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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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4. 조선족은 “행복”했는가 (김문학) 댓글:  조회:4266  추천:29  2010-08-17
《신조선족》월경론24. 조선족은 “행복”했는가 김문학  우리 조선족 지식인,학자들의 “조선족論”에 조선족의 사회, 공간의 “해체위기”의 언설은 수없이도 등장한다. “조선족들이 이미 정든 고향을 떠나 국내나 해외로 나갔다는 결론”을 일괄 하면서 거기에 절락된것은 그럼 왜 조선족이 고향을 떠나게끔 했는가? 그 본질적 근원과 배경을 추구하는것이다.그 본질적 근원이란 “조선족 대중들이 조선족고향 (집단 공간)에서 행복했는가?”하는 중대한 사실이다. 솔직히 직언하면 연변과 같은 조선족사회가 조선족의 다수 (대중)을 진짜 “행복”하게 했는가? 고향을 굳이 떠나면서도 “행복”을 추구한 조선족 대중의 욕구 (물질적 정신적)를 만족시켜줄만큼 사회가 그것들을 제공했는가?이같은 본질적인 생존문제가 대중들에게는 “민족”이란 개념의식보다 더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다.기득권층으로서의 지식인과 우리의 다수의 대중 사이에는 이런 심각한 갭이 위기 의식만큼이나 크게 존재한다.필자의 관심사의 하나가 역시 이 “조선족은 ‘행복’했는가?”하는 문제다. 이것은 조선족의 “월경”이 전개되는 20세기말 시점에서 당시 필자가 안고 있던 번뇌문제군의 하나이기도 했다. 20세기가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라고 질문해도 진보, 발전이란 개념은 적용시킬수 있어도 “행복”이란 허들 앞에서는 엉거주춤 할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 한다.왜냐면 전인류 하는 거시적 시점이 아닌, 인간의 매개인이란 미시적, 충감적으로 바라본 개개인은 다 평등하게 균질한 “행복”을 이룬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우리 조선족의 다수는 이제껏 뿌리 박고 삶을 영위 해온 중국이란 사회와 “행복”을 밀접히 연관 되있는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럼 우선 중국은 어떤 상황이었나?필자는 이 “중국”이란 자체가 꼭 대중들을 “행복의 낙원”으로 이끌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이 추구해온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 건설이 개혁개방을 통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나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빨간”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도입되고 경제가 활성화되었다.지금까지 10% 성장률을 계속하여 보전하는 경제성장은 세계의 독보적 위상을 유지하며 중국 사회주의 발전의 대국적 표상을 선명하게 과시하고 있는것에 대해 필자는 경희를 느끼며 조선족들도 그 혜택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받게 된것을 행운으로 생각 된다.그러나 경제의 활성화에 따라 생산력 향상과 함께 부유가 일부분 관료와 기득권 세계에 집중되면서 “빈부의 차이”가 천양지별의 양상을 노정시켰다. 외국의 중국관찰가들은 “유럽과 아프리카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라고 중국의 현실을 풍자하기도 한다.일본의 중국연구가 키다무라 미노루교수는 “빈부차이”,”탕관오리”,”부패의 만연” 등 키워드를 구사하여 “중국이 성급하게 사회주의 이데올리기를 도입하여 그것을 잘 저장하지도 않은채 사회에 적응한 결과 전통의 변혁도 이루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사회주의의 실현도 이루지 못하는 소화불량상태가 발생했다”고 회의한다. 그 의도는 자명하다. 중국은 인민대중을 평등한 행복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것이다.이 중국속의 작은 변경인 마이너리더로서의 조선족은 “행복”했던가 하면 필자는 역시 회의적이다. 정도 차이나 현실적인 차이는 있어도 여전히 중국사회의 그 상태가 조선족 사회에 그대로 존재한다.그런데 다수의 중국 한족들이 생각은 있어도 실행하기 어려운 월경, 특히 해외로 (한국 등 나라)  진출하는 월경은 행운스럽게도 조선족에게 주어진 호조건이었다.조선족사회 공간에서 찾지 못한 행복 (물질적 부와 정신적 개방성)을 찾아 조선족들을 그야말로 풀을 찾는 양떼와 같이 고향을 떠나 해외로 모험의 길을 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조선족에게 핏줄기인 동시에 젖줄기였다. 부와 정신적 가치의 풍요한 乳源이었다.필자는 “조선족 개조론”에서도 “한국이 있기에”란 소제목을 달고 언급했었다. 아무튼 국내 연해도시 내륙으로 또는 해외로의 진출은 조선족사회에서  부여받을수 없는 행복을 찾아 떠난 모험의 월경이었다.
22    23. 잡식성, 양떼같은 신조선족 (김문학) 댓글:  조회:4560  추천:34  2010-08-10
《신조선족》월경론 23. 잡식성,풀을 찾아 모험하는 양떼같은 신조선족   김문학 필자가 조선어를 “잡초성”으로 지침한 이유는 사실 다른 의도가 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언어구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문화구조, 국민성에 대해서 사색하고자 하는것이다. 또 그것을 통해 신조선족의 역량을 가늠하는 의도에서였다. 우리 언어의 “잡초성”은 모든 文化의 요소를 다 수용할수 있는 그런 왕성한 호기심에 의한 모험심리가 투영(投影)되어있는것이다.  “잡초성”을 또 한면 동물로 비유하면 “雜食性”으로 표현을 바꿀수도 있는데 아무거나 다 먹는 왕성한 식욕, 이문화, 이질세계로 풀을 찾아나아가는 양떼와 같이 우리 조선족, 신조선족의 모험진취적인 월경활동이 반영되고 있다. 조선어의 잡초성, 잡식성, 또는 잡종성 이같은 구조는 “신조선족”에게 가장 적용되는 문화적 모험진취심을 바탕으로 한 개방심리이리라. 세상에 100%로 순수한 언어가 없듯이 100%로 고유한 문화, 민족이란 존재할수 없다. 일본문화를 그 언어에서도 볼수 있는 바와 같이 (한자, 가다카나, 히라카나 등)언어구조가 복합하듯 문화도 잡종성을 이룬다. 그들은 이런 잡종성으로 세계에서 자신들이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것이다. 필자가 우리 조선족의 언어구조의 잡종성은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고 평가하는것은 신조선족에 의해 문화구조를 월경으로 활용시켜 “모험의 시대”, 즉 획기적인 신조선족 시대를 개척했기때문이다. 구조주의를 사상사적으로 개척한 세계적인 언어학자 Saussure(소셀)은 인류에게 있어서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명칭)을 붙인것이 아니라 이름이 생긴것으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속에 존재하게 됐다”고 갈파했다. 언어가 이렇게 관념을 낳는, 한 민족의 사상- 즉 사고방식, 세계인식방법을 농후하게 포함하고 있는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외국어를 모국어 어휘에 수용, 차용하는것은 관념을 낳는 민족의 사상을” 섭취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조선족의 조선어에는 다양한 어휘, 단어가 수용, 차용되는것은 언어의 “순결화” 운운하는 눈물겨운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부작용적인 마이너스로 보이지만 필자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넚은 세계의 공간으로 진입하면서 풀 따라 이동하는 양떼와 같이 살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00년전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우리에게 울려주는 경종같이 좋은 사례가 있다.  “서양의 충격”에 의해 근대화에 대응한 한중일 동양3국의 방법은 그대로 언어에서 반영되었다. 복합적 언어의 우등생인 일본인이 서양의 근대화 개념,이를테면 “민족, 국가, 관념, 이성, 현상, 철학, 주관, 객관, 과학… ”등 수천개의 단어를 한자어로 (신조어)로 만들어 그속에 내포된 근대사상을 솔선 터득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중국은 청말에 그같은 실천이 불가능했다. 한자만 사용한 이들은 기존 한자세계에 없는 개념, 술어를 신조어로 만들어 추가하는것은 자신의 언어로 기술할수 없는 의미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것을 시인하는 “굴복”으로 간주했던것이다. 그래서 늘 외래어를 음역하지만 또 한자가 내포한 뜻이 있기에 그 진의를 이해하기에는 힘겨운 일이었다. 조선의 태도 역시 대륙과 유사한데가 있었던것 역시 우리 100년사의 가장 큰 통절 (痛切)한 아쉬움이다. 결국 늦게나마 일본유학을 통해 청나라나 조선은 일본의 신조선어를 역수입해 일부의 여파를 거친 서양수용을 이룩한다. 현재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의 조선어는 한자만 사용하면 일본어 이상의 복합적 체계의 언어로 될수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여 버렸다고 하는 편이 났다. 조선어의 일견 투박해보이나, 곰곰히 보면 무수한 야생적 또는 원초적인 풀대와도 같은 공생의 사상, 경계를 넘고 어우르는 그런 요소들이 포함돼있다는것을 우리 자신이 자각(自觉)해야 할것이다. 조선어가 제3의 조선어 형태로서, 조선족의 문화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 문화의 풍부성과 바레이션, 가능성은 “신조선족”의 발랄한 활동에 의해서 현현될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신조선족”의 사고, 지식체계 및 세계관 만이 현현시킬 요소가 듬뿍 충만돼 있는 까닭이다. 세계의 이질문화를 몸으로 피부로 흡수하고 있는 그들이 조선족의 문화공간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조선족 문화의 풍부성, 복합성, 유연성의 생성에 전례없는 공헌자라는 인식을 절실히 해야 한다. 세계의 풀을 찾아 모험의 월경을 하는 “양떼”들에게서 우리 조선족의 또 하나의 새로운 미래상을 예견하게 된다.  
21    22. 조선족 언어의 雜草性 댓글:  조회:4542  추천:40  2010-08-04
《신조선족》월경론 22. 제3의 조선어- 조선족 언어의 雜草性    김문학   연변과 조선족문화를 좋아하는 일본인 친구가 있다. 그는 해마다 연변을 비롯하여 동북 조선족지역을 수차례나 드나드는 조선족 팬이기도 했다. 어느날 그가 필자에게 조선어에 대한 소감을 들려주었다. “연변 조선족이 사용하는 조선어는 마치도 요란한 폭죽소리에 기관총소리를 합친것과 같다. 서울 한국어는 한강물과 같이 흐름이 부드러운 리듬이 있는데 연변 조선어는 투박한 리듬이다. 이 양자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흥미롭다” 친구의 “조선어평”을 들으면서 필자도 동감이어서 같이 웃었다. 확실이 서울 한국어나 북조선어의 평양 억양에 비해서도 연변 조선어는 억양이나 톤이 너무 강하고 기복이 심하여 리듬 역시 “폭죽식”이다. 리듬뿐이 아니라 조선족 언어는 조선어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수 없을 만큼 2중, 3중의 복합적 단어가 겹치면서 찹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상용어에서 사용되는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오늘 집사람이 싸주는 벤또를 가지고 단위에 쌍발 했는데 정심참에 글쎄 퉁쓰가 근처 레스토랑에서 시찬을 한턱 칭커하는 바람에 잘 먹었어. 피주에다 위스키까지 잇빠이 했단말야. 근데 옆상에 있던 쭝국 사람이 괜히 시비를 걸어서 깐짱했어. 타마디 한판 승부 걸었다 이거야...” 그  승부가 어떻게 됐는지는 필자는 관심 없지만 이 흔히 사용되는 조선족의 조선어속에는 조선어(한국어) 어순의 구조를 베이스로 삽입된 단어가 그야말로 다종다양하다.   “벤또, 피주, 잇빠이”는 그대로 일본어이고 “쌍발(上班),퉁쓰(同事),시찬(西餐), 칭커(請客),깐짱(干仗=싸움),타마디(他媽的)”는 중국어음독(音読)“레스토랑, 위스키”는  서양의 외래어다. 그리고 단위, 승부, 시비는 한자어이다. 마치도 세계 언어의 박람회를 연듯하다. 우리의 조선어는 100년의 중국과 문화접촉을 거치면서 북조선어와도 이질적이고도 다른 “제3의 조선어”로 변용되였다는 점이 괄목할만 하다. 그리고 우리의 조선어내부를 보면 연변의 함경도방언, 길림과 흑룡강성의 경상도, 평안도방언, 요녕성의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방언 등 조선반도의 동북, 서남, 동남, 서북 방언이 그 근저에 반거하고 있는것도 특징적이다. 중국 조선어에는 시초부터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한 표준어, 중부방언이 결여돼 있었다. 동북3성조선어문사업위원회가 1977년 작성한 “조선어규범”과 1984년에 수정, 개정판에 의해 북조선평양말을 토대로 정해진것이지만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이미 한물 간 “서류”에 지나지 않는다. 북조선식 언어에서 일탈하여 이미 “조선족언어”로서의 “조선어” 즉 제3의 조선어가 구성되었으며 거기에는 1980년이후 특히 1990년이후 서울의 표준어 억양과 단어가 홍수같이 주입되고 있다.. 조선족의 신문, 잡지에도 이같은 복잡한 현상이 반영되고 있으며 “서울로 갈까요 평양으로 갈까요”란 노래제목과 같이 방향성을 잃은듯 하기도 한 제반 언어현상이 현재화(顯在化 )되고 있는 실정이다. 목하 조선어는 투박, 순박, 질박한 “3박”의 양상을 이루고 그것에 또 조잡,복잡,착잡의 “3잡”상태가 가세된다. 그것을 필자는 조선어의 “雜草性”으로 표현하고저 한다. 누군가 손길이 닿지 않고 가꾸지 않은 초원의 원시적 풀 같이 무성하게 자라기만 한 상태, 거기엔 쥐며느리풀도, 난초도, 민들레도, 냉이풀도 개불알꽃도 다 자라나고 있다. 그야말로 백화방초가 경쟁하는 “풀의 세계”다. 필자는 언어학자가 아니므로 그 영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의 조선어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사실 우리 조선족에겐 1990년대 이래 전반 조선족에 공통한 언어와 그 언어집단으로서의 결속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재다시 조선어-(우리 문화의 표징으로서의 언어)를 표준어체계에 귀속시키는 작업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고로 필자는 ①漢字使用을 극력 주장하며 ②서사체계, 서면어는 서울어 표준어체계로 맞춰야 한다는것 ③그리고 일상 회화에서는 각기 자기가 익숙한 방언을 구사해도 되는 자유가 있고 ④그런 회화 역시 문화접촉과 변용을 통해 자연히 변할 가능성이 크다는것 ⑤따라서 중국조선어를 서울어, 평양어보다 이질적인 특징을 이룬 언어체계로 학문적, 정책적,규범적 정립이 필요하다는것을 강조한다. 「조선족 개조론」에서도 이 같은 아이디어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한것이 십분 유감이다.    
