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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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문화'는 어떻게 중국인을 부식시켰는가? [백양 김문학 대담]
2016년 04월 12일 07시 34분  조회:7119  추천:107  작성자: 김문학
<33의 신사유>연재문화대담( 2 )

“장독문화”는 어떻게 중국인을 부식시켰는가?

백양+김문학



백양 선생  

0.들어가면서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의 일이다.
2003년 신록이 짙어가는 5월,나는 일본의 대만출신의 한 지기를 통해 대만의 작가 백양(柏杨)선생님과 연줄이 닿았다.국제전화를 통하거나 서로의 저작을 우송하기도 하면서 어렵사리 맺어진 우리의 연분은 미구하여 망년지교로 되였다.

백양은 80년대 중반 《丑陋的中国人》의 저작으로 전중국의 지식인 ,학생들사이에 폭발적인 션세이션을 일으킨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지성이다.

1986년 12월 ,대학졸업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지 1년 좀 되는 나에게 있어서 이책은 충격적인 애독서였다.24살의 나는 앞날 <丑陋한조선족>같은 책을 써보겠다고 아이디어를 얻은 책이기도 했다.
이런 위대한 작가와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 바램도 간절했다.그러다가 일본유학길에 오른 나는 역시 《조선족개조론》《丑陋的韩国人》등 저작으로 우리 민족내부의 열근성을 비판하는 저작을 써내고야 말았다.

내가 우송해드린 《新丑陋的中国人 》(중국어원고)원제<  중국인>과 일련의 저작을 읽으신 백양선생님은 전화에서 이렇게 평가하셨다. 

“정말 동아시아의 기재<奇才)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어요. 《新丑陋的中国人》은 나의 그것을 초과했어요.나는 즉흥적으로 썼지만 김문학선생은 보다 체계적으로 심도있게 중국문화의 열근성을 신랄하게 해부,비판했습니다.

중국의 조선족에 대해서도 난좀 알고있어요.내가 1946년부터48년까지 바로 김선생의 고향인 심양에서근무한적 있으니까요.시내에 조선족이 많았어요.당신네 조선족,한국민족은 훌륭한 민족이에요.중국과 비해서 그렇게 적은 인구와 좁은 국토에서도 주변강대국으로부터 천번이나 되는 침략을 받으면서도 최종적으로 의연히 독립과 존엄을 지킬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한번도 중국이나 일본을 침략한적 없었지요.그래서 나는 이런 위대한 민족을 존경합니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85세 고령의 백양선생님의 목소리는 흥분에 젖어있었다. “조선민족에서 김선생님같은 국제적시야를 갖춘 비판적 지식인이 배출한것은 정말 축하해야할 경사입니다.우리 동아시아는 김선생과 같은 존재가 필요해요.이제 나와 김선생은 “丑陋的…”학교를 나온 문우에요”.

백양선생님과 나는 그뒤로 그이가 2008년4월 29일 서거하실때까지 한번도 직접 대면하지 못했다
2008년은 내생의 가장 비통한 한해이기도 했다.나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두분을 잃어버렸다.4월4일 어머니가 타계하셨고 4월29일은 정신적스승 백양선생님이 서거하셨다.나의 인생에서는 큰 회환의 일이기도 하지만 백양선생님은 영구히 내마음속에 살아계시고 있다.

백양선생님은 전세계 화인지성중 가장 비판성이 강한 작가,사상가,역사학자,칼럼니스트,문명비평가,소설가,수필가이며 “중국근대 노신이래의 위대한 문화거인”으로 평가받고있다.

미국적 화교 과학자이며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손관한(孙观汉)박사는 “백양의 저작은 성경과 같은바,성경은 하나님이 준것이지만 백양의 저작은 전인류의 지혜에서 온것이다”고 말했다.

현대프랑스의 세계적지성,철학가인 기,소르망은( Guy sorman)“백양은 현대중국의 가장 탁월한 작가다”고 극찬했다.

저명한 북경대학의 중문학부교수 전리군( 钱理群)은 “백양선생의 《 丑陋的中国人 》과 《中国人史纲 》은 노신선생이 쓰지못한 <中国人史>를 쓴것이다”고 노신선생과 백양선생을 동등위치에 놓고 평가했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 연구원인 뢰의 (雷颐)는 백양의 《 중국인사강》을 두고 “이는 역사와 세상사를 동찰한 지성인의 역사에 대한 가장 심층적 해부이다”고 치하했다.

