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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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3)
2010년 03월 30일 15시 21분  조회:3417  추천:50  작성자: 김문학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3)

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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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여러 종류 전기를 섭렵해보면 그가 한복을 즐겨입고 한복차림으로 공식장소에 나타나는 등 행동으로 “한국통”을 자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조선식민지통치정책을 스스로 미화시킬수는 없는것이다. 더구나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감화시킬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토의 이름과 그의 유묵 또한 한학의 교양에서 느낄수 있는것은 동아시아는 원래 유교, 한자문화 등으로 공유할수 있는 부분이 너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일국의 식민통치책으로 인해 그 끈끈한 뉴대성을 파괴시켰던것이다.

  한국 계명대 이성환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이토 역시 안중근과 같은 “동양평화”를 제창했으나 그 행동양식으로서 정반대의 지향성을 실천으로 행하고있었다. 이토는 동양평화를 위한 명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런 이토를 한국침략자로서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으로 보고있었던것이다. 립장의 다름에 따라 두 인물의 사상과 행동은 천양지별의 양상을 보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당시 량국의 립장을 극명히 상징함과 아울러 두 인물의 량립할수 없는 사상적대립을 여실히 증명하고있다. 그리고 일본의 동양평화는 동양제패의 꿈에 불과했으며 안중근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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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란 죄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그 주위에 안중근을 잘 알고있는 일본인들이 안중근을 동정하고 감동을 느끼고 공명하며 감화될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의 인격과 함께 그의 견식, 사상이 일본의 원훈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포들은 그점을 너무나 모르고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의 안중근숭모의 미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앞에서 로씨야검사의 증언에도 등장하는 타나카 세이지로의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하다. 남만철도주식회사의 리사로 있던 그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당시 이토곁에 있다가 안의사의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인물이다. 그뒤 안중근이란 인물을 알게 되면 될수록 타나카는 그 위대한 성품과 견식에 빨려들어 팬이 되여버린다.

  어느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만난 인물중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들가운데서 누가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중근입니다.” 하고 타나카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자신을 총탄으로 쏘아 부상까지 입힌 철천지 원쑤를 감히, 솔직히 위대한 인물의 제일인자로 칭송하는 그 담력뒤에는 역시 안중근의사의 감화력의 파워가 있기때문이란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미담을 소개하자.

  당시 려순감옥에서 헌병상등병으로 안중근의 감방간수역을 맡았던 치바토시치라는 젊은이 역시 안중근의 극렬팬이였다. 직책상관계로 안중근과 일상적 접촉이 잦았던 치바는 당시 25세, 안중근보다 6살 년하였다. 그는 안중근을 처음에는 명치의 원훈 지도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여기고 경계했지만 차츰 접촉이 깊어지면서 안중근의 깊은 교양과 고고한 인격적 포용력, 활달하고 효자다운 효도성, 그리고 일당백의 당당한 태도에 점차 감복되고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당하게 된다. 치바의 친척이 되는 변호사 가노씨의 저술에 의하면 어느날 치바가 안중근에게 “왜 꼭 이토공을 저격해야만 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독립은 물론 일본과 청국(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평화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토공이 추진하고있는 병합정책을 용서할수가 없었어요.      


 이토공의 정책은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행위였기때문이지요. 나는 자신을 조국에 바치는 몸이라고 죽을 각오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뒤를 이을 우국지사들의 궐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토공에 대한 개인적 원한같은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한일 두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것도 이토공 한 인물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력사란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게 아니니까요. 내 거사가 장차 우리 동포들의 독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수 있기만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편판단은 후세 력사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소중한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국을 위해 이슬로 사라질것을 결의했던겁니다. 하나님이 준 이 목숨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돼있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여나는것입니다. 이 모든건 하나님께 맡기고 유구한 한국력사의 하나의 조약돌로 될수 잇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이런 고결한 생각을 품은 안중근이였기에 사형선고를 받고도 상급법원에 상소를 포기하고 그대신 법원 원장에게 사형기를 한달 미루어 자기가 뚯한 동양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저술하기로 작심했던것이다.

  그뒤 치바청년은 안중근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더 살수만 있다면 기필코 한국을 어깨에 짊어질수 있는 거물이 되기에 틀림없겠구나. 이런 인물이 사형당하여 한점의 찬이슬로 돌아가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고 한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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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3월 26일. 작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거사날에서 옹근 다섯달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지으신 결백한 명주 한복정장을 차려입고 기도를 하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고있었다.

  사형장으로 나아갈 시간이 림박하고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감방앞에 서있는 치바를 불렀다.

