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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왜 일본인이 대거 만주로 진출, 침략했는가? 왜 일본이 식민제국 “만주국”을 설립했는가?
근대 한중일 력사문제에서 이같은 소박한 물음은 루락할수 없는 테마이다. 물론 이 테마는 책 한권 또는 그 이상의 방대한 분량이 소요되지만 그 답안으로서 마련된것이 바로 일본인이 설립한 “만철”주식회사에 대한 근대사적리해이다. 이를 리해하는것이야말로 만주침략리행의 첩경이다.
사실 우리는 “만철” 또는 “남만철도”라는 말을 화제에 담거나 기억에 떠올리긴 하지만 그에 대한 리해는 의외로 어둡다.
만주는 일로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일본의 “특수지역 및 권익”으로 간주한다. 만일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패했다면 당연 로씨야의 손아귀로 들어갔을것이다. 1905년 9월 5일, 일로강화조약(포츠마조약)에 의해 장춘이남의 남만주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일로전쟁후 일본은 로씨야가 한대로 만주점령지행정을 계속하여 관동주 수비군과 민정 일반을 통괄하는 관동총독부를 설치했으나 1906년 사이몬지(西園寺)수상에 의해 군부통치를 철페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그해 8월 총독부를 철페하고 려순에 관동도독부를 세우면서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뀐다.
이런 배경하에서 1906년 1월에 발족한 “만주경영위원회”는 륙군대장 고다마(兒玉源太郞) 가 대만식민지경영의 경험이 있는 인물 코토 신페이(後藤新平)를 책임자로 추천하여 만주철도경영을 맡기기로 한다. 1906년 6월 일본정부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의견”을 공표하고 뒤이어 12월 7일 반관반민성격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정식 설립된다.
초대총재는 코토 신페이가 추대되였다. 코토는 대만식민지경영에서 성공을 거둔, 식민지경영의 재질을 갖춘 인물로서 인정받는 인지(人智)이기도 했다. 그는 고다마의 비전대로 “양으로는 철도경영의 가면을 쓰고 음으로는 백반(百般)의 시설을 실행하는”것을 만철의 전략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또 “문장(文裝)적인 무비(武備)”로 칭하고 철도부속지란 명목으로 식민지경영을 실천했다.
1907년 본부를 동경에서부터 대련으로 옮긴 만철의 조직은 총재아래 총무, 조사, 운수, 관산업, 지방 등 5개 부를 설치하고 대련병원과 무순탄광도 그 산하에 두었다. 그리고 안산제철소, 항만, 전력공급, 농림목축업, 호텔(야마토호텔)경영, 시내로면전차, 가스회사 등등 폭넓은 대종경영을 전개했다. 뿐만아니라 청국을 설득시켜 만철연선의 넓은 구역을 속속 침투하여 군대의 주류, 경찰, 사법, 징세, 교육, 사업인가 등 권익을 취득하였으며 이어 상사, 영화, 방송통신, 조사회사 등 제반사업에서 “만철제국”을 성립했다. 그 내실은 사업투자상대회사가 80개나 되는 방대한 “식민회사군”이였다.
당시 코토가 만철총재직을 인도받는 조건으로 (1) 일본정부직원(관리)이 재직한채로 만철사원이 되는것 (2) 만철총재가 관동도독부의 고문으로 되는것 등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246명의 일본정부관원이 만철에 입사했으며 “국책”적성격을 많이 띠게 된다. 그리고 만철창립당시 만주근무자의 봉급이 실질상 본 봉급의 수배나 되는 수당을 받았다는것이다.
만철에서 특기해야 할 두개 부분이 있다. 하나는 “만철조사부”이고 또 하나는 “만주영화주식회사”이다.
1907년에 발족한 “만철조사부”는 만철경영을 위한 토지, 자연조사로 시작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중국 만주지역의 정치, 경제, 지리, 민속, 문화 등 기초적 조사연구를 진행하는 방대한 조직이였다. 그리고 그뒤 일본식민의 중국진출을 위해 조사상대와 범위를 만주를 넘어 중국 관내지역으로 확산시켰으며 본격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그 동경지사는 1908년 설립되면서 동아시아경제조사국, 만주 및 조선 력사지리조사부를 설치하고 조선에 대한 문화, 력사, 풍습연구도 병행시킨다. 1918년 설립된 대련도서관도 만철조사부의 일환이기도 했던것이다.
주요 조사활동을 보면 1908년~1914년의 만주, 조선 력사지리조사, 일본 동양학 창시자들인 시라토리(白鳥庫吉), 츠다 사유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참가하며 동양학의 기초자료를 발굴하기도 한다. 이어 화북자원조사(1935년), 지나항전력조사(1939년), 화중관행조사(1940년), 전시경제조사(1941년), 남방점령조사(1942년) 등등 방대한 조사는 중국과 조선인식의 기초적데이타, 정보를 제공하며 일본식민지침략에 원용되기도 한다.
그뿐만아니라 《만철조사월보》, 《만몽사정》, 《북경만철월보》, 《서향(書香)》, 《북창(北窓)》 등 잡지간행물을 펴내여 당시 중국의 지(知)적상황, 문화, 경제를 리해하는 불가결의 귀중한 기초자료를 남겼다. 그리고 만철에 있던 인물은 대부분 일본의 전후 산업, 학술, 정계에 진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 창립한 “만영(만주영화협회)” 역시 만철영화부를 토대로 만주의 유일한 영화회사이며 식민지국책의 선전을 목적으로 맹활약을 한다. 당시 간판스타로서는 리향란(李香"? 즉 가와구치 요시코(山口淑子)가 활약했으며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스타였다.
국책영화회사의 “만영”이 남긴 방대한 기록영화의 필림은 당시 만주를 리해하는 소중한 영상자료이다. 필자가 소유하고있는 당시의 31권의 “만영기록영상”에는 만주의 민속, 문화, 사회, 뉴스 등이 생동하게 기록되고있다. 지금의 장춘영화제작소는 바로 만영을 그대로 인수하여 재건한 중국의 첫 영화제작소였다.
만철은 장춘ㅡ대련의 표준레루를 부설하는 등 만주철도망건설에 공력을 들였는데 그런것을 토대로 해방후 동북철도교통의 정비는 전국 최고의 수준이였다.
그러나 “만철”이 건설했던 철도를 비롯하여 유감스럽지만 일본식민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대륙침략에 “길안내”역할을 한것은 그 역시 “침략자, 식민주의의 최전선의 첨병”이란 오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식민침략은 흔히 이렇게 철도라는 길을 통한 기차에 실려오는것이다. 이 역시 근대식민침략의 길이기도 했다는 특징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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