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5)
"국혼"은 어떻게 탄생되였는가
김문학
인류력사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상(事像)중 전쟁을 통한 문명, 문화의 충돌이 이(2e)문화교류, 이문화접촉, 전파의 가장 빠른 구실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자 헤러글테이트스의 말대로 “전쟁이야말로 문화의 아버지이다.”
20세기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로일전쟁은 그것을 계기로 일본이 대폭 세계에 알려지며 따라서 조선이란 이름도 세계에 지명도가 19세기보다 높아졌다. 일본이 로씨야제국을 격파한 계기로 일본인의 “무사도(武士道)”가 그 국민성을 제시한 키워드로 인식되기도 한다.
1899년 니이토베이나조(新渡戶稻造)의 영문저작 《무사도》의 영향은 지대했다. 이 책은 무사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아니라 로씨야에게 이긴 일본정신의 근저를 서양의 기사도와 비교함으로써 무사도정신이야말로 일본의 국혼(國魂)이며 일본정신이라는 점을 서양인에게 알리고저 한 비교문화론격인 “일본론”이였다.
영일동맹으로 당시 일본과 가장 친숙한 관계에 있던 서양의 대표 영국이 일본인의 “무사도”적 국민성에 공명을 일으켰다. 이안 하밀튼은 “겸허”와 “엄청난 자존심”으로 무사도를 칭찬하는가 하면 1904년에는 《일본인이 쓴 일본》이란 론집을 낸 영국인 식자도 있었다. 《타임즈》, 《자판메일》 등 신문에서도 일본정신의 “고결함”을 례찬하는 글을 대폭 실었다.
그러나 사실 서양인을 향해 발사한 “무사도”정신은 메이지시대 “충효”나 “충군애국”을 골자로 만들어낸것이지 본래의 “무사도”와는 이질적이였다.
사상사연구자이며 교또대학 인문연구소 교수 야마무로(山室信一)는 일본 “무사계급의 론리가 ‘신국(神).)’으로서의 전통탓으로 국민성이 되여 뿌리박은것이라는 의론자체가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다시 당시의 동양으로 돌려보면 일본내에서 “무사도론”이 류행처럼 일세를 풍미하고있을무렵 일본에는 중국에서 온 많은 젊은 류학생들과 량계초 등 정치망명한 젊은 리더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강대국 로씨야에 전승할수 있은 리유와 일본이 급속히 아시아 최강의 근대국으로 탈바꿈할수 있은 까닭을 일본 “국민성”으로서의 무사도나 애국심에 있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일본을 따라배우자”란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에 온 류학생과 망명정치가들은 청국의 전쟁의 배북, 무술변법의 좌절에서 일본만 성공할수 있은 비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품고 “일본학습”의 공전의 붐을 일으켰다.
류학직전 북경에서 로일전쟁의 개전을 알게 된 추근(秋瑾)은 일본의 용무(勇武)와 독립정신을 칭송하는 시를 읊는다. 그뒤 1904년 일본땅을 밟은후 집필한 “우리 동포에게 경고(敬告)한다”는 글은 당시 류학생의 공통된 심경을 토로했다.
“정말 무척 부러웠던것은 일본의 어린이들이 큰 아이 작은 아이 할것없이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웨치는 광경이였다. 실로 사랑스러웠고 너무 부러워 죽을 지경이였다. 우리 중국에서 언제면 이런 정경을 볼수 있을가? 일본인들은 이렇게 한마음같이 군인을 존경한다. 오늘 로씨야라는 대국이 작은 섬나라 일본에 패한것도 이것때문이리라.”
당시 중국류학생들이 일로전쟁 출정시 “전사를 기원한다”고 씌여진 기발을 들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군인을 배웅하는 열렬한 광경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한 중국의 풍토에서 “진짜 남아는 병사로 되지 않는다”는 속담과 같이 군대를 경시한 습속이 있었다.
그때 량계초가 일본에서 발견한것이 “일본혼”이라는 “국혼().魂)”이였다. “일본인이 늘 말하는것으로 일본혼이란것이 있다. 무사도라는것도 있다.”
그는 《중국혼》이란 책을 집필하여 일본 성공의 리유가 “대화혼(大和魂)”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일본을 다라배워 중국인도 “중국혼”을 갖고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해혼(山海魂), 모험혼, 군인혼, 평민혼(平民魂), 사회혼” 등 다양한 “중국혼”설을 전개하였다.(왕민(王敏) 《중국인의 애국심》)
량계초는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1899년 10월 15일 《청의보》에서 “국민”이란 단어를 사용한 인물이며 “애국주의”, “애국심” 을 창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본체류기간 그는 애국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애국가 4장(四章)”을 요코하마중화대동학교의 창설자로서 학교의 학생들에게 부르게 한다.(야마시타 신이치)
량계초가 애국교육으로서 창도한 “덕육, 지육, 채육” 3방침은 일본에서 본을 뜬것인데 그것이 그뒤 모택동을 통해 신중국에도 이식된다.
그리고 량계초가 쓴 《중국혼》은 장지연에 의해 1906년 조선에서 번역출간되면서 같은 맥락에서 “조선혼”을 창출하고저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는것이 괄목된다.
최석하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조선혼》을 창출할 중요성을 설파하며 박은식(朴殷植)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을 갖춘 “한국혼”양성설을 전개한다.
그리고 신채호는 “국민혼”, 신규식은 “한국혼”을 보급시킬 필요성을 력설한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자주를 회복시키는데서 루락시킬수 없는 국혼, 국민혼 사상이 일본을 통해서 수용, 전파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애국적핵심사상으로 간주되였다. 이리하여 장래 국혼과 애국심을 발양하여 국가를 앗은 일본을 타도하는 정신적 힘을 기르자는 인식이 형성, 정착되여간다.
당시 일본류학중인 로신이 발표한 《소파르타의 혼》이란 글에는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정신을 례찬한 모티브가 설정된것이 그 시대의 조류를 반영한것임을 알수 있다.
일본을 통해 배운 무사도의 상무정신, 국혼, 애국심 등 사상의식은 후날 중국이 일본과 싸운 항일전쟁에서 발휘되였던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에도 이같은 국혼, 애국심이 동원된것도 일본에 대한 아이러니이며 이 역시 근대력사의 아이러니였다. 일본에서 배운것을 일본을 무찌르는 예리한 무기로 활용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영훈교수는 또 이렇게 지적한다. 백두산을 민족의 성지로 한것 역시 민족을 발견하고 가시화하는 상징물의 생성에서 비롯되며 박두산을 신성시한 최초의 인물은 최남선이다. 그는 백두산에서 발생한 “불함문화”야말로 조선문명의 근원이라는 학설을 펼치며 그것을 증명하려고 1927년 백두산에 오르기도 한다. 그뒤 백두산 성지화는 해방후 남북한에서 결쟁을 벌이며 전개시킨데는 “민족”이란 두터운 의식이 안받침되여있다.
일본이 전쟁시기 “야마토민족”을 신성시하고 아시아가 야마토민족이 이끄는 “대동아공영권”으로 편입되여야 한다고 한 주장 역시 “민족신성화”의 창궐한 행위에 불과했다.
안생 백년의 “민족”, 그것은 종잡을수 없는 100살의 기이하고 복잡다단한 의식체(意識體)이다. “민족”은 과연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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