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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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대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주대가 김문학 대담]
2016년 11월 12일 01시 14분  조회:3065  추천:63  작성자: 김문학
〔문화대담〕
왜 당대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주대가 + 김문학
 

 
O. 들어가면서
 
   내가 근년래 대학강의로 상해의 문턱을 자주 드나들면서 주대가교수와 나는 어느사이 호형호제의 벗으로 돼버렸다.
  주대가는 누구인가? 당연히 주대가 (酒大家)가 아니다.  朱大可란 이름의 이사람은 당대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봉적 문화비평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재 중국 문화계에는 “남주북하( 南朱北何)”라는 정평이 있를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남중국에는 주대가이고, 북중국에는 하삼파( 何三坡)를 가리키는데, 북경의 작가, 비평가 하삼파는 중국의 문학, 문화는 아직도 파워가 있다고 하면서 부정적 의견을 갖는 주대가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주대가는 1957년 상해 태생, 원적은 복건성의 객가(客家)이며 화동사범대학 중문계를 졸업하고 오스트랄리아 시드니 과기대학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동제대학(同济大学) 문화비평연구소 교수로 있다.
    문학평론가, 문화학자, 문화비평가와 수필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바, 80년대에 이미 중국문화계의 선봉으로서 지대한 문명을 날렸다.
    당시 중국 영화문학의 모델을 비판한 글로서 전 중국을 진감하였으며 해내외에서의 명성은 당시 중국사상계의 수령인 이택후(李泽厚)와 비견했다.
    평론가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젊은 패기에 넘친 주대가는 “광기의 청년”으로서 대규모의 학술세미나에서도 다른 학자, 지식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멋대로 발언을 마치고는 당장에서 퇴장하기도 했다.
    1994년 전성기의 주씨는 홀연 오스트랄리아로 유학길에 오르고 방문학자, 중문미디어에 종사하기도 하다가 8년후에 다시금 귀국, “주대가의 복귀”가 그때 중국의 문화사건으로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대가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문학립스틱을 바르고 문단에서 놀다》,《상해- 정욕이 절교한다》2편의 글로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뒤 《유망의 성연》(流氓的盛宴)으로 비평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면서 문화계의 주대가 열조(朱大可热)를 일으킨다.
    주대가는 이런 휘황한 경력의 주인공이다.
    주씨의 최대의 매력은 그 예리하고 시리어스한 언어에 있다고 한다.
 “그의 언어는 번개불에 낙전당한 전률같은 ‘통괘함’으로 인해 독자를 박장절교하게끔 만든다. 주대가는 언어연구의 프로이며 언어조종의 고수인바, 비평가인 동시에 더우기는 작가이다. 그의 비평은 작가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글쓰기는 비평가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한다.” (张守涛)
    그의 독특한 이성과 감성이 믹스된 언어를 “주씨언어”라고 일컫는다. 그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냉철하고 예리에 찬 “독설(酷语)” 언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내가 처음으로 주대가를 만난것은 2년전 원단이 지난 후 쌀쌀한 날의 상해의 어느 멋있는 커피숍에서였다. 동글한 얼굴에 예지를 뿌리는 큰 눈동자가 인상적이였다. 키는 나와 비슷하여 왜소했지만, 패기가 있었으며 상상했던 그런 도고함은 없이 겸허함을 내비쳤다. 아무튼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무서운 흉신악살로 생각하는데, 기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려 3시간이나 대담을 나누었다.
    주대가는 나를 그때부터 “김형”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같은 직업, 같은 문화비평가, 작가로서 비평의 독설언어, 시리어스한 비판정신, 세계관 등이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아끼게 되었다.
    내가 금년(2016년)여름 새 핸드폰을 쓰고 위챗을 겨우 배우게 되자 그는 “김형도 이제는 시대흐름에 맞추게 됐군!”하면서  매우 흐뭇해했다.
 상해에 오면 우리는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환담하군 했다. “김형, X일 저녁에 유명 문화인들이 모이는 연회가 있는데 나오라고” 하는 위챗이 오면 나는 시간 맞춰 나간다. TV에서도 보는 감독, 작가,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즐거운 미식과 환담…
 
  주대가 교수는 중국 문화, 사회에 유니크한 견지(见地)를 지니고 우려를 자아내는 지식인이다. 그는 중국의 교육, 문화, 미래에 대하여 “노신”에 유사한 비관적 내지 비판적인 태도를 노정하고 있다.
    노신의 “후계자”로 자임하는 주교수는 중국문학과 문화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성찰의식을 보이며 관망,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
    수차례 대담을 아래 정리해 본다.

