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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선족》월경론
36.魯迅과 李光洙
김문학
노신과 동일문맥에서 비견되는 조선의 인물은 조선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春園 李光洙이다. 일본 유학 경험, 자국국민성 비판과 개조사상, 그리고 세계인적인 월경의 시야 등 측면에서 노신보다 11세 연하인 이광수는 매우 유사한 相似性을 띄고 있다.
단지 死後 최고의 위대한 文學家의 표상으로 낙인된 노신에 비해,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최고봉인 반면 민족의 반역자의 대명사인 “친일문학의 거두”라는 치욕스런 렛텔이 붙여있는것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의 비극 자체가 李光洙의 표상에 투영된것으로 인식할때 중국은 겨우 일제의 식민지전락까지는 면했지만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형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있다. 그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노신은 1920년 梁白華, 柳樹人 및 申彥俊, 李陵史 등 文人에 의해 속속 조선에 소개되면서 이광수에게 수용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의 「개조」잡지에 “조선의 阿鬼”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萬爺의 死」를 집필하는데 「아Q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이광수는 친하게 지낸 후배 문인 金素雲에게 “나는 아Q와 같이 바보다”고 고백,자신을“아Q형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일제식민지속에서 적응과 저항의 구도에서 자신들을 두고 향해진 쓸쓸한 야유였을것으로 추찰된다.
노신보다도 월등 다층다각의 얼굴을 보인 이광수는 안일하게 “친일반역적 문인”으로서 일축하기엔 무리한 인물이다. 사실 지금껏 한국이나 우리 민족이 이광수를 재는 척도는 “민족”이란 바러미터밖에 없었다. 1940년이후의 이광수의 “부일협력”의 언행은 그의 모든 평가를 집약시킨 “표상”으로 고정시켰다. 이 표상 역시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많이 일그러진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의 주장은 이문화의 경계를 살아간 이광수의 “월경적 삶”을 하나의 척도로 재단하면 그 표상은 오히려 다른 양상으로 부상된다는것이다.
서울대의 유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는 1400매의 상하권 이광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도서출판 솔)에서 이광수의 일찍 부모를 상실하는 삶을 “내면 풍경의 발견”으로서 “고아의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여윈 아비를 일본제국주의에서 찾아 헤맸다는 “표상”을 제작해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표상”에 “완전동감”하지 못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여기에 결여된것은 이광수를 이광수이게끔한 그의 이문화체험, 간단없는 월경하는 방랑에서 생성되는 경계의 지(知)적 思想을 평가의 잣대에서 빼버린것이다.
이광수 자신이 일그러진것이 아니라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 시각이 언제나 “민족”,“민족의 반역”이란 고정틀에 맞춰넣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으로 이광수의 “표상”을 재생산 하는것이다. 오늘도 한국지식인의 이런 재생산은 정치적 이용자(노무현정부 친일파 청산정책)들에 영합하여 자기성찰과 반추도 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친일파”의 생산공장은 “친일파”인물, 죽은 자들이 아니라 되려 오늘의 후세 정치가와 그 수하의 체제적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소수의 반역자는 어느 나라든지 다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역자 말고 문제는 후세들이 자진해서 “친일파”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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