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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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필] 항아리, 어머니 그리고 재봉기 (김문학) 댓글:  조회:2591  추천:32  2018-04-14
(수필) 항아리, 어머니 그리고 재봉기   김문학     활력이 강하신 어미님이 우리를 떠나신지도 벌써 10년이 된다. 늙으신 아버님이 묵향이 배인 벼루로 방불하시더니, 어머니의 모습은 키낮은 우리 조선조의 백자 항아리로 보였다.   조선조의 백자 항아리, 우리 겨레의 반찬과 먹꺼리와 함께 겨레의 넋이 담긴 백자 항아리, 그 키낮은 소박한 항아리의 모습에서 나는 왠지 어머니의 질박하고 자애로운 기품을 읽을수 있었다.   어미님이 쓰시던 항아리는 남고, 이제 그것을 일본으로 갖고와 내집에서 소중히 쓰고있다. 이렇듯 어미님의 손때가 묻은 항아리가 아들이 물려받은것 역시 민족문화의 전승이겠지.   기실 이 항아리에는 우리 강릉김씨 가문의 가족사가 슴배어있다. 증조부때로부터 전래하는 이 백자 항아리는 말그대로 보물단지다. 일본식민지 통치시기 유학자인 할아버지는 안면이 있는 일본 지식인이 이 항아리를 꽃병으로 쓰겠다며 고가로 매입하겠다고 간청했지만, 단연코 거절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6세 연하의 할머니와 결혼 하여 강원도에서 만주봉천(심양)으로 이주하면서 항아리를 지니고 오셨다. 그뒤 봉천에서 “대성당”( 大成堂 )이란 유명한 한방약국을 경영하셨다.   1950년 약재 구입으로 개원시골에 하향하셨다가 홍수를 조우하여 돌아오지못한 수귀( 水鬼 )로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공부를 전 학년에서 항상 으뜸으로 하던 아버지는 13살 어린나이에 조실부친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장남으로서 일찍 가장의 직책을 떠매야했다.   약국경영은 어른들에게 맏기고 봉천교외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게 되였다. 그러다가 1959년 어머니와 맞선을 보고 결혼하셔,  1962년9월 장남인 내가 태어나게 된다.   내 기억속에 백자 항아리는 우아한 꽃병으로 보여진게 아니라, 집안의 고추장을 담은 고추장단지로 변신하였다.   이렇게 근대 몰락된 신사의 가문은 조부의 돌발적사망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꽃병을 고추장단지로 쓰는 신세로 전락되였다.   그래도 어린 나는 항아리에서 풍겨오는 어머님의 고추장향이 무척 좋았다. 그리 맵지도 짜지도 않은 안성맞춤한 고추장의 미미( 美味 ). 문화라는것은 이렇게 가족에서 풍습의 맛으로 전승되는것이 아닐까? 내가 9살이 되던그해라 기억된다. 그 키낮은 항아리에서 고추장을 꺼내시며 어머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자 항아리가 키는 작아도 속이 넓어 많이 담는단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작아도 키보다 수십배, 수백배 마음이 넓어야 한단다 …“ “네, 엄마, 알겠어요. 나 커서 우리 강릉김씨 가문을 물갈이 할꺼예요. 농민신세를 벗어난 증조부, 조부처럼 지식인, 존경받는 대학자로 돼서 가문을 바꿔 놓고야 말겠어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사실 나는 농꾼인 아버지가 시내 친적들에게 얕잡아 보이는게 무척 싫었던것이다.   “야~, 너 참 대견하구나, 그런 꿈이 있어야지!” 어머님은 내 머리를 애부해주셨다. “꼭 그렇게 할꺼예요!” 그 뒤 내가 성년이 되어 지식인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일본에서 일시 귀국할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자랑스러워 하셨다. “니가 어떻게 9살 어린나이에 강릉김씨 대를 가신다는 말을 할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되뇌이시곤 하셨다. 우리 삼남매중에서도 어머니는 맏자식인 나를 각별히 아끼셨다. 내가 천생 약골이고 병약했던 까닭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앞에서 이렇게 술회하셨다. “내가 우리  문학이를 임신했을 무렵, 삼년재해 막바라지시기라서 식량도 귀했을 뿐만아리라, 입덧이 하두 심해서 사과한알도 변변히 못먹었지, 그래서 영양부족으로 문학이가 약골로 태어난게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어, 지금도 너무 애처롭단다…”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셨다. 이래서 집의 가사를 누이동생(진옥)과 남동생(병학)에게만 시키고, 나에게는 시킬대신 집에서 책 읽고 공부만 시켰다. 지금도 공부만 줄곧 해온 나는 대학생의 아버지가 되였지만, 가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선비로 돼버렸다. 지금 아내역시 늘 “당신은 천생선비여서 눈에 책밖에 보이지 않고 일이 안보이는 우리집 황제, 선비예요. 이런 황제가 탄생한것엔 다 이유가 었었네요.” 하면서 핀잔인지 칭찬인지 내게 말한다.   사실 선비, 황제란 낱말들이 나는 싫지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늘 내 자신은 일반 애들과 같지 않은 비범한 인간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것도 사실이다.   우리 강릉김씨 가문의 족보를 보면, 조선시대의 천재 김시습이나 일제시대 요절한 귀재 이상(李箱=본명 김 해경)등 쟁쟁한 문화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런 천재, 기재, 귀재로 되여 우리 족보에 이름을 새기고 싶었다. 내 삶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보다도, 오히려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지대했던것이 사실이다.   아버지는 건강하시고 (현재 84세), 독서를 즐기고 과묵하셔서 변제는 무디셨으나 글씨도 달필이고 그림도 능하셨다. 그리고 관용적이여서 너그럽고 타인을 절대 욕하지 않는 성격이여서 누구나 좋아 하는 노호인 ( 老好人 )이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이었으며, 독서는 별로 하지않았지만,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이여서 똑똑하고 사리 밝았으며 비평가 다운 기질을 지니셨다. 그리고 아량이 있고 미래를 볼수있는 관찰력이 탁월하셨다.     내 기억속에서 어머니는 어릴적부터 한번도 “공부하라, 숙제하라”고 재촉 한적이 없엇다. 방과후 우리 세 남매는 귀가하면 무조건 당일 숙제를 다 마치고 노는게 습관이되였다.   어머니의 교육 스타일은 자식들을 무단으로 억압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와 독서의 낙을 찾게 하고, 흥취에 따라 공부하게끔 조언을 주는게 자신의 방법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공부와 함께 운동도 잘했는데, 봄 가을 학교운동회 날이면 어머니는 생산대의 노동도 관두시고 도시락을 싸들고 운동회 응원을 오시곤 하셨기에 다른 애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공부도 운동에도 더 잘하려고 애쓰군 하였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이 원하는대로 성장하게끔 항상 넓은 흉금으로 베풀어 주시고 응원해주셨다. 내가 대학을 가던해 “아무 여자든 니가 맘에 들면 난 다 반대 안 하겠다, 니가 좋은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유와 독립이란 낱말은 굳이 사용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런 개념마저도 모르셨겠지만, 어머니는 그 가치를 벌써 알고 계셨던것인 모양이다. 나는 이런 어머님께 감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엄마두, 흑인 여자야 아니지요. 이쁜 아가씨를 며느리로 데리고 올께요…” 하고 나는 웃었다. 어머니도 따라서 웃으셨다. 어머니나 우리 가족사에서 특기 해야 할 귀중한 기물이 한가지 있다. 60년대 중국산 재봉기다.   