 
1. “문화공룡”이 오다
 
 김: 중국 문화비평의 선봉이며 기수인 주교수님을 이렇게 만나서 중국문학과 문화에 관한 많은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50대–60대의 중국인에게 있어서 1980년대의 중국을 그리워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특히 지식인에게 있어서 80년대는 자유롭고도 활기에 찬 “황금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중국문학만 보더라도 “현대파”와 “신사조”라는 낱말로 규정된 일종의 선봉성적인 선구적인 탐구가 바야흐로 왕성히 전개 되었고 사상계, 학술계도 전례없는 활성기를 맞게 되지요.
     가평요, 막언, 마원, 홍봉, 소동, 여화…등 선봉대군들이 90년대 2000년대초기의 후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에 맞추어 문학비평을 위시로 문화비평계에서도 선봉파들의 맹활약을 벌이는데, 당시의 유효파나 주선생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주선생을 작고한 비평가 胡河清이 “문화공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요!
 
주:  그때 지나간 사정을 잘 아시고 있네요. 80년대는 김선생 말마따나 지식계의 “황금시대”, 자유의 활약시기였습니다. 1983년 화동사대 중문계를 나온 나는 상해의 어느 대학에서 대학국문을 가르쳤는데 거이 글쓰기를 못했다가 1985년 하문대학에서 개최된 전국문예비평신방법심포지엄에 나간것이 내 “미래를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난 전혀 무명청년지식인이었는데 당시 모임에 전국에서 쟁쟁한 지식인들이 모였으니 내게 자극이 컸어요. 돌아와서 그길로 청년시대와 도시의 꿈에 관한 글을 써서 다음해 가장 전위적인 잡지《当代文艺思潮》에 발표했어요. 물론 치졸하고 살기에 찬 이 글은 운 좋게 그해 문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지요.
 
김: 1986년에 《谢晋电影模式的缺陷》이란 논평이 발표했지요? 나도 그 글을 읽었는데 정말 파격적인 우상파괴 였지요. 해내외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유효파의 《신시기 문화의 위기》도 그해 큰 충격을 몰고 오게 되지요.
     어떻게 권위를 무시하고 우상을 파괴하는 비평을 하게 되었는지요?
 
2. 연경기성(年轻气盛) 의 광기
 
주:  80년대는 서양문명사조의 절대적 영향도 있었기 때문인지 전통, 특히는 고루한 전통문화 전통양식에 대한 반항정신이 유행했잖아요.
     나 자신은 외독자인데다가 정신적으로 극도로 자유와 독립을 갈망했고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놀았기 때문에 사고를 즐기고 일단 자신이 생각했다면 자기 주장대로 하는 타입이었지요.
 
김: 일련의 글을 육속 발표하여 선생님은 중국비평계의 선봉적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문명을 날리면서 주선생은 “소년광기”의 도고한 인물이란 품평을 받기도 했습니다.(웃음)
 
주: 네. 그때 난 연경기성이라 광기가 충천했어요(웃음). 심지어 나는 당시 전국이나 지방의 규모가 큰 학술회의에서도 모든 회의 참가자들을 경시하고 자기멋대로 발언을 해버리고는 훌쩍 회의석상을 떠버리는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건 딴 사람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말이예요.
 
김: 알만합니다. 소년득명하고 명성이 자자하시니 원래 소년의 광기란게 있잖습니까.
     그럼 소년시기 유년시기는 어떤 애였습니까?
 
