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담】 《33의 신사유》
중국지식인, 무엇이 문제인가?
뢰의(雷颐)+金文学
0. 들어가면서
“근대 중국지식인연구”의 제일인자로서의 뢰의선생은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베테랑 연구원으로서 학계와 언설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비판적중국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오래전에 그의 저작에 소개된 사진을 보고 나이가 훨씬 연상의 대선배인줄 알았는데, 그는 나보다 근근히 6년 연상인 1956년 태생이었다.
문화학자 사중문(史仲文)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우리는 자주 국제통화를 하면서 서로 안부도 전하고 서로의 관점에 대하여 피력하면서 어느사이 친숙한 문우, 학우로 돼버렸다.
대담을 하기로 서로 예정은 오래전부터 해 왔으나 스케줄때문에 조정이 어려운 면도 있었다. 그러다가 3월 사중문선생과 대담을 이루게 되면서 뢰의선생과의 대담도 뜻밖에 쉽게 이루어 졌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는 법인가 보다.
우리가 대담장소로 정한 곳은 북경 중국사회과학원 근처의 아담한 커피숍이었다.
첫 대면에 조금은 냉철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뢰선생은 기품이 조용하고 예지에 찬 일류의 지성인임을 이내 알아 차릴수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늘 전화에서 처럼 담담히 조용하게 말을 엮어가는 뢰선생님은 “중국지식인” 문제에 대한 애착과 지식인이 살아가는 중국의 대환경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칼날처럼 서있었다.
그런 뢰선생은 신사중의 신사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학자였다. 《孤寂百年- 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등 무게있는 노작을 읽은 나는 크나큰 공명을 일으켰다.
胡适,容闳,梁启超등등 근대 지성사의 스타를 다룬 이 책에는 지식인이 왜 백년의 고독속에서 헤메였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지식인을 통해 그 시대와 함께 현대지식인의 사명, 역할과 운명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수 있지요.”
우리는 “중국지식인”이란 문제를 둘러싸고 긴 시간 대담을 나누었다.
1. “지식인”은 무엇인가?
김: 뢰선생님은 중국근대지식인 연구의 제일인자로서 《 孤寂百年 - 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 》이란 노작을 써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 12명을 통하여 그들의 운명과 사상맥락과 국가정치의 기본속에서 정치와 개인 전공발전사이에서의 모순을 기술했어요. 따라서 종당에는 국가정치속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린 “고독과 적막의 지식인”상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대한 현실적 의의을 갖는 연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뢰선생님은 “지식인”은 구경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으로 부터 우리의 대담을 시작할까 해요.
뢰: 좋습니다. 중국 지식인(知识分子)은 청조말기에 3천년의 황제통치가 붕괴되면서 전통적인 사대부(士大夫)로 불린 독서인으로부터 근대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되지요.
“지식인”을 정의하는데는 두가지 기준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직업적기준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기준입니다. 직업적으로 학자, 작가, 문인, 교수, 오피니언계, 예술인이 이에 속하고 정신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독립”되여 있어야 하는겁니다. 사이드가 지적하다시피 지식인은 으례 “보편적정의”를 대표해야 하며 또한 영원히 “비판”을 견지해야 한다는것이지요. 지식인의 “독립”은 인격, 정신과 관념에서 독립하며, 그속엔 경제적자급과 자신의 내재적 외재적 존엄이 포괄된다고 봐요.
김: 저도 동감입니다. 동양의 사대부, 독서인을 서양에서는 인텔리젠치아 (intelligentsia)나 인텔렉추얼(intellectual)로 칭해지며 시대를 리드해온 계층이었지요. 제정러시아 사회안의 지식인들로서 서구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노예제, 전체주의에서 인민해방과 정치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킨 지식인이 바로 전자이며, 근대 유럽에서 지식과 최고의 교양을 고안해냈고 발전, 확대시킨 자가 후자입니다. 저는 진정한 지식인은 “사회체제에 순응하기 보다는 변혁을 통한 발전을 시도하고, 그 방향을 지적하는 자이며, 사회의 폐단,약점을 지적, 해부, 비판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립적인 인격과 사상으로 체제에 “적응”을 꾀하더라도, 무절조의 곡학아세가 아닌 체제의 개혁, 진보를 위한 건설적 지적, 또는 비평을 하는게 지식인의 몫이라 봅니다.