손재주가 좋으신 어머니는 우리 일가의 옷을 이 재봉기로 자작하여 입혔다. 원근에 소문이 자자하여 동네 이웃들이나 먼 친척들도 옷을 만들어 달라고 맡기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일절 삭전을 안받으시고 기꺼이 봉사를 해주셨다.   우리 삼남매의 등교복이나 여름셔츠까지 어머니가 재단을 하여 손수 만들어 입히는게 관래로 되였다. 매년 설 날이면 어머니가 재봉기로 만든 멋진 새옷을 입을수 있었기 때문에 설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동년시절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소학교 2학년 여름이였다. 그 때 나는 홍소병대표로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인민공사에서 열리는 모택동사상문예이벤트에 나가게 되였다. 그런데 맞춤한 흰 셔츠가 없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상점에 달려가서 흰 목당목(천)을 사가지고 와서 재단을 하여 만들었다.   목당목은 흰 눈처럼 하얀게 아니라, 누르므리한 색에 천 표면에 여기저기 풀벌레 똥 같은 조그마한 점들이 박혀있어 그리 미관은 아니였다. 그런대로 나는 어머니가 지어준 흰 목당목 셔츠를 착용하고 넥타이를 매고 그번 이벤트에 참가하여 씩씩하게 사낭송을 하였다.   귀가하는 길에 5학년의 어떤 선배 여학생이 “지금 누가 이런 누렁목당목 셔츠를 입는다냐? 히히 …”하면서 조롱하였다.   나는 그런 선배여학생이 아니꼬운대로 집에 와서 어머니께 금방있은 “옥당목사건”을 하소연 했다. 솔직히 목당목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서럽기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차곡차곡 타이르셨다. “그건 니 잘못이 아니라, 목당목셔츠입었다고 비난하는 선배애가 잘못이다.사실 넌 모를꺼야, 옥당목은 싰을수록 바래져서 백설처럼 하얗게 바래진단다. 근데 그 선배가 입은 흰 셔츠는 싰으면 싰을수록 누렇게 변색해버려, 사람도 마땅히 날이갈수록 마음이 깨끗한 인간으로 되여야 해, 이 옥당목셔츠처럼 말이야…”   나는 어머니에 대한 울분이 다시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힘으로 바뀌였다. 세월에 싰기고 바래워서 백설같이 결백하고 순결한 인간이 되는 꿈을 키우게 되였다. 내가 현지 그런 결백한 참인간으로 되었는지는 호언을 못하지만, 순수한 지식인, 학자로서 자신의 독립적 인격과 지조를 지키고 허위와 기만을 까발리며,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정신은 그래도 구비돼있어 자못 긍지심을 갖는다.   어머니는 재봉기로 내게 흰 셔츠를 만들어 주었을 뿐만아니가, 순결한 넋, 인간적 지성의 지조를 키워주신것이다. 그 뒤 내가 일본유학길에 올라 독립적 자유주의지식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동아시아에서 알려지면서 나에 대한 일부 동포 지식인의 비방과 인신모독이 심해졌다.   이 일을 알게된 어머니는 내가 심양에 귀가 했을 때 이렇게 직백하셨다. “참 나원, 지금은 21세기요 국경을 제집처럼 넘나들고 국적까지 바꾸는 시대인데, 무슨 ‘매국노’란 욕말이냐?! 문화대혁명도 아닌데, 그런 학자들이 이 무식한 시골 할매보다 낙후하니 내가 다 그런 학자땜에 부끄럽구나! 내가 네 문장 읽어 보니까 다 옳은 말을 했던데 뭐, 참 잘 썼구나. 몸은 왜소해도 온 민족사회를 문장으로 뒤흔들수있으니 사내 영웅이 아니냐! 거기 신경쓰지말고 니 글이나 더 잘 써라…”   이렇게 말하시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여유와 관용, 그리고 자식에 대한 자호감과 자신만만함이 충만돼 있었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거듭 수긍했다. 그때 나는 시골 농꾼인 소학5학년도 졸업하지못한 어머님이 어떻게 이토록 유식한 말씀과 근대적 오픈된 의식이 있었을까 감탄했다.   이렇게 어머니는 항상 내편에 서 계셨다. 잘해도 못해도 나를 무식하게 욕을 하거나 질타한번 아니하셨다. 대신 설복과 자애로운 마음으로 늘 성처받은 나를 보다듬어 주시고 고무격려 해 주셨다. 고상하고 자애롭고 재간이 있고 교양이 슴배인 여성, 어머니, 아내, 그리고 며느리.   며느리로서 김씨 가문에 시집와서 36세에 청상과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셨다. 할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시기심이 강한 시어머니로서 손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대신 며느리에 대한 천대가 월등 강했다.   기실 한 가족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투쟁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할머니의 천대를 견디지 못해 우리 삼남매가 어릴적에 어머니는 동네 서쪽의 큰 호수에 빠져 자살을 할 생각이 한두번이 아니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린 우리 삼남매를 두고 차마 떠날수가 없다고 하고, 훗엄마손에서 천대 받을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해가 뜰 날까지 살아야 한다고 견강히 버텨오신 어머님.   우리 형제가 마련해준 심양시내 고층 아파트에 이주 하면서 이제 살멋있는 만년을 즐기게 됐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이다. 2007년 여름 심양에 가서 한달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을때, 어머님이 재봉기에 마주앉아 일하시는 모습을 나는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이게 어머니의 마지막 유영이 될줄이야 뉘 알았으랴!   2008년 4월 10일 입원하여 병상에 계신 어머님은 국제전화에서 이제 퇴원하면 일본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입쌀송편을 만들어 주시겟다고 하시더니, 14일 심야 갑작스레 천국으로 가시고 말았다. 타계하시기 이틀전 꿈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는 내손을 잡으며 “얘야, 내가 옛날 널 임신 했을 때 꾼 태몽이 있잖아. 그때 내가 두레박안에든 큰 구렁이를 버리고 왔으니, 너와 멀리 사는구나, 근데 나 이제 멀리 길떠야 한다.”하고 말하신다.   나는 “아니, 여기가 좋은데 어디로 떠나신다고 그러세요,엄마!”하고묻자, “아니야, 내가 꼭 가야 할 떼가 있단다. 나 먼저 가니 몸 조심하고 잘 살어라…” 새벽에 깨여난 나는 몽중의 어머니의 “작별”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여 병실의 어머니께 국제전화를 걸어 한시간쯤 통화를 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였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신다는 “죽음”을 타곳으로 가서 산다는 “삶”으로 내게 고백하신 셈이다. 슬픔이란 말이 무력할 만큼 깊은 슬픔과 슬럼프에 빠진 나는 그 뒤 “죽음”에 대해 재다시 사고하게 되였다. 육체의 사라짐은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상념으로 연결해 주었다. 나는 늘 왠지 어머님의 영혼이 내 주위에서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네르기.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글도 더 열심히 쓰고 지속해가고 있는것이다.   아아! 어머님이 작고하신지도 꼭 10년이 된다.   나는 어머님을 위해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단 한번도 우리 자식곁을 떠나 셨다는 느낌이 없기때문이다.   그 키낮은 백자 항아리는 영원히 어머니의 모습처럼 내곁을 지키고 있다. 작지만 소박하지만 맑은 넋을 담은 마음, 자애롭고, 지혜롭고 사리밝고 마음또한 바다 같이 넓은 어머님.    어머니의 그 재봉기 역시 우리 가문의 정신적 대물림의 심벌이다. 그렇다. 이 재봉기로 어머니가 우리의 옷을 하나하나씩 만들어 주었듯이, 이제 어머니의 재봉기는 나의 겹겹 아이덴티티의 옷을 만들어주는 창조적 지성의 보물로 되어 나와 인생을 걷고 있다.   어머니는 영원한 존재적 영혼이다. 그리고 영원한 정신이다!    2018년 3월 길일  