3. 유년시기 이미 문학의 길을 닦다
 
주:  (웃음) 소학 중학시기 성적표의 맨 뒤에는 언제나 한결같이 판에 박은 선생님의 평어가 꼬리처럼 따랐어요.
     내가 “교오자만”하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부터 남다른 오기가 있었지만 늘 흉중에 깊이 숨기고 다녔다고 할수 있지요.
 
김: 기실 저도 같은 경험을 늘 해왔습니다. 성적은 전반에서 최고이지만 어딘가 오만하고 오기가 있었으니 담임선생님이 그걸 조심하라는 평어를 써주셨습니다.
     주선생도 조숙한 소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렸을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습니까?
 
주: 아, 내가 17살 나던해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나는 하루아침 “성숙”되어버렸어요. 아버지는 민주당파 인사였는데 문화혁명시기 홍위병이나 직장에서 투쟁을 받고 숱한 고생에 시달리다가 병상에서 돌아갔습니다. 임종하실적에 곁에는 나와 우리 어머님뿐이었지요. 누구나 우리 집을 멀리 했고 그때 인심은 사막같이 삭막했으니까요.
 
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주: 매우 인자하시고 관용성있는 성품이었지요. 어머니는 학교 음악교원을 하다가 어문 교원을 했는데 아주 엄한 성격이고 잘 웃지도 않는 여성이어서 난 한번도 어머니 앞에서 감히 응석부리질 못했다니까요. 어머니가 교편 잡은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는 늘 다른 학생과 같이 나를 엄격히 대했습니다.
     내가 지금도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것은 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기때문이고. 아버지는 역사교원이었는데 그 영향에 역사를 나는 무지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내가 늘 기대했던것보다 잘 했던 까닭이지요.
 
김: 굉장한 독서가였겠네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구만요!
 
주: 네. 소학교를 졸업하기도전에 중국 4대명작을 다 읽어버렸어요. 내가 12살, 13살쯤에 부모님이 교편을 잡은 두 학교의 도서관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 독서를 했고 중학교에 들어서서는 서양고전문학을 일일히 열독을 했답니다.
 
4. 조국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기 
 
김: 아, 유년, 소년시기 이미 탄탄한 문학의 길을 닦아놓으셨습니다. 해외 유학, 학위 공부등 인생경력에서 나와 주선생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데요. 나의 경우 사실 해외 유학생활, 정착생활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고양식, 가치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론, 글쓰기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주선생은 오스트랄리아란 영어권 나라에서 유학, 학위공부를 하면서 해외생활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주: 사실 나의 유학생활은 김선생처럼 풍후한 장학금을 받으며 윤택하진 못했습니다.
     오스트랄리아에서 난 한 신문사 주필을 하다가 또 실업의 고배도 마시고 그 다음엔 별 일을 다 해봤어요. 건축공사장에서 석고판을 다지기도, 소제공을 해보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광고회사, 상장회사에서 인터넷사이트의 책임자로도 있어 봤고 가장 길게 해 본것이 4년동안 한 신문사 총편집을 맡은겁니다. 그뒤로 시드니이공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귀국했지요.
     나는 유학, 외국생활은 내 인생에서 매우 멋있는 둘도 없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을 떠나 해외에서 조국을 객관화시켜 관망하는 기회와 시각이 생겼으니까요.
     이런 방법, 시각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포괄하여 태어나서 자란 조국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안목은 나의 비평을 전례없는 차원으로 향상시킬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 오스트랄리아 재주시 주선생이 창설한 “문화선봉”이란 사이트가 중국지식계와 해외 중국인 지식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주: 그렇지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외에서 중국을 관찰, 반성하는 시각에서 글들이 많이 나갔으니까 의미가 컸습니다.
     1999년 오스트랄리아에서 쓴 문학비평논집 《聒噪的时代》를 출간하자, 국내 문학계에서는 주대가가 “부활”했다고 야단이었지요. 그리고 2001년 귀국해버렸습니다. 중국문학문화비평은 아직도 중국본토에서 해야하고, 내가 모어로 창작을 하니 아무래도 중국이 아니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오랫동안 영어권에서 살다보니 스트레스도 받고 하여 귀국했지요.
 