뢰: 맞어요! “독립과 비판”이야 말로 지식인의 가장 뚜렷한 표징입니다. 진인각 (陈寅恪)선생이 강조한 “독립적 인격, 자유적인 사상”이란 격언처럼 지식인의 첫번째로 갖추어야 할 조건이지요. 공공사회에 대한 관심과 공공적 양지(良知)로 사회참여의식이 강한 문화인이 “지식인”이지요.
2. 백년의 고적(孤寂)
김: 그러니까 저는 “지식인”은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 기술전문가, 기술관료, 내지 직업성학자, 관료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중국어에서는 지식인(知识人)을 지식분자(知识分子)라 칭해요! 독립적인 무엇이 아닌 하나의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지요(웃음)
뢰선생님은 중국지식인 연구분야의 전문가이시니 선생님의 아까 그 저작과 관련하여 근대 중국지식인상에 대하여 우선 개략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뢰: 지식인 연구에 있어서 나는 두가지 방향이 있어요. 하나는 청말, 신해혁명과 이홍장등에 관한 연구이고 또 하나는 현대의 호적, 부사년(傅斯年)을 비롯한 지식인 연구입니다. 주로 개개인의 지식인의 운명과 사상을 통하여 지식인상을 축출해내고, 중국 국가, 정치와의 운명, 관계양상을 귀납분석했지요.
김: 뢰선생님은 굳이 “백년의 고적”이란 표현으로 중국지식인의 궤적을 형용했습니다.
뢰: 사실 나는 괴로움과 격투하면서 지식인 연구를 계속해왔음을 고백해야 겠어요. 국가와 개인의 명운사이에서 중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거나 모순, 대립의 구도에서 분투해왔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다면 오로지 “백년의 고독”이란 말로 형용할수 밖에 없었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지식인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 뒤로 지식인을 억누르니까 국가정권의 신임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계속 정치비평에 관심하면서 한편 학문도 하면서 자신의 일부 개성을 보존하려고 애썼어요….이러한 모순을 그들은 불가피적으로 십자가처럼 짊어져야 하는 비운에 처했지요.
이게 바로 근대 중국지식인의 운명이었습니다.
3. 덫에 걸린 운명인가?
김: 그러니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중국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사회적, 체제적 덫에 걸려야 하는 운명이겠네요?
뢰: 그래요! 개괄적으로 말하면, 중국 지식인은 첫째로 국가와 개인, 국가, 민족적 부강 국가적 이익과 개성사이에서 일종의 복잡한 계급모순이란 덫에 걸려있었어요.
두번째는 학술을 함에 있어서 순학술학문에 전념해야 되냐? 나라, 민족이 외래침략을 당했을때 자신의 학술을 견지해야 되냐 아니면 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정치적구조에 참가해야 하나? 정치와 학문사이에서 배회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거듭되는 대립, 모순의 괴로움속에서 때로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해야 했어요. “바로 학술과 정치사이에 있다고”말입니다.
김: 이런 의미에서 30~40년대의 거물 지성 호적(胡适)과 그 시대 지식인의 운명이 바로 전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정치와 개인의 학문사이에서 시계추처럼 배회하는 양상은…
뢰: 호적과 동시대의 정문강(丁文江)은 현대 중국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인물로서 30년대에 자신들의 글을 통해 자신의 사상체계을 구축합니다.