이런 평가를 받고있는 백양선생님이야말로 “현대 중국어로 쓴 지성가운데서 가장 출중한 문화태두이다”고 
나는 평가하고싶다.”백양선생님의 총애를 받은 제가,당신의 <문우,지기,형제>로는 될 처지는 못되고 당신의 어깨를 짚고 세계를 바라보고 동아시아를 평하는 글을 쓰면 족하나이다” 나는 늘 이렇게 백양선생님의 영전에 귀속말로 속삭이기도 한다.백양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경애심을 안고 이 대담을 정리해본다.이대담은 2003년에서 2005년에 걸친 수차례의 전화대담임을 밝힌다.
 
1<추한 중국인>의 메가톤급 문화충격
 
김:1986년 겨울 24살의 제가 선생님의 <추한 중국인>(이하<추~>을 처음 읽은 충격은 너무 컸습니다.무릎을 치며 읽던 열독의 쾌감이 오늘까지도 뇌리에 선명하지요.그때 중국대륙의 지식인들,청년학생들이 거이 이책을 돌려가면서 읽었거든요.말그대로 우리 대륙에게는 "메가톤급”문화충격이었답니다.

호남문예출판사와 광주의 화성출판사,그리고 장춘의 시대문화출판사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책을 출판했는데 당시 가장 보수적인 통계로서도 600만부 이상은 팔렸다고 합니다.그러니 해적판까지 하면 1000만부는 넘었을거라고들 하지요.

이책은 세계 화인세계에서 80년대 풍미한 명작일뿐아니라 80년대,90년대의 세계화인청년,지식인에 대해 국민성개조와 인문계몽의 최대교과서라는 평이 있습니다.그만큼 선생님께서 지식엘리트를 영향하면서 중국인의 진화를 추진시킨 공헌은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백:동아시아 귀재가 이렇게 높이 평가해주니 기쁘기만하네요.(웃음) 해적판만해도 몇백만부는 된다고 합니다.우리 집사람이 2004년8월에 소주의 고오헌 출판사에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공식재판했는데 역시 베스트셀러로 되고있다고 들었어요.

작가로서 김선생도 아시겠지만 자신의 책이 많이 팔리고 읽히는것은 더없는 행복이지요.마침 대륙에서 개혁개방의 절정기에 들어선 80년대 서양의 프로이트,사르트,니체등의 사상,관념이 대량으로 수입되고 국민성비판,중국문화붐이 일고있을 무렵이라서 때를 잘타고 난것이기도 합니다.

80년대는 중국대륙에서는 대단히 특수한 의미가 있는 시대였거든요.서양의 문화가치를 참조계로 삼아서 중국자신의 문화를 반성하고 해부하며,청년들은 또 열렬한 구지욕과 서양 인문주의를 바탕에 둔 “이상주의”가 팽배히 일고있는 시대였어요.

지금 그런 청년들이 중국의 각분야에서 중견역량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나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김:반대파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보수파들은 통렬히 백선생님과 이책을 비판하고 결국 발금처분을 내렸지요.그런데 극렬반대파에 의한 선생님의 인신피해는 없었습니까?소동이 굉장했을텐데요.
 
백:다행히도 개혁개방의 시대라 문화대혁명때와는 판이하지요. 60년대에 이책을 냈더라면 나는 영락없이 사형이 아니면 ,감방으로 직행했을겁니다.60년대 나는 장개석부자를 풍자한 만화 한코마에 글을 달았다고 10년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어요.손관한( 孙观汉  )선생님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겁니다.

내가 행운인것은 80년대에 이책을 대만에서 ,대륙에서 낸것이지요.중국당국에서는 이책에 대해서 민족을  매도하고  민심을 교란시켰다고 발매금지를 시켰어요.그리고 《추한중국인의 풍파》,《모두가<추한중국인>이야기시킨화(祸 )》라는 타이틀의 비판서도 많이등장했습니다.내 고향 하남성휘현( 辉县 )에 세운 내흉상도 철거당했어요.그러나 나자신의 개인에 대한 인신피해는 없었고 미국의 대만작가 강남(江南 )처럼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일도 없었습니다.이시대에 감사해야겠어요.
 
김:천만다행입니다.저역시 2001년 《조선족개조론》을 발표했다가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전례없는 반향을 일으키며 찬성파들에게는 민족문화의 귀재로 칭찬받고 반대파들한테는 많이 매도당했습니다.심지어 어떤 동포는 익명전화를 걸어와서 “너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죽이듯이 저격하겠다”고 공갈한 자도 있었어요.( 웃음)

2.  추한 중국인조선족개조론
 
백: 아니 조선족사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요?아시아의 귀재를 이렇게 암살한다구요?국제적 지식인을 테러로 암살한다는건 범죄예요.그래서 해꼬지 당한적은 없나요?이건 정말 충격적입니다.《추한 중국인》을 쓴 나도 아무일없이 무사한데 젊은 지식인을 그것도 같은 동포가 21세기에 그런 무식하고 야만한 행동으로 대하다니 기가 막혀요.

