갖고있는 G•헨더슨은 그의 저서 《조선정치사회》에서 한국사회를 “소용돌이사회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는 자세한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필자는 조선족사회에는 특히 연변에는 인구이동에 있어서 연길을 중심으로 주변농촌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중에 중심과 농촌을 연결하는 중간항이 결여돼있으며 그 공백을 보인다. 무슨 얘기냐 하면, 연길과  농촌지방의 사이에 중간도시가 없으며 농촌의 농민이 단순한 이동을 통해 “나도 해냈다”는 식의 단순한 “역콤플렉스”적 반발식으로 충만돼있을뿐 무조건 중심지향의 수단이 돼버리는 약점을 안고있다. 아마 이것은 연길에만 존재하는 현상이기보다는 전국의 중국인에게도 이같은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小城鎮,小縣城이라는 중간단계가 있기도 하여 도시와 농촌사이의 중간상태는 엄연히 존재한다. 연변의 “소용돌이”는 농촌에서 연길로 흐르는 內向性이 지극히 강열하며 그 흐름은 外向性과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小盆地內에서 이런 內向性 경향은 돌돌 돌면서 시야가 점점 좁아지거나 거기서 정체하거나 하는 현상을 보인다. 연변조선족 지식인의 이른바 일류라고 자찬하는 일부에서 보인 이같은 內向性思考는 그것을 잘 입증해준다. 즉 환언하여 소용돌이속에 자신을 뱅뱅 돌리며 세상을 우습게 보다가 그 향심력에 스스로 혼미되어 빠져 “침몰”당하고 만다. 연변외의 안쪽, 산재지구의 소용돌이는 이와 반대로 外向性을 보이고 있다. 즉 이 도면에서 일목요연하게 보아낼수 있듯이 평원에서 또는 큰 호수에서 흐름은 外向性으로 보다 넓은 사고나 시야의 특징을 보인다. 평야라면 보다 넓은 평야로 도시라면 보다 개방성적 도시로, 강이하면 넓은 해양으로 향심력은 外向적으로 개방성을 보인다. 연변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유는 그 지리적 풍토에서 오는 기질성격과 함께 사고방식의 내향성적인 성향에서도 현현하고 있다. 요컨대 본국의 “도민성”으로 형성된 조선족의 多洋한 성격기질은 그대로 조선족文化群의 바리에션을 노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공간을 유지하면서 보전해온 이런 “도민성격”은 많이 근대화된 한국과도 이질된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이제 조선족이 도시공간에서 재편성되는 문화권은 이같은 기질의 용광로로 된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이같은 성격기질이 경계를 넘으면서 융합되고 조화를 이룬 새로운 도시민적인 문화속에서 새로운 변웅을 보이게 된다.  
38    41. 상실의 시대(김문학) 댓글:  조회:5671  추천:34  2010-10-09
《신조선족》월경론 41. 상실의 시대 김문학 “월경”에 동반되는 조선족의 “월경의 明暗”에 대해서 논술하련다.세상의 일체 事物, 삼라만상에 그 明과 暗이 존재하듯이 월경에 따른 “明暗”의 양상을 필자는 한마디로 “상실의 시대”로 부른다.땅의 상실, 고향의 상실, 편부모의 상실, 학교의 상실… “상실”의 단어는 배알처럼 생긴 쇠사슬 같이 조선족사회에 연쇄적으로 핍박해온다.대저 인구 이동의 월경에는 빈구석이 생기며 이산(離散)과 상실의 아픔을 겪는것은 必至의 文化現象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아픔은 과거형인 동시에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아픔에 연연하고 통탄하며 아픔을 그냥 고통으로 삭이기보다는 아문 상처자국에서 새로운 생이 탄생하는 현실을 포지티브하게 인식하는 사고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실제로 시야를 세계로 넓혀서 바라보면 근 20년의 세계는 지구적 규모의 “상실의 시대”인것이다. 모든 “상실”은 “변화”하는데서 동반대는 빈 공백, 또는 명암의 暗을 말하는것이기도 하다.작년 미국 오바마대통령의 선별한 데뷰는 “change!”라는 변하는 교체, 바꿈을 슬로건으로 행사한 미국 정권의 탈바꿈이었다. 일부에서도 하토야마 내각의 신선한 등장으로 장기간 정권의 헤게모니를 독차지했던 자민당으로부터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이루었던것이다.“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의식이 전세계의 규모로, 세계적 흐름의 중대한 팩터로 나서고 있다. 1989년 베틀린의 장벽이 무너진뒤 20년이 되는 해에 이런 “교체”의 변화가 이룩된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첫째는 이데올리적인 적(敵), 상대를 상실한것이다. 냉전시기 서양과 동양의 자유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의 대적관계가 소련의 붕괴로 대결의 상대, 적이 상실했거나 그 대결의식이 매우 히약해진것이다. 극단적 2분법사고가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다.두번째는 경계선의 상실, 적아의 경계선, 세계의 경제적 경계선 등이 “월경”의 마술같은 힘에 의해 없어지거나 존재감이 희미하게 됐다는것. 자원, 환경, 인구, 금전 정보가 너무 용이하게 국경, 경계를 넘어서 전달, 전파 수용되고 있는 글러벌 사상(事象)이 그것이다.세번째는 “권위”의 상실, 월경적인 文化,文明의 이동, 수용과정에서 그 나라나 민족집단에 있던 전통직 권위, 상징적인 권유의식, 인물까지 포함하여 짓부수었다는것이다.“조선족개조론”에서 필자가 “이제 우상은 없다”라고 역설한것도 우리 조선족의 권위와 우상, 그 고루한 의식을 파괴를 노린것이였는데 그 의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해독의 문제인지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했다.이상 3종의 측면에서의 “상실시대”를 바러미터로 조선족의 “상실”을 바라보면 사실 조선족의 “상실”은 모두가 이 세계적 “상실의 시대”와 同步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奇하게도 작년 2009년 니카의 “6적”비판사건은 베를린 담벽 붕괴 20주년의 해에 발발하게 된다. 근 10년동안 연변 조선족 문단과 논단의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조선족개조론”을 빌미로 전조선족지식계와 사회를 적아관계, 계급투쟁의 수준으로 설정해놓은 일부 조선족 극과 지식인들(”6적”이란 라벨붙은 지식인).이들이 미꾸라지같이 온 연변의 물바닥을 흙탕물로 짓이기면서 살벌한 적아판가름의 필사적 투쟁을 전개할때 “적”이 존재했기때문에 “단합”을 이루었고 “끼리끼리”의 “집합”으로 전례없는 에네르기를 동원할수 있었다.그런데 같은 에네르기로 반발해온 “6적”비판은 6적이 행사했던 힘만큼이나 용수철같이 “6적”으로 연습을 이루며 전설미담의 역량을 발산한다. 물론 니카 US ”6적”의 공방전은 인신공격, 프라이버시 하반신스캔들 등 저차원의 요소도 가미되긴 하지만 “6적”의 완패로 종결된다.“6적”이란 명칭 자체에 대하여 필자 개인적으로는 과대하게 “적”(괄호친 ”적”이긴 하지만)으로 핍축하는 방법에도 전면 찬성은 안하지만 그러나 역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바로 “6적”자신들의 과격하게 살벌했던 발호(跋扈)가 자초한것이 아닐까.결과 “6적”의 붕괴로 그들 자신에게 “적”은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다. 그후 그들이 적을 상실하고 “단합”의 원동력이 상실됨으로 말미앎아 그 허상적인 “단합”도 아마 필자의 추측으로는 오래가지 못할것은 불보듯 뻔하다. 상실감과 무력감, 그리고 절망감과 허탈감에서 일종의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의 심연에 빠질 가능성도 십분 예견된다. 그런데 또 한가지 우려는 그런 DNA의 유전자 인소가 본래부터 존재한 인물이라면 연변의 소분지식 문화환경이나 정치의식속에서 지금은 도사리고 있지만 또 적당히 시기를 노렸다가 재발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을가 하는것이다.필자로서는 “그들”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적아관계로 생각한적이 없으며 우리속의 “그들”로서 사고와 지견의 차이라고만 본다. 작년 니카의 인터뷰에서도 “그들과 친구로도 될수있다”고 했는데 그 귀절이 빠져서 유감스럽다. 흑백의 경계를 넘어 공론, 공생만이 우리 조선족의 방향인 까닭이다.또하나 필자가 발견한것은 조선족의 탈중심, 탈경계에서 생긴 우상, 권위의 타개로 의한 상실은 사상 최초의 “대중의 탄생”이다.중국 정치시스템하에서 “조선족” 문화를 유지해온 우리에게 지금까지 한번도 권위를 넘어선 “대중”을 독자적 사고와 지견을 바탕으로 한 “대중성”을 이룬적이 없었다.그러나 근 10년래 “조선족개조론”의 포스트현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중이 깃발을 들고 제분야에서 “반역”하는 현대적 의의의 대중이 등장한다.  