5. 문화비평의 신경계
 
김: 주선생의 중국문화계에 남긴 업적은 아무래도 문학, 문화비평의 신경계를 개척했다는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귀국후 평론가, 네티즌의 말에 따르면 “주대가의 귀국”은 그 자체가 문화사건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문단에 큰 선풍을 몰고올것이라 분분히 예측했답니다. 예측은 적중되고, 대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주선생은 여러편의 글과 역작인 《流氓的盛宴》 《话语的闪电》 《21世纪中国文化地图》《记忆的红皮书》등 육속 출판하였습니다.
    《流氓的盛宴》 한권으로 이미 새로운 문화비평의 경지를 열었고 전국적으로 “주대가붐”을 일으켰지요. 뭐니뭐니해도 주대가의 최대 매력은 그 언어의 예리함과 사색의 섬세함에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나도 그때 일본에서 주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시리어스한 언어, 래디컬한 비판문체에 심히 공감을 했어요.
 
주: 평론가들은 뭐 내 언어를 두고 “주씨언어(朱氏话语)”라고 격찬을 합니다. 번개치는 격렬함과 통쾌함, 감성과 이성이 조합된 정채로운 비유와 은유, 그리고 신조어들이 멋있다고 야단이었어요.
 
김: 밀란쿤데라가 말했다싶이, 언어의 은유는 그 나라민족의 문화언어환경속에서 시적인 예지의 서술적책략입니다. 주선생은 언어를 조종하는 마술사적인 능숙함으로 독자를 어느덧 그 속으로 빨려들이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어 어문의 언어를 통쾌림리 그 자체이지요.
     혹시 언어의 특별한 수련을 하셨거나 롤랑 바르트 언어레트릭을 배우신건 아닌가요?(웃음)
 
주: 내가 언어에 민감하고 어렸을때부터 독서, 작문을 통해서 언어에 신경을 쓰고 의도적으로 어떻게 매력적인 언어구사를 할것인가에 부심을 했어요. 제가 생각컨대 진정하게 위대한 선지자는 종래로 계몽,계시자로서 그들은 언제나 언어를 통하여 견정하게 진솔한 정보와 진실의 사실을 전달하며, 또한 이런 도경의 방법을 개변하기도 합니다.
 
6. 독설문화는 어떻게 생겼나?
 
김: 저 역시 문명비평가로서 의도적으로 글쓰기에서 언어 표현양식, 문체를 여러가지의 레토릭, 시리어스한 언어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독자를 공감시키는 시도를 해왔고, 또 그게 저의 문체특징으로도 됐어요. 비평가들은 “독설문체”를 창립했다고 하는데, 저는 주선생의 문체특징에서 중국비평계에 대한 큰 공헌의 하나가 酷语(혹어)라 칭해지는 독설(毒舌)문화의 정착이라고 생각됩니다.
 
주: 맞어요.나는 문자미궁을 의식적으로 고심경영하면서 혹어, 색어라고 칭해지는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주씨언어”라는것은 우선 준확한 판단과 영양가로 비평의 파워를 현시하고 그 다음으로 은유를 조합함으로써 예리하고 기발하며 풍부한 사상을 체현하는것이며, 문화나 시대에 대한 민첩하고도 심각한 성찰을 하는데 있습니다.
 
김: 어느 비평가가 평하기를 “주대가의 비평과의 조우는 번개에 맞은 감각이다. 간단한 문자가 고장(股掌)지중에서 기묘한 조합을 이룬다.”
    그리고 저명한 비평가 호하청(胡河清)은 “주대가는 미래 중국문학사의 한분의 대사급 인물이다”고 하면서 “그의 목소리, 정신경계는 대사급 경계의 표징이다"고 격상했습니다.
 
주: (웃음) 호하청씨는 생전에 친한 문우이기도 했는데, 친구로서 좀 과찬이지요. 그리고 칭찬과 동시에 나는 많은 평사와 네티즌의 격렬한 부정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김: 그러나 주선생의 “주씨언어”나 그에 의해 줄줄이 이어지는 사상의 함양과 비평의 매력은 그 누구도 부정할순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난에 반격을 안 하시나요?
 