사실 당신네 조선민족은 우수한 민족이에요.요전번에도 전화서 말했지만 국토나 인구가 적은 민족이 주변국의 천차례나 가까운 침범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지키고 민족심 지켰지요.그리고 인국인 중국과 일본을 한번도 괴롭힌적 없고 평화를 사랑하면서 살아왔습니다.그러니 난 조선민족을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매우 존경합니다.근데 이건 좀 의외군요.하긴 한국의 양계초로 불리는 근대문학의 대부인 이광수도 《민족개조론》을 썼다가 주위사람들에게 큰 봉변을 당한적도 있습니다.
 
김:이광수는 제가 존경하는 민족문화의 거인 이지요 .우리 민족은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민족이든 내부에 장단점이 다 있듯이 중국한족과 유사한 열근성을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나 한국인들도 다 갖고있습니다.

해외에서 자신의 민족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면서 선생님을 따라배워서 시리어스한 문필로 우리 민족의 열근성을 해부하고 갱신과 개조를 기하여보자는 소박한 념원에서 집필했어요.얄팍한 변명이 아니라 ,이런 글을 민족내부에서 누가 나서서 써야하는데 여태껏 체계적으로 쓴 선배들이 없었기때문에 철없는 제가 욕먹을 준비를 하고 용감하게 접어들었습니다.
 
백:정말좋은일을했어요.김선생의《신,추한중국인》(<반문화지향의 중국인>중문원고)원고를 읽었는데 과연 걸작입니다.내가 쓴 《추한 중국인》보다 더 체계적이고 문화적으로 근원을 캤기때문에 설득력이 강하거든요.인구가 적은 조선족에도 이런 글을 쓸수 있는준재가 있었구나 하고 내심 탄복했어요.
 
김:감사합니다.보잘것없는 책을이렇게 높이 평가해주셔서.아,어쩌다 화제가 옆으로 새서 죄송합니다.선생님의《추한 중국인》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충격적인건 아무래도 중국문화의 특질을 《장독문화》로 명명한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장독문화》(酱缸文化)는 어떻게 생긴것입니까?그 특질은 무엇인지요?

3.    <장독문화> 무엇인가?
 
백:《장독문화》라는 개념은 내가 중국문화의 특질을 한마디로 알기쉽게 요약한 말인데 50년전에 어느날 중국사를 읽다가 갑자기 뇌리에 떠오른 즉흥적인 개념이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의 중국문화 특질을 해명한 개념으로서 전세계 화인사회에 널리 파급되고 정착된걸보니 나도 매우 만족합니다.장독이라 하면 김선생도 북방에서 태어났으니까 잘 알겠지만 걸쭉하고 악취가 풍기는 된장을 담은 독이지요.된장은 걸쭉해서 물처럼 맑거나 흐르지 않죠.중국의 문화는 도도히 흐르던 장강이 마치 가라앉은 수많은 더러운 물건이 고이고 쌓여서 침전되고 죽은 사수(死水)로 변한것과 같지요.시간이 갈수록 그 고인 사수는 장독이 돼버리고 거기서는 진흙탕투성이고 악취를 발산합니다.

그래서 이 <장독문화>의 특질은 강한 부식력과 응고력을 갖고 사회를 정체( 停滞 )시키는 역할을 해요.말하자면 일종의 노예정치,기형적도덕,이기적인 인생관과 권세주의에 의해서 오랬동안 침식됐기때문에 인간이 갖추어야할 인간성을 상실해버리고 경직된 사회로 됩니다.
 
김:선생님은 악취풍기는 <장독문화>의 뿌리를 우선 중국인(한족)의 유교전통,특히 “관( 官 )본위”권력이란 병독에서 찾았습니다.
 
백:맞어요.권력이란 병독에 면역력이 지극히 약한 정치적 에이즈증후군에 걸린게 바로 중국인이에요.<장독문화>의 발생은 아무래도 한무제 때 백가를 배척하고 유가독종을 실시함으로써 유교를 국교(国教)로 정한데 근원이 있었다고 봅니다.경쟁관계도 없어지고 권력에 대한 면역력도 상실하고 모두 “관본위”로 경사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나는 중국문화는 한조때부터 내려오면서 추락하고 유교사상은 특히 송나라 때 주자학이 흥성하면서 하락되었다고 생각해요.그리고 명나라 때 접어들어서는 거대한 <장독>으로 정착되면서 중국인의 최대의 비극의 무대가 돼버리고 중국인은 그무대위에서 비극을 연출하게 됩니다.