37    40. 近色比較原理(김문학) 댓글:  조회:5766  추천:42  2010-10-08
《신조선족》월경론 40.近色比較原理 김문학 인간은 “比较”하는 文化生物이다. 사물을 “비교”하는것은 인간의 숙명이기때문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두 눈과 두 귀와 두뇌를 끊임없이 동원하여 자신과 주위의 타자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比较를 하면서 “자신”이라는 존재 또는 아이덴티티 같은것들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 오늘날 월경을 통한 이문화와의 용이한 조우는 같은 연장선에서 自己와 他者와의 比较를 더더욱 돌출하게 현현시키는것이 아닌가. 신조선족이 현재 국내 연해도시와 해외 여러나라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누구나가  이 “비교”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꼭 인류학자나 문화연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글러벌화시대의 인간은 이렇게 자연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을 “비교”하면서 그 누구라 할것없이 실체험론적인 “비교문화학자”  또는 “비교문화인”의 역을 자연하게 된다. 그런데 비교, 비교문화하면 동아시아 文化圈에서 그 비교에 적성이 가장 큰 담당자는 중국, 일본, 한국 동양 3국어를 도탈적으로 구사하고 바라볼수 있는 우세를 갖춘 우리 신조선족의 몫이다. 본디 이날까지 동아시아권에서 “비교”하면 중국과 서양, 아니면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하는 식으론 일대일의 비교가 하나의 고정패던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3국문화 사회를 토탈,종합적 시점으로 비교인식하는 비교문화론적 연구나 인식작업은 지극히 빈약했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영역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젊음의 만용으로 돌진해온 체험을 갖고 있다. 3국의 사회무놔를 하나의 시각에 넣어 조감함으로써 동아시아 한문화권안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이해하여 상호 이해와 인식에 중대한 방향과 지침을 제시할수있는 기본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기반이 마련되면 현재 동아시아 사회가 연대하여 EU간은 “동아시아공동체”를 구성하는데 문화적 기반이 구축된다. 그런데 문화와 문화사이의 “비교”라 해도 결여될수 없는 것이 “비교의 원리”이다.원리라는 단어를 다시 “방법적 원리”나 “수단적 원리”로 환언할수 있다. 필자가 비교연구작업가운데서 제시해온 원리는 독자적인 “近色原理”이다.그렇다면 그 내실은 무엇일까? 이날까지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한국의 비교문화는 다수가 동양의 자국과 서양과 비교하는 동서양비교의 일환으로서 전개해온것이 주종이었다. 문화평론가,번역가 하치스카씨는 이렇게 지적한다. “일본학계의 비교문화연구의 전통적인 고집과 보수적 체질에 대하여 그(필자)는 비판을 시도,일본의 그것이 구미와의 비교만으로 편향돼있는 페해에 경종을 울렸다. 즉 한자문화권내의 비교하는것이야 말로 각국의 문화 특질을 분석해낼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비교원리는 ‘근색비교원리’로 지칭되는바, 동일문화계열의 비교를 통하여 비로서 그 황색의 “淡黄”, “深黄”, ”朱黄”등 미묘한 색상의 차이를 발견할수 잇다는 이치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근색비교원리’를 무기로 그 자신의 풍부한 문화체험을 토대로 하여 다른 학자들이 도저히 할수 없었던 3국 비교문화의 영역을 독보적으로 개척하였다.” 좀더 전개시키자면, 동서양의 문화는 그 인간의 피부색,콧등의 높이,눈동자의 색깔만으로도 이색계열로서 비교가 대조적이며 그만큼 이질된다.그러기에 이질된것을 그냥 이질됐다는 비교도 좋지만 되려 동색계렬인 동아시아문화권의, 일견 유사해보이나 그 가운데서 이질성을 탬색하는 비교연구야말로 그 차이를 극명하게 색출하는 방법인것이다. 필자의 이와 같은 비교원리는 일본학계나 대중들속에서도 많은 공명을 획득하고 잇어서 뒷심이 든든해진다. 필자는 자신의 “근색비교원리”를 구사하여 흔히 동아시아를 “汉字文化圈”으로 通称하는 설법의 구조를 깨고, 异说을 제기했다.사실 한자를 공유하고 사용한다하더라도 한자표현의 내실,문화적 내용은 이질적이며 한자로 표현되는 단어에도 뜻이 이질되는 요소가 많이 편재한다.그 한자에 의해 표현되는 문화내용을 무시하는것은 위험하다.그래서 필자가 새로 창안한것이 중국,대만같은 “한자전용문화권”과 일본,한국(조선반도),조선족같은 “汉字借用文化圈”이란 개념을 분화시킨것이다. 이런 인식은 서로 이질된 문화권으로서 포착함으로써 그 동질성과 이질성을 극명하게 재인식 할수 있는 까닭에서였다.이 역시 신선한 개념으로 학계와 논단의 주목을 받고있다. 사실 “원리”하면 몹시나 고명한 아카데믹한 경지로 보이지만, 대중들은 특히 광범한 위 신조선족은 한중일 3국을 그 언어적 우세로 넘나들면서 자기나름대로 실체험적 비교문화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실천해왔던것이다. 이같은 신조선족의 전례없는 월경의 다아스포라적 신事象들은 그 디아스포라적 가능성을 이미 可视化状态로 끌어올리고 있다. 국내 연변같은 비교적 단일성지향의 고착된 디아스포라집단이 불가능했던 일을 월경의 디아스포라 조선족들이 지금 그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물론 방법으로서의 비교원리를 적용시켜서 그 속에서 부상되는 요소들을 캡쳐하여 우리의 언어적 우세를 거기에 조준하여 활성화시키고 적응시키는 능력과 수준에 우리가 이제 더 고심해야 할것이다. 즉 원리자체가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원리를 활용하여 우리 신조선족만의 독자적 우세,능력을 실천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말한다.    
36    39,체험으로서의 “한중일비교문화론” (김문학) 댓글:  조회:6183  추천:37  2010-10-05
《신조선족》월경론39,체험으로서의 “한중일비교문화론”김문학 일부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 “한중일비교문화”영역을 개척한 필자가 그 전개에서 일본을 높이 올리추고 중, 한국은 상대적으로 내리깎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고 오독이다. 필자는 신조선족의 일원으로서 한중일 그어디에 귀속시키지 않은 문화의 척도를 쥐고 있다. 개념적 관념적인 비교이기보다 월경을 통한 이문화체험을 바탕으로 한 “比较文化论”의 깃발을 내걸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것이다. 동아시아의 문화비교, 이는 한중일 3국어를 장악하고 있는 우리 “신조선족”만이 해낼수 있는 영역이다. 필자가 아니더라도 조선족의 그누군가가 시도했을것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일, 한 문화를 공시적으로 체험할수 있는 오늘 “신조선족”이 꼭 비교문화학자나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그 대중들은 이미 그 풍부한 감수성으로 실체험으로 无言적 형식으로 실행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벌거숭이 3국지》를 위시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반도성, 대륙성, 도국성》등 한중일 비교문화 저작들이 3국어로 간행되면서 “조선족 출신의 지식인이 쓴 작품으로서는 3국과 대만, 홍콩 등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베스트셀러”라고 비평계와 독서계의 평가가 있다. 현재까지 이 비교계열책만 3국어로 동아시아권에서 45만부이상 발배되었으며  영어권, 폴란드어로도 번역되기도 했다. 3국에서나 대만에서도 대학 및 대학원의 비교문화 교과서로 읽히우기도 한다. 수년전 일본 TV방송국의 인터뷰를 받을때 기자의 “3국비교론 저서의 인기 이유?”에 대한 질문에 필자는 “아마 실체험, 이문화의 실체험적인 원액(源液)이 많이 깔려 있기때문이 아닐까”고 응답했다. 필자의 비교문화계열 서적이 3국에서 3국어로 번역 발간되는 현상에 대해 연변의 어떤 지식인은 “3탕, 재탕론”을 펼치면서 지극히 부정적 언설을 발설했는데 그 의도가 알수 없다.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여 월경함으로써 문화가 전파수용되는 “文化의 번역”의 상식을 부정하는 그의 태도에 필자는 그 “상식이하”의 지식수준에 폐구하고 말았다. 앞서 말한 “오해”에 대해서 마저 얘기하겠다. 그 오해는 어디에서 생길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문화에 대한 깊은 체험이 결여된 까닭에서 유발될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自己文化와 异文化를 비교할때 자신이 체험, 이해한 선발성 문화(이것은 근대화를 기준으로 그것이 선발적으로 이룬 나라나 민족의 문화와 그에 후발된 나라나 민족의 문화를 지칭하는 개념)의 높이에서 비교의 상태를 조감하게 되기 마련이다. 왜냐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은 고개들어 앙시할수는 있으나 그 내실에 대한 관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鲁迅이 중일문화를 바라보는 비교의 척도나 이광수가 바라본 한일문화의 잣대 역시 동질적이다. 일본의 높이에서 나름대로 중, 한을 조망하는 방법을 행사했던것이다. 필자 역시 한중일 3국중, 최선발성 문화나라인 일본의 높이에서 한, 중을 바라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비교문화의 불가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높은곳에서 낮은곳을 바라볼 수 있으나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기때문에 필연적 인소를 띈다. 선발과 후발성 지역의 문화를 비교함에 있어서 선발성에 조준하여 자신의 후발성 모습을 거울로 비쳐보는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 비교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후발성 문화를 경멸, 폄하하는것은 문화상대주의의 잣대앞에서는 통과되기 어렵다. 이것을 통과된다면 남는것은 선발문화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사람과 후발문화속에서 살아서 선발문화에 대한 실체험이 없는 사람의 갭뿐이다. 즉 선발문화의 그 높이의 내실을 미처 모르기때문에, 그것을 비교전달하는 화자에게 흔히 후발문화를 폄하, 평가절하시킨다고 보일수가 있으며 그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필자가 일본문화의 경계에서 살면서 느낀 또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즉 이문화이해에서 “졸속함은 금물”이라는것이다. 이문화의 지식,정보에는 빠른것과 늦은것으로 구분된다. TV에서 방영되는 동시적인 정보, 뉴스페이퍼의 정보는 떠있는 빠른 정보다. 실제로 그 이문화를 표징하는 상징으로서의 정보는 늦은것 즉 밑바닥속에 침전된 것이다. 이런 상징적 문화를 아는데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 나라의 문학, 사상, 철학 등 숙성된 문화콘텐츠를 시간을 들여 읽는것, 그 사회안에서  컬쳐쇼크를 감내하면서 문화를 실체험 하는것, 이런 축적, 知的축적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이문화의 심층을 해독할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 필자가 이문화이해에서 拙速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짧은 체험을 통해 일본 스케치식의 인상기를 쓰거나 한국 체험기를 쓴 조선족 작가들도 있는데 빠른 정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것이 많아 아쉽다. 그럼데도 거기엔 일본과 한국을 이해할수 있는 소스가 있으며 아직 실체험이 없는 우리 조선족에겐 빠른 정보 입수에 일조가 되는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필자가 누누히 지적해 온 바이지만 중국에 있어서 일본문화의 이해는 아직도 빠른 정보에 바탕을 둔 졸속주의 인식이 주종을 이룬다. 한국 역시 비슷한 실정이다. “신조선족”이 이때 나서야 할 대목이다. 他文化속에서 깊이 침투하여 느긋하게 이문화를 체험, 인식, 저작을 반복하면서 “이해의 충적”을 쌓는것이 중요하다. “신조선족”은 한중일 文化理解의 발랜스적 역할의 담당자이기도 하다.  