서양의 자유주의개인의 권리는 신성불가침범인데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더구나 자유주의의 중요한 두 리더인 호적과 정문강은 국가라는 대아(大我)를 위해 개인적 소아(小我)를 희생시킬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정씨나 호씨 역시 30년대에 한번쯤 스탈린의 공업화에 지대한 선망을 보이는데 잔혹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의 후진국 공업화 성공을 긍정하지요. 그래서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유주의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들은 국민당정치, 국민당의 독재을 비판합니다. 중국에는 좋은 정부냐 나쁜 정부냐 하기에 앞서 정부가 없다고 일침을 놓아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국가운명의 대과제를 논의합니다.
결국 정문강이 내린 결론은 “나는 스탈린통치하의 한명의 기사(工程师)로서 일할 지언정 해외에 망명하는 지식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김: 그렇지요. 1949년을 경계로 중국지식인은 이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는 운명에 처하지요. 국가건설, 민족의 부흥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다수 지식인은 후자를 택하게 되었지요.
뢰: 맞어요! 호적은 대만으로 가고 정문강은 대륙에 남았지요. 그때로부터 완전히 다른 운명이 전개되지요.
4. “모래위에 세워진 상아탑”
김: 청말시기로부터 20세기중엽, 그리고 1949년이후 문화대혁명등 전례없는 문화의 수난속에서 지식인의 수난은 중국대륙에서 간단없이 이어졌지요.
지식인이 80년대부터 “수난시대”의 크라이막스를 넘어섰지만 독립적 계층으로서 현재 중국사회에서 홀로서기엔 너무나 그 기반이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나 구미사회의 지식인사회와 비교를 해도 이점은 일목요연이지요. 중국 지식인 자신들도 스스로 말하다시피 근대 “지식분자사회”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또한 “모래밭위에 세워진 상아탑”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당대 지식인계층의 괴로움 또는 곤난은 학원파이든 매스컴이든 체제성적 보장이 결핍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뢰선생님은 당대 지식인사회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뢰: 20세기 중국지식인은 한마디로 괴로움과 고적속에서 헤매왔다고 제가 늘 말하곤 합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지식인의 50~70년대 수난시대를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신계몽을 벌이기도 했어요.
지식인은 이런 와중에 사회의 전환점에서 정치환경과 충돌, 모순이 생길뿐만 아니라 지식인 스스로의 사상, 인격에도 모순이 존재했다고 말해야지요.
20세기 지식인은 1949년전후의 지식인을 구별하에 봐야 합니다. 49년 이후에도 17년세대 문혁세대, 그리고 포스트문혁(당대) 세대로 나누어 봐야 합니다.
20세기 최초의 엄복,양계초, 채원배등이 청말세대이고 1915년이후 호적, 진독수, 진인각, 노신등이 또 한세대이며, 풍우란 부사년, 주자청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949년이후는 17년(1949~1966)세대로 농후한 이데올로기색채를 띤 국가에 복종하는 세대였고 80년대 중기 “문화열”속에 궐기한 신세대 지식인이 탄생됩니다. 그리고 “포스트문혁” 세대로 1960년이후 출생한 신생지식인이 현재 활약하고 있지요.
5. “변두리(边缘)” 로 몰리다
김: 좋은 귀납입니다.
제가 볼때 80년대 지식인은 사회의 중심에 서서 커다란 계몽과 호소력이 있었는데 90녀대부터 외부환경과 지식구조의 변화로 인해 지식인이 중국사회에서 “변연화”(边缘化)로 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네요. 90년대이후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진척되고 경제 고도성장을 이루어나가니 사회의 세속화가 박차를 가함에 따라 지식인은 시장사회 주도의 중국에서 “변연화”되었습니다. 여영시(余英时)선생이 이에 대해 전문 논한적이 있지요.
정치적 차원에서 뿐만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변두리고 밀려나지요. 사회가 고도로 분산화되고 계층이 다양화됨에 따라 다원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에 사회에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요.