20    21."신조선족"의 邊境力 (김문학) 댓글:  조회:4348  추천:48  2010-07-30
《신조선족》월경론 21. "신조선족"의 邊境力  김문학   조선족의 내재된 “변경력”은 사실 최근 신조선족의 등장으로 그 위력을 세계적 범위내에서 “발사”하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조선족은 변경성 민족의 조선족에서 탄생된 배경을 감안하면 중층적 “변경성인(邊境性人)”으로서의 성격을 쉽게 인지할수 있다. 환언하면 변경인에서 나온 또다른 변경인인것이다. 직접 프스트 선진국가의 문화권속으로 배낭을 메고 파고들어감으로써 그 큰 외부문명권안의 변경인으로 살면서 원유의 공간과는 이질된 신변경인으로 거듭난다. 국내이동으로 대도시에 진입한 신조선족의 변경인 역시 국외 변경인과 같은 경우를 몸으로 체험, 갈등, 소화시키면서 “신변경인”으로 변동해 간다. 중국근대사를 조감하면 발견되는 역사적 사실은 중국의 혁명은 늘 변경에서 시작되어 중앙으로 침투되면서 활력을 주입시킨다는것이다. 요즘 「근대 재발견」이란 책을 집필하면서 필자가 재인식한것은 홍콩, 상해, 대만 이같은 세개 지역은 근대중국세계의 주변부에 위치한 “변경성”지역이었다. 식민지 또는 조계지로서 외국의 지배하에서 異文化의 교류가 일상화된 공간이었고 “근대”중국을 상징하는 “근대적 실험장”이었다. 이곳은 근대 중국이 배제된   그러나 가능성이 집약된 공간이었다. 여기서 생활한 인간들은 중심의 중국인들보다 시각, 사고, 행동 등 면에서 앞서 달리는 “변경인”이었다는 점에서 특기 할만하다. 상해가 혁명의 근거지, 중공이 탄생된 이유도 이런 배경이 있은 까닭이다. 말이 중도에서 약간 새어나갔는데 이제 다시 본제로 돌아오자. 국내 북경, 상해, 청도나 산재지구의 신조선족이든 해외에서 살고있는 신조선족의 주위에는 흡인력이 강한 문화, 문물들이 현란한 황홀경을 이루면서 신조선족을 빨아들인다. 본이 학습력, 지적 탐구욕이 강한 변경인 출신답게 신조선족은 자신이 밟고 있는 이국문명을 거대한 스펀지같이 탐욕스럽게 흡수하여 걸러내기도 갈등하기도 또한 소화불량을 경유하여 자신의 “변경성”에 충족한 영양분으로 만들어 낸다. 필자 자신의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필자의 많은 지견, 사상, 가치관, 세계에 대한 인식등을 솔직히 고백하여 이 월경하는 삶,“변경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환경(일본등)에서 획득한것이다. 20년전 독일, 덴마크, 스에덴 등 서구나라를 일주하고 최초로 일본 땅을 밟았을 때의 心境은 오늘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싱그러운 일본녹차의 청향이 비강을 자극하는 그것은 바로 이문화 이해, 이문화 지식에 대한 본능적인 체질적인 자극 그 자체였다. 필자는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조선족의 위상을 알리는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중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변경인””세계인”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사고하는 “월경인”의 경계를 살겠다고 스스로 결의를 내렸다. 노신이 일본에서 환등 슬라이드를 보면서 중국 국민성을 각성시키겠다내린  그같은 비장한 심경이 20대인 나에게 각인되었다. 필자는 노신과 비견할만한 문화거인 임어당과 호적을 숭배해왔다. 그 이유는 모두 다 국경을 넘어 월경인, 변경인으로 문화의 창조적 삶을 영위하고 불후의 업적을 쌓아 올린 지식인의 본보기었기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역할에서 조선의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일본의 후쿠자와유키치, 니토베이나조와 같은 文化巨物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면서 당시 필자가 발견한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자신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인이 있었는데 유감천만하게도 우리 조선족에겐 그런 인물이 결여했다는 점이다. 사실 필자에 대한 쇼크가 매우컸다.  임어당은 「吾國吾民」이란 중국인을 알리는 책을 영문으로 집필하여 서양에서 중국인의 존재를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다. 니토베 역시 영문으로 「武士道」를 써서 일본인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한다. 필자가 조선족 문화인으로서는 일본유학의 선구자적 자리에 섰다면 그 유익한 조건을 십분 활동하여 일본어로써 우리 조선족의 위상을 알리고자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쓴 일본어책을 일본인들이 읽는 모습을 전차안이나 도서관에서 볼수 있기를 바랬다. 지금 그런 소망이 이미 현실로 됐다는것으로 滿悅하지만 이같은 꿈을 꼭 필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삼룡선생이 지적한듯이 지금 월경하는 글쓰기는 미국의 유순호씨, 한국의 장혜영씨, 그리고 류연산씨, 김재국씨 등 많은 “신조선족”에 의하여 실천되고 또 주목되고 있는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글씨기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문, 자연과학 등 분야에서 많은 “신조선족”이 이국타향에서 그 조선족의 특질인 “변경력” 을 발휘하여 조선족 위상을 객관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조선족의 변경력의 최대 특징의 하나는 그 사고, 발상의 “유연구조”에 있다. 목표가 다이내믹할뿐아니라 유연한 복합적 시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자 하며 그 문명적 사고에서 이탈하여 아이엔티티도 중층성을 이룬다. 세계의 “선진성”문명을 흡수하고 조선족에 전달하는 첨병으로서 귀중한 존재들이다. 조선족이 내재한 변경성, 변경력 (이중. 3중의 문화력도 포함하여)은 오늘 새천년후 “신조선족”의 탄생과 더불어 발휘할수 있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現狀과 함께 연구해야 하는 과제로 클로즈업될 시점에 와 있다.  또한 이런 “신조선족”이 고향에 되돌아와 고향을 재건설, 재편성하는 주력적 힘이 되는 그날도 크게 기대된다.  
19    20.邊境性 재발견 댓글:  조회:4012  추천:33  2010-07-28
20.邊境性 재발견김문학 일본인의 “변경성”콤플렉스는  특별하다. 근대래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수 없는 포스트근대 대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중국문명에서 탈퇴해 “일본형문명”을 구축한 오늘 날까지 일본인은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적 특질을 “변경성”에서 찾고 있다.최근까지도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이야 말로 세계의 최후의 비경(秘境)일것이다”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일본인 변경이며 일본인의 국민성, 사고나 행동은 그 변경성에 의해 설명하는 일본 변경론”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지식인층을 초월하여 광범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다.한국인 역시 중국대륙의 “변방”이란 의식이 강열하며 지금도 국제정세를 담론할때 꼭 빠지지 않고 번번이 등장하는것이 “변방”(변경)민족으로서의 自觉이다.변경성이라는것은 단지 지리적 조건, 위치만 아니라 거기에 기인되는 문화적 의미를 말한다. 일본의 지대한 변경성 콤플렉스는 “모든 우수한 문화, 문명은 바다건너 저쪽중심에서 흘러오는것”으로 간주했다. 외부에서부터 들어오는 모든 문물에 대해 그들은 엉청난 호기심과 에네르기를 동원하여 수용, 소화시킴으로써 “일본문명”이란 이질적인 “잡종형문명”을 탄생시킨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문명”은 세계사적 흐름에 있어서의 일종 거대한 실험의 埸이었다고 할수 있다.같은 시각에서 이제 우리 조선족의 고향인 연변을 다시 바라보자. 그것은 말할 나위도없이 중국대륙의 동북단에 위치한 “변경”이다. 1980년대 20대였던 필자가 연변을 문화답사 했을때 받았던 충격은 오늘도 기억속에 선명하다. 그것은 말그대로 “동아시아 최후의 秘境”그 자체였다. 이같은 비경이기에 조선족의 “순수성”,”단일성”이 제일 강도높이 보장될수 있는 지리적 환경이 주어졌다는 인심을 그때 나는 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어디 지리 조건에만 그치랴. 우리 조선족 전체가 그 문화 특질이 바로 “변경성”이란 용어로 해석할수 있지 않은가. 중국이란 거대한 중앙, 중심의 변두리에서 “경계인”으로 문화를 영위하고 있는 “변경인”. 이런 “변경성”이 바로 또한 우리의 “정신성”을 긍정짓는 하나의 중심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 고국인 한국인도 그러했듯이 우리는 한번도 세계의 “중심”이란 “우세”를 가져본적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것은 행인지 불행인지 수미일관하게 “변경성”의식 뿐이다. 그리고 그 “변경성”의 콤플렉스에서 오는 “반발심”이란 용수철적인 심리장치를 우리는 또 튼튼히 소지하고 있다.바꾸어말하면, 그것은 콤플렉스를 용수철로 삼아서 생활의 분발하는 원동력으로 활용한다는것이다.약소민족에 변경성 민족의 2중마이너리티가 할수 있는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있는 에네르기를 배우고 아는것으로 전환시켜 그것을 지적인 힘으로 바꾸는것, 이것이 우리에게 恨을 푸는 방법이였으며 “소 팔아서도 자식 공부시키는” 눈물겨운 분발의 에네르기 그 자체였다.필자는 우리 조선족의 “변경성”을 우리 정신사에서 차지하는 큰 팩터와 구조의 하나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변경성은 즉 일족의 정신성이기도 하며 그것은 우리의 지정학적, 정신적 단점인 동시에 우세이기도 하다고 재인식한다.조선족이 전국최고의 교육보급률과 전국 학력의 최고수준을 이날까지 보전하고 있는 원천은 바로 이 변경성에서 유발되는 恨의식의 반작용에서 생기는 엄청난 구지욕, 학습력이다. 学习力(학습력), 이 조어 역시 필자의 창조이다. 배움의 힘, 배우려고 하는 의욕의 힘, 그리고 거기에 주입된 전 가족, 전민족적인 에네르기는 오늘도 식지 않고 있다.이것이 우리 조선족 변경성의 무서운 파워이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던 이유도 그네들의 호기심과 학습력이 뒷바침되었기때문이다. 한국 역시 변경민족의 소국으로서 일본에 뒤지지 않는 변경성의 에네르기를 자각하고 분발하는 힘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던것이 아닐까.조선족의 학습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연변의 “대중적 코미디”로서 널리 알려진 일화를 들어보자. 연변 시골에서 온 조선족 할머니가 생선을 연길시내의 시장에 힘겹게 이고 와서 팔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물고기 생선을 한어(중국어)로 뭐라 하는지 몰랐다.그때 응급으로 고안해낸것이 「水肉(수이러우)」라는 단어였다. 「물고기」이니까, 물은 水(수), 고기는 肉(육) 이렇게 두 단어를 조립시켜 하나의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드디어 시장에 그 푸접좋고 머리좋은 우리 할머니의 큰 목소리가 신명나게 울려버린다.”买水肉啦~!”(물고기 사세요~!)그냥 우스갯 소리로 흘려보내면 그만 이지만 필자는 웃고 본뒤 하나의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 할머니의 발상은 천박해 보이지만 깊이 사색해보면 그 자신의 학습 활용력이 살아숨쉬고 있는것이었다. 옅은 한어지식으로 그는 물고기라는 한어식의 새로운 단어를 창조했던것이다. 물고기의 육신 역시 일종의 고기(肉)임은 생물학적으로도 통한다.변경에서 사는 우리 할머니의 창조적 신조어에서 발견되는것은 우리 민족의 “창조성”그 자체이다. “변경성”을 하나의 “文化性”으로 파악할때 우리에게는 ①변경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분발의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용수철같은 역동이 있다는것, ②주위에 대한 불안감 또는 자기 위치 확인감에서 오는 왕성한 호기심, 에네르기 ③그 에네르기를 변경성 해소의 학습력으로 변용시키는것 ④중심, 중앙문명에는 결핍된 유연구조의 사고 ⑤주변과 중심의 요소를 복합시키는 봅합력, 이러한 5개의 큰 우세를 갖고있음을 自觉해야 한다.필자는 이 5개의 힘을 “邊境性”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18    19. 연변조선족의 ‘19세기 말기증세症勢’ 댓글:  조회:4219  추천:30  2010-07-26
19. 연변조선족의 ‘19세기 말기증세症勢’김문학   세계적인 중국연구의 석학 J·K·Fairbank (中國名費正淸)는 19세기 서양세력의 문명이 중국 및 아시아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웨스턴·인팩트’(서양의 충격)으로 추상화시켜 잠자던 중국이 이 충격에 대응하여 갈팡질팡 하면서 근대화를 구축하려고 한 중국과 아시아의 근대를 파악하려고 했다.  ‘서양의 충격’에 대처하여 대국 중국과 변방의 소국 조선의 대응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는 표현으로서 ‘19세기 말기 증후(또는 증세)’라는것이 있다. 중국에 대한 서양의 충격은 전례없는 유교문명체제에 대한 도전이였으며 ‘천하’관념으로 이어진 중화적 가치관세계의 봉괴를 촉구한것이다. 19세기말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의 수구파들은 ‘조상의 종법은 절대 개변시킬수 없다’는 절대적 전제하에서 ‘중체서용’이란 기괴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변혁을 시도했기는 했으나 그것은 구조적 개혁이 아니었기에 패북으로 종식되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역시 민씨 황후를 비롯한 실질적 수구파들이 조선왕조란 ‘조상의 종법을 개변시키지 않는 전제’하에서 중국세력과 러시아 및 일본의 세력에 사대주의로 우왕좌왕하다가 개혁은 이루지 못하고 이미 앞서 철저한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섬나라 왜국(倭國)의 일본에게 식민지로 먹히우고 만다.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정세를 조감할 때 청국과 조선같이 서양의 충격에 적시적인 적응을 보이지 못하고 고루한 전통적 가치세계를 고집하면서 근대화에서 지연되고 제국의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병적인 양상을 19세기 말기 증후로 일컫는다.   이 말기 증세를 좀더 지근 거리에서 관찰하면 그 내부의 개혁파, 유신파들의 신사상, 신사고, 신가치는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으며 강유위, 양계초나 김용호, 서재필 등 신세대 개혁파들은 수구파들에 의해 철저한 탄압을 당하고 개혁은 물거품으로 종연되는것이다.   수구파들은 물론 백프로로 개혁을 단절시킨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유신’과 ‘개혁’을 입에 걸고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자신의 기득패권을 보전하기 위한 위장한 간판에 지나지 않았던것이다.   