4    사실무근의 "오마이뉴스" (김문학) 댓글:  조회:3618  추천:26  2010-08-20
무근무실의 “오마이뉴스”   ■ 김문학     세상 사람들은 10년에 걸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나 개인에 대해 여러 가지 행태와 목적, 의도로 관심, 주목하고 있는데 대해 당사자인 나는 감사하는 한편 때론 어처구니없고 당혹할 때도 가끔 있다.   오늘 정오, 또 독자들의 제보가 들어왔다. “김정룡 선생이 쓴 <김문학의 반대파 수용>이란 글이 나가자 폭발적인 클릭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 글에다 단 댓글에 ‘태산’이란 익명의 네티즌이 오마이뉴스 보도랍시고 김문학선생이 ‘일본우익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가 다시 일본의 영토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는 보도를 올렸다. 그럼 김문학선생은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가?”   나는 독자들의 전화를 받고 앙천(仰天)했다. 그야말로 속담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 민다”더니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고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독자가 가르친 대로 “태산”이란 익명의 네티즌이 쓴 댓글을 찾아보았다. 그 골자는 주로 이러한 내용이었다.   “김문학은 요미우리신문의 시사잡지 ‘야마이노 특보’ 4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에서 한국이 식민지 지배를 받을 때는 행복했고”, “한국인 스스로 주권행사, 영토를 가질 자격이 부족하다”고 했으며 “한국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다시 일본의 영토로 지배해야 한다”고 했다는 등등이다.   직접 이 댓글을 읽는 순간 나는 아연했다. 나는 진짜 요미우리 신문사에 “야마이노특보”란 잡지가 있는 줄도 모르며 이 잡지사의 인터뷰를 받은 적은 더구나 없다.   참으로 기괴천만의 미스터리, 불가사의의 조작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이 소식은 100% 날조, 위조이다!   내실을 잘 모르는 광범한 독자 제현들이 보면 진짜 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고 믿겠다싶으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뉴스보도”가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마이뉴스가 왜 내 개인에 대해 이런 무중생유, 무근무실의 보도까지 날조해가면서 나를 “악자”로 몰아붙이는지 모를 일이며, 그게 진짜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옳기나 한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광범한 독자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는 부득이 이 무근무실의 소식이 날조임을 밝히는 바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대듀마는 자신에 대한 비방, 중상에 대해 이런 명언으로 대응했다고 전해진다--   “도도한 강물에 한, 두 사람이 방뇨를 아무리 줄기차게 해댄다 하더라도 강물이 오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김문학은 여전히 김문학일 뿐이다! 진실을 말하는 월경하는 자유지식인, 이게 나다.  2010.8.18 
3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3) 댓글:  조회:3429  추천:50  2010-03-30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3) 김문학                                        7  그의 여러 종류 전기를 섭렵해보면 그가 한복을 즐겨입고 한복차림으로 공식장소에 나타나는 등 행동으로 “한국통”을 자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조선식민지통치정책을 스스로 미화시킬수는 없는것이다. 더구나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감화시킬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토의 이름과 그의 유묵 또한 한학의 교양에서 느낄수 있는것은 동아시아는 원래 유교, 한자문화 등으로 공유할수 있는 부분이 너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일국의 식민통치책으로 인해 그 끈끈한 뉴대성을 파괴시켰던것이다.   한국 계명대 이성환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이토 역시 안중근과 같은 “동양평화”를 제창했으나 그 행동양식으로서 정반대의 지향성을 실천으로 행하고있었다. 이토는 동양평화를 위한 명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런 이토를 한국침략자로서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으로 보고있었던것이다. 립장의 다름에 따라 두 인물의 사상과 행동은 천양지별의 양상을 보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당시 량국의 립장을 극명히 상징함과 아울러 두 인물의 량립할수 없는 사상적대립을 여실히 증명하고있다. 그리고 일본의 동양평화는 동양제패의 꿈에 불과했으며 안중근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는가.                            8  이토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란 죄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그 주위에 안중근을 잘 알고있는 일본인들이 안중근을 동정하고 감동을 느끼고 공명하며 감화될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의 인격과 함께 그의 견식, 사상이 일본의 원훈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포들은 그점을 너무나 모르고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의 안중근숭모의 미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앞에서 로씨야검사의 증언에도 등장하는 타나카 세이지로의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하다. 남만철도주식회사의 리사로 있던 그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당시 이토곁에 있다가 안의사의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인물이다. 그뒤 안중근이란 인물을 알게 되면 될수록 타나카는 그 위대한 성품과 견식에 빨려들어 팬이 되여버린다.   어느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만난 인물중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들가운데서 누가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중근입니다.” 하고 타나카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자신을 총탄으로 쏘아 부상까지 입힌 철천지 원쑤를 감히, 솔직히 위대한 인물의 제일인자로 칭송하는 그 담력뒤에는 역시 안중근의사의 감화력의 파워가 있기때문이란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미담을 소개하자.   당시 려순감옥에서 헌병상등병으로 안중근의 감방간수역을 맡았던 치바토시치라는 젊은이 역시 안중근의 극렬팬이였다. 직책상관계로 안중근과 일상적 접촉이 잦았던 치바는 당시 25세, 안중근보다 6살 년하였다. 