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http://www.zoglo.net/blog/jinwenxue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33의 신사유》

전체 [ 18 ]

18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하) 댓글:  조회:2951  추천:52  2019-09-26
 문화대담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하)   여추우(余秋雨 ) 김문학     14.  “진(真)”을 사랑하는 자는 “미”를 좋아한다.   여: 나는  어릴적부터 서예와 그림을 무척 좋아했어요. 지금까지 필로 글을 쓰고 컴퓨터를 사용 할줄 모릅니다. 출판계에서는 나를 “순수공 글쓰기 작가”라고 불러요.   김: (웃음)어쩜 저와 꼭 같이 육필을 고집하는 최후의 “21세기 수공업자”이십니까?   여: 김선생도 육필로 글을 쓴다구요?  90권 책을 다 육필로 쓰다니, 그래서 우린 동지를 넘어선 동필( 同笔 )이군요(웃음).   내가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2017년 5월에 중국미술관에서 “(  余秋雨翰墨展 )(중국예술연구원 주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중국미술관 건관 반세기 이래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킨 개인서예전이 되였어요!     김: 대단하십니다. 중국당대 문인중 최고의 서예가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지요. 선생님은 중국서예가중 누굴 좋아하며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요?   여: 王羲之, 欧阳询, 颜真卿,苏东坡를 좋아해요. 소동파는 문화대가로서 문인의 서예지요. 董其昌과 明代의 쌍벽을 이룬 王铎, 내가 만약 명시대에 살았다면 동기창보다 왕탁과 절친하게 사귀였을거예요! 왜냐면 그의 필묵에서 사나이의 대장부정신이 있고 인격의 호연한 기개가 슴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김: 아까 선생님이 제게 선물해준 두폭 묵보는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혼백이 담긴 글이니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여: 나는 사실 "높으신 분"이 날더러 써달래도 쉽게 안써드려요! 우리 김문학선생은 오랜 지우이고, “아시아의 문화귀재”니 내가 특히 아끼기 때문에 써주고 싶었어요   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 진( 真 )을 사랑하는 인간은 꼭 미를 사랑하게 되여 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가 다 서예나 그림을 좋아하는건 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구비돼 있기 때문이지요.   김: 저도 심히 동감입니다.   여: 나는 잘 몰렀었는데, 김선생의 서예도 보니까 고복(古朴)하고 고졸(高拙)한 문인서예의 풍격이 있어요. 서예도 그렇고 그림 재주도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원래 그림을 배웠나요?   김: 네, 어렸을 때부터 작가되는거 하고 화가 되는게 꿈이었어요. 74년 소학교 때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시기였는데 공자 만화를 60여 폭 그려서 개인전을 교실에서 한적이 있습니다. 심양시 소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관람하러 왔어요.(웃음)   여: 역시 귀재(鬼才)는 소시절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김선생과 나는 여러가지로 서예, 그림을 포괄해서 같은 취미, 애호가 있어서 정말 반갑고 더욱 친근감을 느껴요.   김: 저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대 중국문단에서는 여선생님 서예와 가평요( 贾平凹)의 서예를 최고의 백미로 치고 있는데, 선생님의 서예는 수려하고 유창하며 서예가로서의 서예풍격이 있어요. 그리고 가평요 선생도 다 친우사인데, 그의 서예는 졸고(拙古)하고 소박하지만 전형적 문인서로서 맛이 있습니다.   두분은 풍격이 이질되지만 중국문단 서예의 쌍벽을 이루고 있지요. 또한 두 문학거장이 다 저의 친구이니 저로선 영광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독서에 관한 화제로 바꿀까 생각하는데,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네요. 15.  독서는 생명의 질을 높인다.   여: 독서야 말로 평용(平庸 )을 이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의 성공이 사회관계, 기회, 방향의 정확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건 차선적이고, 가장 우선적인것이 독서, 우연하게 어떤 책을 만나서 책속에서 힘을 얻고 그것이 인간을 평용에서 끌어 내지요.   나는 절강성의 한 편벽한 산촌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이곳 사람들은 다 문맹이예요. 우리 어머니가 타향에서 시집왔는데 이 산촌의 첫번 째 글을 아는 사람이었답니다. 그 뒤 식자반, 학교를 꾸렸는데, 학교에 도서실이 있었어요. 책은 많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엄격한 제도를 세워서 매 사람마다 100자 붓글을 써야 책 한권을 빌려볼 수 있게끔 했습니다. 독서는 사람들에게 밖의 세상을 알게 했는데 지금 우리 고향의 촌민들은 다 부유하게 됐지요.   김: 네, 과연 독서는 역량과 지식과 부유의 길이기도 합니다. 나는 독서가 없는 인간의 생을 생각해본 적 없지요. 독서야말로 평용을 해탈하는 좋은 방법이라 하셨는데 정말 동감입니다.   여: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건 자신의 생명가치를 향상시키는 거예요. 세상에서 99%의 힘이 당신을 평용으로 끌어내린다면, 오로지 1%의 힘이 평용에서 해탈시키게 하는데, 이 1%의 힘은 바로 독서, 열독과 연관됩니다. 평용은 사람을 사악( 邪恶)으로 내밀수 있으니까요.   김: 선생님은 독서의 양과 질에 대에선 어떻게 생각하신가요?   여: 난 독서량이 중요한게 아니라 쾌락한, 유쾌한 독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하는건 필수이고, 많이 읽어야겠지만 나는 양보다도 질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독서에서 최대 문제는 무선택적으로 람독(滥读 )하는것인데, 이 점은 지식인이건 일반인이건 다 있는것 같습니다. 어떤 책이 유명하다면 무턱대고 찾아 읽어요. 더 문제되는 건 인터넷에서 열독을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요. 인터넷, 위챗에서 수 없이도 많은 뉴스, 정보의 포로가 되어 보귀한 생명을 허송합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정보가 다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김: 찬동입니다. 인터넷이나 위챗의 홍수같은 정보에 사로잡혀 서로 한집안 부부끼리도 대화없이 보내는 데, 사실 그런 정보는 얄팍한 지식, 뉴스는 되지만 사상이 없으니까요.   여: 그래요. 내 주장은 독서도 선택성 있게, 람독을 피하고 양서를 골라 읽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특히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많이 읽기를 권장하지만, 독서가들에겐 적게, 질높은 책을 읽기를 권장합니다.   김: 양보다 질이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만, 그래도 나는 양서를 많이 읽어야 하며, 독서량이 어느 정도 축적돼야 한다고 봐요. 세계각국, 민족의 독서량과 그 국민, 민족의 교양, 소질의 높이가 정비례 되거든요. 책 읽는 사람은 책 선택할 줄도  알게 됩니다.   여: 맞어요. 책을 통해 자신을 찾는 프로세스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책 몇권을 책을 읽다보면 만나게 되거든요. 독서는 자신을 되 찾는 정신적인 생명의 질을 높이는 방법으로 돼야 합니다.     16.  글쓰기의 비결, 어디에 있나?   김: 대문장가이신 선생님께 글 쓰기의 비결에 관해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여: 90권의 책을 내고 중일한 3국어로 집필 출판한 김문학선생이야말로 명문작가이지요? 오히려 이 질문을 내가 하고 싶은데요.(웃음)   김: (웃음) 당황해지네요. 대사(大师 )께서 질문하시니, 사실 매일 밥 먹지만 밥 먹는 비결이 어디 있냐 물으면 대답이 궁해지듯이, 매일 글쓰기를 하는 저에게도 비결을 물으면 확답을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제게 있어서 필로 쓰는것보다 두뇌로 사고하는 작업, 정신적 작업이기 때문에, 넓은 지견과 그것을 토대로 한 사고력, 발상력에 비결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사상(事象)이라도 그것을 사고하고 발견하는 남다른 자기의 독자적 발견, 사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글쓰기, 또는 글의 매력을 높이는 비결이라 생각합니다.   여: 좋은 말씀입니다. 나도 글쓰기에는 상법(常法)이 없다고 생각해요. 기본적 방법은 중학교 어문선생이 다 얘기 해주었거든요. 어떤 사람이 한 작가에게 왜 글을 쓰냐 고 물으니, 그 작가가 “글을 쓰고 싶으니까”하고 대답 했답니다. 굳이 글쓰기의 비결이 있다면 나는 나름대로 아래 몇 가지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글쓰는 사람은 가장 간단한 룰을 지켜야 하는데 이것은 나는 글쓰기의 “심리최저라인”이라 하고 싶어요. 또 하나는 내가 글쓰기 할 때 느낀 감수 입니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것으로 보편적 의미가 없을수도 있지요.   김: 구체적으로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 네, 1. 작가는 시시각각 성심으로 독자와 대면하는 기분으로 글을 써야 합니다. 창작충동이 있을 때 필을 들어야 하는데 이 충동은 작가의 평소의 축적과 영감의 불꽃과 동반됩니다. 한평생 글을 썻다해도 최후의 한편 글을 쓸때 독자를 념두에 두어야 하며, 독자가 실망하는 글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해요. 나와 독자는 계약을 맺은적 없으니까요!       2. 문장은 흡인력, 독자를 끄는 매력이 있는게 가장 중요해요. 문장 본신에 장력(张力)이 있어야 하는데, 장력은 격정으로 인해 생기는 거지요. 생명의 일종의 투입만이 격정이 생기고 거기서 장력이 생겨서 나오거든요. 기교도 필요하지만 문장의 최고 기교는 기교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역시 많이 훈련을 거쳐 기교를 연마해야 해요.      3. 언어감각이 문장을 구성하기 때문에 이게 중요합니다. 문학의 세계는 결국 언어로 영위하는 감각의 세계이거든요.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감각, 감정을 배설해버리면 왕왕 감각을 장송해 버려요. 독자의 감각을 유발하는게 중요한데, 서로 모르는 독자들의 감각을 유발하여 공명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진짜 명문은 독자의 이목(耳目)을 자극하는 이목충격력이 구비되여야 해요. 1.진실성, 진실한 감정을 투입하여 써야지, 감정 또한 남발해서도 안되지요. 2.상식기술을 되도록 피하고 생명내면의 것들을 써야 합니다. 3.화제보다도 神情이 더 중요합니다. 소재도 소재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자신의 신정으로, 맛 있게 쓰는 게 더 중요하지요. 소재는 누구나 모방할수 있지만 신정, 멋은 모방하기 어렵습니다.   김: 과연 여선생님만의 좋은 비결이군요! 선생님의 대산문이 그토록 전지구 화인의 심금을 울린 것은 역시 선생님의 이러한 글쓰기 비결이 믹스해 있기때문이겠습니다.     17.  문화 거인의 발자국 여: 김선생에게 이번에는 내가 한 가지 인터뷰해도 괜찮겠지요?   김: 네, 아무렴요.   여: 내가 우리 김문학 교수께 제일 탄복하는 건 3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또 3개국어로 모국어처럼 다 글쓸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나 국내의 이름있는 학자, 작가들도 다 중문 한 가지 밖에 모르고 중문사유자입니다. 그러나 김교수는 3국어학자, 비평가로서 문화의 경계를 뛰여넘는 활발한 문화활동, 글쓰기로서 “동아시아 귀재”로 불리게 되는 거물로 성장했는데, 조선족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알건대, 김문학 선생같은 기재(奇才)는 동아시아에서도 유일무이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3개국을 하다보면 경우에 따라 언어전환을 어떻게 컨트럴하는지 궁금합니다.   김: (웃음) 그건 컴퓨터 버튼을 누르듯 머리속에서 언어전환이 순식간에 됩니다.   여: 나는 절대로 김선생같은 기재를 소홀히 하고 박대해선 안된다고 절실히 느껴요.   김: 감사합니다. 선생님. 중국 당대 문화거인으로서 여선생님께서는 경계를 뛰어 넘는 답사, 고찰과 연구자원을 밑거름으로 “중국문맥””중국미학”과 “중국인격”의 계통적 서술을 완성함으로써 “문채, 학문, 철리적 사고, 강연이 모두 최고봉에 달한 당대의 거장”이라 공적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대 문학거장들도 여선생님에 대한 찬사와 정당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대만의 백선용은 “여추우선생은 당송8대가가 창립한 산문의 존엄을 또 한번 환기시켰다. 혹은 그는 다시금 당송8대가의 뒤를 이어 시화(诗化)적으로 천하의 혼을 사색했다”고 평가했지요.   당대 문학귀재 가평요(贾平凹)선생은 “이 시대는 큰 논쟁이 대성취를 이루게 하는 시대인바, 우리는 행운스럽게도 이런 인물들을 만나게 되였다. 여추우의 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저작이다. 그의 문화연구는 스케일이 방대하고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그는 당대 문학의 하늘을 넓혔으며 그 공헌은 거대하다. 이런 인재는 백년에도 얻기 어려운 바, 역사는 그를 경중(敬重)할것이다.”   여광중선생님도 “양실추, 전종서보다 30여년 후배인 여추우는 지성을 감성에 융합시켜 새 실적을 올렸다”고 격상했지요.   선생님에 대한 폄훼도 만만치 않지만 역시 거인, 거목이기 때문에 질투,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 주요원인입니다. 미움받을 만큼 기적을 쌓았기 때문이지요.   여: 고맙습니다.   김: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것은 문화거인으로서 여선생님은 어떤 모습으로 중국 문화사 문명사에 남고 싶습니까?   여: 한마디로 나는 “고독한 문화인”으로 그 어떤 체제나 직업에 예속되지도 않고 그 어떤 보평에도 아랑곳 않는 철저한 자기, “자기 독립”을 지킨 문화학자, 문명학자로 남고 싶습니다. 이거면 나는 만족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나를 망각해도 나는 개의치 아니하니까요.(끝)                                                대담자소개   여추우(余秋雨)   1946년8월 23일 절강성 여요현 출생.중국 당대 저명한 문화학자,문화비평가,산문작가.   1966년 상해희극학원(대학)졸업.1980년에 “戏剧理论史稿”“中国戏剧文化史述” “戏剧审美 心理学“을 출판 .1985년 중국대륙의 최연소 문과교수로 승직.1986년 “상해10대학 학술엘리트”를 수여 받음.1987년 국가급돌출공헌 전문가의 칭호를 수여 받음.   여추우는 역사문화산문대가로서“文化苦旅”“ 山居笔记”“ 千年一叹” 등 20여 부가 있음. 당대 최고의 산문대가로 불리는 여추우에 대해 문학대가 가평요(贾平凹)는 "여추우는 당대문학의 영역을 넓혔는바 거대한 공헌을 했다.이런 인재는 100년에도 보기 드물며 역사가 그를 경중(敬重)할 것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근년래 대륙에서는 "가장 사랑받는 인기작가"제1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찬사와 폄훼를 가장 많이 받는 문인이기도 하다.  
17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상) 댓글:  조회:2517  추천:38  2019-08-24
 문화대담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상)     여추우(余秋雨 ) 김문학   0. 들어가면서   여추우( 余秋雨 ,1946년생)는 당대 중국 산문의 거봉이며, “문화대사(大师 )”로 존경과 흠모를 자아내는 거물이다. 전세계 화인, 중문작가중 최대의 문화거장으로 명성을 날린 여추우는 한편 가장 중상과 비방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970년대 이란 사계(斯界)의 권위적 교재를 써내어 당시 본보기극 ( 样板戏 )의 문화독재에 향해 반기를 들었다. 1990년대 상해희극대학 학장직을 사직하고 중국문명유적탐방을 쓴 《文化苦旅》로 전국 내지 세계 화인 독서계에서 열렬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문화대산문”이란 문체를 창립하였다.   나는 당시 히로시마대학원 박사생으로 있었는데, 《文化苦旅》를 《중국문화답사기》란 타이틀로 한국어로 번역, 감수를 받아 출간하는 계기로 여추의선생과 망년지교로 되였다.         2008년 8월 3~4일 강연차로 일본을 방문한 여추우와 초대면 하면서 긴 대화를 나누며 두터운 우정을 쌓게 되였다.     그뒤 여추우 선생은 "보행하는 문명행자"로 나서 바빌론, 아랍, 인도 등 세계 문명유적지를 답사하여 지금까지 세계최초로 이 문명답사를 완성한 인문학자로 되었다. 답사중,그는 당대 세계문명에 대하여 참신한 제언을 하여 국제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20여권의 저작은 장기간 전세계 중문서적의 베스트 원 위치를 차지하였다. 대만의 유명작가 백선용( 白先勇)은 “여추우 선생은 유일하게 전 지구 중문독자의 환영을 받으면서 인기가 식지 않는 대륙작가이다”고 격상하였다.     여추우 선생은 또 대륙에서 근년래 전국 고층독자앙케트조사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당대작가”에서 늘 제1위를 독차지했다.     여추우 선생은 수십년간 독립지식인의 자세로 중국문화를 "공간" "시간"  "인격"  "심미"등 "4차원의미의 중국"이란 과제로 나누어 독창적인 연구와 글쓰기 업적을 남겼다.     북경대학, 유엔 과학교육문화조직에서는 여추우를 “글쓰기, 학문, 철학적 사고와 강연 등 영역에서 높은 업적을 쌓은 당대의 거장”이라 높이 평가 했다.   그리고 상해시 교육위원회에서는 또 그를 위해 특별히 "余秋雨大师工作室"을 설립해 주고, 중국예술문화원에서는 "余秋雨书院"을 설립했다.   내가 여추우 선생과 18년만의 재회를 이루게 된것은 2018년 8월22일 상해의 아담한 다방에서였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통화를 하거나 조수를 통해 서로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우리의 대담은 일체 매스컴을 차단하고 비공개로 진행되었는바, 그뒤 작년 10월과 금년 3월에도 부부동반으로 회식을 하면서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은 서로의 글쓰기, 비교문화, 세계문명과 중국문화 인생살이 서예미술 등 다 분야에 걸쳐 구애없이 진행되었다. 우리의 대담은 마치 시나리오 각본을 써놓기라도 하듯이 서로 척척 대화가 맞아들어 통쾌하고 자유로웠다.   여추우 선생은 "우리는 서로 넘 통하는데가 많아서 기쁘다. 서로 미움받은 적수도 많고, 대응하는 방법도 유사하고 서예, 미술을 애호하는 공동언어도 많다”고 연속 말했다.   아래 우리의 수차례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하는 바이다.     1. "문화대산문"의 개척자   김:여서생님, 이렇게 18년만에 재회하니 감개무량합니다. 2000년 8월 초 히로시마서 선생님과 초대면 했을 때는 ,제가 만 37살이었고 선생님이 55세 연강역부한 중년이였는데, 벌써 제가 그 당시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고 선생님은 72세 고희의 줄기에 들어섰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지 연세보다 젊고 활기에 찬 선생님의 모습을 접할수있게 돼서 너무 반갑고 기쁩니다. 유명한 중년 학자, 작가로부터 이미 전세계 화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대사( 大师 ), 거장으로 되신 선생님, 오늘은 제가 많은 화두를 지니고 여러 분야에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벌써 18년이 흘렀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때 애송이 청년학자인 김선생도 이미 “동아시아 귀재”라 불릴 만큼, 동아시아 비교문화계의 제일인자로 성장했으니 대단하지요. 그 사이 나도 김선생의 중문학 책을 사서 읽었기 때문에 “이 친구 참 잘하는군”하고 속으로 언젠가는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오늘 상해서 이렇게 상봉하니 (웃음) 감회 새롭군요!   김: 고맙습니다! 대사께서 칭찬해주시니(웃음)   선생님, 그때 《文化苦旅》를 번역감수하면서 제가 감탄한 것은 정말 지금까지 중국산문사에서 없었던 미증유의 "문화대산문"을 개척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세계 화인세계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수 밖에 없었지요!   이 책에서 선생님 "답사 (旅)"를 통해 자연과 유적을 중국 인문, 역사의 신발전과 그것을 철학적 심미영역으로까지 확산시켰습니다.   여: 1986년 ~1991년 까지 나는 상해희극학원(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는데 전국에서 가장 젊은 학장으로 많은 영예를 안았어요. 그런데 나는 성격상 행정직에 매이는게 싫어서 1991년 사직을 하고 단신으로 서북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적으로 중국문화의 중요한 유적을 답사했습니다. 당시 나는 이국의 한 노교수의 계발을 받고 이 결정을 내리게 되었지요. 이 교수님은 연로한 체구를 끌고 중국서남 소수민족지역을 모험적으로 답사했어요.   여기서 힌트를 받은 나는 새롭게 중국 땅을 밟고 중국문화에 대한 사고와 추적을 노렸습니다.나의 문화고행(苦旅)은 이렇게 시작됐어요. 내가 답사주제를  "백년의 혈류를 답사하여 천년의 휘황을 찾아낸다”(穿越百年血泪,寻找千年辉煌 )고 했었지요.   김: 이로부터 "문화대산문"이 탄생되며 《文化苦旅》《山居笔记》등 책들이 전세계 중문독서계에서 "최대의 인쇄량을 자랑하는 문화서적"으로 부상했으며 선생님도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중문작가의 한사람으로 거듭났지요. 그리고  "문화행자( 文化苦旅 )"로서 사명감으로  세계문명유적지를 답사하게 되는데 언제 부터이시죠?       2 “문화행자”의 기나긴 노정   여: 1999년부터이지요. 《文化苦旅》는 초기작품이라서 답사연구의 요령은 있었으나, 구체적 행문에서는 글쓰기 흔적이 너무 많았어요.     《文化苦旅》는 내가 국내에서만 답사연구했는데 많은 문제에 봉착했기때문에, 이런 담벼락을 넘는 방법으로 중국문화권을 뛰어넘어서 세계로 나아가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이 익숙한 문화권을 벗어나서 세계의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야 자신이 몸 담근 중국문화에 대해 잘 파악할수있지 않겠습니까.   이 점은 유명한 비교문화 학자인 김선생도 너무 잘 알고있으리라 믿지요!   김: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25살때부터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동아시아 비교문화영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면서 심심히 느낀것은 타문화의 비교, 대조가 "문화의 거울"구실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거울을 통해 타문화만 인식할뿐만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수있게끔 하니까요.   선생님의 《文化苦旅》《山居笔记》가 중국 인문과 인격, 중국문화의 정신적 귀속과 사회적 재난등을 탐구했다면《千年一叹》《行者无疆》은 세계의 문화와 중국문화에 대해 이성적인 비교고찰을 했다는것이 돋보입니다.   여: 1999년부터 시작하여 홍콩의 봉황위성TV국에서 세계대문명유적에 대한 역사적 고찰하는 프로를 갖게 됐어요. 애급에서부터 출발하여 중동으로까지 수만 킬로미터를 보행하면서 촬영,보도, 관찰을 하고 중계하는거예요.     처음 우리 집사람 마란(马兰 )은 반대했어요. 중동지역에는 전쟁이 빈발하니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하두 굳세게 나오니까 동의를 하더라구요.   김: 그렇지요! 목숨을 걸고 하는 문화탐험이니까요!   여: 맞어요. 그 시기를 기록한게 《千年一叹》인데 이야말로  탐험하는 글쓰기였습니다.(웃음) 북아프리카, 중동, 중아시아에서 남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이 테러와 공포로 휩싸인 곳이였고 날마다 납치당할 위험성이 대단히컸지요! 매일 어디서 식사하고 주숙하는지조차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내 문장이 매일 한편씩 위성을 통해 세계각지 중요한 중문신문에 연재됐기에 중단을 할수 없었어요. 그래서 황야의 암석위에 엎드려 쓰거나 짚차 차륜에 엎드려 쓰군했는데 체크할 사이도 없이 발표해나가군 했습니다.   《行者无疆》은 유럽답사기록인데 테러위험은 없지만 글쓰기 상황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 한편씩 쓰면서 발표했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만킬로를 뛰면서 위험한 지구를 답사한 인문학자이기도 합니다.     3.중국 ,거대한 비만증과 같은 …   김: 일본《아사히 신문》에서 2000년 "세계를 뛰어넘은 10대국제인물"로 선정한것도 선생님의 업적을 평가 한것이지요.  일개 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로서 저는 선생님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화고찰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러벌 시대 중국에는 세계를 향해 이거라 할 만한 문화를 갖고 있나요?   여: 오늘의 중국에 대해서 나는 중국이 하두 비대하여져서 시장거리에 홀연 나타난 거대한 비만의 거인처럼 사람들에게 생소감과 긴장감을 주고있다고 봐요.   중국문화가 미국이란 대국처럼, 위압감을 주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의 매력도 발산하는 것과 같은 그런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과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비만의 거인처럼 체통은 웅장하지만, 세인을 감복시킬 가치관, 정신적 매력이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여: 그래요! 유감스럽게도 중국문화가 문화적 정신가치보다도 겉치례의 이벤트처럼 화려하고 방대하지만, 실속이 없고 지금 시체말로 하면 격(格局 )이 작다는 겁니다.   결과, 정신적 가치가 결여하고 얄팍한 세속의 가치관만 난무하게 됐어요.   자, 보세요. 민간에서 숭배하는것은 "성공"이고, 관계(官界 )에서는 민수( 民粹)이며, 학계에서는 "국학( 国学)"을 떠 받들고 있습니다.   이 삼자가 바로 중국이란 거인의 성격인바, 사실 이런 "성공"으로 인해 공리성만 따지고, "민수"로 인해 떠들고,"국학"으로 인해 진부합니다.   이런한 거인이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도 누구나 존경하고 매력을 느낄수 없지요!     4. "국학",여기가 문제다   김: 좋은 지적이십니다. 방금 얘기중에서 "국학"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십시요.   여: 나는 "국학"이란 말에 이의( 异议)를 갖고 있어요. "국학"을 만일 그냥 "중국학" "중국문화"등으로 부른다면 정상이지요. 그런데 굳이 학문을 "국기" "국가( 国歌)"와 같은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 담론하는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국가주의"가 "국학"이 추구하는 권위가 돼버렸다면 "배타주의"로 기울어지고 일련의 논리적인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김: "국학"이 배타적 "국가주의"의 장치로 된다면 그건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른바 국 ( 国 )자가 붙은 국어, 국문, 국학…등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시, 19세기 중후기 20세기 초에 유럽과 일본에서도 성행했는데 "국학"이 그런 맥락에서 발현된다면 문제이지요.   여: 그렇지요. 중국안에 많은 민족문화 일테면 선비문화, 돌궐문화, 서하문화, 만주족문화, 몽골문화도 있는데 이를 배척하는것도 문제지요.   그리고 이른바 "국학"이라고 떠드는 걸 보면 대개 복고문화( 复古文化 )이예요. 일체 문화의 생명력은 창조적인 창신문화에 있는데 그걸 방치하고 옛것에 집착하면 창발력이 방치됩니다. 요즘 TV도 그렇고 많은 분야에서 복고주의가 성행하고 있는데, 복고문화는 극도로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그 뒤에 은거하고 있는 것은 극도의 자신감 결여이지요!   여기에 매달려 세계의 기타문화와 대등한 대화의 가능성이 감퇴되고, 자신에 매달려 자미자취( 自美自醉 )된다면, 이것은 사실 개혁개방후 중국문화의 후퇴입니다. 그러니 이런 유치하고 우매한 행위나 사고방식은 사실 우리를 세계와의 교류를 차단시키는 함정을 판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5. 중국문화의 약점과 병페는 무엇인가?   김: 그럼 선생님은 중국문화에 존재하는 병페나 약점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여: 간략해서 말한다면 3가지 약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첫째, 공공공간 ( 公共空间 )의식이 결여하거나 생소한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보면, 외국에 여행간 중국인들이 도처에서 가래침을 뱉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호텔에서 마작을 놀거나 도박을 하는 등 저열한 행위는 외국인이 "도덕성이 없는 중국인"이다 비평을 하잖습니까!   외국인의 비평을 받아도 할말 없지요. 분명 공공공간의 룰을 모르기때문이지요. 사실 그 책임은 중국문화에 있지요.   김: 문화인류학에서 인간관계를 동심원(同心圆)으로 표시하는데 맨 안이 인정권, 중간이 의리권 맨 밖이 공공권입니다. 일본인이 공공권, 한국인이 의리권, 중국인이 인정권에 속해있는데, 이는 중국문화가 공공공간의식이 결여하고 아는 사람, 자족 등 자기인( 自己人)에 익숙돼 있고 이 안에서는 질서 도덕이 잘 유지되지만 밖에 나가면 공공권의 사람은 外人(외인)이고 질서유지가 엉망이지요. 공공권문화에 익숙돼 있지 않는건 그 만큼 현대화가 안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 재미난 말씀이네요. 두번째 약점은 실증의식(实证意识)이 결여 한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황인우(黄仁宇)교수가 지적하다시피 중국역사의 최대의 폐단은 "수자화 관리가 결핍한것"이지요. 우리 나라에서 한때 성행했던 "무당산량이 20만근"등 한 없이 부풀린 수자 통계가 어느 하나 실증 된거 있나요?(웃음)   김: (웃음)그렇지요!   여: 사실 실증의식의 결여는 과학의식의 결여를 의미합니다. 이런 경향은 중국문화로 하여금 줄곧 "충간만 따지고 진가를 불문하는 (只问忠奸,不问真假 )"진흙탕속에 빠지게 했습니다. 진가를 따지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건 다 기초를 상실하고 말지요!   가짜제품, 허위는 어느 나라나 있겠지만, 중국에서는 너무 창궐하고, 루머도 중국에 제일 빈번하지요. 이런 원인은 죄다 중국문화속에 진가를 가르고, 위조품을 제거하고 루머를 해제시키는 장치와 기능이 없기때문입니다.   김: 맞는 말씀이예요.   여: 세번째 약점은 법제관념이 결여한겁니다. 난 정치적 각도가 아닌 문화적 각도에서 이 문제를 말하고 싶어요. 법보다 주먹이라는《수호전》호걸에서 보여주다시피 "법외영웅"을 우리는 숭배하지요. "강호"는 법과 멀리있고 "양민"은 줄곧 고수를 하고, "청관(清官)"은 법외에서 호인역을 맡아요.   중국문화는 법률관념에 생소하고 이럼으로 중국의 여러 대중들이 현대화에 들어서는데 크나큰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김: 완전 동감입니다. 사실 중국문제는 본질적의미에서 "인간문제" 즉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교양, 소질문제에 귀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체제의 탓을 하는데 일리가 있지만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 국민의 소질, 교양이 체제를 결정하는 하나의 가장 굴직한 근간이지요. 국민의 소질, 교양이 상승되면 문화의 질, 삻의 질도 향상되고 중국문화의 질이 존경받을수 있는 쪽으로 상승할 것이라 믿습니다.     6. 당대 80년대 중국문학의 대기상( 大气象)     그럼 이번에는 중국문학, 특히 당대문학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여: 현대문학에 비해 나는 당대문학을 더 높이 평가해요. 내가 매번 뉴욕에가서 강연을 할 때면 하지청(夏志清 )교수님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강하러 오군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친구로 되었어요. 하선생이 내게 자기는 노사(老舍)의 소설을 싫어 한다는 고백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나는 하선생님이 《중국소설사》에서 극력 추천한 전종서(钱钟书 )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기지( 机智 )를 자랑하는것 같다고요. 그리고 하선생님이 추천한 장애령( 张爱玲)의 소설에는 너무 지나친 의도적인 자질구레함이 많아서 좋아하지 않습니다"고 말했어요.   그리곤 우리는 술잔을 들고 대소했습니다.       김: 저 역시 당대문학의 실적이 현대보다 크다고 봅니다.   여: 80년대 당대문학은 매우 중요한 황금시기라고 생각해요. 그 시기 중국의 문학예술은 대기상( 大气象)으로 박력있고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이 있었고 총제적으로 "5.4"시기를 훨씬 초월했습니다.   김: 지당한 말씀입니다. 전번에 제가 가평요(贾平凹 )선생과 만났을 때, 여선생님과 친하다고 하시던데, 중국문인, 작가들과 친교가 많으신가요?   여: 나는 사실 산문작가이지만, 문인들과 별로 사귀지 않아요. 그러나 당대소설가중에 가평요, 막언(莫言 ),풍기재(冯骥才),여화( 余华), 장위(张炜) 등 과는 친구이고, 연장자로서는 정현량(张贤亮),왕몽(王蒙)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행건(高行健 ), 류진운( 刘震云),마원(马原 )등 작가들과도 친교가 있지요.   산문계에서는 주도(周涛)와 친우이고, 해외에는 김용(金庸),백선용(白先勇 ),여광중(余光中) 등이 모두 친구입니다.  용응대(龙应台)와도 본래 친구였고 , 한때 가평요와 우리 삼인이 "풍격이 판이한 3문우"를 결성했었어요. 그런데 그녀가 교관이 되였으니 계속 친구로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웃음) 문학에서는 직위가 너무 높으면 우정에 장벽이 되니까요.     7. "문화차이를 기뻐하라"   김: 동아시아비교문화학자로서 저는 선생님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글쓰기를 해온 선생님의 주장과 지견에 동감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자 사무얼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이란 테제가 인구에 화자했습니다.   그러나 여선생님은 그의 "문명의 충돌"론에 반기를 들고 문화차이를 긍정하고 차이를 흠상하며 차이로 하여금 세계평화의 뿌리로 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 그래요! 2004년 유엔에서 발표한 "인류발전리포트"를 보면 "문명충돌론"을 부정했어요. 나는 유엔 개발기획부서의 초청으로 이 리포트에 관한 연구심퍼지엄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심퍼지엄중에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가 영어 difference (차이), diversity (다양성) 이 두개의 D에 또 하나의 D가 증가됐는데 남아프리카 대주교 투투의 그 유명한 말 “Delight in our differences”(우리는 차이를 기뻐한다)입니다.   자, 보세요, 투투의 말은 그냥 차이에 대한 관통이나 양해가 아니라 차이를 즐거워하고 향수하고 갈구하는 뉴앙스이지요.   김: 이 말에 인류문와의 포용성과 평화공생공존의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여: 문화의 다양성, 다원화는 목적이 아니지요. 목적은 선택의 자유를 주는것인데, 문화적 신분(아이텐티티)의 선택도 포괄돼있어요.   아무 문화든 자신의 우월성을 과장하거나 타문화의 위혐성을 과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 두가지 과장은 모두다 타문화의 생존권과 전파권을 박탈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람의 선택권을 박탈하는것과 같습니다.   기쁜마음으로 다원성을 향유하고, 소심하게 대립을 경계해야 만이 우리가 문화의 매력적인 정체적 생명을 파악할 수 있어요..   8. 왜 끊임없이 "탈출"하는가?   김: 대산문작가로서, 문명비평가로서 여선생님의 근원적인 특질의 하나는 "여행" "답사"를 통한 문화적 탈출(出走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出走를 통해 문명을 읽고 문화의 차이와 동질성을 발견하고 또 그 사색의 여과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명의 파중군"으로서 선생님의 중국문화사에서의 족적은 선명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 出走"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네요.     여: 좋은 화제를 꺼냈습니다.(웃음) 나는 답사, 여행을 일종의 철학적 고도에 끌어올려 "생명적 탈출" 또는 "탈출적 생명"으로 명명하고 싶어요.   김: 과연 좋은 명명이시군요.   여: 여행, 답사란 우리개인의 협애한 생명을 확대시키고 향상시킬수 있고, 또한 원생명에 대한 돌파와 초월이기때문에 나는 그것을 일종의 "생명의 탈출(出走)"이라고 불러주고 싶어요.   곰곰히 색각해보면, 우리의 생명상태가 겉보기엔 매우 멋있어 보이지만, 기실 매우 비좁고 작아요.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의 유능한 고전문학교수가 있다고 칩시다. 일반인에게서 그는 지위가 있는 "성공인사"이지만, 사실은 그의 평생의 생명적 스케일(格局 )은 점점 갈수록 축소되어 버리지요. 그가 대학입학후 이 전공을 선택한후,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종신직업을 한정해 버렸지요. 그후 그의 매차례 진급은 오히려 그의 한정된 범위를 점점 더 좁게 몰아버립니다. 박사 전공이 당나라문학이고 어느 당시인을 연구과제로 삼았다면 그 외에는 손을 대지 않고 무지하지요.   이런 "성공인사"는 너무나 일찍 생명의 범주를 틀에 박아 놓았고 이것으로 자신의 지위와 대우를 확립시겼습니다. 그 지위나 대우가 높다해도 그 생명의 스케일과 활력은 사실 너무 작은겁니다.   많은 공무원, 기업인, 직장인들도 별다름 없어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직업,직장,회사와 겹겹의 인관관계속에 예속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에는 이탈, 일탈, 자기 반역이 없으며, 정신적 자유의 공간이 적어지고 재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집니다.     김: "자기폐쇄" "자기답습"의 상태에서 생명을 태워버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그런 유열, 만열감 내지 행복감이 없습니다.   여: 그래서 이런 폐쇄와 답습을 해탈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出走(탈출)입니다. 내가 일생에서 거듭 끊임없이 탈출한 것은 자신의 사상, 의식 내지 생명력을 보전하고 세계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명의 의미를 실현하는것이지요.     내가 만일 번마다 "탈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원히 오만하고 실적을 별로 올리지 못한 문인이었을겁니다.     내가 "탈출"이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쇠사슬을 벗어나 여행하는 사나이, 국제교재편찬자, 대학학장, 문화유적지 현장해설자, 인류문명의 강연자…로 거듭 날수 있었지요.   김: 너무 잘 알만합니다. 저 역시 자기 탈출로 자신의 글쓰기, 사색과 독서, 그리고 국경을 ,경계를 뛰여넘는 학자로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근데 선생님 때로는 탈출 후 되돌아보면 탈출전의 자신이 생소한 감이 없지 않나요?   여: 물론 있지요. 매번 "탈출"은 바로 생소한 자신을 찾고 생소한 자신을 만들며 그러고나선 그 자신을 향수하는 겁니다.(웃음)   김: (웃음) 그렇네요. 탈출을 통해 경계를 넘는 길이야 말로 자기 진화의 길이라 생각해요. 죽은 물 같이 부동하는 인생, 사심과 생명은 협소한 틀안에서 자멸을 자초하기 십상이니까요.   여: 문화의 중대한 책임의 하나가 바로 자신과 타인을 협소한 틀속에서 경계속에서 탈출하도록 인솔하는 것입니다.       9. 도필문화 (刀笔文化 )   김: 여선생님은 당대 중국문화사에서 드높은 명성을 획득한 동시에 가장 찬반양론으로  펨훼당하고 중상,모독 당한 문인이기도 합니다.제가 수집한 여선생님에 대한 비판서적만 해도 20여종이나 되고 어느 통계데이터를 보면 여선생을 비판한 문장이 무려 1만 6천여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여선생님을 에워싼 중국 당대문화계의 살풍경이 아닌가 합니다.(웃음)   여: (웃음) 이게 다 어디서 비롯된지 아세요? 바로 중국문화속의 도필문화(  刀笔文化 )에서 기인된 거예요!   김: "도필문화"라면 필로 인신공격을 하는건가요?   여: 맞아요. "도필문화"는 또한 공간(攻奸)문화,비방문화, 참부(谗父)문화, 주심(诛心)문화, 비수(匕首)문화,정인(整人)문화라고도 칭할수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만하지요. 이런 문화는 전통적으로 고대로부터 형성됐는데, 근대에 와서 크게 대성합니다.     "도필문화의 요람은 근대 상해에서 출판편집된 잡지 신문이지요. 이로부터 개방된 소수 도시나 반 개방도시에 전파되였습니다. 도필이 문화로 될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의 논리를 구성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논리는 인간을 휘말려 들일 수 있어요.   첫째는 진공으로 정의를 자칭하는 겁니다. 무릇 도필은 자칭 정의( 正义 )라하고, "정의를 위해 진공한다"고 부르짖지만, 강도적 논리입니다. "너를 강탈하는데는 니가 강탈당한 자원이 구비됐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너는 강탈을 당해야 한다."   내가 장기간 관찰한데 의하면, 한 인간이 인신공격을 당했다면 평생 뒤집어 쓰게 되며 자신의 필생의 저주가 됩니다.   그리고 허위로 진공하고, 날조도 불사합니다. 도필문화가 사람들에게 용감한 인상을 주지만 큰 위험성은 없거든요. 중국 현재 상황하에서 "명예훼손침해"로 소송당했다 해도 인치사회에서 법적으로 가해자가 상당히 안전해요.   여하튼 도필문화는 중국문화의 현대적 재난입니다.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이 현저하고 잘 살게 되였지만, 사회문화풍기와 문화건설은 우려를 자아냅니다.   여기엔 절반은 "도필문화"와 관계있어요. 문명이란, 이러한 도필문화, 폭격 악투에서 해탈 되는 것입니다.   김: 사실 여선생님은 중국 "도필문화"의 큰 패해자이지요. 저도 조선족 100년사상 민족사회내부에서 가장 큰 "도필문화"의 피해자 입니다. 여선생님이 한문화권속에서의 큰 피해자이 듯이, 전 조선족문화안에서 가강 큰 피해자로서, 그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습니다.(웃음)   여: 내가 아는 김문학선생은 당대 조선족이 배출한 국제적 시야와 독립적 사고를 갖춘 초고의 기재(奇才)입니다. 그런 기재인만큼 "도필문화"의 공격은 받기 마련이지요.   김: (웃음)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가해자에게 한편 감사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나를 늘 의식하고 살고 있으니까 이런 마이너스 팬도 팬이 아닙니까?   18년전 히로시아에서 대담할 때 선생님은 사람이 유명해지면 공격을 받기 마련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저에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10. "천리마는 발목의 진사를 아니 싰는다"   여: (웃음) 많은 사람들이 인신공격을 대처하는 "호신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내 비결은 바로 "천리마가 달리는데 발목에 묻은 진사를 아니 싰는다"( 马行千里,不洗尘沙 )이예요.       이건 또한 선배로서 후배에 향한 조언이기도 합니다.   1.무함에 대해 절대로 반박, 해석, 권고하거나 거들떠 보지 말기. 일단 대응하면 상대가 반은 이긴 것이니까요.   2. 무함자와 대화, 화해 할 생각 말고 방관자의 동정, 연민을 살 생각 절대 마시길. 그런데 신경쓰면서 생명의 가치를 폄훼시킬 필요 없어요.   3. 만일 무함이 당신에게 손해를 주었다 해도 그냥 그대로 접수하기. 무함은 바로 당신의 "인생청결제"이기도 합니다.   4. 무함을 조우했다하여 절대로 자신의 창조적 활동을 멈추지 말것. 더구나 자신의 일이 무의식중 무함자에 대한 대꾸나 반박으로 되지말 것.   5. 그림자 없는 고층빌딩은 아직 채 짓지 못한 것이요. 등나무가 휘감지 않은 거목은 아직 기상이 모자란 거다. 이런 기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6. 무함을 받은 사람은 "해를 보배로 전화(化害为宝)”시키며, 내심속에 계율을 세워야 합니다. 일테면 필생에 선량에 대해 공격하지 않고, 미지에 대해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 과연, 구절마다 선생님의 실제적 체험속에서 걸러낸 대응법의 "좌우명"같은 말씀입니다.   저도 기실은 저를 십여년동안 무함, 공격하는 자에게 한 번도 곁눈판적 없어요. "만경창파를 가르는 바다의 고래가 언제 개울 물의 미꾸라지에 곁눈 판적있나?" 이게 저의 대응 방법입니다.   선생님, 한때 중국 사회와 언론계, 문화계에서 떠들썩 했던 여선생님의 문화대혁명시기 집필그룹 석일가(石一歌 )의 성원이었다는 비판, 일명 "석일가사건"에 대해 그 진상을 알고 싶습니다.           11. 석일가( 石一歌 )사건의 진상   여: (웃음)상세히 말하자면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해서 말씀드릴께요. 내가 쓴 《문공(门孔)》이란 책에 전문 이란 글이 있어요. 다음 번 그 책을 한 권 드릴꺼니까 한번 읽어보시면 알게 될겁니다.   1990년 12월 내가 동남아시아 고대문명 유적지를 답사할 때, 북경대학 학생 여걸( 余杰 )이 북경에서 "여추우, 당신은 대 참회를 안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내가 문혁시기 상해의 석일가(石一歌 )란 글쓰기 단체에 가담하여 수십편 정치문제가 있는 글을 발표했기 때문에 "문혁잔여" "문화망나니"라고 공격했어요.   김: 네, 그렇군요.  저도 그의 책을 읽은 적 있어요. 신예비평가, 수필가로서 대학가에서 이름이 나있었지요.   여: 그때 난 내일이 바빠서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가, 2000년 1월 네팔 경유하여 사천에 들어와서 한 기자한테 부탁하여 여걸씨한테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뒤 그 기자가 편지를 공개해 버렸네요. 나는 가벼운 심정으로 혈기왕성한 여걸에게 루머를 믿지 말고 진심을 알고 글을 써야 하며, 내 자신도 문혁시기 조난 당했던 일을 밝히면서 그 "석일가"의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김: 그렇군요. 문혁, 경험자가 아닌 70년대생 여걸이 선생님을 전문 연구한 적은 없으니, 일시 만용으로 그럴수도 있겠네요.   여: 1971년 10월 10일 주은래 총리의 지시로 상해에서 로신연구를 목적으로한 《로신전>》편찬소조와 각 대학에서 추천한 성원으로 구성된 “석일가(石一歌 )”글쓰기 소조가 탄생됐어요.   나는 《로신전》편찬소조에 가입했다가 중퇴했습니다."석일가"는 복단대학, 상해사범대 등 교원으로 구성된 교재편찬소조의 필명이었거든요.     김: 당시 선생님은 어떤 글을 쓰셨습니까?   여: 나는《새로 발견된 노신의 일문(佚文)을 읽기》 와 《호적전》의 첫머리만 썼습니다. 다 내 이름 "여추우"석자로 발표했는데 전혀 "정치문제"가 없지요(웃음)   여걸씨가 내게 쓴 사죄문을 공포하고 자신이 문혁식으로 현재의 지식인을 공격했다고 사죄하고 나의 관용한 아량에 탄복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뒤 무슨 이유인지 여걸이 또 나를 비난하고 고원청(古远清) ,손광선(孙光萱),여개위(余开伟)  등이 나름 집중포격했습니다. 그 중에 친구문인 사엽신도 들어있었어요.   그러나 난 한마디도 반격도, 변명도 안했어요! 그 땐 전국의 공공지식인들도 누구 하나 나를 위해 변명해 주는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 다수도 이 집중표격전에 가담하였으니, 이게 바로 중국의 일부 "공공지식인"의 생존지도(生存之道)이니까요.   김: 선생님이 쓰신 공개현상문(悬赏文)이 재미있던데요(웃음)   여: 결국 내가 한가지 방안을 고안해냈지요. 신문에다 당당히 "현상"문을 발표했어요.     "나를 공격하는 자 중에 증거를 내놓아, 내가 그때 “석일가”란 이름으로 문장 한편, 한 단락, 한 구절, 한 줄이라도 그대들이 비탄한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을 표명만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자신의 일년 수입, 인세를 지불할 것이며, 또한 그 증거들을 전국 매체에다 전부 공개 발표하겠습니다." 동시에 나는 이 "현상"을 처리하는 변호사의 성명까지 공개했어요.   이 "현상"책은 "석일가"성원에 해를 주지 않고, 공격자들도 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위해 난 정말 고심했답니다.(웃음)   12. 거목이 바람을 부른다.   김: 그러네요(웃음) 정말 많은 곤혹을 치르셨습니다.   여: 그 뒤 "석일가"사건이 종연됐고 그 누가 한마디 대꾸도 없었답니다.(웃음)   김: 무언의 사실은 소리높은 웅변보다 수백배 유력하지요! 저도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격자에게 "공로상"상패를 드린다고 공개 했어요. 물론 농담으로 한번 가볍게 웃겨본 것이지요(웃음)   여: 이제는 별로 나를 공개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자가 없습니다.물론 뒤에서 쉬쉬 하겠지만 , 아마 "여추우사건"은 종말됐나봐요(웃음)   김: 거목이 바람을 부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웃음)   미국의 예일대학 법학원의 로도(鲁淘)선생이 전문 이런말을 했어요. "(여추우사건)은 이대로 결속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집중적으로 중국의 공인 명예권, 인신권의 법적보호가 극도로 박약함을 노정시겼다. 이 사건의 수많은 참여자, 그들의 문장을 발표해준 신문잡지, 출판사도 포괄하여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모두 형사죄책을 져야 한다. 어떤 자는 매우 엄중한바 일테면 그 고원청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비교적 전면적인 반면교재로서 후세들에게 중국 당대 사법사의 매체사연구의 분석, 해주를 제공해준다.”   자, 그럼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의 가족얘기, 행복한 가정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사모님(16세연하) 마란(马兰)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황매극(黄梅戏)명배우고, 선생님과의 금슬이 좋기로 "잉꼬부부"로 소문났잖습니까?       여추우 부부(중간)와 김문학 부부(좌우)   13. 잉꼬부부   여: 김선생도 아시다 시피, 마란(1963년생)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황매극 배우지요. 18살에 홍콩에서 유명해지고 20살에 전국인민대표로 선출되고 신문매스컴에서 "사랑하는 배우" 전국앙케트조사중 번마다 1위를 차지했어요.   김: 사진에서도 보았지만, 오늘 실제로 만나보고 나니 미인이셔서 놀랐습니다. 두분은 남재여모(男才女貌))의 본보기가 아닐까요!   여: 그런 거대한 명성을 자랑하는 마란이 내게 경탄을 자아내게한 것은 우선 뛰여난 배우로서의 연기력이었어요. 내가 상해서 처음 그녀의 연극을 보았을때 느꼈지요. 나의 《예술창조공정》이란 책이 우리들의 인연을 맺어준 셈입니다.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예술 전문가의 말에 마란이 이 책을 읽고 나와 만나자 했습니다.   그녀의 연극을 보고 초대면 하게 되었고, 서로 상대의 인격, 재능에 매료되였습니다.   어느날 내가 그녀에게 "내 생각에 마란은 내 아내로 되는게 적합할 것 같아"고 말하자 그녀도 즉석에서 "내 생각에도 당신이 내 남편이 되는 게 좋다고 느껴요!"하고 대답했지요 .(웃음) 이게 프로포즈인 셈이지요.   김: (웃음) 간결한 프로포즈가 멋있네요!   여: 그녀는 명예, 성취, 지위를 아랑곳 않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어요. 그러나 한가지 용서하지 않는 건 인간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자, 아첨하여 득세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상견한만( 相见恨晚 )하게 느낀 건, 마란의 무사(无私)한 성품이었답니다. 무사함은 그녀의 본능인 것 같았어요. 이렇게 첫번 째 혼인에서 실패한 나에게 정말 지기를 찾게 했어요.   늘 기자의 인터뷰에서 "두분은 누가 먼저 따랐나요?"하고 물으면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해요. "그건 필요없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내게 명성이 따른 만큼 폄훼, 비방, 중상하는 자도 수 많이 따랐지요. 번 마다 마란이 위안해주고 나를 격려해 주었어요. 내가 마란에게 의존하는 의존도는 정말 높아요.    내 생활의 전부가 원고지, 여행답사, 마란 이 3자로 구성돼있지요.   김: 선생님은 휴대폰도 없으시고, 메일도 하지 않으시니 외계와의 연락은 부인이 맡으시지요.   여: 마란에게 의존하는 게 바로 일절 대외 연락은 그녀가 맡아서 하는거지요. 내게 있어서 그녀가 없으면 외계가 없지요. 이런 일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 못하겠다는데, 내 이유는 너무 간단하고 충분해요. 마치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편벽하고 고요한 작은 섬을 선택하여 사는데, 이따금 작은 배가 외부에서 음식물을 날라다 주면 되니까요. 이 하나만으로 족해요. 딴건 필요 없다니까요.(웃음)   (계속)
16    왜 중국 국민의 궐기를 이뤄야 하나? [진휘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052  추천:33  2018-11-11
(문화대담) 왜 중국 국민의 궐기를 이뤄야 하나? 진휘(秦晖)+ 김문학   들어가면서     진휘(秦晖)는 당대중국사상계의 대표적 인물이며 “당대 최대의 사상가”로 꼽히는 지성계의 기수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청화대학 인문사회학원의 교수로 있으며 역사학자, 경제사학자로서 “공공지식인”으로 지성계와 오피니언계에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진휘교수를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연줄이 닿지 않다가 인민대학 장명(张鸣)교수의 알선으로 예상밖으로 쉽게 연락이 되었다.   우리 일행이 청화대학 인근의 교수주택가에 있는 진교수의 자택을 방문한것은 녹음이 우거진 6월초의 어느 날 이었다. 자택이자 서재이기도 한 진휘의 집은 그야말로 집안이 책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손님 접대용 소파와 작은 탁상을 제외하고 그야말로 책이 산더미였다. 금방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진교수는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역시 저명한 동유럽사연구전문가로 소문난 부인 김안(金雁)교수는 아직 출근중이어서 집에 안 계셨다.   우리는 진교수가 따라 주는 녹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진교수는 연세보다 젊어 보이는 우렁찬 목소리였으며  유머적 센스도 이만저만이 아닌 유연한 학자적 기품이 있었다.   오른 눈이 실명하여  왼 눈으로만 독서하고 글 쓰고 살아간다고 직백한다. “그러나 맞은 켠에서 타인이 볼때는 왼쪽눈이 안질이 있는 거로 보이거든요. 오른쪽 눈은 성하고  그러니 나를 오른눈으로만 보는 우파지식인으로 인정하는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하고 대답하면서 나도 같이 웃었다. “당대 중국의 최대의 사상가” “종합적인 지식인”으로 불리우는 진휘교수. 그는 중국에 관해 어떤 사상과 견해를 지니고 있을까?    왜  “공동적 최저라인”인가?   김: 중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선생님은 역사학, 사회학,경제학,법학 등 여러 영역에 걸쳐서 중국현실문화에 관하여 연구와 발언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사상계, 이론계, 학술계 그리고 정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저작 «共同的底线» 을 잘 읽고 많은 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책에서 충격적인 말을 했어요. “우리의 공동적 바럼라인(底线)은, 좌우각파가 제각기 견지하는 “공평”과 “효율”의 절충도 아니며, 또 “넘치는 자유”와 “넘치는 복지"사이에 “자유방임도 아니고 복지국가도 아닌”  제3의 길을 가야 한다. 즉 “최저한의 자유와 사회보장을 획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고 갈파했습니다. 과연 현명한 사상기법이라고 보는데요.   진: 감사합니다. 이건 내가 2003년이전에 발표한 글들을 묶은 책인데 지금 와 봐도 여전히 효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살고있고 모택동시기보다는 큰 변화를 가져 왔지만 여전히, 자유권리와 사회보장(복지)이 제한성이 있는 결함을 노정하고 있는건 어쩔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 중대한 사상(事象)이 또한 현 체제하에서 어느 정도로 해결하는가가 우리나라의 발전에 관계되는 일이지요. 즉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는  자유의 폭을 넓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본을 늘리는 일입니다. 공민의 권리로 권세자의 권리 남용을 제지시키고 국민의 복지를 경제적으로 보장하게끔 하는것이 기본적인 “공동적 최저라인”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건 현재 중국의 국정에 맞는것이지요. 우리가 불평등하면서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서 국가의 권력이 지대하지만 책임이 적은 체제하에 살고 있는 이게 중국의 실제적 문제입니다. 중국 체제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이런 실정을 잘 알아야 우리가 공민의 권리와 복지를 추구하고 선진국같은 수준에 도달할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이는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공동적 체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는 포플러즘(民粹主义)과 전제주의를 반대하며, 좌우가 하나의 공동라인에서 서야 한다는 얘깁니다.    자벌레(尺蠖)효응   김:그러니 중국의 좌우가치관 문제나 사유화,국유화 등도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야 겠네요?   진:그래요.사유화,국유화 문제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복잡합니다.어떤 네티즌의 말을 빌면,국유자산은 본래 사유화 하지 못하지만,모두가 동의하면 사유화로 전환시킬수 있고,사유재산도 국유화도 안되지만,소유자가 동의하면 될수도 있는겁니다.이를테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자선공익으로 사유재산을 털어 내놓을수 있지요.이런걸 가지고 누구도 사유재산 침범이라 탓하지 않습니다.자원한거니까요.    그러나 중국에서는 웃기는게 이런 두개 논리가 다 꺼꾸로 된거예요.사유재산을 국유화 할수 있는데 소유자의 동의가 필요없이 국가에서 앗을수 있다는 겁니다.민가주택을 강제로 허물어 버리는것 같이 말입니다.국유재산을 사유로 변함에도 서민들의 찬동이 필요없이 쉽게 자기주머니에 넣을수 있지요.(웃음)   김:과연 그렇네요.(웃음)   진:내가 새로운 명사를 하나 창조해냈는데 “자벌레 효응”바로 이 뜻이예요.일반적으로 중국인에게 “좌”적 정책이라면 보수정책이고,”우”적 정책은 이른바 개방정책 이지요.그런데 중국의 개방이나 보수나 다 소수집안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가는거예요.마치 자벌레처럼 한걸음 수축하고 한걸음 신장하면서 하나의 고정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선진국과는 달리 중국 체제하에서 좌파냐 우파냐 하는 문제보다는 여기서 제일 실직적인 문제는 좌파도,우파도 다 좋지만,그 차이점은 영합파(乖派)냐 불영합파(不乖派)입니다.만약 영합파라면 좌파는 권력을 고취하고 권력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아도 되고 영합파중의 우파라면 책임을 문책할순 있으나 권력을 제한할순 없어요.이런 경우,정부는 둘다 좋아하지요.   김:불영합파라면 어떠하지요?   진:불영합파라면 좌우 양측에서 압력을 가해도 괜찮지요.좌파라면 문책을 할수 있고 서민들을 위해 질 책임을 추궁할수 있습니다.우파라면 권력제한을 요구 할수있지요.내 생각에 헌정으로 통하는 길은 이 두가지가 다 필유합니다.한편 정부의 권력을 제한시키고,또 한편으로 그의 책임을 추궁하는거지요.   김:문제는 중국 지식인의 좌우 양파가 다 자신의 사명을 할수 있을까요?   진:중국의 “자벌레 효응”으로 인해 전제체제하의 좌우가 다 체제에 발라 맞추는 역할만 하는데,좌파는 체제의 권력확대에 조력하고 우파는 체제의 책임회피에 도움을 줍니다.서양은 이와 정반대지요   “마이너스복지국가”로서의 중국   김:진선생은 최근에 중국을 “마이너스복지국가(负福利国家)”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해석 해 주시겠습니까?   진:아마 서양선진국,복지가 잘된 나라들에서는 미국,일본,유럽에서는 이런 개념이 없을겁니다.통상 복지국가는 가능한 평등을 추구합니다.시장에서 최초의 분배가 현저하게 공평성을 상실하면 이를테면 징세를 복지에 돌리는 등 2차분재로 상대적 평균화를 시도합니다.    복지정책이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킬경우 그것을 나는”마이너스복지”라 칭합니다.이런 시스템은 분배에 플러스 조절을 할 대신 오히려 마이너스 조절이 되버립니다.   김:그럼 결국 부자는 더 부자로 되고 빈곤자는 더 빈곤자로 되겠군요?   진:그래요!빈부의 차이가 더 넓어지고 강약의 차이가 더 커집니다.지금 중국이야 말로 “마이너스복지국가”입니다.나는 일관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적극적인 과정이라 보고 있고,예전보다 복지도 진보했다고 보고있어요.1978년 이전보다 어느정도 진보는 했지만 여전히 제로복지레벨에 달하지 못했다고 봅니다.지금 중국에서 “자유방임”이냐,”복지국가지향”이냐는 논쟁도 일고 있지만,그런 문제자체 존재하지 않으니 황당무계한 논쟁이지요.(웃음)   김:”플러스복지”가 요망 되겠네요?   진:그렇지요!이런 무용한 논쟁보다는 좀더 개혁을 통해 제로복지를 플러스복지(正福利)로 끌어올려야만 비로서 고복지냐 저복지냐,자유방임이냐 복지국가냐 하고 의논 할수있는 차원이 마련되지요.   중국모식(中国模式)은 무엇인가?   김:”중국모식”이란 용어가 세계적으로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데,진선생님은 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진:”중국모식”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습니다.이 모식을 정의하면 이렇지요.중국은 저인권(低人权)조건하,그리고 글로벌 경제배경하에서 서양과 유니크한 연결을 이루고 있는것입니다.내 말로 얘기하면,중국식”자벌레 효응”과 서양식의 꺼꾸로 된 자벌레 효응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것이지요.    중국의 궐기가 일종 18세기적 자본주의로 21세기형 자본주의를 전승하는 방식으로 실천한다면 서양 내지 세계에 대해서도 별 좋은 일은 아닐겁니다.그럼 중국 자신에 대해서도 좋겠나요?난 우리 현재의 경쟁력은 대부분 우리의 저인권우세로 발전시키고 실현시켰다고 봐요.    이 저인권우세의 전제는 무엇일까요?바로 서양세계가 향수하는 권리가 우리보다 높은것이고,우리에겐 기술적우세도 없습니다.    지금 글로벌배경하에서 우리가 기술,창신은 사올수 있지만 서양에서 우리같은 혈한(血汗)공장은 배우지 못할것 뻔합니다.그러니 우리는 그리 조급할 필요도 없어요.왜나면 우리는 실제로 또 다른 양상을 볼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가 중국을 개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세계가 중국을 개변시킨다구요?   진:네.오늘날 중국의 개혁이 취득한 무수한 성취는 GDP를 제외하고는 홀시할수 없는건 우리의 규칙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간단히 말해서,자유도나,복지면에서나 총적인 비교를 해보면 우리가 과거에 비해 큰 진보를 이루었단 것이예요.   김:그러나 저인권우세는 좀 아닌것 같은데요.   진:그래요.저인권우세는 횡적인비교,즉 서양과 비교하여 얘기한건데,이 비교도 관과해서는 안되지요.목하 상황을 글로벌경쟁의 배경아래서 우리가 여기에 궤도를 맞추지 않으면,그쪽이 이쪽으로 맞추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하여,서양의 노동조합(工会)은 예전에는 종래로 중국의 노동자권리를 관심하지 않았어요,미국을 보더라고 20세기 초두에 화인배척 열조를 일으켰는데 이건 자본가가 아니라 미국 노동조합이 한거예요.지금 미국 노동조합은 중국인이 미국 가는것을 반대 할수있으나 미국의 자본이 중국으로 넘어오는 길은 막을수 없습니다.그러니 지금 미국의 노동조합이 중국 노동자의 인권을 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나면 중국의 노동자 권리가 없으면 미국의 노동자도 재차권리를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이게 바로 글로벌이 조성한 현실이지요.   5.“중국기적” 있기나 하는가?   김: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국내 대부분 학자들이 해석하는 “중국모식”은 기본상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게 많은데 진선생님은 중국을 객관인지의 상대로 포착하여 해석한것이 돋보입니다.    “중국모식”은 저도 존재한다고 보면서 좀 더 역사적 시각에서 관찰 분석하는것이 좋다고 생각이 듭니다.그럼 다음 화제로 ”중국의 기적”에 대해서 여쭈어 볼까 합니다.”중국모델”과 셋트로 거론되는 말에 “중국기적” 이란게 있는데 이점에 대해서 말씀 해주십시오.   진:중국의 경제성장에 관하여 “중국붕괴론”이 있는가 하면 “중국성공론”과 ”중국기적론”이 난무하고 있어요.나는 이 3자에 대하여 모두 엄중한 편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중국의 경제발전이 지속적 성장이 글로벌시대 대응이 잘 된건 사실이지만,”붕괴론”은 사실에 어긋납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면 내 지론대로라면 중국은 ”저인권우세”로 4대요소(인력,토지,자금,비재생자원)가격을 압축시킴으로써  “교역성분”을 누르는 식으로 민주,참여,사상,신앙,공정을 억제하면서 물욕자극으로 인간의 에네르기를 신기루 같은 단순적 부유충동에 집중시키는 모식(양식)이었습니다.   김:그러니까 체제,사상,신앙,공정 등 인적인 정신적인 개혁을 방치하고 순전히 물질부유만 추구하는 저단계 발전이겠군요!   진:그렇지요.이렇게 함으로써 자유시장국가든 복지국가든 다 놀라운 경쟁력을 분출하게끔 했는데 “점진”적이든 “쇼크요법(休克疗法)적인 민주전형(转型)국가들이 다 놀라게끔 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서양식의 자유,결사,민주가 결핍하지만 “저인권우세”는 확실히 글로벌속의 “중국적 경쟁”을 파죽지세로 이끌었고 복지국가들로 하여금 복지수준을 하강시키게 하고 자유국가로 하여금 무역보루를 재건하고 발전도상, 낙후국가로 하여금 자금을 흡수하여 자금을 획득하는 등 더욱 큰 곤란에 직면하게끔 했지요.    흥미로운것은 지금 이런것을 두고 “중국기적” “중국성공”으로 경제학자들이 고취하고 있지요.중국경제의 비자유색채를 좌파가 흠상하고 비복지색채를 우파가 흠상하고 있으며 동시에 빠른속도로 후진국에 흠모를 자아내고 있어요.    아이러니하게 발전도상국과 발달국가에 대해 엄중한 도전을 거는 중국이 각 방면의 칭찬을 받는겁니다.(웃음)   김:그러니까.중국의”우세”란 결국 시장의 “자유”에도 복지국가적”복지”에 있는것이 아니라,그 제도적 “철밥통”에 있는 것이군요.   6.중국공민이 희망하는것은...   진:그렇지만 난 전체체제가 경제성장을 방해하는게 아니라 사실상 경제성장을 ”자극”한다고 봅니다.그러니 “고인권”국가의 산업이 ”저인권”국가체제의 지역으로 이전하고 경제이익을 얻게 됩니다.그런데 그것은 경제수준의 정치발전을 의미하는 동시에 체제상의 차성피쇠(此盛彼衰)를 의미하며,지어는 “열화가 양화를 구축하는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김:그러니까 프랑시스 후쿠야마가 제기한 자유민주의 승리와 ”역사의 종연”이 아니라,여기서는 민주복지제도,인류평등의 소망이 실패했다는것도 의미 할수 있겠네요.   진:그렇습니다.중국이 전제하에서 기형적인 효율로써 “저인권우세”로 글로벌 자금을 흡취하여 상품수출을 통한 경이로운 고액 “쌍순차(双顺差)는 타국을 괴롭 힐 뿐만아니라,일반 중국인에게 얼마만한 이익을 갖다 줄까요?초저렴한 노동력,땅,자원을 내놓아 효과적인 수입요구를 형성시키지 못하고 다만 거액의 딸러만 바꿔올뿐입니다.중국인은 미국이 돈으로 우리의 피땀을 끌어 모았다고 원망하고 미국인은 중국의 염가가 자신들의 밥통을 짓부셨다고 원망하지요.그런데 일단 미국 딸러가 내려가면 미국은 끝나는거고 중국인의 피땀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지요.(웃음)   김:이런 상황을 개변시키는게 순리겠습니다.   진:그래요,이런 상황을 개변시키고자 하는건 타국인 보다도 우리 중국국민이 더 희망하는 일입니다.중국 인민페가가 오른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 개변은 어려워요.오직 인권을 개선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수호해야만 이 상황을 개변시킬수 있지요.시장경제 글로벌을 이루었을 무렵에 인권의 글로벌화가 결여한다면 이 글로벌은 오히려 더욱 큰 페단과 재난을 가져 올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저인권우세”를 제거하면,중국은 원시누적방식을 유지 할수 없으며,관상(官商)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압제하여 투자를 흡수하여 염가상품을 수출하는것으로 ”쌍순차”적 경쟁력을 확대시킴을 제지시킬수 있어요.   7.국민의 궐기를 이룩해야   김:현재 중국 관민이 거국일치로 “중국의 궐기”를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대채 어떤,무엇으로 궐기를 이루어야 하는지요?   진:08년에《대국궐기》시리즈 TV기록영화가 예전의《河殇》만큼이나 히트했지요.여기에 대해서도 나는 여러번 글을 써서 의견을 발표했는데,문제는 우리 중국이 김선생말씀처럼 무엇으로,어떤 방식으로 궐기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궐기를 성취하려면 다른 모식으로 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이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우리의 경제적 GDP가 일본을 초월해 미국 버금의 제2경제대국으로 성장한건 좋지만,인구평군GDP는 아직 일본보다 아득히 후진이에요.그런데 인평군GDP가 껑충 뛰어 올라서 미국,일본과 같고,심지어는 군사상에서 상대방을 전승했다 한들 또 어쩌겠나요?    당년에 짜리러시아가 나폴레옹을 전승하고 러시아군이 파리를 점령했어요.그러나 러시아군중의 청년 엘리트들이 파리에서 보니 이건 아니란거에요! 프랑스인들은 매우 존엄있게 살고 있는데 우리 러시아인은 얼마나 존엄없이 살고 있는가? 우리 동포를 인간취급이나 했냐 이거죠.그리하여 승자가 패자를 흠모하게 된 나머지 그들이 러시아에 귀국한뒤 러시아 변혁과 자유의 길 12월당인을 창설하게 되지요.   김:(웃음)어쩐지 현재 중국의 경우와 흡사한데가 있어 보이네요.상대보다 우리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우린 상대를 따라배울수 밖에 없는...   진:우리가 현재 궐기하려면 두말 할 나위없이 우선 서양의 복지나 자유를 다 따라 배워야 합니다.정치적 자유는 물론 경제적 자유도 아직 대폭 증강해야 하고 독점을 반대하고 국진민퇴(国进民退)의 양식을 개변시켜야 하지요.국민의 궐기가 이루어지는지 급선무이라는 얘깁니다.국민,공민의 진정한 궐기를.   김: 공민사회가 형성되고 국민이 국민으로서의 궐기를 스스로 세우고 지킬수 있는 이런 공민의 사회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진:그래요 ,국민의 궐기없이 국가의 궐기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8.”정신귀족”보다 귀족정신이 필요한 이유   김:근년래 중국에서는 가난에서 해탈되어 나오자 “고귀” ”호화” ”사치 ””부호”등 거리의 광고 패말에서 보여주듯이,항간에서 “귀족”을 과시하려는 현상이 현저합니다.그러나 실속을 보면 겉치례에 불과하며 진정한 “귀족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진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진:좋은 화제를 꺼냈습니다.지금 중국에서는 “고귀한자가 가장 비천하다”는 모택동의 말은 무시되고 도처에서 귀족학교요,귀족클럽이요,”귀족”이 범람하고 있어요.    근데 문제는 자칭 고귀하다고 떠벌리는 국내 귀족의 실속은 어떠한가? 그 실질을 파고 보면 알수 있습니다.”귀족”이란 개념은 뭡니까? ”귀족(aristocrats)”은 고대 그리스에서 “최우수(aristos)”란 단어에서 파생된건데,그 뜻은 현인,대덕(大德)이란거지요.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귀족을 고상한 도덕,고매한 품격과 부유존귀를 갖춘 인간으로 정의했습니다.그러나 부유존귀하지만 도덕이 저열한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귀족이라 하지 않았습니다.대신 그들은 과두(寡头·oligarchs)로 불렀지요.   김:고귀,귀족이란 재물적 부유자이기 보다는 우선 정신력,품위적인 귀족을 가리키지요.   진:그래요.귀족이 고귀한것은 이들이 불행자를 돕고 사회부조리,불평등을 위해 항의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있어서,귀족과 과두는 준별되는데 전자는 사회의 정의를 수호하고 후자는 자기의 사리만 도모하는거지요.    사회불공평의 피해자가 항의를 하는건 당연지사이지요.그러나 피해자만 사회에 항의를 한다면 그건 약자의 소리로 큰 힘이 없을수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사회의 “귀족”이 불행한 약자를 위하여 납함할수 있어야만 사직(社稷)의 복이 되고 조민(兆民)의 경사가 되지요.   김:그렇습니다.인류문명사를 관찰해 보아도 교양과 품위를 갖춘 신사,귀족,현인들이 기득 이익의 담벼락을 뛰어넘어서 힘없는 백성서민을 위하여 통치배,기득권자들을 비판하고 질책하며 일종의 고귀한 정신을 과시했습니다.   진:귀족정신은 한 나라 민족의 귀감입니다.그러나 가증스러운것은 귀족인양 행세를 하는 그런 계층입니다.아Q와도 같은 존재지요.한 정상적 사회에서 아Q도 존재의 권리를 갖고,그러나 아Q들만 있으면 안되지요,특히 변혁시기에는,흔히 이런시대는 이익국면이 조정되는 시대라 공정이 제일 필요한 시대 입니다.그러므로 “정신귀족”보다 귀족정신이 필요하지요.우리 사회에 기득이익을 초월한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고귀한 품질을 갖춘 인간이 많이 육성되어야 합니다.물론 귀족정신은 귀족제도가 아니지요.   9.자유를 실천하기   김:진선생님의 연구영역이 학제적(学际的)이고 광범위하여 여러학문 영역에서 자신의 독특한 이론과 학설 내지,사상,사고를 현시하고 있는데.”실천자유(实践自由)” 즉 자유를 실천한다는 설법이 내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고로 보였습니다.진선생님의 사상은 독일 사회학자 denise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있는데,다른 국내의 자유주의 학자와는 다른데가 있다고 봅니다.    Denise가 제기한 ”공동체”개념은 사회군체주의의 핵심적인 개념인데,진선생님은 그중의 “소공동체”의 이해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개인주의에 대한 소공통체의 속박을 인정함과 아울러 공동체 내부의 멤버에 대해 보호하는 역할을 또 인정하고 있지요.진선생의 이런 견해는 사회군체주의의 색깔이 농후한데,라는 저작에서 진선생님은  자유주의사회를 실천하는 문제를 제시 했습니다.    중국에서 자유를 실천하는 사상은 현실적의의가 크다고 보는데 이점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2004년에 출간된 나의 저작 에서 나는 자유주의본신에 포용성과 제한된 도덕성,제한된 이성(理性)에서부터 자유주의 이념을 논증하려 했고 아울러 자유주의이념이 일반 대중에 대한 친화성(亲和性)이야기도 했어요.    나는 우선 Isaiah Berlin의 “네거티브한 자유”와 ”파지티브한 자유”에 대한 이해를 피력했는데,유행적인 의견은 흔히 “파지티브한 자유”와 복지국가와 연결하지만,나는 그것을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것”과 ”타인이 스스로 노예로 됨을 방지하는것”과 연결시켰습니다.   김:나도 동감입니다.저작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그의 “파지티브한 자유”는 “고급적 자아”와 ”저급적 자아”의 구별에 미치는데,실질상은 부권(父权)제도의 재현이지요.즉 다시 말하여 공동체가 개인생활에 대한 감독,발전적 지향의 감독이라 봅니다.   진:그렇지요.나는 이 두가지 자유와 달리 내 나름대로의 “제3의 자유”란 이론을 제기했습니다.쉽게 해석하면 비자유사회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이지요.자유란 공공물과 같은 바,선렬들이 건립한 자유사회의 좋은 점을 자기 혼자서 독차지 할수 없기 때문에 편승의 문제가 불가적으로 발생합니다.경제학 원리로 말하면 바로 “공지비극(公地悲剧)이지요.    이런 상황하에서 모두가 다만 자기자유만 보호하려 하고,”상호냉담”적인 “네거티브한 자유”에 만족 하는데 그치고 능동적으로 타인을 방조하여 노예에서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자유의 질서도 건립할수 없습니다.    비자유사회안의 인간들이 자유의 이상을 위하여 대공무사한 헌신정신이 필요하단걸 의미합니다.   김:그러니 진선생님의 의도는 “자유”를 말하기 보다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지요.입으로 부르짖는 자유가 아닌 실천하는 자유.진선생님의 이 이론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자유,적극적인 자유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떤것이 있습니까?   진:자유주의 실천에는 아래 세가지가 포괄됩니다.첫째,자신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노예로 되지 않는것). 둘째,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노예주로 되지 않는것), 셋째,타인사이의 강제를 반대 하는 것(노역제도가 존재하는 조건하에서) 이게 없으면 그냥 자유민이었지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10.우리에게 도덕위기가 존재한다   김:당대 유명한 역사가,사상가 고준(顾准)의 책 이름에 란 것이 있는데,자유를 위해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자유주의자의 선각자 모델은 보여주었습니다.중국이 자유주의를 입으로 외치는 자는 많지만 정작 자유를 실천하는 자는 너무 적은게 탈이지요.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요즘 중국인의 “도덕문제”가 클러즈업되고 있는데,이 점에 대한 진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진:좋은 화제입니다.현재 중국인의 최대의 문제중 하나가 “도덕위기”이지요.빈부차이가 엄중한것도 우리의 문제이지만,도덕위기가 너무 심각합니다.    도덕위기는 주로 일종의 최종라인이 없는 그런 위기를 말해요,알기 쉽게 말하면 비교적 고상한 도덕,이를테면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타인을 돕는 이런 걸 나는 자산(慈善)이라 하고,타인을 해치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을 얻는것은 강탈이라 하지요.한 사회는 강탈을 억제하고 평등교환을 진행하고 자선을 장려하는 이런 사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이런 겁탈에 대해 제지작용이 실효했고 고상한 도덕으로 사기위인(舍己为人)을 일종 강제적 규범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장려하기 보다는 강제하고 있으니 문제지요.   김:중국에서는 지금 기부로 핍박하는 핍견(逼捐)현상까지 심하다고 들었어요.   진:그래요.이를테면 어떤 상황하에서 늘 돈 있는 부자에게 기부금을 내라고 핍박하고 기부금이 적다면 많이 기부하라고 핍박합니다.사회적 자선사업이 저조인것도 문제이지만,억지로 기부금을 많이 기부하라고 강압하는것도 “자선”의 본의를 뒤엎은 것이지요.자선이란 그 자체는 일종의 애심으로 이뤄지는 건데,강압한다면 자선이 납세로 변질되고 마니까요!   김:그렇다면 일종 중국에서 등장하는 가렴잡세나 다름 없잖습니까.   진:그렇습니다.공민으로서 행해야 할 법적책임은 납세이지,강제적으로 가렴잡세를 내는게 아니라 봅니다.    결론적으로 도덕문제는 우선 도덕최종라인(底线)을 지키고 강탈하는것을 금지 해야 하며,가렴잡세 같은 기부를 핍박하는 일도 제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상한 도덕,이건 문제 없는데,개혁개방이래 우리는 줄곧 반유토피아를 호소했댔어요,무슨 유토피아를 작별해야 한다느니하지만,유토피아 본신은 재난을 가져오지 않아요! 유토피아란 일종의 이상향(理想国)으로서 이 고상한 이상향을 실현할수도 있고 실현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만일 실현 못했다해도 재난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요.   김:서양,이를테면 미국이 유토피아의 실험이 빈번했는데,공상적사회주의도 실험했지만 실패했다하여 미국에 재난을 초래한것도 아니었지요.   진:그래요.진정한 재난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강제하는 거지요.유토피아를 강제하지 않으면 재난을 조성하지 않습니다.반대로 실현못했다 하더라도 많은 정신적 도덕유산을 남겼다면 그건 좋은 것이지요.    강제가 가져오는건 정신적 곤혹이고 신앙이 상실될수도 있어요,신앙이 없으면 진실한 말을 할수 없게 되고,진실한 말을 못하는 데 어떻게 신앙이 있을수 있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무엇을 신앙한다 하지만 그건 가짜지요! 우리 사회 시장에 그렇게 많은 열악한 가짜 제품이 넘쳐 나는것이 다 도덕위기의 표징입니다.    이런 신앙위기,도덕위기를 극복하지 않는 한 사회나 국가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세계민족에서 존중 받을수 없습니다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화제는 많지만 다음 번 대담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것으로 맺겠습니다.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대담자 소개 진휘(秦晖).1953년생,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역사학자,경제사학자,농민연구자,평론가. 1981년 란주대학 석사 졸업,섬서사범대학을 걸쳐 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교수 주요저작으로《农村公社,改革与革命》《问题与争议》《共同的底线》《走出帝制》《南非之魂》《陕西通史》《田园诗与狂想曲》등 30여부가 있음.