필자는 지금 연변의 일부 지식인의 고루한 사상과 행동속에서 어쩐지 그 ‘19세기 말기증세’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21세기 세계적 글러벌의 월경적 배경하에서 조선족, 특히 연변조선족공동체공간은 ‘세계화의 충격’을 직면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중국, 조선 동아시아국가들이 직면했던 ‘서양의 충격’과도 유사한 현상이다.   100여년전 강유위, 양계초나 김옥균, 서재필 등 젊은 세대들에 의한 생기발랄한 미증유의 혁신을 서태후들 수구파, 민씨 인척의 전통수호자들의 세력을 필사적으로 부정, 진압했던 역사적 기억이 연변의 일부 지식인들속에서 생생한 현실로 재연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해외에서 장기간 생활한 필자는 그것에 더는 침묵할수 없었다.   오늘날 ‘월경의 시대’를 정면에서 맞아온 연변은 중국, 한국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월경에 의한 침투로 그야말로 새로운 연변으로 거듭나야 할 격동의 변동기에 서있는것이 아닌가.   종래의 ‘전통적 공간’으로서의 연변이 이제 그것을 고집할수 없는 새로운 ‘복합적 공간’으로서의 연변이 생성되고 있는것이다. 이 작은 공간에도 봄이 오면 진달래가 만발하듯 당연하게 여러 가지 신생의 의식, 가치관, 이데올로기의 문화들이 들어오고 침투되고 있다. 여러 문화가 모여드는 거대한 문화의 비빔밥이 여기서 현재 제작중이다.   그러나 연변의 일부 조선족 지식인은 연변이 겪고 있는 변혁, '고루한 조선족의 사고와 가치관'에 대한 ‘신조선족’의 비판을 그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문화적 또는 언설적 권력, 권세를 이용하여 절대시하고 철저한 탄압을 감행해왔다.   심지어 그들은 서태후, 민비식의 19세기말 통제방법으로 철저히 대중을 기만하고 날조하고 외곡, 중상하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신조선족’의 참신한 혁명, 사고, 가치관을 공격하고 탄압으로 수미 일관 해왔던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컬하게 ‘19세기 말기의 증세’와 오버랩되는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것이다.   필자는 그런 19세기의 말기 증상이 21세기 연변조선족 사회안에서 일방통행으로 통했다는 사실에 말그대로 또 하나의 ‘웨스턴 인팩트’를 느꼈다. 그 충격속에서 ‘조선족개조론’발표로 불구대천의 원쑤로 몰렸던 필자는 뼈저린 아픔과 함께 큰 드라우마까지 안게 되었다.   물론 필자는 그들의 입장과 시각이 이해된다. 왜냐면 ‘신조선족’과는 매우 이질된 사고방식과 가치관(고루한 의식)에 젖어있는 그들로서 보면 ‘신조선족’이 쓴 비판적 글, 월경하는 글쓰기는 ‘이단’이며 철두철미한 ‘반역’으로 보일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이 밉지가 않다. 그리고 역시 그들을 존중한다. 필자는 문화상대주의자를 표방하는 ‘신조선족’ 지식인의 한사람이기 때문에 사고방식과 가치관, 의견은 달리 할수 있어도 그것이 상대를 완전히 적대시하고 박멸해야 할 지극히 공포스럽고 테러와 같은 발상이 산출돼서는 안된다고 인식한다. 그것은 서태후식 내부탄압의 비극이 아니였던가.   전조선족이 해체나 붕괴의 위기설에 팽창된 ‘절체절명’의 운명에 직면한 이때, 일심동체로 화합해도 성차지 않겠는데 우리 민족의 신생을 위해 적극적인 비판과 의견을 발설하는 신세대에 대해 ‘테러로 저격해야 할’ 적으로 보는것은 백번 양보해도 苦笑밖에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보다 필수는 극복대안을 모색하는것이 급무라고 생각한다. '19세기말기 증세'를 극복하는 대안은 한가지밖에 없다.  異見과 見識은 틀려도 배척 배제가 아닌 이해, 조화의 '공생'이다.   필자는 이글을 빌어서 호소하고자 한다. 연변, 장춘, 할빈, 북경, 청도, 상해 그리고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남미, 한국... 모두가 '신조선족'의 시야와 사고로 화합하고 새로운 조선족 文化를 창출해나가자고. 
17    18. 想像으로서의 연변 조선족 ‘2중성說’ 댓글:  조회:3788  추천:28  2010-07-20
 18. 想像으로서의 연변 조선족 ‘2중성說’ 김문학조선족의 최대 집단공동체인 연변을 관찰 할때 특히 외부에서 연변을 하나의 객관체로서 관찰할 때 어려운것은 ‘상상으로서’의 연변문화 ‘2중성說’과 현실의 연변상(像)을 어떻게 타협시킬까 하는 문제에 봉착 한다.   필자는 연변에 가서 이몸으로 연변을 수차례 체험하면서 연변조선족의 ‘2중성설’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으며 그 언설과 현실의 갭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통 연변조선족 하면 ‘2중문화’, ‘2중민족’으로서 그 ‘2중성설’은 의식화되고 고착되버려 우리 뇌리속에 당연한, 일정의 회의의 여지도 없는 고정관념으로 뿌리박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진짜 그럴까? 하는 의문, 자문(自問)조차 없고 아무런 반추마저도 결여된채 단순화 시킨지도 오래된다. 마치 오렌지를 사과로 의심하지 않는듯한 그런 당연한 이치로써 여기에는 학문적, 언설적 저작(詛嚼)마저도 생략되버린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오늘날 월경하는 신조선족을 발견하면서 이와 대조적인 연변조선족의 종래의 의미의 ‘2중성설’에 대해 다시금 재발견, 재사고 할 계기를 얻었다.   사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상식으로 통하는 诸事像에 대해 의문의 자세로 충감(蟲瞰-새가 위에서부터 지면을 바라보는 조감'鳥瞰'과 대조적으로 개미가 지면을 기면서 주위를 바라보는것은 충감도 라고 함)하면 그 상식의 구조속에 있는 가상(假像)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필자의 지론을 펼치기에 앞서 용이한 이해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해외 학자들이 간파한 '中國思想'의 일부 정설(定說)의 허구성을 실례로 들어보겠다.  근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동양사학자이며 중국연구의 거물인 교토대학의 대학자 나이토고난(内藤湖南 1866~1934년)은 일찍 그의 논고 '청조쇠망론'에서 중국인 자신이나 동아시아인들이 꼭 그럴것이다고 생각하는 중국사상이 현실과 괴리돼있다는 점을 까발리면서 그 사례를 이렇게 들고 있다.   ‘중국인은 그 가르침과 실제가 평상 일치하지 않은것이 있다. 이를테면 중국인은 아내를 비상히 무서워 한다. 怕内나 胃内라는것이 흔히 통하는 말인데 중국의 여자는 사실 기가 세다. 그러나 그 가르침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사회상의 위치로서의 부인(婦人)들이 사회에 뛰쳐나와서는 안된다는것을 강조하고 있다.’   흔히 정설로 된 '중국사상'의 픽션성에 대해 든 실례는 실로 정곡을 찌른 예지(叡智)의 섬광이 반짝이고 있다. 실제로 현재 중국의 신예학자들은 나이토고난의 역사적 학설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안고 연구, 흡수하고 있다. 학문의 국경을 넘은 월경은 이미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이제 필자의 지론을 간단히 기술하겠다. 연변 조선족 지식인들이 소리 높이 강조하고 있는 연변조선족의 '2중성(文化,民族의 2중성 포괄)설'은 이날까지 아무런 자문, 반문적인 회의도 없이 일방통행으로 행해진 하나의 ‘상식’으로 되여버렸다.   그것을 주장하는 지식인의 인식에는 중국땅에 이주해온 조선의 후예로서 당연히 중국적인것과 조선민족적인것의 '2중성'이라고 간단히 도식화시켜 보는 '그러할 것이다' 또는 '그렇게 되야 한다'는 당연지사로 일괄해버린 점이 도사리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확실치 않은 '개연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필연성’이 있는가에대해서는 필자는 회의적이다.   적어도 개혁개방전까지 또는 신조선족 등장의 최근까지도 그 필연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소리높은 언설대로 다 찬동하기는 어렵다.   필자가 발견한것이 그 이중성관념과 현실적 사이에는 갭이 존재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충감으로 바라본 그속에는 허구성(픽션성)이 내재되여 있으며 개연성을 무한히 확장시킨 일종의 '상상적 표상'이었다는것이다.   연변 조선족의 2세의 실례를 들어보자. 내가 조사한 A씨는 1930년대생(2세에 해당)으로서 그의 일상생활은 언어는 조선어(함경도방언을 기초로 한 연변식 조선어)였으며 그 조선어 사용도는 한어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조선어와 한어의 비례 9:1정도라고 함)였다. 식사도 중국식이 아니라 조선식(백미밥에 김치, 된장국 등) 그의 日常生活,思考,行动,習俗 문제반 文化적 요소는 거이 '조선인'(조선민족)적인 것이 절대적이였으며 지배적이었다. 한족(중국적)요소는 그 자신도 표방하듯 거의 보이지 않으며 또 굳이 한족언어를 사용하거나 한족 친구를 사귈 필요성, 또 한족습속을 따라서 할 필요적 요소나 여지성이 없었다.    1940년대생, 1950년대생 그리고 1960년대생 등 (2.5세, 3세) 연변조선족에 대한 조사에서도 반영된것은 물론 A씨 2세보다는 한어사용면에서 약간 빈도가 높았으나 여전히 '조선족'의 요소는 절대적 부동의 위치에 있었다.   1992년 8월 ‘제1차 연변대학 조선족 文化研究 학술토론회 논문집’에 연변대학 강순화선생의 흥미로운 연과 결과가 나와있다.   '목전 연변조선족의 문화풍습'의 제목으로 1992년 8월 현재의 시점에서 연변조선족을 조사분석한 자료로서 그 당시 90년대의 조선족 文化양상 파악의 호자료이다.  아래 연변 조선족 언어사용실태에 대한 조사상황을 인용해보자.   ‘과학적으로 선택한 전 연변 40개 지점의 도시와 농촌에서 2000호 주민을 조사통계한데 의하면 민족언어 사용정황에서 아래와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도시 조선족주민중 550호를 선택하였는데 한 가정에 한 분씩 550명 가운데 일상용어가 조선어라는 사람이 408명으로 74%를 점하고 한어만 사용한다는 사람이 77명으로 14%이며 한어와 조선어를 병용한다는 사람이 65명으로 12%를 차지하였다. 농촌의 조선족주민들을 보니 선택한 1450호의 1450명 응답자중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1387명으로 95.6%에 달하였고 한어를 사용한다는 사람은 27명으로 1.9%, 두가지 언어를 똑같이 사용하는 사람은 36명으로 2.5%를 차지하였다. 이 수자에서 볼수 있는 바 조선족이 집거하고 있는 향촌의 일상용어는 기본상 조선어이며 성시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조선어를 사용하는 비례도 비교적 높은데 이것은 연변지구의 민족집거구 언어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응답자의 년령구조 또한 홀시할 수 없는 요소로 되고 있었다. 우리가 조사한 대상은 모두 기혼자로서 물론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다수가 중로년이였기에 그 평균년령이 47세에 달하였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본인 혹은 부모들의 출생지가 조선인 사람이 적지 않으며 평생 조선말을 써왔기에 자기 민족과 민족어에 감정이 깊고 사회생활에서나 가정에서의 주요한 교제공구가 조선어였다. 이들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이전에 조선족중소학교를 졸업한 분들로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계통적으로 배웠고 사용도 능란하였다.’   보다시피 74%의 조선족, 농촌주민의 95.6%가 조선어만 사용하고 있는 통계수자는 경이스럽다. 조한 2중언어를 똑같이 사용할수 있는 조선족은 2.5%에 불과하다. 실제로 내가 연변에서 접촉했던 지식인이나 지인들도 조사과정에서 걸러낸 결과 역시 이같은 언어의 ‘단일성’경향이 ‘2중성’경향보다 월등 높았으며 연변의 조선족은 굳이 ‘2중성’을 필요로 하지 않은 실상을 알아낼수 있었다.   물론 정치성 경향은 ‘중국국민’으로서의 그 자세는 중국 정치의 수준에 적응시키고 맞추어야 하는 그런 성향은 강했다고 반영되었다.   아무튼 90년대 초반 지어 2000년 초기까지도 연변조선족 ‘2중성설’은 언설과 그 ‘상상’의 개연성으로서는 있었지만 그 내실적 현실은 조선족자신들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文化的으로 한족과 거리를 두고 조선족 ‘단일성’을 확보했다는것이 사실이었다.   연변이 연변일수 있고 조선족 고향, 최대집단일수 있게금 보장한것은 2중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선족 단일성이다. 따라서 단일성만이 연변적인것을 확보해주는 중요한 구성부분이며 단일성이 타자의 침투로, 월경으로 부단한 공간의 축소와 의식의 확장으로 ‘2중성’의 요소가 개연성에서 필연성으로 구축된것은 2000년이후의 사정이라고 필자는 인식한다.   연변조선족의 최대집단이 그동안 늘 그 자신들도 언성을 높여 주장하는 ‘2중성’의 우세가 발휘되지 못한것은 공교롭게도 ‘2중성’이 결핍된 까닭이다. 좀 더 느슨한 표현으로 말한다면 ‘2중성’요소가 존재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적 요소가 박약했으며 따라서 2중성‘우세’를 발휘하는 말은 ‘가능성’이란 말로 그쳤다는것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종래의 연변의 ‘2중성’에서 강조되는 ‘2중성’담론의 대상은 연변이기보다는 안쪽 산재지구의 조선족(할빈, 장춘, 심양, 북경, 청도, 상해, 등)이어야 했다.   적어도 2중성 담론의 상대로서 산재지역 조선족의 2중언어적 文化는 연변조선족권보다 비례적으로나 질적으로도 월등 강도가 강하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이중문화의 우세를 발휘하여 중국내에서 조선족의 괄목할만한 실적을 쌓으면서 그 위상을 주류사회에 인식시킨 큰 역할을 했다. 그 환경으로나 조건으로도 보아 연변적인 변경성적‘단일성’ 편향문화보다 우세가 주어진것 또한 역연한 사실이 아닐까!   이리하여 필자가 이 ‘2중성설’을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연유는 연변에 대한 폄하도 비판도 아니다. 이런 지적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것은 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등장으로 실질적으로 담론의 ‘상상성’에 그친 그 ‘2중성’이 이미 연변에서 형성되었다는것이다. 현재 3세, 3.5세의 연변조선족의 조사를 통해 역시 언어상에서 조한혼용이나 2중언어의 동일한 수준의 구사 등 면에서 속속이 입증되고 있다.    신조선족의 탄생이 연변에서의 ‘2중성’을 실질적으로 ‘상상의 표상’이 아닌 현실로 구축한것은 연변조선족의 하나의 큰 가는성(우세)을 시사하고 있다.    필자는 신조선족의 ‘이중성’에 대해 큰 기대를 건다. 그리고 연변땅에서 조선족 문화를 지켜온 지식인들과 대중들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격변의 시기에 조선족 문화의 변용을 겪어야 하는 와중에 생기는 번뇌, 고충도 이해한다. 민족적인 단일성을 재형성하여 2중성, 3중성으로 재편성, 재구축하는 과정에 있는 연변조선족은 진정한 2중성, 3중성 우세를 발휘할수 있는 문화로 되는 날이 연변조선족의 신생의 날일것이다.