뢰: 맞습니다. 이럴때 지식인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변연화로 몰렸지요. 이른바 중국사회에 새로 급등장한 억만장자, 벼락부자, 졸부등 새로운 형세하에서 나타난 사회기득이익층 그리고 매스컴과 연예계에서 현란하게 활개치는 여러가지의 스타들이 사회의 중심무대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새로운 사회속에 처해있는 지식인이 엄혹한 도전을 받기 마련이지요. 늘 계몽자로 자부해오던 지식인이 이른바 사회에 부자들이나 스타들의 등장에 밀려난 까닭에 지식인은 스스로 “변두리”화 문제를 열렬히 논의하고 인문정신에 관한 토론을 전개했지요. 이런 신환경하에서 지식인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키고 “안신임명”하겠는가? 구경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지식인이 사회 전체를 개변시킬수 없다면 자신의 정신,현실적 포지션을 되찾아야 한다고 분연히 사고하게 되였습니다.
김: 지식인에 대한 국내의 사회적 여론이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회에서 지식인에 대하여 폄훼절하하는 양상을 보고 놀랐습니다. 전문가 (专家)를 벽돌(砖家)로, 교수를 맹수(叫兽)로 매도하는 현상이 보편화 된 현상이 지식인의 “변연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사료하시는지요?
6. 왜 지식인은 매도당하나?
뢰: 김선생은 중국사회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웃음)
내 생각에 자매체(自媒体)의 발달로 인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식인도 당연히 뒤질리없지요. 이런 공공사무에 대한 관심과 의견은 전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으례 신중하게 자신이 파악한 상황하에서 발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지요.
예전에 이런 발표공간이 없다가 일거에 이런 표달공간이 생기니 여러수준의 의견과 지어 황당한 말이 횡행하지요. 이런 교수, 전문가를 두고 매도하거나 분개하는건 이해 가 갑니다.
또 하나는 해외에서는 자매체가 서로 사교를 하는것이 기본이지만. 중국에서는 사회, 공공사무, 정치에 대해 의논이 많은게 특점이지요. 왜냐하면 중국의 이른바 전통매체, 주류매체, 종이신문, 종이매체가 이런 기능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TV국, 신문이 여러 관념과 견해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할수 있다면, 사람들이 거기서 이성적으로 발언하고 토론할수 있습니다.
김: 중국에는 매체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뢰: 그렇지요. 그러니 당연히 대중들이 자매체 위챗을 이용하여 발언하게 되지요.
김: 지식인의 수준에 문제가 있고 대중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TV에서 봤는데 흑룡강성의 신축 육교가 무너지자 소위 전문가란 분이 나와서 해설 하는 말이 “육교가 약한게 아니라 통행하는 자동차무게가 너무 무거웠다는 거예요! 그 말 듣고 다들 앙천하지않을수 없지요(웃음)
뢰: (웃음) 그리고 중국사회에는 서로 타자의 의견, 부동한 의견을 용납하고 들어 줄수있는 그런 환경이 있어야 되지만 중국은 여전히 “문혁”의 여파로 타인의 견해를 존중할줄 모르고 견해가 다르면 무조건 매도 중상하기가 일쑤이지요.
김: 저도 동감입니다. 위챗, 펑유췐에서 저도 문장을 발표했다가 일부 동포한테 쌍욕으로 매도, 중상당한적이 여러번 있거든요.(웃음) “당신의 관점은 찬성할수 없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는 보호해준다”는 고차의 경계가 결핍한게 탈입니다.
뢰: 어쩌겠어요? 그런 수준미달의 인간을 무시해야죠!(웃음)
7. 지식의 비극시대
김: 중국 지식인을 담론함에 있어서 해외 지식인과 “비교지식인론”의 시각에서 고찰해보면 중국 지식인의 하나의 결정적인 결함, 문제점은 지식인 자체가 지식에 대한 인정,공감과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기타 사물의 부속물로 되기를 원하는것에 있다고 봅니다.