15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사엽신 김문학] 댓글:  조회:3486  추천:45  2018-10-03
”33의 신사유”시리즈 대담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사엽신( 沙叶新)+김문학   사엽신( 沙叶新)     0.들어가면서       삶이란 아쉬움(유감)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만나고 싶은 사람과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나는 아쉬움, 회한 같은것이 그렇다.       내가 대륙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명사중에 사엽신(沙叶新 )선생이 그 중의 한 분이다. 서로 만나자고 수차례 별렀지만, 결국 전화에서 통화 몇 번으로 끝난 우리의 아쉬움은 과연 회한이 되여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2014년 봄 상해의 친구를 통해 작가 사엽신선생과 연줄이 닿았다. 우리는 전화를 통하여 서로의 정을 나누기도, 문화적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사엽신선생은 내가 80년대 일본 유학전부터 잡지를 통해 알고 있는 극작가, 수필가였다.       연극 《내가 만약 진짜라면》《진의 시장》《예수, 공자, 레농》등은 중국 문단과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 그는 《진짜 남자대장부를 찾아서》등이 영화, TV연속극으로 방영되면서 전국민의 마음을 진감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특히 내가 90년대 중반 그의 연극본 《예수, 공자, 레농》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오늘도 새롭기만하다.      반골정신, 기지로 번뜩이는 유머와 풍자, 그리고 많은 고정관념을 짓부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대륙의 일류 지식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재질은 물론, 진실을 말하는 지적 용사, 정의감으로 충만된 지식인의 양심적 본보기로 나는 사선생을 내심으로부터 숭경해왔다.      그런데 그의 암질환으로 수차례 수술과 입원, 통원을 거듭하면서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2018년 7월 26일 아침, 사선생은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못다 하신 일을 저 세상에 가셔서도 계속 하시리라 나는 믿고 싶다.      별세후, 장황한 추도회, 추모모임을 못하게끔 하시고, 그냥 일가 친족 8명으로 구성된 간단한 영결식으로 끝나게끔 자식들에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아들의 위챗을 보니 그렇게 간소하게 영결식을 차렸다고 한다.하늘나라로 가신길도 그렇게 사선생 다웠다.      이제 남은건 우리가 사선생의 유지를 이어 받아 어떻게 진실을 말하면서 정의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과제뿐인가 한다. 이 또한 모든 지식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지금 내곁에는 사선생의 사인이 박힌 저작이 남아있다. 요즘 그의 저작을 재다시 찾아 읽으면서 감회가 또한 새롭다.      쟁쟁한 철골(铁骨)의 문사 사엽신! 진실을 감히 말하고 권력과 고루한 관념과 맞서 저항한 코먼센스적인 정신은 우리의 귀감으로 남아 있을것이다.      불굴의 문사 사엽신, 그는 어떤 말을 남겼을까? 사성생에 대한 추모와 정을 안고 대담을 정리 해 본다. 이 대담은 2014년에서 2016년에 걸쳐 수차례의 전화대담을 간추려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1.당대 중국의 쉑스피어   김:서양문화의 쟝르로서 연극은 중국에서 뿌리박은지 약 100년이 좀 넘습니다. 연극 100년사에서 노사( 老舍),곽말약 등 거물이 나왔지만, 신시기(문혁이후)에 배출한 연극대가는 사선생과 고행건(高行健 )을 비롯한 극작가를 꼽을수 있습니다. 1980년 1월 당시의 현명한 지도자인 호요방은 선생님의 극본을 격찬하면서 “당대의 쉑스피어”라고 높이 평가했지요.   그럴만도 합니다. 선생님의 《진의 시장》은 중학교 교과서에 올랐고, 특히 그 걸작이라 불린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과연 중국인의 심금을 울린 메가톤급 문학미사일이었지요. 근데 그게 나중에 공연금지로 되고 그게 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잖습니까? 이 얘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사: 아마 《진의 시장》과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통해서 내가 전국적인 극작가로 선보인것 같습니다. 《진의 시장》은 유머스러운 진의 시장의 인간성을 표현했기에 정부로부터 “우수극본상”을 수상했지만,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반대로 불운했어요.(웃음)   1979년 상해에서 실지로 있은 청년 사기꾼이야기입니다. 이 사기꾼은 고위간부의 자제로 둔갑해서 교묘하게 사기를 쳤는데 이 소재로 내가 79년 여름에 연극대본을 창작했어요. 이건 특이한 연극이였어요. 문혁이후 최초로 간부의 특권을 폭로, 풍자한 연극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송가만 불러온 전통속에서 이런 신선한 풍자극이 나오니까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됐지요. 일단 상해에서 공연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공연이 파급되였는데, 치열한 평론이 벌어졌고 1981년에 상급으로부터 “공연금지”령을 받았습니다.   김: 자료를 보니까 호요방까지 이 쟁론에 뛰어들어, 사선생님을 긍정하셨습니다.   사: 그래요! 1980년 1월부터 2월까지 “극본창작좌담회”가 개최됐는데, 나의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첫머리로 토론이 전개됐습니다. 당시 화약냄새가 농후했는데, 2월 13일 호요방동지가 무려 6시간이나 장편 강화를 하셔서 작가에 대해 꼬깔모자를 씌우는 문혁식 작법을 금지하고 문예작품에 대해서도 예전같은 죄명을 덮어씌우지 않는다고 명언했습니다. 역시 현명한 호요방 동지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1984년에 중국작가협회 입회할 때, 일부 노년 우파세력의 극력적인 반대를 받았지만, 파금(巴金) 등 거물들의 추천으로 무사히 입회했고, 또 내가 입당할 때도 호요방동지의 “사동지는 입당조건에 부합되므로 입당해야 한다”는 친필추천으로 스무드하게 입당이 되였답니다.   김: 과연 호요방 총서기는 문혁이후 보기드문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명한 인물이 우리에겐 축복이지요, 2001년에 사실 저도 《조선족 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족 내부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문혁식의 중상과 비방을 받았어요! (웃음) 그러니 조선족의 의식은 중국 일반보다도 20년 낙후하다고 전 생각듭니다.   2.왜 시대의 양지(良知)가 필요하나? 사: 조선족 지식인에 그런 엉터리 지식인도 있나요?!(웃음) 그것도 문혁이 수십년이나 지난 지금에, 지식인이 정치 몽둥이를 휘두른다는건 문혁수준으로 회귀한거를 말하지요. 당정 간부가 그런 짓을 했다면 몰라도 지식인이 그런 우둔한 짓을 한다는건 시대의 비극이고 후퇴지요!   김: 그러게요! 그래서 전 그런 수준이하의 인간들을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자중균( 资中筠)선생도 사고차원이 다른 인간과는 아예 상종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사: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 보다는 그 시간으로 글쓰고 독서하는 일에 몰두하는게 퍽 현명한 처사지요.   김: 네, 《만약 내가 진짜라면》의 극본을 지금 다시 읽어 보았는데요. 여전히 지금의 시대에도 시효가 떨어지지 않았단 느낌입니다. 사기꾼의 행각을 통해 사기꾼에 편의를 도모해준 중국의 관료주의, 부패에 대해 79년에 이미 신랄한 비판, 풍자를 했네요.   사: 지금처럼 유행하는 “부패”란 단어는 안 썼지만, 내가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고관의 “특권”문제와 체제의 병폐에 대해서 풍자를 했어요. 물론 여전히 미숙한 점이 많지만, 난 지식인은 시대의 양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을 지니고 용감하게 문학예술을 영위해야 하는바, 이 용감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용감하게 광명을 구가하고 또 하나는 용감하게 시대의 폐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3.권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   김: 사선생님의 명언중에 “권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명구입니다. 아마 모든 비판정신과 독립품격이 있는 지식인, 작가라면 다 이 말씀에 공감할 겁니다.   사: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사람마다, 작가마다 답이 틀릴 겁니다. 명리, 금전 또는 교만으로 승급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그냥 낙으로, 또는 정서배설을 위해 글쓰는 자도 있을거지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젋었을 때는 중국 전통문예관의 영향으로 문장경국지대업(文章经国之大业 )이란 “숭고”한 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시기는 모택동의 문예사상인 정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도에서 모택동의 추수기의를 노래한 연극을 쓰기도 했어요.   그러나 개혁개방후, 나는 완전히 탈태환골을 했어요. 우리는 현재 모택동시기를 탈출하여 다원적인 전민주사회( 前民主社会)에서 살고 있지요.   문학예술이 정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시기는 지났고 현재는 권력에 대한 조롱, 풍자와 비판할 수있는 시대이지요.   물론 내가 여기서 얘기하는 권력이란 국가권력을 독점한 독재, 전제권력입니다. 중국은 바야흐로 문혁과 같은 전제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전제주의사회에 들어 섰으며, 글쓰기 역시 권력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김: 그렇지요! 정치와 권력에 곡학아세하는 지식인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인간이나 글쓰기는 만인이 침뱉는 존재로 된지도 오라지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권력의 폭력같은 지배에 맞서서 저항하는 인간이야 말로 진짜 인간이고 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 그래요. 권력이란 원체 부패, 우매, 잔인등으로 직결돼 있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럴진대, 한 작가가 권력을 위해 글쓰기를 한다면 그건 영낙없이 부패, 우매, 잔인을 위해 자원적으로 봉사하는거지요. 만약, 핍박에 못이겨 그렇게 했다면 리해할순 있지만, 자각적으로 그랬다면 그건 원흉을 방조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김: 지식인가운데도 아까 말씀 드렸지만 자각적으로 정치 몽둥이로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을 잡으려 하는건 더 추악하지요!   사: 그럼요! 그런 자가 더 잔인하고 우매하고 부패한 “권력의존”의 추악한 인간입니다. 중국에 이런 자가 너무 많아요. 문화대혁명 때 그런 지식인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권력에 아부하여 대신 사람잡고 밀고하고 온갖 추행을 맡아서 했잖습니까?   4.문혁전에 요문원을 질타한 청년   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해야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사선생님은 대학 졸업후인 1961년에 대좌파 문인으로 유명한 요문원( 姚文元)의 문장을 비탄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 때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사: 1957년에 화동사대 중문계에 입학하여 소설 둬편 써서 교내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더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1961년 대학 졸업후 상해 희극학원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 쓴 논문 《审美的鼻子如何伸向德彪西 - 和姚文元商榷》입니다.   그 때 당시 아직 ”4인방”이 형성되진 않았지만, 요문원은 지식계의 대좌파 인물이므로, 그와 맞서서 비판 한다는건 권세있는 유력자를 건드린 셈이 되지요.(웃음)   김: 대단하십니다. 젊은 나이에! (웃음) 두렵지 않았나요?   사: 두렵긴요! 학술적인 비판인데요 뭐, 그 뒤 문화대혁명중 요문원은 그야말로 청운직상(青云直上)으로 권세를 자랑했으니, 내가 그를 질타한 죄명도 갈수록 커졌지요. 날 보고 문화대혁명직전에 무산계급의 사령부를 포격했다는거예요.그때는 입이 열개 있어도 변명, 하소연 할 길이 없었습니다. “4인방”이 무너진 다음, 동일 사건이라도 평판이 전혀 달라졌지요. 삽시에 문화대혁명전에 벌써 “4인방”을 무찌른 영웅으로 되였습니다.(웃음)   김: 죄인에서 일약 영웅으로 되셨네요! (웃음)   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4인방”의 박해를 받은 것만 시인하고 자신을 “4인방”과 용맹히 싸운 영웅으로 분장시키지 않았어요.     5.가장 큰 고통은 거짓말을 한다는것 김: 문화대혁명시기 사선생의 극본 《边疆新苗》가 비판을 받았지요?   사: 당시 문화부 부장이였던 우회영(于会泳)과 상해시위 문교서기였던 서경현(徐景贤)이 직접 내 이름을 지명하여 ”3돌출(三突出)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판했어요. “사회주의 문예의 근본임무”를 위배했고 , “사엽신의 심미적 코(鼻子 )는 또 자산계급으로 향했다”고 질타하면서 상해문화계층의 비판대회를 소집하여 나를 비판했습니다.   시초에 나는 심중에 불복했고 변언문을 써가지고 반항하려고 작심했어요.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암석에 계란던지는 격이라 부질없다고 생각이 들어 자기 반성문을 써서 굴복하는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어요. 고통스러웠던 것은 반성문을 쓴 것이 아니라 핍박으로 가짜반성, 거짓말을 한거예요.   김: 이해할만 합니다. 반골정신의 덩어리인 사선생님의 인격이니까.   사: 난 고통스러워서 정신이 분렬되고 붕괴될 듯 했어요! 그때로부터 난 절대로 거짓 반성과 거짓말을 안하기로 결심했어요. 쉽지 않지만 나는 내 양심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고 지금도 그렇게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제하에서 물론 때로는 적당한 타협도 자기를 살리는 지혜이긴 하지만, 하나의 원칙, 하나의 라인이 있는데 절대 거짓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김: 카뮤의 말이 생각납니다. “작가는 지극히 고귀한 존재로서 영원히 두 가지 간난한 개입중에 서있다. 거짓말을 거절하든지 핍박에 반항하든지”.   사: 지식인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도록 핍박하는 겁니다. 과거 여러차례 정치운동 때 많은 지식인들이 그 고통에 못견뎌 자살한것은 육체적인 고통도 있겠지만 중요한 요인은 내심적 심리적 고통때문입니다. 이게 우리 나라 전국민, 전 사회가 거듭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무서운 일이 재발하지 못하게끔 하는겁니다.   6.왜 비판이야말로 지식인의 성스러운 사명인가?   김: 지식인이란 개념이 중국에서는 체제를 위하여 해석하고 사탕발린 소리를 하는 식으로 오해 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한데, 기실 “지식인”이란 그 체제를 비판하고 편달하는게 일입니다. 사선생님의 “지식인”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어요.   사: 김선생의 말에 나도 찬성입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진짜 “지식인”은 사상자에 비판자이고 또한 반역자, 반골자로서 과감히 체제에 NO라고 말할수 있는 인간이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류의 기본 준칙이고 정의, 민주, 자유, 독립을 수호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나라 일부 지식인, 작가, 학자를 포함해서 자신을 위하는 글쓰기를 하는데, 그건 마치도 여러사람앞에서 자위하고 섹스를 하는 추태와도 같아요.   작가가 대중의 속된 스타가 돼버리면 그냥 속물로 전락되고 맙니다!  TV 대중문화의 범람으로 지식인이 변두리로 밀려났다고 해도 나는 지식인의 성스러운 사명은 여전히 체제와 사회의 병페를 비판하고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김: 과연 탁견이십니다. 지식인이 권력과 금전에 곡학아세하고 나팔수로 된다면 지식인의 비극일 뿐만아니라 그 민족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사: 그래요. 지식인은 나발통, 거짓말쟁이가 아닌 쟁쟁한 철골(铁骨)을 갖추고 독립적인 품격과 자유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이란 풍격을 가리키는데, 천마가 하늘을 날듯 구애없이, 부귀와 권세에 의거하지 않고 노예나 도구로 되지 않는 것이지요. 자유란 사상을 가리키는데, 과감히 사고하고 말하고 과감히 사랑하고 증오하는 겁니다.   오늘의 지식인은 많이 추락되고 정신적 난골증에 걸렸어요. 우리 나라엔 로신도, 유고도, 채원배도 없습니다. 이런 쟁쟁한 지식인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 아쉽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7.낙화생 향기속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 김: 정말루 좋은 말씀이십니다.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사선생님의 가족과 교육환경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회족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어릴 때부터 문학을 즐기셨다고 알고있습니다.   사: 난 남경의 회족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문화정도가 낮았고 뭐  로동인민이라 해야 맞겠네요. 회민식당도 해보고 볶음음식( --호박씨, 땅콩, 해바라기씨 등을 볶은것)점도 차려보고 또 남경에서 좀 이름난 징반(京板)오리 회사도 경영했습니다. 그래서 2층짜리 집 두채도 갖고 있었으니, 중국사회 각계급의 분석리론에 따르면, 아마 소형자산계급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요(웃음). 지금 시체말로하면 사인기업이고 입당의 대상이 되겠습니다.   김: (웃음)그러네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네요.   사: 울 아버지는 내게 자유방치 정책을 실시했는데, 장차 커서 뭐가 되든 상관없다는거에요. 다만 성실한 인간이 돼야 하는바, 불의의 재산을 넘보거나 불의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교육하셨지요. 어머니는 전형적 현모양처로서 자상하고 착한 녀성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준 영향은 간고분투였고, 어머니가 준 영향은 착하게 모든 것을 리해해야 한다는 것이였어요. 난 지금도 울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이쁜 사진을 내 돈지갑에 소중히 간직하고 다닙니다.   김: (웃음)대단한 효자시군요! 근데 문학은 어떻게 좋아하게 됐습니까?   사: 우리집에서 경영하는 복음음식점에서는 낙화생, 해바라기씨를 포장하는 포장지는 거의다 낡은 책페이지나 신문지를 썼습니다. 그 포장지는 많은 고전적 작품이였어요. 보세요. 《鲁迅自选集》,《巴金自选集》이나, 현대 작가의 작품이였지요. 거기엔 심종문, 빙심, 영성도 등의 작품이 들어 있었거든요. 낙화생 향기가 풍기는 포장지를 나는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현대 문학명작들은 거이 다 볶음음식점에서 읽었답니다. 그러니 지금도 난 책만 보면 자연히 낙화생, 해바라기씨의 향기를 맡을수 있습니다(웃음)   김: (웃음)낙화생 향기속에서 탄생된 문학소년이시군요! 본격적으로 문학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8.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다.   사: 사실 난 좋은 학생이 아니였어요! 매우 까불고 장난끼가 심한 소년이였으나 악의는 없었어요. 초중에서도 난 역시 좋은 학생이 아니고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때 남경의 金陵饭店뒤에 난전시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헌 책도 팔고 사주팔자도 보고 만담도 하고 대중문화를 알수 있는 좋은 장소였습니다.   난 거길 자주 가보면서 기층 중국문화와 접촉하고 영양분을 섭취했어요. 초중졸업전에 내 생명사에서 큰 사건이 돌발했어요!   김: 큰 사건이라니요?   사: 뇌막염에 걸린 거예요(웃음) 여름에 나와 전혀 생면부지의 모기 한 마리가 물어서 급성뇌막염에 전염됐지요. 그뒤 내가 문화대혁명시기에 타격을 받을 때마다 난 그 얄미운, 나를 박해한 모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김:(웃음)모기가 인생의 첫 박해자군요!   사: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입원시 한 이쁘장한 간호원 누나가 나를 잘 보살펴 주었는데 그때 푸쉬킨의 동화시집을 선물해주었어요. 그때 나는 그녀에게 “난 살아서 책을 많이 읽을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병으로 하여 나는 생명의 진귀함을 깨달았습니다. 뇌염은 당시 99% 사망하고 생존율이 1%밖에 안되였으니     9.문학에 대한 긍지감 김: 그때의 병환으로 인해 살아서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겠다고 작심했군요.   사: 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게 된 것은 고중2학년 때 부터지요. 누구나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고중2학년 때 안휘성에서 오신 국어과 선생  무(武)선생을 만난게 내게 복이였어요. 무선생은 생동하게 가르쳤는데 중국문학, 특히 고전문학의 숭고함과 미를 우리에게 가르쳤어요.   난 그때 중국인으로서 행복감을 느꼈고 이처럼 풍부한 중국고전문학의 유산을 향유할 수있다는 데 긍지감을 느꼈어요.   김: 그때 사선생님 소설 쓰시지 않았나요!   사: 우리반에 그때 나이가 나보다 위인 두 동창이 있었는데 하나는 왕씨(현재 강소성화극단 편집)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웃음). 그때 왕씨가 북경의 《인민문학》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고 또 전국 아동문학 1등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극을 받은 나는 너희들이 하는데 내가 왜 못하겠냐는 배짱으로 소설을 습작했어요. 결국 《雨花》의 전신인 《江苏文艺》에 내 처녀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상해의 《萌芽》문학지에 시 두편을 발표했는데 그 때 내 나이가 15살이었지요. 나는 자신을 작가라 생각하고 스스로 뿌듯이 느꼈어요. 그런데 왼걸 작가의 길이 이리도 험난할 줄 뉘가 알았겠어요? 일생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줄. (웃음)   김: 대학에서도 계속 소설을 쓰셨지요?   사: 아까 말하다시피 화동사대에 입학하여 대학 2년생 때 《맹아》잡지에 소설 두편을 발표하고 화동사대에서 “유명인”이 돼버렸잖아요.(웃음)   10.왜 유머는 하나의 파워인가?   김: 사선생님의 극본이나 소설, 수필, 잡문에는 비판성, 풍자성과 아울러 도처에서 해학적인 유머가 매력적입니다. 중국문학사에서 로사의 작품이나, 진종서( 钱钟书)의 소설 《围城》에 늘 기지로 넘친 유머가 있는데, 사선생의 유머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어 독자의 웃음주머니를 풀어줍니다.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어러 번 해왔지만, 늘 전화에서도 순간순간 유머가 있어서 즐거웠지요. 유머는 일종의 기지와 재치, 지혜라고 보는데 서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 그래요. 유머는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는 능력인데, 사물본질의 모순을 통찰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희극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실현시킨 인간의 재질이고 파워입니다.   활달하고 흉금이 넓은 인간만이 유머, 고차원의 유머를 만들 수 있어요. 난 아직 익살(俏皮)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의 명함에 적혀 있는 문자가 넘 유머러스했어요.(웃음)   사: 아! 그 “ 少十斤“이란 문구요. 내 이름이 沙叶新이니까. 매 글자의 왼쪽 편만 따면, 少十斤이니까요!(웃음) 그러니 내 이 사람은 분량이 별로 없어요. 절반만 깎아버렸는데도 10근이나 축 났으니까요. 그러니 내 분량은 전부해야 20근밖에 안되요.   김: (웃음)오른편은 少十斤인데, 그럼 왼편은 어찌됩니까?   사: 그건 좀 쑥쓰럽내요. 亲三口이니까요! 그러므로 나란 사람은 성명에서 보면, 하나는 분량이 가벼운 거고, 중후하지 못하지요. 또 하나는 너무 친절하여 늘 사람과 대면하면 곧 세번이나 뽀뽀를 하니까, 물론 너무 뽀뽀해도 안 좋은거죠.(웃음)   김: 그러네요! 선생님의 《阅世戏言》을 읽으면 마치도 희극을 읽은 듯이 자꾸 웃어야 되는데, 선생님의 희극작가적 직업과 관계 되는건가요?     사: 나는 천생 희극을 좋아하고 내 극작에도 희극이 많지요. 《내가 만약 진짜라면》《남자 대장부를 찾아서》그리고 《공자, 예수, 레농》도 다 희극이 아닙니까. 정극을 쓴다해도 난 늘 해학과 유머를 자연 섞어요. 《진의 시장》에도 익살이 많이 들어있지요.   유머란 DNA와 괸계 되겠지만, 여전이 후천성적인 양성이 주되겠지요. 교양과 흉금이 있어야 하지요. 유머는 교양, 지혜,문화, 정신, 그리고 관용, 리해, 선량, 사랑 나무에서 꽃피고 맻히는 열매입니다.   협애, 자사자리, 잔폭, 독재한 사람은 유머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머의 소재로는 되겠지요.(웃음)   11.진실. 유머. 용감의 리정표   김: 선생님 극작가운데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공자, 예수, 레농》입니다. 이 작품은 대만의 거물작가 백양(柏杨 )선생님의 대륙기행에도 대서특필로 소개했는데 그 책을 읽고 다시 원문으로 읽었습니다.   과연 유머로 찬 희극이었어요. 황당한 형식으로 현대의 상황을 표현한 게 재미있었습니다. 고금동서의 유명인물들을 집합시켜서 서로 담론, 교류, 격돌시키면서 인류사회의 만연하는 배금주의, 독재주의를 풍자하였습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사악을 제거하고, 령혼을 순결화하며, 사상을 단정히 하는 “테제를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대 연극문학의 획기적인 거작이 아닐수 없어요!     사: 감사합니다. 내가 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극작품을 창작해왔지만, 역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공자, 예수, 레농》이예요.   80년대 말에 내가 이 극본을 몇년이나 집필했는데, 참 힘 들었어요. 그때 난 이 연극본을 완성할 수 있다면 암증에 걸려도 후회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08년에 위암이 발견되여 수술하기도 했으니  (웃음)   내가 위안을 받은건 08년에 나의 이 작품이 《중국당대문학선집》에 입선되고, 국가교육부 중점추천의 대학교중문전업교재로도 선정된 겁니다. 정말루 난 이 작품을 사랑합니다.   김: 선생님의 몸에서나 작품에서나 우리는 당대 중국지식인의 전범(典范 )을 보았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유머를 통해 사회인간의 폐단을 비판, 풍자하는 재질, 그리고 자신의 량심을 지키면서 과감히 사상을 실천하는 용감한 행동력, 이런 것들이 다 중국 지식인, 문학인의 하나의 리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사: 과찬입니다. 김선생도 비판성이 있고 비교문화론적 통찰력이 있는 젊은 지식인으로서 동아시아적 의미적 지식인이지요.   나는 지식인이란 본연적인 사상자, 비판자, 반골자로서 감히 NO라고 말하고 정의와 진리, 독립을 추구하는 실천자로서 조금이나마 중국사회에 힘을 보탠다면 한이 없겠습니다.   12.고독이란 이름의 행복한 길 김: 선생님은 중국 연극문학에 큰 공헌을 했을 뿐만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쉽게 할수 없는 양지(良知)를 공헌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우기 지식인의 본보기로서, 독자와 대중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는 유니크한 인물로 중국문학사에 명기 되었지요.   자신의 걸어온 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 난 다른 재간이 없습니다. 평생동안 필을 들고 평생동안 줄곧 사고를 해왔지요. 연극의 방식으로 진실을 남겨서 젋은 후대들에게 알려주는 게 내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안 하고 진실을 말하고 사회의 폐단을 비판하는것이 내 큰 사명이기도 했어요.   내가 이날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한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에 한평생 매달려 일에 쫓기는 인생도 많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망하던 작가로서 살아갈수 있었으니, 난 누구보다 행운이라고 느껴요.   내가 영화에도 출연해보고, 연극창작하면서 상해인민예술원 원장직까지 지녔지만, 탐관으로 변질하지 않고 퇴직할수 있어 다행이지요.   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사: 글쓰기로 평생 고독하지만 좋하서 하는 일을 할수 있는 자체에 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일이나 봉변에도 태연할 수 있었어요. 2008년 위암을 검출해내고 수술을 직면했을 때도 난 태연자약하게 롱담을 할 수 있었지요.   위제거 수술할때 의사에게 “게는 무장공자( 无肠公子)인데 내 위를 다 제거해버리면 난 무위문인(无胃文人)이 되고 마니까 웃끼지 않아요” 그래서 1/4위를 남겼어요.(웃음)   위가 거의 없지만 나는 두뇌와 두 손은 건전합니다. 사고하고 글쓰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요!   내는 다시 태어나도 작가를 택할 겁니다. 진실을 기록하고 세상의 병을 비판하는 필을 날릴 것입니다. 작가의 글쓰기, 행복한 인생길입니다. (끝)       대담자 소개 사엽신(沙叶新) 1939년 남경에서 출생, 회족. 중국 당대 가장 정의감과 비판성이 있는 연극작가, 수필가.   1957년 화동사범대 중문계 입학, 1963년 상해희극학원 대학원 졸업, 동년 상해인민예술극원 편집.1985년 ~1993년 동 원장, 주요 극작품으로 《假如我是真的》《陈毅市长》《孔子.耶稣.披头士列农》《寻找男子汉》.   “중국의 쉑스피어”라 불리면서, 늘 당대 연극사에서 실험적인 희극으로 연극문학계의 선봉으로 활약 함.그리고 비판성, 유머성으로 지식인 전범(典范)으로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거듭남.   2008년 위암 수술후 건강악화로 고생하다가 2018년 7월 26일 별세.  
14    초인적인 '이단자'는 어떻게 문학을 하나? [잔설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155  추천:42  2018-08-01
 문화대담  초인적인 “이단자”는 어떻게 문학을 하나?   잔설(残雪)+김문학     0.들어가면서   잔설(残雪)은 당대 중국문단의 빛나는 “이단자(异端者)”다. 그녀의 이름은 항상 카프카와 나란이 연결돼있으며, 중국 문학의 카프가, 또는 미술로 말하면 피카소와 비견되는 여류작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작품의 양과 질을 감안할 때, 단순히 중국의 “카프카”가 아닌, 카프카를 초월한 특이한 초인간적인 “이단자”로서 잔설을 평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985년 혜성같이 등장한 잔설의 기이한 소설을 접한 때로부터 나는 이내 그녀의 팬으로 돼버렸다. 당시 80년대 중국문화의 황금시기에 출발했던 그 많은 기라성 같은 작가, 문인들이 도중하차하고 잠적을 감춘자들도 부지기수지만, 그녀는 이 “기괴한 소설” 한 길만 지키며 어느새 대가로 돼 당대문학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다.   난삽하고 기괴하며 스토리도, 인물도, 공간도, 지어 시간마저도 애매한 잔설의 작품은 대부분 현실주의를 신봉하는 작가와 독자를 따돌리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젊은 층과 지식층에 그녀의 열성팬이 만만치 않으며, 특히 미국, 일본 등 해외에 팬층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여, 그 작품의 신기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세계에서도 좀처럼 없는 기재(奇才)"라고 격상한 왕몽(王蒙)의 말은 틀림없다.   그런 잔설은 중국 당대문단과 거래를 단절하고 매일매일 소설과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으며, 거이 외부인간과 만나지 않는걸로 알고 있다.   마침 잔설의 오빠 등효망교수(유명한 철학가)와 내가 친한 외우이기도 했던덕으로 잔설(본명 등소화,邓小华)과 이내 연락이 닿았고 또 재빨리 만나게 되였다.   2016년 12월17일 오전10시, 북경 밀운의 자택에서 잔설과 남편 노용(鲁庸)씨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63세(1953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잔설은 소녀같이 천진하고 솔직한 내면세계의 여성임을 알수있었다. 방안에는 난방이 잘되여 있어 훈훈했지만, 그녀는 외출용 다운재켓을 착용하고 있은것이 인상적이였다. 오랜풍습병 고질때문이라고 웃으며 해명해주었다.   오빠의 친구이기도하고 또한 내가 일본에서 온 친근감때문에 잔설은 첫 시작부터 정열적으로 자신의 문학체험과 문학관을 주저없이 이야기 했다.   “김선생도 아시겠지만 일본에서 가장 먼저 내 소설을 번역소개했고 또 내 작품 평론을 쓴것도 일본 대학교수였지요!” 나는 이내 그녀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수있었다.   “콘도나오코(近藤直子)선생이 거이 잔설선생의 소설과 평론집을 번역 출간했고, 잔설선생을 중국의 카프카라고 높이 평가 했지요!”   “맞아요! 김선생 잘 아시네요.” 잔설은 천진한 소녀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대담은 어느 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으며, 점심이 되자 노용씨는 우리에게 푸짐하게 야채위주의 건강음식을 차려주었다. 남편은 작가 부인의 믿음직한 내조자였다.    평소 술을 전혀 못 한다는 잔설은 우리와 함께 캔 맥주 한 통을 같이 마셨다. 빨갛게 상기된 홍조로 인해 더욱 소녀 같아 보였다.   호남 방언이 섞인 잔설의 말씨는 그래도 알아듣기 쉽기도 했는데, 그의 이성,정서 및 말할 때의 제스처는 나로 하여금 그녀가 신 내린 무녀(巫女)로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 잔설의 소설은 바로 그 영적세계에 있는 초인간적인 여성이 발산하는 불가시적인 내면 정신세계에 대한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럼 잔설 본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1.문학을 철학처럼 하기   김: 오늘 잔설여사님을 처음 뵙겠습니다만은, 전혀 낯설지 않네요. 1985년 제가 대학 4년생때부터 기괴하고 음울한 멋이 있는 여사님의 소설을 접하고 열성팬이 된것도 있고, 또 요즘 오빠되시는 철학가 등효망교수로부터 자주 잔설씨의 얘기를 들어서 구면인듯 옛친구로 느껴져서 기쁨니다. 오늘은 잔설 누님의 (여러가지 호칭을 엇바뀌어 쓰는 내가 좀 이상한가?) 소설과, 작품론, 창작과 일상에 관해 많은 소중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잔: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오빠 효망한테서 김선생의 “귀재”얘기를 늘 들어와서 한번 나도 언젠가 만나고 싶었지요. 정말 바다건너 우리 집에 오신 귀중한 손님이니, 오늘은 친구가 돼서 마음을 열어놓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호탕한 웃음)   김: 잔설씨의 소설은 중국 문단에는 그누구도 없는 "문학을 철학처럼 하는", 그런 "철학으로 문학을 하는"특징이 돋보입니다. 소녀때부터 철학을 좋아 했고 또 오빠의 영향도 많이 받았나요?   잔: 맞아요!난 문학을 철학으로 영위하고있어요. 소녀때부터 철학과 문학을 혹애했는데, 내게 영향을 준 사람은 두분 계셔요. 한 분은 울 아버님이시고 또 한 분은 오빠 효망이지요. 두 분 다 우수한 논리성적 두뇌를 갗춘 지식인이시지요. 잘아시다시피 효망오빠의 영향이 관건적 영향을 했어요.   김: ”철학”을 여기서 “영성”으로 바꿔도 될것 같은데요?   잔: 네, 쉽게 말해서 철학이지만, 내실은 “영성”이지요. 환상, 몽상, 팬터지 등 일반에서 보면 기괴하고 난해하고 몽경 같기도 한 그런 언어로 소설을 써내고 있습니다. 평론가 정덕배(程德培)씨가 내 소설을 “꿈(梦)”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현실과 상대한 세속의 대안(对岸)에 있는 몽환같은것들을 나열하여 쓰고 있는게 내 소설이지요.   2. 철학가 오빠와 소설가 누이동생   김: 그러네요. 내가 보건데 오빠 등효망과 여동생 잔설(등소화) 두 오누이는 정말 절묘한 문화콤비를 이루었다고 봐요. 서로 철학과 문학을 흡수하면서 상부상조를 이루고있는데, 아마 이는 당대 중국문화계에서는 유례를 볼수없는 “풍경”이라 생각합니다.   잔: 효망오빠는 나를 제일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지지자이고 사상적 동반자입니다.(웃음) 오빠의 철학적 이론이 내 창작에 영항을 주었다면, 나 또한 창작으로 그의 이론을 지지한다고 해야 하지요.   김: 두분이서 대담집도 내시고하셨는데 참 오누이가 전 부럽습니다. 등효망교수가 펴낸 《残雪:灵魂的历程五》에서 국내최초로 여동생의 작품을 높이 평가 해주고 “당대 작가중에서 가장 일찍 자아현신(自我现身)적 신형인격을 건립함을 의식하고 그것을 건립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작가”라고 평가 했습니다.   잔: 효망오빠는 문학을 최고로 철학의 시각으로 평론하는 문학평론가이지요. 국내에서도 이런 평론가는 전례가 없습니다. 나의 기괴한 영혼의 환상소설을 이해할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우리 오빠 같은 학자만이 내 소설을 이해하고 평론할수있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내 작품을 진짜로 파악하고 평론을 쓸 수 있는 평론가는 아직 국제적으로도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 효망오빠가 내 소설을 해독할수있는 소수자의 한사람이고 아마 제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웃음)   김: 오빠는 철학을,누이동생은 문학을 하지만 두분다 사유의 혁명을 통해 인생의 깊은 심층구조를 파헤치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3.왜 나의 소설은 난삽하고 기괴한가?   김:  1985년 처녀작 《山上的小屋》로 부터 시작된 단편이고 장편이고 잔설씨의 소설은 기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것으로 일관돼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잔설씨의 소설을 읽는 일 자체는 문학연구자나 학자나 또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누구나 용기가 필요하고 인내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 누추하고 조잡하고 기괴하고 난해한 소설을 언어, 구성,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오리무중에 빠뜨리기 십상인데 왜 이렇게 난삽하고 기괴합니까?   잔: (웃음)그건 내가 영혼을 쓰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그런데 이 본래 볼수없는 불가시적인 영혼을 가시화시킨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 날까요?   당연이 누구나가 다 놀랄거에요! 한 사람이 잘 살고 있는데 누가 그 사람의 영혼속의 것들을 영화로 촬영하여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면 경악 할 건 불보듯 뻔하지요. 그러니 이런 영혼을 보이게끔 소설로 써내면 기이하고 불가사이 할거예요. 어쩜 이럴수 있단 말인가고, 그리고 사람에 따라 본능적으로 불결하다고 느낄수 있어요.   그러니 이런 불결하다든가 누추하다든가 하는건 다 세속적 시각에 비낀것이지요. 영혼은 세속적 인소를 배제하고 있으니까요.   김: 그러니까 세속화에 절은 우리 독자들이 덜 세속화된 영성의 세계를 처음 보게 되니까 난삽하고 괴이하게 보일수 밖에 없단 말씀이네요.   잔: 그렇지요!   김: 결국 독자들이 이미 익숙될대로 익숙된 열독전통, 서술전통을 뒤엎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잔설씨의 세계관, 가치관에서 기인되는 문제겠습니다만, 즉 세속의 대안(对岸)에 있는거겠죠!   4.나의 세계는 세속적인 세계와 대립된다.   잔: 맞어요! 내 소설이 인성의 여러가지 암흑면과 기괴한 음울한 면이 많다고 독자들이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지적하지만, 사실 이런 인식은 죄다 그들의 무지, 또는 인식차원의 미달로 비롯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무엇을 묘사했다고 여기는 자는 전혀 내 소설을 해독할 자격이 없는거구요! (웃음)   사실 내가 “무엇을 묘사하는게”아니예요! 내 세계는 여러분의 세속적인 세계와 대립되는겁니다. 이게 포인트거든요. 내가 있는 세계란 내가 원고지와 마주하여 내 “야망의 역량”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신세계이니까요.   김: 그러니까 잔설씨의 소설은 또 하나의 세속적인 세계와 대치되는 창조된 세계, 세속에 없는 초탈한 “영성의 세계”라 해야 겠군요.   잔: 완전 그렇습니다. 나는 어릴적부터 내게만 속하는, 방금 문학씨가 말한 그 영성의 세계서 살아왔어요. 그러니 난 이 세상 인간들이 다 익숙한 세계, 거기서 전개되는 속된 말, 대화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고 있었답니다.   김: 역시 반골적 소녀셨군요!(웃음)   잔: 네, 어른들이 이렇다고 하면 나는 굳이 아니라고 했어요. 내가 영위하는 세계는 내가 창조해내서 세속세계를 저항하는 거지요. 내가 기왕 이 세속세계를 이탈하여 살수없는 만큼이나 이 세속과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내 세계를 만들어 내는것, 이게 내 소설창작입니다.   5.“잔설 서술양식”   김: 나는 잔설씨의 소설을 반복적으로 열독하면서 잔설씨는 중국문단에서 매우 기이하고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유니크한 소설쓰기 양식(모델)을 창립해냈단걸 발견했습니다. 물론 제 말씀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전통적 열독습관이나 경험으로 당신의 소설을 읽는다면 소설의 스토리 전개, 작중 인물의 발전 등이 추측 불가능일 뿐만이니라 소설 언어의 어휘, 구절등이 끊어지고 연결이 결핍된 고립성, 그리고 인물사이, 사건사이, 행동사이에도 고립, 단층이 있어 난삽함의 미궁입니다. 따라서 미궁의 구조는 특이한 텍스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현실의 장면같아보이지만, 세부에서는 또한 철학적 내면 심층의 테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 인성은 무엇인가? 어떻게 왜 살아야 하냐? 철학적사고를 구체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 서술양식으로 이런 상징적 세계를 표현하기 어려우니까 잔설만이 있는 특수한 서술모델을 고안해냈다고 봅니다.   잔: 아하! “잔설 서술양식”이란 개념이 좋은데요!(웃음) 내 소설이 재래식 전통소설 서사모델과 전혀 틀린 이야기 구성으로 돼있고, 카프카와 같은 텍스트가 난해한것과 같이 내 소설도 난해합니다.   사실 영혼에 관한 이야기는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면 전통소설이야기보다 더 재미난걸 발견할 수 있고 구조도 기이하여 미증유의 미(美 )를 발견 할수 있어요. 중국 소설가로서 내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해독한 책을 펴냈는데 내 평론집을 보면 카프카의 묘미(妙味)를 터득할수 있게 되고 따라서 전통적 추리소설보다도 더 절묘한 이야기와 만나게 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진감을 느낄수 있을꺼에요.   6.카프카를 무색케 하는 작가   김: 카프카를 해독한 책으로서는 정말 일류에 속하는 책이라 평가합니다. 잔설씨는 자신에게 큰 영향 준 작가를 우선 카프카를 꼽고 일본의 카와바타 야스나리 등을 지목하시는데, 카프카의 소설《성》《변신》등과 비교하여 볼때, 나는 본인 앞에서 칭찬하는게 아니라, 이미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리 잔설씨가 카프카를 초월했다고 진지하게 평가 하고 싶습니다.   잔: 사실 나도 동감이에요(웃음), 자화자찬이란 빈축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직언하자면, 카프카 소설의 영역이 나보다 훨씬 좁고 인간의 부조리에 관한 사색은 좋으나, 이미 인성, 인간의 자아 등 여러 영역에서 나는 그를 넘어섰다는 자신감이 들어요, 세계적으로 나와 같은 소설은 전례가 없지요!   김: 과연 그렇네요! 카프카는 소설에서 어떤 이념을 불어넣은 건 아닌가요?   잔: 그건 후세 평론가들이 억지 해석이구요, 카프카의 작품이 철학적이념의 고차에 달할수있는 이유는 그의 사고에서 나온게 아니라, 사실은 내심의 정서적 누적에서 온것입니다. 내 생각에 현대주의(모더니즘) 소설은 즉흥적으로 써낸거에요. 《성》역시 완전히 즉흥으로 씌여진것입니다.   《심판》《변신》역시 간단한 철리를 끄집어 내기위해 그렇게 긴 글로 쓴거지요.   김: 잔설씨는 카프카보다 더 전위적이고 그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지요. 카프카 서술양식은 연결성이 있지만 당신의 소설은 연결성이 결핍된 상태로 모든게 고립되고 점(点)으로 되여 있어서 조약성이 있지 않나 생각 됩니다. 어떤 서양의 평론가가 잔설씨의 소설을 보고 “중국인도 이렇게 쓸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고  절탄했지요. 카프카보다 더 전위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는 거에요.   잔: 사실 아까 문학씨가 내 소설에 연결성이 부족하다고 얘기했지만, 내 작품엔 일관적 정서가 연결돼 있고 내가 쓸 때도 정서적으로 수미일관 같았답니다. 고립돼보이지만 정서로 관통돼 있어요.   내용으로나 서사양식으로나 언어로 보나 정말 나같이 소설을 영위하는 작가는 세계적으로도 나밖에 없어요. 난 이 점에 대단히 자부심을 갖고 있답니다.(웃음)   7.”신실험문학”이란 무엇인가?   김: (웃음)동감입니다. 그리고 당대 중국문학의 여러가지 사조, 기법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나왔는데, 잔설씨의 약 10년전부터 스스로 제기한 “신실험(新实验)문학”이란 개념이 신선했어요. 그건 잔설씨의 창작충격 그 자체와 연관이 있다 보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 상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잔: 나는 친한 장소파(张小波)와도 “우리의 문학”에 관해 토론을 했지만, 장소파씨는 우리의 작품을 “본질을 묘사하는 문학”이라 칭했는데 나는 나같은 부류의 특이한 문학을 “신실험”이라 자칭하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의 특징이 우리 부류의 작품중에 관철돼 있는바, 하지만 우리의 실험은 서양의 신소설의 텍스트위주의 언어적 실험과 상당히 이질적이지요.   김: 오, 서양의 신소설과 틀리는군요.   잔: 네, 나같은 소수의 작가는 중국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고집하면서 외부적으로는 고전 문학언어에 대한 존중을 보류하고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문학은 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역적(力的)인 나선형의 폭발로 발육되는건데, 이 합리성은 반론의 여지가 없으며 생명력은 추측할수도 없이 강하답니다.      왜 이 실험문학을 하게 되었냐면, 우리 자신의 정신적 억압이 너무 오래고 본능적으로 보복의 충동이 우리더러 민족의 거대한 잠재의식의 보물고에 잠입하게 했는데, 또한 이 보물이 처음으로 우리 자신에게 소유하게끔 했습니다.   김: 그러니까 자아의식이 강한 잔설씨에게는 모든 “외부” “외계”가 다 자신적 경상(镜像)에 불과 하다는 거겠죠!   잔: 바로 그거에요! 물론 나의 글쓰기는 서양 고전문학을 배운 기이한 과실이지요. 중국 신문학에 대한 포위망을 격파하는 그런 노력입니다. 그러니까 이왕의 중국 주류문학이 인성의 옅은 표층위에서 오락가락하는 관성을 격파하는 “새로운 실험문학”이 노린것은 핵심,본질입니다. 또한  “신실험문학”이란 자아에 관한 문학입니다. 즉 자신을 실험품으로 생명력이 얼마만큼 진부한 통념, 관념의 질곡에서 폭발할 수 있냐 테스트하는거지요.   이런 문학의 전망은 무한히 넓은것으로 전통문학의 협애성과 유치성을 포기하고 직접 인간성으로 승화되여 자신을 구하는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도달한 보편적 의의는 전례없는것입니다.   이러자면 자신의 영혼속에 들어가 영계에서 피비린 싸움을 벌여 종극적인 미( 美)를 걸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을 제단에 올려 놓고 전인류에게 전시하는 장거이지요. 난 이것으로 자호감을 느낍니다!(웃음)   김:  (웃음) 대단한 장거네요! 영혼의 격투속에서 미의 극치가 생출하는 문학, 과연 영성의 문학이군요. 그러니까 “신실험문학”을 “영성의 문학”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8.“자동적 서사”혹은 무당 같은 글쓰기   잔: 무방하지요!   김: 나는 어쩐지 무당이 신이 내려 굿을 하듯이 잔설씨같은 작가는 신이 내린 그런 작가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웃음),아닌가요?   잔: 무당과 유사성이 있어요. 나처럼 고난도(高难度)적 글쓰기는 모든 작가와 이질적인데, 조상의 유전성을 의존하면서 무술(巫术)적인 자동서사(自动书写)와도 유사하지요.   그렇다고 무술은 아닙니다. 이건 강대한 합리성과 공모한, 잠재의식심처에서 유발한 봉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이게 쉽지 않아요. 신실험문학, 또는 아까 문학씨가 제기한 영성의 문학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지극히 민감한 감각과 천재적인 강철같은 논리사유력이 구비되여야 하지요.   김: 그러니 일반 한다하는 대가적인 작가들도 범접을 못할 영적세계의 글쓰기군요!(웃음)   잔: 그렇죠. 또한 여기다가 서양문화 핵심적 내재반성의 힘이 가미해야 됩니다. 영혼에 대한 격투도 옅은 표층차원의 “자기비판”따위가 아니라 명상중에 암흑의 통로를 진입하여 내심의 지옥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 이계(异界)에서 안깐힘을 다하여 인성의 퍼포먼스(Perfomance)를 통해서 인간자신의 여러가지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매번 창작은 번마다 낡은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신을 탄생시키는 실험이지요!   김: 참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런 자신의 죽음과 신생을 이룬다는게.   잔: 물론입니다. 이런 창작이 고난도라고 했던 까닭은, 머릿속에 텅 비어있어 의거할데가 없는상태에서, 무중생유(无中生有)로 폭발시켜 자신을 구원하는 빛발을 생산시켜야 하니까요. 일반인에게서는 이런 신비한 방식이 불가사의로 보이지만, 사실 이런 방식은 가장 자연적이고 인성이 부합되는 방법이에요.   김: 그러니까, 작가가 오랫동안 자각적으로 이런 레슨을 거쳐야 되겠네요.   잔: 네, 그런 훈련을 통해 일종 심층적 은밀생활(심상)이 인간의 일상생활과 동재해야 됩니다.   김: 이런 신실험문학은 일반 작가의 실험소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다른 차원의 얘기가 되겠네요.   잔: 그래요.马原、洪峰、王蒙、莫言등 신시기 소설의 선봉자와는 차원이 틀리지요. 이들은 표층인성에서 표유하지만, 나는 심층 인간의 내면 영혼을 쓰니까요. 내게 글쓰기는 예술지상의 경향이 있고, 예술에 대한 경민도는 중국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수도 없답니다.     9. 왜 중국문학에 고전적 명작이 못 나오나?   김: 어떤 외국 평론가가 지적하기를 “잔설에게는 두개 영혼이 있는데 문학적 영역에 나타난 귀신적인 영혼과 세속중의 일반인과 별 다른게 없는 영혼, 이 양자가 분리된 상태”라고. 이런 분리를 통해 영적인 글을 쓰는게 이해가 됩니다.   자, 그럼 화제를 돌려서 당대 중국문단, 문학에 관한 솔직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잔: 중국 당대 문학, 솔직이 고백하면 유치하고 자아가 결핍하고 공리성이 강하고 또한 정치색채가 많은게 흠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표층현실을 초월하여 심층의 내면세계,자아의 세계, 그 수수께끼같은 세계를 발굴하는 영혼의 문학, 심성의 문학이 순문학에조차도 보이지 않지요. 나같은 작가는 아직 극소수자이고 아직 이해자가 적습니다.   김:  이건 중국의 문화전통의 힘이 너무 강대하기 때문인가요?   잔: 그래요. 그런 전통의 토양에서 육성된 문학은 독자적으로 인간성탐색의 사명을 짊어지기엔 너무 역부족이고, 그런 힘이 모여도 결국 와야 할 이성의 광(理性之光)을 차단해버립니다.   그러니 당대 중국문단에서 미래에 영구히 남을 고전적명작이 나오기엔 너무 실망적이예요. 우리에겐 민족문화에 대한 교양이 부족하고 순문학이 박약하지요. 그런 “민족성”과 “세계성”에 관한 의논이 자주 나오지만, 이런 용속적인 테마자체가 하품이고 옹졸하게까지 느껴져요.   그러기에 이런 의논보다는 우리에게 필요한건 원대한 흉금과 기백, 생명,인성, 독립에 대한 집착과 문학자신에 대한 자신감이지요.   10.중국문학의 집단성 퇴보, 그리고 자비(自卑)감   김: 그래도 근대 《홍루몽》이나 당대의 가평요, 막언, 여화 같은 명작가들이 나타나지 않았나요?   잔: 예전에도 어느 글에서 언급 했지만 ,《홍루몽》이 삼라만상을 썼지만 인물의 자아의식은 여전히 표층적에 머물렀고 인간의 아동시대에서 답보하고있으니 서양과 같은 성숙과는 거리가 멀지요.   자아적 격투에 상승되지 못한채 아동적 유치성에 정지돼있어요. 그러니 이 문화속에서 자란 나는 이 문화의 결함을 비판하지요. 우리가 성숙해야 하니까요. 문학자들마저 아동기에 머물러있으면 말이 됩니까.   김: 잔설씨는 자아의 영혼의 시각에서 중국문화에 대한 비판도 잔설적입니다.   잔: 중국문학속에 잠재된 최대의 결함이 유치성, 아동성이예요. 아동의 경계에서 벗어나 성숙되어야 되는데 말이에요. 특히 남성작가들이 더 해요. 물론 내가 여성이니까 그게 보이지요. 거이 낭만주의, 현실주의 그런 수법으로는 자기반성이 높은 수준에 달하기 어럽지요.   김: 재밋는 지적이네요!   잔: 80년대 余华、苏童 등이 좋았지만 40이 넘으니까 후퇴해버려요. 莫言도 40살이 넘으니 신창작 그런 탐구보다도 자기 답습상태에서 정지됐어요.   말하자면 중국문단의 집단적 퇴보, 그런거지요! 그리고 모두가 중국전통문화에 회귀해야 유일한 출로라고 생각해요. 우리 중국것이 다 서양, 외국것보다 우수하다 이거예요. 우리 조상의 우수성을 발굴하여 발양광대(发扬光大)하면 세계문학을 다 정복한것처럼(웃음).   그러니 문단의 남성작가, 평론가들은 대부분, 나의 글쓰기에 대해 아니꼽게 보고 있습니다.(웃음)   서양문학의 그런 “인간”의 문학만이 문학이고 우리의 문학은 “아동적문학”이라 질타하니까. 그들이 반발하는거에요(웃음)   김: 내가 우리 조선족문학의 수준이 50점도 안된다고 꼬집었는데 그것과 유사하네요(웃음)!   잔: 그러니 결국 그들이 자비(自卑)하고, 흉금이 좁은거지요. 이 문화속에 안주하면서 뭘 수호한단말입니까! 지킬 수 있나요? 문화가 지킴으로써 신생을 얻을수있나요? 왕몽이 이런 선전을 잘하는데 뭘 수호하자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그의 관념중엔 진정한 반성이 없습니다.   김: 잔설씨가 중국 주류문단과 거래를 안하는것도 차원의 차이기 때문입니까?   진: 그래요. 주류가 어디 진짜 순문학을 하는겁니까? 난 중국작가협회주석이 큰 모임행사에 나와 달라고 초청한것도 한마디로 거절 했어요. 내가 왜 거기에 소속되고 나가야하나요! 난 내가 독립자유로 글쓰기만으로도 충분해요. 수준미달 작품을 갖고 서로 높이 올리추고, 굉장히 분식을 하는 그것도 자신감이 없는 표현이거든요(웃음)   11.초인적 “이단자”의 일상   김: 일상생활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천재적 “이단자”의 그게 궁금합니다.(웃음)   잔: 기실 내 글이 괴이해서 그러지 난 상당히 세족적인 인간이예요. 전형적 소시민이지요.(웃음)   지금 난 거의 세속적인것과 사귀지 못하고 있어요. 옛날과 많이 달라요. 20대에는 남편과 재봉일을 하면서 글을 썼지만 이젠 그것도 관둔지 오래고 남편이 다 가사를 하고 난 책읽고 글쓰기만 전념합니다.   김: 그러니 아까 노선생(남편)이 한 요리들이 정말루 맛있었어요. 전업주부(主夫)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으니 좋겠어요.   잔: 나는 매일 매일 365일이 독서와 글쓰기예요. 설날도 안쉬고, 멈출줄을 몰라요. 하루만 거르면 병에 걸릴것만 같아요.   김: 과연 글쓰기의 특급”프로패셔널”이시네요. 지금 거이 친구와 만나는 일도 안한다면서요!   잔: 네,절대루 없어요. 예전에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지만(웃음), 창작이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서서히 뒤로 물러서고 물러서서 이젠 두사람의 세계에요. 나와 남편의 세계, 난 지금 자신의 세속적 생활을 압축시키고 있어요.   김: 글쓰기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잔: 난 오전에 장거리로 달리기를 하고 와서 샤워하고 책상과 마주앉아 약 한시간 쯤 글을 써요. 원고지에 육필로 쓰지요. 컴퓨터로 타자를 안해요.    영어도 독학으로 배워서 글도 쓸수있어요. 영국, 미국에 짧은 글도 발표하기도 해요.(영문 글과 육필로 된 원고를 나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김: 정말 나와 유사한데가 많아요. 나도 육필로 쓰고 타자를 할 줄 몰라요(웃음)   잔: 난 구상도 사색도 안하고 그냥 원고지만 펴면 글이 술술 나와요. 그리고 수정도 안합니다.(从不构思,一笔下稿,也不改稿) 매일마다 글쓰기외에는 또 철학을 읽고, 철학분야의 글도 써서 몇권 냈어요. 북경대 철학교수 수준도 내 눈에는 유치해요(웃음)   12.암흑속의 인간을 광명으로 인솔하기 위하여   김: 과연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천재이시네요! 어느 학자가 지적하다시피 “잔설은 정신의 깊은 차원을 추구하면서 중국문학사에서 최초로 문학적방법으로 이 과정을 묘사해냈다”고 하면서 “잔설의 소설은 일종 즉물(即物)적이 아닌 정신의 유열(愉悦)이다”고 평가했어요.   잔: 감사합니다! 사실 암흑속에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암흑에 있는 줄 모르고 살지요. 우리가 문혁시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낙원이라고 느낀것 처럼 말입니다. 우리 나라 국민은 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요. 지어는 아주 병질이 골수까지 배인 그런 엄중한 상태거든요. 무슨 병이냐면, 노신선생이 쓴 ”아Q병”, 자아를 상실하고 생존의 낙을 잃어버린 그런 우매한 환자이지요.   자아를 보아낼수 있는건 소경이 앞을 보는거와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현재도 내일도 내게 주어진 재질을 활용하여 “자아”를 인식하는 어려운 글쓰기에서 극치까지 발휘할수 있는게 나의 유일한 낙이거든요.   나는 오로지 암흑의 심층에서 끊임없이 길을 개척하고 등불을 만들어 인간들을 광명으로 인솔하는 그런 성취감에서 살고 있어요. 물론 이런 글쓰기가 나와 국민들과 교류하는 특이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건강하게 80세까지 장수할수있다는 자신감이 있는데, 난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글쓰기를 견지 할것입니다.(웃음)                                                 (끝)   대담자 소개 잔설(残雪),본명 등소화(邓小华) 1953년 장사에서 태여남. 당대 중국 신실험문학의 기수.    1985년 처녀작 발표이래 700여만자에 이르는 신실험문학작품, 평론집을 발표하였음,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영어권,일어권문학계에서는 당대 중국 문단의 가장 창조성과 독창성이 있는 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苍老的浮云》《五香街》《最后的情人》등이 있다. 그중 장편소설《最后的情人》은 미국에서 최우수번역소설상을 수상했으며 영국 독립문학소설상 후보로 지명되였다.   2017년 미국에서 출판된 장편소설《边疆》은 문학계의 화제작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일본에서는 잔설의 소설은 문학계의 환영을 받고 있는바, 대량의 소설 문학평론이 번역 출판되였으며 2008년에는 《세계문학전집》대형시리즈에 잔설의 중편 2편과 단편 5편이 입선되였는데 이는 중국작가로서 유일 입선자이기도 하다. 일본의 변역가 콘도나오코(近虅直子)는 동경에서 “잔설연구회”를 창립하여 해마다 잔설을 소개평론하는 잡지 《잔설연구》를 정기로 펴내고 있다.  이밖에 미국,영국, 일본의 대학에서도 잔설과 그의 작품을 문학교과서로 사용하고 연구하고 있다.