16    17. 新조선족의 越境하는 重層의 아이덴티티 댓글:  조회:4751  추천:35  2010-07-08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7. 新조선족의 越境하는 重層의 아이덴티티김문학   ‘구조적인 越境’, ‘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을 원용하여 우리 조선족의 越境으로 일어나는 诸事像•现状들을 바라보면 자칫 간과했거나 미처 보아내지 못한 ‘新’자 라벨이 붙은 ‘新조선족’이 새로 부상된다. 편폭의 제한으로 상세한 논술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조선족의‘월경’으로 현현된 诸现状•事像의 양상을 필자는 以下 요약정리 해본다.    필자는 이것을 조선족의 ‘7대 新변용’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O 연변조선족, 동북조선족(산재지구)의 에스닉공간의 축소와 변용   O 감소해가는 조선족 인구   O 조선족 공간의 미디어 공간의 변용 (한국적인것과 조선족인것의 충돌과 통합경향)   O 관내와 북경 및 연해 대도시의 신조선족 생활문화권(新에스닉공간)의 구성   O 한국속의 조선족 공간의 형성   O 일본, 미국 등 서양선진국가의 新조선족 文化공간의 형성   O 新조선족의 越境하는 重層의 아이덴티티의 형성(또는 형성중)   조선족은 그 월경적 구조로 分析하면 시초부터 마이너리티(소수민족)이며 디아스포라이기도 한 重層적 ‘마이너리티’이였는바 그것이 90년대以後의 대규모적인 越境적 이동을 통하여 重層 마이너리티, 디아스포라로 변용을 이룬다.     필자는 조선족의 월경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그 重層적 양상을 区別化하여제시함으로써 조선족의 多樣化, 多重的 新모습을 이해하는 하나의 바러미터와 시각을 제공하기로 하겠다. 필자의 이같은 시도는 처음 하는 分析작업인 까닭에 難度도 높을뿐만 아니라 지탄받을 가능성도 크지만 그만큼 切实히 필요하기에 빈축을 살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감행할수 밖에 없다.   그럼 연변으로부터 동북 산재지구조선족, 관내, 연해도시 그리고 해외조선족에 대한 그 아이덴티티의 重層적 양태를 그려보기로 하자.   (1) 延边의 사과배型   연변의 지식인들 (김관웅, 김호웅 등)은 연변조선족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을 연변의 ‘사과배’라는 메타포를 동원하여 규정짓는다. 연변특유의 과일로서 ‘연변조선족’의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흥미로우며 따라서 필자도 그 해석을 원용한다. 필자는 조선족의 고향인 연변에 대해서 이 拙稿에서 ‘중국이 없는’ 고착된 디아스포라 공간으로서 연변의 독특한 민족공간으로 인식, 해독해왔다.   사실 알아보니 ‘사과배’는 연변 용정의 돌배나무(接本)에 북조선 북청 배나무가지를 접수시킨것이다. 연변지식인 스스로도 메타포적 상징으로 표상화한 그것은 따져보면 결국 연변+북한 북청 그것이였다.   어디까지나 그 내실은 ‘중국’적인 탈락된 연변조선족과 조국(고향) 북한의 접목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것을 연변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았는데 역시 조선민족의 함유량이 가장 높은 边境性적인 특징을 구유하고 있다고 볼수있다.   따라서 조선족에서도 가장 조선족적인 민족적인것이 많이 보전하고 있는 것 역시 연변조선족이다. 이는 조선족의 시원(始原)적 아이덴티티의 고향이기도 하며 조선족이라는 自覺이 가장 순결도 강한 양상을 나타낸다. 그것을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한다.(그림 참조-1)   그러나 이도식은 지식인의 해석이며 연변대중들속에서 이 도식을 넘어 관내로 연해 중국으로 이동한 성원들은 이 패턴에서 이탈된 성원들이다.(2) 散在지구의 올리브型  중국 한족의 공간에 깊숙히 파고 침투하여 조선족 공간을 형성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것은 직접 한족공간과 교차를 이룬 교접방식으로 노정되며 연변에 비해 그 교차의 면적(즉 境界面)이 넓고 따라서 중국적인 것이 많이 침투당하기도 한다. 언어적 영역에서도 중국식 조선어가 더 특징적이고 중국어를 조선어와 같이 병행시켜 구사하는 성원이 많다. 대중들속에는 특히 연변조선족보다는 중국적인것, 문화를 그대로 선호하거나 거기에 동감을 느끼는 성원이 많다. 여기에는 또한 개혁개방이후 동북을 떠난 조선족 이 북경, 상해, 청도, 대련 등 넓은 중국속으로 진입하면서 산재지구 원유의 오리브형 아이덴티티가 더 확장되면서 자칫하면 조선족보다 한족에 편향하여 同化하거나 할 可能性이 더 크다.   그 아이덴티티는 조선족이라 自覺하면서도 政治文化면에서 중국 한족으로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의식 역시 연변지구보다 더 월등 강하게 나타난다. 아래 그림도식으로 보면 그 넓은 오리브형 경계성이 일목요연하게 안겨온다. (그림 참조-2)   중간 교차면의 그 부분은 올리브에 흡사한데서 필자는 올리브型으로 명명한다. 그 중간의 회색부분이 산재지구 신조선족의 올리브형 아이덴티티의 양상이다. 조선족을 지키려하는 동시에 한족의 중국속에 침투, 주류로 진입하려는 의지로 自覺으로 이 境界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살아가고 있다.   (3) 海外의 양파型   월경으로서 해외에 나온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는 좀 더 중층적이라고 보여진다. 원래 자신이 자각하고 있던 ‘조선족’이란 핵이 있고 또 중국적인 요소가 그 핵의 테두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누구나 자명하다.   한국 같은 ‘조국’에서 아이덴티티를 찾으려 했으나 그 마죠너리티로부터 마이너리티로 취급받아 文化충돌 또는 내새널적인 충돌, 업압을 받으면서 다시 ‘조선족’, ‘중국국민’으로 귀속감을 느끼는 성원은 매우 많다.   일본, 미국 등 선진국들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도 역시 유사한 경우를 조우하면서 적극적으로 선진문화, 문물을 섭취하며 그 아이덴티티에는 시간이 갈수록 이국적인 새 테두리가 더 붙게 된다. 그럼으로 중국에서 태여난 조선족+살고있는 호스트국의 요소 들이 加味된다. 여기서 정착되면서 그 성원의 2세, 3세들은 同化되거나 언어적으로도 3국어를 구사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더더욱 중층적인 모습을 노정시킨다. 이들은 중국 조선족을 최전선에서 알리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면서 조선족의 ‘문화 戰士’들이다. 그 양상을 같은 원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그림 참조-3)   양파와 같은 모양을 한 그것은 표피로부터 한층 한층 박취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최 중핵(中核)에 도사리고 있는 ‘조선족’이다. 이로부터 아이덴티티란 그 자신의 ‘自覺’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각한다면 그 표피가 중층적으로 돼 있다해도 궁극에는 그 자각의 중핵만 남는것이다.   이 같은 중층적 아이덴티티를 소유한 해외 조선족을 섣뿌른 편견이나 무지로서 폄하, 적대시 하는것은 전근대적 시각이며 백해 있어도 일익은 없을것이다.   요컨대 조선족의 월경하는 아이덴티티를 이상 중층적으로 유형化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認識의 편리를 위한 방법이었다. 기실 이 3개패턴은 또 서로 얽히고 융합된 패턴으로도 노정된 경우도 있으며 그 안으로 깊숙히 파고 들면 또 더 중층적 양상이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이렇다. 조선족이 월경을 통하여 ‘신조선족’이 形成되면서 그 양태도 다층적이며 전례없는 풍부한 바레이션을 노정하고 있다. 아이덴티티 역시 고착된 것이 아니라 여러 바레이션을 펼치면서 중층적으로 노정되는데 다만 소극적으로만 파악 할 사항이 아니다.   이러한 월경의 ‘新조선족’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탄이나 비관론 보다는 이 풍부하고도 중층적인 조선족의 ‘가능성’에다 주목하여 그것을 分析, 연구, 파악, 이해하며 조선족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살리는것이다. 우리 조선족 지식인, 문화인 그리고 모든 대중과 함께 이 ‘신조선족’을 새롭게 인식하 고 거기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자는 사명감, 이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 필자가 졸고에서 노린 신과제이다. 