그는 안중근을 처음에는 명치의 원훈 지도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여기고 경계했지만 차츰 접촉이 깊어지면서 안중근의 깊은 교양과 고고한 인격적 포용력, 활달하고 효자다운 효도성, 그리고 일당백의 당당한 태도에 점차 감복되고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당하게 된다. 치바의 친척이 되는 변호사 가노씨의 저술에 의하면 어느날 치바가 안중근에게 “왜 꼭 이토공을 저격해야만 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독립은 물론 일본과 청국(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평화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토공이 추진하고있는 병합정책을 용서할수가 없었어요.        이토공의 정책은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행위였기때문이지요. 나는 자신을 조국에 바치는 몸이라고 죽을 각오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뒤를 이을 우국지사들의 궐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토공에 대한 개인적 원한같은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한일 두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것도 이토공 한 인물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력사란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게 아니니까요. 내 거사가 장차 우리 동포들의 독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수 있기만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편판단은 후세 력사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소중한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국을 위해 이슬로 사라질것을 결의했던겁니다. 하나님이 준 이 목숨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돼있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여나는것입니다. 이 모든건 하나님께 맡기고 유구한 한국력사의 하나의 조약돌로 될수 잇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이런 고결한 생각을 품은 안중근이였기에 사형선고를 받고도 상급법원에 상소를 포기하고 그대신 법원 원장에게 사형기를 한달 미루어 자기가 뚯한 동양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저술하기로 작심했던것이다.   그뒤 치바청년은 안중근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더 살수만 있다면 기필코 한국을 어깨에 짊어질수 있는 거물이 되기에 틀림없겠구나. 이런 인물이 사형당하여 한점의 찬이슬로 돌아가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고 한탄했다고 한다.                                 9   1910년 3월 26일. 작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거사날에서 옹근 다섯달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지으신 결백한 명주 한복정장을 차려입고 기도를 하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고있었다.   사형장으로 나아갈 시간이 림박하고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감방앞에 서있는 치바를 불렀다.   “치바상, 전번에 부탁받은 글을 써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하면서 치바는 부랴부랴 흰 비단천과 필묵을 갖고왔다.   안중근은 자세를 바르게 취하고 단숨에 붓을 날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로다”   그리고는 숨을 죽여 약지가 절단된 왼손에 먹을 듬뿍 묻혀 이름석자 밑에 힘있게 찍었다. 치바는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대례를 올렸다.   안중근의 최후의 사형장면은 어떤 모습이였을가?   10시 정각, 미조부치검찰관, 구리하라전옥, 그리고 소노기통역이 려순감옥 형장감시실에 착석했다.   “사형을 집행한다. 남길 유언은 없는가?” 라는 구리하라전옥의 질문에 안중근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단지 동양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동양평화 만세’ 3창을 부르고자 합니다.”   결국 “동양평화 만세”가 안중근의 유언으로 되였다.   오전 10시 20분, 교수형으로 안의사는 숨을 거둔다.   그날 소기노통역은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오늘 안중근은 어제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웃옷은 백색, 바지는 검은색)을 입고 가슴엔 성화를 품고있었는데  그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여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이상없이 태연자약하게,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장한 우리 영웅의 최후의 순간이였다.    (5면에서) 그는 방금전 자신이 휘호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계속하여 치바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뒤 치바는 제대되여 고향 미야기(똫냘)에 있는 시골로 귀향하였다. 그는 54세로 죽는날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불단에 정중히 모셔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일량국의 영원한 평화친선을 빌었다고 한다. 치바씨가 사망된 뒤에도 부인은 97세의 고령으로 세상뜨기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 안중근과 치바를 같이 기렸다고 한다.   1979년 안중근의 탄신 100돐기념에 치바씨의 후손들이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선생을 통해 서울안중근기념관에 유묵을 기증했다.   안중근과 치바부부의 한일우호를 상징하는 미거를 표창하기 위해 1981년 치바의 유골이 잠든 대림사(댕주凱)에 안중근, 치바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대림사주지와 함께 일한 인사들이 한일평화를 기리는 합동추도법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야말로 안중근과 이토의 원한구도를 넘어선 한일량국의 경하할만한 생동한 평화도가 아닌가!                               10   시다라씨네와 작별을 고하고나니 벌써 저녁무렵이였다. JR전차에 몸을 실은 나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오늘은 내 생에서 그야말로 뜻깊은 하루가 된다. 안중근의 친필유묵,  그것은 내게 있어선 안중근 본인이였다.   이제 돌아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돐기념일이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독립ㅡ동양평화ㅡ투사ㅡ문인ㅡ천주교도ㅡ사상가∼이런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속에 떠오른다. 어둠이 잠기기 시작한 차창에는 붉은 노을이 비낀다. 창가에 문득 안중근의 얼굴이 나타났다. 31세의 청년이 아닌 131세의 백발이 성성한 로숙한 성자(?諒)의 모습이였다. 나는 이 성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자네가 내 유묵을 보았다니 반갑네. 