13    중국지식인, 무엇이 문제인가? [뢰의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433  추천:67  2017-10-01
【문화대담】 《33의 신사유》   중국지식인, 무엇이 문제인가?   뢰의(雷颐)+金文学     0. 들어가면서   “근대 중국지식인연구”의 제일인자로서의 뢰의선생은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베테랑 연구원으로서 학계와 언설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비판적중국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오래전에 그의 저작에 소개된 사진을 보고 나이가 훨씬 연상의 대선배인줄 알았는데, 그는 나보다 근근히 6년 연상인 1956년 태생이었다. 문화학자 사중문(史仲文)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우리는 자주 국제통화를 하면서 서로 안부도 전하고 서로의 관점에 대하여 피력하면서 어느사이 친숙한 문우, 학우로 돼버렸다.   대담을 하기로 서로 예정은 오래전부터 해 왔으나 스케줄때문에 조정이 어려운 면도 있었다. 그러다가 3월 사중문선생과 대담을 이루게 되면서 뢰의선생과의 대담도 뜻밖에 쉽게 이루어 졌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는 법인가 보다.   우리가 대담장소로 정한 곳은 북경 중국사회과학원 근처의 아담한 커피숍이었다. 첫 대면에 조금은 냉철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뢰선생은 기품이 조용하고 예지에 찬 일류의 지성인임을 이내 알아 차릴수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늘 전화에서 처럼 담담히 조용하게 말을 엮어가는 뢰선생님은 “중국지식인” 문제에 대한 애착과 지식인이 살아가는 중국의 대환경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칼날처럼 서있었다. 그런 뢰선생은 신사중의 신사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학자였다. 《孤寂百年- 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등 무게있는 노작을 읽은 나는 크나큰 공명을 일으켰다. 胡适,容闳,梁启超등등 근대 지성사의 스타를 다룬 이 책에는 지식인이 왜 백년의 고독속에서 헤메였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지식인을 통해 그 시대와 함께 현대지식인의 사명, 역할과 운명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수 있지요.”   우리는 “중국지식인”이란 문제를 둘러싸고 긴 시간 대담을 나누었다.   1. “지식인”은 무엇인가?   김:  뢰선생님은 중국근대지식인 연구의 제일인자로서  《 孤寂百年 - 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 》이란 노작을 써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 12명을 통하여 그들의 운명과 사상맥락과 국가정치의 기본속에서 정치와 개인 전공발전사이에서의 모순을 기술했어요. 따라서 종당에는 국가정치속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린 “고독과 적막의 지식인”상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대한 현실적 의의을 갖는 연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뢰선생님은 “지식인”은 구경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으로 부터 우리의 대담을 시작할까 해요.   뢰: 좋습니다. 중국 지식인(知识分子)은 청조말기에 3천년의 황제통치가 붕괴되면서 전통적인 사대부(士大夫)로 불린 독서인으로부터 근대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되지요.      “지식인”을 정의하는데는 두가지 기준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직업적기준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기준입니다. 직업적으로 학자, 작가, 문인, 교수, 오피니언계, 예술인이 이에 속하고 정신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독립”되여 있어야 하는겁니다. 사이드가 지적하다시피 지식인은 으례 “보편적정의”를 대표해야 하며 또한 영원히 “비판”을 견지해야 한다는것이지요. 지식인의 “독립”은 인격, 정신과 관념에서 독립하며, 그속엔 경제적자급과 자신의 내재적 외재적 존엄이 포괄된다고 봐요.   김:  저도 동감입니다. 동양의 사대부, 독서인을 서양에서는 인텔리젠치아 (intelligentsia)나 인텔렉추얼(intellectual)로 칭해지며 시대를 리드해온 계층이었지요.  제정러시아 사회안의 지식인들로서 서구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노예제, 전체주의에서 인민해방과 정치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킨 지식인이 바로 전자이며, 근대 유럽에서 지식과 최고의 교양을 고안해냈고 발전, 확대시킨 자가 후자입니다. 저는 진정한 지식인은 “사회체제에 순응하기 보다는 변혁을 통한 발전을 시도하고, 그 방향을 지적하는 자이며, 사회의 폐단,약점을 지적, 해부, 비판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립적인 인격과 사상으로 체제에 “적응”을 꾀하더라도, 무절조의 곡학아세가 아닌 체제의 개혁, 진보를 위한 건설적 지적, 또는 비평을 하는게 지식인의 몫이라 봅니다.   뢰:  맞어요! “독립과 비판”이야 말로 지식인의 가장 뚜렷한 표징입니다. 진인각 (陈寅恪)선생이 강조한 “독립적 인격, 자유적인 사상”이란 격언처럼 지식인의 첫번째로 갖추어야 할 조건이지요. 공공사회에 대한 관심과 공공적 양지(良知)로 사회참여의식이 강한 문화인이 “지식인”이지요.   2.  백년의 고적(孤寂)   김:  그러니까 저는 “지식인”은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 기술전문가, 기술관료, 내지 직업성학자, 관료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중국어에서는 지식인(知识人)을 지식분자(知识分子)라 칭해요! 독립적인 무엇이 아닌 하나의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지요(웃음)     뢰선생님은 중국지식인 연구분야의 전문가이시니 선생님의 아까 그 저작과 관련하여 근대 중국지식인상에 대하여 우선 개략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뢰:  지식인 연구에 있어서 나는 두가지 방향이 있어요. 하나는 청말, 신해혁명과 이홍장등에 관한 연구이고 또 하나는 현대의 호적, 부사년(傅斯年)을 비롯한 지식인 연구입니다. 주로 개개인의 지식인의 운명과 사상을 통하여 지식인상을 축출해내고, 중국 국가, 정치와의 운명, 관계양상을 귀납분석했지요. 김:  뢰선생님은 굳이 “백년의 고적”이란 표현으로 중국지식인의 궤적을 형용했습니다.   뢰:  사실 나는 괴로움과 격투하면서 지식인 연구를 계속해왔음을 고백해야 겠어요. 국가와 개인의 명운사이에서 중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거나 모순, 대립의 구도에서 분투해왔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다면 오로지 “백년의 고독”이란 말로 형용할수 밖에 없었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지식인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 뒤로 지식인을 억누르니까 국가정권의 신임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계속 정치비평에 관심하면서 한편 학문도 하면서 자신의 일부 개성을 보존하려고 애썼어요….이러한 모순을 그들은 불가피적으로 십자가처럼 짊어져야 하는 비운에 처했지요.     이게 바로 근대 중국지식인의 운명이었습니다.   3. 덫에 걸린 운명인가?   김:  그러니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중국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사회적, 체제적 덫에 걸려야 하는 운명이겠네요?   뢰:  그래요! 개괄적으로 말하면, 중국 지식인은 첫째로 국가와 개인, 국가, 민족적 부강 국가적 이익과 개성사이에서 일종의 복잡한 계급모순이란 덫에 걸려있었어요.      두번째는 학술을 함에 있어서 순학술학문에 전념해야 되냐? 나라, 민족이 외래침략을 당했을때 자신의 학술을 견지해야 되냐 아니면 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정치적구조에 참가해야 하나? 정치와 학문사이에서 배회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거듭되는 대립, 모순의 괴로움속에서 때로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해야 했어요. “바로 학술과 정치사이에 있다고”말입니다.   김:  이런 의미에서 30~40년대의 거물 지성 호적(胡适)과 그 시대 지식인의 운명이 바로 전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정치와 개인의 학문사이에서 시계추처럼 배회하는 양상은…   뢰:  호적과 동시대의 정문강(丁文江)은 현대 중국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인물로서 30년대에 자신들의 글을 통해 자신의 사상체계을 구축합니다.      서양의 자유주의개인의 권리는 신성불가침범인데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더구나 자유주의의 중요한 두 리더인 호적과 정문강은 국가라는 대아(大我)를 위해 개인적 소아(小我)를 희생시킬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정씨나 호씨 역시 30년대에 한번쯤 스탈린의 공업화에 지대한 선망을 보이는데 잔혹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의 후진국 공업화 성공을 긍정하지요. 그래서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유주의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들은 국민당정치, 국민당의 독재을 비판합니다. 중국에는 좋은 정부냐 나쁜 정부냐 하기에 앞서 정부가 없다고 일침을 놓아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국가운명의 대과제를 논의합니다.      결국 정문강이 내린 결론은 “나는 스탈린통치하의 한명의 기사(工程师)로서 일할 지언정 해외에 망명하는 지식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김:  그렇지요. 1949년을 경계로 중국지식인은 이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는 운명에 처하지요. 국가건설, 민족의 부흥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다수 지식인은 후자를 택하게 되었지요.   뢰:  맞어요! 호적은 대만으로 가고 정문강은 대륙에 남았지요. 그때로부터 완전히 다른 운명이 전개되지요.   4.  “모래위에 세워진 상아탑”   김:  청말시기로부터 20세기중엽, 그리고 1949년이후 문화대혁명등 전례없는 문화의 수난속에서 지식인의 수난은 중국대륙에서 간단없이 이어졌지요.     지식인이 80년대부터 “수난시대”의 크라이막스를 넘어섰지만 독립적 계층으로서 현재 중국사회에서 홀로서기엔 너무나 그 기반이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나 구미사회의 지식인사회와 비교를 해도 이점은 일목요연이지요. 중국 지식인 자신들도 스스로 말하다시피 근대 “지식분자사회”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또한 “모래밭위에 세워진 상아탑”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당대 지식인계층의 괴로움 또는 곤난은 학원파이든 매스컴이든 체제성적 보장이 결핍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뢰선생님은 당대 지식인사회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뢰:  20세기 중국지식인은 한마디로 괴로움과 고적속에서 헤매왔다고 제가 늘 말하곤 합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지식인의 50~70년대 수난시대를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신계몽을 벌이기도 했어요.      지식인은 이런 와중에 사회의 전환점에서 정치환경과 충돌, 모순이 생길뿐만 아니라 지식인 스스로의 사상, 인격에도 모순이 존재했다고 말해야지요.      20세기 지식인은 1949년전후의 지식인을 구별하에 봐야 합니다. 49년 이후에도 17년세대 문혁세대, 그리고 포스트문혁(당대) 세대로 나누어 봐야 합니다.      20세기 최초의 엄복,양계초, 채원배등이 청말세대이고 1915년이후 호적, 진독수, 진인각, 노신등이 또 한세대이며, 풍우란 부사년, 주자청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949년이후는 17년(1949~1966)세대로 농후한 이데올로기색채를 띤 국가에 복종하는 세대였고 80년대 중기 “문화열”속에 궐기한 신세대 지식인이 탄생됩니다. 그리고 “포스트문혁” 세대로 1960년이후 출생한 신생지식인이 현재 활약하고 있지요.   5.  “변두리(边缘)” 로 몰리다   김:  좋은 귀납입니다.   제가 볼때 80년대 지식인은 사회의 중심에 서서 커다란 계몽과 호소력이 있었는데 90녀대부터 외부환경과 지식구조의 변화로 인해 지식인이 중국사회에서 “변연화”(边缘化)로 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네요. 90년대이후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진척되고 경제 고도성장을 이루어나가니 사회의 세속화가 박차를 가함에 따라 지식인은 시장사회 주도의 중국에서 “변연화”되었습니다. 여영시(余英时)선생이 이에 대해 전문 논한적이 있지요.     정치적 차원에서 뿐만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변두리고 밀려나지요. 사회가 고도로 분산화되고 계층이 다양화됨에 따라 다원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에 사회에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요.   뢰:  맞습니다. 이럴때 지식인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변연화로 몰렸지요. 이른바 중국사회에 새로 급등장한 억만장자, 벼락부자, 졸부등 새로운 형세하에서 나타난 사회기득이익층 그리고 매스컴과 연예계에서 현란하게 활개치는 여러가지의 스타들이 사회의 중심무대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새로운 사회속에 처해있는 지식인이 엄혹한 도전을 받기 마련이지요. 늘 계몽자로 자부해오던 지식인이 이른바 사회에 부자들이나 스타들의 등장에 밀려난 까닭에 지식인은 스스로 “변두리”화 문제를 열렬히 논의하고 인문정신에 관한 토론을 전개했지요. 이런 신환경하에서 지식인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키고 “안신임명”하겠는가? 구경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지식인이 사회 전체를 개변시킬수 없다면 자신의 정신,현실적 포지션을 되찾아야 한다고 분연히 사고하게 되였습니다.   김:  지식인에 대한 국내의 사회적 여론이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회에서 지식인에 대하여 폄훼절하하는 양상을 보고 놀랐습니다. 전문가 (专家)를 벽돌(砖家)로, 교수를 맹수(叫兽)로 매도하는 현상이 보편화 된 현상이 지식인의 “변연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사료하시는지요?   6.  왜 지식인은 매도당하나?   뢰:  김선생은 중국사회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웃음)   내 생각에 자매체(自媒体)의 발달로 인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식인도 당연히 뒤질리없지요. 이런 공공사무에 대한 관심과 의견은 전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으례 신중하게 자신이 파악한 상황하에서 발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지요.     예전에 이런 발표공간이 없다가 일거에 이런 표달공간이 생기니 여러수준의 의견과 지어 황당한 말이 횡행하지요. 이런 교수, 전문가를 두고 매도하거나 분개하는건 이해 가 갑니다.     또 하나는 해외에서는 자매체가 서로 사교를 하는것이 기본이지만. 중국에서는 사회, 공공사무, 정치에 대해 의논이 많은게 특점이지요. 왜냐하면 중국의 이른바 전통매체, 주류매체, 종이신문, 종이매체가 이런 기능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TV국, 신문이 여러 관념과 견해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할수 있다면, 사람들이 거기서 이성적으로 발언하고 토론할수 있습니다.   김:  중국에는 매체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뢰:  그렇지요. 그러니 당연히 대중들이 자매체 위챗을 이용하여 발언하게 되지요.   김:  지식인의 수준에 문제가 있고 대중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TV에서 봤는데 흑룡강성의 신축 육교가 무너지자 소위 전문가란 분이 나와서 해설 하는 말이 “육교가 약한게 아니라 통행하는 자동차무게가 너무 무거웠다는 거예요! 그 말 듣고 다들 앙천하지않을수 없지요(웃음) 뢰:  (웃음) 그리고 중국사회에는 서로 타자의 의견, 부동한 의견을 용납하고 들어 줄수있는 그런 환경이 있어야 되지만 중국은 여전히 “문혁”의 여파로 타인의 견해를 존중할줄 모르고 견해가 다르면 무조건 매도 중상하기가 일쑤이지요.   김:  저도 동감입니다. 위챗, 펑유췐에서 저도 문장을 발표했다가 일부 동포한테 쌍욕으로 매도, 중상당한적이 여러번 있거든요.(웃음) “당신의 관점은 찬성할수 없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는 보호해준다”는 고차의 경계가 결핍한게 탈입니다.   뢰:  어쩌겠어요? 그런 수준미달의 인간을 무시해야죠!(웃음)   7.  지식의 비극시대   김:  중국 지식인을 담론함에 있어서 해외 지식인과 “비교지식인론”의 시각에서 고찰해보면 중국 지식인의 하나의 결정적인 결함, 문제점은 지식인 자체가 지식에 대한 인정,공감과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기타 사물의 부속물로 되기를 원하는것에 있다고 봅니다.     어느 해외 중국인 학자가 이런 지적을 했어요. “지식의 비극화시대라 칭하는것은 권력, 금전과 대중이 지식에 대한 전례없는 멸시뿐만아니며, 또한 지식이 늘 장식용으로 있어도 없어도 되는 물건이 된게 아니라 지식은 종래로 비미(卑微)하고 비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뢰:  정말 그렇습니다. 대학에서도 학술연구와 교육 본원을 떠나서 무슨 ××× 공정이요, 기요요하면서 대학을 공원처럼 거대하게 부풀리고 확건하지만 관건적인 교육과 연구는 게을리 하고 있어요. 요즘 대학 백년창립기념의식이 성행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정치가를 얼마만큼 배출시키고 기업가, 부자를 얼마나 배양했다고 떠벌리지만 어느 대학에서도 유명한 학술거장 한사람을 배출시키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국내에서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여러가지 심포지움이나 세미나를 하지만 정계 대간부나 대부자를 초정하는것을 주목적으로 하지 요긴한 지식체계는 언제나 차요적이고 부속물로 밀리고 말지요.   김;  내가 이 “중국 일류지성과의 문화대담”시리즈를 진행하는 주목적이 지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동아시아에 향해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인은 누구인가?”란 테제를 발신하고 해석하자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현재 전례없는 경제성장과 사회전변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 격변의 시대에 대해 중국인 지식인 자신이 나서서 해석하고 분석, 제련하여 하나의 의식, 개념으로 이론화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 지식인은 이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더 비극적인것은 그것을 담당할 기력도  능력도 없이 “무기력의 상태”에 빠진 상태라고 봅니다.   8.  지식인은 사망했는가?   뢰:  지식인의 “변연화” 무기력에 따라서 “지식인의 사망”문제를 프랑스 포스트모더리즘의 사상가 리오타르가 지적했어요. 변연화와 다원화 사회속에서 지식인은 흔히 자신을 인민, 인류의 위치에 놓고 보편적 동일가치의 주체를 인정하고 사회를 향해 발언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축해 온 일련의 정체성적 언어 발설이 포스트모더니즘사회에서는 이미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는 거에요. 끊임없이 다원화, 세분화되는 사회에서 사회전체가 받아들이던 정체성적 언어발설 담당자로서의 지식인이 이미 존재감을 상실했다고.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사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미셸 푸코도 이런 맥락에서 유사한 말을 했지요. 그런데 영국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 지그먼트 바우맨(Bsuman)은 리오타르의 주장에 또 해석을 가했어요. 모더니즘사회에서 지식인은 여전히 사회의 “입법자(立法者)”구실을 하며, 지식정체성과 동일성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고 중립적 객관적 지식규칙으로 사회의 지식적 재판자로 되었는데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을 그 누구도 대체 할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后现代) 사회에서는 사회의 다원화로 인해 지식계통이 해체되고 통일한 지식의 장 (场)이 상실한다는거예요.   뢰:  이런 의미에서 중국지식계층에 이미 통일된 지식계층이 여러가지 유파로 세분되고 이른바 국학파, 계몽파, 보수파, 자유주의파, 신우파, 후현대파등으로 나뉘어 통일된 사상, 지식계가 산산히 부서졌지요. 그러니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지적, 사상적 체계를 새로 재건립하고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이거죠!   9.  이중성격의 두뇌명석한 계층   김: 지식인은 대체로 “천성적으로 이중성격소유자”라는 말이 있지요. 학자들이 이에 대해 거론해왔습니다, 피얼 볼디어우(Pierre Bourdieu)가 갈파하다시피 지식인은 “통치자중 피통치자의 일부분”입니다. 즉 지식인이 그 문화자본으로 인해 통치적지위에 있고 동시에 정치와 경제권력을 장악한 자 앞에서는 또 피통치자로 전락된다는 거지요.     이런 모순이 지식인의 2중성격 내지 권위자, 권력자앞에서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순종으로 인해 얻는 거대한 이익과 반항으로 인해 얻는 비싼 대가를 고려하여 대부분 지식인은 현실중에서 흔히 권력과 타협을 이룩하게 됩”니다 ( 제롬 카라벨 Jerome Karabel)     중국의 지식인은 긴 황제제도와 현실체제의 체험속에서 이런 2중성격이 뚜렷하고 하나의 문제라고 보고 있는데. 뢰선생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뢰:  현실의 중국 지식인의 이런 2중성격은 현체제하에서 더욱 선명한건 강조할 나위도 없습니다.     지식인과 정치엘리트사이에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까닭에 이런 모순이 중국지식인의 2중성격을 유발한 최대의 근원이라 봅니다. 전목(钱穆 )이 풍우란( 冯友兰)에 관한 이런 일화를 어느 책에서 기술한적이 있어요. 어느날 두 학생이 연안으로 가게 되어 환송회를 소집했어요. 전목과 풍우란이 초청특강을 하게 되었는데, 풍은 연안에 가는 두 학생에 격상하는 말을 했고 전은 이와 상대로 학생이라면 우선 공부를 잘 하여야 장내 국가의 기둥으로 될수 있다고 연안에 갈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김:  전목은 풍우란과 전혀 반대의 말을 했네요!   뢰:  그래요! 회의가 끝난 뒤 풍이 전의 연구실에 찾아와서 아까 학생들에게 연안에 가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한 건 옳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연안으로 가는 학생들에게 꾸지람한건 잘못이라고 했지요.      이에 대해 전목이 풍에게 당신은 두 학생이 연안에 가는것을 장려하면서도 또한 여러 학생에게 남아서 독서하라고 했는데 이는 전혀 상반되는 길이며,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인데 어찌 범벅으로 말할수 있는가고 질책했답니다.     두 사람이 상호 논쟁하다가 풍우란은 불쾌하여 자리를 떴지요. 여기서 볼수있는바와 같이 전목은 가치관이 매우 명석한 학자이고 풍우란은 늘 양가지견(两可之见)을 갖고 있는 학자였습니다. 전목같은 지식인은 흔치 않고 풍우란같은 두뇌는 명석하지만 “양가지견”의 모순에 있는 지식인은 현대 중국 지식인이 절대 다수입니다.     중국 지식인은 한편 도통(道统)이란 상징기호의 가면을 쓰고, 도덕, 양심 국가주의의 진리의 화신으로 자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권세와 체제에 아부하거나 보좌하여 권력통치 또는 의식형태의 교도원으로 되기를 즐기지요.     이중성격에서 하나는 “도통성”이고 또하나는 “의부성(依附性)인데, 이 2중성격때문에 왕왕 잃어버리는건 자기 자신의 진실한 개성이지요.   10.  비판적지성은 다 어디로 갔나?   김:  앞에서도 말한적 있지만, 지식인의 본질은 체제에 대한 비판에 있어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역설하다시피 지식인이 지식인인 까닭은 비판성에 있으며 권세에 대한 반항입니다. 전공적, 기술화된 전문화적 지식인이 중국에도 많이 증가되었지만 제가 늘 느끼는 점은 중국에 비판적 지식인, 공공지식인이 비례에 따라 너무 적은것입니다.     사이드, 사르트르, 카뮤, 촘스키같은 비판적 지식인이 중국에 너무 희소합니다, 제가 중국지성들과 대담하면서 발견한것도 현재 원로 지식인 80대이상에 모우식(茅于轼)  자중균(资中筠), 원위시(袁伟时)등 고령 지식인에 비판적 지식인이 있지만 그뒤에는 과감히 진실을 말하는 젊은 지식인이 비례적으로 적어서 큰 문제라고 봅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뢰: 지당한 말씀입니다.   지식인이 우리 시대에 할수 있는 사명은 두가지라 생각해요. 하나는 학자, 연구자이고 또 하나는 사상자(思想者)이라고 생각해요. 김선생이 나열한 사이드나 촘스키같은 비판적 지식인의 거물들이 세인의 존경과 각광을 받는 이유는 지식인의 양지( 良知)의 심벌이고 전문가, 학자이면서 도덕적으로 용기가 있는 부조리에 맹렬히 비판을 가할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기백과 실천이지요.    도덕자 사상자이고 지성으로 살아가는게 지식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중국지식인은 현 체제하에서 계몽과 주장이 좌절을 당하자 90년대부터 시장경제의 홍수에 밀려 세속화의 파도에 말려 들었어요.    금전, 마이홈, 가부…등 경제이익의 수익자로 된 지식엘리트들도 그 공리심에 의해 매우 현실적 세속적인 상태에 물젖었습니다.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투기적인 승관발재(升官发财)의 전통이 이들의 심령을 점거했지요.    그러니 도덕이니,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에 앞서 스스로 도덕을 버리고 학술에서도 표절하고 완전히 학자, 교수,전문가로서의 한계(底线)를 넘어서서 부패로 향했습니다.     학문은 할수 있더라도 도덕수준은 밑바닥이고 학문도 안되고 도덕도 엉망인 지식인이 아까 말한 叫兽, 砖家의 전형이 아닙니까. 현체제속에서 삶이 보장되고 윤택해지니까 대부분 젊은 지식인은 “지식인”이라는 의미와 사명감을 잊고 체제에 발라맞추거나 영합 또는 안주하면서 “비판”, ‘저항”을 깡그리 버리고 살게 된게 중국 대부분 지식인의 현상(现状)입니다.   11.  퇴영되고 부식된, 그리고 창조력이 없는…   김:  탁론이십니다. 제가 중국을 자주 오면서 발견된 지식사회의 모습은 80년대 보다도 오히려 물질면, 하드면에서는 진화됐지만, 지성과 사상교양은 더 퇴영되고 부패됐다는 점입니다. 자중균선생님도 이에 대해 이미 큰 소리로 지적했지요.     관원, 정치가들의 부패를 박멸하느라고 현재 야단법석인데 제가 볼때 중국 지식인의 부패도 뒤지지 않은 세계의 베스트원의 기록이라 봐요!(웃음) 이런 와중에 중국에는 자신의 지식체계가 엄중히 결핍한것을 “발견”했어요. 하나의 문명세계가 자신의 지식체계, 언설체계를 정립하지 못한다면 진화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양이나 일본의 지식체계를 흡취하여도 좋지만, 진정한 창조력은 자신의 지식체계가 뒷바침해주거든요. 사실 인문학영역만 보더라도 중국이 49년이후로 현재까지 일본의 인문학발견, 지식체계를 능가할수 있는 실적은 전혀 없습니다. 현실은 그냥 산채(山寨)학문, 산채이론, 개념이나 모조품따위가 범람하고 표절이 횡일할 뿐입니다. 베끼고 복제하고 별 가치없는 지식제품을 양산하는게 중국지식계의 현상이 아닙니까?   뢰:  예리한 지적입니다! 지식계, 학술계는 더 이상 정토(净土)가 아니지요. 학술부패는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으니 너무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학술부패에서도 베끼고 표절하고 하는일이 정상적 보편화로 됐으니까요!(웃음) 내 논문도 표절당한적이 있습니다.     2001년 1기 《社会科学论坛》에 발표한 《中国近代史上的张申府》는 완전히 제가 1998년 2기 《北京大学学报》에 발표한 《中国近代史上的张申府》 전면 표절한겁니다. 그것도 중앙이론연구직장의 박사연구생이 말이에요.     김선생 지적대로 보편적인건 무더기로 쏟아지는 소위 “학술성과”라는게 아무런 창의력도 없는 전인이 말한 복제품이지요!     그리고 대량의 관원들도 수중의 공권력과 공금을 이용하여 대학에서 학위,학력을 “구매”하고 있는데 지어 명문대학에서도 “수입”을 위해 소위 “실권인물”과 결탁하며 그런 부패자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습니다. 돈만 내면 증서를 남발하는바 학교의 명예도 전혀 상관치 않아요…     학술은 민족문화의 정수인데, 이런 식으로 학술을 한다면 그 후과는 엄중하지요. 나중에 “지식 창조력”은 마이너스로 추락되고 우리 사회의 발전과 민족문명의 발전에 엄중한 지장을 주기 마련입니다.     한심한건 학술표절, 부패를 적발해도 절대다수가 응징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그 대학이나 그 기관의 “수치” “오점”으로 된다 여겨서 처벌을 줄 대신 적발자를 비난하는 일도 비일비재입니다.   12. 중국 자신의 지식체계를 창립해야   김: 중국이 국민국가 건설에만 목표로 하지 않고 국제, 세계적 문명대국으로 거듭나면 초우선과제가 자신의 지식체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의 지식체계가 결핍한것은 중국지식계층의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되는데, 학술부패나 재부나 권력에 예속되기를 원한다면 그 자체가 중국지식계의 비극입니다.     서양 내지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일목요연한건 중국지식인의 창조력결핍과 독립인격 자유사상의 부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지식인은 우선 “독립”하고 “자주”하여 창조력을 발굴하여 자신의 지식체계를 정립하는 길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되요.   뢰:  찬성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 지식인은 창조력이 매우 부족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현재 까지도 서양지식, 사상만 따라 모방하는 유치한 상테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수 없어요!     수천년이나 왕권의 지식체계에 의존하여 왔기때문에 기본상 “의존형”지식체계에 머물러 있을수밖에 없었습니다. 49년이후 정치의 예속물로 완전히 변질되었기에 지금까지 세계에 내놓을만한 인문학적 발견, 성과가 없는건 당연하지요. 지어 일본의 인문학에 뒤진것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입니다.   김: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 수천년중에 하나의 왕조가 붕괴될때나 황권이 사회를 장악하지 못할 무렵에 새로운 사상이나 사유가 발생했지요. 지식체계를 창발하고 정립하는 유일한 도경은 권력숭배와 권세통제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환경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뢰:  이데올로기의 관성사유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지식체계를 새롭게 창립하기엔 너무 곤란합니다. 인간의 사유를 공제하기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완전한 자유공간도 불가능 합니다. 적당하게 이에올로기의 공제로 마이너스적 사유를 규제하는것도 필요하지요. 그래서 지식인의 사회 책임을 정립해야 지식체계의 정립이 스무드하게 진행될수 있다고 봐요.   김:  서양의 사상가들이 지적하다시피, 사상, 지식이 물질이익이나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전락한다면 사상도 지식도 제 구실을 못하지요. 그런 덫에 걸려버리면 참신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제대로 클수 없을건 언급할 나위도 없으니까요.   뢰:  국가가 부유하고 금전이 많다고 하여 사상과 정비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유와 금전을 요긴한 사상, 지식개발에 유용하게 쓰지 못한다면 사상은 더 궁핍해지고 문명 역시 쇠락할수 있습니다.     지식인이 사명감으로 지식과 도덕에서 분발하여 중국자신의 지식체계를 확립하는 일이 중국의 문명대국건설을 보증할수 있습니다.       대담자 소개 뢰의 (雷颐)  중국 지식인연구영역의 제일인자.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연구원.   1956년 무한에서 태어남. 1978년 길림대학 역사학부 입학. 전공은 중국근대사상사, 근대지식인과 당대 중국사 연구. 주요저작으로 《取静集》 《被延误的现代化》 《历史的进退》《历史的裂缝》《百年孤寂-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등 다수   
12    왜 계몽은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인가? [등효망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508  추천:63  2017-07-20
왜 계몽은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인가? 邓晓芒(등효망)+ 김문학    0. 들어가면서     등효망은 당대 중국 인문학영역, 철학연구의 대표적 학자이며,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도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몇해전부터 전화로 자주 연락하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문우로 돼버렸다. 전화에서도 들려오는 등교수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교양이 높은 학자임을 알려주는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서로 만나서 대담을 나누자고 늘 별렀지만 여의치 않다가 2016년 11월22일 등호망교수가 계시는 무한의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로부터 나의 “중일한비교문화”주제 강연의 초청이 날아 온것이 계기가 되었다.   21일 고속철도로 무한으로 간 나는 화중과기대 국제센터에서, 그리고 등교수의 댁, 서재로 초대되어 긴 시간의 대담을 하였다. 등교수는 온화하고 겸허한 성품의 신사적학자였다. 그의 철학은 물론 미학, 동서양비교문화론, 국제국내시사비평에 이르는 다 분야의 연구와 학식은 정말 태산처럼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등교수가 창립한 “신비판주의” “신실천론미학” 이론은 중국학계에서도 주목받고 있으며 독일어로 쓴 철학 논문은 서양 철학계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독일 고전철학이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학식과 교양, 지견은 박식 할뿐만아니라 늘 정치(精致)롭고 독특한 견해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등교수의 말은 사실 굵은 말발이 서 있었으며 정채로운 격언같은 말들도 매력적이었다.   대담에 앞서 등교수의 《思辩的张力--黑格尔辩证法新探》 《人之境--中西文学形象的人格结构》 《灵之舞-中西人格的表演性》 《启蒙的进化》등 저작들을 읽어두었지만 그의 박람강기와 중후한 철학적 수양과 학식에 따라가기가 힘든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등교수와 나는 세대차가 있기는 했지만 초면치고는 너무나 의기투합하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은근한 정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게끔 하였다.   게다가 옆에서 등교수부인(역시 대학교수로, 일본어연구자)께서 우리를 잘 보살펴주어서 우리는 아무 허물없는 오랜 친구처럼 며칠동안 대담과 한담을 나눌수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   아래 수차례의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해본다. 1.  철학가의 탄생   김:    이렇게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대가인 등선생님과 마주 앉아 대담을 할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오늘은 “중국의 계몽이 왜 필요한가?” 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선생님의 철학전공과 개인적 편력, 그리고 중국사회, 문화와 교육에 관련시켜 여러모로 선생님의 탁견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등:    나야 말로 동아시아문화권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3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학문활동과 비평활동을 벌리는 “동아시아의 귀재” 김선생과 대담할수 있는것에 영광이고 또 연분이라 생각합니다.   김: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이름앞에 많은 수식어와 타이틀이 붙지만 제 생각에 우선 철학영역의 거목으로서 철학가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글쓰기, 문학과 문화비평은 죄다 본질적 의미에서 철학적소스가 농후하게 깔려있어서 선생님의 철학전공에서 연구하는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과 내재적 연관성이 있는듯합니다. 그러므로 흔히 일반 문화비평가나 문학평론가들에겐 없는 중후한 철학적 교양과 동서양문화비교의 방법에서 튕겨나는 탁발한 사고와 견식은 정말 일류입니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철학을 하게 되셨는지 이 화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등: (웃음)  이 말을 하자면 책 한권 분량이 되는데  1968년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으로 내려 간 제가 독서를 좋아 했기때문에 《레닌선집》《마르크스전기》를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게 되었어요.         나는 스스로 5년 학습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마르크스고전저작뿐만아니라 입수할수 있는 중,외 철학저작과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철학에 착안점을 둔 이유는 책을 구하기 쉬웠고 철학이 모든 인간의 내용을 포괄했기에 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철학”을 통해 나는 장차 주견이 있고 지식이 풍부한 “진정한 남아”로 성장하는것이 꿈이였지요. 1976년이후 정세가 바뀌면서 더 많은 책을 접하고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독서에 심취하였습니다. 77년 대학수험이 회복되자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사전공과 무한대학 철학계 서양철학전공 대학원 시험에 다 합격되었네요. 그러나 부모님의 “우파”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해 정치심사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김:    참 "문화대혁명"의 유독이 청년의 전도를 괴롭히네요.   등:    그러다 1979년에 이르러 무한대학 철학계 석사대학원에 다시 입학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철학전공을 택하여 철학교수로 승진하여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글을 쓸수 있는게 너무 행복해요. 나는 일찍부터 생활, 생명을 하나의 정체(整体)로 간주해왔고 그리고 부단히 반성하여 그 정체에 귀환시키는데 매 부분마다 다 소중하고 버릴수 없지요.           난 전부생명으로 철학을 하는데, 바꾸어 말하면 철학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내재적 생명이고 내 인격과 성격의 구현입니다. 인간이 어느 일에 종사하든 글 쓰든 쓰레기를 청소하든 자신이 하나의 인간이라 의식할때 진정한 인간이 될수 있으며 이런 의식은 이미 철학이 되어있지요.   2.  “나는 유가(儒家)를 비판하는 유가”   김:    유명철학가, 비판적 지식인의 일원으로서 선생님은 중국 전통적 유가(儒家), 유교문화에 대한 비판을 지금까지도 견지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방법이나 문체도 노신문체가 아닌 유교적신사의 느긋함이 있으니 유가적이라고 봅니다.(웃음)   등:    잘 보아내셨네요.(웃음) 내가 유교문화를 비판하는 이유는 유교문화가 오늘 날 자기부정의 도전에 들어서야 하며, 이 절차를 통해서만 그 자신이 계속 발전할수 있는 생명력을 보전할수 있기때문이지요.        난 늘 이런 말을 잘 해요. 오로지 전통문화를 비판해야만 진정하게 전통문화를 계승발양시킬수 있다고, 그러찮으면 결국 전통문화를 죽음으로 내 몰고 말지요.   김:   근 30년래 국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유교전통문화를 비판한 지식인중에서 문장이 가장 많고 가장 긴 시간을 격렬하게 진행한 분이 등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그래요. 그러니 학자들중에서 난 “서양화” “편파적이고 과격하다”는 레테르가 붙어다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난 어차피 대인 원칙이나 일상생활에서는 유교원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내가 유교문화를 대거 비판할때도 유교정신에 따라 중국 전통지식인의 직책을 다 할뿐입니다.   김:    이번에 만나서 보니까 선생님은 과연 유교적 신사란 느낌을 대번에 주었습니다. 그러니 더 친근감이 갔지요.(웃음)   등:  간추려서 말하면, 나는 유교를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주관적 안신입명 (安心立命)에서 나는 자기 부정, 자기반성의 유가이고, 유교를 비판하는 유가입니다. 유가사상에 대한 태도에서는 추상적인 계승법과 구체적 비판법을 갖출것을 주장하며, 유교사상과 현재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중국과 서양의 2중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3.  “ 신비판주의”는 무엇인가?   김:   알만합니다. 일테면 유교의 추상적 “인의예지신”등 보편적 정신은 계승하되, 구체적인 결함에 대해서는 부정, 비판하여 새로운 건설을 시도하는 것이겠네요. 그리고 자기비판, 부정을 통하여 서양의 보편적 가치관 등을 흡수하여 중국과 서양의 2중기준을 세운다는 방법론, 저도 찬성입니다.   등:   맞아요. 감사합니다.   김:  선생님의 학문적주장이나 사상의 저변에 깔린 기본바탕은 아무래도 “ 자기반성과 비판”이란 장대한 이념이라고 보는데요. “신비판주의” 테제를 들고 나오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등:   네. 지난 "5.4"와 80년대 “신계몽”에 이어서 90년대에는 주로 사상,문화계에서 반성과 함께 복고주의, 보수주의가 회복되고 냉정한 이성적 사고를 게을리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맞서서 “신비판주의”개념을 선언했습니다. 중국문화는 진통중에 있는데 전통문화에 대하여 자기반성과 자아비판은 어떤 문화든 다 필요한 태도이지요. 중국문화가 수천년 누적 되면서 자기비판, 자기반성이 없이 어찌 계승발전할수 있겠습니까! 진보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자기비판과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신비판주의”는 "5.4정신"중에서 아래 3가지를 계승발전하자는거지요.        첫째. 회의와 비판정신.  신비판주의의 “신”(新)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5.4"의 비판정신외에도 노신을 대표로 한 자아참회정신을 돌출화 시켰는데 이 정신은 기실 "5.4비판정신"의 내향화와 심화이지요. 셋째는 신비판주의의 또 하나의 사상 원천은 노신이 제공한것, 즉 진화론에 대한 초월이지요.        구체적 방법, 내용에 대해서는 약하겠으나, “자아반성, 자아비판”을 통해 새롭게 전통문화를 관망하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기하는것이 주목적입니다.   4.   사상이 없는 지식계   김:   “자기반성. 자기비판”이 결핍한 중국에서 볼때, 저는 오히려 대중을 견인해야 할 입장에 있는 지식계, 학계의 지식인들이 더  자기비판, 반성이 결여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 내야할 목소리도 못내고 위에서 주어진 윤택한 생활에 안주하여 지식인자신의 사명감을 잊은게 오늘 중국지식인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등:   지당한 말씀입니다. 90년대이래 중국지식계에 전환이 일어나 추락했다는 말도 있는데 추락이기 보다는 본성의 폭로이지요. 중국의 사대부, 독서인은 종래로 다 이랬어요. 그들은 모종의 상황하에서는 대단히 정의감을 갖고 늠름했지만, 또 모종상황에 닥치면 너무 비열하고 야비하며 곰상스럽지요.        이는 뿌리 깊은 열근성인데 개인의 독립의식과 개인의 인격존엄이 결핍하기 때문입니다.   김:   그럼 선생님은 오늘의 지식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등:   가장 주요한 결함은 사상이 없는겁니다. 사상하려고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뱅뱅 돌면서 어떻게 이름을 날리고 실이익을 얻고자만 하니 완전히 명예와 이익의 덫에 걸렸습니다.   김:  동감입니다. 학술체제가 확실히 오늘의 지식인에게 이런 명예와 이익을 제공하는것이 현실의 경우이지요. 마라(摩罗)의 경우 중국지식인의 현실축도라고 보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지식인의 “화려한 전환”   등:   마라는 《耻辱者手记》등으로 우리시대의 자기반성과 비판의 기치를 높이 든 소장 지식인이었으나 최근에  《중국인 일어서라(中国人站起来)》란 책으로 협애한 민족주의로 “세계 3분의 2의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인민을 구하는” 구세자인양 고취하고 있지요. 난 수년래 중국 지식인의 이런 “화려한 전변”에 대해 고민을 해왔습니다. 가장 근원적인것은 역시 전통중국지식인의 “열근성”과 갈라 놓을수 없다고 보지요. 유가 사대부의 이상적인 사상이든, "5.4시기"의 지식인이 유교를 비판했지만, 그 골수속에는 유교의 자아원융(自我圆融)의 고착심리에서 해탈할수 없습니다.   김:   왕소파(王小波)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식인의 최대의 죄악은 자신을 가두는 사상감옥을 짓는것이다”고. 국가나 민족의 발전이 모종의 의미에서 지식인, 엘리트계급과 사상자들이 역사조류에 따라 관성사유의 방식을 타파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립사고, 자유정신의 상징사인 지식인이 이렇게 추락됐으니…   등:   그래요. 현재 어떤 사조는 완전히 사상해방을 반대하는 거지요. 보편적 인성, 보편적 인권사상에 대해 혐오하고 “국정(国情)”이란 방패로 이런것은 죄다 서양의 패권이라 들고 있습니다. 진보는 무엇으로 이룩합니까? 유교로 합니까? 아니지요. 현대과학정신, 기술과 사회개방, 사상해방이지요!     우리가 현대과학기술이 있다고 하여 전통으로 복귀해야 합니까?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요. 이건 태평견(太平犬)의 비겁한 이상에 지나지 않아요.   6. 중국에 대학은 있기나 하나?   김:  중국에 자주 오면서 보니까 저는 예전에 백양(柏杨)선생이 “장독”이론이 연상되네요. 그 걸죽하고 오물로 가득찬 오래 침전된 거대한 장독사회에서 중국인은 하나의 생존기술을 고안해냈다고 봅니다. 문제삼아야 할 룰, 원칙문제도 여기서는 그냥 알고도 모르는척 범벅이가 되어 흐지부지 규명이나 대책도 없이 방치되고 있어요. 학계도 사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중국에 “학술계”가 없다고 지적하셨는데 정말로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등:   중국은 말그대로 혼돈의 “거대장독사회”입니다. 몇년전 청화대학 교수 왕휘(汪晖)의 저작 표절안(2010년, 남경대학 중문계 교수 왕빈빈(王彬彬)이 청화대학 중문계 교수 왕휘의 20년전의 저작 《反抗绝尘》이 표절작이라 지적하여 큰 쟁론이 일어난 사건) 역시 저자가 함구하고 의사를 표하지 않았기때문에 장화(酱化)되고 말았어요. 언설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자가 침묵하고 당사자가 말 안하면 여러사람이 말해도 결국 말하나마나? 이거예요!(웃음)         “학계에서 말해야지 매스컴이 떠들어봤자 소용없다”이거죠. 그럼 학계는 누굽니까? 중국에 학계는 있기나 하나요? 30년대 어떤 이가 중국에는 전혀 학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80년후인 지금 여전히 없는거지요! 중국에서 학술은 근본상 “계(界)”를 이룰수 없고 “계”가 있다면 중국에는 오직 하나 있는데 바로 “혼돈계(浑沌界)”뿐입니다!   김:  (웃음)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등:   중국의 대학도 학술계도 다 강호(江湖)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7.  오물로 가득찬 “상아탑”   김:    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가지 저의 체험을 말씀드리고 싶어지네요. 제가 상해 모대학 일어계 주임의 초빙으로 외교(外教)로 3달동안 일어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정말 대학내부의 심각한 체험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대학 일어계 주임이란 자는 지식인, 교원이란 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능도, 품위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가 나를 초빙한 목적도 오로지 나를 창수 (枪手)로 이용하려는 개인의 타산에 있어요. 그가 직접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김선생처럼 저작이 많은 학자는 정말 부러워요. 나는 아직 부교수에 머물러 있는데 아들 둘 키우는게 벅차요. 요 1년안으로 정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논문2편과 저작 한권내지 역서 한권이 필요하니 나 대신 써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속으로 앙천했어요. 지금 대학에 이런 저열한 인간도 있냐고 말입니다. 내가 완곡히 거절하니까 이 주임은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히고 배후에서 비방중상하여 참 이제 백일이 되어오는데 내게는 말그대로 “악몽의 백일”이지요! 그래서 곧 사직서를 내고 관둘 예정입니다.( 그후 나는 정말 사직했다. 그 주임도 자신의 비열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니까 앙심을 품고 나와의 “외교계약”을 일방적으로 중지하였다. 이 일은 일어계 교수들의 의분을 초래하여 집단적으로 그 주임을  학교규률위원회에 고소하였다…)   등:    아, 참 안됐네요. 그런 너절한 사람을 만나서 김교수같은 동아시아의 저명한 학자가 저열한 소인배를 조우했군요. 그래요. 일찍 관두시고 좋은 체험을 했다고 ,글쓰기의 소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웃음)   김:    정말 글쓰기의 좋은 소재를 무료로 제공해준 그 주임한테 감사를 드려야죠. (웃음)   등:    김선생은 일본이란 조용한 학술분위기속에서 오래 계시다 보니 중국의 대학 학술부패에 대해서 모를수 있지요. 중국대학에서 아까 그 계주임같은 인물은 너무 많아요. 우리 집사람도 역시 계주임에게는 늘 업신여김을 당하여 온 가슴 아픈 체험을 갖고 있어요.         저열하고 덕(德)도 능력도 없는 저열한 인간이 대학, 학술계에 비일비재예요.         중국의 대학이 진짜 대학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중국대학은 아문이고 기업이고 공장, 백화점, 도박장 그리고 “전선”, “토치까”이기도 해요. 물론 대학이긴 하지만 변증적으로 봐야 합니다. 대학교수는 정객같고 막료, 사장, 깡패두목같기도 하지요.(웃음)         그러니 중국의 “학계”는 오물로 찬 “상계”요 “정계”요 또한 “강호”세계이기도 합니다.   8. 조비화(粗鄙化)가 만연하는 사회   김: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상해대학 일어계 주임이란 인간같이 비열하고 악질인간이 대학에 버젓이 활개치며 발호하는 웃끼는 일에 이해가 갑니다.        제가 1985~1991년사이 중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을때만 해도 대학은 그래도 지성의 상아탑으로서 제구실을 했고 성스러운 배움의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학에는 물질면은 진화했지만 교수, 교육의 도덕, 품성은 오히려 퇴화 됐음을 발견했어요.        최근 중국에서 유행하는 단어에 “조비(粗鄙)"라는게 있는데 이는 중국인, 중국지식인의 집중적 추락을 나타내는 상징어라고 생각해요. 북경대의 전리군(钱理群)교수나 인민대학의 장명(张鸣)교수도 이 면에 깊은 우려를 자아 낸 말씀을 하셨지요. 어떤 의미에서 대중보다 글이나 읽었다는 지식인이 더 조비화로 타락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등:   (웃음) 맞는 지적입니다. 중국이란 이 신비한 땅위에서 불가사의한 희괴망칙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지요. 근년에 대학에서 선생이고 학생이고 논문, 저작을 표절하고 연구비 탐오하고… 학술부패는 정치부패에 뒤지지 않아요.   김:   (웃음)제가 상해대학의 체험을 통해《중국의 학술부패》를 주제로 책 한권 집필 예정입니다.   등:    아주 좋습니다. 중국에서 우선 출판발행하면 좋겠네요(웃음)     무한의 화중과기대학 동제병원의 소전국(肖传国)교수가 몇년전에 10만원으로 흉수를 사서 자신의 학술부정부패를 폭로한 방주자(方舟子)씨를 구타한 사건이 전국을 진감했습니다. 소씨는 그래서 “국가정상급 과학가로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하냐”고 입을 모아 질책을 받기도 했지요.        유명학자, 원사 후선인이 이런 골목 깡패들이 하는짓을 할수 있을까? 도덕차원에서 소씨를 질타한다면 너무 창백하지요. 중국에 학자교수들이 수중에 장악한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의 성과를 갈취하고 타인을 평가하고 자신을 높이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재질있는 인재를 압제하고 자신의 말만 듣는 친신만 발탁시키는 등등… 너무 흔해요.         그러나 소씨처럼 돈으로 흉수를 사서 야밤에 코추물과 망치로 라이벌을 대처하는 과학가는 처음이에요.   김:    학자이기에 앞서 우선 인격이 깡패군요!   등:  소씨는 뇌중에는 자신의 학술생애를 고귀한 정신노동이란 의식이 없는 강호세계의 저열한 인간이지요.   김:  그러니 제가 조우한 상해 모 대학의 계주임은 말단 소인에 불과하지요. 조비화가 지식인, 대학에도 만연하니 이게 큰 중국문제입니다. 그러니 등교수님이 늘 제창해온 “중국의 계몽”이 새로운 테제로 중국사회의 큰 과제가 되는건 언급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국의 계몽”을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자고 합니다. 9.  “계몽”이란 무엇인가?   등:   늘 하는 말이지만 중국현대사에서 두차례 대규모 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20세 초의 “5.4”운동이고 또 하나는 80년대의 “사상해방운동”입니다. 이를 또 “신계몽”이라고도 부르지요. “계몽”이란 개념자체 서양에서 수입한 것인데,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정의대로 한다면 “자신이 초래한 미숙( 不成熟)상태에서 해탈하는것”이지요. 여기서 미숙상태란 “미성년상태”라고도 번역하는데, 이 상태는 “자신이 조성한것이다”또는 자기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것입니다.        서양의 계몽을 두고 우리는 흔히 “자유, 평등, 박애, 민주, 공정, 개정해방”등 구호로만 보고 그 배후에 있는 심후한 토대 즉 이런 구호에 내재된 인류보편적본질의 인도주의신념을 이해하지못했습니다.   김:   미셀 푸코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하다싶이 계몽은 어느 한차례의 운동으로 한꺼번에 도달할수 있는 목표가 아니지요. 그것은 “일종 태도 정신기질이고 철학생활이며 이런 태도, 정신 기질 또는 철학생활속에서 인간에게 내함적비판, 우리에 강제된 한계있는 역사적고찰인바,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적 실험”이라 갈파했지요. 계몽이란 이런 실험으로서 자신의 미숙한 상태을 벗어나는 과정을 부단히 탐색하는 역사과정으로 끝없는 길이라고 푸코는 주장했지요.    등:   맞어요! 그러므로 아무리 서양의 계몽이념의 구호를 내걸고 줄기차게 운동을 해도 인류의 보편적 본질의식이 없는 한 지속될수 없습니다. 서양의 계몽운동은 이점을 첫시작부터 의식하고 실천해왔기때문에 성공할수 있었습니다.        계몽사상은 늘 이성(理性)을 하나의 큰 덕목으로 삼고 지성, 용기를 가미하여 실행한것이 특징적입니다.   10. 왜 20세기 두차례 “계몽”은 실패했을까?   김:   그러니까 서양의 계몽운동은 칸트 등이 제기한 것처럼 시종 일관하나 “자기자신의 미숙상태”를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정신상의 미숙,미개상태를 지성, 이성으로 과감히 타개하고 타인에 의거하거나 인솔하기를 기다리는 그런게 아니였지요.   등:   네. 그렇지요! 이것으로 중국 20세기 "5.4운동"이나 80년대 "신계몽운동"을 따져보면 하나의 선명한 특점이 있는데 이 두차례 계몽운동이 다 어떤 지도자, 인솔자 즉” 지식엘리트”들이 민중의 머리위에 군림하여 그들에 향해 “계몽” “발몽(发蒙)”한것입니다.        한자의 계몽은 아동들에게 점차 배양교육하는 뜻이 있지요. 그러므로 서양 영어의 Enlightenment(볏추다) 나 독일어의 (Aufklarung )(징명-澄明)과는 합당하지 않아요.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도 “계몽”을 사상가, 지식인들이 각종 방식으로 군중을 선전, 계발, 발동하고 인솔하여 따르는 군중이 많은걸로 계몽의 성취를 재는 기준으로 삼았어요.         중국의 계몽운동이 언제나 특별히 그 표면적인 “센세이션효과”만 중요시 하고 이론자체에 대한 심입은 없었습니다.   김:  그러니 이택후(李泽厚)선생이 지적하다싶이 20세기 "5.4운동"의 제1차 계몽운동은 “구국”(救亡)적 정치에 의해 눌리웠지요.   등:   그렇지요. 우선 계몽가치는 구국보다 응급가치가 떨어졌고 조속히 효력을 보는것이 아니였고 다음으로 일부 계몽사상가들이 동일 “계몽”논리에 따라 대중숭배 내지 대중우매숭배의 기로에 들어섰기때문입니다.        제2차 즉 80년대 계몽운동은 비록 “구국” 정치요무에서 해탈됐고, 역사문화 측면에서 제1차 계몽보다 더욱 광활한 시야와 깊는 사고가 있었지만 보편적 인성에 대한 반성면에서 여전히 서양 계몽운동의 심도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특히 계몽가치의 기본표준 즉 “이성(理性)적 사고는 여전히 표면적인 논리이성차원에 머물러있었지요.   11. 노신의 결함   김:   탁견이시군요! 서양의 계몽이 고차의 이성(理性)에 의해 성공했다면 중국의 두차레 계몽은 결국 계몽을 소리 높이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이란 문턱에서 서성거렸고, 80년대 신계몽도 역시 낡은 화제를 다시 건져올리고 번마다 빙 돌아서 원래지점으로 돌아왔으며 본질적 진척이 없었습니다.   등:   사실 중국의 계몽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아비판, 자아반성이 없이 그냥 자아전이 (转移) 자아도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중국의 계몽이 계몽의 문어귀에서 배회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가 언제나 자주적으로 계몽을 중국전통적 반역사상과 혼동했기때문이지요. 일테면 노장은사( 老庄隐士 ),위진명류 (魏晋名流),명청이단(明清异端)이런 오랜 사조와 서양근대 계몽사조가 좀 유사한데가 있는데 주류의식에 대항하여 개성을 주장하는것이 그것이죠.   김:   그러나 중국의 이런 흐름과 근대 서양계몽은 본질적으로 이질될텐데요!   등:   그래요. "5.4계몽사상"은 바로 이를 입각점으로 많은 “신청년”을 이끌었지요. 그러나 개성해방이나 독립이나 보편적 이성(理性)을 기초로 하지 않고 그냥 개인의 기질과 성정으로  또는 청춘기의 생리적소동으로 끝난다면 그대로 소실되거나 횡류하는 물욕에 의해 추락되고 맙니다. 이런 계몽은 확실히 출로가 없지요.        노신 작품중의 여위보(吕纬浦)를 보면 당년에 그도 한다하는 “신청년”으로 열광을 보였지만 열이 식자 점차 저조기와 퇴폐기로 가라앉아 생계을 위해 시골로 하향하여 《3자경》이나 가르치고 “무가무불가(无可无不可)”의 허무주의로 전락되고 말지요. 결국 이성(理性)이 결핍한거지요.!   김:   노신 자체도 그런 약점이 있은것 같은데요?   등:   네. 노신 본인도 이면에서 결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냉철한 이성으로 중국전통문화를 비판, 사고하는데는 최고차원에 도달했지만 이 무거운 전통에 대한 적개심은 늘 그냥 여조(女吊)식으로 복수단계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인적 고독, 분개와 일종의 성정으로 돼서 동류인간들의 공명을 일으킬수 있으나 보편적 사상으로 일반인의 두뇌를 무장시킬순 없었어요. 그러니 일단 시대의 풍향이 바뀌면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고 그냥 잔소리만 하는 귀찮은 영감으로 치기 일쑤였습니다.   12.  80년대의 향수   김:   좋은 말씀입니다. 기실 우리가 거듭 언급해온 이성(理性)이란 단어도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어이지요. 중국 철학에 고유한 개념은 아닙니다.   등:   그래요. 일본인이 reason 을 음역하여 한자어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웃끼는건 우리에게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사유, 즉 우리의 계몽을 반성하는 “계몽에 대한 반성”이 결핍합니다. 우리는 모든것을 회의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성을 제도로 감히 활동하지를 못하면서 이성을 가볍게 보는 그런 고약한 버릇이 있어요. 이게 전형적 아Q방식이 아닙니까?(웃음)   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선생님이나 저나 세대차이는 있지만 80년대 사상, 문화의 계몽기에 대한 공동한 문화체험을 갖고 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현대의 지식인 내지 대중들이 사상, 소질수준은 80년대보다 오히려 후퇴된것 같네요. 80년대에 대한 공동한 문화체험, 향수가 가끔 나를 유혹해요. 80년대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사상이 해방되고 활기를 띤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1984년은 조지 오웰이 동명소설에서 공포스러운 사회를 묘사했지만 중국에서는 신계몽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요. 사상계에서는 《미래을 향하여(走向未来)》 시리즈가 정식 간행. 중국문화서원이 설립되고 《독서》잡지의 주요독자는 청년지식인이 맡았지요.        그때 “문혁”이후 졸업한 대학생들이 독립적 표현을 하게 되고 역사무대로 진출했는바 문학, 영화, 인문연구 등 분야에서 전례없는 “신사조”가 출현되었으며 저도 늘 밤 늦에까지 책을 탐독하고 사고를 하였습니다.   등:   그래요! 정말로 80년대는 생기 발랄한 시대였고 모종의미에서 중국문화의 활성기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2010년대는 계몽과 모든 면에서 80년대와는 양상이 다르고 어떤면에서는 후퇴했다는 느낌이 드는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칸트, 푸코적의미의 계몽, 신계몽을 지속적으로 하는것이 우리 중국인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13.  지식인이여,  자신을 계몽하라   김:   저는 근년에 중국의 물질적진보와 인간소질이 퇴보를 “물진인퇴(物进人退)”란 4자로 표현하고 《중국인은 진화했는가?》한 일본어 저작을 출판했어요.        80년대이래  물질적부유와 함께 대중은 물론 지식인의 사상이 퇴보되었습니다. 80년대의 계몽이 실패한 이유의 하나가 지식인이 사상으로 정치를 개변하거나 또는 정치를 이용하여 계몽운동을 추진하려한 것이였습니다. 정치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큽니다.나는 정치나 타자에 의거하려는 독립성부재, 사상부재, 그리고 명예와 이익의 포로가 되어 사상도, 사명도 포기한 안일한 지식인이 중국에 너무 많은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계몽이란 타자를 강제적으로 하라고 구세주, 스승인듯 군림하기보다는 장기적 사상의 질곡속에서 자기 스스로 계몽을 하고 “이성”으로 사고를 하면서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봐요. 지식은 누굴 계몽하기전에 우선 자기 스스로를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웃음)        학술부패, 인격오염의 대학 지식인,교직원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어요.   등:   좋은 말씀이군요. 물질인퇴의 중국은 사실 지식인의 경우를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물질의 안락에 안주하여 사상을 하지 않고 명예나 이익을 갈취하고 수중의 작은 권리를 남용하여 행패를 부리는 지식인 (또는 그냥 교직생활자)이 중국에 어디 한둘입니까? 김선생이 상해대학에서 조우한 그런 주임도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고 너무 많지요. 그래서 내가 중국대학은 강호(江湖)이고 깡패무리라고 과격한 말을 했던겁니다.        우선 고차원의 계몽 운운하기전에 김선생의 지적대로 그런 비열한 후퇴한 지식인의 계몽이 필요하지요!         어제 김선생이 우리 철학계에서 한 《중일한 비교문화》강연은 정말 정채로웠습니다. 일본의 학술,청렴, 학자, 지식인들의 학술에만 정진하는 그런 학술을 할수 있는 자유, 독립의 분위기가 부럽기만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알면 알수록 따라 배울점이 많다는것을 정말 절실히 느꼈어요. 14. 시대는 변했다 그리고 계몽은 ….   김:   감사합니다. 여하튼 중국은 80년대 계몽이후 2000년대의 현재도 계몽이 자타로 절박히 필요한 시대라고 보는데요. 선생님은 신계몽을 어떻게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   20세기 두차례의 계몽은 사회구조와 경제기초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층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지요.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국정이 변하고 자연경제가 해체되고 도시화가 국민생활의 중심으로 되였습니다.       이런한 사회구조와 경제기초가 사상기초를 만들었고 이런 상황하에서 신계몽을 하면 효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럼 신계몽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요?   등:   제일 큰 특징은 소수의 지식엘리트들이 국외에서 신지식체계를 수입하여 사회문화를 개조하는게 아니라 중국사회 자체가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 지식인들께 강열한 질호를 발하는거지요. 지식인으로 하여금 신생활방식을 위하여 새로운 규범과 의식형태의 근거를 제공할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 두차례 계몽과 비교하여 순차가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일부 지식엘리트들이 높은 곳에서 군중을 동원하여 사회를 개변하려 했지만 오늘은 백성들이 문제를 보고 하층에서 지식엘리트들에게 호소하지요.   김:   꺼꾸로 하층 대중이 지식인에게 요구를 하겠군요.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대라고.   등:  그래요. 그러니 지식인이 이런 호소에 호응하지 못하면 실격이 되버리지요. 두번째 특징은 전번 두차례 계몽보다 이론적으로 중요한 추진을 하여 현실생활에 적응시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애국주의, 중화민족 진흥등 이념으로 지식인들이 호소를 했는데 오늘날 백성들에게 이런 공허한 이념이 안 먹히거든요. 그러니 지금의 계몽은 대중들의 생활과 밀접히 연결되고 일상화 계몽이 선양하는 내용이 밀착돼어야 합니다.   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등:  첫째. 신계몽의 특점은 과학으로부터 이성(理性)으로 심입해야 합니다. 이성정신에는 회의정신은 비판적 사유를 말하는데 이게 중국인에게 가장 부족하지요.  논리사고는 추리사유를 하는것인데 이러한 이성정신은 실용목적을 초월한것입니다.          두번째는 민주에서 인권으로 심입해야 하는데 이는 민중의 생활과 직접적 관계가 있고 실제에 부합되는것입니다.          세번째는 보편적가치에 대한 총체적 파악. 보편적가치 하면 서양의 개념이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무지한 생각이지요. 어떠한 보편적 가치도 모종의 문화가 승재(承载)하기 마련인데 서양문화가 승재했다하여 그것을 쉽게 부정해버리면 최종적으로 보편가치를 다 부정하게 돼버리지요.        서양의 보편적가치는 중국의 전통적 보편가치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중국전통적보편가치를 포괄한것은 사실입니다.   15.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는 무엇인가?   김:   계몽의 미래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등:   네. 우선 계몽이 해야할 일에 대해 말씀올리겠습니다. 첫째, 이성으로 천리(天理)를 대항하는겁니다. 중국전통의 천리와 이성는 판이한 개념으로서 천리는 일종 규칙인바 말로 표달하기 어려운 그런 비이성적 관습사유이지요. 이성으로 이런 천리를 타개하고 이성과 자유정신으로 천리의 “이리살인(以理杀人)”의 관습을 수습해야 해요.           두번째는 인권개념으로 자유를 재건해야 합니다. 법적으로 인간의 자유적의사와 인격의 존엄을 보호해야 하지요.                 세번째는 건전한 계몽상태를 수립하는겁니다. 백성들을 미숙한 아이로 보지 말고 건전한 심성으로 계몽에 투신해야 합니다. 만일 계몽사상가가 자신의 생각을 정치적 힘으로 변질시킨다면 계몽의 이질화(异化)가 생겨요.   김:   저도 완전 동감입니다. 요즘 국내에 자주 와서 보면 “국학열(国学热)”이 붐으로 되고 있으며 이런 국학열이 계몽을 뒤덮을 기세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이건 이상할것 없어요. 왜냐하면 중국 수천년의 관성이 바로 정체(停滞)와 후퇴를 초월로 보거나 지어는 썩고 낡은것을 신기한 보배로 여기니까요.   김:   중국의 미래에  대하여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장기적으로는 낙관적이지만 근기(近期)는 별로 희망을 안겁니다. 관용, 민주, 자유, 인권 이런 중요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팩터들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노신이 말했어요. “가장 무서운건 꿈에서 깨어나서 갈 길을 못찾는것”이라고. 오늘은 노신의 시대가 아니지요. 이미 역사환경이 거대한 변화가 생겼지요.         꿈에서 깬뒤 유일한 출로는 일상생활중 의식적으로 보편적가치를 관철하고 국제사회에 들어가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전통으로 복귀하는건 중국의 “출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죽음의 길이지요.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이 전례를 보여주었듯이 세계의 일원으로 변신하는것입니다.        결론은 계몽이야말로 현대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입니다!          (끝)   대담자 소개    등효망(邓晓芒)    저명한 철학가. 문화비평가.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 교수.  1948년생. 1979년 초중학력으로 무한대학 철학계 석사과정 입학. 1982년 석사학위 취득후 무한대 철학계 교수, 박사생지도교사, 서양철학연구소 소장 역임.       중화외국철학사학회 상무이사. 2009년 말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 교수.  주요연구영역은 독일 철학, 미학, 문화심리학, 중서비교문화등 중요저서로《思辨的张力》《冥河的摆渡者》《灵之舞》《人之境》《灵魂之旅》《新批判主意》《启蒙的进化》역서로 칸트의 《纯粹理性批判》등  