주: 반격도 자기변언도 안해요! 관점이 같지 않은 자가 서로 쟁론을 해봤자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는것도 아니고 최종 누가 누구를 설복하지 못하고 구설만 낭비하고 말거든요.
     차라리 자기자신의 창조적 활동에 몰두하는편이 퍽 낫습니다.(웃음)
 
7. 중국문단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인가?
 
김: 동감입니다! 저 역시 비난자들에 대해 일체 무시합니다. 왜냐면 욕말에 쓸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때문이지요. 화제를 바꾸자면, 중국문화, 문단에 관한 얘긴데 저는 세계적 시야로 보아 1990년대에 들어서서 문학이 점차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근년래 인터넷, 핸드폰이 전통적 문학읽기방식을 붕괴시키고 있으므로 “문학의 빈곤시대”라고 칭하고 싶어요. 이 점에 대해 선생님의 탁견을 듣고자 합니다.
 
주: 맞는 말씀이예요! 중국문화사를 회고해 보면 쉽게 발견되는데, 문화와 과학기술은 상반대로서 문화는 진화가 아닌 퇴화의 일도를 걷고 있어요. 중국문학의 고봉기는 선전(先秦)시기에 존재했고 그 뒤로는 당송, 근대,현당대문학은 우리에게 문학퇴화의 궤적을 전시해주고 있습니다.
     보세요. 중국에서 발생한 문화영역의 3차 “어문혁명” 즉 한자혁명(간체자), 한자서사방식혁명(가로쓰기), 그리고 어음혁명(보통말)은 중국문명의 현대성을 정립시키지 못했고 되려 역사전통, 고전문화, 지역문화와 약소 소수민족문화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김: 그럼 당대문학에 이르러서는 어찌 되였습니까?
 
주:  70후, 80후, 90후 내지 2000후 이런 세대간 단층법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건 저급적인 구분이고 젊은 문학일수록 더 좋아질거라는 우리의 환상을 조장시킬뿐입니다.
     문학의 퇴화에 따른 도서 출판인과 매니저들의 도에 넘친 판매책이나 미디어의 그 많은 저질 문학상품에 대한 과대포장선전이 문단의 쓰레기화 효과를 자초해버렸지요.
     21세기 현재 중국문화의 최대의 문제입니다. 출판상인들의 졸렬한 판매수법과 뇌물을 먹은 비평가들의 억지 예찬은 립스틱처럼 금방 나온 출판물에 마구 발라놓아서 책에서는 모조품의 싸구려광택이 나지요.
     이건 훼멸성적인 상업”炒作”이고 기실 작가를 죽이고 작품을 죽이고 말아요. 그러니 중국문단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핀잔을 들어도 할말이 없습니다.(웃음)
 
8. 문학의 쇠퇴와 첩화(蝶化)
 
김: 사실 문학의 위축과 자아폐쇄, 사망에 관한 화두는 전세계적범위에서 전개된지 오라지요. 노벨문학상 자체도 “2류화”로 다운되는 운명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 자체가 근원은 바로 문학자체의 글로벌적인 쇠퇴와 다운에 있다고 보고 싶어요.
 
주: 그렇습니다. 제가 보건대 중국문화에 대해서 말하면 그 자기폐쇄와 쇠퇴는 3가지 측면에서 원인을 캘수 있어요.
1. 20세기 80년대이래 활약한 현역작가들이 대부분 쇠퇴의 주기에 들어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대작가가 아직 성숙되지 못함으로서 세대 단층이 생긴겁니다.
2. 중상주의(重商主义)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학에서도 시장점유률이 작가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주요기준으로 되었는바, 이런 보편적 금전 지상주의가 문학의 영혼과 창조력을 부식시켰고 따라서 전 문단의 쓰레기를 양산시키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3. 영화.TV, 넷트웍, 게임등의 발전흥기로 인해 전통문화의 생장공간을 압축시켰고 진짜 재질있는 작가와 가치성있는 작품이 공중의 인정을 받을수 없게 만들어 결국 문학은 쇠패의 심연으로 밀어넣었지요.
 