이렇게 우리 후예들이 일본에도 마음대로 류학하고 거주할수 있는 세상이 되였구만, 허허∼”   “반갑습니다. 안할아버지는 금년 벌써 131세지요. 할아버지의 유지는 우리 세대가 이어가고있습니다.”하고 나는 깍듯이 대답했다.   “며칠전 하늘나라에서 말이지, 글쎄 이토와 만났구나. 여전히 옛날 모습이여서 놀랐지만 우리는 화해를 했단다. 그래야 우리가 쌓았던 원념들이 담벼락이 돼서 자네 세대가 동양평화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뭇는데 지장이 아니되니까.”   “역시 안할아버지의 탁견이십니다.”   “뭐, 그런건 아니고 하루 빨리 EU보다 앞선 동아시아공동체를 뭇기를 바란다네. 허허허∼”   성자 안중근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공!∼”내가 다급히 불렀으나 안의사는 벌써 하늘나라로 행적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였다. 꿈인지 생신지 나는 알길이 없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 했다.   나는 생각한다. 안중근공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산이 요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있다. 안공의 기념활동도 좋지만 형식차원을 릉가한 실천적, 건설적 차원으로 그의 사상을 활용하고 실현해야 한다.   천부적인권론, 개화사상, 기독교사상, 유교, 불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안공의 사상체계는 21세기형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중근은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그의 세계적 보편가치성을 갖고있는 사상체계가 그것을 확보해준다.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은 우리보다 100년 앞을 달리는 렬차에 탄 유일무이의 사상가이다. 이제 동양평화 실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 이것이 사상가 안중근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 크나큰 과제다.            2010년 2월 28일 일본에서(료녕조선문보에서)
2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2) 댓글:  조회:3477  추천:42  2010-03-26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2) 김문학                                                  5안중근의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난다음 이토의 시신을 밟고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를 세번 목놓아 부른다. 그리고 로씨야병사들에게 결박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간결하고 판에 박은 묘사로 돼있는것이 많다. 어딘가 조잡하고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   이제 그날 의거에 대해서 한번 객관적으로 기술해보자. 안중근에 대한 일본측의 취조기록, 로씨야측의 증언기록이 다수 있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쓰자면 적어도 단행본 한권의 분량이 된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그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여기다 제시하기도 어렵기때문에 나는 제3자 즉 일본측도 한국측도 아닌 로씨야측의 보고를 중심으로 서술키로 한다.  이토가 1909년 6월 1일 한국통감을 사임한 뒤 추밀원의장을 맡았는데 원래 대만 식민지경영 경험이 있는 현 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고토신페이의 권유로 만주의 리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씨야의 대장상 코코프체프와 면담하기 위해서 만주를 일주, 할빈으로 왔던것이다.   10월 26일 아침 9시에 이토가 탄 특별렬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자 코코프체프, 콘스탄티 미텔 등 로씨야측 일행이 이토가 있는 귀빈차량에 올라 인사를 나누고 20분정도 회담을 했다. 그런후 코코체프가 플래트홈에서 로씨야철도수비군 의장대의 열병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토는 정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리유로 거절했으나 상대의 간청에 이기지 못해 응하여 9시 25분쯤 차에서 내렸다. 그때 동석했던 로씨야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안의사의 의거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토공이 로씨야의장병을 사열하고 5보내지 7보 걸어서 일본인 집단환영대렬에 다가갔을 때 로씨야의장병사이에서 몇차례나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두차례 발사소리가 난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총을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범인으로 보여지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 팔을 받쳐들고 의장병앞을 지나가는 이토공을 향해 또 한발 쏘았다. 그리고는 급히 뒤돌아서서 이토공을 뒤따르고있는 수행자들에게 발사했는데 아마 3, 4발인가 발사했다. 마지막 발사는 땅을 향해 쏜것 같은데 생각컨대 이 총알이 타나카 세이조(만주철도 리사)를 맞혀 부상시킨것 같다.(중략)   발사가 끝나자마자 동청철도회사 철도경찰서장대리 기병대위 니키트로프가 2회 발사때 범인에게 덮쳐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하도 강해 쓰러뜨릴수 없었다. 격투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그때 범인은 로씨야어로 “코리아 우라”하고 세번이나 웨쳤다. 범인의 발사시간은 30ㅡ40초가 넘지 않았다. 정거장에 있는 철도경찰의 숙직실에서 안정을 되찾은 범인은 자신의 흉행에 대한 동기를 진술했다. 약 20분뒤에 이토공의 사망을 알려주자 범인은 미친듯이 기뻐하며 숙직실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편 이토는 어떻게 되였는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은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무로다 요시아야 등에 의해 부추켜 렬차안으로 운송되였다. 급기야 이토를 쏘파에 눕힌후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에 응급처치를 감행했다.          당시 수행의원으로 처치를 했던 코야마 여시(鬼??)의 중언에 따르면 피탄된 흉부와 복부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했으며 이미 치명적인 상임을 즉각 알았다고 한다. 정신이 좀 들라고 코야마가 전해주는 브랜디 두컵을 마시고난 뒤 혈색을 잃고 안색이 종이장같이 창백해진 이토는 3번째 컵은 끝내 들이마실 기력마저 없었다. 통역한테서 한국청년이 저격자라는 말을 듣고 이토는 “바보같은 자식!”하고 한마디 뱉고는 더이상 말을 못했다. 그리고 피탄 30분만인 10시에 절명했다.                               6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결코 이토가 숨지기직전에 남긴 “바보”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근대 일본의 건국원훈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이며 “바보”같이 용맹한 적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사의 일면만 알았지 그 리면에 있는 문인, 선비, 지식인다운 인물상에 대해서는 아직 깊은 인식을 못하고있다.  이것은 일본인만 탓할바가 못된다. 