어느 해외 중국인 학자가 이런 지적을 했어요. “지식의 비극화시대라 칭하는것은 권력, 금전과 대중이 지식에 대한 전례없는 멸시뿐만아니며, 또한 지식이 늘 장식용으로 있어도 없어도 되는 물건이 된게 아니라 지식은 종래로 비미(卑微)하고 비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뢰: 정말 그렇습니다. 대학에서도 학술연구와 교육 본원을 떠나서 무슨 ××× 공정이요, 기요요하면서 대학을 공원처럼 거대하게 부풀리고 확건하지만 관건적인 교육과 연구는 게을리 하고 있어요. 요즘 대학 백년창립기념의식이 성행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정치가를 얼마만큼 배출시키고 기업가, 부자를 얼마나 배양했다고 떠벌리지만 어느 대학에서도 유명한 학술거장 한사람을 배출시키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국내에서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여러가지 심포지움이나 세미나를 하지만 정계 대간부나 대부자를 초정하는것을 주목적으로 하지 요긴한 지식체계는 언제나 차요적이고 부속물로 밀리고 말지요.
김; 내가 이 “중국 일류지성과의 문화대담”시리즈를 진행하는 주목적이 지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동아시아에 향해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인은 누구인가?”란 테제를 발신하고 해석하자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현재 전례없는 경제성장과 사회전변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 격변의 시대에 대해 중국인 지식인 자신이 나서서 해석하고 분석, 제련하여 하나의 의식, 개념으로 이론화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 지식인은 이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더 비극적인것은 그것을 담당할 기력도 능력도 없이 “무기력의 상태”에 빠진 상태라고 봅니다.
8. 지식인은 사망했는가?
뢰: 지식인의 “변연화” 무기력에 따라서 “지식인의 사망”문제를 프랑스 포스트모더리즘의 사상가 리오타르가 지적했어요. 변연화와 다원화 사회속에서 지식인은 흔히 자신을 인민, 인류의 위치에 놓고 보편적 동일가치의 주체를 인정하고 사회를 향해 발언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축해 온 일련의 정체성적 언어 발설이 포스트모더니즘사회에서는 이미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는 거에요. 끊임없이 다원화, 세분화되는 사회에서 사회전체가 받아들이던 정체성적 언어발설 담당자로서의 지식인이 이미 존재감을 상실했다고.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사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미셸 푸코도 이런 맥락에서 유사한 말을 했지요. 그런데 영국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 지그먼트 바우맨(Bsuman)은 리오타르의 주장에 또 해석을 가했어요. 모더니즘사회에서 지식인은 여전히 사회의 “입법자(立法者)”구실을 하며, 지식정체성과 동일성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고 중립적 객관적 지식규칙으로 사회의 지식적 재판자로 되었는데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을 그 누구도 대체 할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后现代) 사회에서는 사회의 다원화로 인해 지식계통이 해체되고 통일한 지식의 장 (场)이 상실한다는거예요.
뢰: 이런 의미에서 중국지식계층에 이미 통일된 지식계층이 여러가지 유파로 세분되고 이른바 국학파, 계몽파, 보수파, 자유주의파, 신우파, 후현대파등으로 나뉘어 통일된 사상, 지식계가 산산히 부서졌지요. 그러니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지적, 사상적 체계를 새로 재건립하고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이거죠!
9. 이중성격의 두뇌명석한 계층
김: 지식인은 대체로 “천성적으로 이중성격소유자”라는 말이 있지요. 학자들이 이에 대해 거론해왔습니다, 피얼 볼디어우(Pierre Bourdieu)가 갈파하다시피 지식인은 “통치자중 피통치자의 일부분”입니다. 즉 지식인이 그 문화자본으로 인해 통치적지위에 있고 동시에 정치와 경제권력을 장악한 자 앞에서는 또 피통치자로 전락된다는 거지요.