4.   <장독문화>속에서 부식돼온 중국인
 
김:선생님의 리론대로라면 유교는 물론 불교,도교나 지어 서양의 기독교와 많은 철학사상까지도 중국에 수입되면 변질된다는것이죠.이 악취 풍기는 거대한 장독안에서 침전되고 썩으면서 변질되여버려서 “장독문화”의 농도와 악취를 가일층 강화시킵니다.
 
백:그래요.”장독문화”의 근원은 유교국교화외에도 이런저런 요인이 있습니다.이를테면 불교사상의 마이너스 요인과 유교사상의 속박성이 결합되어서 비굴한 주희의 주자학이나 남존여비 관념이 생겨났습니다.그리고 손중산이 근대 서양사상을 절충시켜서 3민주의를 중국에서 실천하려 해도 성사시키지 못했어요....서양의 의식,사상도 늘 중국으로 들어오면 <장독문화>속에 부식돼서 “중국식”으로 변질되고맙니다.<장독문화>속에서 배겨내는게 거의 없잖습니까.

중국의 근대의 개혁,계몽,정치체제 변혁도 모두 “장독문화”앞에서는 당해낼방도가 없나봐요.중국인은 장독의 장에 여지없이 부식되여서 원기를 잃었어요.김선생도 <新,丑陋的中国人>에서 지적하다싶이 중국역사상에서 “장독문화”가 극치에 달한 조대는 명나라의 주원장때입니다.문화탄압과 문자옥을 철저하게 시행한 폭군의 전형이지요.그는 여러가지 법률을 제정하여 민중이 관의 요구에 항거하지 못하게 하고 은둔생활의 자유마저도 철저히 박탈당했지요.문화대혁명은 주원장의 문화탄압,문자옥의 현대판인거죠.

한편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해금정책으로 대륙과 해외의 관계를 차단시켜버렸으니 서양의 문명에 대해 잘 알수도 ,세계정세에 대해 알수도 없었습니다.그래서 주원장의 명조는 중국의 역사상 “장독문화”가 극치에 달하고 정착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인국인 조선이나 일본,베트남 등 같은 한자문화권의 나라들에서는 독자적문화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같은 “장독문화”가 없어요.물론 유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말입니다.

5.,, 비교 장독문화
 
김:그런데 선생님의 조선에는 “장독문화”가 없다는 말씀에는 찬동할수 없습니다.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전통의 유교가 조선에 계승됐다면서 자칭 “소중화”(小中华)라 자부할정도로 주자학 유교에 철저했어요.그래서 “장독문화”란 말은 없지만 “장독문화’의 특질,국민성격의 결함,정치적관본위사상이 지극히 농후하게 존재합니다.

제가 <丑陋的韩国人>(한국인이여,상놈이되라)을 집필한것도 우리 민족의 “장독문화”를 깨부수자는 염원에서였지요.한국내부에서도 찬성과 반발이 컸습니다.그러나 다행히도 유교의 전통을 농후하게 보전하면서도 한국이 아시아후발국으로서 아시아의 네마리 용의 하나로 세계선진국 행열에 들어섰으니 저 역시 긍지를 느껴요.
 
백:정말 그렇네요.그런데 내가 감탄하는것은 “한자문화권”에서도 일본이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 많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중국과 같은 “장독문화” 가 거의 없다고 할수 있습니다.말하자면 매우 맑고 투명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겁니다.
 
김:그렇습니다.<장독문화>의 장본인인 유교를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처럼 체질화되지 않았고 하나의 교양 또는 지식체계로서 유교를 수용한점이 특이한것이지요.그래서 유교가 농후한 탁류(淘流)를 이룩했지만 일본은 명징한 청류(清流)를 형성했습니다.

동아시아문화는 총체적으로 서양문명의 “개인”문화에 반해 “관계”문화인데 ,인간관계에서도 유교가 농후한 중국과 한국은 밀접하고 끈적끈적해요.그러나 일본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인간관계를 간( 间 )으로 유지하는게 특징입니다. 따라서 맑은것,일본어로 하면 “앗싸리”,”키요라카”라는 말에서 보듯이 담백하고 ,산뜻하고 맑은 청아함의 문화가 있습니다.그래서 고유의 “신도”(神道)의 계율에도 인간을 “청정”하게 하거나 과거에 대해 더러운 오물을 깨끗이 물로 씼어버리는 “물에 흘려보내는 “문화가 저변에 깔려있어요.
 