15    16. "구조"로서의 조선족 越境 (김문학) 댓글:  조회:3577  추천:29  2010-07-04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6. "구조"로서의 조선족 越境 김문학  필자는 ‘移動하는 고향’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람들은 보통 고향을 하나의 고정된 ‘고착물’로서 고착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離散’하여 他者속에서 생활하는 越境人들에게 있어서 고향 또한 移動하는 고향이기도 하다.   등진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살다보면 고향으로 되는 법이다. 필자는 ‘고향을 늘 포켓속에 넣고 다닌다.’고도 표현하기도 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타향살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애수가곡이 무수히도 많은 것은 예로부터 고향을 떠나 경계를 넘어 살았다는 배경이 있는 까닭이리라.    ‘조선족’은 전형적 의미의 越境者, 디아스포라의 사회다. 그런데 개혁개방후, 특히1990년대 이래 조선족의 고향을 떠난 타향의 越境은 국내 연변, 동북3성에서 관내로, 연해도시로, 해외로 이동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또 다시 시작된 민족의 ‘大越境’이었다.   국내 많은 지식인과 유지들은 이 대월경적 移動에 대해 ‘민족집단공간의 해체’라는 네거티프한 우려를 자아내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같은 목소리는 지극히 지당한 ‘민족위기’에 대한 우려이며 전조선족이 심사숙려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는 시점을 달리하여 보면 이것 자체가 네거티프한것만은 아닌것이라 보고 싶다. 네거티브한 이미지와는 달리 포지티브하게 文化모험을 감행하는 時代적 조류이라면 그것을 단지 소극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미 월경의 민족으로서 신월경으로 다시 새로운 복수의 文化와 사회, 공간에 소속하면서 그 모두와 어울리거나 거리를 둔채 여러 갈래의 價値觀을 갖고 자유롭게 ‘경계’를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은 고착된‘디아스포라’에 신선한 공기를 주입한것으로도 통한다. 아니 새로운 삶의 경계를 재구축한 그것이다.    조선족의 구조적 특징의 하나가 ‘越境이다. 하다면 막을수 없는 역사적 흐름인 글러벌화세계에서 이 월경 역시 조선족의 구조를 재편성시킨 의미는 지대하다고 인식해야 할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하나 자칫 간과하기 쉬운 비교지정학 및 비교마이너리티론적 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다. 조선반도가 대륙과 해양세력에 끼인 틈새로서 역사적으로 늘 양대세륙의 발란스 불균형에서 오는 침습을 받았으며 그것은 지정학적 숙명으로 깊이 낙인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반도의 선대들 역시 우왕좌왕하거나 스스로 또는 억압적으로 이동, 월경을 택해왔다.   이 같은 ‘월경’의 긴 역사를 조감하면 월경은 오늘날만 있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월경의 간단없는 ‘레슨(훈련)’을 축적하여 근대 100년전 월경을 통해 이룩한 우리 조선족은 이미  ‘월경’이 그 구조적 내실의 하나로 된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조선족의 구조는 역시 ‘월경적 구조’로 재편성되는것도 자연적이며 운명론적 시점을 투영시킨다면 그것은 불가피면적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래서 필자가 말하려 하는 것은 조선족의 월경은 중국의 티벳, 위글족, 몽골족, 묘족 … 55개의 소수민족, 마이너리티 사회에 비교하여 관찰해보면 아주 행운적이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일본에서 또는 국내에서 만났던 티벳, 몽골, 위글, 그리고 운남성에서 온소수민족 지식인들은 다 이구동성으로 ‘조선족들은 발달된 선진국 한국이란 조국이 있으니 국내 소수민족사회, 지어 한족보다도 일찍 해외로 나가 부(富)를 입수할수 있었을뿐만아니라 그 文化-文明을 접촉하고 흡수할수 있었다. 그대들이 부럽기만 하다. 중국56개 민족중 유일하게 유대인과 견줄수 있으니까 진짜 월경 민족이다.’고 선망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구조로서의 월경’을 조선족 사회를 바라보는 바러미터로 삼는다면 그 포지티브한 조선족의 월경, 그에 잇따라서 생성, 탄생되는 모든 ‘新’字가 부착되는 ‘신조선족’,‘신조선족  生活文化圈’, ‘신조선족 아이덴티티’등 전례없는 새로운 境界를 발견할수 있다. 이래서 조선족이 직면한 ‘민족공동체위기’를 단지 ‘민족공동체 공간의 해체위기’라는 인식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월등 넓고도 고차의 시야에서 그 대안을 모색할수 있게 된다. 이 과제에 대해 국내나 해외의 유지와 지식인들이 같이 고민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14    15. 아이덴티티와 脫아이덴티티 (김문학) 댓글:  조회:3942  추천:37  2010-07-03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5. 아이덴티티와 脫아이덴티티김문학     이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관찰 하기 위하여 ‘아이덴티티’의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보기로 하자. 사실 identity는 한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로서 self-identity는 자기동일성으로 genden-iidentity는 自己認識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신체나 생리적 유아단계로부터 8단계의 성장기로 이행하는데 그 단계에 있어서 개인적 ‘자아’의 양상은 특정된 역사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습관에 따라 나타나는 행동 양식으로 적응해간다. 이런 자아의 적응발전 결과 개인 내부에 ‘자기’상이 형성되는데 이 ‘자아상’에 통합된 연속적동일성(Persistent sameness)를 엔마크계 미국인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아이덴티티라고 칭했다. 자기동일성=아이덴티티는 ‘나는 언제나 나이다’는 연속성과 ‘나는 타인이 아니다’라는 것에 지탱된 사회적 자기의식이며 자아동일성(ego-identity)은 자기동일성의 기초로 되며 이를 유지하는 자아 통합기능을 가리킨다.      개인적 아이덴티티는 자신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하는 생리적 사회문화적 특성에 대한 자각이나 특정집단, 민족성원이라는것을 자각(group identity, ethnic identity)을 포함된다.   집단적 아이덴티티는 집단성원에 공통된 신체특징, 집단의 기원과 역사, 국적, 언어, 종교, 가치관, 지리적환경 등 총체와 함께 他者집단과의 力學關係나 정치, 경제적, 사회 적인 현재조건 등 요소에 의해 특히 중요시 된다. 쉽게 말하면 민족, 집단 등에 대한 일종의 귀속의식을 가리킨다.    ‘아이덴티티’에서 중요한 요소는 개인이 ‘나는 누구인가’하는 답안을 찾아 어느 집단, 민족 등에서 귀속감을 추구하는것이며 그러한 자각(自覺)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그 집단이 안정되고 우월감을 과시했을 때는 아이덴티티도 안정해 있 으나 타자성에 관련을 갖고 타자와의 경계속에서 있을때는 아이덴티티 역시 동요하거나 확장, 또는 자기 독자성만 주장하거나 또는 타자성과의 협조 등을 주장하는 불확실성, 불투명성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조선족아이덴티티’는 시초부터 越境에서 시작돼 중국내에서 정착하면서 형성된 또는 지금도 형성하고 있는 불투명체이다. 그것은 현재 세계적 이동, 월경, 타자와의 만남과 충돌속에서 다시 정리되고 정립되는 과정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황유복선생의 ‘조선족’아이덴티티설은 이 같은 혼효, 경계성속을 살고 있는 조선족의 자아 동일성, 귀속감 의식을 강열히 의식하는 사명감에서부터 출발된 아이덴티티의 정립을 호소한것이라 할수 있다.      현재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아이덴티티’에 대한 담론은 활발해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모종의 형적이나 틀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간단히 언어로서 표현 할수 없는 무의식적 영역에 있는 모종의 감각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것은 자기와 他者를 가르는 척도이며 긴 인생의 도로표식이며 침묵의 전도사로 간주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것 또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역시 구름같이, 무지개같이 실체가 없는 말랑말랑한 유연성의 ‘불확실성’그것으로 비유된다.      또 흥미로운 言說이 있다. 즉 아이덴티티는 이미 상미기한이 넘었으며 여기저기 많이 존재하는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시 재고하고 도전하는 움직임까지도 보인다. 어떤 지역과 나라에서는 아이덴티티의 개념마저도 확립되지 못한대로 아이덴티티를 이탈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언설자체가 近代自我가 확립되지 못한 사연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현대 그런 ‘아이덴티테’에 강박된 상황이야말로 냉철히 분석해야 할 상대라는 담론도 튀어나오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는 ‘아이덴티티’가 꼭 특별히 강요되지 않는 법도 있지만 우리 조 선족같이 작은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경계를 산다면 사정은 또 달라진다. 물론 조선족 출신으로 꼭 굳이 ‘나는 조선족이다’는 아이덴티티 주입을 강요당하지 않고 또 자각하지 않고 살겠다면 그건 별도로 취급해야 할 의제이다. 그러나 ‘조선족’으로 자각하고 그것으로 귀속감을 기탁하고 살아가는 조선족 다수 성원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진지하게 사유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현재 脫연변, 脫중심의 시대에 조선족이 국내 큰 도회지에서 新집거지인 ‘新생활문화권’을 형성시키면서 살아가고 또한 해외에서 까지 월경적 ‘新디아스포라’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아이덴티티’는 더 두드러지게 현현되고 있다. ‘두드러지게 현현되고 있다’고 한 의미는 조선족 ‘아이덴티티’가 단순한 양태에서 多樣하고 重層의양태로 변용 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13    14. 黃-趙 정체성 論爭’의 함정 댓글:  조회:5269  추천:33  2010-07-02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4. 黃-趙 정체성 論爭’의 함정김문학  최근 전개된 황유복 선생님과 조성일 선생님의 ‘조선족 정체성(아이덴티티) 논쟁’, 그 논쟁의 無意味보다도 ‘아이덴티티’를 사고하고 인식하는 우리 지식인의 한계를 재인식하게 한 계기가 된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논쟁의 주인공인 黃 有福 先生님과 趙成日 先生님은 필자에게 있어서는 學問적 대선배이며 同胞의대선배라는 의미에서 모두 다 존경하는 지식인들이다.    황교수님은 조선족연구의 제1인자로서 사회인류학적 방법으로 조선족 연구의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조선족 연구의 프로패셔널이다. 趙先生님은 비록 문학평론이 전공이지만 특히 7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老益壯하여 전공부문이 아닌 문화연구 領域으로도 진입하여 조선족 文化   의 논진을 펼치는 용기와 그 연찬정신에는 가히 감복할 만 하다. 하여 아마추어도 전공영역 밖에서 연구할수 있다는 케이스를 잘 보여준 인물이시기도 하다.    이런 두분의 개인적 경력을 전제로 하여 필자는 ‘황조논쟁’에 대하여 개인적인 인상적인 담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족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담론하게 된 것은 개혁개방 후 인구이동과 월경(越境)적 활동, 한국과의 조우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중국’을 재인식하면서 이 모든 중층(重層)의 他者성을 전제로 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 자각은 이 여러 중층의 他者와의 경계성에서 비롯되며 예전 1,2세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돌출해지고 클로즈업 된다.   黃趙論争의 포인트는 한마디로 이 他者性에 맞춘 (또는 그에 의한 재규명, 규정되기도 하는) 理解, 認識의 차이점에서 기인한것이다. 황교수가 지적했다시피 ‘디아스포라’의 한갈래로서의 조선족이 중국(중국인)과 한국(한국인)이란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족들이 자기 정체성(아이덴티티)을 확보할것이 큰 문제다.    그는 학자로서의 연구경험을 축적하면서 내린 결론은 ‘조선족은 바로 조선족이다’는 ‘100%조선족’설을 주장한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한국)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한)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그는 미국하버드대에서 ‘한국계미국인”연구업적을 비교분석하면서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탈 한국적인 미국 코메리칸 문화의 창출을 ‘한국계미국인’의 독자성으로 인식하고 같은 차원에서 중국의 ‘조선족문화’도 창출 해냈다고 역설한다. 중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조선족’의 독자적 아이덴티티를 예리하게 석출해냈다. 그리하여 황교수는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아이덴티티) 때문에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소리높이 주장하기에 이른다.    황교수의 지론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신과 후대가 주류사회진입을 위한 그런 민족적 조선족적인 아이덴티티가 확고한데 또 무슨 우왕좌왕이 필요한가”는 현재의 조선족의 아이덴티티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석출했다.   조성일선생은 조선족이 과경(跨境)민족으로서 당연히 그 중성민족이고, 또 그 문화는 전통적인 고유의 조선반도에서 온 조선문화와 생활국인 중국문화가 어우러져 그 중성을 띠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며 ‘이중성문화’의 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디아스포라의 특징으로서 조선생의 지론은 새로운 내용이 없으며 지나치게 조선의 시원(始源)을 강조함으로써 그 이중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여기서 결락된 것은 시원이 아닌 現代 우리 조선족이 ‘조선족’으로서 수립될수 있는 한국과도 아주 이질된 그런 조선족의 현재의 내실인것이다.    시원을 강조하는 조선생과 시원을 이미 넘어서 새로운 ‘조선족’이 창설됐다는 분기점은 여기서도 서로 대립된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조선생은 조선족의 문화패턴(型) (그것은 문화인류학의 개념으로서 아무리 작은 집단사회에서도 그 독자적 文化를 그 집단 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미국 여류 인류학자 루즈•베네딕트의 이론) 즉 이중성 문화형을 그대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적용시켰으나 문화패턴과 아이덴티티는 꼭 100%로 合致하지는 않는다.    아이덴티티는 집단성원내의 무수한 개인의 아이덴티티도 포괄되는데 그 얼굴은 문화의 패턴보다 더 무수히 부수적이고 복잡다단하다.   이밖에 필자가 지적하고싶은 또 한가지는 조선생은 황교수의 ‘100%의 조선족’에 대한 개념에 대해 몰이해 했고 또 착각을 한 측면이 컸다. 황교수의 ‘100% 조선족’은 ‘조선족’개념이기도 하며 아이덴티티에 직결된 카테고리로서 거기에는 조선민족의민족적 특질이 이미 내포된 것을 의미하는 ‘중국속의 조선족’의 정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논쟁도 확실한 결론이 없이 不毛의 무의미한 논쟁 그것만으로 막을 닫는다.    황교수는 조선생의 그 ‘‘황교수의 논조가 우리 조선족을 이른바 중국을 이탈하는 무엇으로 몰아부치려 하는지 우려를 떨쳐 버릴수가 없다. 문화대혁명기간에 8.2. 8.4의  터무니없는 사건을 조작하여 우리 조선족을 叛国暴乱의 반역자로 매도한 참안이 문득 필자의 눈앞에 떠오른다’’는 말에 질리고 만다.    ‘‘왜냐면 조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아직도 조성일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황교수는 한탄분노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말장난보다는 지성인들이 해야할 사회적, 실천적 노력을 힘을 모드자’’고 황교수는 호소하고 있다.   황교수님의 분노는 학술문제를 정치문제로 에스컬레이트 시키는 조선생님의 자세에 대함에서 였다. 필자는 그 분노를 잘 이해하고 있다. ‘조선족 개조론’의 저자를 학문적 견해를 넘어서 왜곡, 중상했던 장본인 역시 조선생님등 좌파지식인들이 였다고 한다.    필자 역시 무차별로 당해야만 한 아픈 드라우마를 안고 있으며 이런 저질적인 고루한 구습을 21세기에서 다시 근절해야 생각했는데 역시 그 ‘발톱’은 존재하는 한 늘 상습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만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이러한 不毛의 논쟁은 오히려 조선족을 혼란에 빠지는 ‘함정’을 만들고 있다. 깊고 깊은 미스터리의 함정에 빠져 아이덴티티 의식이 미약한 조선족에게 아이덴티티의 커다란 혼란성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황교수님은 그 혜안으로 爭論의 無意味를 간파하고 그뒤 무시한것은 아주 적절한 판단이였다고 사료된다.    ‘‘우리 조선족 지식인들이 좀더 학술에 접근한 논쟁이 있어야 되는데…’’    오호! 痛哉로다.
12    13.조선족에게 정체성은 있는가 댓글:  조회:3812  추천:28  2010-06-29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3.조선족에게 정체성은 있는가김문학   ‘포스트개조론’이래 조선족 지식인들에 의한 ‘우리는 누구인가’하는 자아동일성인식에 대한 담론이 전례 없이 펼쳐지고 있다. ‘자아동일성’인식은 조선족에서는 보통 ‘정체성’으로 통한다. ‘정체성’은 문화인류학(심리인류학)에서는 ‘아이덴티티(ldentity)’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필자도 이하 졸고에서는 ‘정체성’이란 용어를 부분적으로 사용하겠지만 주로는‘아이덴티티’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면 ‘정체성’이란 용어는 우선 ‘아이덴티티’란 용어에서 알수 있듯이 서양개념이며 ‘정체성’으로 그 내포한 함의를 다 담기에는 좀 역부족이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여 우리가 우리자신에 향해 던져진 질문 – ‘우리는 누구이냐’하는 아이덴티티적 의식을 자각적으로 갖춘 때는 사실 그리 오라지 않다. 조선반도에서 대륙에 이주 한뒤, 자신의 의지로 남아서 ‘조선족’을 형성해온 우리의 선 대 1,2세들 소수민족의 일개 멤버로 중국국민에 편입되면서 ‘중국에서 살아간다는 우 리자신’에 대해서 아이덴티티적 사유는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대들의 정신사에서의 아이덴티티적 고민의 흔적은 뚜렷하지 않으며 ‘중국에서 사는 조선민족’이라는 자아인식이 막연하게 실존했을 뿐이다. 또한 그 의식이 당연한 것으로 특별히 심각하게 사유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중국에서 살아가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지식인이면 몰라도 보통 조선족대중들이 아이덴티티에 대해 자각, 사색을 안해도 될 요소였으며 그보다 살아가는 생존, 생활의 격투가 항상 우선적이였다. 이러한 아이덴티티를 에워싼 민족의식, ‘민족’의 담론이나 사유에 대한 지식인, 대중의 격차는 지금 현재에도 별 다름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필자가 위에서 설정한 소제목 ‘조선족에게 정체성(아이덴티티)은 있는가’는 이러한 조선족의 대중적인 보편적 사유를 두고 한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에게 아이덴티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설정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조선족 지식계에서 조선족정체성(아이덴티티)을 담론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2000년에 들어서서부터다. 그전에 조선족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연구와 담론은 있었지만 명확한 ‘아이덴티티’의 의식의 자각으로 행해진 것은 매우 빈약했다. 일반론적인 조선족 문화의 양상, 이를테면 연변의 鄭判龍선생 등 선대연구자들이 ‘며느리’패턴, ‘사과배’ 접목식 문화라는 문학적 비유에 의한 제시는 흥미롭지만 조선족 아이덴티티를 的确(적확)한 의식으로 석출함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문제는 ‘정체성’담론은 정체성(아이덴티티)이 무엇인가 하는 담론이 없이 그냥 ‘조선족 문화는 이중성’인 까닭으로 그 ‘정체성도 이중성이 아닐수 없다.’는 거치른 유추의 방법으로 유도하는 식은 어딘가 우습꽝스럽기만 하다.   아이덴티티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조차도 결여 한채 아이덴티티를 담론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경솔함’과 ‘치졸함’, 그리고 ‘무지함’의 질타에서 자유로울수 없을수 있다. 물론 개인의 지(知)적인 레벨과 교양과 안목에도 관련된 사연임으로 한마디로 그런 지식인에 대한 비난, 비하하기 보다는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연유를 파는것이 더 우리 모두들에게 유리롭다고 사료된다.