【문화대담】   왜 “은폐규칙(潜规则)”은 중국사회의 사각(死角)인가? 오사(吴思)+金文学   O.들어가면서   오사(1957년 생 )는 재야 학자로서 “潜规则”(은폐규칙), “血酬定律”(혈수법칙)을 발견한 유명지식인이다. 정규적 역사학전공코스를 밟지 않은 저널리스트출신의 역사학연구자로서 이러한 학문적발견은 한다하는 역사학 대가들도 미처 해내지 못한 업적이다.   오사는 중국현대사회와 역사의 터브를 과감히 깨고 있는 잡지 《염황춘추》(炎黄春秋)의 주필을 최근까지 맡았는데 요즘은 글쓰기와 강연으로 바삐 보내고 있다고 한다.   북경의 어느 한 호텔커피숍에서 첫 대면 했을때 오사의 인상은 조용한 기품에 신사의 풍채가 풍기는 사나이였다. 차분한 어조로 조리정연하게 말을 엮어가는 그는 허심하고 두뇌명석한 지식인이 틀림없었다. 의외로 오사씨도 나를 알고 있고 내책도 읽었던터라 우리의 대담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978년 오사는 중국인민대학 중문학부에 입학, 작가로 될 지향을 품고 입학했으나 개학 첫 날 선생님은 중문계는 작가를 육성하는 곳이 아니고 문학비평가를 육성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신문학부로 전학을 요구했지만, 아버지와 친구인 신문학부 주임이 신문학부에 와봤자 배울게 없으니 차라리 중문학부에서 공부하는게 낫다고 타일렀단다. 중문학부 졸업차로 《농민일보》기자로 입사했다. 그가 가장 숭배하는 기자는 유명한 류빈안(刘宾雁)이었다. 진실을 까발리는 용감한 기자의 사명감으로 오사는 현실생활을 반영하려 애썼다. 그러나 현실에서 오사는 은폐규칙(潜规则)에 조우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초래한 역사적 근원을 캐기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문기자라는 직업생활에서 봉착한 현실적 사례를 통해 역사를 결부하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은폐규칙”에서 “혈수법칙”(血酬定律)을 발견하여 일약 전국적으로 유명한 재야 역사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역사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짚어보는것이 오사의 글쓰기의 큰 특징이다. 오사는 대담에서 어떤 탁월한 견해를 얘기했을까? 자, 이제부터 대담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1. “은폐규칙”(潜规则)은 어떻게 발견했나?   김: 오선생님이 발견한“은폐규칙”(潜规则)은 현재 전중국인이 다 아는 명사로 보급되고 있습니다. 중국 현대사학자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중국역사의 하나의 숨은 법칙을 발견한 업적이라는 평도 있어요.      그렇다면 “은폐규칙”은 어떻게 발견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를 얘기해주시면 합니다.   오: 실례지만 김선생은 농촌으로 하향한적이 있으세요?   김: 없지만 농촌에서 태여나고 자랐습니다.   오: 그럼 이해하기가 쉽겠네요. 난 고등학교 1학년때 북경 창평현 농촌에 지식청년으로 하향갔어요. 농촌에서 노동에 시달리면서 세상에 내가 미처 모르는 암흑한 곳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두눈과 두뇌로 보고 사고하게 되었지요. 세상은 겉 말고도 뒤면에 또 다른 양상이 있다는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김: 그 뒤 기자로 뛰면서 농촌 취재중에 “은폐규칙”을 발견했다면서요?   오: 그래요. 내가 《은폐규칙(潜规则)》머리 말에서도 밝혔지만, 농촌에서 화학비료를 분배할 때, 그 분배규칙이 있어요. 서면으로 돼 있는 규칙이 있는데 사실 실제로 분배할 때는 또 다른게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명문화된 분배규칙을 한쪽으로 내세우면서 밑에서는 또 다른 규칙이 있어요. 누가 쪽지를 써주고 누가 쓴 쪽지가 쓸모 있고 또 얼마나 화학비료를 가져갈수 있도록 양까지도 규칙이 있습니다.      이런 규칙은 화학비료 분배결과 이를테면 천톤이라면 정식 서면규칙으로 분배된 양과 밑에서 슬쩍 은폐된 숨은 규칙으로 분배된 양이 얼마란걸 백분비로 계산해낼수 있지요.      내 발견에 따르면 화학비료분배문제에서 은폐규칙의 역할이 더 큰거지요. 그때는 “은폐규칙”이란 단어 말고 내부규칙(内部章程)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경에 역사를 읽으면서 특히 명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유사한 수평면하의 규칙이 큰 작용을 하고 있다는걸 알고 고민끝에 “潜规则”(은폐규칙)란 명사를 창안해냈습니다.   김: 중국 역사의 사회현상을 개괄해낸 낱말로서 의미심장한 용어이지요. 신문을 다루는 저널리스트로 어떻게 역사에 심취하게 됐습니까?   2. 명사(明史)에서 중국의 룰을 찾다   오: 현실은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명나라 역사에 관심을 둔 계기는 우리 현대사와 지근거리에 있고 또 청나라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 중국인의 참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김: 원나라처럼 이민족의 지배가 없기때문에 명료하고 사료도 복잡하지 않지요.   오: 그렇죠. 원조가 물러난 뒤 주원장이 창시한 명조는 당조의 정치규장제도를 도입하여 대명률을 제정하게 되는데 그 취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주원장의 개인숭배로 인해 그의 입법이 실제상 효과를 상실하게 됩니다.     주원장이 실시한 통치방식은 사실상 모택동시대의 정치운동과 유사했는바, 모택동시대 주원장을 답습한건 분명하지요.   김: 미국의 화교 학자 황인우(黄仁宇)의 《万历十五年》(만력15년)등 명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정말 개척적인 연구를 보여준 역작이지요. 황씨의 연구도 오선생의 연구에 참고가 되셨는지요?   오: 당연하지요. 1986년에 황씨의 이 책을 접하고 크게 개안(开眼)을 했습니다.    명나라를 쭉 보면 청렴한 관리를 도태시키거나 청렴한 관리가 추락부패하는 그런 양상을 그대로 현재 중국이 답습하고 있어요. 현재 중국의 현실은 역사를 캐보면 다 존재하고 있었지요. 황인우선생의 명나라연구를 보면 아주 뚜렷하게 우리 현실을 수백년전의 역사로 끌고가는 느낌입니다.     명나라의 은폐규칙을 보고 두터운 역사적 축적과 전통이 있는 중국현실의 은폐규칙이 얼마나 일맥상통한가를 인식하게 되었고 “은폐규칙”을 과감히 자신있게 쓰게 되었답니다.     현실을 인식하기 위하여 그 뿌리를 캐다 보니까 결국 역사를 캤고 역사와 현실을 다 어우러 썼습니다.   3. 은폐규칙의 위험성   김: “은폐규칙”이란 중국 사회현실에 뿌리깊은 객관적 구조라할까 그 존재양상이 사회나 사회도덕에 대한 어떤 악영향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오: 우리가 잘 아는 공식적인 도덕규칙을 실례로 들오봅시다. 예를 들어 군신부자(君臣父子)가 예의인데, 만일 서로 예의가 분수를 넘어서 군자를 신하가 범해도 안되고 반대로 군자가 신하에 대해 침범해도 안되지요. 만약 10%의 과세를 30~50%로 인상하면 그건 폭군이며 정책이 맹호처럼 사나운바, 이게 하나의 규칙이지요. 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진(秦)나라가 14.5년으로 망해버렸어요. 그러니 “인의 도덕” 이러한 체계는 모두가 서로 연결중 형성된 경계선(边界)이지요. 이건 백성이나 정부에 다 유리한 존재이지요.    그렇다면 “은폐규칙”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식적 공인하는 규칙,또는 도덕따위를 정의(正义)의 경계선이라고 치고 황제가 각 관리들에게 이 권리를 수여했다고 합시다. 여기엔 대리인, 대리인이 다 있지만 실제 수행할때 수하 사람들이 슬쩍 뽑아내고 갈취하고 하여 백성들을 업신여긴다면 이런것은 다 정의의 경계선을 이탈한것이고 불온정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정부가 신용없는 정부로 인식하게 되고 인심을 잃게 되죠.힘없는 개인들이 반항심이 있고 반항의 힘은 없다하더라도 나중에 결과는 사회토대가 불온해지고 극단에 이르면 사회는 붕괴되고 말지요.   김: 과연 살상력이 대단하군요! 오: 그렇죠. 은폐규칙이 있는한 매개 관원은 다 이 경계선을 침범할수 있기때문에 나는 거기에 “합법적상해권(合法伤害权)”이란 명칭을 덧붙였어요. 매 관원수중에 모두 이런 모호한 권한이 있어요.상황에 따라 당신에게 5년6년 징역이거나 벌금을 안기는 그런 모호한 권리, 그러나 아무 일이나 도가 있는 법이지요.     “은폐규칙”은 주로 관장(官场)에 유행범람하는 안보이는 규칙을 제시했는데 문제는 우리의 생활영역은 관장뿐이 아니지요. 선악응보사상이 있는데 현실은 또 다 그렇진 않죠.   김: 중국 현실의 관원의 부정부패도 다 이런 은폐규칙과 연관이 있겠군요? 그럼 오선생님은 기자생활중 은폐규칙에 따른 좌절과 곤란에 봉착한적도 있으시겠죠?   오: 당연하죠. 만약 농촌독자가 부정부패를 적발하는 고발편지가 왔을때 정말 하나 하나 실제로 처리를 하고 도와주지 못하는게 안타깝지요. 백성들이 밀고를 해도 관원은 “니들 암만 고발을 해봐, 날 어쩌질 못 할거야...”하면서 태연하게 있어요.백성들이 악한 관리를 고발해도 그 본전이 많이 들어도 별 효과를 못보는게 중국이잖습니까?     우리 기자, 편집자들도 우리 앞에 놓인 진실규칙이 무언가를 너무 잘 알지요. 헌법에 쓴거나 우리가 어떻게 보도를 해야하는가 완전 별 세계니까요. 우리 자신도 매일 갈등과 충돌속에서 헤매이고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 중국인은 매일 “은폐규칙”속에서 생활하고 있지요.(웃음)   4. “혈수법칙”이란 무엇인가?   김: 오선생님은 “은폐규칙”외에 또 “혈수법칙”이란 개념을 창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에 대해 말씀 해주시겠어요?   오: 이 두 개념은 다 중국역사를  관통한 법칙을 분석귀납한것이죠. 명문으로 명시한 법칙은 아니지만 현실사회에서 확실히 큰 작용을 일으키는 게임규칙입니다.     나는 《혈수법칙(血酬定律)》이란 저작에서 하나의 오래된 문제를 착중하여 답안을 찾으려 했어요. 즉 왜 어떤 사람은 폭력으로 임대료(租金)을 갈취하고 또한 사람들이 이에 협력하는가?      《은폐규칙(潜规则)》에서는 회색수입을 얘기했는데 더 심입하여 왜 어떤 사람은 이런 회색수입을 획득하는 자격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탐구해야 했지요.     “혈수법칙”은 바로 인간 심중에 깔린 모종의 계산방식을 탐지해내는 것입니다.노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노임(工资)이라면, 땅으로 환취하는 수익이 지세(地租)이고, 자본으로 얻는 수익이 이자(利息)라 한다면, 유혈과 목숨걸고 획득한 수익은 무엇이라 불러야 될까요? 난 이를 혈수(血酬)라고 정의 했어요.   김: 이 개념으로 비적, 강도, 깡패들이 금전재물을 갈취하는 본질을 규명 할수 있겠군요.   오: 그럼요. “혈수법칙”의 시각에서 역사를 개괄한다면, 역사를 엮어가는 과정이 바로 유혈과 생명으로 생존의 자원을 바꾸는 과정이고, 사회를 다스리는 제도가 바로 폭력으로 갈취한 생존자원을 합법화시키는 과정이지요. 김: 완전 동감입니다. 중국사를 관통한 룰이 바로 겉표면의 유교나 윤리도덕이고, 오선생님이 창안한 “은폐규칙”이나 “혈수법칙”이야 말로 중국사의 과거와 오늘날 면면이 이어진 폭력구조를 잘 체현했습니다. 왕학태선생이 제기한 “또 하나의 중국”과 잘 맞먹습니다.     왕학태선생의 또 하나의 중국이 “흑색의 사회”라면 오선생이 제기한건 “회색사회”이지요.   5. 회색지대에서 흑색사회로   오: 맞어요. 난 예전에 “회색사회”라는 용어로 설명한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각종 사회에서 “흑색”의 정도는 각기 구별이 있어요. 내 책이 혹시 독자들에게 모든 사회가 다 까마귀같이 검다는 인상을 줄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겁니다.   김: 그렇죠. 세부나 정도에서는 다 차이가 있으니까요.   오: 그래서 우리가 한가지 현대의 관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요. 즉 정부, 정권은 일방적으로 백성을 통제관리하는 기능만 있는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면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정부에 납세를 하는건 신복을 표하는게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획득한기위한 교역행위이지요.     이런 정부와 서민의 관계는 “흑사회화”(黑社会化)라고 절대 말할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공평한 교역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양자관계는 어떻게 회색 내지 흑색으로 변질 할까요?     하나의 전제정권이 있다고 칩시다. 폭력수단으로 정권을 잡은 이 집단이 정권을 수중에 장악한 뒤 절대권력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정권의 계승자들이 지적장애자거나 잔혹한 독재자거나를 막론하고 서민들은 정권을 선택할 권리가 없어요. 이렇게 정권이 회색, 지어 흑색으로 변질되고 서민들은 힘 없으니까 그냥 현실을 묵인할수 밖에 없습니다. 폭력, 무력으로 인민을 탄압하고 정권을 유지 하는게 특징입니다.   김: 문화대혁명시기의 중국정권이 그러했지요. 사실 중국의 역사도 쭉 고찰하면 하나의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6. 폭력원리의 원규칙 (元规则)   오: 그렇습니다. 양계초도 지적했지요. 중국의 역사를 펼치면 역사 자체가 곧 상작(相斫)사이라고,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모두 전쟁인바, 공개되거나 숨겨진 폭력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949-1976년의 중국 당대역사에서도 “혈수법칙”의 실례를 무수히도 찾아낼수 있지요. 토지개혁, 대약진,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거의다 폭력을 최종위협수단으로 제도를 변화하고 강제적으로 제도변경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반항능력이 없는 인민대중 개인들에게 폭력은 여지없이 탄압하는 무기였지요.     나는 이같은 폭력으로 제도를 결정하는 도리를 원규칙(元规则)이라고 명명했는데, 원규칙이란 바로 규칙을 결정 짓는 규칙을 가르키는거지요. 원규칙이란 바로 폭력이 강한자가 일체를 결정하는 규칙입니다.   김: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회학자 OISON(1932~1998)교수가 그의 저작 《권력과 번영》에서 중국의 비적을 실례로 폭력집단과 현지 시민들사이의 상호이익관계를 지적했는데 중국현실사회의 폭력원규칙이 이렇게 창궐할수 있는 이유는 그 전제적 권력정부와 함께 아래서 서민들의 “합작”을 누락시킬수 없다고 봅니다. 더 넓은 시야에서 고찰하면 중국의 폭력 원규칙은 말 잘 듣는 대다수 백성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 그렇죠. 이런 원규칙과 혈수법칙 그리고 은폐규칙이 하나같이 순순히 생기고 발전유지해온 근저에는 아무래도 사회, 역사, 대중의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중국은 여전히 “원규칙”권에서 살고 있다   김: 오선생님께 한가지 여쭙고 싶은 문제는 중국이 1976년 문화대혁명 또는 모택동시대가 종식된후 역시 이와 같은 원규칙- 은폐규칙-혈수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나요?   오: 물론 아직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혁이 종결된 표징이 바로 “4인방”의 분쇄인데, 그 뒤 개혁개방정책의 결책자들 역시 총을 지휘할수 있는 그런 권력자들이지요. 어디까지 개방하고 어디까지 개혁하냐? 이 경계선은 어떻게 설정하냐? 예를 들어 보면 결책자에 유리한 지도가가 꼭 농민의 치부(致富)에 유리하다고는 말할수 없어요. 만약 농민대중의 치부와 결책자의 지도자와 이익이 일치하다면 개방은 거기까지입니다.     만일 좀 더 심입하면 농민대중의 치부에는 유리하다하더라도 개방은 거기까지는 안 할수 있어요. 결책자의 차원에서 볼때, 의연히 우리가 말하는 “원규칙”의 작용을 받거든요.   김: 그렇다면 중국의 현실은 역시 원규칙, 은폐규칙권안에서 맴돌고 있다고 해야겠군요!   오: 그래요! 개혁개방 30여년을 쭉 보면 여러제도의 변천, 규칙변화, 개혁은 모두 규칙의 조정에 불과 한바, 사실 수평면하에서는 모두 이런 규칙(원규칙 등)의 테두리에서 이탈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종시 이런 원규칙의 지배하에서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그냥 그자리서 답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그래도 관념, 이데올로기차원에서는 많은 변용을 했을텐데요?   오: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 30여년전과 현저하게 다른건,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퇴색해가고 있는 점이지요.   8. 퇴색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   김: 이데올로기의 퇴색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얘기해주시겠어요?   오: 모택동시대에 생산성보다도 더 중요시한게 이상(理想)-공산주의를 조속히 건설하는것이었습니다. 모씨는 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수령으로 되려고 애썼는데 그는 명확히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군중노선을 걸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군중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농민의 자유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요망한다”고요.   김: 농민에게 자유를 안 준다는건 왜서이죠?   오: 왜냐면 공산주의와 충돌되기때문입니다. 모택동이후, 개혁개방시기에 이렇게 부르짓던 이데올로기도 점차 박약해졌지요. 대신에 핵심적 목표, 최대 가치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경제발전으로, 현대화 실현으로, 경제건설이 가장 큰 이념으로 전변되었습니다.그래서 이에 상응하게 경제적자유도 개방되고 우리 대중들도 확대된 자유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농민, 노동자, 상인, 자본가, 학자도 자유가 있게 되었는데 하지만 자유라해도 규칙경계선의 조정에 지나지 않지요!     최고 결책자 또는 지배자집단의 이런 조정은 농민의 이익에 부합될뿐만아니라 지배집단의 이익에도 부합되는 상부상조이지요.     개혁개방전과 개혁개방후의 제일 중대한 변화는 최고가치관의 변화지요. 이 변화로 인해 자신이익에 도움을 주는 변화가 생긴겁니다.   김: 그러니까 “원규칙”따위가 계속 작용을 하고 있다는 얘기겠군요.   오” 그렇죠! 권력에 제일 유리한 변화가 생기고 각종 조종도 따라 나선겁니다. 그러나 “원규칙”은 여전히 규칙을 결정하는 규칙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본원적인 규칙임은 변화가 없습니다.   9. 관가주의 (官家主义)라는 신개념   김: 오선생은 최근에 “관가주의”란 신개념을 제출했는데, 어떤 얘긴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오: 은폐규칙, 원규칙 및 혈수법칙의 시각으로 중국사를 관찰하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이는데 나는 “관가주의”라는 신개념으로 정의했어요. 교과서적 설법으로 말하면 진나라 한나라 이래 청조말기까지 줄곧 중국은 봉건사회라고 했지만 이건 틀린거지요. 왜냐하면 고대한어와 접목시켜 보아도 고대인들이 찬성할리 없죠. 왜냐하면 봉건제도는 진나라때 이미 “폐봉건, 입군헌”(废封建,立郡县)이란 제도와 같이 폐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봉건사회가 폐지된 군헌제에서 주인은 바로 관가 집단이니, 당연히 관가주의라 해야 타당하지요.   “관가(官家)”란 낱말은 고대한어에서 3가지 차원의 뜻이 있어요. 하나는 황제를 가리키고 두번째는 아문(衙门)이고 (현재의 공립,국립)과 같이 도로가 관가의 것이라면 관도(官道)라 했지요. 세번째는 관원 개인의 존칭이었습니다. 이 삼자가 다 주인으로 되고 법을 제정하고 규칙관념을 세울수 있었으니 “관가주의”입니다. 이런 중국사회를 나는 “관가주의 사회”라고 부릅니다. 이건 “봉건주의”나 “전제주의” “황권(皇权)전제주의”보다 더 적절하지요. 김: 관가주의가 봉건주의보다 더 적절하게 중국 역사의 사회특질을 규명하는 명칭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중국사회의 지배체제로 볼때도 이 개념은 더 정확한 제시를 했다고 보는데,관료주도의 사회인만큼 중국이 관가주의 체제하에서 은폐규칙, 원규칙 그리고 혈수의 룰이 더 스므드하게 범람할수 있는 환경과 토대가 된다고도 생각해요.   오: 맞는 말씀입니다.   10. 핵심구조변혁의 미완성   김: 중국은 30여년의 개혁개방으로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오선생의 지론대로 이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오: 생태학과 진화론의 시각에서 보아 개혁개방전의 중국사회는 물종이 희소했어요. 농민이 아닌 공사사원, 노동자가 아닌 관판기업 직공, 그리고 관료 이런건 모두 관가주의 체제에 예속된 물종이었지요. 그러나 개혁개방후 공사사원이 자작농으로 변신하고 개체호, 농촌기업가, 농촌기업자본가, 농민공... 등 물종이 풍부해졌으며, 이데올로기가 느슨해지고 경제건설을 첫자리에 놓고 하여 풍부하고 복잡하고 창조력이 있게 된 사회생태를 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관가주의의 핵심구조가 아직도 지속하고  진, 한시기이래의 2천년의 대구조가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김: 경제의 고도성장이 정치제도의 개혁을 환기시킬수 있을까요?   오: 서양에서 이런 관점이 유행했는데, 경제발전과 정치변혁 또는 헌정민주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는 타당성도 있어요. 그러나 한조목씩 검증한다면 반증도 나오지요. 인구당평균수입이 수천 수만달러의 중동석유국가중에도 여전히 정치변혁이 없지요. 인도는 인구딩평균수입이 현저하게 낮은데도 정치변혁은 얼마나 빠릅니까?     GDP나 중산계급의 비례를 들고 나와도 그 반증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 민주, 헌정이 어떻게 탄생할까를 강조하기 보다는 전제정권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얘기해야 할꺼 아닌가요? 전제권력은 꼭 무너지고 말아요. 왜냐하면 취약하기 때문에.     전제가 붕괴된담 새로운 민주정권을 수립할 개율이 높으며,또 하나의 전제정권이 일어설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나 더욱 큰 가능성은 아무래도 민주정권이지요.   11. “은폐규칙”이 소멸되는 길   김: “은폐규칙” “원규칙”등 중국의 암흑한 룰이 어떻게 소멸될수 있을까요?   오: 예를 들어서 현재 전국적으로 군체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다 제가    보건대 이익의 경계선을 조정하는 마찰이라고 생각해요. 농민의 토지권 경계선은 늘 모호했기때문에 최근 농민이 토지권익을 둘러싸고 항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권익은 농민의 소유가 아니라고도 안하고 그렇다고도 직설적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애매모호한 경계지대에서 트러불이 생기지요. 이런 쟁탈전와중에 맹 이익의 분계선이 뚜렷해지고 법규가 생기면 트러불도 적어집니다.   김: 중국 농민의 인내력 내지 감수력이 강한건 정부의 권력이 그만큼 강한 증명이 아닙니까?   오: 맞어요!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관과 민의 관계조정을 하고 은폐규칙중 피해자의 반항을 안무할수 있다면 이런 은폐규칙들도 대폭적으로 소실될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은폐규칙, 원규칙 이런 거는 다 사각(死角)이기도 해요. 쉽게 때려서 떨어뜨릴수 없는 존재이지요. 왜냐하면 법적으로 그 “사각”을 겨냥하여 청소할수 없기때문입니다.     김: 긴 대담 감사합니다. 오선생님의 말씀이 과연 중국 미래의 방향에 유익한 조언이 될것으로 믿습니다.   대담자 소개: 오사 (吴思) 저명한 역사평론가, 저널리스트  1957년 북경출생. 1982년 중국인민대학 중문계 졸업후 《농민일보》기자, 편집   1996년부터 《염황춘추》주필,사장 역임 2009년 《염황춘추》잡지 법인 대표 주요 저작으로 《潜规则》《血酬定律》등 다수    
10    왜 당대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주대가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064  추천:63  2016-11-12
〔문화대담〕 왜 당대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주대가 + 김문학     O. 들어가면서      내가 근년래 대학강의로 상해의 문턱을 자주 드나들면서 주대가교수와 나는 어느사이 호형호제의 벗으로 돼버렸다.   주대가는 누구인가? 당연히 주대가 (酒大家)가 아니다.  朱大可란 이름의 이사람은 당대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봉적 문화비평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재 중국 문화계에는 “남주북하( 南朱北何)”라는 정평이 있를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남중국에는 주대가이고, 북중국에는 하삼파( 何三坡)를 가리키는데, 북경의 작가, 비평가 하삼파는 중국의 문학, 문화는 아직도 파워가 있다고 하면서 부정적 의견을 갖는 주대가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주대가는 1957년 상해 태생, 원적은 복건성의 객가(客家)이며 화동사범대학 중문계를 졸업하고 오스트랄리아 시드니 과기대학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동제대학(同济大学) 문화비평연구소 교수로 있다.     문학평론가, 문화학자, 문화비평가와 수필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바, 80년대에 이미 중국문화계의 선봉으로서 지대한 문명을 날렸다.     당시 중국 영화문학의 모델을 비판한 글로서 전 중국을 진감하였으며 해내외에서의 명성은 당시 중국사상계의 수령인 이택후(李泽厚)와 비견했다.     평론가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젊은 패기에 넘친 주대가는 “광기의 청년”으로서 대규모의 학술세미나에서도 다른 학자, 지식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멋대로 발언을 마치고는 당장에서 퇴장하기도 했다.     1994년 전성기의 주씨는 홀연 오스트랄리아로 유학길에 오르고 방문학자, 중문미디어에 종사하기도 하다가 8년후에 다시금 귀국, “주대가의 복귀”가 그때 중국의 문화사건으로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대가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문학립스틱을 바르고 문단에서 놀다》,《상해- 정욕이 절교한다》2편의 글로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뒤 《유망의 성연》(流氓的盛宴)으로 비평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면서 문화계의 주대가 열조(朱大可热)를 일으킨다.     주대가는 이런 휘황한 경력의 주인공이다.     주씨의 최대의 매력은 그 예리하고 시리어스한 언어에 있다고 한다.  “그의 언어는 번개불에 낙전당한 전률같은 ‘통괘함’으로 인해 독자를 박장절교하게끔 만든다. 주대가는 언어연구의 프로이며 언어조종의 고수인바, 비평가인 동시에 더우기는 작가이다. 그의 비평은 작가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글쓰기는 비평가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한다.” (张守涛)     그의 독특한 이성과 감성이 믹스된 언어를 “주씨언어”라고 일컫는다. 그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냉철하고 예리에 찬 “독설(酷语)” 언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내가 처음으로 주대가를 만난것은 2년전 원단이 지난 후 쌀쌀한 날의 상해의 어느 멋있는 커피숍에서였다. 동글한 얼굴에 예지를 뿌리는 큰 눈동자가 인상적이였다. 키는 나와 비슷하여 왜소했지만, 패기가 있었으며 상상했던 그런 도고함은 없이 겸허함을 내비쳤다. 아무튼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무서운 흉신악살로 생각하는데, 기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려 3시간이나 대담을 나누었다.     주대가는 나를 그때부터 “김형”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같은 직업, 같은 문화비평가, 작가로서 비평의 독설언어, 시리어스한 비판정신, 세계관 등이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아끼게 되었다.     내가 금년(2016년)여름 새 핸드폰을 쓰고 위챗을 겨우 배우게 되자 그는 “김형도 이제는 시대흐름에 맞추게 됐군!”하면서  매우 흐뭇해했다.  상해에 오면 우리는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환담하군 했다. “김형, X일 저녁에 유명 문화인들이 모이는 연회가 있는데 나오라고” 하는 위챗이 오면 나는 시간 맞춰 나간다. TV에서도 보는 감독, 작가,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즐거운 미식과 환담…     주대가 교수는 중국 문화, 사회에 유니크한 견지(见地)를 지니고 우려를 자아내는 지식인이다. 그는 중국의 교육, 문화, 미래에 대하여 “노신”에 유사한 비관적 내지 비판적인 태도를 노정하고 있다.     노신의 “후계자”로 자임하는 주교수는 중국문학과 문화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성찰의식을 보이며 관망,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     수차례 대담을 아래 정리해 본다.   1. “문화공룡”이 오다    김: 중국 문화비평의 선봉이며 기수인 주교수님을 이렇게 만나서 중국문학과 문화에 관한 많은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50대–60대의 중국인에게 있어서 1980년대의 중국을 그리워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특히 지식인에게 있어서 80년대는 자유롭고도 활기에 찬 “황금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중국문학만 보더라도 “현대파”와 “신사조”라는 낱말로 규정된 일종의 선봉성적인 선구적인 탐구가 바야흐로 왕성히 전개 되었고 사상계, 학술계도 전례없는 활성기를 맞게 되지요.      가평요, 막언, 마원, 홍봉, 소동, 여화…등 선봉대군들이 90년대 2000년대초기의 후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에 맞추어 문학비평을 위시로 문화비평계에서도 선봉파들의 맹활약을 벌이는데, 당시의 유효파나 주선생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주선생을 작고한 비평가 胡河清이 “문화공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요!   주:  그때 지나간 사정을 잘 아시고 있네요. 80년대는 김선생 말마따나 지식계의 “황금시대”, 자유의 활약시기였습니다. 1983년 화동사대 중문계를 나온 나는 상해의 어느 대학에서 대학국문을 가르쳤는데 거이 글쓰기를 못했다가 1985년 하문대학에서 개최된 전국문예비평신방법심포지엄에 나간것이 내 “미래를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난 전혀 무명청년지식인이었는데 당시 모임에 전국에서 쟁쟁한 지식인들이 모였으니 내게 자극이 컸어요. 돌아와서 그길로 청년시대와 도시의 꿈에 관한 글을 써서 다음해 가장 전위적인 잡지《当代文艺思潮》에 발표했어요. 물론 치졸하고 살기에 찬 이 글은 운 좋게 그해 문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지요.   김: 1986년에 《谢晋电影模式的缺陷》이란 논평이 발표했지요? 나도 그 글을 읽었는데 정말 파격적인 우상파괴 였지요. 해내외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유효파의 《신시기 문화의 위기》도 그해 큰 충격을 몰고 오게 되지요.      어떻게 권위를 무시하고 우상을 파괴하는 비평을 하게 되었는지요?   2. 연경기성(年轻气盛) 의 광기   주:  80년대는 서양문명사조의 절대적 영향도 있었기 때문인지 전통, 특히는 고루한 전통문화 전통양식에 대한 반항정신이 유행했잖아요.      나 자신은 외독자인데다가 정신적으로 극도로 자유와 독립을 갈망했고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놀았기 때문에 사고를 즐기고 일단 자신이 생각했다면 자기 주장대로 하는 타입이었지요.   김: 일련의 글을 육속 발표하여 선생님은 중국비평계의 선봉적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문명을 날리면서 주선생은 “소년광기”의 도고한 인물이란 품평을 받기도 했습니다.(웃음)   주: 네. 그때 난 연경기성이라 광기가 충천했어요(웃음). 심지어 나는 당시 전국이나 지방의 규모가 큰 학술회의에서도 모든 회의 참가자들을 경시하고 자기멋대로 발언을 해버리고는 훌쩍 회의석상을 떠버리는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건 딴 사람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말이예요.   김: 알만합니다. 소년득명하고 명성이 자자하시니 원래 소년의 광기란게 있잖습니까.      그럼 소년시기 유년시기는 어떤 애였습니까?   3. 유년시기 이미 문학의 길을 닦다   주:  (웃음) 소학 중학시기 성적표의 맨 뒤에는 언제나 한결같이 판에 박은 선생님의 평어가 꼬리처럼 따랐어요.      내가 “교오자만”하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부터 남다른 오기가 있었지만 늘 흉중에 깊이 숨기고 다녔다고 할수 있지요.   김: 기실 저도 같은 경험을 늘 해왔습니다. 성적은 전반에서 최고이지만 어딘가 오만하고 오기가 있었으니 담임선생님이 그걸 조심하라는 평어를 써주셨습니다.      주선생도 조숙한 소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렸을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습니까?   주: 아, 내가 17살 나던해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나는 하루아침 “성숙”되어버렸어요. 아버지는 민주당파 인사였는데 문화혁명시기 홍위병이나 직장에서 투쟁을 받고 숱한 고생에 시달리다가 병상에서 돌아갔습니다. 임종하실적에 곁에는 나와 우리 어머님뿐이었지요. 누구나 우리 집을 멀리 했고 그때 인심은 사막같이 삭막했으니까요.   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주: 매우 인자하시고 관용성있는 성품이었지요. 어머니는 학교 음악교원을 하다가 어문 교원을 했는데 아주 엄한 성격이고 잘 웃지도 않는 여성이어서 난 한번도 어머니 앞에서 감히 응석부리질 못했다니까요. 어머니가 교편 잡은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는 늘 다른 학생과 같이 나를 엄격히 대했습니다.      내가 지금도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것은 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기때문이고. 아버지는 역사교원이었는데 그 영향에 역사를 나는 무지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내가 늘 기대했던것보다 잘 했던 까닭이지요.   김: 굉장한 독서가였겠네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구만요!   주: 네. 소학교를 졸업하기도전에 중국 4대명작을 다 읽어버렸어요. 내가 12살, 13살쯤에 부모님이 교편을 잡은 두 학교의 도서관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 독서를 했고 중학교에 들어서서는 서양고전문학을 일일히 열독을 했답니다.   4. 조국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기    김: 아, 유년, 소년시기 이미 탄탄한 문학의 길을 닦아놓으셨습니다. 해외 유학, 학위 공부등 인생경력에서 나와 주선생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데요. 나의 경우 사실 해외 유학생활, 정착생활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고양식, 가치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론, 글쓰기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주선생은 오스트랄리아란 영어권 나라에서 유학, 학위공부를 하면서 해외생활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주: 사실 나의 유학생활은 김선생처럼 풍후한 장학금을 받으며 윤택하진 못했습니다.      오스트랄리아에서 난 한 신문사 주필을 하다가 또 실업의 고배도 마시고 그 다음엔 별 일을 다 해봤어요. 건축공사장에서 석고판을 다지기도, 소제공을 해보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광고회사, 상장회사에서 인터넷사이트의 책임자로도 있어 봤고 가장 길게 해 본것이 4년동안 한 신문사 총편집을 맡은겁니다. 그뒤로 시드니이공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귀국했지요.      나는 유학, 외국생활은 내 인생에서 매우 멋있는 둘도 없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을 떠나 해외에서 조국을 객관화시켜 관망하는 기회와 시각이 생겼으니까요.      이런 방법, 시각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포괄하여 태어나서 자란 조국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안목은 나의 비평을 전례없는 차원으로 향상시킬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 오스트랄리아 재주시 주선생이 창설한 “문화선봉”이란 사이트가 중국지식계와 해외 중국인 지식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주: 그렇지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외에서 중국을 관찰, 반성하는 시각에서 글들이 많이 나갔으니까 의미가 컸습니다.      1999년 오스트랄리아에서 쓴 문학비평논집 《聒噪的时代》를 출간하자, 국내 문학계에서는 주대가가 “부활”했다고 야단이었지요. 그리고 2001년 귀국해버렸습니다. 중국문학문화비평은 아직도 중국본토에서 해야하고, 내가 모어로 창작을 하니 아무래도 중국이 아니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오랫동안 영어권에서 살다보니 스트레스도 받고 하여 귀국했지요.   5. 문화비평의 신경계   김: 주선생의 중국문화계에 남긴 업적은 아무래도 문학, 문화비평의 신경계를 개척했다는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귀국후 평론가, 네티즌의 말에 따르면 “주대가의 귀국”은 그 자체가 문화사건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문단에 큰 선풍을 몰고올것이라 분분히 예측했답니다. 예측은 적중되고, 대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주선생은 여러편의 글과 역작인 《流氓的盛宴》 《话语的闪电》 《21世纪中国文化地图》《记忆的红皮书》등 육속 출판하였습니다.     《流氓的盛宴》 한권으로 이미 새로운 문화비평의 경지를 열었고 전국적으로 “주대가붐”을 일으켰지요. 뭐니뭐니해도 주대가의 최대 매력은 그 언어의 예리함과 사색의 섬세함에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나도 그때 일본에서 주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시리어스한 언어, 래디컬한 비판문체에 심히 공감을 했어요.   주: 평론가들은 뭐 내 언어를 두고 “주씨언어(朱氏话语)”라고 격찬을 합니다. 번개치는 격렬함과 통쾌함, 감성과 이성이 조합된 정채로운 비유와 은유, 그리고 신조어들이 멋있다고 야단이었어요.   김: 밀란쿤데라가 말했다싶이, 언어의 은유는 그 나라민족의 문화언어환경속에서 시적인 예지의 서술적책략입니다. 주선생은 언어를 조종하는 마술사적인 능숙함으로 독자를 어느덧 그 속으로 빨려들이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어 어문의 언어를 통쾌림리 그 자체이지요.      혹시 언어의 특별한 수련을 하셨거나 롤랑 바르트 언어레트릭을 배우신건 아닌가요?(웃음)   주: 내가 언어에 민감하고 어렸을때부터 독서, 작문을 통해서 언어에 신경을 쓰고 의도적으로 어떻게 매력적인 언어구사를 할것인가에 부심을 했어요. 제가 생각컨대 진정하게 위대한 선지자는 종래로 계몽,계시자로서 그들은 언제나 언어를 통하여 견정하게 진솔한 정보와 진실의 사실을 전달하며, 또한 이런 도경의 방법을 개변하기도 합니다.   6. 독설문화는 어떻게 생겼나?   김: 저 역시 문명비평가로서 의도적으로 글쓰기에서 언어 표현양식, 문체를 여러가지의 레토릭, 시리어스한 언어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독자를 공감시키는 시도를 해왔고, 또 그게 저의 문체특징으로도 됐어요. 비평가들은 “독설문체”를 창립했다고 하는데, 저는 주선생의 문체특징에서 중국비평계에 대한 큰 공헌의 하나가 酷语(혹어)라 칭해지는 독설(毒舌)문화의 정착이라고 생각됩니다.   주: 맞어요.나는 문자미궁을 의식적으로 고심경영하면서 혹어, 색어라고 칭해지는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주씨언어”라는것은 우선 준확한 판단과 영양가로 비평의 파워를 현시하고 그 다음으로 은유를 조합함으로써 예리하고 기발하며 풍부한 사상을 체현하는것이며, 문화나 시대에 대한 민첩하고도 심각한 성찰을 하는데 있습니다.   김: 어느 비평가가 평하기를 “주대가의 비평과의 조우는 번개에 맞은 감각이다. 간단한 문자가 고장(股掌)지중에서 기묘한 조합을 이룬다.”     그리고 저명한 비평가 호하청(胡河清)은 “주대가는 미래 중국문학사의 한분의 대사급 인물이다”고 하면서 “그의 목소리, 정신경계는 대사급 경계의 표징이다"고 격상했습니다.   주: (웃음) 호하청씨는 생전에 친한 문우이기도 했는데, 친구로서 좀 과찬이지요. 그리고 칭찬과 동시에 나는 많은 평사와 네티즌의 격렬한 부정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김: 그러나 주선생의 “주씨언어”나 그에 의해 줄줄이 이어지는 사상의 함양과 비평의 매력은 그 누구도 부정할순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난에 반격을 안 하시나요?   주: 반격도 자기변언도 안해요! 관점이 같지 않은 자가 서로 쟁론을 해봤자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는것도 아니고 최종 누가 누구를 설복하지 못하고 구설만 낭비하고 말거든요.      차라리 자기자신의 창조적 활동에 몰두하는편이 퍽 낫습니다.(웃음)   7. 중국문단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인가?   김: 동감입니다! 저 역시 비난자들에 대해 일체 무시합니다. 왜냐면 욕말에 쓸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때문이지요. 화제를 바꾸자면, 중국문화, 문단에 관한 얘긴데 저는 세계적 시야로 보아 1990년대에 들어서서 문학이 점차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근년래 인터넷, 핸드폰이 전통적 문학읽기방식을 붕괴시키고 있으므로 “문학의 빈곤시대”라고 칭하고 싶어요. 이 점에 대해 선생님의 탁견을 듣고자 합니다.   주: 맞는 말씀이예요! 중국문화사를 회고해 보면 쉽게 발견되는데, 문화와 과학기술은 상반대로서 문화는 진화가 아닌 퇴화의 일도를 걷고 있어요. 중국문학의 고봉기는 선전(先秦)시기에 존재했고 그 뒤로는 당송, 근대,현당대문학은 우리에게 문학퇴화의 궤적을 전시해주고 있습니다.      보세요. 중국에서 발생한 문화영역의 3차 “어문혁명” 즉 한자혁명(간체자), 한자서사방식혁명(가로쓰기), 그리고 어음혁명(보통말)은 중국문명의 현대성을 정립시키지 못했고 되려 역사전통, 고전문화, 지역문화와 약소 소수민족문화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김: 그럼 당대문학에 이르러서는 어찌 되였습니까?   주:  70후, 80후, 90후 내지 2000후 이런 세대간 단층법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건 저급적인 구분이고 젊은 문학일수록 더 좋아질거라는 우리의 환상을 조장시킬뿐입니다.      문학의 퇴화에 따른 도서 출판인과 매니저들의 도에 넘친 판매책이나 미디어의 그 많은 저질 문학상품에 대한 과대포장선전이 문단의 쓰레기화 효과를 자초해버렸지요.      21세기 현재 중국문화의 최대의 문제입니다. 출판상인들의 졸렬한 판매수법과 뇌물을 먹은 비평가들의 억지 예찬은 립스틱처럼 금방 나온 출판물에 마구 발라놓아서 책에서는 모조품의 싸구려광택이 나지요.      이건 훼멸성적인 상업”炒作”이고 기실 작가를 죽이고 작품을 죽이고 말아요. 그러니 중국문단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핀잔을 들어도 할말이 없습니다.(웃음)   8. 문학의 쇠퇴와 첩화(蝶化)   김: 사실 문학의 위축과 자아폐쇄, 사망에 관한 화두는 전세계적범위에서 전개된지 오라지요. 노벨문학상 자체도 “2류화”로 다운되는 운명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 자체가 근원은 바로 문학자체의 글로벌적인 쇠퇴와 다운에 있다고 보고 싶어요.   주: 그렇습니다. 제가 보건대 중국문화에 대해서 말하면 그 자기폐쇄와 쇠퇴는 3가지 측면에서 원인을 캘수 있어요. 1. 20세기 80년대이래 활약한 현역작가들이 대부분 쇠퇴의 주기에 들어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대작가가 아직 성숙되지 못함으로서 세대 단층이 생긴겁니다. 2. 중상주의(重商主义)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학에서도 시장점유률이 작가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주요기준으로 되었는바, 이런 보편적 금전 지상주의가 문학의 영혼과 창조력을 부식시켰고 따라서 전 문단의 쓰레기를 양산시키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3. 영화.TV, 넷트웍, 게임등의 발전흥기로 인해 전통문화의 생장공간을 압축시켰고 진짜 재질있는 작가와 가치성있는 작품이 공중의 인정을 받을수 없게 만들어 결국 문학은 쇠패의 심연으로 밀어넣었지요.   김: 탁론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또 한가지는 문학을 에워싼 대환경 보다도 문학자체의 변화, 변질에도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주: 맞어요. 종이 인쇄에 의한 전통적 열독방법으로서의 문학이 수천년 흥성기를 누리다가 21세기에 꼭 기필코 쇠퇴하기로 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매스컴시대 그것을 꼭 무너뜨려야 할 상대이니까요. 신매스컴이 우선 문학의 독자를 분쇄시키고 그들을 문학에서 따돌렸기때문에 이로써 작가들의 신념을 붕괴시키고 문학을 일종의 무시당하는 “페기물”로 전략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재 바야흐로 나비처럼 탈변하여 옛날 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매체를 이용하여 영화,TV, 게임, 단신, 위챗등 여러 쟝르로 탈바꿈하여 문화현장에 되돌아 옵니다.      “첩화”된 문학을 화려한 “신물종”으로 변신했음에도 우리는 계속 그 고루한 껍떼기를 붙잡고 그의 사망을 슬퍼하여 울고 있습니다.(웃음)   9. 왜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김:  중국은 현재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자신감도 획득했고 “문화번영”을 국책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데 문화비평가로서 주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  역사적으로 볼때, 문학을 포괄한 중국의 유교문화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과시했고 아무리 강대했다해도 세계의 공간적으로 보면 매우 제한되여 있었습니다.      중국이 문화에서 미국문화의 독점상태를 격파하고 세계적범위안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는 문화대국이 되자면 아직 머나먼 길을 걸어야 됩니다.   김: 세계를 지배할수 있는만큼의 이념체계, 지식체계, 가치체계를 정립하고 “유연한 파워”가 구비되는게 급선무겠지요.   주: 그래요. 우선 “유연한 파워”의 문화실력이 구비되는데, 유연한 실력이 세계적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러자면 4가지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봐요. 1. 유력한 독립, 자유, 비판적인 인문정신 2. 독특하고 탁월한 원창(原创), 창신, 창의의 특징 3. 인류의 공통적 가치를 추구하여 협애한 민족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4. 지역과 민족의 역사문화전통을 전승하고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 개방적.   김: 그렇다면 중국문화번영이 어려운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  그 이유는 금방 말한 4가지 기준에 부합되기는 커녕 오히려 상반되는 방향으로 중국이 가고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 상황을 보면, 첫째로는 견유(犬儒)주의, 노예근성에 지배되여 있고 둘째로는 산채(山寨)주의에 지배된 나머지 창조의 에너지와 생태가 상실되고 있지요. 셋째로는 종족주의, 협애한 민족주의의 포로로 되고있으며 네번째는 공리적 물질주의와 위국학 (伪国学)에 엄밀히 포위되어 자아초월과 상상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문화상태하에서 이런 병폐들이 치유되지 않으면 중국문화의 자아번영은 영원히 백주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10. 대사(大师)조작의 대약진운동   김:  “문화번영”화두와 연결된 화제인데요. 근년 중국에 자주 오면서 볼라니까 중국은 “문화번영”의 기상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 특히 문화영역에서 “대사”를 만드는 대약진운동 비슷한 이벤트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실지로 나는 자칭 “××대사”라고 명함에 버젓이 찍어서 자기선전을 하는 화가, 서예가도 심심잖게 보고 웃었어요.   주: (웃음) 잘 보아냈네요. 요즘 중국은 “문화대사”계보를 만드는데 열중하고 무슨 “영웅”이요 “종사”(宗师)요,  “태두”요 “거장”이요 하면서 화려한 단어를 늘어놓으면서 국민의 자신감을 돋구어 주자고 합니다.      대륙에서 “대사”를 자주적으로 만드는데는 3가지 비결이 있어요. 1. 우선 그 “대사”는 초인간적인 재질이 있어야 하는데 비범한 기억력이 그것이지요. 이면에서는 전인각(陈寅恪) 과 전종서(钱钟书)의 사적을 과대포장한것 보면 이내 알수 있습니다. 2. 그리고 “대사”의 신체적 조건으로서 장수, 천수가 “대사”의 절대 조건이에요. 보세요. “문학대사” 冰心, 巴金, 钟敬文, “국화대사” 刘海粟 黄永玉 등도 90세이상이고 백세 넘은 사람들이지요. 3. 묘당(庙堂)과 강호(江湖)사이에서 독무를 출줄 알고 구레나룻이나 수염을 날리며 적절한 시기에 눈물을 흘리며 대중들에게 권장을 하는 테크닉이 있어야 하지요. 이른바, 눈물대사(含泪大师)이지요. 사실 중국 “대사”는 신체적 서사(叙事)의 금메달 달아주기 운동, 이벤트로서 그건 각 지역마다 “이미지공정”이고 민간에서는 일종의 엄중한 “문화조급증”을 의미합니다.   김: (웃음) 정채로운 비유와 독설이군요!   주: 기실 “대사만들기”는 문화위기에 대한 우려심을 완화시키고 의도적으로 “문화번영”의 가상을 인공적으로 제작하는겁니다.       솔직히 말하여 20세기 하반기이래 중국의 토양에서는 한그루의 “대사”라 칭할수 있는 식물이 생장하지 못했잖습니까?!      “위조대사” 역시 새빨간 문화립스틱을 창백한 입술에 발라서 이 인문정신이 결여한 빈곤의 문화시대를 분식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지요.   11. 원한이여, 안녕   김: 주선생은 노신의 “원한정치학”에 대하여 최초로 제기한 비평가의 한사람입니다. 2001년에 발표한 《殖民地鲁迅和仇恨政治学的崛起》라는 등 글을 통하여 노신의 연애와 결혼에서 나타난 인격적 결함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노신비판”의 선봉의 한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작 《流氓的盛宴》에서 “仇恨政治学”(원한 정치학)이란 신개념을 제출하고 증오에 찬 노신의 언어와 모택동의 언어가 방법론적으로 결합하여 중국의 “원한정치학”을 결성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지적으로서 현실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주:  중학시대 문혁후기에 나는 《노신전집》을 통독했으며 노신의 언어체계에서 자랐으니 모종의 의미에서 나는 “노신의 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웃음) 나는 1994~1999년에 오스트랄리아의 생활에서 내 심성이 인류화로 나아갔고 해외에서 이성으로 민족정신과 민족성격을 반성하는 계기를 가졌어요.   김:  이해가 갑니다. 해외에서 중국의 내실을 객관화시켜 정찰하는 찬스를    주:  노신을 반성하는것은 신문화운동의 전체적 반성의 일환이기도 하며 초창기 노신과 만년의 상해시기의 노신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완전히 동감입니다.   주:  북경시대의 노신은 중국 현대 가장 탁월한 작가이지만 상해시기에는 변모합니다. 만년에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원한, 증오만 남았어요. 그의 만년의 “원한정치학”은 또 역사폭력언어의 원천이 됩니다. 이게 노신의 비극이고 시대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상해시기 노신은 거이 한다하는 유명 문인, 지식인은 다 골고루 욕하고 인신공격을 하는데 노신의 욕을 먹은 지식인은 해방후기에도 계속 수난을 당합니다.      노신의 그런 인신공격의 방식은 20세기 하반의 폭력언어에 격진적인 모델과 도덕적 합리성을 제공하게 되지요.   김: 맞아요. 노신이 만년에 상해시기 거의 소설, 문학창작은 손떼고 잡문이라는 인신공격으로 타자를 공격하는데 정력을 기울입니다. 제가 노신 연구를 하면서 보니, 노신은 잡문으로 당시 유명인을 욕하면 발표가 쉽고 원고료가 금방 들어오니 생계의 수단으로 그런 잡문을 대량적으로 집필 발표했다고 봅니다. 그도 인간이고 처자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니까요. 이 점은 연구자들은 홀시하고 있습니다.   주:  그렇지요. 상해시기 노골적인 증오, 원한이 노신의 뇌리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일부분은 공공적 요소, 내지 “민중을 위한 증오”였고 대부분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습니다. 문혁시기 노신식의 원한이 중국언어의 중요한 무기로 이용당하게 되는데 노신을 반성하는건 우리 자신의 반성이며 우리가 그런 유치하고 노골적인 인신공격의 증오학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신의 유산을 계승한다면 그런 원한학은 버리고 그의 독립, 자유적 비판정신을 따라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2. 일체문명은 개방속에서 성장한다.   김:  2014년 6월 출간한 선생의 상하권 대작 《华夏上古神系》를 잘 배독했습니다. 이 저작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 문화비평의 유연한 산문성격과 달리 학술성이 지극이 농후한 바, 중국신화에 대한 인류학, 고고학, 사회학, 비평학, 심리학등 여러 영역의 고찰이 돋보입니다.      주선생의 학문, 비평의 큰 전환이라고 봐도 괜찮습니까?   주:  그렇다고 얘기해도 무방하겠지요. 2000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의 쇠퇴이고 시장의 개방으로 대중의 문화적 소비가 커지고 나도 대중문화 비평으로 전향했지요. 그래서 문화비평을 하다보니까 전지구의 상고신화를 발견하고 전세계의 신의 이름이 다 똑같다는 발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미엘문명, 인도문명, 이란문명 또는 중국문명 그리고 머나먼 마야문명, 정도는 부동하지만 동일문명이 파열하여 그 파편속에서 생성 발전된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  주선생은 이 장편대작을 통하여 중국신화의 생성발전은 물론 중국 역사중의 “허위제작”문화를 까발리기도 하고, 국학이 중국의 보수, 독자성을 증명하려는 자폐성이라 지적하기도 하면서 일체 문명은 장폐쇄속에서 자라나고 발전하는게 아니라 연결속에서, 관계망속에서 개방속에서 이어진다는 도리를 알기 쉽게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으면서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선생이 일본어를 알고 계셨다면 이 저작이 더 풍부한 용량의 대작이 됐을거라는 아쉬움입니다.       왜냐하면 상고신화에 대한 일본학계의 연구는 방대하고 치밀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의 연구업적을 참고하면 이 책이 많이 보완되고 완벽성에 가까워 질것입니다.   주:  아, 그렇습니까? 일본어를 모르니까 이면에서는 큰 손해네요. 그럼 앞으로 김교수의 자료, 문헌적 지원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상고신화에 대한 투철한 이해없이 선진(先秦)철학에 대한 진상을 알길없으며 따라서 중국문화의 정신적 본원을 탐명하는데 지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21세기신문화운동”에 그리고 중국문화의 미래적 부활에 일조가 되리라는 염원에서 이 저작을 써냈습니다.   김:  좋습니다. 금후의 학술이나 비평에서의 구상을 얘기해주시겠습니까?   주:  요즘은 인터넷시대, 스마트폰 시대라 나는 여기를 무대로 계속 대중을 위한 학술, 문화비평가로서 현역에 있고 싶어요. 물론 젏은 시절의 격렬한 문체보다도 좀 부드러운 문체로 글을 쓸 생각이고 양보다는 질을 따지면서 쓸 예정입니다. 글쓰는 내가 글을 안 쓰면 내가 아니니까요!     대담자 소개   주대가 (朱大可) 당대 중국 가장 영향력있는 문화비평가, 문화학자의 한 사람. 1957년 상해에서 출생 1983년 화동사범대학 중문계 졸업 2004년 시드니과기대학 철학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제대학 문화비평연구중심 교수   문화학자, 비평가 및 수필작가로서 그는 20세기 80년대 문화비평의 선봉, 기수로 전위문화의 중요한 수호자로 나섰다. 근년에는 중국문화연구와 비평에 종사하며 문화철학, 상고신화, 당대  대중문화등 영역에서 활약하며 사상과 문체는 독자적으로 일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문화연구와 비평에 지대한 영향을 과시하고 있다.  