35    37.일그러진 李光洙 표상 (김문학) 댓글:  조회:7116  추천:27  2010-10-02
《신조선족》월경론 37.일그러진 李光洙 표상 김문학  이제 이광수의 경계를 넘은 삶을 다시 바라보자. 그의 삶을 이끄는 큰 테제의 하나는 월경과 그에 따른 방랑이다. 11살에 고아로 된 그는 1906년 13세에 일본유학의 길에 오른다. 철학자 지명관선생은 “그의 조선적인 유교영향이 적었다”고 지적한다. 그 반면 그는 다감한 소년시절 일본의 명치중학에서 일본의 근대문명개화에 일찍 개안한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 귀국하여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1916년 와세대대학에 유학하여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소세키(夏目漱石)와 영국의 바이런 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무렵 「매일신보」에 「동경잡신」을 발표하는데 일본의 선진성 근대화에 대해 선망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무덤을 찾아 “경모와 감개”를 표하기도 하는 그는 소년기에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을 한국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인식하고 있다.  소년시기 모든 조선인보다 일찍 문명개화에 开眼한 그는 자신만만한 확신을 갖고있는 패기로 넘친 청년지식인으로 변용한다. 그가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天才”라 불린데는 그 이유가 있다. 그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재능과 지견과 사상이 있은 까닭이다.   국민적 시인 서정주가 그의 시에서 “나를 키운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 이광수의 삶의 8할은 경계를 넘는 “월경”이다. 노신은 절강-남경-동경-센타이-동경-절강-북정-광주-상해로 인생의 월경을 거듭하지만 이광수의 월경은 초원을 찾는 양과 같이 시공적으로는 일본의 츠시마-러시아 바이칼호-상해-해삼위로 地球적인 월경이다.  월경의 문인, 사상가로서의 이광수, 그는 비평가들이 흑백논리와 선입견의 고정관념에 포로가 되어 무조건 친일 문인으로 반역자로 왜곡중상하는것은 허용치 않는 존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인「민족개조론」을 위시한 고백작품 「나의 고백」「나의 자서전」 등 주요 저작을 변변이 읽어보지도 않고 “오, 이광수, 친일한 작가”하고 안일하게 일축하려 든다.  「민족개조론」(1922년「개벽」)은 세계인, 월경하는 코스모폴리던적인 시각에서 러시아 류랑시절에 태어난 아이디어이다. 정신적 아버지인 안창호의 영향으로 생긴것으로, “일제 총독부의 사촉”으로 집필됐다는 망언은 무근무실하다.  필자가 10여년전, 그리고 최근 또 정독한「민족개조론」은 조선민족의 결함을 시리어스하게 비판하고 새시대에 맞게 개조함으로써 재생을 기하자는 위대한 사상이 담긴 명문이었다. 오늘날 재독해도 여전히 그에 관통된 사상은 유효하며 그를 산출한 저자야 말로 우리 민족의 탁월한 사상가, 지성인이라는데 탐복할만한 걸작이다.  저자가 서문인 “변언”에서 밝히다싶이 “이 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중에서 발생한것으로서 내것과 일치하여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나는 조선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구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번 존경과 감사를 드림니다”  보다싶이 이 사상은 해외동포 월경하는 민족 지성의 사상임이 엄연하다.  이광수는 조선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관대, 박애, 예의, 렴결, 자존, 무용, 쾌활”이며, 반면 결함으로 “허식, 나태, 비사회성, 경제성 쇠약, 과학의 부진”등을 열거한다.   그리고 그는 민족성 개조의 비전을 8항목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한다. 우리 민족이 이광수의 개조사상 비전을 진지하게 성찰, 수용했으면 오늘 우리 민족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것이다.  일본에 후쿠자와 유키치의「학문의 권장」이 있다면 조선에는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경계성에서 생성된 민족사상은 아이러니하게 그 민족 억압의 피식민지화 앞에서 “굴절된 지혜”로 나타난다. 한국 단국대 김원모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춘원은 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만큼 표면적으로만 거짓으로 친일 행동을 했을뿐, 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있다는것이다. 그러기에 춘원은 그 자신의 친일 행위를 민족정신 보존운동으로 역이용했다고 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일협력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친일을 위장한 민족보존운동’은 바로 그의 작품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기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춘원의 친일과 민족 보존론」  춘원은「나의 고백」에서 한마디로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풍부한 월경으로서 경계를 넘는 실천속에서 걸러낸 “사상”을 몰이해하고 단순하게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것은 우리 자신의 “愚”이다.  춘원에 대한 고정적 표상은 상당히 일그러진 면을 노정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죽어서도 지탄받는 비극은 사실 식민지를 체험한 우리 민족 모두의 “비극” 그 자체인것이 아닐까?  2001년「조선족 개조론」의 논쟁이 백열화되던 당시 한국과 일본, 조선족의 지식인들은 필자에게 “조선족의 李光洙”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산재지구 한 지식인은 “이광수를 받아들이지 못한것은 일제식민지라는 비운의 역사때문이지만 21세기의 조선족에게 김문학을 친일반역으로 내모는것은 그만큼 우리 자신의 비극이다. 왜나면 여전히 조선시대의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했기때문이다”고 2001년 12월 장춘에서 개최된 <김문학 작품세미나>에서 발언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신조선족의 등장으로 같은 월경의 경계를 넘은 사고와 개방성으로 우리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변하고 있다. 
34    36.魯迅과 李光洙 (김문학) 댓글:  조회:5837  추천:25  2010-10-02
《신조선족》월경론 36.魯迅과 李光洙 김문학   노신과 동일문맥에서 비견되는 조선의 인물은 조선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春園 李光洙이다. 일본 유학 경험, 자국국민성 비판과 개조사상, 그리고 세계인적인 월경의 시야 등 측면에서 노신보다 11세 연하인 이광수는 매우 유사한 相似性을 띄고 있다.   단지 死後 최고의 위대한 文學家의 표상으로 낙인된 노신에 비해,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최고봉인 반면 민족의 반역자의 대명사인 “친일문학의 거두”라는 치욕스런 렛텔이 붙여있는것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의 비극 자체가 李光洙의 표상에 투영된것으로 인식할때 중국은 겨우 일제의 식민지전락까지는 면했지만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형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있다. 그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노신은 1920년 梁白華, 柳樹人 및 申彥俊, 李陵史 등 文人에 의해 속속 조선에 소개되면서 이광수에게 수용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의 「개조」잡지에 “조선의 阿鬼”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萬爺의 死」를 집필하는데 「아Q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이광수는 친하게 지낸 후배 문인 金素雲에게 “나는 아Q와  같이 바보다”고 고백,자신을“아Q형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일제식민지속에서 적응과 저항의 구도에서 자신들을 두고 향해진 쓸쓸한 야유였을것으로 추찰된다.   노신보다도 월등 다층다각의 얼굴을 보인 이광수는 안일하게 “친일반역적 문인”으로서 일축하기엔 무리한 인물이다. 사실 지금껏 한국이나 우리 민족이 이광수를 재는 척도는 “민족”이란 바러미터밖에 없었다. 1940년이후의 이광수의 “부일협력”의 언행은 그의 모든 평가를 집약시킨 “표상”으로 고정시켰다. 이 표상 역시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많이 일그러진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의 주장은 이문화의 경계를 살아간 이광수의 “월경적 삶”을 하나의 척도로 재단하면 그 표상은 오히려 다른 양상으로 부상된다는것이다.   서울대의 유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는 1400매의 상하권 이광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도서출판 솔)에서 이광수의 일찍 부모를 상실하는 삶을 “내면 풍경의 발견”으로서 “고아의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여윈 아비를 일본제국주의에서 찾아 헤맸다는 “표상”을 제작해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표상”에 “완전동감”하지 못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여기에 결여된것은 이광수를 이광수이게끔한 그의 이문화체험, 간단없는 월경하는 방랑에서 생성되는 경계의 지(知)적 思想을 평가의 잣대에서 빼버린것이다.   이광수 자신이 일그러진것이 아니라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 시각이 언제나 “민족”,“민족의 반역”이란 고정틀에 맞춰넣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으로 이광수의 “표상”을 재생산 하는것이다. 오늘도 한국지식인의 이런 재생산은 정치적 이용자(노무현정부 친일파 청산정책)들에 영합하여 자기성찰과 반추도 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친일파”의 생산공장은 “친일파”인물, 죽은 자들이 아니라 되려 오늘의 후세 정치가와 그 수하의 체제적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소수의 반역자는 어느 나라든지 다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역자 말고 문제는 후세들이 자진해서 “친일파”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33    35.노신은 왜 중국국민성을 비판했는가? 댓글:  조회:6312  추천:34  2010-09-24