11    12. 월경하는 ‘신조선족’의 新生活文化圈 댓글:  조회:3834  추천:26  2010-06-27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2. 월경하는 ‘신조선족’의 新生活文化圈 김문학   평론가 최삼룡선생님이 2009년 5월 ‘니카’에 발표한 ‘重绘中国朝鲜族文化地图’는 신선한 감각의 논고다. 그의 논고에서 펼친 언설적 주장은 바로 필자가 ‘개조론’이래 구상해온 ‘신조선족’사회의 전개와 一致했던것으로 필자에게는 반가운 글이였다. 최선생님은 ‘조선족문단의 劉再復’으로 불릴만큼 1980년대부터 조선족문학의 이론적 헤게모니를 거머쥔 개명파 이론가이다.   그리고 최선생님의 이 논고가 ‘니카’에 게재된 것 역시 의의가 아주 크다. 필자는 ‘21세기의 라스트 수공업자’로 自嘲할 정도로 컴맹이며 아직도 입력을 못하고 홈페이지를 볼줄 모르는 위인인데 친구의 도움으로 작년 가을경 ‘니카’의 인터뷰를 받고서부터 ‘니카’를 가끔 들어가 보게 되였다.   공정히 평가하면 국내의 모든 신문매체나 잡지가 게재, 기획하고 취급할수 없는 신사상, 신감각, 신문학, 신사조 등을 ‘니카’가 민간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신조선족’의 언설적 표징으로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젊은 ‘신조선족’의 언설적 집결지이며 근거지의 하나이다.    당연히 아직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에는 많은 미숙함과 결함들이 존재하지만 ‘신생’의 인터넷지로서 앞으로 보완되고 극복해나가길 바란다. ‘니카’가 내건 슬로건 ‘境界의 소멸을 꿈꾸는 境界者들의 이야기’는 바로 경계와 국경을 넘는 ‘신조선족’의 ‘세계적인 사상, 세계적인 인식, 세계적인 시각’의 특징을 대변하는 말이 아닌가.   다시 최선생님의 논고에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여러 종류의 ‘조선족문학사’의 집필진의 멤버로 활약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오늘날 문학사에 대한 결점을 발견한다. ‘문학발전의 공간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홀시’한 결함을 지적하면서 드디여 ‘조선족문학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는 신선한 결론에 이른다.   1980년대이후 조선족사회의 인구이동에 따른 신문학권의 형성과 그에 상응된 문학지도를 그리는 것은 필자의 ‘신조선족’사회의 탄생과 그 ‘異时的文化群’과 一致한 취지의 견해이다.    최선생님은 이렇게 갈파한다.   “중국조선족문학의 지리적공간의 확장은 결코 문학의 표면현상의 변화가 아니다. 도시는 농촌과 다른 자연경관과 인문환경이 있으며 소도시는 대도시와 현대화수준이 다르며 집거구는 잡거구와 언어환경이 같지 않다. 외국은 중국과 통치제도와 주류의식형태가 틀린다. 이런 구별은 필연적으로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느때부터인지 연변에 거주하는 작가들에 의하여 나온 작품과 연변외의 도시나 연해지구의 작가들에 의하여 나온 작품들이 차이가 보인다. 중국의 56개 민족중 주체민족인 한족의 문학작품을 많이 수용하는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과 한족의 문학작품을 많이 수용하지 않는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된 작품들의 차이가 보인다. 한국에 자주 나들며 한국문학을 많이 공부하는 작가에 의하여 씌여진 작품과 한국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작가에 의하여 씌여진 작품의 차이가 보인다.’’   “요즘에는 미국의 뉴욕에 가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열띤 작품활동을 벌리는 류순호의 작품과 한국, 일본에 오래 체류한 김재국의 작품, 일본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작품활동을 벌리는 김문학의 작품, 그리고 한국과 러시아의 생활체험이 두터운 장혜영의 작품이 제나름의 특색으로 독자들속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있다.’’   “그리고 연해지구의 문학은 집거구보다 상대적으로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문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아울러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인, 문화인들과의 조화속에서 생성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띄운다.’’   그리고 논고의 결말 부분에서 최선생님은 조선족의 2009년 현재의 ‘문학지도’를 그려야 하는 이유를 천명하시면서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만약 누가 1945년 8월에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그렸다면 중국의 동북지도를 놓고 신경(지금의 장춘)과 연수와 통화와 녕안과 교하와 룡정과 연길과 조양천과 도문과 안도만 찾아놓으면 되였을것이다. 신경에는 ‘만선일보’가 있었고 최남선, 박팔양, 황건이 있었고 연수에는 류치환, 통화에는 김영팔, 교하에는 박영준, 룡정에는 윤동주, 강경애, 안수길, 김창걸, 연길에는 리욱, 조양천에는 김조규, 도문에는 현경준, 함형수, 안도에는 천청송 등이 있었다.’’   “만약 누가 1976년 10월초에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그렸다면 세계지도도 필요없고 중국지도도 필요없고 연변지도만 보고 연길만 찾으면 되였을것이다. 김학철, 정길운, 리근전, 김창걸, 리욱, 최정연, 황봉룡, 채택룡, 김례삼, 김철, 임효원 등이 모두 연길에서 살았다.’’   “만약 누가 2009년 4월에 중국조선족지도를 그린다면 연변지도만 가지고 안되며 동북지도만 가지고 안되며 중국지도만 가지고 안된다. 세계지도가 있어야 한다.’’   “연길, 룡정, 훈춘,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심양, 대련, 북경, 천진, 청도, 항주, 상해, 소주, 란주 등 국내도시들외에 서울, 평양, 도쿄, 뉴욕, 모스크바, 베를린 등 세계적인 도시들도 찾아야 할것이다. 그 도시들에 누구의 이름을 써넣겠는가? 이 문제의 해답은 필자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중국조선족문학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에 우리 문학을 관심하는 모든 석학이 힘을 합쳐 풀이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선생님의 혜안에 의해 걸러낸 결론에는 필자도 전적으로 찬동한다.   그러면서 ‘文學’에만 구애되지 말고 필자가 이 글에서 누누히 창도해온 ‘신조선족’의 生活文化圈으로 확대하여 그 文化圈지도를 그리는 것이 더욱 요망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精神史를 정리하는데 지대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현재 조선족은 정착 100년의 역사에서 미증유의 이동, 변모, 변용을 겪고 있으며 이런 변화된, 또는 되가고 있는 조선족을 정신사적 조감도에 의한 이론적 정리가 필요하며 안고있는 문제점을 파악하는것과 함께 변모된 조선족사회를 재발견하고 재규명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10    11. ‘신조선족’의 국제적위상과 의미 (김문학) 댓글:  조회:4170  추천:30  2010-06-25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1.'신조선족'의 국제적위상과 의미김문학   그리고 강씨는 사이드나 재미교포2세작가 이창래를 거론하면서 필자의 활동은 서구가 아닌 일본을 무대로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비판했다고 처음으로 지적한다.   "사이드나 재미교포 2세 작가인 이창래는 모두 복수 문화의 경계에서 활약하는 아웃사이더이다. 김문학은 서구가 아닌 동양, 특히 옛날 제국주의 지배자였던 일본에서 활동하며, 한중일 3국 문화의 경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단지 사이드가 서구제국주의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면, 김문학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상대를 어설픈 비난으로 폄하하기 보다는 우리 안의 약점, 병증을 비판함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높여 상대와 동등한 공존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 김문학의 궁극적이면서도 유일한 목적이다."   이어서 강씨는 이런 투철한 지적을 하면서 해외에서 활약중인 ‘조선족’지식인의 위상을 규명하는 의의와 필요성을 언급한다.   "사이드가 서양에서 오만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 받는것과 김문학이 우리 안에서 비난, 왜곡당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보수적인 미국의 지식인들은 사이드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맹렬히 비난, 반발했는데 그 배경에는 사이드의 이론이 폭로한 서양 제국주의의 치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배여있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안에서 김문학을 비난, 비방하는 이면에는 그의 책들이 드러내는 우리 안의 많은 치부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위에서 보아온 김문학의 진정어린 자체 비판의 건설적인 담론과 그 진면목을 미처 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 왜곡은 상당히 안이하고 조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 진면목에 대한 인식 없이 행해지는 과도한 평가나 감정적인 비난, 폄하 역시 다 난센스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동포지식인의 위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글러벌 시대를 살아가고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객과화 시켜 바라보는데 더 없이 적절하고 필요한 거울이 된다."   같은 책에서 심훈은 같은 유학체험을 바탕으로 근대문화를 회고하면서 신조선족의 경계를 넘은 글쓰기에 대한 위상을 신선한 각도로 피로 한다.   "김문학은 일찍 20대 나이에 중국을 떠나 일본과 국외에서 유학을 하면서 의식구조나 세계관에서 철저한 변화가 생겨난다. 그는 문화인격으로서는 코스모폴리탄형의 ‘세계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 변신에 대해서는 본인 역시 자부심을 느끼면서 늘 자랑하고 있을 만큼 의식적인것이다.국경을 초월한 코스모폴리탄형의 정신적 세계에서 국경이나 고향의 경계선은 없어지며 타자의 조국과 고향도 자신의 조국과 고향같이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그런 넓은 의미의 시각이다."   "타인의 고향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할 수 있고 내 고향도 타인의 고향 같이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세는 해외에서의 오랜 체험 없이는 완성되기 어려운 일이다. 필자도 일본에서 유학과 취직생활을 통해서 김문학식의 코스모폴리탄의 시점을 이해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됐다."   "세계 근대문화사를 둘러다 보아도 중국, 조선의 문단을 보아도 유학생의 근대문학, 인문학에 대한 공헌은 이루 형언할수 없이 크다. 중국의 노신, 곽말약, 주작인, 주양이나 호적, 임어당, 양실추, 하연이나 조선의 이광수, 최남선을 위시로 한 근대 문학의 대가들의 지도자적 역할이나 최근 유학생의 지식계에서의 위치를 보아도 실감할 수 있으리라."   "김문학의 독특한 위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들과도 또 한층 다르다. 그는 계속 이(異)문화속에서 자리를 지키면서 이문화의 위치에서 자기 민족문화를 객관화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인물은 우리 조선족에게는 처음의 경험이며, 신선한 문화적 공기와 지적인 자극을 주게 된다는 면에서 의의는 매우 크다.미처 느끼지 못한 이 중요한 의의를 더 이상 무시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잇따라서 국경을 넘은 ‘신조선족’의 글쓰기에 대해 속단은 금물이며 김학철선생이 지적했던것과 같은 지적을 하면서 정면에서 색깔과 편향없는 환원작업이 필요하다고 일갈한다.   ''아직도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젊은 그를 두고 이미 성취한 것보다는 앞으로 성취할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볼 때 그를 오늘의 안목으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경솔한 행동일 것이다.''   ''그의 맨탤리티와 조선족 문화사에서 차지할 위치에 관해서는 그와 맞먹는 역량의 평론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의 글을 읽고 그를 편견없이 색깔을 버리고 환원시키는 일이다.''   신생의 ‘신조선족’글쓰기에 대해 2003년의 시점에서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그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예견 할수 있는 것은 탁견이 아닐수 없다. ‘신조선족’의 ‘발견’은 그 시점에서 시작된것이다.‘신조선족’의 등장으로 조선족이란 작은 마이어리더, ‘고착된 분지적인 文化型디아스포라’가 국제무대에 알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적 무대’란 세계 조선민족의 네트웍보다 더 넓은 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가리킨다.   이제 머지 않아 주요 세계 선진국에서 ‘신조선족’의 존재적 가치는 날로 커질것이며, 그 위상이 자리잡으면서 최 前線에 선 ‘조선족’의 표상으로서 정착될것이다. 필자는 그 근미래를 예견한다. 그것은 10년~15년이면 족할것으로 추찰된다. 