백:그러니까,일본에는 깨끗하게 물로 씻어서 갱신하는 문화입니다.이것은 장기간  고이고 쌓이고 침전돼서 형성된 “장독문화”의 끈적끈적한 그런것과는 이질되는 문화이겠습니다.

김:선생님께서는 늘 일본과 비교하여 일본은 우수한데 중국은 열근성이 많다는 지론을 펼쳤습니다.일본을 많이 좋아하시는것 같은데요?
 
백:네,나야말로 일본,일본문화를 좋아하는 극렬팬이지요.1988년에도 일본에 가서 보고 많이 놀랐어요.청결하고,예의바르고,친절하고,용의주도하고 상대를 배려하고…아시아에서도 ,세계적으로도 일본처럼 살기좋은 나라는 흔치않을겁니다.

일본은 운이 좋은 나라였어요.왜냐하면 중국에서 수입한것은 기타 북방민족과 달리 중화문명의 정화만 흡취했기때문이에요.당나라 "황소의 난"이후 견당사 파견을 정지시키고 국교도 거의 단절해버립니다.

그래서 일본은 송,명시대의 중국의 가장 추락한 시대의 암흑한 문화를 수용하지 않아도 됐거든요.송,명시대는 과거제도,환관제도,전족문화의 대성기였는데 ,일본은 조선과 달리 과거제도,환관제도와 전족문화를 수용하지 않았어요.그리고 유교문화도 가장 추락된 중국의 그 시기의것도 막을수 있었습니다.일본이 유교문화의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것도 여기서 기인되지요.
 
김:비교문화론,비교문명학의 시각에서 관찰하면 ,”장독문화”의 양상을 중일한 3국에 적응시켜 비교하면 일목요연해집니다.즉 유교의 농후도에 따라 “장독문화”의 정도가 정비례되는거지요.중국은 유교의 고향이고 조선은 유교의 제2의 고향,”소중화”였으며 일본은 유교를 지식체계로 받아들이고 체질화시키지 않았어요.그러므로 중한일 순으로 정도,농도가 노정되는거겠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조선은 반도여서 대륙과 붙어있었기에 대륙문명의 압도적 정복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었고 ,일본은 행운스럽게 섬나라여서 바다를 필터로 중국문명 수용에 “선택원리”를 행사할수 있었어요.그러니 일본의 대륙문명의 우수한것만 따오고 조선은 우수한것도,열악한것도 다 수용할수밖에 없었던거지요.

6. 일본을 배워야 하는가?
 
백:나는 “일본인은 한사람이면 돼지 같지만 3사람이 단합하면 용으로 되고 중국인은 한사람이면 용이지만 ,3사람이 합치면 돼지,벌레로 되고 벌레보다 못하다고…중국인의 내흥( 内讧)에 대해서 비판해왔습니다.

중화민족은 세계에서도 위대한 민족의 하나인건 사실입니다.그러나 이”장독문화”에 장기간 부식된데서 우리는 독립사고와 인격을 상실하고 사상과 판단력 시야가 장독을 벗어날수 없었습니다.그러니까 일본인은 무엇을 해도 잘할수 있고 우리는 무엇을 해도 대충대충,서양문명을 배워도 철저하게 배우지 못하지요.

분명 서양문명의 우수성을 얘기하면 중국인속에는 꼭 “숭양미외”(崇洋媚外)라고 비난합니다.서양의 우수한 문명을 배우는데 뭐가 나쁩니까?중국인은 타인을 칭찬할 용기마저도 없고 타인을 비난하는 용기는 굉장히 큽니다.

일본인은 이점에서 중국인보다 우수해요.그들은 남들의 우수성을 허심하게 인정하고 따라배우는 재능이 뛰여나거든요.

아편전쟁과 흑선도래(黑船到来)에서 나타난 중일의 태도에서도 이점이 잘 나타났어요.우리는 아편전쟁을 아주 네거티브하게 굴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일본은 오히려 자기반성,각성의 사건이 됩니다.19세기 중엽,미국의 흑선이 일본에 들어와 일본배를 격침시켜요.그러나 일본은 그 굴욕을 정신적으로 분발하는 계기가 됐어요.그뒤 곧 명치유신이 유발되고 일약 세계적선진국행열에 뛰여들어요.
아편전쟁은 굴욕적이지만 중국의 “장독문화”에 큰 충격을 준셈이지요.역시 갑오중일전쟁도 일본이 준 충격은 너무 컸어요.

