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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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본에서 단련된 장개석
2013년 10월 11일 07시 27분  조회:5589  추천:6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8)

일본에서 단련된 장개석

김문학


  백년전의 1909년 6월, 장개석과 손문은 일본에서 첫 상봉을 이룬다. 호놀룰루에서 일본을 거쳐 싱가포르로 가게된 손문은 진기미의 소개로 장개석을 만난것이다.

  중국 근대사의 두 거물의 첫 상봉은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시의 사실에 대한 자상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그 실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중화민국사의 특기할만한 상봉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손문은 그날 만났던 장개석에 대한 인상담을 진기미에게 이렇게 술회한다. “우리 혁명운동에는 장개석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그는 장차 꼭 혁명가로 성장할것요.”

   장개석과 일본의 인연은 손문만큼 두텁다. 근대 일본과 중국관계사의 “산증인”으로서 일본인들은 오늘까지도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높으며 지대한 존경의 마음을 품고있다. 장개석은 일본에서 두번 류학하며 수차례 망명, 방문했는데 일본문화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독특한 부분이 있었다. 

   1905년 청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근 일년 류학한다. 처음 일본으로 향한 배우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지 않고 손수건이나 티슈에 뱉어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청결한 일본인 인식이 각인된다고 자신이 고백한다. 첫번째 류학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국민당 원로의 한사람인 진기미를 알게 되고 진씨의 조카들인 진과부, 진립부 형제 등 많은 혁명지사를 알게 된다.

  그해 겨울 귀국한 장개석은 1906년 수석으로 보정(保定)륙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기실 그가 여기에 입학한 목적은 바로 일본으로 재차 류학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07년 구정을 쇠고난 그는 총망히 대련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동경의 진무학교(振武.A校)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청국류학생의 군사학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의 륙군예비교로서 유명했다. 중국 근현대의 저명한 군수장, 도독(都督)들이 거의 이 학교 출신이였다. 염석산(閻錫山), 채악(蔡鍔), 리렬균(李烈均), 오록정, 장백리, 풍옥상 등 수백명의 리스트가 줄짓는다.

  장개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륙군에 편성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니이카터현 타가다(高田)포병련대에서 근무한다. 당시 24세의 장개석은 신장 169센치메터, 체중 59.2킬로그람, 최하위 2등병으로서 일본군의 “무사도”적인 규칙아래 렬악한 환경과 엄격한 군기하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1905년 청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근 일년 류학한다. 처음 일본으로 향한 배우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지 않고 손수건이나 티슈에 뱉어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청결한 일본인 인식이 각인된다고 자신이 고백한다. 첫번째 류학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국민당 원로의 한사람인 진기미를 알게 되고 진씨의 조카들인 진과부, 진립부 형제 등 많은 혁명지사를 알게 된다.

  그해 겨울 귀국한 장개석은 1906년 수석으로 보정(保定)륙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기실 그가 여기에 입학한 목적은 바로 일본으로 재차 류학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07년 구정을 쇠고난 그는 총망히 대련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동경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청국류학생의 군사학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의 륙군예비교로서 유명했다. 중국 근현대의 저명한 군수장, 도독(都督)들이 거의 이 학교 출신이였다. 염석산(閻錫山), 채악(蔡鍔), 리렬균(李烈均), 오록정, 장백리, 풍옥상 등 수백명의 리스트가 줄짓는다.

  장개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륙군에 편성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니이카터현 타가다(高田)포병련대에서 근무한다. 당시 24세의 장개석은 신장 169센치메터, 체중 59.2킬로그람, 최하위 2등병으로서 일본군의 “무사도”적인 규칙아래 렬악한 환경과 엄격한 군기하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겨울에는 설국이라 불린 타카다의 병영에서 일본군과 같이 랭수에 세수를 하고는 또 군마를 씻는 작업, 변소청소 등도 해야 했다. 식사사정도 백미밥은 있었으나 일본식 “오니기리”(주먹밥)에 다쿠앙(무우김치류) 세쪼각이였다.

  당시 일본군영에서는 간거한 훈련방식으로서 검소한 생활을 지향하고 정신적소양과 심신의 단련을 통해 육체와 의지의 일체화를 노렸던것이다.

   장개석은 바로 이같은 군대의 훈련체험을 통해 치욕과 간거한 심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苦)를 락으로 삼으며 높은 사상의 경계에 도달했다고 많은 식자들이 보고있다.

  그뒤 장개석은 실생활에서도 일본식 검소한 식사를 즐겼으며 담박한 일본식 생활을 지향했으며 부인 송미령의 사치한 생활양식과는 판이했다. 그가 언제나 “장까까머리”란 별명이 붙을만큼 삭발을 즐긴것도 일본식 군대의 삭발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은 까닭이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진충보국의 전통정신을 숭경하며 또한 부모를 존경하고 스승을 높이 모시고 협과 의를 중히 여기는 일본민족성을 사랑한다. 일본은 나에게있어서 제2의 고향이다.” (1970년 외국인 기자 회담)고 장개석은 솔직히 고백한다.

  장개석은 일본의 무사도와 중국의 사도(士道)를 모두 중국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학설의 실천으로 보고있었으며 중일 량국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2년 《중국의 립국정신》)

  1934년 장개석이 전국민에게 호소한것이 유명한 “신생활운동”이다. 그 운동의 골자는 바로 장개석이 20대 젊은 시절 일본에서 형성된 정신세계의 일부분이였다. 일본에서 배운 “례의렴치”를 슬로건으로 중국 국민성을 개조하고 문명인, 문명국으로 탈바꿈을 지향한것이 장개석의 꿈이였다. 도덕과 지식교양의 향상을 호소한 이 운동은 중국 민국정신사에서도 평가절하시킬수 없는 한 대목이다.

  장개석은 일본국민성과 비교하여 중국국민성을 “오예(汚穢), 랑만(浪漫, 산만, 규률이 없음), 라타, 퇴당(頹唐, 정신위축, 체격취약, 불량취미 등)” 등 4대 렬근성으로 꼬집고 그 치료약이 바로 “례의렴치”의 생활방식이라고 지적하며 그 실행법으로서 “정제,  청결,  간단, 소박(朴素)”의 국민성정립이라고 력설한다.

  장개석의 일본인식에는 청년시기 일본에서 실체험을 바탕으로 한 “일본적정신”이라는것이 자리잡고있었다. 그는 1934년 신생활운동에 관하여 수차례 강연을 하면서 “나는 일본륙군에서 배웠으며 그 학교교육, 군대교육을 받았다. 일본인의 생활은 례의렴치에 통한다. 그것으로 일본은 부국강국으로 되였다. 우리 중국인은 포연탄우속에서 일본인과 싸우기전 일상생활에서 이미 지고있다”고 국민성 결함을 지적한다.

  장개석이 창도했던 “신생활운동”은 70년대 박정희가 한국에서 대거 전개했던 “새마을운동”과 같은 맥락으로서도 포착할수 있다. 일본을 배워 문명인, 문명국으로 거듭나자는 동아시아의 “일본학습”의 형태이기도 했다. 사실 21세기의 오늘에도 장개석의 “신생활운동”의 골자는 여전히 유효하며 부유와 물질추구에 편향된 오늘 중국국민의 결함을 시정하는 정신적 “약”으로 될수 있다.

  장개석의 일본인식, 일본문화 리해에는 중국 정치가치고는 투철했다. 그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숙지하고있었기에 항일에 있어서는 섣부른 “암석에 계란 던지기”가 아닌 “일면교섭 일면저항”의 전략을 사용했으며 “지구전론” 역시 모택동보다 수년앞서 제기해왔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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