9    10. 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 (김문학) 댓글:  조회:4393  추천:45  2010-06-23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0. 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김문학   국경을 넘고 경계를 넘어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는 ‘신조선족’을 그 ‘글쓰기’를 통해 그 지적(知的)양상을 가늠해보기로 하자.    국경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글쓰기를 해온 ‘신조선족’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국제적으로 필자를 평한 책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지성 김문학 읽기’ (강원석 편저 2003년, 한일문화교류센터 간행)가 그것이다.    이책에는 ‘조선족의 월경하는 글쓰기’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다루면서 필자에 대한 국제적 평가, 논평, 해독문, 비판 등을 다양하게 집성하여 ‘신조선족의 글쓰기’에 대해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으로 본다. 물론 ‘자화자찬’의 빈축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얘기하자면 필자 개인이 아닌 또는 필자를 통해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의 디아스포라적 의미를 인식하는 자료를 제공하고싶다. 이를 계기로 독자여러분의 ‘신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켰으면할 따름이다.    필자와 ‘조선족’의 ‘국경을 넘어 글쓰기’에 대해 본격적인 조명은 최삼룡선생을 비롯한 조선족평론가와 한국, 일본의 지식인들과 매체였다.    한국의 강원석은 연변조선족의 일부지식인의 김문학글쓰기에 대한 편견, 왜곡을 지적하면서 그 내실을 이렇게 밝히고있다.     '김문학은 많은 오해를 받고있는 인물이다. 오만하며 ‘친일적’이라는 등. 그러나 그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들은 사실 경계를 넘나드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자유로운 글쓰기에 대한 오해에서 유래된다. 소위 ‘김문학현상’으로 불리는 일부 네티즌이나 지식인들에 의한 그의 국제적 글쓰기에 대한 비난, 왜곡에서 그의 참모습을 곡해한 부분이 매우 많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동포지식인으로서 아마 김문학처럼 찬반양론으로 대립된 평가를 받는 사람도 그리 흔치 않을것이다. 그 역시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충돌속에서 국제적 명성을 확보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여러가지 차원에서 김문학은 ‘조선족’이라고만 한정시켜서 규정짓기는 어려운, 때로는 좀 거북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조선족’이란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나 국경을 뛰어넘어 국제적으로 문화활동을 벌이고 있고 또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국제적인 평판, 특히 조선족 안에서나 한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찬성과 부정, 비방, 왜곡까지 가미된 논란을 제3자의 입장에서 나는 오랫동안 방관해왔다.'    이어서 강씨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활동하는 김문학을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비교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나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활약하는 김문학을 바라보면서 미국에서 영어로 활동하고있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Siad)를 연상시킨다. 사이드와 김문학은 유사한 점이 많다. 그 유사성은 바로 ‘아웃사이더’와 ‘경계를 넘는 글쓰기’라는 단어로 축약할수있다. 사이드의 명작 ‘오리엔탈리즘’, ‘문화와 제국주의’는 두가지 문화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아웃사이드’적 의식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오리엔탈리즘’등의 책들은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화해로 이어주는 아웃사이더의 연결작용을 극명하게 완성한 이론으로, 탈냉전 시기를 맞이한 오늘날에 세계적 필독서로 평가 받고 있다. 동서양의 동등한 공존을 주장하는 사이드의 논리는 두 문화 사이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자신이 그 둘 중 하나에만 속하기 보다는 그 두 세계에 다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나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때, 그것은 슬프거나 박탈당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제국이 분리해 놓은 그 두 세계에 다 속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두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그는 자신의 그 포지티브한 ‘아웃사이더’적 특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다.    ‘하나 이상의 역사와 그룹에 속해있다는 느낌이 한 문화와 한 나라에만 충성심을 느끼는것보다 더 나은 대안이 될수 있다.’    그는 서양에 대해 분노와 복수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남겨놓은 장점을 이용해 서로의 동등한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편이 낫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세계화 시대를 맞은 오늘날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이 되었다.      
8    9. 동아시아의 3국어 사용자 (김문학) 댓글:  조회:4765  추천:31  2010-06-01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9. 동아시아의 3국어 사용자 – 식민제국의 언어적 기억김문학   ‘디아스포라’에서 다시 생성된 디아스포라 – ‘신조선족’의 국제적, 국내적 경계를 넘은 등장은 조선족 100년사의 새로운 한페이지를 열어놓은 대희사이다.    조선족정신사에서는 전례없는 특기할만한 현상이다. 이제 잠간 담론의 무대를 일본에서 유학, 정착하고있는 ‘신조선족’으로 옮겨보면서 그 다중 언어적 실력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현재 일본에 살고있는 조선족, 중국에서 건너와 유학, 취직 또는 무역, 대학교수, 회사원, 지식인, 학자, 술인 등으로 활동하는 일본속의 ‘신조선족’이 일본사회에 可視化되고 갈수록 주목을 받고있다.    절대다수가 중국국적을 소지하고있으며 성명(姓名) 자체에서는 보통 ‘중국인’의 성명과 똑같게 일본식으로 읽혀지기에 그 존재가 표면에 나타나기 어려울 듯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조선족’이란 명칭이 일본인사회에서 이제 낯설지 않다.    일본인들이 조선족에 대해서 제일 경탄을 금치못하는 사항이 바로 조선족이 ‘3국언어 사용자’라는 언어실력이다. 보통 일개국밖에 구사하지못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동아시아 일,중,한 3국언어를 유창히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경이로운 실력이기도 하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도 한족들에게서 ‘2중언어사용자’로서 선망의 상대가 되고있지 않은가. 물론 연변조선족은 여전히 그 소분지형 문화의 소산으로 한어를 유창히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비례적으로 74%나 된다는 통계를 본적이 있다. (물론 구사할수있으나 정통하거나 유창하지 못한 사람의 비례는 농촌인구를 포함하면 그정도는 될것이다. 실제로 내가 사귀던 동북사대시절의 연변친구들속 거의 한어를 못하거나 유창하지못한 사람이 대수였다. 대학입학 첫 건강진단때 화룡에서 온 K씨는 팔에 예방주사를 맞을 때 한어를 잘못 알아듣고 바지혁띠를 풀고 엉덩이를 내보여 주위에서 웃음통이 터진 실례도 있다.)    그러나 유창정도야 차이가 있지만 재일중국조선족은 3개국어 사용자로서 주위의 일본인,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선망의 상대가 되며 취직률도 상대적으로 높다.    그리고 중국에 있을때는 거대한 한족앞에서 작은 마이너리티(소수민족)인었으나 일본에서는 중국인과 한국인과 다 같은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란 점에서 동등한 위상으로서의 심리적 우세도 주어져있다.    조선족의 일본 유학생이 많은 이유는 100년전 일본제국의 식민주의피지배자였다는 역사적 기억과 밀접히 연계성을 갖고있다.    대만, 만주와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배권에서 일본제국의 언어정책은 그 민족의 독자적 언어문자에 대한 배제를 특히 1940년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으로 실행했다.    일본학자들 자신의 표현을 빌면 ‘조선, 대만, 만주 등 근대 일본제국이 품어안은 식민지는 ‘국어(國語)’ 즉 일본어가 얼마만큼의 영역으로 확대시킬수있는가의 실험장이었다.    만주, 간도에서 이 실험장안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모국어인 조선어와의 유사성으로 인해 일본어를 가장 우수하게 마스터했으며 그런 연유로 한족들의 시기를 살 정도로여서 때로는 ‘二鬼子’로 불리기도 했던 역사적 체험을 가지고있다.    반세기전의 식민제국언어의 일본어는 개혁개방후 조선족 학교교육의 조선어, 중국어와 함께 외국어로 우선 배우기 쉬운 언어로 일본어가 선행되였다.    식민제국 언어의 ‘기억’이 재생되여 조선족 외국어 교육이 자연 선택되였다. 지금은 영어교육도 보급되고있으나 일본어는 여전히 그 같은 식민의 기억으로 제일 습득하기 용이한 언어로서 조선족이 늘 선택하는 외국어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제국식민정책에 의해 나(라)를 좇겨 중국에 온 조선족의 후세대가 다시금 식민지제국이였던 일본으로 찾는 그런 ‘회전’이 글러벌화속에서 아무 거부감없이 행해진것이다.    그래서 그 덕으로 중국의 마이너리티로서 중국이란 이 거대문화의 모습에 가리워졌던 조선족이 선참으로 선을 보이게 된곳이 한국이 아닌 일본이였다.    20년전 필자가 처음 일본에 유학생으로 도일했을 때 아주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대학선배 한,둘이 일본에서 유학경험을 거쳐 ‘조선족은 일본어를 너무나 완벽하게 잘하는 인재’라는 표상이 따랐던것이다.    그런제 지금 일본에는 일본어를 무기로 일본이란 사회무대에서 일본인이나 한국인, 중국인 뒤지지않게 활약하는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각 분야에 존재하고있으며 우리 조선족의 위상을 알리는데 성공한 지식인도 적지않다.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파워실력을 발휘하여 그 위상을 국제적으로 과시한 것은 바로 30~40(년)대의 ‘신조선족’이다. 국내에서 조선족들이 역설(力說)하던 조선족의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일본에서 국경을 넘은 ‘경계인’들이 실현한것이다.    일본에서 활약중인 ‘신조선족’과 함께 그뒤에 이어진 미국, 유럽, 그리고 수자적으로 가장 방대한 만의(?) 재한조선족, 이 같은 ‘신조선족’을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정체를 규명하여 ‘조선족정신사’의 볼륨있는 새장을 열어야 한다.
7    8.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 (김문학) 댓글:  조회:4660  추천:39  2010-05-30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8.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김문학   그럼 ‘디아스포라’의 개념, 카테고리부터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기로 하자.    사실 ‘디아스포라’의 개념은 복잡하고 그 개념 정리는 ‘문화’개념과 유사한 다층성을 나타내고있어 그 기본적의미를 우선 파악하고저 한다. 1970년 이래 세계 탈식민주의문화이론에서 문화인류학의 용어로 쓰인 ‘디아스포라’를 원용함으로써 1990년대에 기본상 정착되면서 2000년이후에는 그에대한 개념카테고리의 해석이 계속 증식되고있다.    ‘파종’(씨뿌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어에서 유래된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이 팔레스티나에서 ‘이산(離散)’을 주로 가리키는 용어로 되였으며 비록 이산은 되였지만 종교, 텍스트, 문화에의해 연결됐다. 유대의 ‘디아스포라’는 완결성(integricy)과 동질성을 나타내기위로 사용되였던것이다.    시초부터 유대적 종교의미로 각인된 ‘디아스포라’가 일반화되여 서로 다른 공간, 나라, 사회속으로 진출하여 경계성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간이나 집단을 가리키게 되였다. 이처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디아스포라’는 국외추방자, 난민, 외국인노동자, 망명자, 在外同共体, 宗教共同体,등 영역으로 확대된 용어로 되어 그 양상이 복잡중층적이되있는것이 추세이기도하다. 로빈 • 코엔의 ‘글러벌 • 디아스포라’은 또한 ‘피해자디아스포라 • 노동디아스포라 • 제국디아스포라 • 교역디아스포라 • 문화디아스포라’로 분류시킴으로써 디아스포라현상을 유대적독점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 개념적 공간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R • 브루베이커(Rogeres Brubaker) ‘디아스포라’의 기준을 (1) 이산 (2) 고향지향성 (3) 경계의 유지 이 3가지로 규정짓는다. (1), (2)는 기본이고 (3)은 디아스포라의 불가결의 중요한 기준인데 생활하는 호스트사회에대한 독자적 아이덴티티의 보유를 의미하며 또한 그 역동성으로 이종혼효성, 유동성, 크레올화, 혼합주의 요소가 강조되기도한다.    늘 인용되는 슈트아트 홀은 ‘디아스포라경험은 본질이나 순수함 등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종성(異種性)의 인식에 의해 규정된다. 차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차이와 함께 차이를 통하여 살아가는것 같은 ‘아이덴티티’의 개념, 즉 이종혼교성에 의해 나타난다고 언급했다.    ‘디아스포라’의 복잡한 개념을 중국의 조선족 특히 ‘연변조선족’에 적용시켜 조선족의 위상과 정체성(아이덴티티)등을 해명하려는 동기는 좋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하고싶은 서양적학문의 개념용어를 적용시키는데는 그에 상응된 방법이 따라야한다고 여긴다. ‘이민자’, ‘망명자’, ‘독립운동가’로서 중국에 이주하며 살아온 초기의 조선족은 ‘디아스포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소분지내부’에서 ‘고착돼버린’ 과거의 ‘디아스포라’이다.    따라서 지금 3~4세, 21세기를 살고있는 조선족사회를 ‘방법으로서의 디아스포라’로 포착하는 것이 요망된다. 즉 1990년이래, 2000년이후 형성된 국내의 경계를 넘은 월경적 조선족, 그리고 해외로 국경을 초월한 조선족 이들을 필자의 명명인 ‘신조선족’으로 설정하고 ‘디아스포라’로 해명하는 것이 타당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자신을 디아스포라로 자칭한 것 역시 21세기 글러벌상황하에서 일어나고있는 신현상, 조선족으로 말하면 월경하는 ‘신조선족’이란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임을 밝히고자 한다.    조선족 또는 연변의 소분지형 문화속에서 ‘고착된 디아스포라’에서 다시 증식된 2000년이후의 ‘신조선족’ 이들을 해석하고 관망하는 작업은 즉 다시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를 환원시켜 조선족의 신패턴사회를 해독하는 방법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특히 연변조선족)은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원용하여 말하자면 소분지형 문화에서 고찰해본듯이 ‘디아스포라’ 요소를 무의식적으로 억압시킨 또한 디아스포라의 ‘경계성’, ‘경계인’을 스스로 액체나 고체덩어리같이 응고시켜 그 파워나 가능성을 발휘할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오히려 오늘 21세기의 ‘신조선족’, 연변이란 조선족중심에서 이탈된, 이역시 필자의 명명이지만 ‘탈변입중’(脫边入中)의 인구이동에 따른 조선족에 적응시켜서 보면 ‘신조선족’의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상(像)이 뚜렷해진다고 보고있다. (이음)일본 히로시마에서
6    7.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4824  추천:31  2010-05-24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 7.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디아스포라’   김문학     ‘경계성’, ‘양가성’, ‘혼효성’ 등 키워드는 반드시 현재 많이 유행하고있는 ‘디아스포라’와 직결된다. 최근 조선족학계나 문단에서도 ‘디아스포라’가 조선족을 해석, 해독하는 하나의 개념으로서 빈번히 소개, 담론되기도 한다. (김관웅, 김호웅 등)    조선족 지식인으로서 처음으로 필자가 ‘디아스포라’의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소개했고 또 스스로 자신을 ‘디아스포라, 월경의 디아스포라’라고 자칭했다.    아침 식사는 북경의 레스토랑에서 우롱차에다 기름빵을 먹는다. 그리고 정오에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서울 시내로 달려가서 삼계탕에 들큰한 동동주 한사발을, 저녁은 어느새 도쿄에 날아와서 신선한 생선회에 기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런 3국 동시 체험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된지도 오래다. 도쿄의 아담한 선술집에 홀로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어떤 기묘한 꿈속에 있는듯한 착각을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없이 해보았다.    나에게는 이런 ‘혼란상태’가 오히려 하나의 낙인것이다. 나는 스스로 자신을 일종의 ‘분열인간’이라고 부른다. 내가 감히 ‘분열인간’이라고 자랑삼아 큰소리 칠수있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항로와 밀착된 체험이 있기때문이다.    중국에서 태여나 어릴때부터 한국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규사하며 2중 언어의 문화생활을 해온 내가 20대가 끝나는 무렵에 일본으로 유학와 일본문화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한지도 벌써 10년이 가까워 온다. 그리고 또 모국인 한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모국문화를 거듭거듭 체험해왔다.    게다가 해마다 중국에는 두세번 꼴로 일시 귀국해 현지 생활을 느끼고 온다.    내 가슴속에는 중국문화와 일본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라는 동양 세 나라의 문화에다 조선족문화까지 비빔밥같이 온통 엉키고 뒤섞여 내입에는 가장 맛있는 문화 비빔밥이 있다. 이처럼 자기자신을 분열시키고 복합화시키는 체험없이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향한다는 것은 허위적인 슬로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 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벌써 50여년전에 미국의 사회학자 E.V. 스통키스가 그의 저서 에서 경계인(境界人)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경계인이란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지않고 복수의 집단에 소속되긴 하나 어느 한 집단에도 완전히 빠져버리지않으며 그 귀속이 분명하지않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경계선,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경계선을 의식하지않고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최근 문화인류학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디아스포라가 이에 해당된다. 원래 유태인의 ‘이산’이라는 뜻에서 온것인데, 자기 문화에도 이문화에도 소속되지않고 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창조의 에너지로 삼는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동과 이산을 뜻하던 네거티브 개념이 국제화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소중한 포지티브 개념으로 바뀌었다… (‘나는 즐거운 越境人’ 1999년)    인용이 길어져서 죄송하오나 필자가 최초로 제기한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맹렬히 비난하던 연변의 일부지식인들이 지금에 와서 오히려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조선족문화코드를 푸는 필수적 무기로 삼고있으니 아이러니를 느끼며 또한 ‘상전창해’를 느끼게 한다.    그토록 필자의 인격모욕까지 병행하면서 ‘디아스포라’를 사갈(蛇蝎)시 하던 분들이 아무튼 학문적인 개안(開眼)을 이루었다는 것은 경하할만한 사연이며 학계의 ‘진보;를 노정한 일이니 필자 역시 만열(滿悅)하다.  