9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나? [전리군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414  추천:40  2016-10-28
〔문화대담〕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나?  전리군(钱理群)+김문학 o. 들어가면서    전리군선생은 당대 중국 인문학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거물이다.    북경대학 중국문학계열의 권위적인 교수이며, 1980년대이래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을 과시해온 인문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노신, 주작인 연구의 태두로서 알려져 있다. 전교수의 20세기중국지식인의 정신사적 고찰과 20세기 중국사경험의 반성과 총화는 국내와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리군교수의 여러 저작을 읽으면서 그의 팬으로 되었으며, 내심에서 전교수를 존경하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배견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은 심정도 매우 간절했다.     의외로 나의 소망은 생각보다 조속히 찾아왔다. 중국사회과학원 왕학태선생과 북경대학 중문계 주임 진효명 교수의 연줄로 쉽게 전리군선생과 연결이 되었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전리군교수의 목소리는 약간 쉰소리에 자장(磁场)이 있는 부드러운 소리였다. “아, 일본에 계시는 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군요. 동아시아 3국비교 문화론저를 여러권 읽어서 벌써 알고 있었답니다.” 내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전교수 말씀에는 매우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아, 근데 어쩌죠? 내가 현재 북경시내에 살지 않고 창평(昌平)의 노인아파트에서 아내와 둘이서 살고 있어요. 북경시내서 여기까지 오시려면 불편하실텐데요…” “고까짓것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죠! 전선생님을 뵈울수 있다면 바다를 건너서라도 찾아갈수 있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야 너무 환영하지요! 그러잖아도 김문학씨를 한번 만나뵙고 싶었던 차라, 그럼 여차여차하게 오시면 됩니다.’ 전선생은 차근차근 주소와 오는 길을 가르쳐주셨다. 2016년 6월29일 오후 2시, 우리 일행이 도착한 목적지는 호화로운 5성급 호텔수준의 노인아파트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동그란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 인자한 노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전교수는 흔히 길거리에서 볼수있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작은 두눈은 예지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요근년에는 기자의 인터뷰를 포괄해서 거이 사람을 안 만나요. 김선생은 일본에서 온 귀한 손님이고 또 한번 만나보고 싶던차라, 잘 오셨어요…” 싱글벙글 전리군선생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반겨주셨다.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중국 인문학계의 태두이신 전선생님과 대담을 할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대담은 호흡이 잘 맞았으며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어느 사이 3시간이 흘렀다. 웅변가이신 전교수님은 종횡무진으로 구수하게 이야기를 펼쳐 나 또한 유쾌한 대담을 체험할수 있었다. 대담이 종료되자, 전교수님은 나에게 흔쾌히 제사(题词)를 써주셨다. “两脚踏三国大地,一心评东亚文明” 이 14자야 말로 내가 하고 싶었고 또 실천하고 있는 좌우명이다. 전리군선생과의 3시간의 대담을 아래에  간추려서 정리 해본다. 1. 행동하는 지식인 김: 전선생님은 말그대로 당대 중국을 대표하는 인문학계 학자의 한분으로서 현대문학, 사상,사회연구에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제가 전선생님을 존경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선생님의 몸에 모든 수식어를 빼놓고도 선생님은 자신의 이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학자, 지식인의 본보기라는 점 입니다.       2002년 북경대학 교단을 떠난뒤로 중학교육에 혼신을 다해 실천해오셨습니다. 장장 12년동안 기층 중학교육에 투신했지만 많은 고배를 마셨고 실패를 했지만 선생님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실천에서 또 많은 소중한 체험,경험들을 통해 교훈이나 방법을 모색했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은 왜 대학교수직에서 정년퇴직 하신 다음  중학교육에 투신하셨는지요? 서재에서 글이나 쓰면서 정년퇴직후 생활을 얼마든지 즐길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전: 사실 난 1998년부터 중학교 어문교육에 관심을 가졌어요. 관심을 가진 동기는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의 문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교육문제라고 느꼈습니다. 인간이 노년에 들어서면 모든것을 다 보아내고 절망할수 있지만 유일하게 아이들한테는 절망 할수 없지요. 애들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절망에 반항할수 있거든요.     두번째로 대학교수가 중학으로 내려가는 것은 5.4의 전통이지요. 노신, 주작인,주자청도 다 중학교원을 한적 있잖습니까?     그래서 내가 우선 선택한 곳이 내가 18년동안 살았던 귀주였지요. 여기서 향토교재《귀주독본》을 편찬하여 “자신의 발밑을 알자”는 과제를 제기하고 변두리지역에서 교육을 전개시켰어요. 그전에 북경등 중앙지역에서 하다보니까 이데올로기의 장애물이 너무 컸거든요. 10여년동안 중학교육실천속에서 수많은 곤난에 봉착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아무튼 헛수고가 아닌 실천이었다고 자부합니다. 2. 무엇이 우리의 교육을 망치는가? 김:  2002년 퇴직후부터 2014년 12년동안 전선생님의 기층교육을 위한 실천, 눈물겨운 노력은 전 교육계, 학술계가 알아주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스스로 고백하다싶이 “누전누패 누패누전(屡战屡败,屡败屡战)”의 고난의 길어었어요. 그럼 중국의 교육 개혁에서 장애물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전: 지금 교육 개혁의 장애물은 관념문제가 아니예요. 바로 이익문제입니다. 교육 전체가 이익의 연쇄로 되었는데 이 연쇄는 굉장히 큰 괴물인거예요. 교육 행정부문만 아니라 거기에 연관된 모든 분야, 심지어 과목, 교과서, 보호자까지도 다 그러하지요!     이를테면 응시교육을 소질교육으로 전변시키겠는가? 어림도 없어요! 왜냐면 응시교육을 제거해버리면 많은 사람들이 철밥통이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없어집니다. 그러니 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기 마련이지요. 내가 중학교육에 개입하여 이런 교혁을 하자고 했지만 죽기살기로 날 몰아 쫓아내는 거에요. 이유야 불보듯 뻔하죠. 내가 그네들의 이익을 건드렸으니까요. 내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근본 이익을 침범했으니까 날 구축하는거죠(웃음) 김: 그러니까 중국교육은 이미 실이익이란 괴물에 완전히 점령당해버린거군요! 2014년 선생님께서는 고령이시기도 하고 중학교육에서 손을 뗀다고 하셨는데, 교육에 관심을 뗐다는 말씀은 아닌것 같습니다. 3. “대문제 • 소행동” 전: 물론 아니죠. 사실 저는 학자라기보다는 교육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원은 내 기질이나 이상에 더 맞는 직업이라 생각하거든요. 김: 실지로 선생님의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게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것보다 더 심각하고 정채롭다고 했습니다. 전: 맞어요. 내 학술저작도 기실은 엄격한 학자의 연구성과라기보다는 한 교원의 강의라 하는게 낫지요. 청년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제가 책 쓰기를 즐기거든요.(웃음) 김: 선생님은 행동하는 지식인, 사상가로서 “큰 문제를 생각하고 작은 행동을 실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의 “생명존재방식”이라고 어느 책에서 고백하셨습니다. 전: 솔직히 고백하여 이 말에는 현실앞에서 무가내하와 구체적 반항의 뜻이 내포돼 있는거죠. 이런 체제, 현실중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되도록 독립적인 진솔한 목소리를 내고 각성자, 비판자로 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겁니다. 언제나 자신의 독립사고를 견지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되, 자신이 하고 싶은, 할수 있는 일을 하며 사회에 유익한 작은 일들을 하는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일상생활의 논리와 구체적 행동에 옮기는것입니다.     제가 《평민교육인문독본》을 시리즈로 편찬한것도, 《자원봉사자문화총서》를 펴낸것도 구체적 작은 행동의 일환으로 한 사소한 일이지요. 김: 정말 선생님께서는 중국사회, 교육에 사소한 행동으로 큰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전: 요즘은 두문불출, 중학교육에서 손을 떼고 “교육밖에서 교육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진정한 교육자는 교육에만 관심할것이 아니라 교육을 초월하여 사회와 사회변혁을 관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상자, 교육자로서의 실천 신념은 한마디에요. 즉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4. 지금 왜 노신인가? 김: 과연 정채로운 좌우명입니다. 전선생님은 교육가로서 정말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전선생님은 중국 당대 노신연구의 태두로서, 노신에 관한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근년래 중국 학계, 교육계에서도 노신에 대한 의논이 분분한데 선생님은 노신에 대해 요즘 어떤 사고를 하고 계십니까? 전: 내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는 노신이 당대 중국에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대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청소년들에게 노신의 의의를 거듭 강조하면서 노신을 읽으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김: 노신의 당대적 의의, 매우 매력적인 테제이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노신이 우리에게 특수한 의의가 있는것은 다른 작가와 달리 현재에도 현실적 의의가 있다는 거지요. 노신은 여전히 현재 진행적인 존재이며 그 존재적 가치를 크게 발산하고 있습니다. 오늘 중국에 있어서 노신의 의의는 매우 중대하고 심원합니다.     노신은 우수한 비판성자원(批判性资源)입니다. 간단하게 실례를 들어서 근년래 중국의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있는 와중에 노신의 이 분야에 관한 적절하고 심각한 학견, 논술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비판과 반성의 자원을 제공해주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원창성(原创性)적이고 또한 원천성(源泉性)적이기 때문입니다. 5. 노신의 참 모습 김: 투철한 지적입니다. 장기간 중국에서는 노신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왜곡당한 부분이 많았지요. “横眉冷对千夫指,俯首甘为孺子牛”라는 투사로만 부각시키고 경외할수만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신화적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노신은 “투사”의 얼굴뿐이 아니지요. 부모의 아들, 아버지, 남편, 청년의 지도자, 작가 그리고 미술애호가 등 여러가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으면서, 비판성이 강하고 또한 인자한 아버지로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맞어요. 노신의 참모습, 노신에 대한 기본인식을 잘 해야 합니다. 노신이 직면한 문제는 중국의 구체적 현실문제였는데, 문제에 대한 사고,해석은 지극히 심각한바, 아무 현실문제가 그에게 있어서는 민족문화, 지어는 세계문화에 대한 추궁으로 전향되고 인간성과 국민성에 대한 해부로 승화되지요.     그럼으로 노신의 작품은 현실과 보편성과 잘 결부되고 그 시대성을 초월하여 초시대적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노신의 글을 읽으면 마치 그가 오늘 우리가운데 살아 있는것같은 느낌이지요. 내가 늘 말하군 하지만, 어떤 작가는 그 시대에 국한된 작가, 과거의 작가이지만 노신은 아닙니다. 그는 오늘 현재 진행형의 작가로서 오늘의 의의를 지니고 있는겁니다. 김: 지당한 말씁이십니다. 노신은 사실 1980년대중반까지 줄곧 “민족혁명”의 화두로만 휩싸여 온 혁명의 “성인”이었지요. 전선생님을 위시로한 노신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노신이 신단(神坛)에서 서서히 내려와 참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노신에 대한 극단적인 숭배와 극단적 폄훼도 다 노신의 참 모습을 흐리게 하지요. 전선생님의 노신의 당대적 의의는 너무 적절하고 의의 깊은 지적입니다. 6. 노신의 당대적 의의 전: 노신의 당대적 의의에 대해 말하자면 아까도 언급했지만, 노신은 우리에게 풍부한 사상적,비판적 자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한 노신의 사고는 우리가 오늘 중국을 인식하는데 어떤 의의가 있을까? 나는 이런 몇개 측면으로 보고 있어요     어떻게 중국 국정(国情)을 이해 할것인가 하는 문제.노신은 《随感录五十四》에서 중국 사회의 상태는 몇세기를 하나로 묶은거와 같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구체적 문장은 인용하지 않지만 중국 상황에 대한 노신의 명제는 지극히 심각해요. 중국문제의 복잡성, 다종 사회형태와 문제가 하나의 시공속에 공존한다고 지적한 곳에서 당대 중국도 역시 북경 상해와 같은 후현대사회, 서부지역과 같은 현대 내지 전근대사회가 공존하는 시기라는것을 연상할수있어요. 이게 중국의 기본 국정입니다. 김: 각종 사회발전단계의 공시성(共时性)사회가 곧 중국의 현실이고 큰 문제이기도 하지요.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서 관찰하면 일본이 포스트모더니즘 한국, 대만이 그 뒤를 따르고 북한이 전근대사회, 중국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전근대가 뒤섞인 사회덩어리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공동체가 잘 안되는 이유도 이 사회발전단계의 갭이 격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내부 발전단계의 갭이 큰 문제는 중국의 문제를 산생하는 온상이기도 하지요. 전: 그렇지요. 중국문제의 다양성, 복잡성은 한가지 논리,한가지 사유로 관통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신의 국정 해석은 우리에게 문제를 바라보는 풍부한 계시를 주고 있습니다.     노신은 또 《文化偏至论》에서 한 말인데요. 1907년 일본유학때 쓴 글인데 중국에는 동시에 두가지 병증이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옛것은 중국 자신에서 자생하는 병이고 오늘의 것은 교통의 발달로 생긴 병으로서 이것으로 중국이 망가지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쇼크를 받았습니다. 20세기 초에 노신의 말이 바로 오늘 중국의 현실을 적중한 말이지요. 중국의 고유의 전제주의의 폐단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발전이 갖고온 서양문명의 폐단. 오늘의 중국은 바로 이 두가지 병폐에 걸린 시대이지요. 노신의 중국 실정에 대한 분석판단은 바로 오늘 중국의 현실에 대한 기본적 판단이라고 할수 있어요. 7. 누가 중국의 개혁을 가로 막는가? 김: 노신은 국제주의적 시야로 중국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당시 중국의 현실 개혁에 관한 글들은 많은 잡문을 통해서 발설했는데, 이 면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 중국의 개혁에 대해 노신은 그의 《小杂感》이란 글에서 이런 지적을 합니다. “曾经阔气的复古,正在阔气的要革新,要改革”  이 말엔 사실 매우 심각한 의미가 포괄돼 있지요. 누가 어떻게 개혁을 하고 개혁의 에너지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노신의 분석은 3가지로 분류했는바, 첫번째는 “曾经阔气” 했던자들이 현재 실세하여 개혁을 하고자 하는데 개혁의 방향은 곧 “复古”입니다. 모택동시대로 회복하자는 논조가 바로 이거지요.     두번째는 “正在阔气的”한 자들이 현상태를 유지하자고 고집하는바, 중국모델론, 中国模式论자가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김: 이는 기득이익자들의 논조라고 생각됩니다. 현상유지를 통해 진일보 개혁을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전하자는 심산이 아닐까 합니다. 전: 바로 이겁니다. 이건 전형적 기득이익자들의 논리로서 우리가 이미 정확한 길을 걷고 있으니 더 이상 개혁도 필요없이 현상유지로 가자는 거지요. 그런데 개혁이 대추세이니까 그네들도 개혁을 부르짖어요. 개혁의 목적은 눈앞의 그들의 기득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얄팍한 타산에서입니다. 나는 이게 아마 중국 목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논조라고 봅니다.     세번째 개혁은 바로 “未曾阔气的人”인데, 권력도 세력도 없는 사람들이 당연히 현상 불만으로 개혁을 요구합니다. 민간개혁세력으로서 유권 (维权), 인터넷민주 (网络民主), 자원봉사자(自愿者组织) 등 방식으로 개혁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민간개혁자는 노신이 말한 “未曾阔气的人”에 속한자들이며, 내가 볼때 많은 백성,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므로 이런 민간의 개혁을 지지해야 합니다. 대다수 백성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개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되지요. 8.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나? 김: 노신을 중국의 쉑스피어, 톨스토이로 보는 학자도 적지 않습니다. 노신이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학사, 정신사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이유는 풍부하고 심각한 정신적 문화재부로 되고 있기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에서의 노신 연구가 오히려 중국보다 앞선면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노신을 자신의 아시아의 공통문화재부로 간주하고 있기때문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노신의 당대적 의의에 대하여 정채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노신의 의의, 노신의 정신적 재부로 말하여 현재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신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전: 예, 노신은 《中国人失掉自信力了吗?》에서 매우 심각한 말을 했어요. 어문 교과서에도 나오는 문장이니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로부터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결사적으로 일하는 사람, 민중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면서 묵묵히 견인불발하게 일하는 우리 중국인의 자신감, 정신력을 높이 칭찬했지요.     나는 노신의 이 말이 우리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한가?라는 문제에 답장을 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중국인에게 수요되는 정신은 바로 견인의 정신과 또 하나는 지혜의 정신이지요. 김: 그러니까 목표를 위하여 견인불발의 의지력으로 달성할때까지 끝가지 노력하는 정신이겠군요? 전: 그렇지요. 조급해 하지 말고 유장하게, 지혜를 발휘하여 부지런히 견인성있게 분발하는 정신력입니다. 노신이 제창한 정신은 중국의 현실에 딱 들어 맞습니다. 중국이란 나라에서는 노신처럼 목표를 정하고 근기있게 서서히 유장한 마음으로 부단히 애쓰는겁니다.     왜냐하면 중국 같은 체제는 일조일석으로 변하는게 아니니까 이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자신을 보전하면서 견인불발하고 또 지혜롭게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요. 9. 모택동과 노신 김: 노신의 당대적 의미에 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젊었을 때 정신적 지도자는 노신과 모택동이라고 고백한적 있지요. 초기의 노신연구에도 모택동의 영향이 있었다고 하셨으며 대만에서 《毛泽东时代与后毛泽东时代》란 저작도 간행했습니다.     제가 보건데, 노신은 사후 모택동의 몇가지 위대한 수식어에 의해 규정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신은 사후 최고의 문화 성인으로 신단으로 모셔진 반면 그 높은 신단의 그림자도 길었는바, 최고수령의 자의에 의해 이용당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된것은 노신의 불행 그 자체입니다. 사실 노신의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해석처럼 그렇게 작고 좁고 굳어진건 아니였지요. 오히려 노신의 작품은 어떤것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초시대, 초국경 의의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택동이 노신을 좋아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은 이 두 인물의 공통점 내지 유사성은 무엇인지요? 전:  (웃음) 우선 아래 몇가지 에피소드를 듣겠어요. 노신은 공산당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회의적인 태도로 관찰하였지요. 노신과 모택동사이에 이런 일화가 있었어요. 풍설봉(冯雪峰)이 모택동의 시 한 묶음을 상해에 있는 노신에게 갖다 보였는데, 《西湖•井冈山》을 읽더니 노신이 하하하 대소하면서 “모택동의 이 시에는 산대왕(山大王)의 기개가 있다”고 했어요. 풍이 모택동에게 이 말을  전하자 모택동은 나야 말로 산대왕! 혁명의 산대왕이다! 고 대소하면서 말했습니다. 모택동은 스스로 자신을 녹림대학의 호한이라고 칭했어요.     흥미로운것은 1920년대 현대평론과 노신이 논전을 벌일때, 영미파 신사들이 노신을 학비(学匪)라고 욕했는데, 노신도 답왈 “나를 비적이라 했으니만큼 나는 비적이 옳다. 어쨌단 말인가?”고 했거든요. (웃음) 김: 노신에게는 비적도 당해내지 못할 천연적인 반항의 야성(野性)이 있었지요! 전: 그래요. 모택동이 노신을 왜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 했는가? 모택동의 내심에는 그의 초기 저작에서 강열히 과시하다싶이 자신이 성인으로 될 염원이 간절했지요. 모택동이 노신을 신성화, 영웅화시킨것은 자기 자신이 바로 민족의 공전절후의 영웅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 모택동은 어느 노신기념회의에서 “노신학습과 자아개조”를 제기하면서 노신을 자아 개조계열에 넣었거든요. 노신에 대한 인식과 이용을 보면 “이용, 제한, 개조” 3단계 였는데,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지식인에 대한 책략이었고 지식인을 노신처럼 개조하는것이었습니다. 10. 나의 정신적 낙원은 어디서 오는가? 김: 사실 해방후 노신의 불행은 정치이념의 이용물로 이용당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작인도 “(노신)이 사후에 제멋대로 조종당하였는바, 기념이라고 하지만 기실 어떤것은 조롱이다”고 조취인(曹聚仁)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었습니다. 괴뢰로 조롱당하고 이용당한 지식인중 노신은 가장 심각한 전형이라고 생각됩니다. 생전에 그렇게 독립, 자유의 지식인이고 작가였던 노신이 사후에 그렇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거지요.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의 노신연구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혹시 저 같은 후학이 빈축을 살 각오를 하고 말씀드린다면 선생님은 노신에 너무 빠져들어가 “노신연구”를 객관화시키는 시야를 잃지나 않았는가 걱정되기도 합니다(웃음) 전: (웃음) 일부 무술가들이 무술에 빠져 주화입마 (走火入魔)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요. 나는 사실 아직도 노신에 깊이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 지식구조상 노신과 거대한 거리가 있다는것을 느끼고 있어요. 지금 많은 연구자들이 노신을 중국전통문화의 반역자라고 하지만, 기실 노신과 전통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불교 등 전통문화에 정통해 있지요. 우리가 여기서 거대한 격차가 있기 때문에 깊이 파고들어 갈수 없습니다. 김: 전선생님의 정신적 낙원은 노신에서 많은 자원을 얻는다고 고백했네요? 전: 그렇구 말구요! 내 정신적 낙원의 중요한 자원은 노신의 정신이 원천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노신은 이미 너무 많이 얘기하여 싫증난다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안해요. 노신은 아무리 얘기 해도 무진장한 정신재부라고 느끼거든요.     그리고 내 정신적 기지(基地)는 북경대학과 귀주, 이 두개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 중심과 변두리, 엘리트와 서민, 이런 이원구조인데 목하 학술계에서는 나같은 사람이 적지요.     이 두가지를 다 어우르는것으로 고난을 정신낙원으로 전변시키지요(웃음). 11. 일본의 노신연구가 앞서가는 이유 김: 노신연구의 태두인 선생님앞에서 이런 말씀을 올리 자면 죄송합니다만, 저도 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로서 일본에서 노신에 오랫동안 주목해 오면서 나름대로 연구도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의 노신연구에 관해 자연 주목하게 되면서 한가지 느낀 감상이라면 오히려 원산지 중국보다 일본의 노신연구가 앞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맞어요. 일본인의 노신에 대한 인식이나 연구가 오히려 중국보다 객관적으로 우수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신연구에서는 다소 “신화노신”이란 보따리를 지고 있지만, 일본은 학술자유의 사회라서 이런 보따리가 없지요. 나는 일본의 노신연구자 키야마히데오(木山英雄)와 마루야마 노보루(丸山昇) 같은 학자를 너무 좋아합니다. 노신은 거리를 두고 아까 김선생 말처럼 객관화시켜서 봐야되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서양의 연구보다 일본의 노신연구를 더 좋아해요. 서양의 연구는 좀 모자라지요. 노신은 동아시아에 속하니까, 내가 “동아시아의 노신”이란 개념을 제기 한적 있습니다. 김: 동경대학의 노신연구가인 후지이(藤井省三) 교수의 노신 연구나, 하나하나 이름을 거론할순 없지만 많은 노신연구자들의 연구는 실속있고 노신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깊은 연구를 하며 괄목할 만한 실적을 쌓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주도의 중국식 학술의 통병이있기때문에 학문연구에서 항상 일본의 뒤전에 서서 따라가고 있는 중국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예전에 중국인민대학의 손욱(孙郁)교수와도 이런 이야기를 하자 그도 내말에 찬동을 하더라고요.     선생님, 한가지 여쭙고 싶은데요, 이건 제가 선생님의 여러저작을 읽으면서 느낀 바인데 선생님의 파란만장의 인생체험과 혁명-투쟁-문혁의 과정에서 형성된 학문스타일은 저 같이 인생열력이 옅고 또한 해외에서 장기간 형성된 지식구조나 학문스타일과 굉장히 이질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듭니다.     선생님세대는 자신의 열력, 체험에서 학문이 샘 솟듯 괴어오르는 느낌이에요. 풍부한 열력을 정신적 자원으로 승화시키는 그게 너무 멋있습니다. 12. 풍부한 고통은 어떻게 정신자원으로 승화하는가? 전: 참 좋은 화제를 꺼냈네요! 1936년생인 나는 말그대로 청장년시기를 혁명과 투쟁속에서 보냈습니다. 나 자신도 문화혁명시기 반혁명으로 누명을 쓰고 내 인생의 최대 착오, 혹은 죄도 문화혁명때 지은것이지요. 문혁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인간성의 악을 유발시켜 그 악을 최대한으로 팽창시켜 인간이 금수처럼 변하고 이로부터 사회의 악을 조성한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나의 후회, 통한, 교훈등이 나로 하여금 수치를 알게 했으면 자신에 대한 반성, 해부, 비판을 하게끔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 고통을 통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미화하거나 자랑거리로 삼을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성찰하여 고통을 정신적 자원으로 승화시켜야 하지요.     나는 지식인으로서 이런 사명감을 갖고 출발했는바, 내 연구의 스타트점과 귀속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心灵的探寻》,이 저작을 쓰면서 문혁의 그림자에서 탈출했고 《丰富的痛苦-“唐吉诃德”和“哈姆雷特”的东移》등 책의 연구를 통하여 정신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김: 파금의 “진실을 말하는” 정신과 일맥상통한데가 있습니다. 선생님세대의 지식인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상태를 “풍부한 고통”으로 귀결할수 있다면 “정신적자원”으로 전변시키는것 또한 선생님세대 지식인의 지혜와 고통을 초극하는 방법론 내지 경험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젊은 지식인은 전선생님과 같은 혹독한 역사체험을 할수 없으며 영국의 문화비평가 테루이 에글레턴(Temyeagleton)이 말한 그런식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나 또는 애초부터 그런 역사의 존재를 느낄수도 체감할수도 없었다고 해야지요.     전선생님이 존경스러운것은 역사속의 자신을 그 시대환경에 돌리거나 그런 핑계로 안주함이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자각적 담당을 짊어지고 역사를 자아적 “정신자원”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진솔한 용감하고 사명감 있는 엘리트의 행동양식입니다.     그리고 아까 선생님 스스로 언급한바와같이 가장 높은곳과 가장 낮은 곳 모두 다 어우러져 청년을 위해 연결하고 일을 하는 사명감은 정말 찬미해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전: 김선생이 이렇게 예찬하시니 고맙군요(웃음)! 13. 민간의 파워, 민간의 길 김: “정신적자원”이 이제 화두가 되었는데 저는 중국인의 현시점의 정신적자원에서 가장 결핍한것이라면 신앙의 위기와 정신의 빈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전: 그렇습니다. 현재 중국이 GDP세계 제2의 대국이 되고 생활조건도 좋아졌지만, 또 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제도를 재건하고 문화를 재건하고 가치를 재건하고 생활을 재건해야 하지요.    내 생각에 이러한 재건은 아래 3가지면에서 착수해야 됩니다. 하나는 역사적 경험교훈을 총화하는것이고 또 하나는 현실에 대해서 고찰하고 조사하여 사색을 해야 하는것이며 다음 하나는 이런것을 이론적 고차원으로 제련시키는것이어야 합니다.    지식인의 최대 임무는 정신자원에 결핍한 신 가치관, 신 이념을 제공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난 역부족이지요. 내게 이론적 실력이 결핍하니까요. 그렇지만 종당에 신 일대들이 해 내리라 믿고싶어요. 김: 중국은 공자,맹자,노장의 윤리사상 말고도 세계에서 지식체계, 오리지널 독자작인 사상을 창립해야 하며 그런 면에서 공헌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관방, 민간이 함께 공동체가 되어야 할텐데요. 전: 난 관방에 대해 거의 기대를 안 걸어요! 관방이 뭘 해준다고 그럽니까? 그냥 지식인들더러 찬동하고 해석하기만을 요구할뿐인데 무슨 창조력이 있겠습니까!     나는 오히려 민간의 파워, 민간의 입장을 강조하고 싶어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민간의 길이 믿음직하지요. 물론 최후에는 아래서부터 위로,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법을 결합해야지만, 민간의 힘은 거대한겁니다. 14. 민족주의, 여기가 위험하다 김: 근년래 경제적 부유로 인해 중국의 민족주의, 문화적내셔낼리즘이 팽창하고 있는게 현저합니다. “수백년래, 중국이 이런 성세에 도달한적은 없다””돌연 세계 대국이 된 우리자신을 발견했다”등 민족주의의 자신감이 생기면서 전례없는 애국주의, 국가주의가 고양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 이러루한 것들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군국주의로 변질되기 쉬워요. 아시다싶이 세계 근대사,현대사가 이미 이 점을 입증해주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시아에서도 현대 일본이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팽창된 결과 군국주의로 변질되어 아시아 전역을 괴롭힌 과거가 바로 눈 앞에 있지요.     요즘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북조선도 그리고 중국도 민족주의, 국가주의로 서로 대항하고 있는데, 정말 역사를 거울로 삼고 교과서로 삼는다면 상호자제하고 지난날 처참한 군국주의가 발호하지 않케끔 경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기실 제가 보건데 중국에서 애국주의, 민족애를 대거 제창하고 있는 뒷면에는 되려 애국심, 민족애라는 팩터들이 결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애국, 문명, 평등, 자유… 등 이런 낱말들은 서양선진국, 특히 일본에서는 별로 잘 쓰이지 않는 사어(死语)로 될 정도지요. 중국의 화장실 소변기위에 까지도 “애국”,”문명”이란 글빨이 보이니 참 가관입니다.(웃음).  중국이 근대국가로 성장했지만, 성숙된 근대국가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성숙된 국민, 이를테면 중국에서 강조하는 공민(公民)이 아직 사회적으로 결핍하기 때문에 국민국가는 아직 미완성이지요. 15. “국민성개조”의 과제 전: 옳은 지적입니다. 중국이 경제, 물질적 생활면에서는 대폭 향상하고 부유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우리 국민의 내실 즉 소질은 큰  문제꺼리입니다.     노신이 필생을 다하여 중국 국민성개조에 정력을 기울였는데, 중국국민성의 약점이 문제였기 때문이지요. 1905년 노신은 중국이 입국(立国)하자면 관건은 우선 입인(立人)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입인이란 주로 개체적 개인의 정신자유, 독립인격을 말하거든요. 노신의 눈에서 물질이 풍부해지고 과학이 발달해도 중국인이 만약 개체적 자유, 독립인격이 없다면 중국은 현대문명국가가 아니기때문에 개체적 정신자유를 그가 추구하는 기본 목표였습니다. 김: 그러니까 아까도 선생님께서 누누이 언급하신것과 같이 노신의 당대적  의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이십니다. 전: 그래요. 노신이 중국국민성비판에 많은 것을 제기했는데 3가지만 요약해보면, 첫째로 국민성중의 노예근성문제, 두번째로 중국역사 및  근대사에 대한 노신의 판단은 일치일난(一治一乱)의 역사성과 그중에서의 노예성문제 셋째로는 중국사회에 대해 두가지 매우 준엄한 판단을 했는데, 하나는 중국민족은 식인(食人)의 민족, 사람을 잡아먹는 민족이라는거지요. 김: 사실 노신의 “식인”은 두가지 차원이 포괄됩니다. 하나는 정신적 비유이고 또 하나는 실제로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진짜 식인을 한 역사현상이지요. 《광인일기》소설을 쓰기전에 노신은 북경의 신문에서 진짜 사람고기를 먹은 신문기사를 여러번 보고 감촉이 깊었던것입니다. 전: 그렇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노신은 중국을 “문자유희의 나라”라고 지적하면서 연극을 놀고 간객에 능한 민족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결과 중국은 기만과 허위가 발호하는 나라로 되었다는겁니다. 김: 근년래 학계에서 “국민성”, 이 개념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는데, 저는 비교문화,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국민성”은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족성원중 개개인의 세부차이는 어느 민족내부나 다 존재하지만, 그 민족이 오랜 역사체험과 지리기후환경의 동일한 조건에서 배육된 국민적 성향, 민족적 성향은 유사성, 고도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지요. 전: 맞어요. 어떤 과일이나 실물이 기후, 지리조건이 다른 곳으로 이식하면 같은 종이라도 전혀 이질된 양상으로 변하는 자체가 각기 부동한 지리, 환경내지 인물환경속에서 배육된 민족성이 다르다는것을 인식하게금 하지요. 16. 정치(精致)한 이기주의자들의 천국 김: 아무튼 중국인의 소질향상은 자타의 의향을 불문하고 중국인자체의 최대의 급무라고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은 근년에 중국의 보통 국민보다도 오히려 지식인, 대학교육의 병폐속에서 육성된 엘리트들을 “정치(精致)한 이기주의자”라고 질타했습니다. 전: 제가 몇년전 무한대학 전 학장 유도옥(刘道玉)이 소집한 대학교육에 관한 모임에서 한 말입니다.(웃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의 일부 대학, 북경대학도 포괄하여 지금 바야흐로 “정치한 이기주의자”를 배양하고 있다. 그들은 고지력상수이고 세속적이고 노회하며 연기를 잘 하고 잘 발라맞추면서 체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 달성에 능하다. 이런 사람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일반 탐관오리보다 더 위행성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교육은 인간성교육에서 실패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정말 정채로운 지적입니다. 제가 지금 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느낀 점 역시 그네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세속에 물젖어 있고 실이익만 따지고 세상물정에 노련해있음이 보이고 급공근리(急功近利)적이지요. 이 나라의 인문환경, 교육이 바로 이런 사람을 육성하는 거대한 훈련장이지요. 갈검웅(葛剑雄)교수님이 중국의 교육문제는 교육의 중국문제라 하셨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만, 요즘 중국에서는 자신감이 팽창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17. 21세기는 중국의 세기인가? 전: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환상이고 노신이 갈파한것처럼 일종 자대(自大), 애국의 자대이지요.     일부 애국자들의 소원이기도 하지만, 세계 어느 하나의 문화가 세계의 중심으로 된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근년래 경제성장의 힘을 입어서 중국문화의 영향이 커지고 세인의 주목을 받는 가능성은 있어요. 그러나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 하고 중국문화가 세계를 통치한다는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김: 그렇지요. 중국이 세계를 리드할 만한 지식체계와 가치체계를 창발하지 못하는 한 세계를 통치하기는 그냥 허언(虚言) 망언(妄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 내가 보건대 21세기는 다원문화의 세기입니다. 보세요. 세계적범위에서도 어느 문화, 이념이 전세계를 통채로 지배하는건 무리이지요. 영국이 그럴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됐어요? 미국도 마찬가지로 제생각대로 잘 안되지 않습니까?(웃음)     중국이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것도 백일몽에 지나지 않아요! 중국문화가 어떻게 어떻게 될거라고 희언을 떠벌이지만 다 황당한 소리에요.     공자님이 중국을 구할순 있어도 세계를 구할순 없습니다. 그건 그냥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자원에 불과합니다. 노신을 보더라도 내가 노신을 평생 연구해왔지만, 노신의 사상이 일체를 대체한다고는 종래로 생각한적 없어요. 난 그저 노신의 사상이 일종 홀시할수 없는 정신적자원이라 생각할뿐인데, 이것도 하나의 견해이지요.     그저 이렇다는 거지요. 더 이상 무슨 큰 역활을 할수 있겠습니까? 김: 그럼 선생님은 21세기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방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내 생각에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우수한 부분을 섭취하는 방향이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양문화중에서도 일본의 경험, 인도, 한국의 경험도 우리가 중요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가야할 길은 이런것들을 다 어우르는 초월성적인 방향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담자 소개 전리군(钱理群) 당대중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자의 한사람으로서 중국에서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있는 학자. 1939년생,북경대학 중국어문학부 베테랑교수,2002년 정년퇴직.20세기 중국사상,문학과 사회에 대한 연구,특히 20세기 중국인사와 정신사적 고찰,20세기 중국경험의 총화적성찰은 해내외의 큰 중시를 받음. 북경대학 재직시 “가장 환영받는 10명 최우수교수”의 수석으로 꼽힘. 주요저작으로는 《心灵的探寻》《周作人论》《周作人传》《丰富的痛苦》《1948:天地玄黄》《与鲁迅相遇》《钱理群讲学录》《新语文读本》《我的精神自传》《一路走来—钱理群自述》등 다수.
8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하) [가평요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088  추천:61  2016-10-12
문화대담(8)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하)                           가평요(贾平凹)+ 김문학     13. 《폐도》그 이후 김: 《폐도》로 원기를 상하신 선생님은 1990년대 후반기에 착실하게 충전기를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96년에 《白夜》《土门》 98년에는 《高老庄》,2000년에는 《怀念狼》으로 부터 《秦腔》 《高兴》 《古炉》 《带灯》《极花》로 장편소설의 홍수가 쏟아냈지요.      포스트《폐도》는 의도적으로 《폐도》의 마이너스적 이미지를 만회하려는 노력이 보이는데요?   가: 그래요. 《폐도》그 이후로 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소설을 보다 순수하게 쓰며, 소설속에 형의상학적인 요소를 많이 넣으려고 했어요. 《폐도》이후 작품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그런데 아랑곳 안합니다. 아무리 날 비평, 폄훼해도 난 신경 안쓰고 내 방식으로 나아가거든요. 내가 무슨 작품을 어떻게 쓰든 다 숙명적인 인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때 모순문학상을 못탔을때 내게 문학상에 대해 물었는데 수상을 하든 못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그런것은 별 의의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나는 그냥 내 평정한 심경을 보전하면서 상을 받아도 못 받아도 계속 장인같이 꾸준히 써갑니다.   김:  2005년에 나온 《秦腔》을 그중 제가 좋아합니다.     이 소설에는 남자주인공 인생(引生)이라는 광인같은 소년이 짝사랑을 하다 못해 스스로 자신의 물건을 잘라내는 “거세”가 나오는데 , 제가 보기엔 이 거세는 바로 선생님의 자신의 글쓰기 정신사에 대한 절단이며《폐도》에 대한 절거라고 생각됩니다.   14. 순수문학 최후의 대사(大师) 가: 재미있는 지적이네요. 북경대학의 진효명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어요. 확실히 나는 《폐도》와는 다른 풍격의 소설을 노렸습니다. 후기에서도 썼지만 이 작품은 내가 최초로 전면적으로 우리 가족과 마을을 쓴 소설이지요. 현재 현대화가 진척되면서 농촌고향은 내 기억속의 고향과 너무 멀어져가고 전통문화도 나날이 상실해가고 있기때문에 나는 내 필로 닳아져 가는 고향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싶었지요. 김: 북경대학의 진효명교수는 저와 친분이 두터운 평론가인데, 그의 가평요론은 언제나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그는《폐도》가 20세기 말 90년대 중국의 도시 폐도를 썼으나 《秦腔》은 21세기 현재 중국농촌의 폐허의 풍경을 썼다고 하면서 전자는 “정신과 문화”이고 후자 역시 문화와 정신을 제시했다고 지적했어요.     《秦腔》을 통해 가선생이 도시, 황량한 도시를 관망하지 않고 자신이 나서 자란 농촌의 고향으로 글쓰기를 회전했다고 하면서 순문학의 “최후의 대사”, 또한 향토문학의 “최후의 대사”라고 극찬 했는데, 나 역시 진교수의 관점에 찬동입니다. 가: 고맙습니다. 《秦腔》은 파노라마식으로 한무리 인물들과 전 동네이야기를 써야 했기때문에 완벽한 스토리 전개를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열독시 비교적 곤란하다고 불만도 있었지요. 그뒤로 쓴 《高兴》은 그 수법을 개변하여 한,두명 주요인물만 쓰고 농촌을 떠나 시내에서 농민공으로 일하는 도시속의 농민들의 생태를 썼습니다.     만약 중국의 향토가 만구할수 없는 분리에 빠졌다고 하면, 이것은 어쩌면 시대의 진보이지요. 현재 중국이 가장 선진적인것과 가장 후진적인것이 서로 교차되였고 가장 전통적인것과 가장 현대적인것이 서로 엉키었어요.  또 도시와 농촌이 교차되고 많은 사람들이 엉켜서 사회 전환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복잡다양한 농촌의 상실과 도시로 진출한 농민공의 현실양상을 나의 “개인의 글쓰기”로써 내 시각에서 썼습니다.     15. 덜레우저의 “주름”과 일상의 세부 김: 가선생의 《秦腔》에서 시작 된 《高兴》 그리고 《古炉》《带灯》등 명작들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중국 당대 장편소설의 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가선생은 이런 소설대작을 통하여 현저하게 괄목한 성과는 유니크한 “가씨생활세부소설양식”을 창립했다는겁니다.     선생님은 스토리 전개의 명수인데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보다도 일상세부의 “조밀한 기술”이란 기법을 쓰고 있지요. 가: 맞어요. 내가 《秦腔》후기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스스로 이런 소설기법을 “밀실한 유년식서사”(密实的流年式叙事)라고 명명했어요.      농촌시골의 “生老病离死,吃喝拉撒睡”란 일상 삶과 언제나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일상”을 쓰는 방법입니다.     《홍루몽》에서의 생활의 세부를 쓰는 기법과 유사한데, 쉽게 말하면 홍루몽의 영씨과 녕씨 두집의 충돌이 완전히 두집의 생활, 귀공자 아씨들의 일상세부의 자질구레한 서술에 의해 소설의 주요 줄기로 되고 독자들도 이 세부에 말려들어가서 두집간의 충돌의 이념을 망각하고 말지요.      내가 소설에서 노린 서사적효과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야기의 생활화, 세부화를 통해 소설의 유연성과 따스함이 가미 되였습니다. 김: 당대 프랑스 사상가, 철학가인 덜레우저(1925~1995)의 “주름”이론이 생각나네요. 그는 이 세계는 “무한의 주름”으로 구성되였는바, 때로는 늘 “유한한 주름의 흔적”으로 노정된다고 주장하면서, 주름은 물질적인것과 정신적인것  이 두가지로 분류하며, 정신의 주름은 무한한 양식으로 노정되며 거기엔 잔주름이 많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소설의 일상은 세부작 주름살을 펼침으로써 그 안의 안보이던 일상세부의 잔잔한 것을 세밀히 보여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또 중요한건 그 정신적 주름살을 펴서 보여주는게 선생님의 작가적 영위입니다.     제가 그중에서도 구성이나 스토리보다도 선생님의 문학적언어가 중국작가중 가장 유니크한 스타일을 자랑하고 있다고 보는데 아무리 칭찬해도 말이 모자랄것 같아요. 선생님은 언어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니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6. 언어의 마술사 가: 언어란 무엇인가? 진정한 문학언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컨대 준확하게 정서와 사유를 표달한다면 그건 훌륭한 언어입니다. 언어는 흔히 작가의 생명과 기품과도 연관이 있지요. 그래서 언어는 지나친 분식은 필요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요란하게 울긋불긋 화려하거나 미사려구는 좋은게 아니지요. 흔히 명품도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품격이 높은겁니다. 심령의 외부적 표현으로 언어가 너무 수사에 치중한다면 오히려 수준이 떨어집니다. 김: 진정한 거물작가는 흔히 글이 평명하고 소박합니다. 언어와 글의 최고경계는 오히려 제일 간단하고 평명하고 자연스러움속에서 가장 표현력이 있으며 가장 고차원의 사유와 심령를 담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선생님은 정말 “언어의 마술사”라 해야죠. 왜냐하면 선생님의 글은 한 줄만 읽었다면 금방 선생님의 글임을 알수 있거든요. 가평요의 독특한 서사 양식, 단어, 그리고 고문과 백화문을 절묘하게 조합한 문체, 단어단어들에서 튕겨나오는 분위기들…  선생님은 당신만의 언어로 그 마술사같은 언어로 독자들의 심금을 순식간에 끌어 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가: 어느 직업의 최고경계는 다 비슷하기 마련인바, 진지(真知)를 체험했고 관통할수 있는 사람은 다 고인(高人)입니다. 이를테면 도교에서의 신선은 살아있는 실재의 인간인바 천지를 관통하고 사리에 밝지요. 인간이 인정(人精)으로 되면 곧 신선으로 되는것입니다.     인간이 정(精)으로 되고 위대해지면 한마디 말을 해도 인생의 철리요, 그 현금속에는 이미 고수준의 뭔가가 많이 쌓여있습니다.     배부른 사람이 발산하는 기가 틀리고 영혼이 포만한 사람은 에네르기가 풍부한것과 같이 문자도 신선하고 독특하게 되는 법이지요. 김: 독자들이 늘 저에게 질문해요. 글 잘쓰는 비결은 어디 있냐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자주 많이 읽고 쓰면 평명하고 간결하게 쓸수 있다고, 저는 글이 간결하고 평명하고 꾸임없는게 가장 최고경계라고 믿기때문에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초학자들은 흔히 미사려구요, 기교요 하면서 머리를 짜지만 저는 그럴수록 글은 죽는다고 생각해요. 산 글은 기교나 미사려구 없이 진솔하고 평명해야 하는것입니다.     선생님의 소설이나 산문은 진솔, 평명, 간결한 무기교의 최고 경계에 달했다고 보는데요?   17. 모든 문학작품에는 “경계”가 있어야 가: 나는 소설이나 모든 문학작품에는 “경계(境界)” 이 두글자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싶어요.     이 경계는 의경(意境)이 아니라 또 다른 단어로 말하면 “格局”(구조와 격식)입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경계” 이 단어를 좋아합니다. 경계는 꼭 장대하고 광활하고 심도있어야 해요. 그렇지만 또한 세속을 강조해야 하구요.     여기서 난 통속이라 하지 않고 세속(世俗)이라 합니다. 왜? 세속에는 인간냄새, 생활냄새가 나고 흔히 말하는 향속(乡俗)과 시속(市俗)의 냄새가 나거든요.     이처럼 아(雅)와 속(俗)은 소설의 천성이지요. 난 상아탑같은 소설이 싫고 살아 숨쉬는 소설이 좋습니다. 김: 그러므로 선생님의 소설, 산문작품에는 언제나 살아 숨쉬는 민간의 풍속이 듬뿍 들어 있고 그것은 세속적인 먹고 마시고 싸고 누고 자고 하는 세속이란 일상의 세부를 통하여 전통문화와 현대의 갈등, 당금세계 인간들의 두터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高老庄》에는 많은 더러운 습관이 묘사되고 있지만 평용한 세속의 무료함을 피하여 높은 경계에 이르고 있다고 봅니다. 가: 《高老庄》중의 일부 향속, 그 생활습관의 “더러움”을 쓴 의도는 고로장의 불행을 안타까워한겁니다. 이런 “더러움”이야 말로 그들의 고루한 문화의 죽음, 인종을 퇴화시키는 열악한 환경을 말하지요. 우리가 실생활중 가끔 이런 일에 봉착 하지요. 친구나 친척중에 어떤 사람의 바지 자크를 안 채웠거나 눈에 눈꼽이 끼었을때 나는 작은 소리로 귀뜸해주지요.     농민들의 그런 더러운 습관을 벗겨주는게 농민의 아들로서의 양지와 책임이거든요.     18.  농민과 엘리트사이에서 김: 선생님은 늘 자신을 “농민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거듭하면서 아마도 자신을 “농민의 자식”에서 아이덴티티를 규정짓는것 같습니다.      저 역시 심양근교의 중국의 조선족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습니다만, 저는 소시적부터 이 농민의 호적을 고치고 대를 가시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에 열심했고 지금까지 해외유학,석박사공부를 하면서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고 엘리트의식이 지극히 강열하게 뇌리에 각인돼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농민을 배반하여 엘리트지식인이 됐다는데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선생님께 제가 탄복하는것은 “농민”내지 “농민의 아들”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근원을 두고 있으며 농민 소재를 쓰시고 농민의 아들로서의 양지와 사명감을 지니고 계신겁니다. 가: 내가 《我是农民》이란 책 한권까지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줄창 19살까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에서 살았고 사실 지금까지도 음식습관은 거의 농민의 습관입니다. 맥주는 못마시고 소주만 마시는것도 농민습성이지요.(웃음)     어려서부터 김선생과 세대차이가 있다고 보는데, 단 일반적인 전통교육을 받은면이 많고 전통적 인소가 많지요.   김: 그리고 선생님은 “농민”이라는 “아이덴티티”로 규정하고 계시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을 전통적 사대부, 즉 전통적 문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그림이나 글속에는 현대적요소가 늘 보이며 현대지식인이라고 해도 어폐는 없겠지요.   가: 아무래도 내겐 현대적의식도 있거니와 굳이 어느게 더 비중이 무겁냐 따진다면 전통적문인쪽이겠지요. 농민식 문인, 내가 나서 자란 향촌에는 불교와 도교의 분위기가 매우 농후했답니다. 왜냐면 그곳은 기본상 교통의 경계선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지요.     하지만 현대 생활, 현대의식에 대한 선망, 학습, 흡취가 상당히 빈번했습니다. 내가 아는 우리 고향의 농민들은 겉으론 농민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상 사상은 여전히 현대적이었는데 단지 표현을 잘 안했을 따름이지요.     내가 형식을 강조하고 현대의식을 강조하지만, 나 또한 자기를 내세우는 그런 쿨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러니 겉으론 아주 전통적사대부라는 느낌을 주게 되는데 사실은 오해입니다.     나와 자주 접촉해 본 이들은 깜짝 놀라는거예요. 왜냐하면 내 사상, 사유가 그들보다도 훨씬 현대적이고 모더니즘이라고요!     그래요. 내 사유, 사상방면에는 절대 농촌의 촌스러운 구석이 없거든요. 농민의 그런 협애하고 보수적이고 자사자리한 그런 버릇이 제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김선생이 말하다시피 개인 생활면에서는 매우 전통적이지요! 모순덩어리라고 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19. 전통적 문인의 취미 김: 제가 중국의 당대 학자, 작가, 평론가 등 지식인들과 교제하면서 한가지 느낌이라면, 역시 아쉬운 부분인데요, 거의 붓글씨를 잘 쓰는 지식인을 못 봤어요. 만년필로 쓰거나 컴퓨터로 타자를 하다보니 붓을 멀리 한지도 오라지요.     제가 상대에게 싸인을 하는 붓글씨를 보고 오히려 내 붓글씨가 더 멋있다고 칭찬받습니다. 내 수준도 다 칭찬받는 정도이니, 웃끼죠.     근데 선생님은 특별해요. 제가 만난 문인가운데 진정하게 당대 최고의 “전통적문인”이라 할수 있는 까닭은 전통문인 답게 하나는 고완 수집가이시고 컬랙션도 이번에 와서 보니까 무진장 많습니다. 그리고 붓으로 서와 그림을 그리는 서화가라는 점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림이나 서를 딱 보면 금방 “가평요”품격이구나 알리지요. 가: 아, 이렇게 동양에서 온 지기가 생겨서 무척 기쁩니다!     내가 고완수장을 하는데는 사실 문물적가치나 경제적 가치를 안 따져요. 다 내 심미가치에 부합되면 그만이지요. 질박하고 대기(大气)하고 이런 분위기의 고완이 좋습니다.     나는 이런 기가 큰 기물에서 내 서예와 회화에 많은 요소를 섭취해요. 한 유명한 거물급 평론가가 내 글쓰기, 서법, 회화를 담론할때 그중에는 민간성, 전통성, 현대성이 내포돼있다고 평가했는데 난 이 말에 찬동합니다.     왜냐면 난 이면으로 의도적으로 노력을 기울였기때문이지요. 물론 보잘것 없는 수준이지만.     그러나 글쓰기야 말로 내 영구한 본업이고 서법, 회화는 과외흥취이지요. 김: 선생님의 주로 컬렉션을 보면 석(石),고토기, 도자기, 항아리가 많습니다. 이 많은 컬렉션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는 주로 서화나 문방사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가: 그럼 유명 문인들의 서예가 있겠네요? 김: 네. 예를 들어 손문, 이홍장, 오창석, 제백석, 대원군, 김윤식, 김옥균, 후쿠자와유기치,이토히로부미등 동아시아의 문인, 지식인들의 서화가 있습니다.   가: 다 거물들의 희소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네요. 김: (웃음) 그냥 취미로 하는겁니다. 제가 명인의 서화를 무지 좋아하거든요. 제가 선생님과 공감하는 부분도 “전통적문인”상이며 선생님의 서예나 회화가 상당 프로급 수준이라는데서 더 숭앙하게 됩니다. 중국에서 선생님의 묵보(墨宝)를 얻는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들었어요.   20. 서화명가로서의 가평요 가: 감사해요. 아마 내 서예와 회화중에서 회화가 더 좋은것 같아요. 그러나 난 그림은 거의 안 팔아요. 아깝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안미술학원에서도 겸직교수로 있기도 했는데 보니까 소묘를 해종일 그리게 하는데 난 나쁘지 않다고 보지만 소묘를 위한 소묘는 국화창작에 별 도움이 못돼요.     중국화에는 사의(写意)가 중요한바, 그것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의 공간을 주지요. 물론 사실(写实)은 아니고.     중국 옛날 글쓰기는 붓으로 쓰니까 간결한 문언문(고문)밖에 쓸수 없지요. 다들 내 글씨가 멋있다고 하지만, 그냥 그 정도고, 만약 옛날 고인들을 부활시키면 그들 어느 누구의 붓글씨도 다 현대 저명한 서예가 보다 훨씬 우수해요.     제생각에 현대 문인이 컴퓨터로만 쓰다보면 이제 100년, 수십년이 지나면 누가 붓글로 한자만 쓰기만 하면 다 서예가로 될수 있는거예요.   김: 재밋는 말씀이군요.     선생님의 서화 실력은 소설보다 뒤지지 않는데요. 선생님은 서예와 글쓰기 (소설)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 그건 깊이 생각한적 없습니다. 내가 서안에서 생활한지 이미 40여년이 돼오지만 여기에 이런저런 번뇌가 많아요. 그렇다고 떠날수도 없구요. 서북지역의 중심이고 난 외지사람이라 내 자신의 문학그룹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기본상 단독으로 활동하지요.     북경, 상해는 정보량이 많고 교제가 많으니까 늘 독립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여기는 교제가 적어서 홀로 있기, 사고하기가 좋은 공간입니다. 난 늘 단창필마(单枪匹马)로 글쓰는데 습관됬지요.     그리고 서안에는 전통문화가 농후하게 남아 있으므로 이런 생존환경이 생존경험을 결정짓지요. 서안에 두텁고 장대한 문화적분위기가 있기에 글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于右任, 柳青, 石鲁,张艺谋, 路遥등 명인 대가들이 많이 탄생한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서법은 문자의 형식미의 극치이고 경외인데,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홀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철학, 의학, 서법, 회화에서 우리의 사유가 나오기 마련인데요. 문자만 보더라도 형상문자이고 가장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 글러벌화, 서양화에 따라 동방인의 사유가 상실돼가고 민족문화가 상실될 위험성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지키는것이 우리 자신의 사명이 아닌가 해요.   21. “4차원문학”이란 무엇인가? 김: 저는 현실과 역사를 쓰는 명작가로서의 가선생님은 자각적으로 고차원 파노라마의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파노라마문학”이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리겠어요.     평명하게 말하여 이것은 간단한 현세문학의 모델에서 이탈하여 파노라마, 전경(全景)식 시야로 이 세상을 관망하고 글쓰는 문학의 방법입니다.     이 개념은 제가 만든 신조어 인데, 미국에 있는 저명한 문학평론가 유재복(刘再复)선생의 4차원 문학관 개념에서 힌트를 받은거지요.     유선생은 문학의 “4차원공간”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했어요. 즉 중국현대문학에는 오로지 “국가, 사회, 역사”, 이 1차원만 있을뿐, 그래서 단차론 문학이라는 거예요. 심미적 차원에서 또 다른 3차원이 모자라다는거죠. (1)  존재의 의미를 묻는 차원 이 차원에서 서양문학이 비교적 강세를 노정했는바, 카프카, 카뮤, 사르트르 등이 이 차원에 속하고 중국에 노신의 《야초》나 장애령의 《倾城之恋》이 있을뿐입니다. (2) 영성과 대화하는 차원 영성 즉 신과 대화하고 우리 지성의 한계를 넘어선 체험등을 가리키는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냐”의 문제의식입니다. (3) 자연의 차원 여기에서 자연은 대자연, 내향적 자연 즉 생명적자연입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자크 런던의 작품이 이런 차원에서 다루고 있지요. 이상 3차원과 “국가, 사회, 역사”의 차원을 합하여 “4차원문학”을 이루고 있답니다. 제가 이것을 종합하여 “4차원파노라마문학”이란 개념을 재창조했어요. 이런 “4차원파노라마문학”을 다 갖춘 작가야 말로 고차의 수준에 오른 작가라고 할수있습니다. 평론가들은  贾平凹 莫言 余华 史铁生 등 당대 작가들만이 이 레벨에 달한 작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  “4차원문학”이란 파노라마문학의 신개념은 매우 의미있습니다.     저는 이 4가지를 이론적으로 자각했다고 할수 없지만, 글쓰기에 있어서 역시 이 4차원을 의식했을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론가, 평론가가 아니니까 이론적 고차의 설명은 어렵지만 이상 4가지 차원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글쓰기를 전개한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폐도》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차원에서 이 시대 정신 추락, 신념의 붕괴와 함께 지식인의 현실적 실존경우에 대해 캐물었거든요.     제2차원에서도 말하는 소, 돌의 그림, 불명비행물, 그리고 사망, 자연의 신비에 대해서도 많이 썼습니다. 제3차원 자연에서도 산, 물, 여우, 늑대, 소, 등 자연생태와 인문생태에 연결시키자고 애썼습니다. 김: 이처럼 선생님은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문학4차원의 파노라마”의 고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제 생각에 중국작가가 앞으로 이런 수준으로 나아간다면 노벨문학상은 10년안에 또 한분 나올것입니다. 저는 틀림없이 가선생의 몫이라고 보고 있어요. 일본의 무라카미도 아시아 작가로서 가능성이 크지요.     선생님은 막언(莫言)과 막역지교로 알고 있습니다.   22. 막언(莫言)과의 막역지교 가: 저는 문단에서 서안이라는 서북 변두리에 있고 원체 성격이 내향적인데다 어눌한탓이라 그리 교제를 잘 하지 못해요.     그러나 몇몇 평론가분들과 막언씨와는 막역지교입니다. 아주 오래된 에피소드인데 어느 해 여름 북경에 있는 막언씨가 신강으로 가는 길에 서안에 들른다고 나더러 서안기차역까지 마중나오라는 연락전보가 왔습니다.     그때까지 난 막언을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기때문에 부랴부랴 종이 팻말에 “莫言” 두 글자만 써서 역전에 달려가서 기다렸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하나 나한테 말거는 사람이 없고 막언씨도 끝내 나타나질 않았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금방 위챗이나 똰씬이 되는것도 아니니까 도저히 연락할 방도도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나는 겨우 똰씬만 보내고 위챗은 할줄 몰라요. 사실 막언씨는 그날 급한 일로 서안에 오지를 못했습니다. 오후가 지나서 내가 한 승객에게 ××번 열차가 도착했냐고 물었어요. 그 사람은 내 손에 든 종이팻말을 꺼꾸로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 이제야 난 당신에게 말할수 있게 됐네요. 사실 난 그번 열차가 도착했는지 모르지요.”     (웃음) 그제야 나는 아차 하면서 팻말에 쓴 “莫言”두자를 깨달았어요.     “말하지 말라”는 이 두 글자는  참 멋있어요. 가석하게도 막언씨의 필명으로 되었습니다. 김: (웃음) 아. 그래서 끝내 못 만나셨군요. 그러고보니까 저번 선생님이 저에게 제 스마트폰으로 발신한것도 똰씬뿐이었네요.     그 뒤 막언선생과 관계는 막역지교로 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 약간 상호간 오해가 있었지만 서로 북경에서 만나고 서로 오해를 풀고 말마따나 “막역지교”로 되었습니다. 김: 사실 문학계에서는 우선 가선생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어야 할 수준인데 선생님이 교제나 자기 선전을 못하여 그렇게 됐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가: 노벨상 수상도 제가 바라는것이기도 하지만, 그게 역시 운명과도 관계 된다고 봅니다. 막언씨야 중국 당대문학의 거목이지요. 누가 받아도 다 우리 중국 문학의 영광이 아닙니까. 김: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다는 말마따나 막언씨는 가선생님을 깍듯이 존경하고 문학의 거물로 모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당대 중국문학의 두 거봉이 사이 좋게 막역지교로 지내니 참 존경스럽습니다. 보기도 좋구요.     저는 지식인들끼리 “문인상경”의 도를 넘어선 인신공격엔 신물이 납니다. 서로 돕고 존중하면 다 자신께 되돌아오는데도 말입니다. 가장 똑똑해보이면서 어리석은게 지식인인가 해요. (웃음) 가: 그러게요.(웃음)   23.  누가 나를 영향주었나? 김: 이번에는 화제를 바꾸겠는데요. 선생님은 문학의 길에서 어떤 작가를 좋아하시며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가: 사실 내 문학의 스타트점은 굉장히 낮았습니다.     초기 습작에는 글쓰기를 좋아하다 보니 늘 타인의 책을 읽고 계발을 받아서 모방하여 긁적거리기도 하고 시간이 가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열독과 열력이 넓어지면서 소설에 대한 인식이 깊게 됐습니다.     중국작가로는 손리, 심종문, 장애령,폐명을 좋아하며 또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대작가로는 庄子 陶潜 苏东坡 司马迁 蒲松龄 曹雪芹등 이 있구요.     외국 작가로서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좋아하며 《백년의 고독》을 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의 川端康成(카와바다 야스나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처음 카와바다의 작품을 접하고 그에 심취한 나머지 서점에 갈때마다 그의 작품을 찾군 했어요. 그의 한 단편하나를 읽자고 그 두터운 책을 사왔어요. 그리고 일본어번역가에게 편지를 써서 그더러 카와바다의 작품을 될수록 많이 번역해 달라고 했다니까요(웃음) 김: 카와바다는 저도 좋아합니다. 선생님은 그의 어떤 면을 좋아하하시는지요? 가: 그 작품의 맛, 그 감각이 너무나 좋아요! 그 분위기는 완전 가와바다의 독특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의 작품은 늘 나를 골치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쓰기의 궤적을 찾을수 없으니까요.     난 거듭 감개무량했어요. 세계의 작가는 두가지로 분류할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고 또 하나는 신이라고 생각 돼요. 어떤 작가는 그 작품을 읽으면서 서서히 그 규률성을 장악할수 있지만 신같은 작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해요. 그냥 선망할뿐이지요. 중국의 庄子 苏东坡나 외국의 마르크스. 타골.헤밍웨이가 그렇고 카와바다야스나리가 그런 작가입니다. 김: 카와바다는 가장 일본적인 미를 일본적인 필치로 표현하며, 그런 미의 서술양식이나 문체는 일류이지요. 제가 또 그를 좋아하는 이유의 하나는 역시 전통적 문인취미의 문사로서 미술괴집가로서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가 괴집한 컬력션에는 중국 송나라의 비취색 청자나 고려 청자도 일급품입니다. 서예가로서 또한 특색을 나타냈는데 “深奥幽玄” 이란 4자는 그의 서예에 대한 깊은 조예를 표현했어요. 가: 카와바다의 감각은 내가 배울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는 동양의 작가로서 서양 모더니즘과 일본전통의것을 잘 조합시켜 독특한 경계를 창조했다는 이점에 나는 너무 감격했어요.     그의 작품에 일본적인것과 세계적인 현대의식이 잘 믹스되어 내게 큰 계시를 주었는데 그로 인해서 나는 서양의 현대파 철학, 미학, 문학의 책을 읽고 그 영양가를 섭취한다음 또 다시 의식적으로 중국고전문학예술의 학습에 돌아오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도취했다가 내 고향에 시선을 돌리게 되어 이제 마침내 내 독자적 작품스타일을 양성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24. 영원히 육필로 글쓰기를 고집한다 김: 제가 아는 유명문인, 작가는 거의다 육필로 글쓰기를 고집 또는 견지하고 있습니다. 왕몽, 무라카미 하루키, 용응대(龙应台), 이오 (李敖), 막언(莫言), 그리고 선생님도 육필로 원고를 쓰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 자신도 수십권의 책을 다 몽블랑펜이나 수성볼펜으로 써서 원고지만 해도 제 키의 수백배나 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육필로 글쓰는 작가로서 육필로 글쓰기를 하는 작가분들께 더 동감과 존경심이 가거든요. 가: 수십년 동안 나는 만년필로 글쓰기를 고집해왔습니다.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컴퓨터에 흥취가 없고 그걸 다룰수 없으니까 그런거지요.     한때는 내가 쓴 원고를 아내가 타이핑을 해주었는데, 그녀는 문학하는 것도 아니고 문학에 관심 없는 여성인데 내 소설원고를 보고 잘 모르겠대요. 그래서 아예 딴 사람에게 타이핑을 시키지요. 김: 저는 늘 이런 말을 잘해요. 컴퓨터 건판을 때리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고 타가(打家)다. 진짜 작가는 필로 글을 써내는 사람이야만 (作家),작가와 타가의 차이는 바로 필에 있다고 (웃음) 가: (웃음) 정말 재밋는 말씀이네요!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군요. 김: 선생님의 글쓰기 스타일, 매일 어떤 스케줄로 글쓰기를 하십니까? 가: 매일 아침8시에 서재에 가서 점심 11시까지 글을 쓰고나서 11시부터 12시까지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고 한잠 잡니다. 이게 내 오랜 습관이지요. 낮잠을 잠간 잔 뒤 오후 5시까지 글쓰기를 하고 5~6시에 또 손님을 만나죠. 내 생활규률은 기본상 이 일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25. “문여기인(文如其人)”은 정말 그런가? 김: 대체로 하루 얼마만한 분량을 쓰시는지요? 가: 잘 되면 5천자, 특별히 순조로운 날엔 8천자 문제없습니다. 김: 글쓰기는 먼저 구성안을 짜고 초고를 쓰십니까? 가: 젊었을 때 산문, 중편소설을 쓸때는 초벌원고 한번 쓰고 나서 또 한번 정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대강 맥락을 잡아놓고 노트에다 초고를 적은 다음 또 한번 수정하고 그리고 원고지 뒤면에다 베낍니다.     《古炉》를 쓸때만 해도 전후로 200만자가 되는데 무려 300개 싸인펜으로 썼어요.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이 있잖습니까. 기실 어느 정도 작품을 써내야 문여기인에 달할수 있다고 봅니다. 또 “득심응수”(得心应手)란 말도 있는데 맘속으로 생각했다해도 손이 척척 말이 들어 주는건 아닙니다. 김: 저도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사실 글은 많이 읽고 써야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야 글쓰기가 쉬워집니다. 모드 기교를 떠날 때 가장 득심응수의 경계에 달했다고 할수 있지요. 가: 옛사람들의 말이 멋있어요.     “  看山是山,看水是水; 看山不是山,看水不是水;看山还是山,看水还是水”     이게 작품이나 모든 사물의 최고 경계인데 이런 경계에 이르는건 어려운 일입니다.