그뒤 무술유신이 탄생했지요.우리가 아직 일본인식에서 게을리 했고 잘 몰라서 그러지 일본인 ,일본문화에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우수한것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 전쟁에서 못나서 당한것도 우리지만 일본의 전쟁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반성을 촉구해야 맞습니다.그러나 그것으로 일본인식을 대체하면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요.자기반성과 타자의 우수성을 긍정하고 배워야만 진보할수 있는게 역사발전의 한 법칙이니까요.
 
김:완전히 동감입니다.타인을 무작정 비난,비판하고 자신의 결함을 반성하지 않은 것 역시 중국식 “장독문화”의 특징의 하나가 아닐까요?
 
백:중국은 대국이지만 중국인은 흉금은 엄청 협소하고 포용력이 결핍한게 결함입니다.대단히 정서적이고 주관적 이념이 강해서 우리의 “장독문화”의 파워가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수 있어요.

7. 중국인의 치명적 결점은 무엇인가?
 
김:중국국민성의 열근성에 대한 담론도 역시 서양과 일본인의 지적,자극하에서 진행돼왔습니다.엄복,양계초,진독수,호적,노신,임어당…근대이래 수많은 지식인,정치가,사회엘리트들이 거듭 중국인의 결점에 대해 지적해왔는데,노신이후 국민성해부에 가장 영향력있는 지성은 백양선생을 꼽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중국인의 결점을 어떤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백:나는 내 일생에서 가장 큰일을 했다하면 중국국민성해부를 역사와 현실을 통해서 진행한것이라고 자부해요.나는 필생의 정력으로 우리 중국인이 “장독문화”에서 해탈하는데 쏟아왔습니다.우리의 결점이 너무 많고 열악한건 사실이에요.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열할수 있습니다.

(1) 불청결,무질서,큰소리로 떠드는것
(2) 파벌투쟁과 내홍
(3)  “근면’이 결여하다
(4)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습관
(5)  도량이 협소한것
(6)   사고가 경직된것
(7)   야량자대,과잉한 자기중심주의
(8)   노예근성
(9)   관본위사상
(10)  정의감이 약하고 용기가 없다

이상 간추려서 나열한 중국인(한족)의 치명절 결함은 우리의 열근성의 구체적 표현인데 내가 말한 “장독문화”의 내용이기도 합니다.나는 중국인이 하루속히 장독문화에서 뛰쳐나오기를 바라기때문에 비판을 해온것이지요.
 
김:어느 민족이나 집단에는 다 장점과 결함이 공존하기 마련입니다.우수한것 정화로 되는면들은 그민족사회의 특색과 영구한 정신적가치로 보전,계승될것이고 그결함은 민족사회를 부식시킵니다.
선생님은 주로 그 결함을 지적,비판하는데 기울어졌습니다.그리고 그런 결함을 현실과 전통,역사속에서 근원을 탐색하고 해부해왔습니다.그런 선생님의 신조를 듣고싶습니다.

8.”군왕에 찬가를 부르기 대신 창생을 위해 말한다
 
백:내 신조는 한마디로 표현하면.”군왕에 찬가를 부르기 대신 창생을 위해 말한다”(不为君王唱赞歌,只为苍生说人话)"이지요.

중국문화의 특징이 “장독문화”라면 이 장독은 바로 중국 군왕(임금)권력지상과 “관본위”제도하에 육성된 전통문화,즉 악취를 풍기는 밑굽이 없는 거대한 장독,중국인은 이 장독속의 된장에 절이고 온몸이 잠겨서 죽은 시체로 되고말았지요.

내는 이 장독을 까부시고 인간을 해방시키는 성스러운 사명감으로 살아왔어요.

중국문화는 정치주도이고 농후한 정치적관본위와 그 위엄아래서 억눌린 창생들의 노예의식 ,거기서 재생하는 정치문화이지요.그러니까 중국사회는 “시체미련”문화이며 조상,특히 전제권력의 제왕장상에 대해 숭배하는 기형사회이지요.그리고 중국민족은 이 장독속에서 와리투 (窝里斗)하는 민중으로서 중국인은 다 된장의 구더기와도 같아서 걸쭉한 장독안에서 내홍을 벌였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런 대중을 위해 계몽하고 말하고 싶어요.절대 제왕장상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거나 찬송가를 부르진 않아요!
 
김:지난 80년대 선생님의 국민성해부에 대해서 이미 “100명의 정치가도 해내지 못한 큰 공헌을 했다”는 평이 있었습니다.선생님께서 해부한 “장독”문화개념은 이미 중국인 세계에 널리 파급되고 ,민중의 비판의식을 환기시켰어요.물론 아직도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선생님의 사상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공적은 중국정신사에 한페이지를 남길것입니다.
 