김: 탁론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또 한가지는 문학을 에워싼 대환경 보다도 문학자체의 변화, 변질에도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주: 맞어요. 종이 인쇄에 의한 전통적 열독방법으로서의 문학이 수천년 흥성기를 누리다가 21세기에 꼭 기필코 쇠퇴하기로 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매스컴시대 그것을 꼭 무너뜨려야 할 상대이니까요. 신매스컴이 우선 문학의 독자를 분쇄시키고 그들을 문학에서 따돌렸기때문에 이로써 작가들의 신념을 붕괴시키고 문학을 일종의 무시당하는 “페기물”로 전략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재 바야흐로 나비처럼 탈변하여 옛날 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매체를 이용하여 영화,TV, 게임, 단신, 위챗등 여러 쟝르로 탈바꿈하여 문화현장에 되돌아 옵니다.
     “첩화”된 문학을 화려한 “신물종”으로 변신했음에도 우리는 계속 그 고루한 껍떼기를 붙잡고 그의 사망을 슬퍼하여 울고 있습니다.(웃음)
 
9. 왜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김:  중국은 현재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자신감도 획득했고 “문화번영”을 국책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데 문화비평가로서 주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  역사적으로 볼때, 문학을 포괄한 중국의 유교문화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과시했고 아무리 강대했다해도 세계의 공간적으로 보면 매우 제한되여 있었습니다.
     중국이 문화에서 미국문화의 독점상태를 격파하고 세계적범위안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는 문화대국이 되자면 아직 머나먼 길을 걸어야 됩니다.
 
김: 세계를 지배할수 있는만큼의 이념체계, 지식체계, 가치체계를 정립하고 “유연한 파워”가 구비되는게 급선무겠지요.
 
주: 그래요. 우선 “유연한 파워”의 문화실력이 구비되는데, 유연한 실력이 세계적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러자면 4가지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봐요.
1. 유력한 독립, 자유, 비판적인 인문정신
2. 독특하고 탁월한 원창(原创), 창신, 창의의 특징
3. 인류의 공통적 가치를 추구하여 협애한 민족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4. 지역과 민족의 역사문화전통을 전승하고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 개방적.
 
김: 그렇다면 중국문화번영이 어려운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  그 이유는 금방 말한 4가지 기준에 부합되기는 커녕 오히려 상반되는 방향으로 중국이 가고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 상황을 보면, 첫째로는 견유(犬儒)주의, 노예근성에 지배되여 있고 둘째로는 산채(山寨)주의에 지배된 나머지 창조의 에너지와 생태가 상실되고 있지요. 셋째로는 종족주의, 협애한 민족주의의 포로로 되고있으며 네번째는 공리적 물질주의와 위국학 (伪国学)에 엄밀히 포위되어 자아초월과 상상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문화상태하에서 이런 병폐들이 치유되지 않으면 중국문화의 자아번영은 영원히 백주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10. 대사(大师)조작의 대약진운동
 
김:  “문화번영”화두와 연결된 화제인데요. 근년 중국에 자주 오면서 볼라니까 중국은 “문화번영”의 기상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 특히 문화영역에서 “대사”를 만드는 대약진운동 비슷한 이벤트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실지로 나는 자칭 “××대사”라고 명함에 버젓이 찍어서 자기선전을 하는 화가, 서예가도 심심잖게 보고 웃었어요.
 