7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상)[가평요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5315  추천:83  2016-09-05
문화대담(7)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상)                         가평요(贾平凹)+ 김문학   들어가면서        가평요(贾平凹)는 당대 중국 최고봉의 작가이다. 작품의 양이나 질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학의 거대한 산맥을 이룬 작가라는 정평이 나 있다.     당대 문학사에서 가장 쟁논이 많고 명성을 떨친 작가로서 “가평요를 모르면 중국인이 아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는 중국문학계에서 “귀재”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거물이다.     저명한 문학평론의 대가이며 복단대학 교수인 진사화(陈思和)선생은 나의 외우이기도 하다. 내가 서안에 가서 가평요와 만나 대담을 나누도록 알선을 해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쪽의 귀재와 서쪽의 귀재의 상봉은 하나의 뉴스꺼리가 된다.”  뉴스가 될지 사건이 될지 나는 관심 없지만, 가평요씨와의 만남은 내 생애의 사건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7월12일 저녁 8시경, 비행기 연착으로 늦게 도착한 나를 찾아 서안 대담서시호텔까지 가선생이 비서와 함께 오셨다. 내가 “가선생님, 제가 절을 올릴까요?” 하면서 인사하자, 웃음으로 반기면서 그는 나를 악수한 다음 끌어 안았다. 따스한 선생의 가슴이 나를 포옹해주었다. “아, 너무 반갑습니다. 이렇게 가선생님을 뵙게 되니…” 내 말에 가선생은 이렇게 반기면서 답했다. “나도 옛날부터 김선생의 책을 좋아했어요. 일본에 오래 계신 선생을 이렇게 일찍 만날줄을 몰랐지요.” 가선생은 나와 함께 동행한 동생을 이미 예약한 호텔안 고금 중국요리점으로 안내하셨다. 가선생은 손수 갖고 온 모태주와 산도의 황주로 우리를 관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선생의 비서장인 마리여사는 나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우리 가선생님은 김교수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좋아했어요. 이번에 오신다니까 꼭 잘 환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답니다. 술도 그렇게 많이 못 마시는 편인데 오늘 기뻐서 평소보다 잘 드시고 말씀도 많이 하시는겁니다. 귀재는 역시 귀재를 알아보는거에요.” 당대 문학의 대가인 왕증기(汪曾祺)는 가평요와 좋은 사이였으며 그를 “귀재”라고 불렀다. 나는 가평요선생은 “귀재”라는 차원을 넘어선 문학의 태두, 일대 산맥이라 평하고 싶다. 가평요는 이미 틀림없이 “국민적 작가”의 대표로, 당대 문학의 산맥에서 최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다.   15일까지 나와 가평요선생은 그의 서재에서, 호텔에서, 가평요문화연구원에서 세차례나 장시간의 대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오랜 지기처럼 화기애애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심적 코드가 잘 맞았다. 키도 비슷하고 취미도 똑 같았다. 서예, 골동품 컬렉션으로서 “전통적문인”취미로 애호가 동일했다. 대담기간에 가선생은 내가 요청을 하기도 전에 흔쾌히 붓을 들어 내 서재의 재명”文华堂” 3자를 휘호해 선물했다. 동생 김명학에게도 《静而远观》이란 4자를 휘호해 선물했다. 서예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한 가선생의 붓글씨를 거금으로 사는 사람도 많았다. 한중일 3국에서 출판과 영화사업을 하는 동생은 가선생의 묵보(墨宝)를 가보(家宝)로 소중히 하겠노라 싱글벙글했다. 가평요선생의 작품, 창작, 재질, 그리고 사상과 교양, 인품은 모두 일급이다. 가평요가 없었더라면 중국문학은 얼마나 허전했을까고 나는 늘 생각하군 한다. 사실 나는 가평요와의 대담을 한권의 책 《김문학, 가평요와의 대화》로 묶을 예정이며, 종합적 논평서 《가평요의 문학제국》을 집필 출간예정으로 있다. 올 가을께 가평요선생의 초청으로 문화강연을 하게 되며, 또 계속하여 대담을 나누며 가선생과 함께 가선생의 창작무대로 된 그의 고향, 상주를 일주하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3차례 대담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외부의 일체 지장을 차단하기 위하여 서다. 아래 대담은 3차례의 장시간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 한 것임을 밝혀둔다. 상, 하 두편으로 구성된다.     1. 당대문학의 기적은 어떻게 창출했나? 김: 가선생님, 제가 지금 이렇게 선생님과 동석하여 대화를 나눌수 있는 자체도 저는 신비로운 영성의 힘이 도와주었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은 30여년 중국 당대문학의 살아 있는 증인이기도 하며, “중국문단의 기적”이라는 정평이 있어요. 지금까지 110권의 작품집에 한자로 천만자를 넘는 거대한 한어문학을 창출해냈습니다. 소설, 시가, 문론, 서법, 회화,등 여러 영역의 예술장르에서 모두 걸출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이는 목전 세계 중국어로 글쓰는 문화권에서는 전인미답의 쾌거입니다.        개혁개방후 많은 문인작가들이 하해(下海)를 하여 중도하차를 했지만, 선생님은 서안이라는 이 고도에서 독실한 신도같이 문학에 생명을 걸고 종시일관하게 창작을 견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룩한 실적도 경이로운 기적 그 자체이지요! 무엇이 선생님의 창작을 지탱하게끔 했습니까?   가: 사실 여러가지 현란한 껍데기를 한층한층 베끼고 나면 나는 결국 “농민”입니다. 잘 생긴 미남도 아니요. 그렇다고 남들과 같이 청산유수의 웅변가도 아니지요. 어눌하고 사교를 좋아하지 않고 고독을 좋아 하는게 내 성격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자신을 “계란광주리를 들고 붐비는 장마당을 걷는 사람”이라 비유해요. 사람들속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사람들을 피할수밖에 없지요.가장 큰 자유는 마음의 자유이거든요. 나는 글쓰기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고, 또 제가 사교도 못하고 장사도 못하고 아첨도 못하니 장끼는 글쓰기, 그림그리기 밖에 없으니 할수 있은건 이것밖에 없지요. 아무영역이나 혼신을 다해서 전념하고 고집하다보면 물론 공 드린 만큼 성과도 나오게 됩니다. 글쓰기는 내 삶의 전부이고 또 삶 자체이기고 하지요.   2. 귀재. 그리고 미문(美文)의 탄생   김:  아, 기적은 이렇게 이루어졌군요!     선생님은 문단에서 이미 “천재”를 초월한 귀재, 기재, 괴재라는 별명으로 통합니다. 저는 소년시절 문학공부를 할때 선생님의 산문, 수필을 너무 좋아했어요. 선생님은 소설에 앞서 산문으로 우선 문명을 날렸으며 산문은 그야말로 미문이었습니다. 일테면 《月迹》(1982년)에 나오는 “丑石”라든가 “访兰”과 같은 명수필은 제가 습작시 많이 모방해온 범문이었지요.   가: 1972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서북대학 중문계시절인데 주로 문예이야기를 쓰다가 산문창작으로 넘어 갔어요. 당시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든 작가는 천진에 계신 손리(孙犁)선생입니다.  표지가 없는 산문집을 탐독하다보니까 작자가 손리였지요. 제가 선생님께 팬레터를 써보내면 꼭꼭 답장을 해주었고 우린 망년지교로 되었어요. 1982년  첫 산문집《月迹》을 손선생의 추천으로 백화문예출판사서 간행하게 되었고, 손선생님은 또 손수 머리말까지 써주셨지요. 그해 천진에 손선생님을 찾아갔을때 선생님은 친히 물만두까지 빚어서 환대를 해주는데, 작별할때는 내게 물만두를 싸주기도 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어느 글에서 손리 다음엔 심종문(沈从文),장애령에 심취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시기 굉장한 독서광이었지요?   가: 예. 그때는 사실 뭐 읽을꺼리가 없었거든요. 내가 소학 4,5학년땐가 삼촌집에 놀러 갔다가 3권으로 된 《홍루몽》을 발견하고 그걸 읽다가 몰래 훔쳐서 집으로 갔고 왔어요. 보풀이 일도록 읽다가 결국 책도둑이 발각돼 삼촌이 와서 책을 회수 해 갔지요(웃음)   김: (웃음) 소년 “공을기”이시군요!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책도둑을 했지요. 문학 소년은 다 비슷한 체험을 갖고 있는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작품에는 《홍루몽》이나 《수호전》의 서사양식이 깔려있어요.   3. 전통과 현대사이에서 글쓰기   가: 그래요. 근대, 현대 중국문학의 근저에는 《홍루몽》《수호전》의 전통서사모델이 있어요. 명청 백화소설의 전통이 농후한것은 중국의 사정이고 전통이기도 해요. 심종문, 장애령, 폐명, 그리고 임어당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들의 전통이 내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선생님의 산문, 소설에는 중후한 중국전통이 관철돼 있으면서 때로는 서양 현대양식을 조합한 양상이 보이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관찰한데 따르면 가선생님은 “의식의 흐름”이나 “모더니즘”등 새로운 전위적 수법, 조류에 대해 대항하거나 의도적으로 가늠하는 태도로 조심함을 보이고 있는것 같습니다.   가: 예를 들어 먹는것으로 말하면 난 안 먹기로 하면 죽어도 아니 먹고, 먹는다 하면 죽도록 많이 먹는 타입이에요. 작가란 지식, 정보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하지만, 중요한건 독립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는 지혜가 아니죠. 서양의 사조가 중국에 들어오면 쉽게 작아지고 영혼을 잃어버릴수 있어요.      80년대 나는 서양 신사조에 열중했는데 내 문학관념은 거의 다 미술이론에서 힘을 입었어요. 중국 미술계가 문학계보다 서양문화를 수용하는데는 언제나 한걸음 앞었으니까요. 나도 현대적 글을 더러 쓰기도 했지만, 거기에 푹 몰두하진 않았습니다.   김: 관찰자적 아웃사이더란 말씀이네요?   가: 그래요. 나는 영원히 신 사물을 환영하지만, 나는 늘 그것을 관찰, 연구하면서 강기슭에서 관찰하고 관망해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물을 건너는가 세심히 보면서 내가 어느 곳이 깊고 옅은가를 눈여겨 보는거예요.   4. “자기 자신의 독특한 길을 걸어라”   김: 제가 보건대 선생님은 산문에서 소설로 전향한 다음 1980년대 후반 장편소설《浮躁》로 부터 이미 자신의 독자적 문학의 길을 형성하고 걷게된것 같아요. 중국 작가로서 이 장편소설로 최초로 미국의 美孚飞马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가: 국제문학상을 받은건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내가 이것으로 내 독자적 문학의 길을 걷게된 심벌이기도 합니다. 1985년의《浮躁》이후 나는 농촌과 상주(商州)이야기를 시리즈로 소설 창작함으로써 내 자신의 유니크한 풍격, 방향을 형성하게 되었지요. 나는 지금도 내가 택한 길이 옳았다고 확신을 합니다.   김: 1987년 작가출판사에서 간행한《浮躁》를 읽으면서 저는 작가의 언어적 매력과 현실중국의 농촌개혁묘사에 탄복했어요. 장차 노신과 같은 대작가의 탄생이라고 혀를 차면서 읽었답니다. 노신화가 《伤痕》 으로 당대문학의 “상처문학”의 장을 열었다면, 선생님은 이《浮躁》로 들떠 있는 중국 80년대의 시대를 귀납했지요.   가:  “浮躁”라는 단어가 내 소설로 인해 중국에 널리 사용된건 사실입니다. 현실 개혁와중의 들뜬 심경을 포착했지만 저는 여전히 이 작품에 대해 맘에 안들어요. 나 역시 이 작품을 쓸 무렵 마음이 浮躁해 있었거든요.(웃음)     5. 작가는 무엇인가?   김: 가선생님은 작가로서 글쓰기의 프로패셔널중의 프로패서널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1979년 겨울 결혼날에 원고지를 신령으로 제단에 모시고 손수 경례를 했다는 에피소드는 너무 감격적이었어요. 문학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혹애와 적자(赤子)의 마음이 잘 나타냈습니다.   가: 어떤 문단 호사가들이 날 두고 “글쓰기를 위해 글 쓰는 작가”라고 투정 대지만, 난 결국 작가니까 글쓰기에 전념하는게 내 일이잖아요. 목공은 가구를 만드는게 목공이고 요리사는 요리를 만드는게 요리사가 아닌가요!      작가가 글 아니쓰고 딴거 하면 작가가 아니지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하는게 아닙니까? 나는 숫벌이지만 여왕벌은 아니지요.여왕벌은 맛있는걸 먹을수 있으나 여전히 하는 일은 후대번식이니까요!   김: 《四十岁说》이란 수필에서 선생님은 글쓰기의 “문도”(文道)에 대한 감오나 많은 작가의 프로적 학견을 피로했어요. 참 멋있는 명문입니다.   가: 거기서도 내가 쓰다시피, 작가란 사실 수공예인과 같아서 글을 잘 쓰면 수공일을 잘 한것과 마찬가지지요. 내 일이 잘 되면 스스로 기쁘고 또 남을 유열(愉悦)시킵니다. 아주 간단한 도리에요. 만약 작가란 직업이 가장 마음이 자유롭다 한다면 또한 상반대로 가장 겉모양을 꾸밀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작가와 저열한 작가는 여기서 갈라지는거죠.   6. 먼 이계(异界)를 위하여   김: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겠습니만, 선생님과 저는 글쓰기의 작법과 관념에서 많이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어요. 수년전 제가 요녕신문 기자의 인터뷰에서 조선족 글쓰기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닫혀진 감성의 폐역(闭域)에서 끌어내어 이적인 세계 즉 이계(异界)를 보여주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안주하고 있는 세계에서 귀렬(龟裂)을 뚫고 참신한것들이 거기서 분출돼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포와 불안같은 경험이기도 하며, 또한 해방, 해탈, 유쾌, 괘감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동시에 가능케 해주는게 곧 문학이나 사상의 힘이다.”   가: 아주 멋진 말입니다. 작가, 좋은 작가라면 사회인생에 대한 태도를 표현해야 하며 이 태도는 자신의 것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인간, 내지 인류의 것을 표달해야 합니다. 근대 중국에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学为体,西学为用)이란 관용어가 있는데, 문학에서 말하면 서양의 글쓰기 기교만 수용한다는 뜻이 되겠지만, 난 이 말에 늘 결함이 있다고 여겨요. 중국의 종교철학이나 서양의 그것은 구경 다 최고의 경계는 일치합니다.   김: 그렇죠. 따지고 보면 최고차에서는 거이 동일한 차원을 이루고 있지요.   가: 그래요. 구름위에는 다 찬란한 해빛인것과 같지요. 문제는 그 양광아래 각양각색의 운우나 풍설이 제각기 다채로운 양상과 미학을 자랑하고 있는겁니다. 여기서 동서양인의 사유방법수준을 분석해야 하죠. 수묵화와 유화, 희곡과 화극, 중의와 서의… 동양의 정체감 중시와 서양의 실험분석 중시를 인식해야 하며 그 독립성과 풍부성을 알아서 구름층을 넘어서 인류지고의 상통한 경계로 가야하지요.     “ 가장 민족적인게 세계적이다”는 언설을 난 그리 찬성하지 않아요. 이 “민족적”인게 인류 최후의 상통한 경계를 갖춰졌나가 관건 포인트입니다.   김: 맞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것, 내것만 고집하여 그것을 쓰는것도 좋지만 열린 작가라면 먼 이계, 이성을 위해 그들을 겨냥하여 글발을 쓴다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멀리 후세에도 100년뒤. 500년뒤에서 남을 작품을 탄생시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봤을 때 중국작가들이 정치적 대환경하에서 쓰고 있는것은 안일한 현실터치에 가미된 이데올로기입니다. 아이러니 하게 이런 이데올로기적 작품은 더 좁은 폐색(闭塞)화 시키고 타자, 세계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수 없지요. 작가라면 의례 우선 ”아득히 먼 독자”에게도 전해질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는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시, 공간적으로 떨어진 독자들에게도 읽힐수 있는 그런 리더블일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사고와 저의 생각은 잘 일치되고 있어요. 앞으로도 “국민적작가”로서의 가선생님의 텍스트는 중국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가장 선구적인 표징이 될거라 확신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믿어주셔서   7. 《废都》는 왜 당대 최고의 위대한 소설인가?   김: 중국 당대문학을 거론 할때 가평요를 빠칠수 없고, 가평요의 문학에서 《폐도》는 누락시킬수 없는 이정비적인 거작입니다. 농촌 소재를 쓰다가 도시 지식인의 생태를 재현한 작품으로서, 민국이래 소설중에서 최고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히트작이었지요. 93년 여름 방학 일시 귀국했다가 심양 평론가 친구의 소개로 《폐도》를 사서 읽게 되었는데 저는 정말 열독의 쾌감을 만끽하면서 읽었지요. 일본에 갖고 와서도 또 세번 읽었습니다.     선봉파 작가의 대표적 인물인 마원(马原)은 《폐도》는 당대 최고의 위대한 소설이라고 격찬했는데 저도 그의 관점에 동감입니다.   가: 《폐도》는 1992년에 출간했지만, 1990년에 쓴겁니다. 지금도 재판되고 있는데 해적판만 해도 내가 장악한것만 무려 70여종이나 되며 불완전 통계에 따르면 8천만부이상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나는 지식인의 부조(浮躁)를 통해 당대 문화의 溃败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 溃败를 초월할수 있는 성문화를 통하여, 그리고 그 문화적 전승의 맥락에서 1990년대 전통문화 부흥운동과 결합하여 뿌리를 찾고 싶었지요.   김: 그런데 세인들, 더구나 문학을 업으로 하는 평론가들까지도 시선이 《폐도》의 성적묘사, 너무 리얼리티한 성묘사에 쏠려 그만 선생님의 깊은 속심, 의도를 간과했던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큰 관심사도 쟁론이 일어난 것도 성적묘사에 대해서였습니다.   가: 맞아요. 성묘사에 눈길이 쏠리면서 내 작품의 모든것을 부정해버렸어요. 사실 지금 이 소설이 나왔더라면 별거 아닌데 말입니다. 일본에서 이 소설이 번역 출판되자 히트를 쳤고 번역자이며 문학평론가인 요시다교수는 “《폐도》야 말로 중국 5.4 이래 진정하게 인간을 쓴 장편소설”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인성과 인간의 약점을 묘사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 했어요. 그 뒤 프랑스에서 《폐도》가 프미나(费米那)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다.   8. 배설의 상징세계   김: 《폐도》는 현,당대 중국 최대의 쟁론을 일으킨 최대의 문제작으로 부상된것에는 성적묘사에 대한 쟁론, 곡해가 많았기때문이라고 봅니다. 《금병매》나 서양의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애인》,나버코프의 《로리터》와 비견할수 있는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폐도》는 완전히 봉살당하는 불운에 처해있었지요.     지금까지 대체로 주인공 장지접(庄之蝶)의 여러 여성과의 성접촉을 그냥 퇴폐,무료, 성에 대한 모독…등으로 편협된 관점으로 편향되여있지만, 나는 《폐도》를 수차례 정독하면서 작가의 경의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했어요. 흔히 사물을 바라볼때 두가지가 있지요. 오감(鸟瞰  )과 충감(虫瞰  )     그러니까 새들이 공중에서 지면의 물체를 바라보는 시점과 개미나 벌레가 지표에서 기면서 바라보는 시야가 전혀 틀리지요.   가: 그렇죠. 세인들 시선이 성묘사에 쏠려서 내가 진짜 의도했던 주제를 외면해버렸지요!   김: 지금까지 절대다수 평론가들은 그냥 충감으로 바라봤기때문에 작품중의 성묘사문 자체에만 확대경으로 바라보고 문제삼고 비판했지요. 좀 더 다른 이차원 (异次元)에서 이를테면 오감의 시야가 필요 하거든요.     저는 문화인류학, 비교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순문학평론가의 시각에서 이탈하여 보았어요.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클리포오드 기얼즈의 유명한 해석 인류학 내지 상징인류학 이론이 있습니다. 그의 상징, 해석학적 이론을 빌어서 보면, 선생님이 쓴 《폐도》의 주인공 장지접은 지식인, 작가로서 물욕이 팽창되고 정신적으로 들뜬 90녀대(지금은 더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썼어요.     직언하면 장지접의 성적 배설, 복수(复数)의 이성 파트너와 빈번히 행해지는 성적행위는 작가의 또 하나의 정신적배설행위를 상징하는것입니다.   가: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정신적 배설행위, 정채롭습니다.   김: 지식인, 작가로서 주인공은 두가지 펜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손으로 글쓰는 펜이고 또 하나는 남성의 심벌인 페니스, 이것도 신체적 펜으로서 자신의 글쓰기 배설의 펜이지요!   가: (웃음) 이런 발견은 그 누구도 한적이 없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비교문화학자만 할수 있는 해독이지요.   김: 감사합니다. 그래서 들뜬 인문환경하에 지식인의 적응, 내지 대항상태로 자신의 두가지 펜으로 배설을 통한 울분풀이를 하는거지요. 여기서 성교는 퇴폐이기보다는 당대 지식인의 이 부세(浮世)의 홍역을 치르면서 자발적인 적응, 또는 정신적 향유, 반항의 배설이기도 한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 김선생의 귀재다운 정채로운 해석에 나도 나 자신을 재발견한 느낌입니다. 문학비평은 역시 문학텍스트의 글발에 매달리는게 아니라 보다 넓은 지적(知的)시야에서 관찰, 비교, 해석하는게 너무 필요하다고 봅니다.   9. “언어폭력”의 야만이 사람을 키운다    김:《폐도》는 기념비적인 명작이지만, 이로 인해 선생님은 당대 최대의 비난과 중상을 받으시면서 인내해야 할 경우를 겪었습니다.   가: 벼라별 욕을 다 먹었지요! 그렇다고 나는 한번도 그런데 대응한적도 없었어요. 작품이 나간 다음 타자가 의논하고 비평하는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봉살이든, 격상이든 쌍방에서 밀어올리는 동력이 있지요. 이것도 다 나의 타고난 복이지요. 나를 긍정하면 난 더 잘 써서 보여줄꺼고 나를 비난하면 난 불복하여 더 잘 써서 내 실력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내가 강해야죠. 수화상제 방능연단(水火相济 方能炼丹)이지요.     사실 나 본인은 여러가지 언어폭력에 많은 심적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폐도》의 대논쟁은 이미 문학비평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대 사건으로 비약발전 되었고, 내 일상생활, 신변의 사람들까지도 누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편견, 누명, 이미지는 개변하기 어렸웠고 문학밖의 많은 부조리, 곡해, 폭언이란 야만이 나를 괴롭히는 존재였지요. 그러나 《폐도》를 거치면서 나는 홍역을 무사히 치르게 되듯이 나를 단련시켰고 아무리 큰 일이 나한테 닥쳐도 나는 늠름할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은 감옥 가는 거 빼고 다 겪었지요!   김: 저도 조선족과 동족내부에서 수많은 중상과 비방을 당한 “수난의 지식인”으로서 선생님의 심경을 너무 잘 이해합니다. 한편 저는 그런 비방자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적어도 마이너스적인 내 열성팬이니까요. 나늘 관심하고 주목하는 정열은 높이 봐줘야 그런 사람들의 지극감천의 정열에 걸맞는거니까요!(웃음)     모종삼(牟宗三)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모든것을 용서해야 모든것을 승인할수 있고 모든것을 초월해야 모든것을 소탈할수 있다.”고      가선생님은 그런 초탈한 인간, 무욕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 초탈 무욕의 경계   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는 자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지요. 난 원체 키도 작고 형상도 별 볼것 없고 나서서 활보할 것도 못되는데다가 그 시기 가정 정치성분이 나빠서 부친이 반혁명으로 몰렸지요. 그래서 뭇사람들 앞에서 잘난척도 못하고 교제도 싫어했습니다.내가 말해 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었고 다들 비웃기만 했어요. 마치 샹린아주머니(祥林嫂)처럼 억울함을 하소연해도 다들 번거러워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년시절부터 말수 적고 어눌하고 묵묵히 독서만 하는 소년이었으며 성격도 우울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 고독을 즐겼습니다. 고독은 인간, 특히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문인, 작가에게는 더 없는 낙원입니다.     그리고 나는 책욕심, 글욕심외엔 큰 욕심이 없어요. 금전도, 이성도, 명예도 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연”(缘)의 세계니, 구태여 안깐힘을 써서 추구한다고 얻어지는것도 아닙니다.   김: 선생님의 작품중에도 불교, 선종의 초탈한 이미지와 분위기가 늘 농후하게 잠재해있고 선생님의 서재에도 그런 느낌이 다분히 들어요. 선생님의 50세를 기념하여 쓴 수필《50大话》에서도 선생님이 말한 “人生一片心, 不因人热;文章千古事, 聊以自娱”란 귀절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가: 내가 원래 병약한 체질이라, 체약다병과 과언과욕(寡言寡欲)은 내 인생의 셋트처럼 따라 다녔어요. 내가 다병하니까 여기저기 기묘하게 아픈데는 많지만 그게 또 나로 하여금 많은 재난과 거북함을 무난히 넘기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날 보고 무슨무슨 직위에 올라야 하고 무슨무슨 문학상을 받아야 하는데 하면 난 그냥 난 병꾸러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무연하다고 한마디로 답한면 그만이니까요!     인간이 욕심이 과다하면 여러가지 병, 정신질환에 걸리고 자신을 괴롭히지요. 문인, 작가, 지식인은 으례 욕심을 누르고 자신의 글쓰기나 연구에 몰두하는게 편하다고 봐요. 너무 과욕은 본말전도의 위험성을 자초하거든요. 작가는 글만 쓰고 평가는 타인에 맡기면 그만입니다. 11. 문학은 자유로운가?   김: 외견에는 연약해 보이나 내심은 강직한게 선생님이지요. 제가 선생님의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하나의  발견이라 할까, 정확히 말하여 놀란 사항이 있는데요. 선생님의 1970년대 초부터 수필, 산문이나 지금까지 장편거작을 쭉 읽어보아도 많은 작가, 문인에게 보이는 체제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발라 맞추는 그런 글이 한편도 없는겁니다.     중국문학자체가 “文以载道” 의 전통을 전승하면서 또 흔히 정치나 정치포부와 밀착되어 영위해왔지요. 특히 현대,당대에서 혁명의 테제가 늘 개인 일상의 삶을 독차지 했으며 정치가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 내지 글쓰기의 주제가 되지 않을수 없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 심종문, 장애령과 판이한 한계죠. 그러나 경의로운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에는 혁명이나 정치에 영합한 인소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고중시절인 1979년에도 습작시 4인방을 비판하고 개혁을 가송하는 그런 정치적요소를 듬뿍 넣었거든요.     1980년대이후로 중국문학은 전례없는 서양의 사조와 시야의 충격으로 가장 활약하게 됩닌다. 문학이 문학다운 80년대시대가 열리고 인간, 인성을 쓰는 문학이 열리게 됩니다.   가: 사실 말씀하다시피 나와 같은 연배의 작가들은 80년대에 들어서서 문학의 본연에 개안하고 문학을 하게 됩니다. 서양의 여러 유파나 사조들이 쉴새없이 밀려오고, 문학은 실험이 거듭되고 반짝 스타도 나타나고 어떤 작가들은 또 자발적으로 글쓰기를 포기하기도 했어요. 최초 전국문학상 수상자들인 王蒙,刘心武,卢新华, 张承志,张洁등등 많았지만 현재 그 중에서도 남은 작가가 많지 않아요.     30여년이 지나서 주요하게는 사고양식의 변화가 많았는데 물론 문학사유가 아직 철저하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출판사나 작가나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관념은 각가지로 분화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것은 여전히 5,60년대의 관념이 농후합니다.     이를테면 시대의 거울이요 사회의 기록자요, 인민의 대변인이요, 문학의 몇개 대요소요, 무슨 환경중의 전형모델성격이요 하면서 문학관의 집단무의식의 요소가 너무 굳어 있지요.     제가 30여년동안 해온 일도 이런 굳은 관념을 부수고 글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쓰기와 정치는 연관시키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12. 독립하라, 누구도 없는것 처럼    김: 문학은 자유로운가 하면 예스라는 대답이 어렵지요. 글쓰기의 대환경도 그러하거니와 가장 요긴한건 작가의 사유와 관념이 스스로 자신에게 정신적 족쇄를 무의식중에 채우고 글쓰고 있어요. 이를테면 위에서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작가든 편집이든 겁이 나서 스스로 자주 검열을 해버리는거예요. 이러니 작가는 많아도 고수준의 순문학작품이 태어날수 없지요.     선생님의 독립작가적 기품에 또 한번 놀란것은, 사실 오늘 낮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들과 회의를 하고 저녁만찬은 중앙어른들과 같이 하셔야 하는데도 선생님은 그들을 뿌리치고 저와 함께 식사하시고 말씀을 나눈것입니다. 선생님이 관장을 싫어하는 문인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오늘 직접 체험했네요. 《폐도》가 나온 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중선부, 조직부에 건의하여 선생님더러 남방을 체험하면서 중국의 개혁형세에 대하여 써보라고 했지만 가선생님은 섬서의 화서촌에 가서 부서기직을 걸고 개혁을 반영한 작품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정치적 칭화이(情怀)가 결여하고 문단의 관장에 관심없음을 보여주었지요. 현재 중국의 대학의 학자나 문인들도 관장에 비집고 들어가기에 여념없는데 선생님같은 독립적 문인은 “희귀종”에 속하지요. 제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독립인격과 자유정신을 갖춘 지식이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지식인의 약점은 바로 용기가 부족하고 독립성이 결여한것이지요. 이 민족이 너무나 많은 고난의 역사를 겪었기때문에 중국인의 정치칭제 (情结)는 꼭 강렬하면 사명감도 있고 기회주의자나 영합, 아첨하는자들도 많습니다. 위기에 닥치면 그냥 뿔뿔이 흩어지고 독립성이 없거든요. 현실생활에서도 늘 볼수 있는게 독립정신이 결핍한 사람이 너무 많은것입니다.     그러니 중국 지식인은 가장 매수당하기 쉽고 초안 (招安)당하기 쉬운 무리이예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맨날 글을 써서 관을 욕하다가도 일단 관직을 주면 곧바로 변절해요. 사탕발린 소리를 하는거죠.(웃음)      작가가 이 현실과 충돌되는건 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충돌이 없으면 명작이 탄생될수도 없습니다.   김: 사실 작가나 지식인은 반시류의 독립정신이 그의 영혼이니까요!   가: 그래요. 내가 문학에서 작품의 “두터움”(厚)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실 정신측면을 가리키거든요. 내가 간부가 되어 누구를 간섭하거나 하는건 내 적성에도 안 맞습니다. 중국의 정치적 현실을 작가가 도피하기는 어려워요. 문학이 여러가지 풍격, 스타일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작가에게 중요한건 독립인격, 독특한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독립적 정신사상과 글쓰기가 주어지는게 요긴하지요.   (이하 하로 이어짐)
6    누구를 위해 비판의 종은 울리나? [장명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609  추천:52  2016-08-07
문화대담(6)   누구를 위해 비판의 종은 울리나 ? 장명(张鸣)+김문학   비판적 지식인의 사명감   김:  장선생님은 현대 중국의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 선봉의 한 사람입니다.     제가 장선생님을 포괄한 중국 체제내의 비판적 지성을 탄복하는건 체제내부에 있으면서 과감히 체제를 비판하는 용기와 슬기이에요.     비판적 지식인이란 체제와 권리의 남용과 불공평, 부조리현상을 비판 질책하고 진리와 공정,객관,진보 등 가치를 추구하는 지식인을 말합니다. 사르트르가 간파한것과 같이 “지식인의 천직은 불공평한 현상을 비판하는것이며 그것이 어디서 생기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명감이 특색입니다.     오늘 선생님과 함께 문화대담을 나눌수 있어 후배로서 영광으로 생각해요.   장; 정말 반갑습니다. 중국사회 과학원의 뢰의 (雷颐)씨와 우리 인민대학 문학학원의 손욱(孙郁)원장으로부터 예전부터 김문학씨의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동북출신의 조선족 비교문화학자, 수십권의 저작을 썼고 국제적시야를 갖춘 독특한 문화학자라는것, 나도 동북에서 살았고 조선족 벗들이 있었는데, 조선족은 “술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이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또 청결하고 부지런하고요.”     김문학씨의 출현으로 조선족인문계렬 지식인이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는 평도 있어요. 같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이렇게 “귀재”라 불린 인물과 만나게 되서 기뻐요!   김: 과찬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辛亥-摇晃的中国》을 위시로 많은 저작을 읽고 인터넷 블로그를 접하면서 당대 중국 수일의 비판적 지성, 공공지식인으로서 역사, 정치,교육, 국민성, 국제관계, 일상생활 등 여러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비판을 하고, 또 늘 정곡을 찌르는 글에 혀를 둘렀어요.     그런데 방금도 언급했지만 저야 해외 언론자유가 보장된 환경에서 비판을 전개할수 있으나 선생님은 중국인민대학이라는 국립대학중의 국립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여러가지로 비판을 전개할수있다는건 일반 지식인이 다 할수있는건 아닙니다. 모두다 체제에 안주하면서 사탕발린 말이나 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세상에서 굉장히 소중한 존재이지요   장: 감사합니다. 비판적 지식인, 공공지식인이라고 했으니만큼 제 구실을 해야지요.(웃음)   이 사회에 부조리, 불공평과 죄악이 있다면 비판할수 있는건 지식인뿐이에요. 지식인은 본래부터 지식을 이용하여 불공평과 압박등에 대해서 대담하게 비판하고 정의와 평등, 인권 등 가치를 수호하는게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신해혁명이 중국근대를 혼란시켰다   김: 선생님은《辛亥-摇晃的中国》에서 기존의 신해혁명연구와 많이 다른 지적을 했습니다. 신해혁명의 준비부족이라든가 특히 “만약 신해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청조가 정상대로 입헌정치를 실시 했다면 의회제도가 조만간에 실현되었다”고 지적한것은 과연 정채로운 지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장: 사실 신해혁명은 교과서에서 미화한것과 다른 양상이지요. 그것은 준비가 잘 안된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변혁이었거든요.     혁명성공은 중국에 커다란 영향을준건 사실이지만, 그건 역효과였어요. 근대화를 추진할 대신 사람들에게 신제도에 대한 곤혹과 초조감을 주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새로운 선진적 제도를 중국에 갖다 주어야 할 혁명이 부흥과 부강의 드림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혁명후의 혼란상태를 초래했어요.   김: 그렇죠. 사실은 청말 광서신정(光绪新政)때 서양식 정치제도나 법률사상을 이미 도입했지요.   장: 맞어요. 현재 교과서적인 신해혁명의 평가가 고착되고 기호화되어서 당시의 실정이나 혁명의 많은 문제점을 호도시켰지요.     김선생의 《100년전의 중일한》에서도 밝혔듯이 신해혁명은 미완성의 혁명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볼때 신해혁명은 별 주목하지 못한 혁명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어요. 서양 정부에서는 거의 아무도 정부고관을 파견하여 신해혁명을 고찰하거나 하지 않고 당시 주청 대사들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에요.     그러나 중국인 당사자들에게 이는 굉장히 큰 혁명이었지요. 소수민족인 청나라 만주족의 제국을 뒤엎고 한족 중심의 공화국을 최초로 세웠으니까요.     그러나 공화제는 말이 쉽지 2천년동안이나 황제정치에 습관돼온 중국인에게는 지극히 곤란의 도정이었습니다. 청조 황제제도는 붕괴시켰지만, 공화제, 민주제는 설립도 되기전에 난장판인 민국이 전개됩니다.   민국은 다채로웠다   김: 선생님은 현대중국사에서 오히려 민국시대가 사상이 자유스러웠고 더욱 개방되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장: 민국사가 흥미로운것은 우리 역사의 명조, 청조사보다 더 다채로운 양상을 나타내고 있지요. 복잡하고도 전연 상반되는 얼굴이 공존하니까 재미있고 매력적인거에요. 세가지 차원에서 민국을 개괄할수 있습니다.     첫째. 제도는 점점 하강선을 긋고 있지요. 북양군벌시기 1912~1926년이고 국민당시기가 1927~1937년 항전 그뒤로 내전시기로 이어집니다. 마땅히 공화제를 실시해야 되는데 원세개는 결국 대총통취임후 황제제도를 복벽했다가 실추하고 말아요. 그 뒤 시기는 약하겠지만, 국민당시기 제도적으로 민주상황이 북양시기보다 더 못하지만 국력은 회복됩니다.   김: 그러니까 신해혁명후, 서양식의 의회제도가 중국인의 관습적 전제문화앞에서는 미약한것이지요.   장: 그래요. 민주,의회의 개념은 있었지만 실지로는 당국체제로 장개석시기는 일당,일주의 일인수령 천하였습니다.    진짜 정치적 영위는 전통적 수단이었는데, 제왕시대의 황권통치에서 군인통치와 학자가 가담한 통치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김: 민국시기 연해도시에서 민족산업이 발전되고 자주적기강산업도 어느정도 생기면서 인프라가 정비되기도 합니다.   왜 민국시대는 자유, 개방의 시대였나?   장: 이시기에 많은 신생의 직업이 탄생되고 많은 문화예술이 번영하고 대학도 진보하게 되지요. 이시기 군벌들은 주로 일본에서 군사를 배운 사람들인데 오패부(吴佩孚) 손전방(孙传芳)등은 문인기질의 양호한 군인이었어요. 염석산등도 사회건설을 하려고 애썼어요. 일본과 러시아를 배운 군벌정권하에서 물질은 현대화 요소가 많아졌지만 온 사회 사상은 제도 문화면에서 전제쪽으로 흘렀습니다.     아무튼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배할때까지 진짜 전제를 세우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중국문화사상, 대학, 교육, 출판 지식계,예술계에 장족한 발전의 틈새를 주었습니다.     대학만 보더라도 매우 개방된 국면하에서 개설,운영해왔는데 북양시기에서부터 국민당시기까지 외국인에게 개방하고 외국인 교원전문가를 대량 초빙했어요.   김: 손문과 원세개, 장개석 지어 장작림 등 인물들 측근에 일본 전문고문을 두었으며 1898년 경사대학당(지금의 북경대학) 설립시 일본의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교육컬리큐람에 참여했습니다.   장: 맞어요. 당시 개방된 상태하에서 경제도 다원적이었고, 북양군벌시기에는 국유경제가 없었어요. 국민당시기에 국유경제가 생기는데 국가가 독점할 만큼 강대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큰 영역에는 정부의 손이 못미치는 공간이 주어졌거든요. 대학도 3종 국면 즉 국립, 사립, 교회대학 3족정립(三足鼎立)의 양상을 노정했어요.     현재의 북경사대의 전신인 보인(辅仁)대학은 천주교가 창립한것이고, 북경대는 원래 연경대학에서 발전되었는데 교회에서 만든것이지요. 협화학원(协和学院)은 당시 세계일류의 의학원이었는데 교회가 설립한것입니다. 국립대 최고는 북경대였고 국민당시기 중앙대학이 있었고 , 청화대학은 반국립, 반사립이였어요. 남개대학은 사립의 표징이었고 아무튼 민국시기 대학은 정말 훌륭했어요.     군벌들도 앞다투어 대학을 세웠는데 당계요가 운남대학, 장작림이 동북대학, 조곤도 하북대학을 창설했습니다.     당시 학술은 자유롭고 교수가 학교를 다스렸고 이게 너무 좋았어요. 대학자치에 대해 존중했는데 민국시기의 대학은 멋있었어요. 대학교수도 교편을 잡는다면 4백원넘는 월급이 보장됐으니까요.     무슨얘기냐면, 당시 경찰의 월급이 8원이었으니 교수의 경제수준이 얼마나 고수준이었는가 알만하지요!   김: 제가 중국에 와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알았는데 보통 대학교수의 월급은 아직 생각밖에 너무 적었습니다. GDP세계제2의 경제대국에 어울리지 않지요!(웃음)   장:  (웃음)그렇습니다. 그리고 민국시기 사상, 학술은 자유로왔습니다. 대학이 이처럼 자유로우니 언론자유도 보장돼 있는건 당연하지요. 잡지도 자유롭게 만들수 있었어요. 《신청년》은 개인들이 만든거고, 교과서도 다 민간에서 쓰고 출판했어.     민국사를 보면 국가가 강대했다해서 사상문화가 번영하는것도 아니고, 국가가 혼란하고 약화되었다 해도 사상문화가 같이 허약해지는건 아닙니다.   김: 그렇습니다. 민국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풍부한 시사를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공공지식인으로서 현대 중국에서도 대학, 교육, 관원의 부패에 대해 늘 무자비한 비판을 해왔어요. 지금 대학에 대해 어떻게 보고계신지요?   중국의 대학 구제불능인가?   장: 예전에도 나는 중국의 대학에 대해 많이 비판해왔습니다. 대학의 추락은 여전하고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어요. 대학이 아문(衙门)같다고 내가 자주 질책했지만, 지금의 대학은 아문보다 더 한 아문입니다.     중국 축구와 중국대학 어느게 더 희망이 있냐고 기자들이 묻는말에 나는 중국축구라고 답했어요!(웃음)   김: (웃음) 오리려 축구가 더 희망성이 높다는 말이네요. 대학이 그 정도로 추락했나요?   장: 물론 이렇게 대답한데는 홧김에 던진 말이기는 해도, 그만큼 중국대학은 중국축구만큼이나 부패하다는 얘기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관료기구가 산업화로 이끈데 있어요. 그래서 거대한 이익집단의 형성하에 대학은 실지로 교육이익집단의 이익을 획득하는 제단으로 변질돼버렸습니다.     행정화가 팽창된데는 그것만이 이익집단의 최대이익화를 보장해줄수 있으며, 독점경영만이 이렇게 행정화된 대학을 유지해 나갈수 있거든요.   김: 행정화에 대한 객관적 비판시스템이 필요하지요.   장: (웃음) 말이야 듣기 좋지요. 제아무리 외부에서 비평을 해도 그냥 마이동풍격이에요. 몇년전에 발표한 《중국에는 오로지 하나의 대학밖에 없다》라는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중국의 과도한 행정화,독점화는 모종 의미에서 중국엔 대학이 하나밖에 존재 안해요. 그것은 바로 교육부대학이에요. 기타 모든 대학은 이 대학의 분교나 분부에 불과합니다. 목전 전국의 모든 도시가 획일화된 것처럼 대학도 획일화로 쏠리고 있어요.     전세계 어느 대학도 자신이 자신의 졸업증, 학위증서를 발급하는데 중국의 대학만 교육부 증서를  발급합니다. 이런 현상 자체가 계획체제의 산물이지요.     민국시대에도 북경대, 청화대, 서남련대, 이 모두가 다 자기절로 학위증서를 발급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중국 대학의 자주, 독립성은 어디 있습니까?     대학 행정에서는 교수들의 교수안도 체크하고 연구논문은 무슨 SCI 수량을 따지고 학술자유를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논문수자만 중시하니 대학이 어디 대학같아요? 무슨 기관같아요!   교육의 비만증과 소화불량   김: 중국에서 보니까 요즘 대학을 거대화시키는게 유행입니다. 대학을 주변의 작은 대학과 병합하여 비대화시키는데, 사실 저는 이상하게 느껴져요. 인간도 체통이 크고 비대하다고 해서 능력, 자질, 역량과 정비례되는것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대학도 그러하다고 봅니다.     접때 어떤 변강의 대학이, 주변 몇개 대학,전문학교와 병합해 그 지역 최대의 규모를 갖춘 대학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결과 그 방대한 규모만큼 실력과 실제 인재양성에는 별 실효과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공정”이요, 무슨 “기요”요 하면서 분식해도 그 본질적 의미가 없지요. 대학이 무슨 잡기단, 곡마단도 아닌데 요란하게 분장할 필요가 있나요?   장: 맞는 지적입니다. 90년대후기 211공정과 985공정은 경제성장에서 부유해진 중국의 대학이 비대화해가는 표징이기도 해요. 그 방법은 주로 세가지가 있어요. 돈 뿌리기. 재력을 집중하여 소수의 수준급대학에 투자하는것 행정강화하기. 그 돈을 투자한 만큼 행정컨트롤을 강화하는것 산업화 실행. 기업관리요소를 도입해서 물량화 관리를 통한 대학교원의 대우개선 기실 이 3방면의 개혁은 결국 대학의 비대화와 함께 가장 현저한 특징이 바로 행정의 강화입니다. 그 다음은 대학의 수입비용이 10배나 증폭되고 국가도 대학생모집을 내수경제 향상 수단의 하나로 삼고, 전국에서 대학생모집에 힘을 기울였지요. 따라서 대학의 비대화에 응해 많은 도시에서 대학을 규모, 외모면에서 개선개축하고 대학도시를 건설하여 대학의 산업화는 부동산, 토지개발업과 기묘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김: 대학교육의 대약진이군요!   장: 예. 이런 대약진은 행정 주도의 대학독점회사를 형성했어요. 대학에서는 산업화의 특징을 보였는데 고액의 학,잡비를 받고 또 사회시장과 연관있는 전공을 설치하여 기초학과의 위축을 초래했어요. 이런 관영산업은 독점이기 때문에 기본상 경쟁이 없고 대학의 행정기관, 아문화, 관료끼가 넘치지요.     행정체제에서 요구하는 정액을 채우기 위해 대학과 교원들은 가짜 조작, 베끼는 등 형식으로 때우고 학생들에게도 논문을 억지로 발표하게 하여 정액의 수자를 채우는데 나서게 합니다.     편견없이 말해서 현재 중국의 대학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됐어요. 개별적 학원, 교수외에 대학 전체가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공중에서 떨어지는것과 같아요. 솔직히 말하여 현재의 대학은 옛날의 중학교육과 유사하며, 상당히 많은 지방대학은 이름만 걸었을뿐이지요. 지금의 중국대학은 이미 대학이라 칭 할수 없어요. 김: 대학의 위기를 탈출 또는 극복하는 길은 있습니까?   장: 한마디로 개방과 개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김: 그래도 말이 쉽지 만만치 않을텐데요?   장: 아, 쉽지 않아요! 개방은 가능성이 있지만  중앙정부와  교육기득권자 사이의 결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결투에서 성과가 있다면 진일보 개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국엔 “그러나”가 너무 많아요. 개방하여 교회에 학교운영권을 준다면 문제는 더 해결하기 쉬워집니다. 민국때처럼 교회에서 대학을 꾸린 경험을 적응하면 위기 극복의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됩니다.   노벌상 수상은 토치카를 격파하는게 아니다   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노벨상 욕망”은 보통이 아닙니다. 이미, 문학상과 자연과학(의학생리학)에서 중국인이 염원의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대학,인구에 비해 너무 정비례가 되지 않는다고 중국내 지식인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본은 GPD세계제2의 기간에 10여명의 노벨수상자가 나왔는데 중국은 같은 시기 비례적으로 너무 말이 아니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 중국인의 노벨상 칭제(情结)는 거국체제입니다. 근년래 정부유관부문에서 만인계획을 내왔는데, 과기인재 만명을 중점적으로 선발장려하여 그중에서 또 최우수 100명을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노벨상을 공격한답니다.이런 기세당당한 방대한 공정은 실로 고무적이에요.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이런 유사한 과기인재 양성공정은 예전에도 있었어요. 다 기백이 있고 거금을 소모했지만 노벨상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요.(웃음)   김: 과연 전제제도의 중국다운 얘기군요.   장: 거국체제의 우세는 스프츠항목의 난관을 공략하는데는 효과가 있어요. 그러나 기초과학을 이런 식으로 돌격한다는건 소련도 그랬거니와 중국에도 지금까지 효과가 없습니다     과학연구영역은 기실 한 국가의 교육과 연구체계와 연결되있는 법이지요.노벨상수상이 어디 등산과 같은 일인가요? 오른다고 해서 동반하게 되나요? 만일 전쟁에서 적진을 진공한다면 이런 집중공격은 적의 토치까를 부술수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연구, 노벨상수상은 한나라의 전체과학기술실력,사회학술환경의 뒷받침 해줘야 하지요. 노벨상 각 상에서 자연과학영역에서 수상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죄다 교육과학연구실력이 최강의 국가입니다.     현재 GDP세계제2의 대국이지만 우리의 과학,교육수준은 아직 수준미달이지요. 일본에 비해서도 많이 후진국입니다. 과학기술실력이 교육과 밀접히 관계된다만,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표준답안식이죠. 중국의 중학생이 올림픽학력경기에서 수상한는데는 문제없지만 과학연구영역,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지요. 과학연구체제도 그냥 연구항목이요,연구비요 하면서 결국 행정화 체계이니 문제입니다     노벨상 수상을 바란다면 우선 해야하는일은 그런 공정이 아니라, 교육과 과학연구체제를 개혁하고 행정주도,학벌주도를 버려야 합니다. 이게 급선무에요. 딴것은 다 쓸데 없어요. 화려한 공정(工程)은 결국 슬로건과 비슷하니까요!   “당신은 행복합니까?”   김: 과연 독설가 장선생님다운 날카로운 정곡을 찌른 말씀이십니다.     이번에는 중국인의 일상 삶의 질에 관한 화제를 여쭈고자 해요. 개혁개방 30여년이 지난 오늘 중국이 물질적으로 부를 획득했지만, 저의 관찰에는 삶의 질이 물질적 차원에서는 향상되었어요. 그러나 요긴한 정신적, 문화적 차원에서는 별 진보를 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상해, 북경 등 대 도시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아요. 목소리만 컷지 미소가 지극히 적어요. 한 나라의 종합적 소프트파워를 가늠하는데는 그 나라 국민의 만족도, 행복감 문제가 하나의 바러미터로 되는데. 중국인의 이점에 대해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장: 제가 몇년전에 글에도 썼는데요, 인민논단잡지의 임의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약세군체”(弱势群体)로 보는 사람중 지식인이 55% 당정간부가 45% 샐러리맨이 58%에 달해요. 그리고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약세군체”라 여기는 사람은 7할이라고 합니다.   김: 아, 당정간부, 지식인이라면 다 사회의 엘리트계층인데 그럴수가 있나요?   장: 글쎄 말입니다. 더욱 아연해지는것은 평시 위풍이 름름한 경찰도 기자의 인터뷰에서 자신도 약세군체이니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소연한대요. 웃끼는 얘기죠. 만약 이러한 사람들중에 어느 한사람이 농민공신분과 서로 바꾸라하면 그럴 사람이 있겠어요?(웃음)     그러나 이들의 하소연도 절대 꾸민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식인도, 관원도, 샐러리맨도 경찰도 다 고가 집가격, 고가교육비,고물가 등에 눌려 허리가 굽혀지는건 사실이거든요.     상급행정의 압력, 하급과의 처리 등 이로 최대 수익자인 관원도 빛좋은 개살구에요. 반부패의 환경하에서 “탐불가 불탐역불가”(贪不可,不贪亦不可)의 궁지에서 허덕이게 되지요.   김: “당신은 행복합니까?”의 물음에 예스라고 대답할 계층의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건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장: 사실 다 현실의 삶에 만족감, 쾌락이 없다는것이지요. 소수면 몰라도 70%나 되는 국민이, 그것도 상층엘리트층이 만족감이 없다는 사실은 큰 문제이지요.     중국 개혁개방 30여년에 경제총량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부의 증가는 행복감의 증가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더 많은 국민들이 행복감이 줄어들고 안전감도 없다고 불만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이 바로 출국입니다. 안전감이 없고 살 장래성이 없다고 느낀 많은 사람들이 개방과 함께 국외로 나가 유학하고 이민하고 정착합니다.   김: 지어 그렇게 미국에 민주, 자유가 없다고 비판하던 이른바 젊은 애국자들도 미국 남자와 결혼하는가 하면 아예 미국국적을 취득하고 마는 케이스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장: 그래요. 그러므로 제생각에는 아직 개혁을 해야 해요. 국민들의 불만의 목소리는 결국 더욱 큰 변혁을 부르는것이지요.   횡단보도는 문명수준의 눈금   김: 일상 세부의 화제인데요. 저는 일본서 오래 살다가 중국에 한번씩 오면 제일 무서운 두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변 보는일이고 또 하나는 길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입니다. 대학청사의 안에 있는 공중화장실안에도 토이렛페퍼가 비치돼 있지 않아서 늘 봉변을 당했던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널때 또 두가지 겁나는 일이 있는데요. 하나는 행인들이 적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는게 많이 보이고 외려 청신호를 기다렸다가 건너는 사람이 소수인 경우도 늘 있습니다.     자동차역시 횡단보도를 청신호때 건너는 행인을 무시하고 스피드를 내서 질주하는 현상이 많아요. 좌우로 잡아먹을듯이 달려오는 맹수같아서 늘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웃음)     공중화장실이 “2.5㎡의 문명관”이란 말이 있고, 횡단보도 역시 그 나라 국민의 문명레벌의 눈금이지요.   장: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화장실에 화장지를 두지 않는건 하나는 재정문제라는 말이 있고 또 하나는 화장지를 도둑 맞치는 일이 비일비재라고 합니다.   김: GDP세계제2의 경제대국이 그 화장지도 살돈이 없다는 말은 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복단대학 갈검웅선생님은 중국보다 문명수준이 낮고 경제력이 가난한 아프리카주의 대학 화장실에도 대부분 화장지가 비치돼있다고 한적이 있습니다.   장: 황차 화장지까지 훔쳐가는 국민의 문명수준은 바닥이 다 드러난거죠!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은 결국 청색을 통행 적색을 스톱이란 법의 룰을 안중에 없는거죠. 그냥 촌에서 논두렁 건너는 의식으로 나만 건너가면 된다는 그런 농경문화의 습관이 남아있다고나 할까요.   김: 그러니까 해외에서는 중국인처럼 용감한 국민은 없다고 하지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적신호를 무시하니까요. 제가 늘 관찰해보면 적신호때도 부랴부랴 건너는 행인들은 무슨 급무가 있어어가 아니에요. 건너가자 저쪽에서 금방 핸드폰을 보면서 유유자적 우보로 천천히 걸어가거든요.(웃음)   장: (웃음) 그게 바로 습관이지요. 별 바쁜 일로 그런것도 아니고 옛날부터 건너는 습관이 되어서 무의식의 행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 자동차시대라고 불릴만큼 중국거리엔 자동차의 홍수입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자동차는 보행대용일뿐아니라 돈 있는 자들의 자랑꺼리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집사는 돈을 부모가 내주고 은행대여를 해서라도 외제 고급자동차를 사지요. 벤츠, BMW 부귀와 돈자랑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자랑하기 위해서 초스피드로 운전하는데 차안에 있는 자는 차밖에 있는자를 무시하고 얕잡아 보지요.     그러니 김선생같이 해외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은 횡단보도 건너기가 전쟁터로 나가는것과 같지요. 본래는 청신호는 행인의 통행권리인데 그런 차들이 좌우양쪽에서 맹속력으로 질주해오니 인간이 차를 피하는 곤경에 빠지게 돼요.   김: 자동차가 문명의 상징물이기도 하며, 인간의 교통도구에 지나지 않지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인간의 소질이 아직 자동차라는 껍떼기에 갇혀서 그 껍떼기보다 더 중요한 인간, 내지 인간의 생명을 모르는거예요.   장: 그러니까 중국은 자동차시대만 있었지 자동차시대의 문명은 아직 없습니다.    “관강민약”의 중국문제   김: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아레시스.토크빌러의 《구제도와 대혁명》를 읽으면서 나는 18세기 후반의 프랑스가 마치 21세기 현재의 중국을 실사(实写)한 느낌을 강렬히 받았어요. 부패, 추악하고 책임감이 없는 관리와 불만에 차 있으면서도 또 무기력한 보통대중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초조와 불안하여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잡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중국 현재의 관민의 관계 및 실존양상 그 자체라 생각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중국 관민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장: 참 좋은 화제를 꺼냈군요. 중국이란 이 역사중에서 진한통일이래 수천년동안 관료형 제국국가가 유지되면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관계가 바로 관과 민이었습니다.     사회모순의 굶은 주선도 여전히 관민모순이었고 관은 사회운행의 주체였으니 어느곳에서 민의 원성이 관의 통제로 삭일수 있었지요. 한편 사회의 엘리트, 지식인도 민과 이탈돼있었고 관원과 관계가 더 밀착돼있었습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관의 권력이 너무크고 강한 까닭에 민은 거이 무슨 권력도 없이 약소한 존재였어요. 약한 민이 관의 저항으로 상급에 반영하고 매스컴이 폭로시킨다해도 결국 관의 상급도 관이기에 관의 악행을 억제시키는 길은 좁아요. 그러므로 관이 가장 두려워하는것은 매체에 폭로되는것이지만, 많은 상황하에서 일을 컨트럴 할수 있고 그것을 억누르면 민의 반항도 결국 우야무야 흐지부지해지고 말지요. 그러면 관원들은 계속하여 대담하게 권리를 확대, 남용할 길이 넓어집니다.   김: 관을 감독하는 법적 메키니즘이 정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또 작동이 되지 않는 인치사회 중국에서 관의 권력에 자동적으로 굴복하는게 민의 하나의 국민성으로 고착되었습니다.     민 자체가 자신의 인권,민권과 자유를 향유하고 지킬줄 모르니 이것도 큰 사회문제이지요.   장: 체제내의 부동의견자들, 이성(理性)의 목소리를 압제하다보면 체제밖의 서민엘리트들이 궐기하며 민중을 위해 일을 할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각급 관원들은 공공적 사건처리에서 도리를 따지지 않고 강제로 압제하며 부분적 서민엘리트들이 비이성,폭력적으로 저항하게끔 만들어버려요.     그러니 이성의 목소리는 관방의 강폭속에서 민간에서는 제대로 성장할수 없게됩니다. 현재 관장(官场)에서 전례없는 권대독존(权大独尊)의 풍기가 생기고 여러 분야의 관장에 만연되고 있는데 대학도 포괄돼있어요.     자기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은 예외없이 관의 타격 배척을 당하고, 반대로 모든 관장에는 관화(官话),거짓말, 빈말과 아첨이 성행하게 됩니다.     민중의 뜻은 표달할수 없고 누가 민중을 위해 말을 하면 관의 공적(公敌)으로 되기 십상이지요.   김: 역시 무서운 관민의 관계역학입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문제 해결의 방책이 있는지요?   장: 이런 “관강민약”의 사회환경과 토양속에서 그 관계를 해결하는 묘안은 아직 없는줄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가 능동적으로 이 대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을 찾을수 있냐 없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여전히 대환경의 개혁이 필요하지요.   왜 인간의 존엄, 유린당할까?   김: 장선생님, 저는 비교문화 학자와 문명비평가로서 항상 동아시아3국인과 함께 특히 중국인의 “인간문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품고 관찰분석해왔습니다.     “국민성”이란 테제를 떠나 중국인을 세계 각국인과 비교할때 지금까지도 인간의 조건중에서도 존엄, 자유를 경시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한나 아렌트(현대 독일의 탁월한 사상가)의 《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등 명작을 읽으면서 더 많은 사고를 하게 됬었습니다. 인간은 독립사고, 적극적으로 생활하는것이 아렌트적 의미의 인간조건의 하나인데 사고와 행동이 인간의 중요한 조건이며,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존엄,자유 내지 자신의 계몽,이성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인간을 경시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요. 경찰이 농민공에 대한 형편없는 태도나 최근에 일어난 뢰양(雷洋)사건에서도 이점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장: 중국에서는 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는 패턴이 많습니다. 권력이 좀 있다면 권력이 사유영역까지 침범하여 상대의 존엄을 꾸겨야 권력의 맛을 보는듯하지요. 어렸을때 선생은 일을 저지른 학생에게 벌 주기 위해 전 반급앞에서 그 학생의 프라이버시나 약점을 공개해서 프라이드를 여지없니 꺾어놓군했잖습니까.     현재 상급과 하급관계도 흔히 주노(主奴)관계로 작용하며, 마음에 안드는 부하를 여러가지 수단으로 존엄을 꺾는 일이 비일비재지요.     권력의 산생은 폭력, 정복과 갈라놓을수 없는데 이른바 정복이란 육체의 콘트럴뿐만 아니라 피정복자에 대한 정신적 유린을 의미합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피정복자의 정신, 육체적 복종은 권력실시의 실효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우리 중국사회에는 여전히 권력자의 권력의식이 DNA로서 전해왔어요. 권력자만 아니라 많은 권력자가 아닌 대중들에도 그런 권력의식, 심리가 있어서 자신들의 자식,또는 약자에게 같은 굴욕을 안기지요.    흔히 도시인들이 농민공에 대한 태도, 언어, 눈길하나에도 부지중 그런 우월자의 의식중에 존엄을 무시하는 건 일상에도 늘 있지요   김: 존엄이란 인간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덕목으로서 인간이 인간이게끔 보증하는 기본조건이기 마련이지요. 대체로 중국에서도 여전히 존엄의식이 희박하고 사람들도 존엄을 지키면서 생존하는 태도가 결여합니다   장: 부존빈비(富尊贫卑),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의식이 중국인의 인간관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고질이지요. 인간이 존엄이 짓밟히고 또 사람마다 존엄을 무시한다면 이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지요.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는 사회만이 정상적이고 인간다운 사회이지요.    돈키호테의 경종   김: 중국에서 비판적 지성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장교수님께서는 래디컬한 비판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대담같은 무자비한 비판을 해도 괜찮습니까?(웃음)   장: 아무렴 괜찮구 말구요. 오늘 말한 내용은 다 내가 공개발표한 글에서 쓴 내용입니다. 지금 중국도 언론자유도가 넓어져서 문화대혁명시기처럼 지식인을 공권력으로 맘대로 잡는 그런 시대는 아니니까요.   김: 선생님은 중국지식계의 “돈키호테”라 불립니다. 2007년 인민대학에서 학원원장의 교수에 대한 직함평가에서 부조리가 있다고 과감히 질책하고 결국 전국 지식계에 “장명사건”으로 파급되었지요. 당시 장선생의 지지자가 많았으며 장선생님이 정치계주임직을 박탈당했지만 지식인의 독립자유정신을 수호했다는 점에서 선생님은 더 학계의 존중을 받게되었습니다.   장: 내가 좀 과격한 비판을 하여도 내 명성때문인지 누가 감히 어쩌질 못해요. 전국적으로 파장되면 뒤수습이 두려우니까!(웃음)   김: 미술가 진단청(陈丹青)선생의 사건이 있었지요. 미국 유학하고 미국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진선생이 청화대학 미술학원에 교수로 취직했다가 교육의 고루한 방식이 싫어서 청화대 교직을 물러난 일이 사회적 사건으로 되었습니다. 중국학계에서는 더 많은 장명,진단청이 나타남으로써 현실 체제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개변할수 있는 개혁의 역량이 된다고 호응하였습니다.   장: 내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돈키호테의 방망이(펜)를 들고 경종을 울리는것은 우리 나라의 관료체제, 우리 사회안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불평등 또는 결함,폐단을 지적, 개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김선생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비판적지성으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3국에서 이렇게 하는 건 대단한 일이지요.   김: 비판적,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서 앎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것이, 사회에 대한 언설적 총탄의 발화행위라 믿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말입니다.   장: 그래요! 내가 갖고있는 하나의 신조는 서재속의 학자처럼 학술을 상아탑의 정교로운 조각으로 만드는게 아닙니다.     내는 사회 비평을 하는 일은 계속 견지할겁니다. 이 사회에 선량을 억느루고 흑백을 전도시키고, 양녀를 창녀로 핍박하고, 언론 탄압을 하는 여러가지 악행이 존재하는 한 나는 내 손의 펜을 놓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실정을 알리는것은 매 하나 지식인의 거부할수 없는 책임이기때문이지요. 대학 교원으로서 더욱 그러하지요.     나는 내가 얼마나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양심이 불안한 까닭입니다.     내가 일을 한 뒤 그 어떤 트러블이 생겨도 령도들이 그 얼마나 노여워해도 나는 다만 양심의 지령에만 복종합니다. 이게 나의 생존방식입니다.           대담자  소개   장명(张鸣)   중국 현대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 정치학자, 역사연구자, 평론가 1957년출생 , 동북의 북대황에서 자람 청소년시기 농업기계공, 수의를 지냄 중국인민대학 대학원 졸업 현재 중국인민대학 정치학계 교수   주요 저작으로는 《辛亥-摇晃的中国》《乡村社会权力和文化结构的变迁》 《历史的会脾气》 《历史的底稿》《北洋裂变》 등 다수가 있음     