백:감사합니다.나는 늘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지식인”의 몫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나는 게릴라 같아서 우리 문화와 사회의 병증이 어디 있으면 그걸 진단해내는것뿐이에요.그러나 의사가 아니니까 직접 치료를 하지 못하지요.
나의 적은 명확해요.바로 “장독문화”입니다.내가 줄창 노력해온건 바로 자기문화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것뿐입니다.

9.백양과 노신
 
김:저는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노신선생 생각이 납니다.반체제 지식인 ,다 일본을 좋아한것,시리어스한 문풍,무자비한 국민성비판 ,잡문…공통성이 많습니다.

선생님의 “장독문화”론은 노신이 제기한 “흑색염색독”(染缸)설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어요.물론 백양선생의 이론은 노신보다 심도있고 체계적이며 그것보다 확대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백:물론 나개인적으로 노신의 솔직한 성격과 권세에 아첨하지 않는 용기에 대해서 동감하며 지극히 존경합니다.아무튼 중국문화사에서 그의 공헌은 그 누구도 지워버릴수 없어요.

사람들은 내가 노신을 닮은데가 많다고 곧잘 의논하는데 사실 내 글쓰기와 사고양식에 대해 노신의 영향은 아주 미미합니다.게다가 솔직히 고백해서 나 자신 스스로도 노신의 작법에 대해 다 찬성하기는 어럽습니다.왜냐하면 그는 무비의 투쟁성만 구비돼있었지 ,넓은 포용력은 결여했기때문이지요.
자,보세요.죽는날까지 그는 “그누구도 용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자신에 대한 반대,비판을 받아드리는 아량이 없는건 민주주의 시대의 자세가 아니니까요.

내 생각에 노신은 “민족작가”였지 ,절때 “민주작가”는 아닌겁니다.대륙에서는 노신을 신성한 존재로 공자와 같은 현대의 “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이건 잘못된거예요.
 
김:아니,그건 80년대의 일이고 지금은 노신을 재인식,비판하는 신예지식인들의 역량도 만만치 않습니다.노신을 신단(神坛 )에서 끌어내리는 작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노신을 본래 노신으로 환원시키는 문화현상이 일어나고있어요.저도 앞으로 《노신 뒤집어보기》란 타이틀로 노신에 관한 저작을 집필예정입니다.
 
백:아,그런가요?벌써부터 그렇게 했어야죠.노신이 근대 중국문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건 사실입니다.그러나 그 영향은 호적(胡适)보다는 못미치지요.그의 영향은 다만 중국대륙에 그쳤지요.호적의 사상에는 방대한 학술적기반이 있거든요.노신은 그런 풍부하고도 체계적인 학술기반이 결핍합니다.그의 우수한점은 감수성과 투쟁성뿐이지요.
 
김:저도 어렸을 때 노신을 숭배했지만 대학이후에 호적을 읽으면서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노신의 행운은  대륙의 위대한 수령에 의해 “신단”에 모셔진것이고 호적의 불행은 비판해야 할 “반동파’로 낙인찍힌거지요.그리고 노신의 행운은 또 비애를 묻었습니다.사후 노신에 대한 왜곡,극도로 분식,미화시킨 나머지 신성한 제단에 올린겁니다.그러니 계급투쟁의 “도구”로 이용당했으며 인간과 멀어진 “성인”이 돼버린데 있죠.
 
백:노신을 우상화시키는것은 우리 자신을 우롱하는것과 같지요.노신은 그냥 노신으로 보는것이 타당합니다.
 
김:선생님은 노신을 초월했다고 자신을 평가하시는것 같은데요?

백:2002년인가 “인민일보”기자의 인터뷰 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나는 노신보다 위대하다.그것은 내가 노신의 어깨위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때문이다.그러므로 그보다 멀리 볼수있다.마찬가지로 후세들도 나보다 더 위대해질것이다”(2002년 12월30일 인민일보)
 
김:노신 역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수 없는 인물이지요.누구나 그 안목,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방법,가치관등은 모두 시대의 한계를 받기 마련이니까요.노신의 비판정신과 호적의 관용정신을 믹스하는 길이 우리 지식인이 앞으로의 자세라고 생각됩니다.백양선생님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0.  자신이 평가하는 백양
 
백:나자신은 성격이 직솔하고 활달하면서 고집이 세고 너무 직통배기로 말하며 또 관용적이지요.(웃음) 평생 어디에 구애받지 않을 야생동물입니다.그리고 타인이 나를 욕하고 비평해도 난 다 받아들일수 있습니다.물론 행동적으로는 원시적인 반응을 하기도 해요.그러나 하도 욕을 먹는데 익숙이 돼서 누가 욕을 안하면 또 심심하기도 해요(웃음).이게 다 내 우점일수도 결점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웃음)그리고 선생님 목청도 우렁우렁하고 맑습니다.말씀하실 때 의기투합하면 격동되면서 정서적으로 흥분에 젖기도 하지요.
 