주: (웃음) 잘 보아냈네요. 요즘 중국은 “문화대사”계보를 만드는데 열중하고 무슨 “영웅”이요 “종사”(宗师)요,  “태두”요 “거장”이요 하면서 화려한 단어를 늘어놓으면서 국민의 자신감을 돋구어 주자고 합니다.
     대륙에서 “대사”를 자주적으로 만드는데는 3가지 비결이 있어요.
1. 우선 그 “대사”는 초인간적인 재질이 있어야 하는데 비범한 기억력이 그것이지요. 이면에서는 전인각(陈寅恪) 과 전종서(钱钟书)의 사적을 과대포장한것 보면 이내 알수 있습니다.
2. 그리고 “대사”의 신체적 조건으로서 장수, 천수가 “대사”의 절대 조건이에요. 보세요. “문학대사” 冰心, 巴金, 钟敬文, “국화대사” 刘海粟 黄永玉 등도 90세이상이고 백세 넘은 사람들이지요.
3. 묘당(庙堂)과 강호(江湖)사이에서 독무를 출줄 알고 구레나룻이나 수염을 날리며 적절한 시기에 눈물을 흘리며 대중들에게 권장을 하는 테크닉이 있어야 하지요. 이른바, 눈물대사(含泪大师)이지요.
사실 중국 “대사”는 신체적 서사(叙事)의 금메달 달아주기 운동, 이벤트로서 그건 각 지역마다 “이미지공정”이고 민간에서는 일종의 엄중한 “문화조급증”을 의미합니다.
 
김: (웃음) 정채로운 비유와 독설이군요!
 
주: 기실 “대사만들기”는 문화위기에 대한 우려심을 완화시키고 의도적으로 “문화번영”의 가상을 인공적으로 제작하는겁니다.
      솔직히 말하여 20세기 하반기이래 중국의 토양에서는 한그루의 “대사”라 칭할수 있는 식물이 생장하지 못했잖습니까?!
     “위조대사” 역시 새빨간 문화립스틱을 창백한 입술에 발라서 이 인문정신이 결여한 빈곤의 문화시대를 분식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지요.
 
11. 원한이여, 안녕
 
김: 주선생은 노신의 “원한정치학”에 대하여 최초로 제기한 비평가의 한사람입니다. 2001년에 발표한 《殖民地鲁迅和仇恨政治学的崛起》라는 등 글을 통하여 노신의 연애와 결혼에서 나타난 인격적 결함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노신비판”의 선봉의 한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작 《流氓的盛宴》에서 “仇恨政治学”(원한 정치학)이란 신개념을 제출하고 증오에 찬 노신의 언어와 모택동의 언어가 방법론적으로 결합하여 중국의 “원한정치학”을 결성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지적으로서 현실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주:  중학시대 문혁후기에 나는 《노신전집》을 통독했으며 노신의 언어체계에서 자랐으니 모종의 의미에서 나는 “노신의 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웃음) 나는 1994~1999년에 오스트랄리아의 생활에서 내 심성이 인류화로 나아갔고 해외에서 이성으로 민족정신과 민족성격을 반성하는 계기를 가졌어요.
 
김:  이해가 갑니다. 해외에서 중국의 내실을 객관화시켜 정찰하는 찬스를 
 
주:  노신을 반성하는것은 신문화운동의 전체적 반성의 일환이기도 하며 초창기 노신과 만년의 상해시기의 노신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완전히 동감입니다.
 
주:  북경시대의 노신은 중국 현대 가장 탁월한 작가이지만 상해시기에는 변모합니다. 만년에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원한, 증오만 남았어요. 그의 만년의 “원한정치학”은 또 역사폭력언어의 원천이 됩니다. 이게 노신의 비극이고 시대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상해시기 노신은 거이 한다하는 유명 문인, 지식인은 다 골고루 욕하고 인신공격을 하는데 노신의 욕을 먹은 지식인은 해방후기에도 계속 수난을 당합니다.
     노신의 그런 인신공격의 방식은 20세기 하반의 폭력언어에 격진적인 모델과 도덕적 합리성을 제공하게 되지요.
 
김: 맞아요. 노신이 만년에 상해시기 거의 소설, 문학창작은 손떼고 잡문이라는 인신공격으로 타자를 공격하는데 정력을 기울입니다. 제가 노신 연구를 하면서 보니, 노신은 잡문으로 당시 유명인을 욕하면 발표가 쉽고 원고료가 금방 들어오니 생계의 수단으로 그런 잡문을 대량적으로 집필 발표했다고 봅니다. 그도 인간이고 처자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니까요. 이 점은 연구자들은 홀시하고 있습니다.
 