《신조선족》월경론 35.鲁迅은 왜 수미일관 中国国民性을 통렬히 비판했는가?   김문학   노신의 세계관과 사상은 日本의 异文化时空의 体验속에서 생성된다. 절강 소흥출신의 무명의 청년 주수인(周樹人)으로부터 국민적 작가 문호 鲁迅의 탄생에는 이문화체험이란 중대한 배경이 있었다.   노신은 모택동에 의해 3개의 “위대한” 라벨이 붙은 인물이지만 그런 장식어로만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성격의 인물상을 노정하고 있다. 필자는 노신을 바라보는 바로미터가 바로 일본에서의 이문화체험, 문화수용이라는 점이라고 지적 하고 싶다. 그는 국경을 넘은 월경적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을 갖춘 “국제인”, “세계인”이었다.   노신연구는 최근들어 신예학자들에 의해 “비판”과 함께 전례없는 활발상을 전개하지만, 그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문학자로 높이 숭경하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투철하다고 생각된다.   원 노신박물관 관장이며 현재 중국인민대학 교수인 노신연구의 중진 손욱(孫郁)교수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했다.   필자가 노신에 대해 고민한 문제의식은 “왜 노신이 그토록 각골통한(刻骨痛恨)의 정념으로 중국국민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그것을 수미일관하게 그자신의 使命으로 삼았는가? ”는것이다.   이같은 문제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즘에서도 많은 연구와 발설을 했으나 정곡을 찌를 해답을 못찾아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나 혁명사상가의 차원으로 편향해 표피화되고 또 그것이 노신論의 고정트이 돼버렸던것이다.   필자는 그 해답을 노신의 주수인시대 일본유학을 통한 이문화이해의 시공간에서 찾고자 한다. 1902년 22세의 주수인은 1907년 여름까지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다. 그곳에서 일본문화를 통해 서구문명에 開眼한다. 주수인은 일본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양식에 자신을 적응시키는것을 이문화이해의 방식으로 삼는다.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그는 잘 신었으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神田)의 중화요리점에서 중국 火腿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사먹은적이 없다”,  “동경에서 그가 의식적으로 일본식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 (마루야마 노보루「노신」1965)   노신이 평생 기른 수염모양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가 일본에서부터 선호했던것으로 죽는날까지 보전하였다. 그의 수염모양새를 두고 시비를 건 무료한 지식인도 있을 정도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한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경계의 높이를 승화시킨다.   노신의 뒤에는 많은 일본, 일본문화가 직결돼있다. 그가 가장 일생을 통해 존경한 사람은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 스승 후지노 선생이었다. 팽생의 지기 외우(畏友) 역시 일본인 우치야마(内山完造)였으며 그와 아들 해영의 전문수진의사는 일본인 의사였다. 지어 그가 사망직전에 남긴 절필 역시 일본 외우에게 쓴 일본어였다. 노신은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다. 지어 1932년 일제가 동북3성(만주)를 강점했을때 “항일운동”에 대해 노신은 준혹하게 지적한다.”이 排日의 소리속에서 나는 감히 견결히 중국의 청년들에게 충고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에게는 우리가 배워야 할것이 많다는 그것이다.”   필자는 노신의 작품속에서 수없이도 많은 일본어적 요소를 발견했다. 그의 언어에는 중국문법에 맞지 않는 문법구사 지어 단어까지도 일본어를 그대로 수용했던것이다. 그의 白話文은 일본어 文体에서 비롯된것이다. 그의 친일적 경향은 모두 일본의 이문화체험속에서 연유된다. 주수인이 노신으로 되는데 밑거름은 일본이었다.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은 미친것은 우리가 간파했던 또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다.   노신의 “국민성개조”의 지향은 일본에서 H. 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비판서,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에 우후죽순같이 나타난 서양 학설, 철학서를 노신은 일본어를 통해서 접했다. 그러던 그는 유학생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외국문학번역서를 간행하기도 하며 언설적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1909년 6월 귀국한뒤 그는 ‘적막’과 소침속에서 자신을 모대김에 맡길뿐이다.  왜 그렇게 중국국민성개조에 왕성한 정신력으로 불타던 그가 갑자기 귀국하여 의기소침하게 되는가? 필자는 이 단계의 노신에 대해 늘 의문을 품었다. 그가 환등슬라이드를 센타이에서 보면서 우매한 중국구경꾼들의 모습에서 중국국민성개조에 뜻을 두개 되고 문학으로 전항했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왜 실천하지 못했을가? 실제적으로 1918년 5월 「광인일기」를 「신청년」에 발표하기 까지 그는 방황하는 주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정리가 그의 일과이다싶이 했다.   그가 소침하고 失意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가 비교연구끝에 찾아낸 답안은 한마디로 이문화체험의 시공간에서 받은 역(逆)발적인 컬쳐쇼크였다. 즉 본국 동포들에 익숙했던 중국, 중국인이 오히려 일본문화에 익숙했던 그에게 “이문화”적 시간, 공간으로 보였으며 그 “후진성”에 끝없는 절망감과 지어 험오감마저 느낀것이다.   노신은 일본에서 “국제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체험한 조선족이 연변에 되돌아 와서 느낀 연변의 “후진성”, ”농촌적인 모습”과 연상시키면 이해가 갈것이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 된 노신, 그가 귀국한뒤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모습은 “열등” “후진” “우매” ”고루” “아Q”등 부정적 표상으로 꽉 차있었다. 이미 다른 표상이 들어설 틈마저 없었다.   즉 그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중국인을 바라본것이었다. 그가 서거하기 며칠전 상해 일본조계에서 일본의 외우 우치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의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였다.   노신의 중국, 중국인의 “열악성”에 대한 절망감에 가까운 비판, 부정은 국제적 안목, 복수문화의 경계를 살던 사상가 노신의 숙명이었다. 그 숙명은 노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또 그 한계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뜨게했던것이다. (필자의 노신論은 저서 「노신 뒤집어 보기」에 자세히 쓸것이다)   노신이란 인생과 언설적인 대선배의 뒤를 이어 백년후 일본에서 유학, 취직 정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비슷한 이문화체험의 입지에서 노신의 視覺, 知見, 境界성에 대해 너무나 이해가 간다.   유사한 유학의 이문화체험의 여과가 없이 노신의 이같은 고층차의 세계인적 사고를 이해하기는 지난(至難)할것이다.   필자가 왜 우리 조선족의 열악성을 비판하면서 숱한 조선족의 결함, 단점을 “준혹”하게 꼬집고 그 “개조론”을 창도했던 이면에는 역시 일본이란 이문화체험자의 “경계성”으로부터 발한것이다. 필자는 늘 “세계인” ”지구촌인”하는식으로 자칭하기를 즐기는 모습을 일부 지식인들에게서 비난과 중상의 타깃으로 점찍혔던것 역시 이해한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거만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세계적” “경계성”적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때문이다.   이제 신조선족의 월경은 경계성을 사는 “세계인”을 양산할것이다.    
32    34.체험하는 異文化의 時空 (김문학) 댓글:  조회:4826  추천:26  2010-09-23
《신조선족》월경론34.체험하는 異文化의 時空김문학 異文化理解의 가장 효과적인 方法은 그것을 體驗하는것이다. 옛날과 달리 외국이나 국내 이동, 여행이 日常化된 현재, 우리는 아마 아래와 같은 체험을 늘 겪었을것이다. 일테면 며칠간 외국 또는 중국의 남방에 여행이나 출장갔다 고향으로 귀가했다고 하자. 그런데자기 집도 時差나 空間적 차이로 생기는 모종의 생소감같은 부적응성 반응이 나타날때가 많다. 같은 맥락에서 수년간 외국에 체류해 있다가 귀국하면 역시 크나큰 부적응 반응이 수시로 생긴다. 자신이 익숙해있던 자기 나라 문화나 환경이 어느새 “他文化”로 돼있는것이다. “여기가 분명 내가 살았던 그렇게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내고향 맞아?”하면서 꼭 홀가분만한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기간 체류했던 타향이나 외국이 더 익숙한 자신의 고향 또는 나라로 낙인되는것이다. 필자 자신도 중국에 돌아가면 이미 또 하나의 이문화공간이 되어 그 이문화를 만끽하는 재미가 있다. 중국에서 노점시장 특히 야시장이라 불리는 그런곳에서 필자는 이국적 정취, 엑조틱을 느껴 몹시 滿悅한다. 대도시의 일주에서 전개되는 야시장에서 19세기말기적인 전근대와 21세기의 근대문화가 회립하는 교차로적, 용광로적인 양상은 언제 보아도 마냥 즐겁다. 그 다이내믹한 활력을 통해 필자는 중국 다수 기층인들의 억세고 근면한 생활력에 경이감을 느끼군 한다. 그리고 그속에는 분명 일본에서는 박물관에나 남아있음직한 도구나 기물들, “원생적 야생적 思考”라고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브 • 스토레스가 지칭했던 민초들의 독자적 생존원리와 세계관 같은 요소들이 혼재해 있었다. 한국에 가서 장기간 체류했던 신조선족들도 중국에 귀국했다가 적응을 못하여 다시 한국을 찾아가는 케이스는 또 하나 붐에서 낳은 출국붐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문화체험”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경계적”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것이다. 이문화자체가 “경계적”인 까닭에 그속에 들어가서 숨쉬고 일하고 사는것은 그 경계적 시간, 공간을 사는 얘기가 된다. 왜냐면 이문화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같은 “시간”이긴 하지만, 자신이 여직껏 속해있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며, 그 공간 역시 더 말할 나위없이 이질된 공간이기때문이다. 문화인류학에서 이런것을 “경계적 시간, 공간”이라 지칭하며, 이문화속에서 시공을 헤염치면서 자기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의 시간 공간을 실체험하게 된다. 이문화의 공간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쉽다. 민족, 언어, 종교, 습속 등 문화가 다른 나라. 집단사회의 공간은 당연히 이질공간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문화 시간이 다르다고 하면 좀 고개를 갸웃들거리는 대목일것이다. 다같은 시간인데 어디가 이질적이냐는 의문이 앞선다. 그러나 세계에는 근대적 의미의 “시간관념”이 아닌 각자의 사회전통적 시간도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나 중국에도 지금의 시간관념과 이질된 사고가 있었으며 오늘의 일본에도 서양일력이 아닌 “皇紀X千年”하는 시간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현존하는 일본의 원호, 일테면 平成,昭和,大正,明治하는것은 明治이후 일본은 시간을 天皇의 재위기간으로 획을 긋는 사고가 있었기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호연대(元號年代)를 잘 몰라서 헷갈릴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런것들은 근대적 시간과는 이질된 일본 특유의 독자적 상징적 시간관념이라는 문화를 노정하고 있다. 이 독자적 文化속에는 흔히 그나라 독특한 문화가 슴배어있기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것은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일본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일본의 이같은 시간문화를 터득하기에는 쉽지 않을것이다. 시간과 함께 공간으로서의 “이문화체험”은 중요하다. 더우기 오늘날 21세기와 같이 인간, 물건, 정보, 금전이 수시로 이동하는 글러벌세계속에서 이문화공간으로 들어가는것(관광, 여행, 회의, 장단기간 체류, 유학, 취직, 이민, 망명)등이 용이한 시점에서 그어떤 서책이나 인터넷 정보나 지견보다도 실체험만큼 유효한것은 없을것이다. 시야, 사고방식에서 우선 체험과 미체험에서 생기는 갭은 엄청나다. 내가 최초로 일본에 왔을때 일본에 대한 체험담이나 인상담을 국내 친지들에게 들려주면 그중에는 이해자도 있었지만 “이 양반이 일본만 높이 추켜올리고 중국은 폄하시키냐”는 식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필자가 발표했던 비교문화론적인 한국문화론이나 「조선족개조론」같은 논조에 대해 한국에나 조선족의 식자나 대중들은 거이 미체험에서 오는 무지와 편견에서 오는 반발이 많았다. 그들이 이미지속에 각인된 고정된 일본표상(허구적인 요소가 많음)을 무기로 필자에게 오히려 “황국사관”이니 “일본예찬”이니 하는 수없이도 많은 편견의 렛벨을 필자에게 붙인것이다. 특히 연변 조선족 일부 소수의 지식인의 그런 편향적인 “무지”의 일본지식에 필자는 페구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일본 실체험이 있게 된 대중들이 오히려 일본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뒤 필자에게 “그때 당신이 말하던 일본론을 이제 일본에서 실제로 보면서 알았다”고들 이구동성으로 찬동을 표한다. 대중들의 해외 문화체험이 오히려 진부한 지식인의 고리타분한 답습적 인식보다 월등 우수하다는것을 필자는 신조선의 탄생을 통해서 더 실감하게 되었다. 신조선족이 해외에서의 다양한 이문화의 시공간적 체험은 이제 우리 조선족에게 새로운 혈액요소로 되어 되돌아 올것이다. 지금부터 좀더 이 실혈액을 소중히 하는것이 바람직한것이라고 필자는 권장하고자 한다.