5    왜 중국의 개혁개방전망에 낙관하는가?[모우식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759  추천:55  2016-07-29
《33의 신사유》 문화대담(5) 왜 중국의 개혁개방전망에 낙관하는가? 모우식+김문학   들어가면서 모우식(茅于轼)선생님과의 대면은 지난 6월28일 오전 9시경 북경시내의 녹음이 우거진 한 주택가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였다. 모선생님은 사진에서 익숙히 보아오던 얼굴모습처럼 미남형에 신사적인 대가의 기질이 넘쳤다. 88세의 고령을 의심하도록 70대로 보였으며, 겸손하고 자애로우며 친근하여 오랜 지기같은 느낌이었다. 82세의 미인 사모님도 멋진 원피스차림으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모선생은 현대중국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대표적인 경제학자의 거물로서 국제적으로 높은 성망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경제학계의 노신”으로 불리는 그는 경제학의 발견과 업적외에도 진실한 언설로 중국의 도덕, 정신세계를 이끄는 “정신적 기수”로 일반 대중과 지식인계층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그를 “한간” “민족반역자”로 비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모선생을 알게 된것은 1997년 《중국인의 도덕전경(前景)》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작년에 유명역사학자,평론가 오사(吴思)선생의 소개로 모선생과 직접 전화통화를 빈번히 하게 되었으며, 이번 대담이 쉽게 결정되었다.   “김문학선생은 젊었지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에서 제일인자로 불리는 인물이더군요. 나는 젊은 학자와 교류하기를 좋아한답니다. 김선생과 대담을 속으로 많이 기대했어요.”   우리의 대담은 자연히 친구의 대화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전개되였으며 2시간이 눈깜짝할사이에 흘러버렸다. 사모님도 가끔식 대화에 끼어들어 모선생님의 사적인 일화도 들려주어서 고마웠다. 모선생은 근현대 중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중국인의 정신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노벨상 수상급 경제학원리의 발견   김: 모선생님의 경력을 보면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학에서는 기계전공을 배우고 치치할철도국에서 기관차 기사, 공정사를 하셨고 그 뒤 철도부 과학연구소에 전근되어 기차차량연구에 종사했지요. 그러다가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산서성 대동에서 7년간 하방했으며 청장(青藏)철도건설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경제학자와 달리 경제학전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제학연구에 놀라운 실적을 쌓았어요. 어떻게 공학연구에서 경제학연구로 전향하시게 되었습니까?   모: 내가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된 이유는 계획경제시대 철도의 경제성을 어떻게 평가하는데로 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때 벌써 내가 46살이었거든요. 그때 다른 경제학자들이 《자본론》에서 구절을 따오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을때 나는 공학연구자로서 그런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날수 있있어요     사실 경제학은 추상적 개념을 늘어놓는게 아니라 수리(数理)의 기초위에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중국 경제학자들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예속당하고 있었을 무렵 나는 그런게 싫었어요. 학문은 정치가 아니니까요.   김: 선생님께서 1979년 유명한 경제학의 “택우분배원리 (择优分配原理)”개념을 제기했을때 50세였지요. 이 원리는 경제학 노벨상 수상급의 발견이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아직 폐쇄된 중국의 환경에서 선생님은 세계경제학영역의 최첨단에 서계셨어요. “택우분배원리”는 경제학, 특히 미시적경제학의 척추라고 불립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모: 미시적경제학에서 핵심적 연구주제는 바로 적은 자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분배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택우분배원리”는 바로 직통적으로 자원배치의 최량원칙이 무엇인가를 따지는겁니다.     최우분배원리는 각 영역에 배치된 자원으로 하여금 통일적인 가장자리 (边际) 수익을 거두게 하는 것이지요. 계획경제체제하에서는 이론적으로는 통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통하기 어려워요. 왜냐하면 평균수익을 변두리 수익이라고 오판하고 칼로 베버리기식의 비례관계로 국민경제건설을 지도하기때문에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조정을 막아 버려요. 결과 낭비와 저효율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러니 오로지 시장경제의 길을 가야 통해요. 택우분배원리에 따라서 시장이익을 추구하는 참여자는 항상 가격신호를 충분히 이용할수 있으며 부단히 미량적 조정을 하여 변두리수익이 낮은 투입을 변두리 효익이 더 높은 영역으로 향상시킬수 있답니다. 최후에는 모든 변두리 수입이 일치하게 되고 이상적인 분배를 달성할수있어요.   중국 “경제계의 노신”으로 되다   김: 1975년인가 소련 경제학자 L.V 칸트르위치가 “택우분배원리”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선생님은 정보가 폐쇄된 상황하에서 이 원리를 발견하신건 대단합니다. 1985년 《走向未来丛书》의 한권으로 선생님의 《择优分配原理》를 출간했는데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요.   모: 그때 우리나라 정보가 막힌 상황에서 나야 이런 정보를 몰랐지요.또 알수도 없었고. 나는 나대로 경제학의 미시적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는데 내 학생중에 지금 유명한 장유영(张维迎) 송국청( 宋国青) 양소개(杨小凯) 등 우수한 학자들이 포괄돼있었어요. 1984년 철도부 과학연구원에서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로 전근되어서 더욱 본격적으로 경제문제를 연구하게 되었고, 나는 중국경제계의 계몽을 위해 헌신할 결의를 했습니다.   김: 모선생님은 “경제계의 노신”이라고 불립니다. 미국연구소는 당시 소장으로 계신 거물 이신지(李慎之)선생님의 초빙으로 전근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모: 그래요. 내 인생을 바꿀 만큼 이신지선생님의 영향은 막대했어요. 그때 이선생은 미국경제에 관한 논문을 매년 몇편 발표하기만 하면되니까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가지라고 했어요. 정말 고마운 분이지요. 미국연구소에 있는 10년동안 내  3분의 2의 연구성과는 다 중국개혁에 관한 글이었는데 이들은 중국개혁에 다소 추진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나는 체제내에서나 체제외에서나 항상 자유주의 지식인이라 여겨왔어요. 보다 개방된 사유에서 경제영역이나 사상영역에서 계몽자로 자신해왔습니다.   김: 그래서 선생님을 “경제계의 노신”뿐만아니라 “사상,개혁의 노신”이라 칭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아마 미국이나 일본같은 나라에서 사셨다면 노벨상 수상도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모: (웃음) 아마 그럴수도 있겠지요. 모선생 사모님 방백: 우리 모선생은 많은 분야를 걸쳐서 연구를 해왔는데 사고가 독특하고 역향(逆向)적인 사유가 많아서 늘 독창적인 연구실적을 이루어왔어요.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고 상식을 도전하는 정신이 강하지요. 그리고 고지식하고요.   김: (웃음) 그렇군요. 독창적 학자로서의 성품이 갖추어있지요. 선생님은 민간에서 최초의 싱크탱크(智库)인 천칙(天则) 경제연구소를 창립했지요. 중국 민간싱크탱크의 상징으로 꼽힙니다. 유명 싱크탱크 “천칙경제연구소” 모: 예. 1993년 내가 장서광(张署光) 성홍(盛洪) 당수녕(唐寿宁)등 학자들과 문화사업을 하고 있는 대상(大象)회사와 공동으로 천칙경제연구소를 만들었어요. 김: 그런데 궁금한건 “天则”이란 이름이에요. 모: “天则”은 《시경》의 시구 “天生丞民,有物有则”(천생승민,유물유칙)이란 시구에서 따 왔는데, 자연의 규칙을 뜻합니다. 이 명칭은 우리 경제학자들이 다 제도경제학에 공동한 관심을 품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지요. 초기에는 성홍씨가 소장을 담임했다가 1993년 가을께 미국 시카고대학 방문학자로 가는 바람에 내가 소장을 맡게 되었어요. 금년부터는 오사(吴思)씨가 이사장을 맡게 되었구요. 김: 천칙연구소는 미국의 《타임즈》나 국제적 매스컴에서 중국 민간에서 탄생된 최초, 최고의 싱크탱크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로 어떤 일들을 하셨습니까? 모: 너무 많은 일들을 전개했지요. 중국제도변천의 연구, 경제, 인문개혁의 연구 그리고 격월천칙포럼도 개최했어요. 그리고 상아탑에서 나와 경제학 “산업화”에 힘을 기울였는데 아시아 개발은행 후드기금회와 미국국제경제연구소가 위탁한 많은 항목을 완성했어요. 모선생사모님 방백: 모선생은 사실 퇴직후에 집에서 쉬면서 글이나 쓰면되는데도 쉴줄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연구소에 매일 출근하면서 글 쓰고 강연하고 젊은 소장학자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어요.그렇다고 무슨 돈 되는 일이 아니데도 사욕은 다 뿌리치고 중국개혁을 위해 헌신을 해왔지요. 요즈음은 88고령이니까 연구소일은 관여하지 않지만 그래도 강연초청이 있으면 나가셔요. 누가 우리의 치부(致富)를 방애했나? 김: 선생님의 굵직한 신조의 하나는 “중국인이 부유해지는것”이라고 어느 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누가 우리의 치부를 방애했나?》라는 책에도 이 신조가 잘 구현되고 있었어요. 왜 중국은 가난한가? 누가 우리의 치부의 길을 방애하는가?를 미시적 실례를 들어 표현했습니다.   모: 난 지금까지 해외 선진국, 후진국을 다 돌았고 내 인생도 민국,신중국,개방개혁 3단계를 다 겪었어요.이런 와중에 경제학자로서 내가 가장 관심을 품은건 중국이 가난한것과 우리의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에 대해 캐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의 무질서, 성실하지 못한것, 소질이 열악한것도 큰 문제이며 제도도 큰 문제입니다. 사실 한 개인의 물질생활의 풍요로움은 본인이 창조한 가치량뿐만아니라 동일사회중 기타 성원의 일하는 질과 효율과도 관계됩니다.     경제학의 견해에서 바라보면 인위적인 불합리가 생산의 잠재력을 저애하고 인간의 노동을 생산에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노동성과를 상쇄하는 노력에 써버리지요.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국가의 재부를 좀 먹고 개인의 치부를 방해합니다.     치부의 길은 아무래도 제도의 창신과도 관계가 밀접하지요. 그중에서도 핵심적인것은 자유교환의 시장가격시스템으로 자원의 배치방식을 개변해야 서로가 시장에서 수입을 취득할수 있고요. 이러자면 재산소유권을 명확히 해야 됩니다.   GDP의 신화를 넘어서야   김: 저명한 경제학자이고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기수로 꼽히는 하이예크는 《노역으로 향한 길》등 저작에서 경제방식과 인간성, 정신양상에 큰 역할을 한다고 지적 했어요. 국가가 과도하게 경제를 관리하여 생긴 문제를 소련의 해체를 통해서 설명하였으며 전체주의 계획경제의 큰 페단에 대해서 비판의 메스를 드리대면서 전체주의가 바로 인간을 노역의 길로 끌고가는 길이라고 지적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지 오웰의 《1984》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으며 전체주의의 결함을 비판한 자유주의지식인의 하소연을 실감했습니다.선생님은 중국의 계획경제와 GDP 추구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모: 하이예크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중국만 아니라 세계 계획경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 서지요. 중국이 장기간 계획경제를 한 결과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등소평이 시장경제를 실시 했잖아요. 그래서 전례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GDP는 당연히 중요해요. 플러스면에서GDP의 향상은 대중들이 돈벌이에 투신하고 돈 벌려는 욕망이 강함을 설명해요. 그러나 문제는GDP 만 추구하면서 돈을 버는 동시에 타인을 상해하는겁니다.     원래 시장경제는 타인을 상해줘서는 안되는게 룰이에요. 그러나 보세요. 현재 중국에서는 일방적으로 억지로 일하여 상대를 손해주는 일이 어디 한 둘입니까? 이것은 발달한 선진국의 시장경제와 비하여 현저한 거리가 있지요.   김: 일본에서는 상업원칙이 너 좋고 나 좋고 소비자도 좋은 3방호(三方好)원칙이 잘 관철되고 있어요. 그러니 일본의 기업이 오래 지속되고 전승되지요. 백년이 넘는 회사가 일본에 세계제일 많은데 무려 5만2천여개나 되고 200년이 넘는 기업이 4천여개가 되구요. 천년이 된 기업이 7개 그중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회사가 오사카의 콩고구미 (金刚组)인데 1438년에 설립된 거지요.   모: 그러니 우리가 일본을 따라배워야 합니다. 타인을 상해하는GDP는 엉터리죠. 타인을 상해한다면 그건 도박이 되버려요. 내가 벌고 상대가 밑지면 별로 못 번거예요. 나도 벌고 너도 벌고 다 벌어야 GDP가 상승되지요.     시장경제의 기본특징이 쌍영(双赢)이니까 쌍영이야말로 재부를 창조하는 길입니다.   김: 좋은 말씀입니다. GDP만 올려서 풍부해졌다고 외치는 것도 유치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중국의 산업구조가 경제학자들의 지적과 같이 노동력집약형산업중심이어서 품삯만 벌어드리는 구조이지요. 설계에서 가공까지 전과정을 걸쳐얻는 수입은 몇퍼센트정도의 수익을 누적한거에 지나지 않아요. 최대 수익자는 구미나 일본같은 선진국이고 게다가 중국은 또 환경보호와 같은 코스트를 자부담해야 하지요.   모: 맞아요. 지금GDP신화를 강조하면서 경제의 활성화를 높이 올리추고 있지만, 중국인이 계획경제를 또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계획경제에서 고배를 마시고도 잘 몰라요. 나는 시간이 되면 계획경제의 페단에 관한 저작을 쓸 생각이에요.   왜 중국인의 도덕을 추궁하는가?   김: 선생님은 경제학자이면서 노신처럼 중국인의 도덕, 국민성소질에 대하여 일찍부터 추궁하고 비판하고 반성을 본업처럼 해 오셨습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알게 된것도 1997년 선생님의 저작 《中国人的道德前景》을 읽으면서 였지요.       경제학자들이 도덕을 관심한 실례로 아담 스미스, 칼 맑스,프리드먼,시몬, 하이예크등을 들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경제학자로서 어떻게 도덕에 관심을 쏟게 되었지요?   모: 시장경제는 법치경제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나는 더 정확히 말하여 “시장경제는 도덕경제”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의 토대위에서 성립된것이니까요. 이게 내가 도덕을 관심하는 출발점입니다.       1987년 미국방문후 귀국하여보니 중국경제는 개혁에 의해 많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문혁에 의해 파괴된 윤리도덕이 엉망이 였지요. 공산주의도덕은 신앙위기에 직면 했고 사회공덕은 여지없이 추락되었기때문에 나는 도덕이 경제발전에 적응하지 못함을 아주 고민했어요. 1989년에 《중국인의 도덕전경》을 집필했지만 당시 정치풍파로 출간이 미루게 되었다가 1996년에야 공식 출판했습니다.   김: 일반적 도덕론 저작은 흔히 설교에서 설교로 그치는데 선생님의 책은 일상 사소한 에피소드로 입각하여 도덕문제를 논하니 풍부한 시사와 함께 설복력이 강합니다. 또한 시각이 독특하기때문에 사상(事象)을 보는 견해가 유니크해요. 예를 들어 제1장 제2절에서 선생님은 뢰봉을 따라 학습하는 보도, 한 사람이 뢰봉을 따라서 호심호의로 근처의 대중을 위해 의무적으로 일상도구를 수리해주는데, 이 사람앞에 수십명이 줄서 있어요... 그런데 이 수십명은 뢰봉을 학습하여 호인호사를 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공짜를 좋아하는 인간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 그래요. 내가 의무적으로 타인의 도구를 수리해주는걸 반대하는건 무턱대고 좋은일을 하는걸 반대하는건 아니지요. 왜냐하면 한사람이 뢰봉이 된다면 수십명은 공짜를 노린거예요. 여기에 지극히 심각하고도 평범한 도리를 제시해주고 있어요. 즉 도덕의 발생함은 두가지 상황이 있다는것. 하나는 인간과 인간이 대등하지 못할때, 부자와 가난한자, 강자와 약자, 버스에 오르는자와 내리는 자 이들은 다 부대등 위치에 있어요. 그러므로 부자, 강자, 승차하는 자는 가난한자, 약자, 하차하는 사람을 방조하든가 양보해야 하지요.       의무로 도구를 수리하는 자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부대응을 이해하지 못한 과오를 범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완전히 대등해 있을때는 어떤 도덕문제가 생길까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은행이 도산한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앞다투어 그 은행의 저축금을 다 빼낸다면 아무리 성실한 은행도 하루아침에 망해버려요. 이때 은행과 대등관계에 처한 고객도 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물진인퇴(物进人退)의 중국인   김: 선생님의 책과 관련하여 말씀 드리자면 제가 2014년에 《중국인은 진화했나?》란 책을 일본에서 출간했는데 물질진보와 함께 정비례 되지 못한, 도덕, 정신적 진화를 이룩하지 못한 물진인퇴(物进人退)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일본과 한국 동일문화권에 비교해도 이 상황은 너무 일목요연해요. 선생님께서도 《중국인의 도덕전경》에서 “물질 향수의 특점은 곧 포화상태에 달할수 있지만 과도한 물질향수는 도리어 고통을 조성한다. 정신향수만이 인간을 고차의 경계로 이끌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어요.     확실히 제가 보건대 중국인의 물질재부가 풍부해졌지만, 그와 맞먹는 정신, 도덕신앙의 추구는 오히려 퇴보했다는 겁니다.   모: 김선생님의 “물진인퇴”의 개념은 참 의미있는 발견이라 할수 있습니다. 확실히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건 물질 풍요로움뿐아니라 완미한 정신생활도 같이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사자리한 사회안에서 이러한 경지를 이룩할수 있는지 문제지요. 내가 《중국인의 도덕전경》을 쓴것이 바로 시장경제와 도덕의 융합과 충돌을 해명하고 시장경제하의 도덕관을 제시함으로써 개혁개방중 우리의 도덕관의 변화와 전망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8. 인간과 인간사이의 “등가(等价)관계”는 무엇인가?   김: 선생님의 중요한 지적의 하나가 “인간과 인간사이의 등가관계”입니다. 시장경제와 전통도덕의 관계에서 선생님은 인간의 권리, 평등, 제도등 문제인데,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모: 1997년 내가 경제학연구에서 제기한 “인간과 인간의 등가관계”는 장기간 연구끝에 탄생된 거지요. 쉽게 요약해서, 개인이란 원체 사회 맴버중의 일원으로서 그 누구도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아요. 수학의 집합론적 등가개념으로 인간관계를  해석한것이지요.      한마디로 “매개인이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이 최대한에 도달한다면 그 한도가 곧 타인의 같은 자신의 이익이다.”이게 바로 인간의 등가성입니다. 김: 그렇다면 이 등가관계는 인간평등의 보편적가치관과 직결돼있겠습니다. 요즘 중국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에도 구현되고 있지요.   모: 그렇지요. 등가관계와 인간의 인권, 즉 생존권, 인신권, 프라이버시권, 언론권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요. 이는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모종 권리를 이용하여 인권을 무시한다면 이건 특권입니다. 특권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자의 소유지요.      그러나 일종 제도로서의 시장경제가 나타나서야 인간과 인간의 평등이 가능해질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교환은 평등, 자원의 토대위에서 성립되니까 평등이 없다면 광범한 진실적 교환관계가 있을수 없으니까요!       특권이 발호하는 불평등사회에서 특권자들이 무상, 또는 변상적으로 보통인의 노동성과를 점유하기때문에 생산력이 낮고 대부분 경제가 가난하지요.       아프리카도 그렇고 우리 나라 문화대혁명시기에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김: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도 처음부터 흑모백모(黑猫白猫)이론으로 실지 지향이어서 효율만 선택했고 공평성은 홀시 했습니다. 특권에 대한 적대감이 일반 민중들속에는 있지만, 특권을 취소하기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되네요. 물론 개혁개방 30여년을 통해 인권, 평등을 통해 중국이 인권을 확립하고 민주법치의 국가로 갈수 있나요? 선생님은 이점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9.도덕신앙의 위기   모: 불확정적이지요. 세계적으로 보았을때 성공과 실패의 사례가 다 있으니 그 경험교훈을 잘 연구해야 해요. 요약해서 말하자면 정권과 인민대중이 피차관계를 어떻게 처리개선하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정부가 좀더 관용한 태세로 임하고 인민이 인내심있게 기다리면서 수십년 내지 백년이 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이 30여년동안 개혁중에서 공전의 업적을 쌓았고 중국인이 또 지혜와 문명을 지닌 민족이니 난 중국의 인권전도에 신심이 있어요.   김: 동감입니다. 제가 졸저 《중국인은 진화했는가?》(일본판)에서도 지적했지만, 현재 부유를 거머쥔 중국인이 도리여 신앙, 정신적세계가 빈곤하다고 생각해요. 중국에 자주 엘리트지성들과 대담하면서 그들도 “신앙위기”에 똑같이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모선생님은 이점 어떻게 보십니까?   모: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 문제는 공동의 가치관이 없는것이 바로 신앙위기의 문제지요. 또한 우리는 기본적의 사실, 진실마저 승인하지 않으려고 해요.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된다는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도덕인데, 우리는 왕왕 그러지 못해요. 왜? 진실을 말할수 있는 환경이 없다면 어찌 진실을 말할수 있겠어요?   김: 선생님께서는 《중국인의 도덕전경》등 여러저작에서 도덕의 중요한 성격을 전 인류의 공동한 도덕신앙이라고 하시면서 자유, 인애,성실,관용등 덕목을 꼽았습니다. 자유와 진실(성실)만큼 인간에게서 중요한게 없지요.   10.자유. 진실의 공동가치관   모: 내가 가장 강조하는것도 자유와 진실등 가치관입니다. 자유란 무엇입니까? 바로 타인을 방애하지 않는 자유여야 해요. 누구나 타인의 자유를 방애하지 않는 세계야만 진정한 자유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부자유한것은 누가 보이게 안보이게 우리의 자유를 방애하기 때문이지요. 자유는 보편적 가치관입니다. 한때 자유를 얘기하면 이건 자산계급자유화라 외치면서 마치 맹수처럼 기피했었지요. 그러나 무산계급도 자유가 수요되지요. 무산계급도 노예를 원치 않으니까요.(웃음)   김: 자유, 독립, 진실을 추구해 온게 선생님의 전생애입니다. 신앙, 도덕위기의 근원은 어디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건 진실한 말을 못하는데 있어요. 그러니 우리사회 제일 기본적인것이 상해를 입지요. 예를 들어 진실한 말을 못한다면 이 사회가 어찌 진보할수 있어요? 진실한 말을 하자면 용기와 담력이 필요한 사회이고, 잘못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진실, 성실이런거는 다 인간의 보편적 도덕인데 그걸 막아 버리면 뭐가 됩니까?!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안되요.   김: 단테가 말했지요. “도덕신앙은 지혜의 결함을 보완할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영원히 도덕의 결함을 메울수 없다.” 제가 볼때 우리에게는 도덕 보다도 악지혜에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모: 한 사회가 거짓말로 유지된다면 이 사회가 좋아질수 있겠습니까? 물론 현재 사정은 많이 호전됐어요. 어떤 진실한 말은 할수 있으나 어떤 많은 진실은 함부로 얘기해선 안되지요. 이 사회적기본문제도 아직 해결 안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노구를 끌고 지금도 글을 써서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11.왜 온갖 비방중상에도 아랑곳 안하는가?   김: 그런 선생님을 두고 인터넷에서는 “최대의 한간” “민족반역자”라고 온갖 비방, 중상이 빗발치듯 합니다. 저 역시 유사한 체험을 갖고있는데요. 선생님은 이런데 어떻게 대처합니까?   모: 그냥 내버려 둬요. (웃음) 내게 밑거름이 되는 비판은 얼마든지 좋지만, 많이는 막무가내로 날 저주하는 내용입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불쌍해 보여요. 교양이 없고 무지하고 우매하기때문에 그럴수 있습니다. 내가 날 욕하는 인터넷 댓글이나 글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저열한 욕말이 많아요. “죽어라”든가 “개새끼”라든가 뭐 형편없는 비언속어들이지요. 이런 댓글들은 중요한 정보가 숨겨져 있어요.     첫째. 대부분 그 사람들이 문화수준이 낮고 도리를 분석하는것으로 설복할 능력이 없으니까 일언반구로 자신의 불만을 배설할뿐입니다. 인터넷 욕말에는 여럿이서 폭력싸움하는것과 흡사하지요. 그들의 주먹이 두뇌보다 한수 위입니다.     둘째. 그들은 강렬한 불만정서를 품고 있으니 가장 악독한 욕말만 골라서 표현합니다. 나를 꼭 죽이자고 그런것보다는 사회불만이 극치에 달했다고 봅니다.   김: 왜 그들이 폭력언어로 원쑤대하듯 할까요?   모: 이성이 결핍하고 사상이 간단한 까닭으로 쉽게 극단으로 향하게 돼요. 그 이유는 초등교육과 관계 된다고 봅니다. 예전부터 계급투쟁교육이었고 요즘은 무원칙적 애국주의로 인해 자기 나라에 대해서는 다 옳다고 여기고 반성이 없고 정의, 박애정신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등교육에 타자를 존중하고 자신을 존중하는 예의 교육이 많지 않기때문에 문혁식의 유독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김: (웃음) 알만하겠습니다. 대중은 무지해서 그러지만 대학교수나 지식인들중에서 간혹 이런 막무가내한 자가 있으니 한심하지요!(웃음)   모: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기와 틀리거나 자기보다 앞서가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래서 무지한 폭한같이 폭언으로 욕하는 지식인도 더러 있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말아요. 아랑곳 안하면 그만이예요! (웃음) 내게 덕과 진리가 있으니까요.   김: 아인슈타인이 큐리부인의 추도식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일류의 인물이 시대와 역사진로에 대한 의의는 그 도덕성품면이 오히려 그 단순한 재능성과보다 더 위대하다”고. 선생님은 정말 이 시대의 최전선에 서서 지식과 덕을 친히 실행하는 모범적 군자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모: 감사합니다. 동아시아의 “귀재”가 이렇게 칭찬해주시니(웃음)   12.“나는 부유한 자를 위해 말하고 가난한자를 위해 일하리”   김: 선생님의 명언중에 세상이 널리 알려진 “부자를 대신해 말하고 가난한자을 위해 일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가난한 자를 위하여 말을 하고 동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부자를 위해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 그래요. 지금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말하는 사람은 많고 부자를 위하여 대언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한편 부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많아도 가난한 자를 위해 일 하는 자는 극히 적어요.     원인은 단순합니다. 가난한 자는 약자군체이므로 그들을 위해 대변하면 사회의 찬성을 받아요. 그러나 부자를 위해 말하긴 어려워요. 왜냐하면 부자는 우리 사회에서는 맑스의 착취리론의 영향으로 착취자로 보기가 일쑤거든요. 부자를 위해 일을 하는것은 노동보수가 많기때문에 다들 원합니다.     결과적으로 부자를 위해 말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 극히 적지요.   김: 그러니까 선생님은 사회상식을 거슬러 역행한다는 뜻이겠군요.   모: 맞어요. 물론 여기서 부자는 성실하게 치부하는 기업가나 창업자를 가르키지요. 부자들의 이익과 재부가 보호를 받아야 되거든요. 중국이 장기간 빈곤했기에 부자들을 적시하는 구부(仇富)심리가 강해서 그들이 당하기 쉽지요. 권력앞에서 부자도 가난한자와 같이 업심받고 착취당합니다. 중국은 스스로 민간의 기업과 부자를 보호하고 산업을 키워야 하며, 그들이 쌓은 부유는 긍정받고 지켜야 합니다.     한편 가난한자를 위해 말만 하기보다 진짜 그들을 위해 착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모선생 사모님 방백: 우리 모선생은 이 말때문에 온갖 욕을 다 먹었어요. 그리고 “교육산업화”를 고취하고 “일제물건을 보이코트하기”를 반대하는 말을 했다가 네티즌의 비방중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두 전혀 상관하지않고 덕으로 원념을 대하고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가난한 사람들께 매년마다 현금으로 몇만원씩 지원하고 자신은 또 검소하게 지내지요. 택시비도 나는 일푼도 더 안주지만 모선생은 언제나 2원씩 더 주지요. 택시기사가 기뻐한다구요…   13.중국 제일의 완인 (完人)   김: 그래서 모선생님은 중국의 제일 완인(完人)이라 불리지요. “중국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로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경제학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에서 어떤 인물은 지식으로 세계를 계몽하고 어떤 인물은 사업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어떤 인물은 도덕으로 세계를 감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선생님은 이 3가지 면을 다 어우르고 실천하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학자로서 진리와 진실로 사회를 계발하고 실천자로서 행동으로 타인을 도와주고 도덕모범자로서 많은 사람의 본보기로 되었다는 평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모: “인생을 향수하며 또한 타인을 도와 인생을 향수하게끔 한다”는 말과 “温良恭俭让”이 5자가 내 인생의 의의를 개괄했습니다. (모선생님은 대담이 끝난 뒤 나에게 이 5자를 붓글로 휘호해 선물해주었다)   김: 선생님의 인생에서 영향이 큰 책은 무슨 책이 있습니까?   모: 관념적으로 내게 가장 큰 영향준 책이 《논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많은 도리를 아주 명석하게 가르치는 책이지요.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 공자는 이직보원(以直报怨)이라 말씀했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대지혜가 함축돼있는바 인간이 이를 실천에 옮긴다는건 용이한 일이 아니지요.   김: 인생88세를 사시면서 간추린 신조 또는 교훈은 무엇이 있지요?   모: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건 여전히 인간을 존중할줄 아는 것입니다. 온량, 겸허, 공손하게 타인을 대하고 타인을 허투루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나는 보통 경계심이 없어서 이용당하고 속아넘기를 잘 해요. 이용당해도 괜찮아요. 타인에게 이롭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니까요(웃음)   김: 제가 전번 전화서 선생님의 저작을 일본서 미처 못 갖고 왔다고 하자 선생님은 이미 싸인해놓은 저작을 준비해 놓았으니 염려말라고 상냥하게 말씀했잖아요. 당시 저는 너무 감격했어요. 이렇게 자상한 분이시구나 하고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것은 선생님은 중국의 개혁개방 30여년 그 미래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14.중국개혁개방의 전망은 밝다   모: 공평하게 평가하여 중국의 개혁개방 30여년은 역사상 전례없는 실적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면에서 중국공산당의 엘리트의 지도적 성과는 대단하다고 평가합니다.     나는 3가지 측면에서 이 위대한 성공을 평가하고 싶어요 (1) 재부가 증가된것 (2) 자유가 확대된것 (3) 개방으로 인해 중국이 세계속으로 들어간것. 모택동시대에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할수 없었지요.   김: 그럼 개혁개방의 부족점 또는 약점은 무엇인지요?   모: 첫째로는 인치에서 법치로의 이행이 아직 부족하고 두번째는 여론감독의 시스템이 아직 부족한겁니다. 세번째는 지방정부의 이익만 추구하는 페단이 있지요.     그리고 여전히 자유의 폭이 모자라는것이지요. 국제적으로 전문경제자유와 경제실적의 효율에 관한 연구기관이 있는데 인민의 자유도가 높을수록 경제성장이 순조롭고 생활수준이 높습니다.   김: 저명한 미국의 중국인 역사학자 당덕강(唐德刚)은 “역사의 3협(三峡)”개념으로 중국이 자유민주국가로 변모하려면 300년은 걸린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모: 나는 100년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과거 100년동안 중국의 변화는 매우 컸고 현재 중국은 개방된 나라로서 젊은이들도 많이 보고 사고하며 앞으로 큰 문제를 해결해 나갈수 있다고 믿어요.     내가 보건데 중국은 현재 신민(臣民)사회에서 공민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단계에 처해있어요. 지금 가장 희망성이 있는 시대라고 보고있어요.   김: 선생님은 미래 전망에 대해 낙관적이라는 얘기십니까?   모: 그래요.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중국은 서서히 평형이 잡힌 발전의 길에 들어설수 있어요.     다수 대중들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안거낙업(安居乐业)이 아닙니까? 그것을 반대하는건 무엇이지요? 특권이지요. 그러니까 현재 가장 환영받는 주장이 바로 인권, 민주, 법치,성실,자유가 아닌가요!     중국이 평등, 인간과 인간의 평등이 이뤄지면 자유의 사회에 들어설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 그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할수 있지만, 우리 후손들이 그런 장미빛미래에 살수 있다고 생가하면 희열에 벅차오릅니다   대담자 소개 모우식 (茅于轼)   당대 중국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의 한 사람 “중국경제학계의 노신”이라 불리고 있음 매스컴에서는 “당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평가가 있음. 1929년 강소성 남경 출생. 1950년 상해교통대학 졸업 기차 조종사, 기술원, 공정사(기사)역임 1984년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연구원으로 되였으며 1993년 정년퇴직후 유명한 민간 싱크탱크 “천칙경제연구소”설립 초대소장으로 취임. 2012년 미국 프르드맨 촉진자유상을 수상   주요저작으로 《择优分配原理》《中国人的道德前景》《谁妨碍了我们致富》《现代经济学前洽专题》《生活中的经济学》등 다수. ----------------- 茅于轼(1929年1月14日— ),生于南京。经济学者,民间经济学者的重要代表。原北京天则经济研究所理事长,民间学术机构“人文经济学会”的理事长。2014年4月26日,茅于轼成为英国 Prospect 杂志评选的“2014世界思想家”十位获奖者之一,名列第四。 荣誉成就 编辑 ●被美国Marquis世界名人录和英国剑桥国际传记中心选为1993-1994年度世界名人。[8]  ●1997年出版的《中国人的道德前景》,于1999年获ATLAS基金会办法的该年度AntonyFisher国际纪念奖。[8]  ●2010年1月8日,《中国新闻周刊》举办创刊十周年庆典。当天,这本以“影响有影响力的人”为宗旨的周刊评选出十年来推动社会进步的各领域“影响力人物”,茅于轼先生获评知识界影响力人物。[11]  ●2012年3月,设于美国华盛顿的智库卡托研究所(Cato Institute)宣布,茅于轼获得该研究所颁发的2012年米尔顿·弗里德曼自由奖。卡托研究所认为,茅于轼是中国个人权利和自由市场的最积极倡导者之一,他倡导开放和透明的政治体制,并在中国从计划经济向自由市场经济转型过程中贡献了力量。茅于轼也是中国民间慈善和社会自助组织的实践者。[7]  ●2014年4月,入选英国 Prospect 杂志“世界顶级思想家”(World Thinkers of 2014)候选50人名单。是本年度唯一入选该候选人名单的中国人。[13]  ●所著《中国人的道德前景》一书获1999 Sir Antony Fisher国际纪念提名奖。[14]  ●2014年中国讲师500强[15]  入围讲师。 个人主张 茅于轼道德前景 中国人的道德前景:“毫不利己,专门利人”从个人动机来说是高尚的,但在普遍意义上看,提倡这种行为并不能达到提高社会道德水平的目的。“私”是人类本性,也是市场机制运行的基础。市场经济社会的道德前景并不暗淡,重要的是肯定私利,反对特权,保护个人财产,使私心从破坏力变成创造力。 茅于轼政治改革 政府和民众的关系要有一种新的调整和定位。从制度框架看,市场经济是基于公平竞争和自由选择之上的社会形态,它要求每个人在社会中有同等的权利和地位,民主政治是其中不可缺少的环节;从资源配置和经济改革效率的层面,政府职能是提供公共物品,民众的义务是依法纳税,两者之间必须建立一个开放、竞争的公共物品市场,才能实现资源配置最优的一般均衡。 政治改革不应当是个敏感话题,如此,不利于改革深入和全民参与,公民应当可以用客观、和平、建设性的论调,对“一切敏感问题”发表看法。当政治改革遇到挫折的时候,一方面政府要保持灵活务实的态度,要承认人权、清除特权;另一方面,民众要依法捍卫自己的权利,严肃地承担自己的法律和道德义务。 茅于轼快乐之学 追求快乐是人生的最高准则,财富不是。快乐是衡量个人生活和整个社会环境好坏的惟一和无上准则。助人不要给人带来负担,争取自己的快乐的同时给别人快乐,要增加快乐的总量,要不折不扣地进行帕累托改进,即确实没有任何一个人不快乐,而至少有一个人更快乐。 一个社会要有宽容精神,也要有批评,从善意出发的批评就是二者的结合。“以直报怨”是化解一切矛盾应有的态度。以直报怨包含两重意思,一是要直率地指出对方的错误,用适当的制裁对待破坏规则的人;二是要让他有改悔的机会,惩罚中有爱心。 茅于轼人物评价 在中国,一提起经济学随笔,人们自然就会想到茅于轼,他是较早以随笔的形式来阐述深奥的经济学道理的。1994年,茅的一部《生活中的经济学》,通过对美国市场的考察,阐述了市场经济的运行规律,该书一版再版,几乎成了经济学随笔的代名词,由此,茅获得了足够多的关注和支援。  著名经济学家茅于轼 随后他又推出了《中国人的道德前景》、《谁妨碍了我们致富》等著作,在国内产生了较大的影响。他又出版了《我所认识的经济学》、《经济白话》、《给你所爱的人以自由》等著作,这些著作大多以经济随笔、演讲录的形式,对农业、入世、自由、道德等一些与现实生活密切相关的问题进行探讨,他的许多观点非常与众不同,他的文风恰如一句古诗:“语不惊人死不休”。[39]  茅于轼自认是独立的、自由的经济学家,他的特点是把经济学更加平民化,纠正社会上一些人对经济学的错误认识。在研究学问上,他对自己的要求是,不仅要掌握教科书中的定理,还要找到可以说服自己的生活例证。 百度百科  
4    왜 '또 하나의 중국'을 알아야 하나? [왕학태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790  추천:52  2016-07-08
《33의 신사유》 문화대담(4)   왜 “ 또 하나의 중국”을 알아야 하나?                         왕학태+김문학   1.“또 하나의 중국”발견   김: 현대 중국 인문학계에 “3대발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학태선생님의“유민문화(游民文化)”와 여영시(余英时)선생의 “사문화(士文化)”,그리고 오사(吴思)선생의 “숨은 규칙(潜规则)”을 인문학의 3대발견으로 칭하고 있지요.      물론 대만 백양선생의 “장독문화”까지 넣어서 저는 “4대발견”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되기도 합니다.     왕선생님의 “유민문화”론은 중국 지식계에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이신지(李慎之)선생님은 유민문화를 논한 저작《유민문화와 중국사회》을 평해 “또 하나의 중국을 발견했다”고 격찬했습니다.      “유민문화사회”에 관해서 선생님과 대담을 하고자 하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려요.   왕: 천만에요. 김선생도 젊은 학자로서 이미 많은 책을 내셨고 ,특히 동아3국과 중국국민성에 관한 논저들은 중국 지식계에서도 매우 주목받고 있습니다.   김: 고맙습니다. 유민문화 연구의 제일인자인 선생님께서는 역대로 중국 지식계에서 홀시해온 유민사회,그러니까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정통사회 즉 현성사회(显性社会)의 뒤면에 있는 비정통사회,즉 은성사회(隐性社会)에 대해 체계적으로 발굴, 연구를 해냈습니다.     1999년 제가 선생님의 《유민문화와 중국사회》를 읽었을 때 큰 감명을 받은 이유가 바로 “또 하나의 중국사회”에 대한 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성사회가 현재 중국에 미치는 영향과 앞으로 중국사회의 관련양상에 대해 풍부한 시사를 주고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유민문화를 재발견하고 책을 쓰기에 이르렀습니까?   2. 하층사회의 체험이 학문으로 승화   왕: 사실 내 인생은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난 1960년대초 북경사범학원 중문계 학부생시절에 반동학생으로 몰리웠어요. 1975년 우파로 감옥에서3년 감방신세을 지었지요. 그러니까 옥중생활에서 난 수많은 하층사회 인간을 접하고 그들의 삶, 생각, 행동양식을 낱낱이 파악하게 되였습니다. 김선생도 문화인류학자이니까 아시겠지만, 그 사회속에 깊이 들어가 체험하는건 지식인, 학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직접 이해하고 몸으로 느낄수 있으니까요.      하층서민은 마치 《수호전》의 세계와 같아서 거기에는 악한기(痞子气), 유망기(流氓气), 유민기(游民气)로 가득차있지요. 그래서 나는 《수호전》을 연구하는게 오히려 《홍루몽》을 연구하는것보다 중국사회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서나 현실에서나 나는 방금 말한 유민, 유망, 악당들을 너무 많이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도리고 이성이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폭력,주먹입니다.   김: 그렇죠. “폭력원리”는 중국역사를 관통해온 하나의 생존원리, 사회원리이기도 하지요.   왕: 맞어요. 그래서 나는 중국사회를 화려한 겉만 보지 말고 이런 유민들의 세계,은성세계에 대해 주목하게 됬고 마침내 전문저작을 써내게 되었습니다.   김: 일찍 1919년에 민국시기 도아천(杜亚泉 )선생이 유민문화에 대해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의 중국문학자 타카시마도시오(高岛俊男) 선생도 《중국의 대도적》이란 책을 간행했습니다.   왕: 도아천선생은 《동방잡지》(제16권4호)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습닌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귀족문화와 유민문화는 늘 모순적으로 공존하며 교체하면서 성쇠를 이루어왔다. 즉 귀족문화가 왕성할 때는 사회가 침체부패하고 따라서 유민문화가 그것을 대체 해버린다. 그러나 유민문화가 왕성해지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귀족문화가 다시 이를 대체 해버린다. 이것이 중국사의 순환이다.”       두선생은 신해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중국이 귀족문화와 유민문화라는 양대세력에 빠져서 우왕좌왕했기때문이라고 지적했어요.     그러나 도선생은 중국사회의 역사적 진로와 결부하여 세밀한 분석,고찰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아무튼 “유민사회”를 지적한것만으로도 큰 실적이지요.   3. 아Q는 전형적 유민이다   김: 왕선생님의 중요한 지적은 아Q의 신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아Q는 농민이 아니라고 했지요.      왕: 그래요. 1980년대부터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나는 유민문제에 대해 캐기시작했어요. 내가 우선 주목한것은 노신선생의《아Q정전》의 아Q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나의 분석에 의하면 노신은 중국인의 열근성을 문학적으로 제시하려고 해서 아Q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국내 연구자들은 흔히 아Q는 낙후한 농민이라 보고 있지만, 아Q가 어디 농민입니까? 우리가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대한 분석을 누락시켰어요. 아Q는 도시와 시골에 유랑하는 유민의 전형 모델이지요. 고정직업도 주소도 가정도 종법(宗法)도 없는 유민, 그리고 그의 성씨도 뭔지 몰라요. 이게 전형적 유민이 아니고 뭡니까?(웃음)   김: 그렇네요. 노신선생은 유민을 문학적 형상, 이미지로서  재현하였지만, 이론적, 학문적으로 유민문화를 탐구하지 못했습니다.  왕선생님께서 노신선생이 미처 하지 못한 학문적규명을 하셨어요.  중국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유민과 귀족 환언하여 악당과 신사 또는 비유교와 유교계층이라는 2항대립구도를 이해나는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즉 표면사회와 리면사회의 교체가 중국사회교체의 일종 룰이기도 하겠네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유민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4.유민, 그리고 시비가 없는 세계      왕: 유민이란 말그대로 직업과 노동대상인 땅을 잃고 유동,유랑하는 사회의 무리를 말합니다.         유민이란 개념은 최초 《예기. 왕제》(礼记 . 王制)에 등장해요. 《관자》에도 나오지요.  상앙(商鞅)이 지적한 “농민이 적고 유민이 많았다”는 말과 같이 유민은 일종의 직업으로도 되였습니다.           청나라때는 유민을 무뢰한, 악당, 깡패등과 같은 취급을 했어요. 1949년 신중국 성립후 정부에서는 유민을 부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유민개조”운동을 벌이기도 했지요.    김: 그럼 유민은 굉장히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겠습니다. 선생님은 송나라때부터 유민의 군체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왕: 선진(先秦)시기부터 유민이 있었지만, 유민군체, 유민의식의 형성은 아무래도 송조때부터라고 봐야지요. 여기서 상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으나, 정치적현실과 도시제도의 변화에 따라 유민이 무리로 생기고 유민의식도 팽배해집니다.   김: 유민의 성질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  네가지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스스로 이를 “유민성격”이라 명명했어요.   1.천연적인 반사회성, 천하가 대란에 빠지고 그 틈에 자신의 처지를 개변하려고 하지요   2.능동적인 진격정신, 즉 능동적으로 타자를 진공해요. 자신의 이익을 얻기위해 폭력, 무력으로 타인을 쳐서 빼았아 냅니다. 《수호전》의 세계가 그런 세계가 아닙니까   3.결속, 동맹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흔히 비슷한 사람끼리 결속하여 친구, 형제를 맺어서 같이 행동하는겁니다. 《3국연의》의 “도원3결의”가 그 간단한 형태이고 복잡한것은 비밀결사, 방회를 만드는것이지요. 그러니 폭력원리가 제일이고 “적아만 가리고 시비는 안 가린다”는 원칙입니다. 《수호전》에서도 이 점이 잘 구현되고 있어요.    4.반지성, 반문명성격, 지식, 교양, 문명을 존중하지 않고 무력,힘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 행동양식입니다.    이것은 중국전통사상의식중 가장 암흑하고 가장 야만적인 일면이지요     5.중국역사는 유민이 만들었다   김: 중국의 귀족과 유민의 권력 다툼의 역사라는 지적과 같이, 중국사회의 계층을 관철해보면, 정통사회의 질서구조에서 배제된 계층이 늘 사회전면의 원동력으로도 되었지요.       지식인들속에도 출세의 길이 끊기고 체제에서 배척당하면 유민에 가담하는 현상도 늘 있은 일입니다.     제가 약 십년전에 《중국, 국민성의 리(里)구조의 발견》을 집필할때 선생님의 저작과 해외학자들의 유민, 도적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섭렵했는데, 역시 폭력원리는 유교의 원리와 함께 중국사를 관철한 큰 테재였습니다.   왕: 옳은 말씀이에요. 사실 중국사의 농민봉기, 이를테면 역사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진승,오광이나 명조를 세운 주원장이나 또는 명조를 무너뜨린 이자성도 태평천국운동을 발동시킨 홍수전도 다 농민출신으로서 유민을 조직하여 궐기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김: 영국의 사회학자 P.R빌린그스리의 저작 《비적-중국의 변경과 중앙》(1988)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에서 비적이 창궐하였는데 1930년에는 비적총수가 적어도 2000만이나 달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때 중국의 신문,잡지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체는 상실하고 비적의 세계로 돼가고 있다”고 질호할 정도였으니까요. 나라 전체가 강호의 세계를 이룬것입니다.   왕: 나는 최근에 “강호(江湖)”라는 단어로 “유민”을 말하기도 합니다. 유민에서 나온 “강호”는 하나의 군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곤 했으니까요.       송조에 이르러 도시가 발달하자 유민도 군체의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유민의식도 송나라이후부터 통속소설등 문예스타일로 표현되였는데 역시 그 작자도 강호의 예인 (艺人)들이 창작한것이지요.   6.“강호” 사회의 중국   김:  “강호”는 중국 전통사회를 이해하는 커다란 키워드라고 생각해요.그것은 “정통”의 대극에 있는 비체재의 민중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여기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고계신지요?   왕:  “강호”란 단어는 《장자(庄子)》에도 나오는데 재야의 반항정서와 역량도 포함돼 있다고 학자들은 말해요. 그러니까 체제내에서 나온, 또는 거기에 못들어간 재야, 민간의 세상이기도 합니다.     전통적 사대부들이 “묘당(庙堂)”에 있으면 군자를 생각하고 강호에 있으면 서민을 우려한다”고 했는데 조정내의 파벌,명예투쟁에 싫증이 난 그들이 강호에 오면 조용하고 음모궤계가 없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수 있었거든요.   김: 전통적 지식인들이 입세시에 유가(儒家)가 되고 출세(出世)시에는 도가(道家)로 되는 패턴이겠네요.   왕: 그래요. 그리고 또 하나의 강호가 바로 유민의 강호이지요, 실례를 들어 《수호전》에 영웅호걸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사회가 바로 전형적인 유민의 강호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호는 사대부의 문질빈빈(文质彬彬) 한 강호와 전혀 판이해요.     음모와 폭력과 주먹,칼부림의 피비린 내나는 도광검영(刀光剑影) 세계이지요.     이런 강호는 험악한 세계, 담력, 체력이 다 필요한 세계입니다.   김: 사실 19세기 이래 청말민국 내지 신중국성립전까지 강호세력이 체제와 결탁하여 또는 직접체제내부에 들어가서 체제를 강호로 변모시킨 일도 비일비재 했지요.     방회, 비밀결사가 민국시기의 군,경찰,금융,공상계,매스컴,문예계, 서비스업계나 최하층 쿠리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뻗어있었던것이지요.   7.왜 중국인은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가?    왕: 맞습니다. 중국인이 왜 《수호전》이나 김용의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지 아세요?   김: 중국에 확실히 강호, 비적원리의 토양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무협문예에 열중하는 심리에는 협객이 나타나서 악당을 징벌하는 그런 쾌감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중국 지식인들도 협객이나 호걸의 호방한 언행에 매료당하는 사람이 많지요. 《수호전》《3국지》나 김용소설에 이어지는 협객소설의 계보에는 중국대중의 권선징악(劝善惩恶)의 낭만적 상상력을 야기시키는건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폭력에 대한 명백한 향수가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왕: 그래요. 사실 중국인의 심리에는 비건강요소가 다분히 있어서 독립자주의 정신이 결핍합니다.     중국인이 왜 단결하자, 하나로 뭉치자고 외우는가요? 똘똘 뭉치는것은 다름아닌 내홍, 내부투쟁을 벌이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내홍을 벌일때 우리는 흔히 그 이유에 정의로운 대의명분을 씌우기를 좋아합니다.       만약 누구를 욕하고 타도하기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또는 “인민을 위하여” 하는식으로 사탕발린 말로 자신의 투쟁의 정당성, 합리성을 돌출히 내세우는겁니다.       《수호전》이나 무협소설은 죄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홍투쟁을 벌이는가 방법수단을 가르치는 거지요. 곰곰히 분석해보면 《수호전》중의 강호지주가 양산박 의사들을 압박했나요? 없지요.  다 우연한 사고로 양자의 적대관계를 조성하고 생사결판을 보는거 아니고 뭡니까?       예를 들어 양산박이 축가장을 습격할때, 축가장이 양산박을 토벌할 위험성이 있다고 핑계를 대요. 사실은 양산박 사람들이 축가장의 재물과 식량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거든요.     무협소설에서도 치고 싸우는 모든것은 다 계책, 묘략, 폭력위에다 “정의감”이라는 사탕을 발라놓고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인간을 무함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이 이기는가를 가르치고 있기때문에 현대 사람들이 그것을 무척이나 즐기게 되는법입니다.   8.엘리트문화 VS 대중문화   김: 대만의 사회인류학자 이역원 (李亦园) 선생이 “대전통과 소전통”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대전통은 공자를 대표로 하는 사대부, 지식인문화, 즉 정통문화고 , 소전통은 관공(关公)을  대표로 하는 인간의 문화입니다.       영국의 문화사학자 피터 버클은 그의 저작 《유럽 근대의 대중문화》에서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는 분렬 또는  대립된 문화가 아니라고 지적했어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엘리트문화가 소전통이고 대중문화가 대전통입니다. 그런데 지배자엘리트들이 대중문화가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다고 치면, 곧바로 대중문화를 억압하거나 개조해 버립니다. 이러한 통치권력하에서 대중과 유민문화는 엘리트문화에 의해 계속 조종당하거나 개조당하는 비운에 봉착한다는 겁니다.   왕: 나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대중의 사상문화와 사대부지식인의 그것은 큰 차이가 없고 세부에서 약간 이질된 표현이 있을 따름이지요.       어느게 좀 더 저속하고 또 어느게 좀 더 문명한가의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예를들어 《수호전》에 양산 호한들이 내든 “替天行道“(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라는 슬러건은 대중들속에서 나온 독창적인 의식이에요.   이는 대중의 사상이거나 또한 지식 엘리트의 사상이기도 하는 경계성에 있는 의식입니다.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하층인들이 통치자들을 저항하는 무기가 되고 엘리트들에게 있어서는 제왕을 보좌하여 왕도를 행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수호전》《3국지》등 통속적 대중문예작품이 그 뒤 사회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것을 우리는 부정할수 없지요.   김: 그러니까 이 양자는 상호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공생관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어쨋거나 피터 버클이 지적한 양자의 관계역학(力学)은 여전히 중국현실의 사회구조에 대조하여 고찰해도 적응할수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선생님의 노작《유민문화와 중국사회》배독하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는데요. 하지만 한가지 아쉬움이 남아있었어요. 쭉 역사적으로 귀중한 문헌자료를 구사하여 유민문화의 전모를 발굴, 분석한 업적은 높이 평가 하지만, 유감인것은 근현대 사회,오늘의 사회와 밀착시켜서 그 관계양상을 누락시킨 점입니다.   9.현대 사회 폭력   왕: 지당한 말씀입니다. 기실 김선생도 잘 아시다시피, 중국에서는 학술적으로도 여전히 공개해서는 안될 금기사항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주터 현대 민감한 금기사항은 아예 터치를 안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내 책에서는 주로 역사상 근대이전의 문헌자료를 통해 유민문화와 중국 사회의 상호관계양상을 탐구한것이니, 근현대까지는 미치지 못했어요. 나 자신도 큰 아쉬움은 남지만 어쩔수 없어요. 내 욕심같이 적나라하게 다 썼다가는 공개출판이 어려우니까요.   김: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저작이 비록 현실터치를 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유민의 “또 다른 하나의 중국”을 통해 중국역사의 입체적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의는 오늘 현실의 이해와 미래를 예측하는데 밝은 거울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여겨요.      현재 사회 민간 흑사회, 깡패조직의 폭력, 그리고 권력자, 이를테면 경찰의 국민에 대한 강제 폭력, 교정내의 어린이의 폭력,인터넷상의 만연하는 언어폭력… 이런 “폭력”이 중국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런 가슴 아픈 폭력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 내가 유민군체의 성격을 분석할때 이미 밝혔지만, 그중 “적나라한 폭력과 야만”이 하나의 큰 특징입니다.     《수호전》에서 무송이 반금련에 대한 잔인한 폭력적 살인이나 이규의 살인마같은 살인행위가 그러 하지요.     《수호전》《3국지》의 폭력,호협,의리등 요소들이 면면히 이어오면서 중국인, 특히 조폭사회, 암흑사회, 하층유민까지 영향이 큰것은 부인할수 없습니다.       한편 고대사회에서 형벌자체가 아주 잔혹하여 목숨외에도 주로 신체, 육신에 대한 비인도적인 형벌이 많았어요. 이런 잔혹함은 하층민중들로 하여금 반항할때 더 잔혹한 수단을 쓰게 했지요. 이와같이 잔혹한 폭력문화가 사회전반에 영향이 미쳤어요. 하다못해 사람을 매도하는 욕말도 “천번 칼자국 맞아야 한다(杀千刀的)”는 등 잔혹하게 표현됩니다(웃음)       사실 현대의 폭력은 옛날 사상과 조직형식이 다 똑같고 무협소설에서 배워온것이 대부분입니다.   10. 의(义)의 비교사회론     김: (웃음) 정말 그렇네요. 모종의 의미에서 유민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나 국민성을 파악하는 하나의 바러미터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유민문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성격이 의(义)라고 갈파하셨는데 정곡을 찌른 지적입니다.       사실은 중국인 자체가 의를 중히 여기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지요.    왕: 맞어요. 의는 여러가지 다양한 차원에서 해석할수 있는 전통도덕의 하나인데 유교에서도 의와 리(利)는 밀착되 있는거에요. 유민에게 있어서 의는 곧 리익과 직결돼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지금 일상에서 한사람을 평가할때 “쟝이치(讲义气)”가 중요한 도덕의 가치기준이 되거든요. 강호유민사회에서도 의기(义气)는 서로 사귀고  신임하는 인간관계의 접착제로서 그것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봉사, 공헌이 아니라 하나의 이익을 계산한 투자이기도 합니다.        《수호전》의 송강이 바로 의협으로서  그런 전형적 인물이지요. 송강이 금전으로 강호에서 친구를 맺는데 대해 김성탄(金圣叹)이 이를 얕잡아서 “돈으로 교유한다”(以银子为交游)고 비난했지요.(웃음)   김: (웃음) 맞는 말이네요.     제가 졸저 《중일한 3국인국민성격》(홍콩삼련출판사)에서 3국의 국민성을 비교하면서 중국인의 의(义),일본인은 화(和),한국인은 정(情)의 특질이 있다고 했어요. 비교문화론적 시각에서 같은 “의”라도 중국은 이익을 강조하는 성향이 지극히 강하지만 일본은 약해요. 인간의 화를 이루기 위해 의가 베풀어지는것이에요.  중국은 그 한자같이 羊이 我에게 얻어져야  义가 이루어지는겁니다. 羊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의 먹는것, 재물을 뜻하거든요. 그러니 재부가 내것이 되어야 의가 통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중국인은 이익을 우선시키는 그런 국민성이 있다고 봅니다.   왕: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그러므로”유정유의”(有情有义) 가 중국인의 선호하는 인간성이기도 하지요. 의기의 본질이 중국인이 생존을 꾀하는 도덕이라면 역시 그중에는 실제직 이익이 큰 비중을 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중국말에 사용빈도가 높은 이런말이 있잖아요. “出门靠朋友”(밖에서는 친구에 의거한다)라는 말이라든가 “多一个朋友多一条路”(친구가 많으면 길이 열린다)는 말이 가장 집약적으로 중국인의 의리(义利)의식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옛날뿐만아니라 이는 오늘 우리 중국인의 생활의 법칙의 하나로도 정착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의리가 통하는 교제권안에서는 그대로 통하는 룰이 되고있어요.   11. 왜 중국인은 공공권에 익숙하지 않은가?    김: 또 국민성, 인간소질의 말인데요. 중국인에게 있어서 의리는 사실 자신의 가족,친구, 동료 등 아는 인간권(人间圈)에서만 작동이 되는거에요. 문화인류학에서 인관관계를 동심원(同心圆)으로 따지는 게 있는데,자신을 핵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원을 “인정권”人情圈), 그 조금밖에 있는게 “의리권”(义利圈),그리고 제일 밖에 있는 큰 원이 곧 “공공권”(公共圈)이라고 일컬어요.       한국인이 제일 좁은데 인정권, 중국인은 바로 의리권, 일본인은 공공권에 익숙해 있습니다. 유교의 농도와 동심원의 사이즈가 정비례 되는데 한국인은 가족, 혈연주의의 유교가 가장 농후하고 다음이 중국, 일본순으로 되거든요.       그래도 한국인은 현재 민주화사회로 변모하여 중국인보다 공공의식은 많이 강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인은 여전히 인정권과 의리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때문에 공중장소에서 질서의식이 약하고 자기중심으로 방약무인의 경우가 종종 있지요. 인정권, 의리권 등 사적인 공간에서는 사덕(私德)이 강하게 존재하여 아는 사람끼리는 양보도 하고 서로 배려하지만, 공공권에서는 타인에게 그런 공덕(公德)이 없지요.그래서 공중도덕이 약하고 공중질서를 무시하고 공공서비스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왕: 참 그렇네요. 또 한가지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종법(宗法)사회에 몸을 담고 있어서 매개인의 개성이 위축되고 하나의 독립적, 성숙된 인격을 형성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송조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가족종법제도안에서 살아왔는데 한 종족의 인간들로 구성되고 일반적으로 족장은 지위가 있는 사람들중에서 선출되지요. 이 시기 행정관리와 종법이 공동으로 이같은 향토사회를 유지했습니다.       종법이란 정부적 기능이 있어서 같은 종법공동체내트웍안에서 종법성원들에게 보호와 공제하는 이중역활을 했거든요. 이렇게 되니 그 안에 있는 매개인은 개성이 줄어들고 진취심이 상실되기 마련이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현대 중국사회도 커다란 종법사회를 모방한 그 자체이지요. "문화대혁명"때 전통적인 종법사회를 모방한것은 그 실례가 수없이도 많아요. 자, 보세요, 그때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모주석의 좋은 어린이다”고 교육한것도,  “당은 친부모보다 더 가깝다”라든가 이런것들은 다 종법사회의 모방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였습니다.(웃음)       이런 관성적 사유에 물든 중국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하기보다는 늘 위에서 어떤 새로운 지시가 있나? 잘못하면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고 위축하거든요.     그러니 진정한 공민으로 되기 어렵고 공민사회와 거리가 멀게 되지요.   12. 공민사회를 지향하여야 한다   김: 좋은 말씀이십니다.     현재 중국이 개혁개방 3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한국 등 인국 동일한자문화권 나라와 비교해보면 일목요연해지는데요. 물질재부성장과 함께 인간의 소질 국민성의 향상이 정비례되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중국사회의 진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구경 어떤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지 고견 경청하고 싶습니다.   왕: 현재 하층민중들이 경제문제, 사회곤경에 직면해 있고 고층 위정자도 많은 현실과 정책 등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중외의 사정을 총화하여 가장 우수한것만 따와서 사회와 접목시키고자 하지만 어디 그런 쉬운일이 있겠어요? 결국에 왕왕 결점만 따오게 되죠. 지금 개방정책으로 굶주렸던 온 국민이 밥벌이 길에서 저돌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눈앞의 이익만 따지고 장원한 안목으로 보는 사유와 방법이 결핍해요. 그러니 늘 비극이 끊이지 않지요.   김: 아까 선생님께서는 공민의식, 공민사회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왕: 내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공민사회가 우리 나라에는 없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공민사회를 거론하고 있지만, 대부분 공민사회단체 NPO조직,자원봉사자조직이나 자선단체등을 꼽고 있어요.   김: 그중에 가장 중요한 공민의식,공민소질이 아닐까요?   왕: 바로 이거예요    광대한 민중이 기본적인 공민소질이 구비되였느냐가 가장 핵심이거든요. 왜냐하면 공민사회는 공민소질을 갖춘 공민이라야 구성될수 있기때문입니다. 공민소질이 없이 아무리 공민사회조직을 결성해봤자 그냥 조그만 활동그룹으로 끝나고 말아요. 왜? 공민사회가 아니니까요. 공민사회의 기초는 공민자각(自觉)이에요.     공민자각이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의식하는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공공사무에 적극 참여하는 공덕심(公德心)이에요.   김: 맞어요. 100여년전 양계초가 일본에서 망명했을 때 일본인과 비교하여 중국인의 공덕심, 애국심이 가장 결여하다고 한탄을 했잖습니까!   왕: 그렇습니다. 100여년지난 오늘 우리가 또 이런 같은 말을 하는자체가 하나의 비애이지만 현실이 또 그러하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공덕심을 양성해서 사회의 신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매개 중국인민은 합격한 공민으로 되며 규범적으로는 법치사회로 되어야 해요. 그리고 권리적으로는 민주사회를 세워야 하는거구요. 이거야 말로 정상한 사회라 할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습니까?   공민사회, 법치사회,민주사회만이 중국의 진로라고 생각합니다.   김: 유민사회, 비공민사회에서 공민사회로 나아가는게 중국 사회의 유일한 방향이겠습니다.       대담날자: 2016년5월25일     대담자 소개    왕학태(王学泰)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중국유민, 유민문화 연구의 권위학자, 1942년 북경에서 태어남 북경사범학원(현수도사범대학) 중국문학부 졸업 주요저작으로는 《유민문화의 중국사회》 《중국인 음식문화간사》《감옥쇄기》 《또 하나의 중국을 발견하다》《중국고전시가요적총담》《”수호”시소록》
