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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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2013년 05월 19일 09시 56분  조회:5140  추천:11  작성자: 김문학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5.
이제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할빈역 플래트홈에서 발발한 역사적인 의거 장면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안중근의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난 다음 이토의 시신을 밟고 “코리아 우라(한국만세)”를 세 번 목 놓아 부른다. 그리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결박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간결하고 판에 박은 묘사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어딘가 조잡하고 사살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

이제 그날 의거에 대해서 한번 객관적으로 기술해보자. 안중근에 대한 일본 측의 취조기록, 로씨아 측의 증언기록이 다수 있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쓰자면 적어도 단행본 한권의 분량이 된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그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여기다 제시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는 제3자 즉 일본 측도 한국 측도 아닌 로씨아 측의 보고를 중심으로 서술키로 한다.

이토가 1909년 6월 1일 한국통감을 사양한 뒤 추밀원의장을 맡았는데 원래 대만 식민지경영 경험이 있는 현 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고토신페이의 권유로 만주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씨아의 대장상 코코프체프와 면담하기 위해서 만주를 일주, 할빈으로 왔던 것이다.

10월 26일 아침 9시에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자 코코프체프, 콘스탄티 미텔등 로씨아측 일행이 이토가 있는 귀빈차량에 올라 인사를 나누고 20분정도 회담을 했다. 그런 후 코코체프가 플래트홈에서 로씨야 철도수비군의 의장대의 열병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토는 정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상대의 간청에 이기지 못해 응하여 9시 25분쯤 차에서 내렸다. 그때 동석했던 로씨아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안의사의 의거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토공이 로씨아의장병을 사열하고 5보내지 7보 걸어서 일본인 집단 환영대열에 다가갔을 때 로씨아의 장병 사이에서 몇 차례나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두 차례 발사소리가 난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총을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범인으로 보여 지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쳐 들고 의장병 앞을 지나가는 이토공을 향해 또 한발 쏘았다. 그리고는 급히 뒤돌아서서 이토공을 뒤따르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발사했는데 아마 3,4발인가 발사했다. 마지막 발사는 땅을 향해 쏟 것 같은데 생각건대 이 총알이 타나카 세이조(만주철도 이사)를 맞혀 부상시킨 것 같다.
(중략)

발사가 끝나자마자 동청철도회사 철도경찰서장대리 기병대위 니키트로프가 2회 발사때 범인에게 덮쳐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하도 강해 쓰러뜨릴 수 없었다. 격투 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그때 범인은 로씨야어로 “코리아 우라”하고 세 번이나 외쳤다. 범인의 발사 시간은 30-40초가 넘지 않았다. 정거장에 있는 철도경찰의 숙직실에서 안정을 되찾은 범인은 자신의 흉행에 대한 동기를 진술했다. 약 20분 뒤에 이토공의 사망을 알려주자 범인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숙직실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편 이토는 어떻게 되었는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은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무로다 요시아야등에 의해 부추 켜 열차 안으로 운송되었다. 급기야 이토를 쏘파에 눕힌 후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에 응급처치를 강행했다.

당시 수행의원으로 처치를 했던 코야마 의사 (小山)의 증언에 따르면 피탄 된 흉부와 복부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했으며 이미 치명적인 상임을 즉각 알았다고 한다. 정신이 좀 들라고 코야마가 전해주는 브랜드 두 컵을 마시고 난 뒤 혈색을 잃고 안색이 종이 장 같이 창백해진 이토는 3번째 컵은 끝내 들이마실 기력 마져 없었다. 통역한테서 한국청년이 저격자라는 말을 듣고 이토는 “바보 같은 자식”하고 한마디 뱉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그리고 피탄 30분만인 10시에 절명했다.

6.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결코 이토가 숨지기 직전에 남긴 “바보”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근대 일본의 건국원훈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이며 “바보”같이 용맹한 적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사의 일면만 알았지 그 이면에 있는 문인, 선비, 지식인다운 인물상에 대해서는 아직 깊은 인식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인만 탓 할 바가 못 된다. 우리 자신도 사실 안중근의 “투사”를 넘은 위대한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번 3월의 나의 특강은 안중근의 평화사상 및 사상가적인 심층의 안중근을 알리고자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금년 안으로 <<사상가 안중근>>이란 제목의 책을 펴낼 예정으로 지금 일본어로 집필 중에 있다.

한마디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 쯤 표면적인식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문인이자 사상의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단선적이면서도 피상적인 이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독립” 유목과의 만남을 통하여 단순히 만용만 자랑하는 투사 안중근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독립자주지향으로 내세웠던 사상가 안중근 선각자와 만나는 실감을 느꼈다.

사상가 안중근, 그는 구경 누구인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모르고 있던 안중근의 이면, 심층에 대해 재 이해를 해야 할 사정에 와있지 않은가. 나의 이 졸고에서 안중근의 위대한 사상가의 전체상을 다 표현하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나 총체적,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31년의 짧은 인생은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간 공판투쟁 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 했을 뿐 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그는 려순감옥의 심문에서 “한 나라라도 독립자주하지 못하면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두가 독립하는 것이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라고 소리 높이 주장한다. 독립자주평화는 안중근의 유일한 화두이며 그가 평생 겨냥했던 이상이다. 그의 사상이 가장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발로한 것이 바로 이 “독립”유묵이 아니였던가!