  “치바상, 전번에 부탁받은 글을 써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하면서 치바는 부랴부랴 흰 비단천과 필묵을 갖고왔다.

  안중근은 자세를 바르게 취하고 단숨에 붓을 날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로다”

  그리고는 숨을 죽여 약지가 절단된 왼손에 먹을 듬뿍 묻혀 이름석자 밑에 힘있게 찍었다. 치바는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대례를 올렸다.

  안중근의 최후의 사형장면은 어떤 모습이였을가?

  10시 정각, 미조부치검찰관, 구리하라전옥, 그리고 소노기통역이 려순감옥 형장감시실에 착석했다.

  “사형을 집행한다. 남길 유언은 없는가?” 라는 구리하라전옥의 질문에 안중근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단지 동양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동양평화 만세’ 3창을 부르고자 합니다.”

  결국 “동양평화 만세”가 안중근의 유언으로 되였다.

  오전 10시 20분, 교수형으로 안의사는 숨을 거둔다.

  그날 소기노통역은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오늘 안중근은 어제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웃옷은 백색, 바지는 검은색)을 입고 가슴엔 성화를 품고있었는데  그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여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이상없이 태연자약하게,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장한 우리 영웅의 최후의 순간이였다.   

(5면에서) 그는 방금전 자신이 휘호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계속하여 치바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뒤 치바는 제대되여 고향 미야기(똫냘)에 있는 시골로 귀향하였다. 그는 54세로 죽는날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불단에 정중히 모셔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일량국의 영원한 평화친선을 빌었다고 한다. 치바씨가 사망된 뒤에도 부인은 97세의 고령으로 세상뜨기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 안중근과 치바를 같이 기렸다고 한다.

  1979년 안중근의 탄신 100돐기념에 치바씨의 후손들이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선생을 통해 서울안중근기념관에 유묵을 기증했다.

  안중근과 치바부부의 한일우호를 상징하는 미거를 표창하기 위해 1981년 치바의 유골이 잠든 대림사(댕주凱)에 안중근, 치바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대림사주지와 함께 일한 인사들이 한일평화를 기리는 합동추도법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야말로 안중근과 이토의 원한구도를 넘어선 한일량국의 경하할만한 생동한 평화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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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다라씨네와 작별을 고하고나니 벌써 저녁무렵이였다. JR전차에 몸을 실은 나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오늘은 내 생에서 그야말로 뜻깊은 하루가 된다. 안중근의 친필유묵,  그것은 내게 있어선 안중근 본인이였다.

  이제 돌아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돐기념일이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독립ㅡ동양평화ㅡ투사ㅡ문인ㅡ천주교도ㅡ사상가∼이런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속에 떠오른다. 어둠이 잠기기 시작한 차창에는 붉은 노을이 비낀다. 창가에 문득 안중근의 얼굴이 나타났다. 31세의 청년이 아닌 131세의 백발이 성성한 로숙한 성자(?諒)의 모습이였다. 나는 이 성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자네가 내 유묵을 보았다니 반갑네. 이렇게 우리 후예들이 일본에도 마음대로 류학하고 거주할수 있는 세상이 되였구만, 허허∼”

  “반갑습니다. 안할아버지는 금년 벌써 131세지요. 할아버지의 유지는 우리 세대가 이어가고있습니다.”하고 나는 깍듯이 대답했다.

  “며칠전 하늘나라에서 말이지, 글쎄 이토와 만났구나. 여전히 옛날 모습이여서 놀랐지만 우리는 화해를 했단다. 그래야 우리가 쌓았던 원념들이 담벼락이 돼서 자네 세대가 동양평화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뭇는데 지장이 아니되니까.”

  “역시 안할아버지의 탁견이십니다.”

  “뭐, 그런건 아니고 하루 빨리 EU보다 앞선 동아시아공동체를 뭇기를 바란다네. 허허허∼”

  성자 안중근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공!∼”내가 다급히 불렀으나 안의사는 벌써 하늘나라로 행적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였다. 꿈인지 생신지 나는 알길이 없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 했다.

  나는 생각한다. 안중근공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산이 요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있다. 안공의 기념활동도 좋지만 형식차원을 릉가한 실천적, 건설적 차원으로 그의 사상을 활용하고 실현해야 한다.

  천부적인권론, 개화사상, 기독교사상, 유교, 불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안공의 사상체계는 21세기형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중근은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그의 세계적 보편가치성을 갖고있는 사상체계가 그것을 확보해준다.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은 우리보다 100년 앞을 달리는 렬차에 탄 유일무이의 사상가이다. 이제 동양평화 실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 이것이 사상가 안중근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 크나큰 과제다.            


2010년 2월 28일 일본에서


(료녕조선문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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