31    33. 神은 우리에게 ‘明鏡’을 주었다(김문학) 댓글:  조회:7266  추천:23  2010-09-19
《신조선족》월경론33. 神은 우리에게 ‘明鏡’을 주었다김문학신선사장(神仙思想)에 나타나는 東王父, 西王母가 사용하던 ‘거울’이 아니다. 절세미인 양귀비가 화장시 쓰던 아릿다운 거울은 더구나 아니다. 성경에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했다면 필자는 “우리에겐 ‘거울’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거울은 곧 “異文化”라는 이름의 거울이다. 그것이야말로 타자를 알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는 “明鏡”이다. 월경민족에서 탄생된 조선족에게는 수미일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선물받았다. 漢族과 기타 소수민족과의 조우를 통해 우리의 1,2세대 선대들에게도 막연하지만 어떤 “異文化”라는 거울을 갖게 된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 거울을 오늘의 신조선족 같이 유효하게 사용했는가는 의문은 많이 남는다. 글러벌리즘의 시대 중국 연해로, 바다건너 해외로 진출함에 따라 조선족에게는 하나 또 하나의 “이문화”라는 거울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우리 스스로 획득했지만 그 축복받을만한 성격을 필자는 神에게 하사받은 선물로 고맙게 생각한다. 고정적인 이문화 거울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일거에 우리앞에 전개되는 시대, “이문화 이해”의 시대가 조선족역사의 새장을 열어놓았다. 이래서 우리는 기성관념을 깨고 새롭게 리누얼하면서 우리의 모습 자체를 변용시키고자 하고 있다. “이문화 이해”란 무엇인가? 문화인류학적인 해석을 보자. “자기와 他者 또는 자기집단과 타집단이란 관계의 문맥에서 자기 내지는 자문화에 대하여 “異質的存在”로서의 他者내지는 他文化를 알기 위한 지적(知的), 실천적 영위”를 가리킨다. 인류학의 주요내용이 文化的他者의 이해인것 같이, 인간자체의 생활에도 지금은 他者이해가 日常化되고 있다. 특히 신조선족의 경계를 넘는 경제, 문화활동의 빈번함과 일상화는 꼭 타문화 이해로 직결되는것이 특징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문화이해”라고 해도 사실상 그 내실에는 여러가지 이해의 수준과 특질이 존재한다. 심리인류학자 스파이로(SPino)는 예전에 이문화이해-습득에는 다음과 같은 5종의 수준, 내지 단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1)이문화의 어떤 사실을 알게 됐다 (2)그 의미(배경이나 이유)가 알게 됐다 (3)그것을 “정확하다” 또는 “적절하다”고 믿는다 (4)그것을 자기자신도 “할수 있게”된다 (5)그것이 내면화 된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착안된다) 여기서 (1)은 초보적 이문화의 차이점을 알게됬다는것이고 점차 상승, 심도있는 인식을 거쳐 (5)단계에서는 그 이문화는 이미 他者가 아닌 자기의 내면의 일부분으로 소화흡수되어 공감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문화이해는 이문화라는 「明鏡」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 인식하는데로 회귀한다. 이같은 他者와 自己사이에 “설치”된 “영경”을 통해서 타자 이해를 자신의 이해로 동시에 섭취하는 과정은 새로운 “自己”의 形成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 수준과 질적인 정도는 개개인의 사정과 이해력, 적응력에 따라 같지 않지만 이 거울은 우리가 매일 아침 세수하고 자기 얼굴을 보듯이 자신을 비쳐주는 중요한 ‘장치’-문화장치-인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용모를 볼수 있는 장치는 “거울”이 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말할수 있는것은 異文化의 존재, 그 理解가 곧 이런 文化的 거울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20년동안 소식이 불통이었던 중학동창 N씨를 최근 서울에서 만났다. 중학 졸업후 농민으로 일하던 그녀는 서울에서 생활한지 15년, 농촌의 부인에서 이미 세련된 도시 “마담”모양으로 탈바꿈 했다. 지성과 외모의 세련을 겸비한 그녀의 변신에서 필자는 해외 근대문화속에서 십분 적응시킨 이문화이해의 “달인”을 발견했다. 물론 외모적 변모뿐만 아니다. 이미 서울의 근대도시문화를 내면화시켜 그 자신도 서울 근대문화의 수준으로 승화시킨것이다. 그녀와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들이키며 환담하면서 이문화의 명경은 역시 村婦도 都市모던 여성으로 이쁘게 화장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구나고 실감했다. 일본에서 만났던 60대의 연변출신의 남자 E씨는 필자와 환담하면서 “일본체험에서 얻는것은 무엇인가”라는 필자의 인터뷰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에 온지 8년째입니다. 말그대로 8년 항전이지요. 중국에 있을때도 대련, 청도 연해도시에서도 살아봤습니다만, 일본에서 느낀것은 역시 하나입니다. 조선족이 살아남는 진짜 방법은 연변오지와 같은 땅을 떠나서 밝은 선진문화도시나 지역, 나라로 아주 나와 살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그 땅에 너무 집착했기에 땅밖에 모르는 “땅벌레”로 전락되지요. 만일 내가 연변에서 그냥 농민으로 있었다면 너무나 비참했을겁니다. 세상을 모르고 사는 “땅벌레”였을거니까요. 김선생님이 이런 생각들을 책으로 써서 우리 조선족들을 좀 호되게 깨우쳐주십시오.” 이문화라는 명경에서 결국 발견된것은 우리들의 고루한 “토착형” 인간모습이었다. N씨와 E씨, 이들은 이문화의 실체험으로 우리 조선족의 땅에 연연하는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의 목소리는 우리의 일부 고루한 지식인의 사고방식보다 수백배 현실적이고 선행성을 띤다. 신은 우리에게 이문화란 明鏡을 주었다. 이것을 버릴것인가 살려서 우리의 변신에 활용할것인가 하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30    32.海鯨과 鰍魚의 比較論(김문학) 댓글:  조회:5620  추천:27  2010-09-16
《신조선족》월경론32.海鯨과 鰍魚의 比較論 김문학고래와 미꾸라지. 메타포적 레토릭을 구사한것이다. 바다건너 越境하는 신조선족의 해양성, 개방성적 視野 및 스케일과, 연변의 일부 구조선족의 퇴영(退嬰)적 前近代的 폐쇄성과 泥臭性의 視野 및 그 스케일을 比較하는 메타포.이 레토릭이 처음 니카에 뜨자 다수 네티즌의 안구를 자극하면서 주가를 높인듯 했다. 이는 작년 8월말 필자가 니카의 인터뷰에 응할때 사용한 비유였다. “장장 10년을 연변 일부 수구파지식인들에게서 ‘매국노. 반역자’…로 비방, 중상을 한몸에 받으면서 왜 한번도 대응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에서 등장한다.필자의 원어는 이렇다. “바다에서 사는 고래가 언제 한번 개천에서 노는 미꾸라지들에게 시선 주는거 밨습니까? 사는 곳, 스케일, 시야가 다른데 왜 고래가 미꾸리의 흙탕물 장난에 신경을 쓸 이유가 있겠나요? …”니카 인터뷰문에는 “고래와 미꾸라지의 관계”라고 적혀있던데, 필자는 이들 사이의 그 어떤 “관계”가 아닌, 異質性, 異時代性을 언급했던것이다.지금껏 수없이도 많은 팬, 독자와 매스컴으로부터 “왜 일절 대꾸 안했나?”는 점이 너무 궁금했던 까닭인지 이 질문을 필자는 무수히도 많이 받게 되었다. 오늘 이 지면을 빌어 단 한마디로 명확히 대답드리겠다.“서로 사는 무대와 时代가 다른 까닭에 일말의 反論의 가치도 여지도 없었다고 판단 했기때문이다”고.굳이 한마디 더 부언하자면 “잠꼬대 같은 말장난의 소모전에 나는 내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소모시킬 이유가 없었기때문이다. 내 자신에 대한 인물평과 작품의 판단은 시간에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필자는 성격적으로 유연성이 있어 그런 비난 받는것도 립지(立地)적으로 감안할때 당연지사라고 인식했으며 그에 무돈지(無頓智)했다.2년전 68세로 작고하신 어머니는 필자에게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은 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무의식중  이 모교(母敎)가 필자의 좌우명이 된듯 하다.상해 海派文化인의 대표인 중국 당시 문학계, 독서계의 왕자로 불리는 여추우(余秋雨)선생님은 필자와 오랜 친분을 나눈 인물인데, 그가 2000년 8월 히로시마서 필자와 상봉했을 때 이런 체험 교훈을 들려주었다.“사람은 유명해지면 수시로 수많은 비난, 중상을 받기마련이므로 김선생도 앞으로 이런 경우에 꼭 조우할것이니 절대로 섯뿔리 대응하거나 그런 소모전에 말려들지 않도록 근신(謹愼)해야 합니다…”당시 여선생님은 필자에게 이런 文句를 써주었다.春雨大雅能客物秋水文章写人事죄송하게도 어쩌다 말이 좀 샜으니 본제로 돌리자. “해경과 추어의 比較 ”에서 사실 필자가 노린것은 고래와 미꾸라지를 신조선족의 개방성 사고의 스케일과 구조선 일부 수구파의 전근대성 폐쇄적 사고의 스케일을 지극히 对照적인 표상(表象)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이다.그럼 고래와 미꾸라지의 담론을 좀 더 체험적 근접적 거리에서 어프로치 해보기로 하자. 필자가 “고래”에 대한 이미지에 지대한 관심을 품게 된것은 대학교 1학년때 일본어역으로 Herman Melville(1819-1891)의 장편소설 「백경(白鯨)」(흰 고래)을 읽게 되면서였다.  사마세토 모금에 의해 “세계10大長篇小說”에 꼽힌 이 소설은 거대한 백경(白鯨) 모비딕한테 왼쪽 다리를 먹히운 선장 예하브가 보복을 위해 세계의 해양을 항해하면서 그 백경을 찾는 모험소설이다.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고 시작되는 소설은 이슈메일이란 화자의 구술로써 이야기가 전개된다. 본질적 의미에서의 키퍼슨(중요인물)은 선장이 아닌 젊은 수부(水夫)인 화자이며 그 백과전서적인 고래에 대한 지식은 그야말로 “박물지”적이며 역사, 과학, 신화, 언어학적 제반 영역에까지 섭렵되는 고래에 관한 知見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이야기의 구조는 다원구조로서 풀기어려운 복잡한 인용, 상징의 그물 세계를 이룬다. 그것은 정치소설, 종교소설, 또는 모험, 실험, 해양, 인간, 인간과 고래, 인간과 인간의 격투…를 현란하게 묘사하고 있다.고래가 사는 무대는 해양—불루오션(청색바다)이다. 고래에 대한 필자의 지식은 여기서 시작되며, 해양에 대한 동경도 여기서 시작된다. 내륙 심양에서 자란 조선족 학생으로서 “바다”는 동경이 황홀경이도 했다.“왜 세계를 文明史적으로 동양, 서양 하는 식으로 海洋의 “洋”으로 표현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필자는 18세의 다감한 시절에 자문자답하면서 “해양”을 몹시 의식하게 되었다. 