이런 모순이 지식인의 2중성격 내지 권위자, 권력자앞에서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순종으로 인해 얻는 거대한 이익과 반항으로 인해 얻는 비싼 대가를 고려하여 대부분 지식인은 현실중에서 흔히 권력과 타협을 이룩하게 됩”니다 ( 제롬 카라벨 Jerome Karabel)
중국의 지식인은 긴 황제제도와 현실체제의 체험속에서 이런 2중성격이 뚜렷하고 하나의 문제라고 보고 있는데. 뢰선생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뢰: 현실의 중국 지식인의 이런 2중성격은 현체제하에서 더욱 선명한건 강조할 나위도 없습니다.
지식인과 정치엘리트사이에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까닭에 이런 모순이 중국지식인의 2중성격을 유발한 최대의 근원이라 봅니다. 전목(钱穆 )이 풍우란( 冯友兰)에 관한 이런 일화를 어느 책에서 기술한적이 있어요. 어느날 두 학생이 연안으로 가게 되어 환송회를 소집했어요. 전목과 풍우란이 초청특강을 하게 되었는데, 풍은 연안에 가는 두 학생에 격상하는 말을 했고 전은 이와 상대로 학생이라면 우선 공부를 잘 하여야 장내 국가의 기둥으로 될수 있다고 연안에 갈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김: 전목은 풍우란과 전혀 반대의 말을 했네요!
뢰: 그래요! 회의가 끝난 뒤 풍이 전의 연구실에 찾아와서 아까 학생들에게 연안에 가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한 건 옳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연안으로 가는 학생들에게 꾸지람한건 잘못이라고 했지요.
이에 대해 전목이 풍에게 당신은 두 학생이 연안에 가는것을 장려하면서도 또한 여러 학생에게 남아서 독서하라고 했는데 이는 전혀 상반되는 길이며,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인데 어찌 범벅으로 말할수 있는가고 질책했답니다.
두 사람이 상호 논쟁하다가 풍우란은 불쾌하여 자리를 떴지요. 여기서 볼수있는바와 같이 전목은 가치관이 매우 명석한 학자이고 풍우란은 늘 양가지견(两可之见)을 갖고 있는 학자였습니다. 전목같은 지식인은 흔치 않고 풍우란같은 두뇌는 명석하지만 “양가지견”의 모순에 있는 지식인은 현대 중국 지식인이 절대 다수입니다.
중국 지식인은 한편 도통(道统)이란 상징기호의 가면을 쓰고, 도덕, 양심 국가주의의 진리의 화신으로 자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권세와 체제에 아부하거나 보좌하여 권력통치 또는 의식형태의 교도원으로 되기를 즐기지요.
이중성격에서 하나는 “도통성”이고 또하나는 “의부성(依附性)인데, 이 2중성격때문에 왕왕 잃어버리는건 자기 자신의 진실한 개성이지요.
10. 비판적지성은 다 어디로 갔나?
김: 앞에서도 말한적 있지만, 지식인의 본질은 체제에 대한 비판에 있어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역설하다시피 지식인이 지식인인 까닭은 비판성에 있으며 권세에 대한 반항입니다. 전공적, 기술화된 전문화적 지식인이 중국에도 많이 증가되었지만 제가 늘 느끼는 점은 중국에 비판적 지식인, 공공지식인이 비례에 따라 너무 적은것입니다.
사이드, 사르트르, 카뮤, 촘스키같은 비판적 지식인이 중국에 너무 희소합니다, 제가 중국지성들과 대담하면서 발견한것도 현재 원로 지식인 80대이상에 모우식(茅于轼) 자중균(资中筠), 원위시(袁伟时)등 고령 지식인에 비판적 지식인이 있지만 그뒤에는 과감히 진실을 말하는 젊은 지식인이 비례적으로 적어서 큰 문제라고 봅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뢰: 지당한 말씀입니다.
지식인이 우리 시대에 할수 있는 사명은 두가지라 생각해요. 하나는 학자, 연구자이고 또 하나는 사상자(思想者)이라고 생각해요. 김선생이 나열한 사이드나 촘스키같은 비판적 지식인의 거물들이 세인의 존경과 각광을 받는 이유는 지식인의 양지( 良知)의 심벌이고 전문가, 학자이면서 도덕적으로 용기가 있는 부조리에 맹렬히 비판을 가할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기백과 실천이지요.