우리 자신도 사실 안중근의 “투사”를 넘은 위대한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는가?   이번 3월의 나의 특강은 안중근의 평화사상 및 사상가적인 심층의 안중근을 알리고자 행해지는것이다. 그리고 나는 금년안으로 《사상가 안중근》이란 제목의 책을 펴낼 예정으로 지금 일본어로 집필중에 있다.   한마디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쯤 표면적인식에 머무르고있을뿐이다. 문인이자 사상의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단선적이면서도 피상적인 리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독립”유묵과의 만남을 통하여 단순히 만용만 자랑하는 투사 안중근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독립자주지향으로 내세웠던 사상가 안중근선각자와 만나는 실감을 느꼈다.   사상가 안중근, 그는 구경 누구인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모르고있던 안중근의 리면, 심층에 대해 재리해를 해야할 시점에 와있지 않은가. 나의 이 졸고에서 안중근의 위대한 사상가의 전체상을 다 표현하기에는 미치지 못할것이오나 총체적,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31년의 짧은 인생은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간 공판투쟁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했을뿐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고있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그는 려순감옥의 심문에서 “한 나라라도 독립자주하지 못하면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수 없으며”, “모두가 독립하는것이 평화를 달성하는것이다”고 소리높이 주장한다. 독립자주평화는 안중근의 유일한 화두이며 그가 평생 겨냥했던 리상이다. 그의 사상이 가장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발로한것이 바로 이 “독립”유묵이 아니였던가!   안중근은 또 일본검사의 취조중 한중일 동양 3국을 세형제로 비유한 우화를 술회하면서 셋째동생 일본이 둘째아우 한국을 향해 악행으로 괴롭히고있다고 비유하면서 지금 동양의 평화가 깨여진 결과는 이토의 강제정책이 렬악했기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또 이토 본인을 간웅(쇤衿)이라고 지탄, 그를 제거한것은 동양평화실현을 위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더우기 1909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당시까지 그는 개인전기인 《안응칠 력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사상을 구상화한 후자 저술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는것이 너무 아쉽고 가슴아픈 일이다. 결국 3월 25일까지 써서 서문부분에만 그쳤는데 고등법원원장 히라이시(틱柯)와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청취서》 등을 종합하면 그 전면모를 대강 알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5면에서)    안중근의 사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동아시아의 최대 분쟁의 중심은 려순을 중립지대로 개방하고 한, 중(청), 일이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리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을 아시아평화의 근거지로 만드는것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의 재정확보책으로 원만한 금융을 위해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 공통류통의 공용화페를 발행하는것, 그리고 3국의 청년들이 2개국 3개국 언어를 배우게 하고 우방, 형제적 제휴련맹관념을 형성시킨다. 그뿐만아니라 3개국 공동기술개발센터와 동아시아 동양평화군대를 창설할것까지 제안한다.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지역의 동쪽끝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서양의 로마교황청에 각국 대표를 파견하여 서양과의 협력관계를 도모할것을 권유한다. 이래서 세계적시야에서 신뢰를 얻을수 있고 평화의 유지를 이룩할수 있다고 신념을 수립한다.   그는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일국중심의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의 동아시아평화정책의 제한성을 간파하고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를 파괴하고 로씨야, 미국으로 전쟁을 확장시킨다면 일본 자신의 괴멸을 기필코 초래한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한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예언은 너무나 적중하지 않았던가!   안중근은 사상뿐만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탁월한 예견적안목을 갖춘 예지에 찬 예언가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련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페제도 이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견식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력사를 돌이켜볼 때 일본은 동아시아공영권을 소리높이 주장했지만 일본 중심의 일국내셔낼리즘적인 강제적 정책이였기에 동아시아의 공명을 일으키기에는 력부족, 결국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무산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의 EU련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 등 세계적인 공동체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중근은 유럽공동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모네보다. 중국근대의 국부로 추대된 손중산보다, 그리고 아시아평화의 리더였던 칸트보다 더 선구적인 대사상가, 대정략가임이 틀림없다.   안중근, 그는 100년앞을 내다본 영지(亶列)의 사나이다.                                 7   정오가 되자 이시마루회장은 시다라로인과 나를 위해 일본료리정에다 푸짐한 오찬을 마련했다.   식사중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안중근에 관련된 내용으로 꽉 차있었다.   “왜 안중근이 일본의 원훈을 암살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려순감옥에서 그렇게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을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당당한 신앙심에 매료된다는겁니다. 그래서 법원과 감옥, 통역사 그리고 일반 관리들까지도 다 일본인인데 안중근에게 글을 써달라고 요구했답니다. 려순옥중에서도 안중근에게 상등백미밥에다 끼니마다 반찬에 맛있는 과일이 배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에 한번씩 목욕도 시키고 리발도 해주고∼ 일본의 최고실력자 원로를 죽인 범인에 대한 존경이 이렇듯 깍듯했다는것은 정말 경탄할 일이지요.”   화제는 또 안중근의 품위있는 유묵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2월 14일 사형판결이 난 뒤 주위의 일본인중 비단이나 일본화지를 지참하여 안중근에게 휘호(?