필자가 당시 고민했던 문제의식은 왜 인류가 육지에 살면서도 그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개념은 동륙(東陸) 서륙(西陸)이 아닌 동양, 서양인가 하는 소박한 테제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필자는 당시 중국대학에서의 석사공부를 단념하고 동양의 선진국 일본의 한문세계에서 아카데미즘을 흡취하고 동양 3국인 文化의 比較를 겨냥했다.이유와 목표는 개개인에게 다르지만 이렇게 조선족의 해양을 향한 청색의 월경시대는 사실 바다 해양문명에 대한 역경이 근저에 숨쉬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번에는 “미꾸라지”의 표상에 대해 얘기하자.“기름종깨과의 민물고기, 논, 개천 등 흙바닥속에서 살면서 길이 15cm, 가늘고 길며 미끄러움”사전에는 이런 해석문이 일반적이다. 우아한 한자를 차용하여 추어(鳅魚)라 일컽는다. 미꾸라지는 약하여  “미꾸리”라고도 한다. 우리 육지인의 친숙한 민물고기지만 그에 대한 표상은 어딘가 야유적 풍자적인것이 많다.일테면 “미꾸라지를 먹고 용트림한다” ”미꾸라지 용 됐다”등 미꾸라지는 보잘것 없는 비천하고 토속적이고 폐쇄된 스케일이 작은 인물로 규정돼 있다.  “미꾸라지국”은 일명 우아한 “추어탕”으로 불리는데 필자의 대호물(大好物)이다. 경상남도 출신의 할머님이 끓이는 추어탕은 일대 미미(美味)였다. 개육탕, (보신탕)은 필자는 즐기지 않으나 이 추어탕은 참 맛있다. 한국에서도 보급된 식당메뉴이기도 하며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도 즐겨 먹는다. 일본에서는 도죠, (泥鰌)라고 하는데 그 흙냄새를 꺼린 그들은 오히려 바다의 뱀장어를 특별히 선호한다.식문화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부언하면 중국 대륙 문화의 식문화는 그 요리명칭에 거개가 「火」자변이 붙는다. 炒、燒、烤、爆、煮…등 고기나 나물을 불로 가실가는 소재의 신선함을 죽이는 특징이다. 대조적인것이 일본인데 그 요리에는 「魚」자변이 많이 따른다. 거의 생선문화, 그것은 海洋性을 나타내는 문화이기도 하다. 하다면 우리 한국 (조선족 포함)은 「火」자변과 竹(초)자변 즉 나물이 많아 거개가 땅에서 나는 나물과 육류다. 맛있다는 장어도 우리는 민물 장어, 육류도 당연 개고기 같은 육지의 육류가 대호물이 된다.미꾸라지국은 좋지만, 미꾸라지적인 땅에만 직찹하는 좁은 시각과 스케일은 아무래도 타개해야할 우리의 문제일것이다. “미꾸라지”역시 개천에서 용이 탔다는 말과 같이 넓은 바다의 개방성 시야와 사고를 갖추면 “고래”로 변실 할수 있다. 그런데 기어이 좁은 개천 흙바닥으로 뚫고 들어가면서 재롱피우겠다면 그건 그 자신의 선택이니 그 자유는 존중한다.그러나 조선족이 개천을 탈출하여 넓은 바다에서 청색시대, 월경의 시대를 살면서 이미 “해경”으로 변신하고 있는 경하 할만한 변화가 이룩되고 있다. 그들이 바로 개방성 인간으로 거듭난 “신조선족”이다.좁은 개천에서 살지라도 넓은 바다의 시야와 사고를 지향하면 영낙없이 거대한 “해경”으로 거듭날것이다.전장 10m, 체중 4500kg의 웅대한 건물과 같은 고래, 집채같은 고래의 무대는 넓고 넓은 해양이다. 고래들은 말한다. “바다, 이문화의 바다에는 세계 가장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고 백경같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세계 그 어디로 질주하는 뜨거운 피들.추어들의 초라한 표상에서 더욱 극명적으로 뜨는것은 거대하고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신조선족의 청신한 표상이다.이제부터 신조선족의 겟텔은 “해경(海鯨)”이다! 그리고 심벌(상징적) 로고마크는 바다를 달리는 “해경”으로 디지안 돼 있어야 할것이라 생각한다.  
29    31.2050년의 우리는(김문학) 댓글:  조회:4811  추천:28  2010-09-14
《신조선족》월경론31.2050년의 우리는 김문학신조선족이 바로 動熊的時期가 탄생시킨 것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20세기를 돌이켜 보면 인구이동과 “월경”이 글러벌화 아래서 전개된 세계사적인 공동현상이기도 했다. 조선족은 1990년이래 세계 월경의 최전선에 서서 세계의 움직임과 同步的인 행동을 보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월경은 단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는 형이상학적인데서 보다 중요하게 부상된다. 즉 부(富)와 함께 사고방식의 변용, 유연하고 풍부한 사고양식을 100년 조선족의 유례를 볼수 없는 형태로 학습, 산출시킨 것이다. 조선족의 생활사와 정신사에서 이는 특기할만한 변용이었다. 필자의 조선족문화에 근 미래에 대한 展望은 비관적이 아니라 오히려 낙관적이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식의 조선족 文化의 20년 주기설(波動性)으로 앞날을 조망하면 어둡지는 않다. 물론 각자 보는 견해나 지견은 각기 다른것은 시각의 차이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필자는 이제 2010-2030년의 조선족은 상대적인 “半靜半動熊시기”에 들어서면서, 외부에서 새로운 집거지를 형성하여 그동안 쌓은 경험을 安靜하여 반추, 저작하면서 “신조선족집단공간”형성에 힘을 주입 할것으로 보인다. 한편 연변의 전통적 민족공간도 월경을 통해 해외에 나갔던 回归者의 신선한 혈액에 의해 文化反省을 하게 되면서 하나의 신생의 “연변조선족민족공간”이 재편성 되리라 예견된다. 또한 한국과 북조선이란 (통일한국은 더 좋고) 굵은 핏줄이 우리의 뒤에 있다. 그리고 신조선족의 해외파들은 그 선진국에서 자신들의 집단공간 (일테면 재한국조선족의 30~40만)이 새로운 “조선족 공간”을 구성할것이며 일본,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에서는 “집단적 공간”의 물리적 “공간”보다는 “文化的공간”으로서 그 유대가 튼튼히 구성 될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2050년 까지 이런 “신조선족”의 추세대들에 의해 “신조선족의 문화공간”이 다시 세계적인 넷트워크의 “신공간”으로 재구축, 1950년대 以后, 신백년의 “新신조선족”이 탄생 될것이다. 이제 100년후에도 조선족은 멸망 되지 않는다. 공간의 축소는 새로운 공간을 의미하고 농민으로서의 토지 상실은 도시시민으로서의 시민문화권 형성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민의 근대 및 전 근대적 문화차원을 질적으로 비약을 이룬 고차(高次)적 도시文明空间으로의 新生을 상징한다. 우리에게 조선족 멸망의 우려보다 “신조선족”을 어떻게 재건, 재구축시킬까를 고심하는것이 더 요망되며 바람직하다.  
28    30.조선족문화의 波動性 댓글:  조회:5107  추천:29  2010-09-13
《신조선족》월경론30.조선족문화의 波動性 김문학필자는 조선족문화의 연구와 조선족문화論에 있어서 무엇보다 重要한 것은 조선족 文化의 構造를 “越境”으로 포착하는것이라고 사료한다. 越境民族으로서 시작된 우리의 역사는 아마 역시 越境으로 끝날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숙명적으로 “월경”과 직결된 집단이라는것을 망각할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文化를 구조적으로 규명할때, 이 越境 및 그것으로 동반되는 모든 諸事像들을 빼놓고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 우리의 지식인이나 학자들이 조선족文化(또는 精神史)를 越境에 의한 文化의 波動性에 대해서 귀납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100년의 역사를 文化史적인 周期性 을 귀추하여 文化史的法测적 方法으로 文化를 논하고 내일을 展望하는 발상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하다.  林語堂은 中國 漢民族의  文化를 論한 「吾国吾民」(1935년)이란 영문저서에서 한족이 외래 民族의 침습에 의한 수혈을 받고 매번마다 약 800년 주기로 종결됐다고 지적한다. 이 역사 周期說은 물론 임어당 자신의 독창적인 발견이 아니라 1926년 顧頡剛(중국 저명한 역사가) 「古史辨自序」에서 지적한것은 원용한것이다. 顧氏는 “만일 五胡,契丹,女真,蒙古의 侵入이 없이, 漢族에게 신선한 혈액을 주입하지 않았다면 한족은 아마 오늘 날까지 구연(苟延)되지 못했을것이다”고 직설했다. 북방의 소수민족의 침입(월경)이 한족에게 신생명의 입김을 취입시킨 중대한 역사적 주기성을 갈파한 대목이다.  일본의 근대 사학자, 나이토고난의 제자이기도 한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역시 그 저서 「東洋 朴素주의적 민족과 문명주의적 사회」에서 같은 역사설을 전개시키고 있다. 북방이나 주변의 朴素주의적 非文明 소수민족이 문명대국 중국을 침입하여, 소박한 요소를 취입시킴으로써 한족에게 신혈액을 주입, 한족의 “신생”을 초래했다고 논점을 제기한다.  중국 文明史는 漢族만이 아닌 諸“야만”민족의 마이너리티의 침입(越境)에 의해 구성된 중요한 史实은 오늘 그 누가 부정할수 있으랴.  거대한 대륙 文化에도 우리의 상상을 절(絕)하는 越境의 드라마가 있거늘, 하물며 우리 작은 마이너리티로서의 越境이 그 구조적인데 이를 어찌 외면할수 있으랴. 이제 필자는 조선족 문화의 파동성(주기성)에 대하여 간단히 논술하고자 한다. 조선족이 외부문화에 대한 행동은 (1) 靜熊적인것과 (2) 動熊的 및 (3) 半靜半動熊的 시기로 不麦性,連續性을 보이고 있다.  해방후 조선족의 외부문화에 대한 대응, 對外意識은 주로 적극적인 인구이동의  越境을 주축으로 노정하고 있는것이 특징적이다.  “靜熊的”인것은 집단적으로 安定, 정착하면서 외부文化 (즉 주로 漢族文化)에 대해 受熊的 태세를 취하며 반발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獨自性을 지키려하는 시기이다. “動熊的”인것은 외부文化(漢族,海外)에 대해 安定,定着의 수동적 반발, 수용을 깨고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한족文化空间(대도시)와 海外로 越境하여 지근 거리에서 외부文化를 접촉수용하는 양상이다. “半靜半動熊”는 이상 양자가 복합된 형태로 靜熊的 安定性을 지키면서 또한 적극적으로 외부文化를 수용하고자 行動으로 실천하는 양상이다. 1950년대~1960년대(20년) 靜熊的时期 1970년대~1980년대(20년) 半靜半動熊时期 1990년대~2010년(20년) 動熊的时期 “越境的移動”의 특징적 기준으로 조선족의 文化는 20년 주기성(周期性)의 波動性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20년 사이클을 가지고 귀추해보면 조선족의 문화는 주로 半靜半動熊 및 動熊를 반복하면서 외부문화에 대한 단순한 反발을 넘은 적극적 수용융합이 월경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특성을 진단해 낼수 있다.  정치문화(국가적 의식)에 대한 우리 조선족 태세는 물론 적극적이고 민족문화(습속적 사고, 행동양식)에 대한 우리의 独自性을 보유하면서 越境을 통해 많은 외부 文化의 요소를 흡수하고 있다. 