5    6. 小盆地型 문화 (김문학) 댓글:  조회:4707  추천:26  2010-05-22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6. 小盆地型 문화 김문학  조선족의 고향, 민족적 구심점인 연변의 문화를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해명해봄으로써 그 내실과 함께 연변이 안고 있는 장점, 결점을 석출해보기로 하겠다.   ‘조선족개조론’의 연변에 대한 그 결함을 비판을 한 ‘이미지 선행’으로 아마 필자가 연변에 대하여 혐오하고 부정적 표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심양에서 태여난 나는 강원도 강릉 출신의 후예로서 조선족이 집결된 연변에 대해 어릴 적부터 막연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지금껏 40이 넘도록 나는 겨레가 같이 모여사는 지역에서나 나라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70년대 초 소학교를 다닐 때 ‘조선어’교과서는 요녕성교육학원에서 편찬한 ‘漢字’어가 섞인 ‘朝漢混用’의 문장들이었다.    그 뒤 차츰 출판되는 교과서로 바뀌면서 ‘연변’이란 지명을 알게 되었다.   연변에서 살아온 동포들은 아마 실체험이 없어서 잘 느낌이 안 올 수도 있는데 늘 이민족과의 경계에서 살아온 필자가 연변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동북사대시절에 나는 연변에서 온 동포들과 늘 사귀고 축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연변의 ‘사과배’의 미미(美味)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최초로 연변을 방문한 것은 1987년 봄이었다.   연변의 조선족 민속을 알아보고자 혼자서 찾았다.   연변 경내에 들어서자 열차 안에서는 조선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연길 역에 하차했을 무렵 치마저고리차림에 머리로 짐을 이고 가는 할머니, 연길역 앞의 조선족여성의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조선어간판, 조선말, 억양이 좀 투박하긴 했으나 재밌었다. 이런 연변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나는 생각을 뇌리에 떠올려보았다.   필자의 어머니도 2년 전 별세하기까지 ‘한번 연변에 가보았으면 얼마나 좋으랴!’하고 되뇌이시군 하셨다. 이 같은 심리적 동경심을 아마도 ‘피는 못 속인다’는 말로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의 민족적‘구심적’, 겨레의‘고향’ 그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연변 서시장에서 이쁘장한 아줌마가 ‘맛보이소’하면서 건네주던 감자떡이 먹고 싶어지군 한다.   고향과 핏줄, 이런 것은 추상적 관념이나 의식보다도 실 체험에서 느낀 그 따스한 겨레의 손길에서 받는 체온에서 표상화되는 것이다.   이런 연변, 이런 우리조선족의 중심이며 고향인 연변의 문화적 양상을 이제 다시 바라보면서 필자는 그것을 추상적인 이론으로 접근하려한다.   지금까지 나는 수차 연변을 방문했는데 연변의 그 지형적 특징이 오늘도 선명히 기억에 강인돼있다. 연길시는 주변에 높고 낮은 구름이나 산에 포위돼있으며 그 시내에는 물줄기(강)이 흐르고 전형적 소형盆地(분지)이다.   이 폐쇄된 공간속에 공예품같이 정교로운 도시가 생겼고 이 분지 내에서 조선족이 조선족일 수 있는 한족과 이질적인 조선어(함경도방언)를 구사하면서 조선족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연길시 밖으로 자동차로 용정과 도문으로도 가보아도 역시 사방 산에 둘러싸인 크고 작은 분지가 올망졸망 연결돼있었다. 연변은 이렇게 산과 산속에 묻힌 소분지의 세계였다.   이 같은 소분지안에서 영위돼온 작은 공동체, 그 작은 공동체 안에서 조선족겨레끼리만 무어서 형성된 민족집합공동체. 여기에는 모든 외부세계와 단절시키거나 또는 그렇게 멀지않은 공동체와 꼭 산 고개를 넘어야하는 연결성이 있었으므로 옛날에는 교류가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인류학자 요네야마(米山俊直)가 쿄도의 분지를 ‘소분지우주’로 칭하고 일본문화의 다양성을 이 ‘소분지우주’로써 포착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그의 개념대로 따르면 연변의 소분지 역시 하나의 특수한 ‘소분지우주’로 그 속에서 인간들의 세계관, 동질성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그리고 바로 이 소분지형 지리로 인해 조선족이 분지 내에서 함께 빼곡이 모이면서 그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조선족문화의 ‘소분지형문화’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이 소분지형문화는 연변조선족의 장점이다. 동시에 또한 그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정교롭고 아름다운 그리고 귀여운 분지속의 도시 연길, 그리고 도문, 용정 … 이런 중호형도시가 소분지로 돼있다. 그리고 산을 사이 두고 연결돼있다. 연변전체가 큰 분지의 연합체이다. 소분지의 세계 안에서는 소분지적 민족공동체가 폐쇄된 공간에서 존속되기는 쉬운 한편 외래의 문물을 흡취하는 데는 불리한 면이 있고 경계를 넘는 문화적 창조하기엔 불리한 것이다.   더욱이 연변이 1990년대까지 북동아시아 중, 러, 조가 인접된 트라이앵글지역으로서의 역할을 하지못한 것은 그 변경적인 지연적‘우세’를 망각하고 ‘변경인’으로 자각하며 오픈된 사고를 갖고 있지 못한 것도 이유의 하나겠다. 그리하여 적극 외부를 유치하기보다는 외부에서 들어오기까지 기다리는 그런 수동적 자세를 보였다. 여기서 노정된 사고자체가 ‘변경인’을 자인한 연변동포들의 한계였다.   연변은 경계를 사는 ‘경계성’이 있다고 요즘 연변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언급하는 담론의 화두가 되고 있으나 필자는 그런 주장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얼마만한 내용이 현실적인가 회의스럽다.   왜냐면 중국 속에서 소분지문화를 형성하면서 그 상대적으로 외부와 차단시킨 ‘조선족생활권’을 만들어 생활양식은 거의 ‘조선족’ 그것이었다. 환언하자면 중국속의 ‘小朝鮮’적인 분지였을 뿐이다.   이속에는 재일교포가 일본어와의 갈등속에서 격투하는 번뇌와 경계를 사는 심리적, 민족적인 그런 ‘싸움’에서 유인되는 교차로적 ‘경계성’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조선어 단일언어만으로도 충분히 통하는 연길‘소분지’내지어 구태여 중국인과의 ‘경계’에서 오는 그런 고뇌, 격투는 거의 생략되었거나 필요로 할 여지가 크지 않다.   100년 전 이주 당초에는 현지중국인들과의 이 같은 ‘경계’에서 겪어야 할 접전적격투는 빈번했지만 그것이 점차 3세대, 4세대로 백년을 지속됨으로서 하나의 독자적인 외부와 차단시킨 文化, 民族的空間으로 ‘고착’돼버렸다. 그리하여 앞에서도 지적한 것같이 민족의 거울이며 살아있는 교과서라는 조선족(연변조선족)의 文學에는 他者로서의 중국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그런 중요한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성인의 학문적인 고차의 민족자화상표상에도 이런 팩터는 결여돼있다.    자는 조선족(특히 연변조선족)의 전래적 표상을 ‘경계의 공간’ 他民族과의 인접된 교차공간에서 생성되는 양가성(Ambivalenz)이나 혼효성(Hybriaity)같은 것은 호의적인 ‘허구성’이 아닐까고 생각되기도 한다.      당연히 100%의 ‘허구성’은 아니다. ‘연변분지’에도 다소 존재하나 ‘안쪽’으로 진입하면서 중국인과 완전히 지근거리에서 인접되 사는 ‘산재지구’라 불린 광대한 지역의 조선족이 더 앞에서 말한 ‘경계의 공간’에서 ‘경계성’을 띠고 있다고 봐야한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4    5.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 (김문학) 댓글:  조회:4805  추천:46  2010-05-16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5.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김문학 이렇게 ‘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을 방법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면 또 하나의 큰 ‘결함’이 발견된다. 무슨 결함인가? 우리의 ‘중국조선족’에는 ‘중국’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도 ‘중국조선족’이라고 자칭한다. 그것은 중국 속에서 살고 있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 명칭이기도 하다. 우리 지식인, 문학인, 정치인, 언론인에서 보통 농민대중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삶의 장(場)일뿐만 아니라 그 장속에서 삶을 이어가면서 (문화인류학적인 용어로서는 경계를 살아간다고 한다) 나름대로 민족문화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경계에서 ‘경계인’으로 생활자로서 조선족의 정체성, 자기인식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 그 ‘중국文化’와 경계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는 그토록 밀접한 관계상대로서의 이 같은 ‘중국’이 결여한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 제도로서의 유대만이다. 그것은 또한 부득불 중국국민으로서 살아가는 제도적국민(시민)으로서 패스포트적인 동일감을 느끼려 한다. 그리고 정치, 제도외의 조선족은 기본적으로 민족적 겨레로서의 조선족 음식, 음악, 습속예절(유교적 예의)면에서는 즉 생활양식=文化적면에서는 한족文化에 대해 아무런 연결성이나 또 그만큼  關心이 박약한 채 ‘끼리끼리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연변이 이런 현상이 가장 보편적이고 강도 높고 점차적으로 ‘안쪽’으로 내려오면서 그런 양상이 담박해지는 실상을 보인다. 즉 반대로 연변외의 조선족이 중국, 중국인과의 관계, 환경 속에서 밀접한 생활양식 및 사고양식을 노정하고 있다. 아무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조선족은 중국에 살면서 그 경계의 인접한 ‘중국’의 팩터를 정치적제도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이면서 교우적, 언어적 및 습속적 차원에서는 ‘우리 조선족’것만 선호하는 그런 양식을 고집하고 있다. 필자가 이 현상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조선족의 삶의 양식을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국, 중국문화에 대한 인식, 그에 대한 접근 양상의 결함 그 자체를 거론하자는 것이다. 중국이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는 훌륭한 타자(他者)이지만 조선족은 이 타자를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대중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언설적으로도 지극히 결여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의 문제에서 유발되는 것이기도 한데 흔히 조선족내부에서 그냥 안일하게 ‘우리조선족’하는 방식으로 단선적사유로 통했으며 한족과의 비교문화론적인 방법이나 문화인류학적인 비교의 접근도 우리는 게을리해왔다. 우리는 한족이나 여타 소수민족보다 우월하고 교육열이 높다는 ‘자화상’으로 안일하게 표상화시키면서 ‘되놈’ 아니면 무슨 놈 하면서 차별화해온 성향이 많았다. 일본은 ‘왜놈’이고 서양인은 ‘양놈’이고 하는 식으로 그냥 있는 대로 불러주는 것 이질문화를 상대화시키는 시각이 결여했다. 오늘 ‘한국인’에 대한 지칭 역시 흔히 ‘한국 놈’으로 통한다. 문화의 상징적 표상인 문학의 글쓰기에서도 한족과 경계에서 살아가는 ‘경계인’으로서의 조선족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학에는 한족과의 관계양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족과의 관계, 마찰, 교류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조선족이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문학은 우리의 ‘조선족’이 ‘조선족’으로서만 외로운 ‘간도(間島)’에서 살아간다는 그런 의식이 강하며 한족 등 중국인 중국과의 경계의식이 박약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경계인’, ‘디아스포라’적의 고민과 번뇌, 컬쳐쇼크 등이 제게된 우리의 ‘중국 없는 조선족’, 중국과 괴리를 한 실상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이나 일본, 브라질 등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문학에는 호스트국(살고 있는 나라)의 현지인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과 갈등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현지의 호스트국어로 집필하여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조선족작가들 속에 중국어로 창작집필할 수 있는 자가 극소수이며 그 영향력을 아직 과시하지 못하고 있다. 십년 전 ‘조선족 개조론’에서도 이 현실을 지적했지만 아마 그것을 정면으로 수용할 자세나 토대가 미 준비 상태인 듯 하여 유감스럽기만 하다. 요컨대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정면에서 중국을 우리와 직결된 자화상으로서의 ‘타자’라는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류를 하며 우리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어필하고 한족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대도시의 조선족이 그런 환경이 주어진 이상 노력만하면 전망은 아주 밝을 것이다. 주위의 많은 타자들과 깊숙히 파고들어가 어울리고 주류사회에로 진입하는 방법도 조선족의 파워와 문화를 전파하고 살아남는 길의 하나라는 인식을 이제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와있다. (다음 계속) 일본 히리시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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