봐)를 요구한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안중근은 번마다 상대를 고려하여 어구를 선택하고 정성껏 써주었다고 한다. 생각컨대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일본인에게 자신의 품은 뜻을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박학어문, 약지이례”(널리 학문을 배우고 례로써 자신을 단속한다)라는 《론어》[옹야편]의 문구를 한 일본인 관리에게 써준적이 있는데 기하게도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박문은 이 론어 옹야편에서 두 글자를 따온것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토는 유교의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시에 능했으며 서예가로서도 일본 근대서예사에서 능서가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소장하고있는 몇점의 이토 유물을 보면 그는 행서나 초서에 능했는데 성격같이 활달한 글씨를 썼다. 한국통감, 인감이 찍힌 그의 유물은 또한 일본식민지화의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조선의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당시 일본의 여느 정치가보다 깊었으며 조선유교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앞섰다고 거듭 말했다.     (료녕조선문보에서 전재)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1) 댓글:  조회:3784  추천:55  2010-03-24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1) 김문학                                    1    2010년 2월 20일 새벽 4시경에 깨여난 나는 유난히 흥분돼있었다. 40대에 들어서서 10대같은 마음의 설레임을 느끼기는 처음이다.   그럴만한 큰 리유가 있다. 왜냐면 오늘 나는 우리 민족의 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진 영웅 안중근의사의 친필 유묵과 곧 대면하기로 돼있기때문이다.   일본서 살아온지 벌써 20년이 된 나는 “국제안중근기념협회” 총회 부회장 겸 일본지회장직을 맡은지도 어언 수년이 된다. 이같은 영광스러운 사회직을 맡으면서 나는 나름대로 일본에 있는 안중근 관계자료를 발굴, 수집하면서 안중근사상연구를 해오고있는중이였다. 원래 고서수집과 서화괴집벽이 있는 나는 동아시아비교연구와 함께 관련 력사인물 서화자료를 꽤 많이 수집했는데 근대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같은 개화파리더나 중국의 손문, 리홍장, 원세개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타나카 카쿠에이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명인사들의 유묵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금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100주년기념활동의 일환으로 우리 “국제안중근기념협회”에서 최고로 완성도가 높은 《안중근의사 기념화첩》출간을 준비중에 있다. 화첩편집위원회의 멤버로서 나는 일본에 산재돼있는 안중근 관련 사진, 자료를 적극 발굴, 수집하여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이번 안중근의 유묵친필은 절대 간과할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안중근의 유묵은 일본인이 다수 소장하고있지만 사진이나 화첩에서나 보았지 한번도 친필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나에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몇시간후면 소중한 안의사의 친필유묵과 대면하게 되니 어찌 가슴이 설레이지 아니하랴!   그리고 안의사 순국 100주년기념으로 나는 이곳 히로시마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ㅡ동아평화를 기원하여”라는 주제로 곧 특별강연을 갖게 된다. 주최측의 강연광고가 나가자마자 일본인들의 반응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바로 며칠전, 나의 책을 애독하고있다는 히로시마 모 중소기업의 회장인 이시마루씨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사는 집 근처에 간센지 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그 절의 주지 시다라씨가 안중근의 친필유묵 “독립”을 소장하고있는데 그와는 친한 사이여서 유묵을 볼수 있다는것이다. 다행히 시다라씨 역시 내 책을 읽었고 수년전 히로시마시내 호텔서 나의 비교문화특강을 청강한적이 있다고 한다. 나도 간센지에 유묵이 소장돼있다는 정보는 오래전부터 입수했지만 무슨 방법으로 주지와 접촉할가고 고민중이였다. 나는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2   아침 식사를 대충 끝낸 나는 10시 JR히로시마역에서 미요시행 렬차를 잡아탔다. 10시 55분경 무카이하라(蕨覩)역에 하차하니 이시마루회장이 자가용으로 대기하고있었다.   간센지는 역에서도 승용차로 20분 달려 아주 한적한 산마루에 자리잡고있었다. 정토진종파에 속한 800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절이란다.   주지 시다라 시미즈씨는 82세의 고령이였지만 60대쯤으로 보이는 왜소한 로인이였다.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반기면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전에 김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나이 드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만나뵈니 40대 젊은 분이시네요.”하면서 시다라씨는 부인이 내놓은 오차를 권했다.    이어서 시다라씨는 곧장 안의사의 유묵으로 화제를 옮겼다. 그가 간직해온 유묵은 약 10년전에 넌픽션작가 사이토씨의 권유로 매스컴에 사진으로 공개한적 있지만 한국에서 전시되기는 한번뿐이라고 한다.   안중근의 유묵은 전부 려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게 휘호를 해준것인데 그 수자가 근 200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독립”이란 글이 있는 유묵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한다. 두말할것없이 한국에 반환되면 국보급 문화재다.   한국정부는 이 귀중한 유묵을 긴 시간 소중히 보관해온 시다라씨에게 감사의 뜻으로 한국 서울에 초대하여 안중근기념식전에 참석시키기도 하고 국빈처럼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 생전에 시다라씨를 한번 뵙자고 초청한적이 있는데 시다라씨는 완곡히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를 피력했다. 왜냐면 안중근을 숭모하여 우리 집의 가보를 소중히 모시는것은 우리 집안의 범사(럴慤)이므로 대통령의 접견을 받을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은것도 아닌데 하고 생각했기때문이라고 한다. 시다라씨는 겸손한 인품이였다.   “어떻게 안중근의 유묵이 이곳 간센지에 남아있게 됐습니까?” 나의 새삼스런 질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의 작은 할아버지 시다라 마사유키가 당시 대련구청에 근무하고있었는데 안중근의사와 동년 동월생이였다고 합니다. 두분은 잦은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백년전의 지금쯤이 됩니다. 안중근이 사형당하기전인 1910년 2월 려순감옥에서 이 ‘독립’ 두 글자를 써서 저의 작은 할아버지께 주셨습니다.”   나는 또 궁금했다. “왜 ‘독립’이란 어휘를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에게 써주었을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역시”하면서 대답했다.   “한국인들로부터 늘 받는 질문입니다. 일본인에게 주면 안중근님의 본인의 뜻이 일본인에게 전달될것이라고 판단했던것이 아닐가요.”   “독립이야말로 안중근의사의 절절한 소원이 푹 슴배인 글자니까요.” 나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의사의 일본인에 대한 유언 그자체라고 생각이 되였다. 시다라씨는 또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은 이토를 격살하고 이 ‘독립’이란 글발을 통해서 이토의 직접적인 상전인 천황에게 조선독립을 호소하고싶었던것이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인물이지요. 31살의 청년이 이런 장대한 스케일과 예지와 용기를 갖고있었다는것은 너무나 존경스럽지요.”   실제로 안중근과 접촉이 있은 일본인들이나 지금의 일본인들속에도 안중근의사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이 있다.   “우리는 원쑤가 쓴것이면 피하거나 버리고싶어한다. 안중근은 일본의 적일터이므로 그것이 버려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 많은것이 남아있고 또 대접받고있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안중근은 일본을 좋아한것 같다. 아버지가 일본류학을 가려다 갑신정변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을만큼 일본의 신문화에 흥미가 컸다. 그러나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까지 하는 극렬한 반일투사가 된 리유는 오직 하나뿐이였다. 조선독립을 지켜내고자 하는것이였다.”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이며 안중근 자료발굴 및 연구의 제일인자인 최서면선생이 최근 “안중근의사의 유물전시회에 붙여”에서 쓴 말이다. 로숙한 연구자다운 의미심장한 말이다.                                     3  어느새 시다라부인이 “유묵이 준비됐습니다.”하고 우리를 불렀다.  최고급 일본견사로 특제한 포장커버속에서 시다라부인은 조심스럽게 안중근의 유묵액자를 꺼냈다. 사진에서 익히 보아왔던 “첍접”이란 박력있는 두 글자가 한눈에 확 안겨왔다. 종횡 33X66센치의 일본화지에 박아쓴 글씨였다.   “첍접  뫙兢랗墩異쩠?챲櫓  댕?뉦훙 갛路몽 뺱 (廊丹)  화지는 열화되여 시누렇게 변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먹 글씨나 장인은 너무나 선명히 박혀있었다. 안중근의 유물중에서 이 손바닥인이 가장 뚜렷하다고 한다.   나는 방안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우에 유묵액자를 정중히 모셔놓고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시울이 뜨거워난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형언할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물결이 팽배하면서 어느새 눈물이 앞을 흐리였다.  나는 유묵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유묵으로부터 받는 특유의 기(?u)에 나는 무한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였다. 유묵은 나에게 끊임없이 호소하고있다. 절절히 또한 침통하게.  “독립” 두자는 순간 안중근의사의 얼굴모습으로 변하여 다가왔다. 순국 당시 31세의 청년의 안중근. 얼굴은 대형영사막의 영상처럼 클로즈업된다. 독립자주 평화사상을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부르짖고있었다.  문여기인(匡흔페훙)이란 말과 함께 자여기인(俚흔페훙)이라 글씨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듯이 이 글씨자체가 안중근의 인격의 결정체이며 등신대(된?댕)의 안중근 그 자신인것이다.  침착하고 육중한 그 글씨의 뿌리는 아마 한국 근대유학자 선비들의 기풍이 슴배여있다고 본다. 어디 그뿐이랴. 단정하고 명쾌하고 중후한 본인의 인격을 남김없이 발로하고있는것이다.                                      4  문득 나는 안중근의 그 선명한 먹으로 찍은 장인에 네 손바닥을 갖다대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1910년 6월, 12인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으로 왼손의 약지를 절단했기에 약지는 새끼손가락 사이즈와 같다.   천생 녀자의 손같이 작은 내 손이였지만 안의사의 손은 의외로 내손만큼이나 섬세하고 작았다는 발견에 나는 다시금 놀랐다.163센치의 신장인 안의사가 손이 항우의 왕손만큼 클리는 만무했다. 그의 손은 분명 크고 투박한 무인(嶠훙)의 손이기보다는 작고 섬세한 선비, 문인의 손이였을것을 나는 확인할수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 역시 피아니스트나 화가의 손처럼 가늘고 긴 편이였다.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의 유학경전을 익혔던 그가 붓을 쥐였어야 할 손에 총을 쥐고 적장을 저격하지 않으면 안되였을 배경에는 바로 그 참담했던 력사와 민족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것이 아닌가.   안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 역시 161센치의 왜소한 체구였다. 며칠전 야마구치의 이토기념관에 전시된 , 그가 입었던 조선통감복이나 속내의 실물을 보면서 그가 몸이 작았다는것을 실감할수 있었다. 기(펜)하게도 안중근과 이토의 생일은 모두 9월 2일 똑같은 날이였다. 이토는 1841년 9월 2일, 야마구치현(?왯퓀) 하야시(주)씨 농가의 장남으로 태여났다.(그뒤 이토가문의 양자로 되여 성이 이토로 됨)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순흥(?휾)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했다. 할빈에서 사망 당시 이토는 만 68세 로인, 안중근은 만 30세 청년이였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결은 한일량국 민족의 대결 그자체였다. 두 사람은 생일을 같이 공유했을뿐만아니라 서로 원쑤이긴 했지만 그 인물의 성품면에서는 모두가 량국의 위인으로서 공통점이 많았다고 학자들이 밝히고있다.   일본의 지한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교또대학 이토 유키오교수(이토 히로부미와 아무런 친척관계가 없음)는 작년 11월 600페이지의 대형전기 《이토 히로부미》(코단샤 간행)를 집필했는데 그는 이토와 함께 안중근연구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이토와 안중근의 관계를 론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기묘한 느낌이지만 이토의 전기를 집필하는 작업과정에서 안중근의 성품을 알게 되면서 립장이야 달리 하지만 강한 정의감, 의지 등 면에 있어서 이토와 류사한 점이 많다는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토 암살자인 안중근에게는 굳은 신념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토와 공통한 친절감마저 들었다.”   그렇다. 후세의 일본인 학자들까지 안중근에게서 자신들의 위인과 같이 동일한 위치에 높이 올려놓고 높이 평가하고 공명을 일으킬수 있다는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확고한 신조가 배경에 있었기때문이다.                                     5   이제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할빈역 플래트홈에서 발발한 력사적인 의거의 장면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료녕조선문보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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