27    29.靑色時代 (김문학) 댓글:  조회:4942  추천:30  2010-09-10
《신조선족》월경론 29.青色時代     김문학피카소의 “청색시대”가 아니다. 친구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쇼크를 받은 그가 무기안료의 침울한 청색을 표현하려 했던 암청색조의 무거운 청색, 절망의 청색이 아니다.   필자가 얘기하려 하는것은 때로는 진하다 못해 에메랄드의 광택이 반짝이는 바다의 청색이다.   오늘의 조선족은 전례없는 개방시대를 지향파한 해양의 청색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을 필자는 토지에 연연했던 농경지향의 대륙적인 황토의 황색시대, 또는 이데올리기의 홍색시대와의 상대적 개념을 전제로 한것이다.   내륙오지의 연변을 이탈하여 연해도시, 바닷가의 개방성 대도시로의 이동, 그리고 푸른 바다를 넘어 해외의 선진국문명권에서 해양의 개방성과도 같이 青色時代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바다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희망의 바다다. 미풍은 속삭이고… 휘파람 불며 가자. 희망의 바다로!”   우리의 민요 「꽃마차」의 “거리”가 “바다”로 바뀌고 있다. 본디 바다의 청색은 “희망”의 의미이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는 해양의 아시아에서 탄생했다”고 문명사학자 가와가츠 헤이다(川勝平太)가 갈파했다. 그는 이렇게 창신한 언설을 펼치며 “해양”을 “발견”한다. 고대 문명은 아시아 “대륙”에서 형성되는데 반해 근대 문명은 비아시아 “해양”에서 탄생된다. 세계사의 다이내미증을 낳은 무대는 아시아에서 비아시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바뀐 이유를 문화전파의 실크로드인 “육상의 길”의 역전적인 “해상의 길”에서 찾는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맑은 문물들이 아시아대륙에서 해상의 길을 통해 유럽으로 흘렀다.   이래서 역사는 해양아시아로 무대를 옮긴다. 서양 최초의 산업국가 영국과 동양 최초의 산업국가 일본은 거대한 해양아시아를 통해 역사의 시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즉 근대의 세계사가 막을 연것이라고 한다.   가와가츠는 유물사관과 육지(陸地)사관을 초월하여 “문명의 해양사관”이란 참신한 이론을 발안한다. 그는 유물사관, 육지사관을 이데올로기와 육지(땅)의 사관은 어디까지가 육지 중심적이며 거기에는 중대한 바다에 향한 시점, 이 바다로부터의 시점이 통채로 결락돼 있다고 지적한다.   해양아시아(대륙적 아시아에 대치한 개념) 의 인팩트에 대한 레스폰스로써 해양국가 일본과 유럽에 신문명이 출현됬다는 해양사관 테제.   21세기는 현재의 추세가 지속되면 세계 최대의 바다인 태평양이 무대로 되는것이 틀림없다. 장래의 「태평양문명」을 짊어질 APEC의 중요한 멤버로서 일본도, 한국도, 그리고 중국도 해양지향의 길에 이미 들어섰다.   그리고 서양의 근대사회 자체도 해양을 무대로 생성된것이며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전부가 해양국가였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라 불린 페루낭 부로테르(1902~1985)는 그의 명저 「地中海」에서 역사에 향한 눈길은 육지에서 바다로 전환시켰다고 선언했다.   중국대륙의 문명에 한해서 담론할때 동양사학의 권위인 구와바라지츠조(桑原隲藏) 박사가 1925년 유명한 논문 「역사상에서 본 남북중국(지나)」에서 회하를 분수령으로 남북중국설을 전개하면서 남방문화가 북방문화를 능가했다고 갈파했다. 정치중심의 북방과 경제중심의 남방이 천여년전에 이미 형성됐으며 북방은 정치 얼굴의 “대륙중국”, 남방은 경제 얼굴의 “해양중국”설을 제시했다.   “대륙중국”과 “해양중국”의 이원론은 대단히 현실적 의의를 띤 언설이다.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남방순회에서 걸러낸것도 이같은 배경을 잘 설명한다. 경제와 문화적 누적이 중한 남방, 해변가 도시에서의 개방성을 활용한 속셈은 너무나 탁견이었다. 아니,탁견이라기보다는 그 역사적 전통의 특징을 그대로 이용한것이였다.   만약 정치의 도시, 홍색이데올리기로 팽창된 북경에서의 개혁은 무리였을것이다. 중국의 근대의 많은 혁명, 유산은 남방에서 생성, 탄생되어 북방에 오면 북경에서 종식되는 “근대사의 법칙”을 필자는 “발견”한다. 강유위 양계초의 무술변법도 손문의 신해혁명도 북경에 이르면 다 패북의 좌절로 무산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중국에도 홍색지대와 청색지대의 전통적 공간이 존재했다. 그러나 북경의 홍색이데올로기가 팽창되면 청색도 기가 죽는다. 문화대혁명은 기실 완전히 홍색의 해양, 홍색의 광란이었던 점에서 중국의 홍색문화는 여전히 연연한 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중국 북경정부도 이미 등소평이래 해양지향의 청색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상해, 청도, 대련, 심천 등 대도시는 청색시대의 청색문화가 농후한 공간이다.   조선족이 이런 연해도시의 청색문화지대에 진입하여 국내적 청색시대를 만끽하고 있는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그리고 바다건너 월경을 통해 해외에서 살고있는 조선족 역시 해외 청색시대의 개방성 문명의 수혜자이며 전도사이기도 하다.   누런 농경지 땅을 배경으로 한 황색시대, 붉은 이데올로기 중심의 홍색시대를 넘어서 해양지향의 조선족이 청색시대의 주인공이 된것. 이는 조선족의 축복이다.   중국 전체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해양성지향의 선진국가로 탈바꿈하는 이 격동의 시대,조선족의 청색시대는 많은 의미에서 국내마이너리더의 해양문화지향의 선구자이다.   선구자의 앞에는 항상 푸른 바다가 있다.        
26    28. 지식인의 무덤 (김문학) 댓글:  조회:6191  추천:41  2010-09-07
《신조선족》월경론 28. 지식인의 무덤 김문학  구조선족의 종말과 함께 또 하나의 ”종말”을 선고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지식인의 종말”이란 테제이다. 아니 지식인 전체가 아니라 우리 조선족 지식인, 좀 더 구체화시켜 直言하면 연변조선족의 일부 “수구파+좌파(?)지식인”의 종언.  사실 10년전 「조선족 개조론」에서 필자는 이미 그 시점에서 그들이 종언을 예언했다. 최종회 「장백산」(2001년 6기) 「조선족 지식인 비판」「지식인의 精神病理學과 우리 자신의 제한성」「우상, 이제 없다」등 문장에서 그들의 죽음을 정신병리학 원리로 分析하면서 경종을  울리었다.  그런데 비극적인것은 당시 그들은 이 글을 쓴 필자에 대한 외곡적인 해독과 몰이해의 까닭으로 정서적인 열광적 반발의 광란극을 벌이는데 열중하여 필자의 지적을 간과 했거나 역시 해독할 수준도 능력도 결핍했던것이다.  오늘도 불가사의 한것은 그때 왜 그들이 냉철하게 읽는 해독(解讀)도 자기 省察도 없이 무조건 반발, 반박, 부정의 광란극을 펼쳤는가 하는것이다. 그 점이 오늘까지도 궁금하고 한편의 전인미답의 희극을 보는듯 재미있었다.  그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비판했던 “연변좌파병원”의 그 극중의 배우들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연(自演)의 배역을 맡았던것이다. 세상에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고 유순호씨도 미국에서 킬킬킬 조소한다.  그들 자체가 자신들을 위한 종언의 “무덤”을 만들었다는것이 결론일것이다. 필자는 그때 조선족의 일부 수구파의 단점과 그 형성원인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 지식인자체가 농경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살면서 그것이 무의식중에 체질화된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끼리만 집중된 지역에서는 지식인의 농경성격이 여타 이민족과의 실질적인 접촉이 없어도 전혀 생활에 부자유가 없으며 또한 그것을 특별히 필수하지 않은 전제하에서 그것들이 더욱 비대화로 발전하여 클로즈업되기 십상이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중세의 베네치아, 근대의 영국 등 재해양민족에게 보여지는 《바다야말로 내가 일하고 사는 고향이며 영원히 잠들수 있는 무덤》이라는 사고가 없다. 즉 내가 나가서 내가 사는 곳이 어떤 이경(異境)이라 할지라도 내 고향이라는 개방적인 사고와는 무연하다. 이미 한세기여동안 중국에서 정착해오면서 고정불변의 내 《고향》을 만들고 고수하기에 여념이 없어진것이다. 따라서 고질로 된 고향을 떠나면 죽을것만 같은 사고로 점철돼있으며 고향리별의식은 없으며 끝까지 《성역화》시킨다.  이런 지식인의 의식은 일원적(一元的)이며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충만돼있으며 원패턴(한가지 류형)의 사고에 포로돼 내부로부터든 외부로부터든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언론이나 행동은 모두 이단시(異端視)되고 타도의 타깃으로 되기마련이다.  거기에다 《정치적투쟁》의 유전자까지 투기적인 정열이 가미되다나니 우리 지식인이 《성역》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무슨 일인들 못해내랴.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나라나 민족을 막론하고 지식인중에는 어디에나 보수적인것과 개방적인것으로 이분되는 일은 흔하다. 일본에도 보수적인 우익지식인의 목소리가 크며 한국에도 보수적인 지식인의 세력은 상당하다. 그러나 비교를 통해 보면 우리 조선족지식인의 보수성은 더욱 렬악하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촌놈》의 레벨을 벗으려면 아직 멀었다. 이 표현 말고 딴 표현을 아무리 찾아도 더 적중한것을 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이고 아이러니컬한것은 우리 지식인의 보수성은 이미 고향을 이탈하고 땅을 떠나 모험의 길로 나아가는 많은 농민의 당찬 모습에 비하면 너무 왜소하고 영양실조처럼 보인다. 