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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선족》월경론
35.鲁迅은 왜 수미일관 中国国民性을 통렬히 비판했는가?
김문학
노신의 세계관과 사상은 日本의 异文化时空의 体验속에서 생성된다. 절강 소흥출신의 무명의 청년 주수인(周樹人)으로부터 국민적 작가 문호 鲁迅의 탄생에는 이문화체험이란 중대한 배경이 있었다.
노신은 모택동에 의해 3개의 “위대한” 라벨이 붙은 인물이지만 그런 장식어로만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성격의 인물상을 노정하고 있다. 필자는 노신을 바라보는 바로미터가 바로 일본에서의 이문화체험, 문화수용이라는 점이라고 지적 하고 싶다. 그는 국경을 넘은 월경적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을 갖춘 “국제인”, “세계인”이었다.
노신연구는 최근들어 신예학자들에 의해 “비판”과 함께 전례없는 활발상을 전개하지만, 그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문학자로 높이 숭경하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투철하다고 생각된다.
원 노신박물관 관장이며 현재 중국인민대학 교수인 노신연구의 중진 손욱(孫郁)교수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했다.
필자가 노신에 대해 고민한 문제의식은 “왜 노신이 그토록 각골통한(刻骨痛恨)의 정념으로 중국국민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그것을 수미일관하게 그자신의 使命으로 삼았는가? ”는것이다.
이같은 문제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즘에서도 많은 연구와 발설을 했으나 정곡을 찌를 해답을 못찾아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나 혁명사상가의 차원으로 편향해 표피화되고 또 그것이 노신論의 고정트이 돼버렸던것이다.
필자는 그 해답을 노신의 주수인시대 일본유학을 통한 이문화이해의 시공간에서 찾고자 한다. 1902년 22세의 주수인은 1907년 여름까지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다. 그곳에서 일본문화를 통해 서구문명에 開眼한다. 주수인은 일본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양식에 자신을 적응시키는것을 이문화이해의 방식으로 삼는다.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그는 잘 신었으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神田)의 중화요리점에서 중국 火腿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사먹은적이 없다”, “동경에서 그가 의식적으로 일본식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 (마루야마 노보루「노신」1965)
노신이 평생 기른 수염모양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가 일본에서부터 선호했던것으로 죽는날까지 보전하였다. 그의 수염모양새를 두고 시비를 건 무료한 지식인도 있을 정도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한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경계의 높이를 승화시킨다.
노신의 뒤에는 많은 일본, 일본문화가 직결돼있다. 그가 가장 일생을 통해 존경한 사람은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 스승 후지노 선생이었다. 팽생의 지기 외우(畏友) 역시 일본인 우치야마(内山完造)였으며 그와 아들 해영의 전문수진의사는 일본인 의사였다. 지어 그가 사망직전에 남긴 절필 역시 일본 외우에게 쓴 일본어였다. 노신은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다. 지어 1932년 일제가 동북3성(만주)를 강점했을때 “항일운동”에 대해 노신은 준혹하게 지적한다.”이 排日의 소리속에서 나는 감히 견결히 중국의 청년들에게 충고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에게는 우리가 배워야 할것이 많다는 그것이다.”
필자는 노신의 작품속에서 수없이도 많은 일본어적 요소를 발견했다. 그의 언어에는 중국문법에 맞지 않는 문법구사 지어 단어까지도 일본어를 그대로 수용했던것이다. 그의 白話文은 일본어 文体에서 비롯된것이다. 그의 친일적 경향은 모두 일본의 이문화체험속에서 연유된다. 주수인이 노신으로 되는데 밑거름은 일본이었다.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은 미친것은 우리가 간파했던 또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다.
노신의 “국민성개조”의 지향은 일본에서 H. 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비판서,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에 우후죽순같이 나타난 서양 학설, 철학서를 노신은 일본어를 통해서 접했다. 그러던 그는 유학생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외국문학번역서를 간행하기도 하며 언설적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1909년 6월 귀국한뒤 그는 ‘적막’과 소침속에서 자신을 모대김에 맡길뿐이다. 왜 그렇게 중국국민성개조에 왕성한 정신력으로 불타던 그가 갑자기 귀국하여 의기소침하게 되는가? 필자는 이 단계의 노신에 대해 늘 의문을 품었다. 그가 환등슬라이드를 센타이에서 보면서 우매한 중국구경꾼들의 모습에서 중국국민성개조에 뜻을 두개 되고 문학으로 전항했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왜 실천하지 못했을가? 실제적으로 1918년 5월 「광인일기」를 「신청년」에 발표하기 까지 그는 방황하는 주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정리가 그의 일과이다싶이 했다.
그가 소침하고 失意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가 비교연구끝에 찾아낸 답안은 한마디로 이문화체험의 시공간에서 받은 역(逆)발적인 컬쳐쇼크였다. 즉 본국 동포들에 익숙했던 중국, 중국인이 오히려 일본문화에 익숙했던 그에게 “이문화”적 시간, 공간으로 보였으며 그 “후진성”에 끝없는 절망감과 지어 험오감마저 느낀것이다.
노신은 일본에서 “국제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체험한 조선족이 연변에 되돌아 와서 느낀 연변의 “후진성”, ”농촌적인 모습”과 연상시키면 이해가 갈것이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 된 노신, 그가 귀국한뒤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모습은 “열등” “후진” “우매” ”고루” “아Q”등 부정적 표상으로 꽉 차있었다. 이미 다른 표상이 들어설 틈마저 없었다.
즉 그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중국인을 바라본것이었다. 그가 서거하기 며칠전 상해 일본조계에서 일본의 외우 우치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의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였다.
노신의 중국, 중국인의 “열악성”에 대한 절망감에 가까운 비판, 부정은 국제적 안목, 복수문화의 경계를 살던 사상가 노신의 숙명이었다. 그 숙명은 노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또 그 한계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뜨게했던것이다. (필자의 노신論은 저서 「노신 뒤집어 보기」에 자세히 쓸것이다)
노신이란 인생과 언설적인 대선배의 뒤를 이어 백년후 일본에서 유학, 취직 정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비슷한 이문화체험의 입지에서 노신의 視覺, 知見, 境界성에 대해 너무나 이해가 간다.
유사한 유학의 이문화체험의 여과가 없이 노신의 이같은 고층차의 세계인적 사고를 이해하기는 지난(至難)할것이다.
필자가 왜 우리 조선족의 열악성을 비판하면서 숱한 조선족의 결함, 단점을 “준혹”하게 꼬집고 그 “개조론”을 창도했던 이면에는 역시 일본이란 이문화체험자의 “경계성”으로부터 발한것이다. 필자는 늘 “세계인” ”지구촌인”하는식으로 자칭하기를 즐기는 모습을 일부 지식인들에게서 비난과 중상의 타깃으로 점찍혔던것 역시 이해한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거만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세계적” “경계성”적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때문이다.
이제 신조선족의 월경은 경계성을 사는 “세계인”을 양산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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