3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갈검웅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374  추천:40  2016-06-11
문화대담(3)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갈검웅+김문학     1. "중국문제군(群)"   김: 중국 현대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분인 갈선생님과 이렇게 대담을 나눌수 있어 후배인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오늘은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고자 해요.   갈: 반갑습니다.김선생의 책을 읽었을때는 나이 듬직한 학자인줄로만 알았는데 아주 젊은 분이시군요. 동아시아 3국 문화비교는 참 정채로왔습니다..   김: 감사합니다. ”중국문제”란 개념이 있습니다. 중국 내지 중국사회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결함과 약점들, 이게 우리자신이나 세계 학자들이 중국의 앞으로의 진로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도 되고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현재 경제성장에 동반되는 환경오염문제, 정치개혁문제,도시와 농촌의 격차, 그리고 빈부의 격차,국민소질.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문제 …등등 안고 있는 “중국문제”는 방대한 “중국문제군(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갈: 그렇지요. 이러한 “중국문제군”을 해결하거나 극복하는게 우리 중국 관민앞에 가로 놓은 크나큰 과제입니다.          이런 문제군을 극복하지 못하면 중국은 자칫하면 정체상태에 빠지거나 내부로부터 모순이 쌓이고 터져, 자신의 전진방향을 가로 막는 장벽으로 역작용할수도 십분 있지요.   김: 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중국문제군”과 관련해 선생님 전공이나 관심분야에 관해서만 담론의 화제로 삼고자 합니다.   갈: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2.  “ 중국”이란 무엇인가?   김: 중국문제를 인식하는 전제는 “중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재고해야 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날까지 “중국”이란 말을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다 보니깐 공기와 물처럼 익숙한 나머지, 이에 대한 생각을 잘 안했지요.        글로벌시대 세계속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생기면서 나는 누구인가?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은 세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등 아이덴티티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선것이죠.          선생님은 명작«통일과 분렬-중국역사의 계시»중에서 이념의 터브를 깨고 중국역사의 흐름속에서 “중국”과 “민족”에 관하여 많은 정채로운 발견과 지적을 했습니다. “중국”의 개념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갈: 중국의 “국(國) 자에서 알수 있듯이 국은 或(역)자와 상통하여 본래 성과 읍을 뜻했어요, 그것은 원래 한 촌락이나 종족의 거주지였지요, 상나라때 국군이 거주하는 곳이 곧 “중국”이였어요. 진시황때는 정군통치범위를 뜻하는 대명사로 되었습니다. “중국”의 “개념”이 늘 불확정,모호했으며 그 범위도 언제나 변해왔지요.   김: 그렇지요. 미국의 한학자 조셉 P.레빈슨도 고대 중국에서 나라(国)는 하나의 권력체였다고 지적햇습니다.   갈: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현재인의 개념이었지.역사 각 단계,시기나 또 동일단계내에서도 “중국”은  꼭 일치하지 않았고 누구나 다 수긍한것은 아니였습니다. 기실 “중국”이란 개념은 산생과 발전과정속에서 객관성과 주관성이 병존해왔지요. 객관성에도 4가지 부동한 개념이 있어요. 첫째. 정치성적인 중국,즉 정권과 국가, 최초의 중국은 많은 나라중에서도 중심,중원 복판에 있었던 나라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국군이 거주한 나라였습니다. 진시황제가 6국을 멸하고 진나라를 세웠을때 그 수도와 중심구역은 중국이었고,그때 진나라의 강역도 중국이라 칭할수 있었어요. 서한에서 청말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강역을 다 중국이라 칭 할순 있었지만, 부단히 통일과 개발범위에 따라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각 조대의 정식 국명이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청나라의 정식명은 대청, 대청국이었거든요.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에 의해 중국이 그제야 우리 나라의 정식 국명이 되었습니다. 둘째. 문화성적인 개념으로서 “중국”은 종시 강열한 민족함의가 있었는데,일반적으로 한족문화지역을 가리켰거든요. 따라서 지리개념과 불일치하기도 했고, 영토의 귀속문제도 모순이 많았어요. 한편으로 아무리 먼 변강지역이라도 한족인이 많이 거주했거나 한족문화전통이 상당히 발달했다면 “중국”의 일부분으로 인정했어요. 또 한편으론 기타민족이 한족문화를 수용하여 일정한 발전정도를 보이면 한인의 인정을 받았고 이곳도 “중국”의 한 구성부분으로 승인했습니다 셋째. 민족성적인 개념, 이것은 한족의 전신인 여러 하(夏),화하(华夏)여러민족과 한족에게 동화당한 기타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비한족의 집거구는 이적(夷狄) 만이( 蛮夷  )등 외국에 속했고 중국이 아니었거든요.그런데 한족이 남방과 변강으로 집거하면서 여기에 비한족이 대량으로 융합되여 민족개념으로서의 중국도 따라서 넓어지는겁니다. 넷째. 지역성적인 중국, 즉 중원(中原) 과 같지요, 하남, 그리고 섬서,산서,하북, 산동 등지는 중원으로 칭할수 있습니다. 중원은 한 조대의 강역과 수도를 기준으로 하는데 일반적으로 수도나 정치중심일대를 가리켰으니까요.   김: 그럼 주관성적 개념은 어떤것이죠?   갈: 주관성적으로 볼때,”중국”의 개념은 시간,공간의 차이뿐만아니라 동일시공간내에도 부동한 군체나 개체들이 부동한 이해와 해석을 가할수 있었어요.      장기간 정치의 목적으로 출발하여 사학계에서는 현재 중국경내의 강역(疆域)에 대해 줄곧 “자고이래(自古以来)”를 강조하면서 중국이 마치 하,상,주나라이래 줄창 이렇게 큰것처럼 우기고, “자고이래”의 증거를 찾느라고 쌍불을 켰지요.   3. 왕조는 중국인가?   김: 갈선생님의 리론대로라면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장은 매우 복잡한것으로, “중국”이라는 이 공동체는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천하”라고 칭하는편이 더 낫겠군요.     “천하” 주변의 인간들은 중앙왕조에 대한 귀속감을 정도부동하게 갖게되였고 왕조는 기실 근대적의미의 “국가”가 아니며 중국과 등호를 칠수 없었겠습니다. 갈: 그렇습니다, 왕조는 중국과 동등하지 않지요. 춘추시대 “중국”이란 단어가  나왔을때, 황하중하류 즉 다시 말해서 중원의 몇개 제후국에 해당된것입니다. 그리고 이런것들은 단지 지역적 문화적 개념이었으며 명확한 기준이 없었지요. 중화민국이후 “중국”이 그 간약한 칭호로서 중국이란 국가적 국명이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말하는 중국은 현대적 의미의 중국이 아닙니다. 따라서 왕조는 중국과 구별되지요. 청조를 제외하고 어느 하나의 왕조의 영토가 지금의 중국전부를 포괄시킬수 있는 강역을 갖고 있지 못했던건 뻔한 사실입니다.        역사상의 통일을 판단할때 당연히 왕조의 통일을 빼놓을수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오늘날 중국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논할때, 왕조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과 꼭 같다고 말할순 없습니다.        서주말년 신민들이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莫非王土)”란 송가를 부를때 우리는 중국이 통일됐다고 장담할수 있겠어요?없지요. 그리고 명조시기 장성을 건설할때 우리가 명조의 강역을 중국이라 할수 있겠어요?   김: 그럴순 없지요. 그러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다”는 우리의 상식처럼 된 말도 사실과 어긋나겠네요?   갈: 그렇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다”고 한다면,여기서 중국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만일 중원, 황하류역이라 한다면 그건 맞어요. 진시황이 황화류역 아니라 오늘날의 전 중국을 통일했다고 하면 그건 말도 안되죠. 진시황이 통일한 강역은 북으로는 음산산맥과 료하하류, 서쪽은 용동(陇东)고원, 서남쪽은 기껏해야 사천분지나 운귀고원에 그쳤습니다.      대만과 해남은 미치지 못했어요.   4. 통일과 분렬의 방정식   김: 우리는 보통 “중국”이 역사상 통일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고 분렬이 짧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통일과 분렬-중국역사의 계시》에서 중국역사상 최대강역범위의 통일시간은 근근히 82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저작을 읽으면서 사실 큰 쇼크를 받았거든요.   갈: 여태껏 우리는 중국역사상의 통일과 분열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게 실정입니다. 이 체제는 역사상 간단없이 벌어진 과정이고 지금도 여전히 중국정치생활에서 회피할수 없는 모순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우리의 사학관은 이 문제을 정확히 해석하기를 기피했으며 오늘날까지 여기에 대해 터브가 남아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사학의 이런 터브를 깨고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때문입니다. 거대한 시공간내의 발전변화중 역사상의 통일과 분열을 규명하고자 썼지요.     내가 스승 담선생님의 《중국역사지도집》을 협조하여 수정할때 발견했는데 중국역사상의 통일분열문제에 대해 아직 터브구역이 많았어요. 그에 대한 전면적 공정한 인식이 결핍했고 전통적관념의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역사상 왕조의 최대강역을 범위로 한다면, 그 통일시간은 82년 밖에 안된다는 통계를 냈어요. 즉 기원 1759년 건륭이 천산남북로를 장악한뒤로 부터 1840년 아편전쟁후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다음까지지요.   김: 사실은 이 82년동안에도 세부에서 보면 지방에 따라 통일의 양상이 미진한점이 많았습니다.      만주, 즉 동북도 장기간 청정부에서 방치한 상태였고 그냥 군사주둔방역을 위주로 하고 광서말기에 이르러서야 동북3성을 설치했지요.   갈: 맞어요. 흑룡강이북, 우쑤리강이동지역이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한것도 침략도 있지만 여기에 청나라에서 행정기구를 두지 않은 탓도 있어요. 러시아사학가들도 이를 침략이라 승인하지 않고 “신토지의 개발”이라고 우겨요.      신강도 내외몽골도  기본적으로 자치였고 서장에는 중앙에서 대신을 파견하였을뿐, 천하사상으로 인해, 천하가 다 우리것인데 하필 행정기구를 설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거지요.     청말시기 서양의 자극으로 영토의식에 개안하게 됩니다.     중국에 있어서 분열,분리시간이 길고 통일시간은 짧았어요. 중원왕조에 있어선 통일시간이 분열의 시간보다 약간 짧았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이전의 분열시간이 통일시간보다 길었고 원나라이후에는 기본상 통일된거죠.   김: 과연 《3국지》의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合久必分) 이라는 명구처럼 중국은 통일과 분열의 방정식을 풀어가면서 오늘날의 중국을 이루게 된것이네요.     제가 보건데 현대 중국인은 “대통일”을 좋아하는것 같은데, 이게 중국인의 하나의 절대적 관념으로 고착됐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통일관” 재사고   갈: 중국인이 현재의 사고방식에도 깊이 남아있는것은 중국문화라 하면 곧 유교문화, 화하(한족)문화라 하여 한족의 우월주의 사고가 많지요.     장기적으로 중국강역의 형성과정에서 아주 편면적인 관념이 있는데 중원 화하민족의 왕조에 가입해야만 통일이고 진보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분열, 반동적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한 변강정권, 지방정권이나 소수민족정권 또는 그 강역에 대해, 언제나 천방백계로 중원왕조에 귀속됐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애쓰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예 ”분열정권”이라는 감투를 씌워버리죠. 이런 사고는 문제가 있어요. 기본사실을 간과했기때문입니다. 중원왕조의 강역은 정치적으로 확장되었고, 왕조이외에도 여러 정권, 민족자치와 독립이 존재 했으니까요.      사실 어떤 변강이나 소수민족지구는 교통의 폐쇄, 간거한 조건 혹은 당사자들의 외래통지자에 대한 저항으로 중앙과 지방정권이 관할하기 싫어했던 점도 있었습니다.   김: 이런 국면은 사실 민국시대에도 존재 했습니다.   갈: 그러니 그건 분열이 아니고 지방 민족의 자치라 해야죠. 중국같은 다민족국가가 형성되는 장구한 노정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김: 일체 사물에 명암이 있듯이 통일에도 그 이폐가 병존할꺼라 생각합니다. 그 점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갈: 역사를 요약해서 말한다면, 점유와 통치를 막론하고 한 국가의 강역이 크다고만해서 좋은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연과 인문적 장애가 없다 하더라도, 한 국가가 무제한으로 영토를 확장하는건 불가능하거니와 불필요하지요. 범위가 적당한 영토라야 정권공고에 유리롭고 인민생활의 안정과 사회생산적 발전도 스무드하게 영위할수 있기때문입니다.     통일의 유리로운 점은 외적을 방어할수 있는것이고 또 하나는 강대한 역량을 결속하여 자연재해에 저항할수 있는 겁니다     통일에 의하여 한자문화권이 형성되고 일본, 조선반도 등이 공동한 문화형태를 형성한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폐단도 같이 동반되는것이지요. 역사적으로 “통일”의 폐단은 “통일”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그 통일이 전제집권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치제도 어떤 제도로 통일을 실현하고 통일을 관리하는가에 달렸다고 봐요.   6. 왜 제도 문제가 중요한가?   김: 갈선생님의 저작에서도 누누히 지적했다싶이 통일시기의 진시황은 강유력한 집권제를 실시하여 역사 발전을 추진시켰지만  인민이 주인이 되지못하고 기본적 민주를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장성은 그렇다치고 그 자신의 궁전과 능묘를 짓는데 인민의 재난을 초래하고 인민에 대한 폭행 역시 그의 역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건륭황제의 《4고전서》를  “위대한 문화공정”이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할때 수만종의 서적을 건륭제 사상과 부합안된다는 이유로 일거에 불사르고 또 많은 지식인들이 문자옥에서 아우성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의 통일에 어디 민주와 자유가 있냐고 질호했습니다.   갈: 중국사상에서 두차례나 공전절후의 학술사상 백가쟁명의 절호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차례는 춘추전국시기고 또 한차례는 20세기 신문화운동시기였지요.       아시다 싶이, 춘추전국시대는 통일된 국가정권이 아니고 대소정권이 병립한 시기였지요. 신문화 5.4 운동시기는 명의상으로는 통일된 중화민국이 존재했으나,실제적으로는 북경정부의 점령이 미친 곳은 수개성에 불과했고, 또 “국중유국”의 조계지세력도 있었으니 이런 난세중에 문화사상이 공전의 활약상을 보이고 많은 사상,문화대가들이 배출했습니다.       상대로 역사상 천하통일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시기 그와 상응된 사상자유와 학술의 번영,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거장들이 많이 탄생하지 못했지요.       건륭제시기 성세를 이루었지만 문화사상자유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하고 지식인에 대해 억누른 암흑의 시기였잖습니까.   김: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제도문제가 중요하다는것이겠습니다.   갈:  맞아요. 중국의 역사가 이미 잘 증명하다싶이 통일정권은 부동한 제도를 실행할수 있으며 상당히 긴시간에 걸쳐 존재할수 있습니다. 대만,홍콩,마카오 등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실행할뿐만아니라, 대륙 각지에서도 기본제도가 불변한 상황하에서 부동한 구체적 제도를 실행할수 있거든요.       사실상, 각 특구. 해남성에서도 이미 하고 있잖습니까. 헌법이 규정한 기본제도라 해도 민주적 합법과정을 거쳐 필요한 수개도 해야 하지요.   김:   지당한 말씁입니다.   갈:  이래서 광범한 민주, 건전한 법제를 광범위하게 실행한다면 공민의 언론,출판, 학술의 자유가 보장되며 사상의 자유도 간섭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러면 진정한 사상해방과 학술의 흥성이 통일된 국가에서 나타나고 이런 실정으로 인해 국가는 더 부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김:   그러니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치제도개혁도 경제개혁과 함께 심도있게 진행하고 언제나 구호나 슬러건으로 외치는데 그치치 않고 실속있게 실천에 옮기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에서 끝나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중국인이 보편적으로 굳게 믿고 있는 “염황자손”신념에 대해 딴지를 걸었습니다.   7.  “염황자손(炎黄子孙)” 은 중화민족의 동의어가 아니다   갈:  현재 중국인의 세계에서는 “염황자손”이란 단어가 보편적으로 유행을 타서 “중화민족”이나 “중국인”의 동의어로 되고 있는 상황이지요. 장기적으로 해내외의 화인들은 “염황자손”으로 자칭하면서 동일 조상을 모심으로써 민족국가에 대한 귀속감 아이덴티티를 증폭시키자고 합니다. 염제, 황제 능묘를 수선하고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고 야단법석이지만, 난 여태껏 이에 반대해왔어요.     왜냐하면 국가의 명의로 어떤 하나 또는 몇개 민족의 조상을 가지고, 그것을 마치도 각 민족의 공동선조로 칭하는건 타당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헌법》에 중국 각 민족은 평등하다고 규정했으니 한족은 당연히 염황을 본 민족의 선조로 섬길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기타 민족에게도 강제할순 없지요. 그럼 한족은 왜 칭키스칸이나 송짠깜보를 기리지 않나요? 각 민족은 각자 자신의 조상을 기려도 되지만 국가의 명의로 하면 억지죠. 이러면 소수민족의 감정에 손상을 끼칠수도 있습니다.   김:  “민족”이나 심지어 “전통”이란 사실 근대에 들어와서 유구한 역사가 있는게 아니고 발명한것입니다. “근대”와 대립적 의미에서 “전통”이란 개념을 발명하여 문화민족주의 발전의 일환으로 민족과 민족문화의 역사자신감,우월감을 형성하여 왔지요.     사실 “염황자손”이란 단어, 개념 역시 생긴지 100년에 불과  하지요. 진독수 등에 의하면 민족주의를 수립하기 위해 청나라와 맞서면서, 한족지식인들이 고안해낸 “전통”에 불과한거랍니다.   갈:  그러니 “염황자손”이란 개념은 한민족 형성발전의 역사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긴 설명을 약하겠는데 현재 약 10억이 넘는 한족중에 진짜 “염황자손”은 오히려 소수민족입니다. 왜냐하면 진한이래 북방에서 황하중하류지역으로 천입한 비 한족 흉노, 선비. 돌궐, 고려, 여진, 몽골,위글,회.민족 등 인구가 대량으로 한족으로 동화되였고 어떤 민족전체가 한족에 융합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오늘날 중화민족의 실제에도 부합되지 않지요. 현재 한족외에도 55개 민족이 있는데 그중 어떤 민족은 한족의 문헌에 따르면 염,  황 두황제나 그 후예와 다소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상 이것은 고대 대한족주의자들의 억단이지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미국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지만 종래로 동일 조상을 운운하지 않고서도 공동으로 미국드림을 향하여 공동으로 나아갈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굳이 이런 일을 벌이니 이건 민족지간의 융합에 불리하고 역사를 거슬러오르는 짓이에요. 통일의 기초는 여럿이 공동한 가치관,이익이지 공동한 조상이 아니니까요. 세계조류에 맞지도 않거니와 자기기만식의 가식에 지나지 않으니 난 지금까지 그 어떤 적극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웃음)     황차 공민은 언론 신앙자유가 있으니 어떤 명칭을 쓰고 어떤 조상을 섬기든지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염황자손”은  중국인민의 대명사가 아닌것은 꼭 명확히 해야 돼요. 관방언론과 공식서류에서도 호도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8. 절대적 순수혈통의 민족은 없다   김: 1920년대 역사학 대가 고석강(顾颉刚) 이 “고사변(古史辩)”을 역설하면서 “민족의 일원(一元)출자관념을 타파”하고 “지역은 종래로 통일됐다는 관념을 타파”하고 “고대는 황금세계였다는 관념’을 타파할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대계도 등 지식인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고씨의 견해는 맞었지요. 일본에서도 메이지이후 민족심 고취를 위해 야마토민족이 단일민족이고  야마토문화가 “만세일계(万世一系) 라 그 순수성을 떠들어 대다가 패전후 그에 대한 반성이 생기고 일본문화의 “잡종성”을 자인하게 됐습니다. 갈: 세계적으로 절대적 순수혈통의 민족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면 꼭 빨리 퇴화되어 절멸되고 맙니다.     한(화하)족이 세계적으로 가장 유구한 민족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계 최다 인구의 민족으로 발전될수 있은것은 조상의 위대한 혈통이 아니라 바로 대량적으로 기타 민족을 흡수하고 각 민족의 정화를 응집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치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역량은 각 민족에서 오는바, 각 민족자체의 창조력과 그 단결력에 있지요.     중국에서 염황2제를 존중해온것은 우량한 민족전통이지만 그것은 한편 “대한족주의”의 표현이지요.     신해혁명전후에 혁명당파가 독립한 성에서 황제기년(黄帝纪年)을 사용한적있습니다. 청제국에 대한 부정이지와 또한 한족의 협애한 민족감정을 발로했지요.     황제기년도 그뒤에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9. 소수민족의 시야   김: 아까 선생님께서 “대한족주의”란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는 조선족지식인으로서 중국,중국문화를 바라 봄에 있어서 아마 많은 한족 지식인과 시각, 입장 또는 이해가 좀 다른면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의 궐기, 중국문제, 중국의 양식에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 중국의 한족지식인들도 관심을 갖고 연구, 인식, 탐색해오고 있지만, 여기에는 절대다수가 한족역사시야의 중국이였지, 소수민족의 시야, 시각이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중화민족”이란 단어, 개념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청조의 문화유산 또는 정치유산을 전승하는것이지요. 그러나 그 내실은 한족의 역사, 문화 또는 한족이 생활하는 광활한 지역만이 아니라, 여러 소수민족이 포괄되여야 합니다   갈: 맞어요.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늘 말해왔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한족인만의 중국이 아니라 역시 50여개 소수민족의 중국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한족정권,중원정권의 유산을 계승할뿐만아니라 여러 민족의 유산을 계승해야 하고, 소수민족의 시야로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테제입니다.   김: 다민족시각하의 중국을 이해하는것은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근대적의미의 근대 국가, 즉 민족국가 ,영어로 칭하면nation-state 인데요.     루샨W. 페이가 “중국은 실질상 민족국가로 위장한 문명국가”라고 갈파했듯이 “일국일족”의 나라가 아니라 많은 민족, 문화, 종교를 포함한 방대한 국가이지요.     장족, 위글족이 바라 본 중국과 한족이 바라본 중국은 그 양상이 틀리기 마련인데, 이런 시야를 다원적으로 넣어서 중국을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선생님께 한가지 여쭈고 싶은데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세계적으로도 좋다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의 “한족화’가 빠른 스피드로 진척되고 있습니다. 이런 강유력한 한 문화중에 소수민족이 자신의 문화를 보존할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10. 소수민족문화, 어떻게 지킬까?   갈: 예리한 질문이군요(웃음)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강대한 민족의 문화우세와 정치적 지배가 약소민족의 동화와 함께 그 민족문화의 소멸을 초래했습니다.     물론 한족도 그 과장에서 이민족의 많은 장점을 흡수 한것도 사실이지요     그리고 또 자신의 문화적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소실되어버렸습니다.소실은 또 하나의 융합을 말하지요. 소실과 동화의 반복이 곧 중국역사입니다. 이런 방정식을 되풀이 하면서 오늘의 중국, 중국인이 있게 된것이지요.       그 방법에 대해 난 이렇게 생각해요. 보통 민중은 그 자신의 선택권이 있으므로 외부에서 섣뿌른 간섭은 삼가해야 합니다. 서양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생각으로 소수민족은 “영원히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야 하며 그들이 구경하고 연구하는 활화석으로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서장에 갔다온 어떤 미국학자가 나에게 말하기를 “라싸에는 지금 자동차뿐이고 우마차를 볼수 없다”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어요. “내가 당신 나라에 가보니 우마차는 안보이고 자동차천지더라. 당신네들이 자동차를 탈수 있다면 장족들도 못탈 도리가 있냐?”     현대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소수민족의 현대화를 반대하는건 웃끼는 얘기죠(웃음) 김:  (웃음) 그렇죠.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조선족문화가 많이 보유돼 있는데 현재 한국인들이 “연변은 민족문화의 박물관인데 요즘은 너무 근대화되여 볼 멋이 없다”고 하지요. 사실 연변에 어느 정도 근대화적 생활양식을 가르쳐 준게 한국인데 말입니다.   갈: 국가적 차원이나 학문적 차원에서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성 있게 그것들을 보존하고, 보존할수 없는 부분은 빨리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지요.     그렇다고 현대화를 막는건 아니고 그 자신들이 현대화를 원하지않는다면 그건 딴 문제고.     내가 80년대 서장에 갔을때만해도 라면(方便面)이없었는데, 물론 그 단어도 없었어요. 근데 캉스푸라면이 들어가면서 장족들은 라면을 아예 “캉스푸”라고 칭해요.     문화는 그 민족의 선호하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으로서, 우리는 민족의 문화,전통을 존중하고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이야말로 민족평등의 기초이지요. 그러므로 소수민족 자신들의 선택도 존중해주는게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요.   김: 저도 조선족지식인으로서 21세기 조선족 생활과 존망에 대해서 매우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은 동북3성의 토지를 떠나 해외로, 연해도시로 이동하고 정착중에 있어요. 조선족의 유지들이 이런 이동, 월경에 대해 “조선족의 해체”로 우려와 위구심을 나타내고 있지만, 저는 오히려 구조적으로 이동, 월경이 조선족의 특질이라고 파악하고, 이런 이동과 월경이 농경문화권에서 도시문명권으로의 정착으로써 조선족의 다양한 생활의 장(场)을 개척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으로 없어진게 아니라 A농경권에서 B의 도시문명권으로 이동을 했을 따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작《중국인구사》《중국이민사》《미래의 생존공간,자연공간》등에서 이동과 이민의 문명탄생과 전승, 전파에 대한 적극적인 역활을 거듭 지적 논증했습니다. 이동과 문명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11. 인구 이동이 문명을 살린다   갈: 방금 김선생님이 고민하는 조선족문제에 대한 견해 저도 찬동해요. 선진문명권을 지향하는 이동, 이민이 한 민족을 새롭게 탈바꿈하는 방도이지요.     수천년의 인구이동사를 통괄해보면, 중국역사상의 인구이동,천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 대가정이 있을수 없고 따라서 중국이란 이 국가적실체도 존재할수 없습니다.     현재 중국의 주요민족인 한족이 바로 그 형성과정에서 대량의 기타 민족요소를 흡수 또는 융합한 결과입니다.     사실 문화, 문명의 전파는 인구이동에 의해 진행되는 법이지요. 후진구역에 대한 개발은 인구의 이동,이민에 의해 인구 수를 늘릴뿐아니라, 기술, 도구가 같이 오며, 선진적문화, 문명을 갖고 오기때문에 문명전파의 몫을 하지요.     이를테면 동북3성이 청조의 봉금지역으로부터 중국의 중공업기지, 곡창기지로 변모된것도 많은 이민과 그에 수반되는 문화와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아놀드 토인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명은 일종 운동으로서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영원한 항해이지 항구는 아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사학대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중국이 수천년 역사속에서 늘 멸망하지 않고 신선한 혈액을 보전할수 있은 까닭은 타민족의   침략과 혼혈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동은 인구소질자체에도 플러스 요인이 있지요.   갈: 그럼요. 인구이동은 근친, 동족간 통혼 등 소규모 범위내의 통혼을 막을수 있기때문에 인구소질에 적극적인 역활을 합니다.     그리고 이동은 인구의 문화소질 향상에도 이롭습니다. 도시의 형성은 거의 인구이동, 이민에 따른 결과인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유를 막론하고 도시의 확대는 외래인구의 대규모 이동, 천입을 전제로 하는겁니다.     근대 상해가 그 전형적인 케이스이지요. 1843년 상해가 갓 개항했을 당시 상해는 50여만 인구에 불과했으며, 영국, 프랑스 조계를 설치 한곳의 상해성밖의 농촌구역이였고 인구 역시 희소한 고장이였습니다.     그러나 1900년에 상해 인구는 100만, 1949년에는 500만으로 대폭 증가되였습니다. 상해가 강남의 한 중등현성으로부터 일약 중국 최대 아시아 최대의 모던 근대도시로 성장된데는 이민이 결정적 작용을 했습니다.   김: 인류사는 사실 인류의 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저는 문명사적 시각에서 인류의 인구가 이동, 월경하면서 일어나는 문명의 양상,면모를 연구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저작이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갈: 좋지요. 동아시아의 월경, 이동을 문명사시야에서 다루는 연구는 새롭고 심원한 의의가 있는 연구가 되는겁니다.   김: 감사합니다. 또 한가지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것은, 현재 경제성장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긴 중국에서는 “전통문화”를 회복하고 “국학”을 흥하며, 해외에 많은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등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가하십니까?   12. 전통문화와 현대   갈: 기실 전통문화라도 그 민족의 융합과 변천, 개방의 역사와 같이 고정불변으로 보진 않습니다. 중국문명이 이역문명을 흡수하여 부단히 발전시킨 역사라면 전통 역시 고유, 고정불변으로 고착시켜서 보면 안되지요.     중국이 현재 전통을 부흥시킨다는것은 쇄락했기때문에 다시 회복시킨다는것인데 왜 쇄락했냐는 이유를 분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전통적 지식체계가 현대성, 현실에 적응할수없은 까닭이지요.   김: 문화 자체가 곧 한 민족, 사회집단의 주어진 자연현실에 대한 적응으로서 거기서 생긴 적응상태 즉 생활양식 사고양식이 아닙니까.   갈: 그래요. 문화는 이렇게 현실에 따라 변하고 부단히 발전하는거지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해. 우리 오늘날의 문화는 여전히 전통적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과도기, 적응상태에 있다고 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애매모호한 주장이나 전통문화와 현대에 관한 태도 역시 여기서 비롯된것이지요.     문화, 전통문화에도 순수한 것이 없어요. 증류수처럼 순수한게 없지요. 여러민족이 융합,동화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 어디 순수한 전통이 있겠어요. 그러니 전통문화를 논할때 개방, 변천, 융합의 일면을 중시해야지 거기에 대해서 고정형식으로 매이면 안되지요.     국제적으로 볼때 중화문명 역시 이역, 해외문명을 부단히 흡수, 발전시킨 결과임으로 순수성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이건 영원히 그러게 될껍니다.   김: 우리의 근대, 현대는 사실 구미문명의 절대적 영향하에서 영위해 왔고 또 해가고 있지요.   갈: 그러니 전통도 현실, 현대를 떠나 운운할수 없어요. 전통이 현대에 적응할수 없는 부분이 많거든요. 그럼 어떡해야죠? 그 정화를 남기고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좋지요. 예전에 우리는 정화와 찌꺼기를 한꺼번에 버렸는데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찌꺼기까지 긍정하고 남긴다면 그건 더 어리석은 짓이아닙니까. 그리고 중국의 현대화, 진정한 세계강국으로 되려면 중국인 관념의 현대화를 이루고 전민의 현대화를 성취하는 길이 그 첩경입니다.   김: 공사다망하신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정채로운 말씀들이 독자들에 큰 지적(知的) 자극을 주고 계발을 주리가 믿습니다.   대담날자: 2015년 12월 27일 대담자 소개 갈검웅 ( 葛剑雄 )   1945년 절강 호주 출생 중국 현대 저명한 역사지리 학자 복단대학 교수. 역사지리연구 소장. 도서관장 역임 교육부사회과학위원회 역사학부 위원 중국역사지리.인구사.이민사 연구영역의 제일인자. 주요저작으로 《통일과분렬:중국역사의계시(1994년》《중국인구사》《중국이민사(1993년)》《중국인구발전사(1991년)》《우리가 해야할 반성(2015년)》등 다수가 있다.
연재문화대담( 2 ) “장독문화”는 어떻게 중국인을 부식시켰는가? 백양+김문학 백양 선생   0.들어가면서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의 일이다. 2003년 신록이 짙어가는 5월,나는 일본의 대만출신의 한 지기를 통해 대만의 작가 백양(柏杨)선생님과 연줄이 닿았다.국제전화를 통하거나 서로의 저작을 우송하기도 하면서 어렵사리 맺어진 우리의 연분은 미구하여 망년지교로 되였다. 백양은 80년대 중반 《丑陋的中国人》의 저작으로 전중국의 지식인 ,학생들사이에 폭발적인 션세이션을 일으킨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지성이다. 1986년 12월 ,대학졸업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지 1년 좀 되는 나에게 있어서 이책은 충격적인 애독서였다.24살의 나는 앞날 같은 책을 써보겠다고 아이디어를 얻은 책이기도 했다. 이런 위대한 작가와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 바램도 간절했다.그러다가 일본유학길에 오른 나는 역시 《조선족개조론》《丑陋的韩国人》등 저작으로 우리 민족내부의 열근성을 비판하는 저작을 써내고야 말았다. 내가 우송해드린 《新丑陋的中国人 》(중국어원고)원제<  중국인>과 일련의 저작을 읽으신 백양선생님은 전화에서 이렇게 평가하셨다.  “정말 동아시아의 기재
1    왜 역사의 진실을 추구 하는가? [양천석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050  추천:72  2015-09-15
  33의 신사유 -김문학과 중국 당대 지성33인과의 문화대담 머리말     중국은 현재 바야흐로 역사의 크나큰 전환점에 서있다.     개혁  개방 30여년동안 중국은 일사천리로 발전하여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 했다           그러나 오늘 중국이란 이 거대한 사회속에 안고 있는 문제점은 산적해 있다.     중국은 어떤 문제와 모순과 결함에 봉착해 있으며,어떻게 순조롭게 숙명 같은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겠는가?     그리고 국내의 이미지와 세계속의 국제적 시점에서 중국은  어떻게 해석하며 인식, 해독할것인가?     이 같은 인식론적 문제의식을 안고 나는 그동안 그리고 지금도 중국을 문턱이 달도록 드나들면서 중국 당대의 33인의 지성들과 만나서 대담을 해왔고 또 해나고 있다.     화려한 “성세”의 표피를 벗기고 본 중국은 여전히 변혁을 요망하는 내실이 반거하고 있다     중국이 현 전환기에 개혁을 하여 모순들을 해결하여 자신의 지식체계와 이념을  수립한다면 세계를 리드할 가능성은 있다.19세기 영국와 20세기 미국처럼.     요는 국내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세계와  공동한 번영 대안을 찾느냐 못찾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중국 대표적 현대 지성들과 이러한 문제점을 둘러싸고 신사유와 신차원으로 담론을 펼쳐 “중국 문제”를 진맥해본다. 우선은 시리즈 제1탄으로 저명한 근현대 사학자 장개석 연구의 권위인 ,양천석(杨天石)선생과의 대담을 소개하는 바이다.                                           왜 역사의 진실을 추구 하는가? 양천석+김문학 어떻게 항일전쟁을 기억 해야 하나? 김문학(이하 김): 아까 양선생님의 항일전쟁 진상에 관한 강연을 감명깊게 잘 들었습니다. 긴 강연으로 피곤 하실텐데 이렇게 저와의 대담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양천석(이하 양): 이렇게 상해서  뵙게 되서 나 역시 정말 반갑습니다. 황차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젊은 학자와 대담을 나누게 되니 나도 굉장이 기쁘지요 김:   고맙습니다. 중국 현대 사학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는 역사 학자인 양선생님께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된 저야 말로 큰 영광이지요. 금년은 항일 전쟁과 세계 반파쇼전쟁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지요.그래서 중국이 올 들어 거국일치 전례 없는 대규모로 기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항일 전쟁을 기억하고 반성할까에 관한 화제로 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양:   네,좋습니다. 역사 기억은 반성을 위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반성정신과 실천은 역사학자와 역사인식에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소질이지요. 더구나 한 나라와 민족에 있어서 역사적 기억과 동반되는 반성은 발전하고 자신을 초월 할수 있고 에너지가 되는 법입니다.      20여년전만 해도 항일전쟁에 있어서 우리는 장개석이 항일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이였으며 지여는 도피했다가 항일의 결실을 절취한 그런 악자 취급을 했었지요. 그리고 항일 전쟁도 주전장(主战场)과 적후 전장(敌后战场)이란 구분법도 없었거든요.       그러나 현재의 육속 발전되는 장개석과 국민당사의 사실을 보면 우리의 섣뿌른 결론이 다 잘못됐다는 인식이 앞서게 됩니다. 김:  역사 기억은 반성을 기반으로 해야 된다는 지적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 역시 방법론적으로 반성을 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자기와 타자의 상호 관계넷으로 이룬 정합(整合)적인 개념이므로 타자 탓만하고 타자를 비판 ,성토하는것으로만 기울어 진다면 그 속에서 안일한 기념 행사로 자기 반성, 자기 점검을 방치하기 십상입니다.      항일 전쟁의 기억을 방법론 인식론으로 따진다면 저는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세부적 인식을 가해야 하며 이와 병행하여 그런 일본군에게 왜 우리가 그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와 국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당했다는 문제에 심각히 반성을 추구해야 하는 계기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다 나름대로 여러 차원에서 각자 반성을 하는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가요.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길은 험난하다 양: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를 읽는 행위는 거기서 뭔가 교훈이나 경험을 섭취하기 위한것이라고 생각 해요. 그런데 역사 기술에서 진실이 가리워 졌거나 허위성으로 덮어져 있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파 헤치는것이 역사학자,지식인의 사명입니다.      역사의 생명은 진실에 있습니다. 역사 연구와 인식에서 그 어떤 신화(神化)나 귀화(鬼化)도 다 마땅치 않지요.그러나 이 또한 인류의 정치 생활중에서 항상있는 현실이기도 하면서 역사 연구에서도 늘 있는 현상입니다.극복하기가 어려운 일이지요.        물론 이중에는 역사학자 자신의 문제도 있거니와 더우기는 역사학자가 처해있는 사회 환경, 즉 다시 말해 이른바 “어경(语境)”문제이지요. 어떤 환경이 한 역사적 인물은 “신화” 또는 “귀화”시키기를 원할때 어떤 사람들, 학자들은 왕왕 이런”어경”수요에 영합합니다.        때문에 사회는 자각적으로 역사 연구에 양호한 “어경”을 제공해주어야 하며 우리 역사 학자들도 역사 진실을 위하여 양지(良知)를 내세워 불량한 “어경”과 저항하는 용기가 갖춰져야 합니다. 김:   양선생님은 국내 굴지의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전문가이지요.선생님의 많은 저작을 배독하면서     저는 선생님의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양심적 지식인,비판적 지식인의 코먼센스를 읽을수가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길에서 저 역시 양선생님과 같은 대선배와 지기가 있어서  마음의 만열을  느낍니다. 양: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길은 결코 탄탄대로가 아니지요. 2002년 장개석을 연구한 저작 《장씨 비밀 당안과 장개석의 진상》(사회과학문헌출판사)을 펴냈습니다.이책은 장개석이 비밀리에 수장하고 있던 당안(서류)에 의존하여 장개석의 생애를 연구하는 저작이죠.         책이 나오자 마자 일부 사람들이 익명으로 중앙 영도자에게 밀고신을 써서 보냈어요.장개석이 누구인데? 장개석은 전범의 우두머리요,민족의 쓰레기(败类)요,천고의 죄인이잖아요.현재 중국사회과학원의 양천석이라는 자가 공공연히 장개석은 “민족영웅”으로 올리 추고 있으니 당중앙에서 엄격히 조사하고 엄숙히 처분을 가해야 한다고 밀고를 했어요.(웃음)        사실 내 이 책안에는 “민족영웅”이란 4자가 전혀 없어요.중앙 영도자는 중국 사회과학원 영도에게 명해 내 저작을 읽게 했습니다.그 결과 어떤줄 아세요? 결론이 이 책은”탁실한 학술 저작”이며 “학술 연구 이지 장개석을 올리춘것이 아니다.”란 것이 였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 이렇게 김선생이라도 자유롭게 대담을 할수 있게 된거 랍니다.(웃음)    김:   (웃음) 그렇네요.저도 십분 양선생님의 심경을 이해합니다.저도 똑같은 경험을 당한적이 있으니까요. 지식인은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공권력에 비판하는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공권력에 영합하는 지식인, 후자가 늘 전자를 공격하고,공권력을 차용, 이용해서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을 무함하거나 궁지에 밀어 버리려고 합니다.어느 시대나 이런 영합과 지식인은 다 있는 법이니 저는 무시해 버립니다.전에 여추우(余秋雨) 선생님이 저랑 대담하실때 이런 인물들에게는 대꾸하지 말고 무시하라는 비법을 가르쳐 준적 있습니다.(웃음) 이말은 이쯤하고    접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양선생님은 민국사 영역에서는 제일급의 프로패셔널이시며 민국사,국민당사나 특히 장개석 연구의 권위자 이십니다.근데 근대 현대사에서도 많은 인물중에서 왜 장개석이시죠?   장개석의 진상을 까발리는 중요성 양:   중국 근대사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활약했지만 그중에서는 중국의 운명이나 역사의 진로를 바꾼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핵심적인 인물이란 쉽게 말하여 역사에 대해 특수하고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을 가리키죠. 그러나 많지는 않아요. 무술 유신 시기에는 강유위, 신해 시기에는 손중산, 5.4운동이후에는 장개석과 모택동입니다. 김:   그렇죠. 20세기 중국은 장개석과 모택동의 세기라 할수 있습니다. 양:   장개석과 모택동을 떠나서 중국현대사를 담론 할수 없지요.특히 정치적 수요로 장개석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도 많은 왜곡과 허위성이 가미됐습니다. 역사의 진상이 흐리워 질때가 많듯이 인물의 실상이 흐리워 질때가 많지요.     내가 늘 얘기했지만 장개석은 중국 근대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인물로서 복잡하고 공과가 겸한 사람입니다. 대공과 대과(大过)가 겸한 인물이지요. 그러니 모택동마저도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전후 판이합니다. 자 보세요.1938년 항전 초기 모택동은 연안에서 개최된 중공중앙 제6차 6중  전원 회의에서 한 보고에서는 국민당 역사상 두 위대한 인물이 있다고 판합니다. 하나는 손중산이고 다음으로는 장개석이라고. 손중산을 ”민족 영웅” “최고 통수”로 평가해요. 그러나 1945년 항전 종료후에는 모택동은 자기말을 뒤엎고 장개석은 “인민의 공적”으로 칭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민들은 장개석에 대한 평가도 여전히 두가지 상반되는 양상을 이루고 있지요. 김:   정치의 가장 복판에 군림한 정치의 인물 역시 정치적 환경의 수요에 의한 포폄에선 자유로울수 없는 법이지요 양:   그렇습니다.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포폄으로 엇 바뀌는 이유의 하나는”올리추기(捧) ”이지요.      성인이요 태양이요 하면서 올리추지요. 또 하나는”매도(骂)”지요. 한 인물은 극악 무도한 천인이 질타하는 만고의 죄인으로 평가해버립니다.        장개석은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로서 수많은 역사적 대사건을 겪은 인물이죠. 청년시기에는 손중산을 따라 신해 혁명,원세개 토벌,호법 운동에 투신했고 손중산 몰후에는 북벌을 통솔하고 청당,공산당 토벌,항일전쟁, 내전을 껵으면서 오랫동안 중국의 당,정,군 3면의 최고 지도자로서 “원수(元首)”로 군림했습니다. 중국 공산당과 2번이나 합작,분열을 했고 1949년에는 대만으로 쫓겨가 반공복국(反共复国),하나의 중국을 견지 해왔어요. 88세에 사망했으니 장수했죠.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양극적으로 갈라지면서 한편 신격화되면서 천고완인이요, 고훈성덕         (高勋盛德),광화용택(光华溶泽),민족영웅으로 추앙된 반면에 추화되면서 인민공적,원흉수악 (元凶首恶),민족의 쓰레기,천고 죄인으로 폄훼당했습니다.       이 양극의 찬반을 다 장개석의 진상과 괴리되었고 진실을 덮어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거든요 김:    그럼 장개석의 진실을 까발리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가요? 양:  우리가 지금까지 장개석을 포함하여 진실과 위배된 역사 기록과 평가를 해온것이 사실입니다.장개석과 국민당의 진실을 캐는것은 중국 근현대사의 과학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어요.이것이 첫번째구요.그리고 두번째는 국민당의 항일을 포함한 진실을 밝히고 긍정함으로써 대만과의 평화관계를 발전시키고 최종적으로 민족과 국가의 통일 완성에 유리로운것입니다. 김:   사실 2005년 호금도가 항전승리 60주년 기념 강연에서 중국 항일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정면 전장과 적후 전장의 작전 임무를 맡았으며 공동으로 항일을 이루었다고 언급 했지요.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국민당의 항일 주력을 인정한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항일 전쟁하면 공산당이 절대적 주력이였고 국민당은 무조건 소극 항전 ,적극 반공이란 판에 박은 말로 밀어 붙이거든요.모택동은 어느 문장에서 항일 전쟁시기 장개석은 사천의 아미산에서 숨어 있었다. 항일의 나무를 심지 않고 물도 뿌리지 않고 있다가 현재 항일 전쟁이 승리하니까 아미산에서 내려와서는 긴 팔을 내밀어 승리의 과일을 따먹으려 했다고 야유했습니다.        역사 사실을 덮어 감추고 역사에 거짓말을 하는것은 아마 양선생님께서 지적하시다시피  사실이거든요. 그러므로 양선생님의 일련의 저작들은 학문적으로 역사 진실 규명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제가 양선생님을 진심으로 탄복하는 이유는 선생님은 체제내의 지식인이고 저는 체제외의 해외에서 활동하는 지식인인데 체제외보다 체제내의 지식인의 학술 연구 활동이 그리 쉬운건 아니지요.특히 역사,근현대사의 진실을 터치하는 작업은 많은 용기와 정의감이 필요하거든요. 양선생님의 사학 연구의 기본 자세와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학 연구의 기본 정신은 무엇인가? 양:   나는 늘 역사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고 주장했어요. 역사적 인물이나 역사에 있어서 늘 그에 대한 평가나 기술이 폄훼,찬반,애증등 긍정적과 부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이 자체는 괜찮습니다.요긴 한것은 사실(史实)을 청리(清理)하고 사실을 환원하는 작업이죠. 사실은 객관적 존재이므로 오로지 하나일뿐입니다. 나는 사실은 입론의 기초이고 또한   역사저작의 과학성을 점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각자 입장과 이익,정치적이나 가치관,성격,교양,지식구조등 차이로 인해 역사 사실에 대한 인식, 해석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우리 모두가 사실(史实)에 대해 존중하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호간 대화,토론 할수있는 기반을 마련할수 있어요. 역사 특히 정치사에는 늘 국가,민족,계급,집단,파벌과 개인과 개인사이의 투쟁으로 꽉 차 있으므로 역사 학자는 이런 문헌 자료를 널리 범독하고 역사속에 깊이 심입하여 이 역사의 투쟁을 넘어서 이해 관계나 각종 주객관 제한성을 초월해야 명확히 관찰하고 준확히 판단을 할수 있습니다. 사학이란 무엇인가? 도구인가 과학인가? 내 생각에 만약 도구라고 간주하면 기필코 실용과 이익 만족의 수요에 따라 주관 목적으로 역사를 기술하거나 은폐 또는 왜곡하는 부분도 있을것이며   때로는 어떤 사실을 과대포장하여 진실을 잃을수가 있어요.    그러나 과학이라 생각하면 기필코 역사의 진상을 추구하며 최대한으로 역사의 진 면모를 환원하는 목적에서 각종 은폐 왜곡은 피할수 있습니다.    중국은 사학을 중시하고 사학이 전인의 성패를 모색하는 감별 기능이 있다고 간주하며, 과거를 이해하고 교훈을 섭취하는 기능과 지식과 지혜를 개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기능들을 과학성을 구비한 전제하에서만이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발휘 시킬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사회와 독자를 자칫하면 오도(误导)할 위험성이 있지요. 그러므로 관건은 역사 사실을 잘 정리하여 사실을 환원시키는데 있습니다. 김:  탁견이십니다. 제가 중국에 자주 들어와서 강연,학술활동으로 느끼는 중국은 제가 유학 가기전보다 많이 변한것입니다.특히 개혁 개방 이후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학술 분위기가 많이 자유로와지고 개방됬다는 실감이 늘 들어요.      말하자면 매우 민감한 역사, 더우기 근현대사 연구에서도 수많은 터브를 깨고 있어 과거 문혁식 사고 방식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극 소수의 문혁식 사유에서 구태의연히 빠져 나오지 못한 지식인도 더러 있지만, 학문과 언론의 영역에서도 개인의 주장이 나오고,호적(胡适),진인각(陈寅恪)이래의 “독립 인격, 자유 정신”의 지식인이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물질에서는 GDP 대국으로 성큼 뛰여 올랐지만 그 이면에 있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 즉 유연한 실력에서는 여전히 강대국이 아니지요. 우선 학술을 포함한 문화,문명면에서 자신의 지식 체계,이념을 확고히 세워야 세계에서 존중받는 나라가 될수 있습니다. 사학 영역에서 보면 90년대 이후 신자료 발굴, 신방법, 이론의 수입, 신 문제 의식의 제기,국제적 시야의 연구로 새로운 결론, 결실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문화로서의 역사 읽기” 라는 시각으로  근년에는 역시, 특히 중대한 근,현대사에 대한 해독 작업을 해왔습니다. 패자의 시각에서 역사를 읽는 작업을 시도하고 중일한근현대사의 허위성을 까발리는 작업을 벌렸습니다.       양선생님이 장개석에 관한 진실 시리즈 저작들은 새로운 자료 발굴과 문제의    제기를 위해 새로운 학문 성과를 이룬 호례가 되겠습니다. 그럼 장개석은 대체 어떤 인물이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요?   장개석과 중국 현재 양:  사실 중문계 출신인 제가 우연히 지난 세기 70년대부터 중화민국사 연구에 뛰여 들었습니다. 최초에는 손중산을 연구하다 보니까 필연적으로 장개석 연구에 손을 대게 됐어요. 2002년 《장씨 비밀 당안과 장개석의 진상》 출판한뒤 대만에 수차례나 건너가서 장개석이 대만에 갖고간 많은 당안 서류와 그의 일기에 근거하여 편찬한 “학기(学记)” ”곤험기(困险记)” ”성극기(省克记)”등 문헌 자료를 섭렵하고 많은 논문을 썼어요. 김:  2006년 3월에 양선생님은 미국 스텐포드 대학 호불(胡佛) 연구원에서 개방한 원본을 접한 최초의 중국인 학자이지요. 선생님은 수차례의 장개석 일기 원본을 손으로 베끼셨는데 사진에서 그 원지고를 보니까 1메터 이상은 되는 높이든데요. 장개석 일기가 다 진실인가요? 양:   나는 일기의 진실성을 믿고 싶었습니다. 1915년부터 1972년까지 장개석은 53년이나 줄곧 일기를 적어왔어요.그것도 붓으로 썼거든요. 장개석이 일기를 쓰게 된것은 증국번(曾国藩)을 따라 배워서 그런 거예요. 증국번(曾国藩)이 매일마다 일기를 적었으니 자신도 영웅호걸을 따라 중화민족의 모범성현이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장개석이 일기를 쓴 목표는 개인 도덕 차원에서 였고 또 하나 이유는 그날 그날의 사업을 적고 사업을 지도하고 경험을 총화하자는것도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일기는 순전히 프라이버시를 적었어요.누구한테 보일려고 적은것이 아니니까.거짓말을 적을 필요가 없었지요.     장개석 일기의 사학적 가치는 어디에 있을가요? 중국공산당의 모택동,유소기,주은래,주덕도 일기를 적지 않았어요. 세계 정치사에서 최고 수령이 53년동안 일기를 견지한건 장개석 한사람뿐이지요.      그의 일기를 통해서 첫째로 우리는 장개석의 내면 세계를 읽을수 있고 둘째로 그 당시 정치적 내막을 탐지 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국제 정치의 베일을 벗길수 있고 우리가 미처 모르던 역사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상세하게 실례를 들수 없지만 일기의 사학적 가치는 너무 귀중하지요. 장개석은 어떤 인물인가? 하면 나는 3가지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첫째,장개석은 민족주의 자이지요.그의 일생은 민족진흥을 갈망하고. 될수록 국가의 주권을 수호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늘 장개석은 미제국주의의 주구라고 질타했는데, 장개석은 일기에서 “ 미국은 정의가 없는 나라”라고 비판했어요.  대만이 대륙을 침공할때 미국이 원자탄을 빌려 줄수 있다는 것에도 단연히 3번이나 거절을 했습니다. 조어도 영토 문제에서도 장개석은 촌토라도 쟁탈할것을 주장했어요.   두번째는 개량주의자입니다. 그는 온화한 혁명을 주장하였으며 반공하는 이유는 공산당이 사유제를 억누르데 있었으나, 그는 사유제를 보호했지요. 또 공산당이 계급 투쟁을 했지만 국민당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계급 합작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은 무산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지만 그는 전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장개석과 공산당의 3대 분기점이라고 자신이 말했어요. 세번째로 장개석은 중국 전통 문화、기독교 교의와 손중산 사상의 숭배자였죠. 장개석은 전통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평생 숭배한 인물이 왕양명(王阳明), 증국번 등 인물이 였거든요. 1966년 우리가 “문화대혁명”을 할때 장개석은 대만에서 중국 문화 부흥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그는 또 1938년에 한 사람이 변증법과 방법론을 모른다면 혁명을 성공시킬수 없다고 일기에 썼어요.    그는 기독교의 “박애구세(博爱救世)”를 믿고 기독교의 핵심 사업은 “애인(爱人)”이지만 공산당의 계급 투쟁은 “한인(恨人)”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장개석은 “한인”이 아니라 “애인”을 선택한다고 말했어요. 장개석의 중국과 모택동의 중국 김:  탁월한 근대 사학자인 황인우(黄仁宇)선생은 “中国大历史” “从大历史的角度读蒋介石日记”등 저작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을 비교 했어요. 장개석의 약점을 지적한 부분이 정채로웠습니다. 장개석 정부는 행정넷트웍, 문화 ,경제 3영역에서 절반만 구축했는바. 중앙정부,지식엘리트,도시를 기초로한 현대 경제는 운영을 잘했어요.그러나  광대한 농촌,농민을 방치해 버렸어요.황선생의 말을 빈다면, 국민정부의 중국은 고층기구에 그쳤고, 사회기층에 미치지 못했지요. 그 넒은 농촌은 공산당의 발전 기지로 제공한것입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결정적 차이점은 광대한 농촌,농민의 권력 기제를 장악했냐 못했냐에 있었지요.특히 항일 전쟁시기 농촌에 침투하여 민족주의를 호소하면서 광범위한 항일 유격 근거지를  이룩 했는데. 이것은 국민당이 농촌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한 공백을 메운셈이 되지요. 항일 전쟁후 중공은 항일 유격 근거지를 점에서 선으로 ,면으로 연결 시켜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 전술로  도시에 있는 국민당을 포위하여 내전에서 승리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럼 양선생님은 장개석이 대륙에서 패배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양:  네,농촌을 장악하지 못한게 큰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밖에 민족 자산 계급을 장악하지 못한점,내전을 발동하여 경제 정책에서 과오가 빚어진것, 일당 독재, 개인 독재, 마지막으로 국민당 내부의 부패를 들수 있습니다.    사실 장개석 본인은 청렴하고 탐오를 하지 않았으며 검소한 생활을 즐겼습니다.그러나 반부패에서 철저하지 못한것이 실패의 고배를 마신거지요. 실패의 요인은 어디 있는가하면 태자당에 대해 엄격히 단속을 못한데 있습니다.   장개석의 인물상 김:  장개석은 청년시기에 일본에서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일본 문화속의 청렴,결백,무사도 정신에 경도 되면서 추운 겨울에도 냉수로 세수하고, 언 주먹밥을 먹으면서 검소한 생활중 강직한 군인의 성격을 키운것 같습니다.      모택동과 장개석의 서예를 보면, 그 필체에서도 두 인물의 성격이 일목요연하게 안겨오지요.. 모택동의 필체는 용비봉무(龙飞凤舞)의 시인 기질이고, 장개석은 똑 바로 개서체로서 근엄직실(谨严直实)군인의 풍격이 역력 합니다.      장개석이 혼인 생활에서도 사치부화관 송경령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것이 그의 검소질박한 생활습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양: 장개석은 개인 중심주의자였고 일당독재자였지만. 그 또한 자기 반성을 끊임없이 해온 인물이였습니다.그의 장점은 의력과 지구력이 강하고, 끈기있게 분발하는것이지요. 그의 약점은 호색,조폭,의심이 많고 고벽(孤僻),자기를 아끼는것이였어요. 그리고 자식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지요.지금까지 그가 탐오를 했다는 증거를 하나도 찾아 볼수 없습니다.      장개석은 평생 끓인 물만 마시고 오차물도 잘 안마셨어요.   항전 승리후 국민당 요원들이 중경에서 상해로 돌아왔을때, 모두가 5섯가지를 쟁탈하기에 여념이 없었지요.집(房子),자동차(车子),금전(票子),금덩이(条子),여자(女子).당시 이것을 오자등과(五子登科)라고 칭했어요. 장개석의 아들 장위국(蒋伟国)이 와중에 별장 하나를 얻었는데 장경국(张经国)이  이 상황을 장개석에게 보고하자 그는 일기에다 이 자식은 가풍을 더럽혔다고 (此子败坏家风) 적고 있습니다.그리고 장경국을 시켜 장위국의 별장을 반환하라고 했습니다. 김:  그럼 장개석의 공죄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양: 요약하면 3대공과 3대 죄가 있어요.3대 공은 첫째 북벌인데 3년안으로 3대 군벌 그룹을 침몰시켰고 두번째는 항일을 한점입니다. 장개석은 “공간으로 시간을 바꾸고 소승을 쌓아 대승을 거두는” 지구전(持久战)을 주장했어요.장개석은 섣뿌른 계란으로 암석을 치는 전술이 아니라, 강대한 일본군앞에서 지는것이 이기는격으로, 지구전을 발안해냈습니다.1936년 이미 이런 지구전을 고안해내고, 연해에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사천을 기지로 삼아 세계 동맹국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일본을 전승하는 전략이였지요.전면 항전인 1937년의 한해전인 1936년도에   이미 이런 위대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셋째는 대만 건설입니다.      그의 대죄는 공산당토벌이고, 또하나는 3년 내전,세번째는 대만에서 백색테러를 한것입니다 김: 정채로운 말씀 잘 들었습니다.앞으로 장개석 일기 해독 시리즈를 육속 출간하실 예정이라고 들었는데요? 양:  시리즈 제4집을 올해안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다른 저작들도 현재 준비중입니다. 김: 오늘 긴 대담 감사했습니다.선생님의 이채로운 역사 저작을  기대하면서 건필 하시길 바랍니다. 대담자소개 양천석( 杨天石)     저명한 역사학자. 중국사회과학원 영예학부위원, 중앙문사연구관 관원, 북경대, 청화대 겸직교수. 1936년 강소성 출생. 장기간 중국문화사, 중국근현대사, 특히 민국사, 국민당 연구에 많은 실적을 쌓았으며 장개석연구의 제일인자.     주요저작으로 《양천석근대사문존(文存)》(통5권) 《양천석문집》,《역사의 수수께끼를 찾아서-근대 중국의 정치와 인물》, 《장씨 비밀당안과 장개석진상》,《장개석의 진실을 찾아서 – 장개석일기해독》(1,2,3집).  제1집은 2008년 중국10대 도서상, 제2집은 남방독서절 최고인기역사 저작상을 수상 했음.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