안중근은 또 일본검사의 취조 중 한중일 동양 3국을 세형제로 비유한 우화를 술회하면서 셋째동생 일본이 둘째아우 한국을 향해 악행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비유하면서 지금 동양의 평화가 깨어진 결과는 이토의 강제정책이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또 이토 본인을 간웅(姦雄)이라고 자탄, 그를 제거한 것은 동양평화실현을 위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더욱이 1909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당시까지 그는 개인 전기인 <안웅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사상을 구상화한 후자 저술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난것이 너무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다. 결국 3월 25일까지 써서 서문부분에만 그쳤는데 고등법원원장 하라이시와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정취서>등을 종합하면 그 전면모를 대강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안중근의 사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동아시아의 최대 분쟁의 중심인 려순을 중립지대로 개방하고, 한 중(청), 일이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리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을 아시아평화의 근거지로 만드는 것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의 재정확보책으로 원만한 금융을 위해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 공통유통의 공용화폐를 발행 하는 것. 그리고 3국의 청년들이 2개국 3개국 언어를 배우게 하고 우방, 형제적 제휴연맹관념을 형성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3개국 공동시술개발센터와 동아시아 동양평화군대를 창설 할 것까지 제안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지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서양의 로마교황청에 각국 대표를 파견하여 서양과의 협력관계를 도모할 것을 권유한다. 이래서 세계적 시야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고 평화의 유지를 이룩 할수 있다는 신념을 수립한다.

그는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일국(一國)중심의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의 동아시아평화정책의 제한성을 간파하고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를 파괴하고 로씨야, 미국으로 전쟁을 확장시킨다면 일본 자신의 괴멸을 기필코 초래한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한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예언은 너무나 적중하지 않았던가!

안중근은 사상뿐 만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탁월한 예견적 안목을 갖춘 예지에 찬 예언가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연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폐제도 이 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식견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본은 동아시아공영권을 소리높이 주장했지만 일본 중심의 일국내셔널리즘적인 강제적 정책이었기에 동아시아의 공명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 결국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무산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의 EU연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 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등 세계적인 공동체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중근은 유럽공동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모네보다, 중국근대의 국부로 추대된 손중산보다, 그리고 아시아 평화의 리더였던 칸트보다 더 선구적인 대사상가. 대정략가임이 틀림없다.

안중근, 그는 100년 앞을 내다 본(英知)의 사나이였다.

7.
정오가 되자 아시마루회장은 시다라로인과 나를 위해 일본요리점에다 푸짐한 오찬을 마련했다.
식사중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안중근에 관련된 내용으로 꽉 차있었다.

“왜 안중근이 일본의 원훈을 암살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려순감옥에서 그렇게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을까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당당한 신앙심에 매료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원과 감옥, 통역사 그리고 일반 관리들께서도 다 일본인인데 안중근에게 글을 써 달라고 요구했답니다. 려순감옥에서도 안중근에게 상등백미 밥에다 끼니마다 반찬에 맛있는 과일이 배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에 한 번씩 목욕도 시키고 이발도 해주고-- 일본의 최고실력자 원로를 죽인 범인에 대한 존경이 이렇듯 깍듯했다는 것은 정말 경탄할 일이지요.”

화제는 또 다시 안중근의 품위 있는 유목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2월 사형판결이 난 뒤, 주의의 일본인중 비단이나 일본 화지를 지참하여 안중근에게 휘호를 요구한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안중근은 번마다 상대를 고려하여 어구를 선택하고 정성껏 써주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일본인에게 자신의 품은 뜻을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 모른다.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박학어문, 약지이례 (博學於文, 約之以禮 널리 학문을 배우고 례로써 단속한다)라는 (논어)〔옹야편〕의 문구를 한 일본인 관리에 써 준적이 있는데 기하게도 이토히로부미의 이름 ‘박문’도 이 논어 옹야편에서 두 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토는 유교의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시에 능했으며 서예가로서도 일본 근대예사에서 능서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몇 점의 이토 유묵을 보면 그는 행서나 초서에 능했는데 성격같이 활달한 글씨를 썼다. 한국통감, 인감이 찍힌 그의 유묵은 또한 일본식민지화의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조선의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당시 일본의 어느 정치가보다 깊었으며 조선유교 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앞섰다고 거듭 말했다.그의 여러 종류 전기를 섭렵해보면 그는 한복을 즐겨 입고 한복차림으로 공식장소에 나타나는 등 행동으로 “한국통”을 자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조선식민지통치정책을 스스로 미화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감화시킬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토의 이름과 그의 유묵, 또한 한학의 교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는 원래 유교, 한자문화 등으로 공유 할수 있는 부분이 너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일국의 식민통치책으로 인해 그 끈끈한 유대성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한국 계명대 이성환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이토 역시 안중근과 같은 “동양평화를 제창했으나 그 행동양식으로서 정반대의 지향성을 실천으로 행하고 있었다. 이토는 동양평화를 위한 명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필요성을 주장했고, 안중근은 이런 이토를 한국침략자로서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입장의 다름에 따라 두 인물의 사상과 행동은 천양지별의 양상을 보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당시 양국의 입장을 극명히 상징함과 아울러 두 인물의 양립할 수 없는 사상적 대립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동양평화는 동양제패의 꿈에 불과했으며 안중근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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