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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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27) 베일에 가려진 서태후 레이프사건과 의화단의 사후처리
2013년 09월 30일 16시 10분  조회:6707  추천:1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7)

베일에 가려진 서태후 레이프사건과 의화단의 사후처리


김문학

 

력사에는 베일에 가려진 은페된 사실(史實)이 무수히도 많이 존재한다. 필자가 력사공부를 해오면서 한중일근대사 100여년전에도 이같은 은페와 허구가 많았다는것을 발견하면서 노상 경악하군 했다.

력사교과서나 영화 《원명원을 불사르다》, 《수렴청정》에 의해 널리 각인된 8국련합군의 만행과 의화단의 애국적저항 및 서태후의 도벽행위(西巡)는 주동의 정설로 돼있다.

그러나 필자가 일본에서 발견한 사료기술에는 서태후가 사실 광서황제와 같이 피난을 가지 않고 자금성에서 100여명의 환관들과 눌러앉아있었던것이다. 영화에서는 1900년 8월 10일, 8국련합군이 북경으로 습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청국 궁정에서는 서쪽으로 탈출하는 “서순(西巡)” 즉 서태후, 광서황제 일행이 8월 15일 새벽 자금성을 나서 10월 26일 서안에 도착하는것으로 돼있다. 그리고 서태후도 광서황제도 한족의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겨우 도벽에 성공하는 우여곡절이 전개되여 비장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광서황제만 피난하고 서태후는 자금성을 지켰는데 그것이 그녀의 비운을 초래한다. 《력사독본》 1992년 11월호 《선향의 불》(마스이 유키오(增井經夫), 1987년 간)의 증언에 의하면 8국련합군이 북경에 입성하여 롱성(籠城)하고있던 외국인, 중국인을 해방시키고 북경에서 야만적인 략탈과 폭행을 감행하였다. 그런 와중에 자금성에 란입한 미국병사가 서태후의 거실까지 습격하여 64세의 서태후를 레이프(강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대청제국의 최고실력자인 64세의 로파를 정복했다는 상징적의미로 그런 만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 사태에 경악한 청국은 미국에 항의하였으며 미국 역시 사과했으나 그 긴급교섭에 통역으로 입회한 인물이 일본의 유명한 작가 핫토리 우노기치(服部宇之吉)교수였다. 당시 그는 동경제국대 교수로서 북경류학중에 의화단사건에 조우하여 북경롱성에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뛰여나게 잘한 그를 량국정부가 제3국의 통역으로 림시 요청했던것이다.

청국에 사죄한 미국정부는 의화단의 사후처리로서 청국으로부터의 배상금을 중국인을 미국으로 류학시키는 류학자금으로 하는 등 청국교육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것으로 매듭진다.

당시 청국과 미국 량측으로부터 핫토리교수는 “이 사건을 30년동안 입밖으로 새나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막음다짐을 받았다. 핫토리는 그 약속을 지켜 30년동안 아무에게도 루설하지 않았다. 그가 동경대학 동아사연구실에서 당시 그의 제자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노하라 시로오(野原四郞), 마스이 유키오 등 인물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 세사람은 현대 일본의 력사학, 고고학 분야의 쟁쟁한 학자로 성장한다. 마스이교수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일본 군부와 기자들속에 이 사건을 알고있는 인물이 다수 있었으며 단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뿐이라 한다.

핫토리교수는 일본의 중국학의 거물이며 1902년 북경대 전신인 경사대학당 창건시기 교습으로 최빙돼 물심량면으로 공헌한 재질과 덕을 겸비한 야심적인 학자였다. 그의 부인은 또 추근(秋謹)을 일본으로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며 그의 막둥이 딸의 회상에 의하면 부인도 이 사건을 알고있었다고 전해진다.

“국모릉욕사건”은 그 사건이상으로 “청국을 릉욕한” 상징적 사건이였고 중국의 반식민지의 치욕적인 근대사의 한 장면이였다. 그 배경에는 “의화단운동”이 있었으며 외국인의 “북경롱성”이란 력사사실이 있었다.


그럼 의화단운동은 왜 발생했을가? 19세기말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렬강의 중국진출은 문화적으로 기독교 포교활동으로 전개되였다. 하여 많은 청국인들이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는데 신도들과 중국 평민들의 충돌도 빈발하였다. 드디여 반양(反洋)교운동이 장강류역, 화북에서 과격화되며 결국 의화단운동의 단서로 된다.

의화단은 의화권술에서 온 명칭인데 권술과 주문을 터득하면 그 어떤 총칼도 막는다는 불사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민간신앙을 베이스로 발전되여 1899년 산동에서 흥기하고 1900년에는 하북으로 전파되였다,. 봄에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6월 20일부터 동교민항이라 불린 외국공사관구역 및 성내 북부구역에 8국 외국인과 청국신도 4천여명이 “북경롱성”의 막을 열었다.

의화단은 의화권술에서 온 명칭인데 권술과 주문을 터득하면 그 어떤 총칼도 막는다는 불사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민간신앙을 베이스로 발전되여 1899년 산동에서 흥기하고 1900년에는 하북으로 전파되였다,. 봄에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6월 20일부터 동교민항이라 불린 외국공사관구역 및 성내 북부구역에 8국 외국인과 청국신도 4천여명이 “북경롱성”의 막을 열었다.

일본 외무성 서기생과 독일공사가 의화단에 의해 살해되면서 의화단과 8국 렬강과의 전투가 전개된다. 지금까지 의화단에 대해 진압군을 파견하면서도 탄압할가 지원할가 망설이던 청국정부는 6월 21일 8국렬강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의화단을 전투력으로 활용하려했던것이다. 8월 8국련합군은 북경을 습격한다. 련합군은 치렬한 싸움끝에 북경에서 갇혀 “롱성”하던 외국인과 청국신도들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8국련합군은 북경성에서 교과서에서 기술한 “필설을 다할수 없는 살인, 방화, 강간, 략탈”을 거듭하면서 원명원에 있는 국보진품, 문화재를 강탈한다.

이런 와중에 궁중에 남은 서태후가 그 만행을 당하게 된것이다. 서구군대와 대조적으로 당시의 문헌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규률을 지키고 자금성을 보호하는데 기여했던것이다. 리홍장의 심복이였던 성선회(盛宣懷)는 “일본군은 로씨야군과 달라서 신뢰할수 있으며 자금성을 지켜줄것이다”고 주장한다. 서구군대들이 자금성을 포격하자고 한것을 일본군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청국에 동정했으며 자금성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노력으로 자금성은 략탈을 면했고 성벽에 탄환 하나 맞지 않고 수비되였다.

우리가 배운 력사에는 이런 력사의 구체적인 실상들이 탈락돼있다. 의화단이 어떻게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비장히 희생됐다는 표층적인 사실만 강조하며 그런것을 모두 “애국적행위”로 활용한 “사후기술법”이 허다하다.

여기서 발견되는것은 서태후의 청국정부가 의화단을 애국적방패로 삼아 서구렬강과 결승전을 감행하는 첨병으로 리용했던것이 큰 우(愚)였다. 결국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격으로 서구렬강의 침략을 북경으로 깊숙이 침투시킨 악과를 자초했던것이다. 서구의 근대무기앞에서 주문과 칼이 무슨 소용있으랴. 1901년 11개국 렬강에 의해 맺은 《신축조약》은 청국의 반식민지화를 진일보로 가속화시켰다. 근대문명을 무시한 력사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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