주:  그렇지요. 상해시기 노골적인 증오, 원한이 노신의 뇌리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일부분은 공공적 요소, 내지 “민중을 위한 증오”였고 대부분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습니다. 문혁시기 노신식의 원한이 중국언어의 중요한 무기로 이용당하게 되는데 노신을 반성하는건 우리 자신의 반성이며 우리가 그런 유치하고 노골적인 인신공격의 증오학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신의 유산을 계승한다면 그런 원한학은 버리고 그의 독립, 자유적 비판정신을 따라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2. 일체문명은 개방속에서 성장한다.
 
김:  2014년 6월 출간한 선생의 상하권 대작 《华夏上古神系》를 잘 배독했습니다. 이 저작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 문화비평의 유연한 산문성격과 달리 학술성이 지극이 농후한 바, 중국신화에 대한 인류학, 고고학, 사회학, 비평학, 심리학등 여러 영역의 고찰이 돋보입니다.
     주선생의 학문, 비평의 큰 전환이라고 봐도 괜찮습니까?
 
주:  그렇다고 얘기해도 무방하겠지요. 2000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의 쇠퇴이고 시장의 개방으로 대중의 문화적 소비가 커지고 나도 대중문화 비평으로 전향했지요. 그래서 문화비평을 하다보니까 전지구의 상고신화를 발견하고 전세계의 신의 이름이 다 똑같다는 발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미엘문명, 인도문명, 이란문명 또는 중국문명 그리고 머나먼 마야문명, 정도는 부동하지만 동일문명이 파열하여 그 파편속에서 생성 발전된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  주선생은 이 장편대작을 통하여 중국신화의 생성발전은 물론 중국 역사중의 “허위제작”문화를 까발리기도 하고, 국학이 중국의 보수, 독자성을 증명하려는 자폐성이라 지적하기도 하면서 일체 문명은 장폐쇄속에서 자라나고 발전하는게 아니라 연결속에서, 관계망속에서 개방속에서 이어진다는 도리를 알기 쉽게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으면서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선생이 일본어를 알고 계셨다면 이 저작이 더 풍부한 용량의 대작이 됐을거라는 아쉬움입니다. 
     왜냐하면 상고신화에 대한 일본학계의 연구는 방대하고 치밀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의 연구업적을 참고하면 이 책이 많이 보완되고 완벽성에 가까워 질것입니다.
 
주:  아, 그렇습니까? 일본어를 모르니까 이면에서는 큰 손해네요. 그럼 앞으로 김교수의 자료, 문헌적 지원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상고신화에 대한 투철한 이해없이 선진(先秦)철학에 대한 진상을 알길없으며 따라서 중국문화의 정신적 본원을 탐명하는데 지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21세기신문화운동”에 그리고 중국문화의 미래적 부활에 일조가 되리라는 염원에서 이 저작을 써냈습니다.
 
김:  좋습니다. 금후의 학술이나 비평에서의 구상을 얘기해주시겠습니까?
 
주:  요즘은 인터넷시대, 스마트폰 시대라 나는 여기를 무대로 계속 대중을 위한 학술, 문화비평가로서 현역에 있고 싶어요. 물론 젏은 시절의 격렬한 문체보다도 좀 부드러운 문체로 글을 쓸 생각이고 양보다는 질을 따지면서 쓸 예정입니다. 글쓰는 내가 글을 안 쓰면 내가 아니니까요!
 

 
대담자 소개
 
주대가 (朱大可)
당대 중국 가장 영향력있는 문화비평가, 문화학자의 한 사람.
1957년 상해에서 출생
1983년 화동사범대학 중문계 졸업
2004년 시드니과기대학 철학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제대학 문화비평연구중심 교수
 
문화학자, 비평가 및 수필작가로서 그는 20세기 80년대 문화비평의 선봉, 기수로 전위문화의 중요한 수호자로 나섰다.
근년에는 중국문화연구와 비평에 종사하며 문화철학, 상고신화, 당대  대중문화등 영역에서 활약하며 사상과 문체는 독자적으로 일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문화연구와 비평에 지대한 영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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