도덕자 사상자이고 지성으로 살아가는게 지식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중국지식인은 현 체제하에서 계몽과 주장이 좌절을 당하자 90년대부터 시장경제의 홍수에 밀려 세속화의 파도에 말려 들었어요.
금전, 마이홈, 가부…등 경제이익의 수익자로 된 지식엘리트들도 그 공리심에 의해 매우 현실적 세속적인 상태에 물젖었습니다.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투기적인 승관발재(升官发财)의 전통이 이들의 심령을 점거했지요.
그러니 도덕이니,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에 앞서 스스로 도덕을 버리고 학술에서도 표절하고 완전히 학자, 교수,전문가로서의 한계(底线)를 넘어서서 부패로 향했습니다.
학문은 할수 있더라도 도덕수준은 밑바닥이고 학문도 안되고 도덕도 엉망인 지식인이 아까 말한 叫兽, 砖家의 전형이 아닙니까. 현체제속에서 삶이 보장되고 윤택해지니까 대부분 젊은 지식인은 “지식인”이라는 의미와 사명감을 잊고 체제에 발라맞추거나 영합 또는 안주하면서 “비판”, ‘저항”을 깡그리 버리고 살게 된게 중국 대부분 지식인의 현상(现状)입니다.
11. 퇴영되고 부식된, 그리고 창조력이 없는…
김: 탁론이십니다. 제가 중국을 자주 오면서 발견된 지식사회의 모습은 80년대 보다도 오히려 물질면, 하드면에서는 진화됐지만, 지성과 사상교양은 더 퇴영되고 부패됐다는 점입니다. 자중균선생님도 이에 대해 이미 큰 소리로 지적했지요.
관원, 정치가들의 부패를 박멸하느라고 현재 야단법석인데 제가 볼때 중국 지식인의 부패도 뒤지지 않은 세계의 베스트원의 기록이라 봐요!(웃음) 이런 와중에 중국에는 자신의 지식체계가 엄중히 결핍한것을 “발견”했어요. 하나의 문명세계가 자신의 지식체계, 언설체계를 정립하지 못한다면 진화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양이나 일본의 지식체계를 흡취하여도 좋지만, 진정한 창조력은 자신의 지식체계가 뒷바침해주거든요. 사실 인문학영역만 보더라도 중국이 49년이후로 현재까지 일본의 인문학발견, 지식체계를 능가할수 있는 실적은 전혀 없습니다. 현실은 그냥 산채(山寨)학문, 산채이론, 개념이나 모조품따위가 범람하고 표절이 횡일할 뿐입니다. 베끼고 복제하고 별 가치없는 지식제품을 양산하는게 중국지식계의 현상이 아닙니까?
뢰: 예리한 지적입니다! 지식계, 학술계는 더 이상 정토(净土)가 아니지요. 학술부패는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으니 너무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학술부패에서도 베끼고 표절하고 하는일이 정상적 보편화로 됐으니까요!(웃음) 내 논문도 표절당한적이 있습니다.
2001년 1기 《社会科学论坛》에 발표한 《中国近代史上的张申府》는 완전히 제가 1998년 2기 《北京大学学报》에 발표한 《中国近代史上的张申府》 전면 표절한겁니다. 그것도 중앙이론연구직장의 박사연구생이 말이에요.
김선생 지적대로 보편적인건 무더기로 쏟아지는 소위 “학술성과”라는게 아무런 창의력도 없는 전인이 말한 복제품이지요!
그리고 대량의 관원들도 수중의 공권력과 공금을 이용하여 대학에서 학위,학력을 “구매”하고 있는데 지어 명문대학에서도 “수입”을 위해 소위 “실권인물”과 결탁하며 그런 부패자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습니다. 돈만 내면 증서를 남발하는바 학교의 명예도 전혀 상관치 않아요…
학술은 민족문화의 정수인데, 이런 식으로 학술을 한다면 그 후과는 엄중하지요. 나중에 “지식 창조력”은 마이너스로 추락되고 우리 사회의 발전과 민족문명의 발전에 엄중한 지장을 주기 마련입니다.