그러고도 《우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솔자》인양 행세를 하려 드니 진짜 촌놈으로 추락된것을 실감한다.  21세기의 첫시작부터 우리 지식계, 문단에서 새로운 《의식혁명(意識革命)》의 물고를 터쳤다. 우리 민족의 전례없는 《의식혁명》의 홍류다. 내가 소리높이 웨치고싶은 말은 누구보다도 먼저 반성하고 개방해야 할 사람은 많은 대중이나 농민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지식인 자신들이라는것이다.  열린 개방의 길만이 우리 지식인,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일부 조선족의 결점을 필자는 구조선족의 “농경성”에서 규명했으며 “고향을 이탈하고 땅을 떠나 모험의 길로 나아가는 농민” 즉 “신조선족”에 비교해도 후진적인것, “우리 시대의 인솔자”로서는 失格이라고 지적했다.그러므로 이미 그 시점에서 그들의 失格은 그들의 역사적 무대에서의 退埸을 의미했다. 마치 포스터모던이라 불린 1980년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식인의 무덤』에서 밝혔듯이 지식인의 기능의 실조를 선언했던것과 유사하다.  20세기 후반 세계적 권위적 인물로서 앙가주망(사회참여)사상의 기치를 든 장 폴 사르트르가 1968년 5월 학생운동때 연설하던 그에게 “사르트르, 이제 말을 그만둬라!”는 쪽지를 청년들에게 부터 전달받는다. 사르트르는 그 메모지를 보고 목연해진다. 이미 자신이 청년학생을 리드하는 지도자의 헤게모니적 시대는 지났다고 실감했다.  이 운동에 에설 푸코의 모습이 보였다. 『언어와 물질』이란 저서로써 사르트르를 “인간의 종말”을 선언했다고 비판하면서 사르트르의 시대가 푸코적인 지식인의 리드시대로 새로운 장을 열었다.   마치 조선족의 지식인의 “최후의 보루요”, “흑마백마요” 자찬하던 “수구파 지식인”의 “종말”은 작년 니카의 젊은이들에 의해 선고당한다. “신조선족”의 발랄한 등장이었다.   그 “보루”는 멋있게 붕괴되어 마침내 자신들의 “무덤”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필자는 노신의 “물에 빠진 개를 매질하는 식”의 극단적 수단은 찬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냉철하게 자성하고 반추하는 여지를 주는것 역시 우리 선대 역사의 지혜가 아닌가. 그러면 그 삭막한 무덤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필것이요 풀이 무성할것이다.
25    26.생존유지주의와 유교로서의 “越境” (김문학) 댓글:  조회:5201  추천:33  2010-08-26
《신조선족》월경론26.생존유지주의와  유교로서의 “越境” 김문학 조선족의 越境을 필자는 생존욕망의 구조와 유교전통의 가족관념에서 해독하고자 한다. 흔히 우리는 越境에 의한 조선족의 문제를 모두 “民族”이란 개념의식의 틀안에다 몰아넣고 사고하는 버릇이 있으나 이 추상적인 “틀”로만 규정시키기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듯 하다. 조선족 다수를 점하는 대중들의 이동적인 “월경”의 행위구조의 리면에는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한다”는 당위성과 자각성이 존재하는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족 사회 공동체안에서 획득하지 못한 행복(부와 정신적 차원)을 추구하는 “월경”에 뒷바침 해주는것은 거창한 민족의식이 아니라 그것은 개인과 가족의 생존욕구 구조와 유교전통속의 가족관념 및 그 가치뿐이다. 100년전 조선족의 중국으로의 월경은 자각적인것과 정책적 (일제의 정착)인 요소가 있었다면 100년후 오늘의 월경은 조선족사회의 집단적 헤게모니에 의해 정책적으로 그 어떤 사상과 이론의 지시에 따라 행해진 것이 아니다. 즉 강유력한 정책과 어떤 정권의 이데올로기의 지대한 지도와 간섭이 있은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조선족 자신들의 자발성적인 행위였으며 그 자발적 행위구조를 이해하는 작업은 반드시 그 원초적 생존욕구 구조와 유교의 가족관 등으로 이해하는것이 너무나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문화인류학자 크리포드 기어츠의 경제적 인류의 원리에 의하면 농민, 대중은 일종의 살아가는 “경제인”으로서 그 의식 가치관을 “생존유지 제일주의”로 이해할수 있으며 또한 대중의 의식구조를 “개인이익 제일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전자를 “모럴.에코노미”로 후자를 “폴리티컬.에코노미”로 지칭한다. 대중들의 가치관, 생존구조를 이 두가지 유형의 구조로 이해하면 역시 인간의 욕망구조가 그 얼마나 동질적이며 민족이나 그 어떤 이데올기에 의해 규정짓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민족”관념이나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규정적 틀로서 사용하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욕망구조의 2차적, 차요적 요소인것이다. 그리고 조선족은 유구한 유교적 전통, 그중에서도 사회규범과 개인적 규범으로서 가족관념, “우리 가족을 위하여”라는 관념이 동아시아에서도 유별나게 발달돼있다. 이같은 관념이 생존욕망구조의 생의 에네르기로 충당되는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자신과 후세의 행복을 위하여”가 조선족의 행복찾기 월경의 경제, 문화활동을 보다 왕성하게 진행되게끔 보장해준다. 앞에서 거론했던 네티즌 대중들의 언설은 이 “욕망구조+유교가족관념”의 “월경”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집을 떠나 타지 또는 모국, 타국등으로 나간 모두들의 꿈인 행복을 이룩하기 위해 땀흘리는것은 현재의 어려움보다 미래의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하는 당연한 행동”으로 한 네티즌이 “월경”을 규명진 문장을 본적이 있다. 이 지적은 고명한 지식인의 “공론”이나 “민족담론”보다 수십배 현실적이고 원초적이며 조선족 월경을 원론(原論)적으로 해석했다고 본다. 개개인의 조선족이 월경을 통하여 획득한 물질적 부와 정신적 부는 다같이 마침내 민족의 것으로 귀추될것이다. 지식인에게 만일 그 헤게모니성이 있다면 월경에 대한 일방적 부(負)의 가치를 강조하는것을 버리고 그 플라스적 가치를 탐색하고 이론화하여 신조선족의 비전에 방향을 제시하는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신조선족”의 배경에는 유구한 유교적 가치와 인간의 생존욕구라는 든든한 구조로 지탱되었다는 사실을 재발견하면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24    25. 대중들은 “思想”한다 (김문학) 댓글:  조회:4550  추천:30  2010-08-23
《신조선족》월경론 25. 대중들은 “思想”한다   김문학     연변조선족 내지 조선족 전반적 “해체위기설”에 대한 언설과 사상은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우리 조선족의 고고한 언설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 자신이 착각하듯이 고명한것이 아니라 “탁상공론”이란 질타에서 自由로울수 없는 면들이 많이 존재한다.   필자는 오히려 삶의 최기층과 최전선에서 몸으로 땀으로 체험을 하고 있는 광대한 우리의 대중들, 비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더 실제적이고 현실에 밀착된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같은 느낌은 아마 필자 혼자만이 아닐것이다.   개혁개방 중반에 이르러 중국 지식인의 지적(知的) 탐구는 체재내의 위에서부터 부여하는 물질적 생활, 조건의 향상으로 편향되고 안일한 환경의 혜택을 듬뿍 향유하면서 “사색”과 “사상”은 일종의 정신적 나태로 변형되고 매우 “물질적 인간”으로 변용되어버렸다.   환언하면 일종의 “俗物的知識人”이 물질적 배경하에서 탄생된 셈이다.   국내 조선족의 체제적 혜택을 충분히 향유하고 있는 지식인 역시 이같은 유사한 지식인이라는 점에서는 중국 한국 속물적 지식인과는 구별되지 않는다.   조선족 지식인은 思想했는가?란 질문에 필자는 부득불 부정적인 답안을 준비해 둘수밖에 없다. 思想을 여기서 動詞적 의미로 사용한것은 사상을 하나의 실천으로 향하고 또는 실체험에서 대중적 기반의 진실성이 반영되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함에서다. 우리 지식인은 기실 “思想”도 없거니와 “사상”도 하지 않았다.   사상 내지 지식은 개성적 지식인, 사상가들에 의해서 명시되는것만은 아니다. 일반 대중의 지식, 현실인식 상태도 “사상”의 한가지 형태로 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사상은 대중적 집단에서 생성되는 코멘센스(良識)로서 되려 대중의 지식, 언설에서 반영되게도 한다.   1990년대 이래 최근 10년 조선족 비지식인의 인터넷상의 활발한 언설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양식(良識)적인 “사상”을 노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변대학의 김강일 교수가 2009년 6월에 조글로에 발표한 “조선족사회는 왜 해체위기를 맞고 있는가”에 대한 대중들의 리플방식으로 발설된 언설들은 우리 지식인의 “공론적” 현실파악의 결함과 한계성을 갈파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상”을 읽을수 있었다.   “미래안”이란 네티즌은 연변이 조선족 대중에게 흡인하는 매력이 없는 점을 11조의 항목으로 분석, 나열했다. 매우 정곡을 찌른 정확한 지적이다.   “매력적 연변의 공간”을 호소하는 너무나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근거를 제공한 면에서 이 11조 항목은 의의가 크다.   네티즌들은 연변공동체의 “해체”를 다른 시각에서 포착하면서 세계적으로 신공동체의 형성 “사상”을 피력한다.   연변조선족 공간의 해체를 꼭 마이너스로만 보지 않고 월경민족으로서의 구조를 활성화시켜 새로운 도시 공간 문명의 창설을 주장하는 “思想”이 잘 반영된다.   이 “사상”은 실생활체험에서 “人間”으로서의 대중들이 주장하는 21세기에 적응시킨 신조선족의 비전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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