한심한건 학술표절, 부패를 적발해도 절대다수가 응징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그 대학이나 그 기관의 “수치” “오점”으로 된다 여겨서 처벌을 줄 대신 적발자를 비난하는 일도 비일비재입니다.
12. 중국 자신의 지식체계를 창립해야
김: 중국이 국민국가 건설에만 목표로 하지 않고 국제, 세계적 문명대국으로 거듭나면 초우선과제가 자신의 지식체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의 지식체계가 결핍한것은 중국지식계층의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되는데, 학술부패나 재부나 권력에 예속되기를 원한다면 그 자체가 중국지식계의 비극입니다.
서양 내지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일목요연한건 중국지식인의 창조력결핍과 독립인격 자유사상의 부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지식인은 우선 “독립”하고 “자주”하여 창조력을 발굴하여 자신의 지식체계를 정립하는 길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되요.
뢰: 찬성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 지식인은 창조력이 매우 부족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현재 까지도 서양지식, 사상만 따라 모방하는 유치한 상테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수 없어요!
수천년이나 왕권의 지식체계에 의존하여 왔기때문에 기본상 “의존형”지식체계에 머물러 있을수밖에 없었습니다. 49년이후 정치의 예속물로 완전히 변질되었기에 지금까지 세계에 내놓을만한 인문학적 발견, 성과가 없는건 당연하지요. 지어 일본의 인문학에 뒤진것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입니다.
김: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 수천년중에 하나의 왕조가 붕괴될때나 황권이 사회를 장악하지 못할 무렵에 새로운 사상이나 사유가 발생했지요. 지식체계를 창발하고 정립하는 유일한 도경은 권력숭배와 권세통제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환경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뢰: 이데올로기의 관성사유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지식체계를 새롭게 창립하기엔 너무 곤란합니다. 인간의 사유를 공제하기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완전한 자유공간도 불가능 합니다. 적당하게 이에올로기의 공제로 마이너스적 사유를 규제하는것도 필요하지요. 그래서 지식인의 사회 책임을 정립해야 지식체계의 정립이 스무드하게 진행될수 있다고 봐요.
김: 서양의 사상가들이 지적하다시피, 사상, 지식이 물질이익이나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전락한다면 사상도 지식도 제 구실을 못하지요. 그런 덫에 걸려버리면 참신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제대로 클수 없을건 언급할 나위도 없으니까요.
뢰: 국가가 부유하고 금전이 많다고 하여 사상과 정비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유와 금전을 요긴한 사상, 지식개발에 유용하게 쓰지 못한다면 사상은 더 궁핍해지고 문명 역시 쇠락할수 있습니다.
지식인이 사명감으로 지식과 도덕에서 분발하여 중국자신의 지식체계를 확립하는 일이 중국의 문명대국건설을 보증할수 있습니다.
대담자 소개
뢰의 (雷颐)
중국 지식인연구영역의 제일인자.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연구원.
1956년 무한에서 태어남. 1978년 길림대학 역사학부 입학.
전공은 중국근대사상사, 근대지식인과 당대 중국사 연구.
주요저작으로 《取静集》 《被延误的现代化》 《历史的进退》《历史的裂缝》《百年孤寂-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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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재로 불릴 만한 숱한 업적을 조선족 인문학자에서 으뜸으로 쌓았고 그만큼 동아세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은 이제 그누구도 승인 하지 않을수 없다.
김문학선생의 팬이 많은 반면에 질투하고 헐뜯고 무서워 하는 자들이 있다는건
그만큼 그의 위력을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지지자들이 훨씬 많고 일부 머리가 경직된 소수인간만 그를 뒤에서 욕하고 있을뿐이다.
김선생의 다음 멋진 글 기대하면서 이렇게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