백:(웃음)잘 아네요,난 인정에 약하고 타인이 나에게 조금만 잘하면 그 은혜를 잊지 못하는 성미입니다.그리고 멋장이 신사 못지않게 멋부리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아요.어떤 의의있는 이벤트같은거 있으면 난 퍼머를 하고 꽃무늬 샤츠와 반바지를 입고 거리에 나서니까 젊은청년들 유행에 절대 뒤지지 않아요.

김:부부금슬이 굉장이 좋다고 들었는데요?
 
백:지금의 집사람 장향화와는 1978년에 결혼했습니다.다섯번째로 되는 결혼이지요.내가 어려울 때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요.지금은 진짜 내 24시간 사용비서이기도 합니다(웃음)

내가 몸이 좋지 않으니 집사람이 다 나서서 처리하고 손님도 접대하고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내 전속 매니저입니다.
 
김:10년 옥중생활은 선생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이 있습니까?
 
백:내가 1968년 3월부터 10년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감방은 나를 잡문만 쓰는 칼럼니스트로부터 중국역사를 꼼꼼히 연구하게 만든 산실이었지요.

그러니 내 신생( 新生)은 감옥에서부터 시작된것입니다.(웃음) 사마천이 그런 혹독한 역경속에서도 <사기>를 쓸수있었다면 나도 감방을 역분발의 무대로 삼을수 있다고 다짐했거든요.
 
김:어떤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출옥하신 뒤 정치에 대한 비판이 무뎌지고 옛날처럼 필봉이 예리하지 않다고들 하면서 다시 감방살이 할까봐 겁나서그런다고 하는데요?
 
백:말도 안되는 소리예요.제가 감방안에서 깨달은건 정치를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중국인의 국민성,소질 즉 문화문제를 해부하고 비판하는것이 더 중요하다는거예요.왜냐면 정치역시 중국인의 문화속에서 파생되는것이니까요.중국의 장독문화야말로 중국정치의 뿌리입니다.
 
김:대만에는 제가 좋아하는 지성이 선생님을 포괄해서 세분이 있습니다.백양,이오( 李敖 ),용응대( 龙应台 ).이오선생은 선생님과 쌍벽을 이루는 문화거장이고 ,용응대여사는 신예비평가이신데 이오선생은 정치적비판이 많고 용응대여사는 사회적비판이 많으신데 비해 선생님은 문화적 비판에 주력하고 계시지요.이 세분이 계신다는건 대만의 행운이라고 생각돼요
 
백:맞습니다.대만의 문화사회풍토가 육성시켰지요.

11.  “추한 중국인 여전히 유효하다
 
김:선생님의 불후의 명작 《추한 중국인》이 탄생된지도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이 책은  세계 중국인 사회뿐만아니라 일본에서도 지금까지 22판을 증쇄하고 한국에서도 번역출간이 되었습니다.그러니 이미 한자문화권 내지 서양에까지 파급된 지대한 영향력 있는 저작으로 되었지요.

손관한선생님은 선생님의 이 책이 자신에게 준 영향에 대해서 인류에 대한 “<성경의 영향>으로 비유했어요.<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사받은것이지만 백양의 책은 인류의 지혜에서 왔다”고. 이는 아마 선생님의 저작에 대한 최고의 경의와 평가라고 생각됩니다.《추한 중국인》은 20년넘게 지났지만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보시는지요?
 
백:중국의 “장독문화”는 일조일석에 해소되는게 아닙니다.수천년,수백년의 뿌리를 둔 중국민족의 문화가 쉽사리 변할리 없지요.

따라서 이 “장독문화”가 존재하는 한 중국인의 국민성적 열근성,아까 위에서 내가 지적한 결함들은 여전히 우리의 현대화와 진보를 가로막는 높다란 장벽이 됩니다.

정치개혁을 포함해서 중국,중국인이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는 많고도 많습니다.그중에서도 인간의 현대화,인간소질의 향상이 아직 정치제도 문제앞에서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제가 역사를 통해 중국인의 국민성과 관본위 등에 대해 규명하려고 애쓴것도 다 우리 중국인의 “인간문제”,즉 문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자는 염원에서였지요.

현재 중국인의 물질이 풍부해짐에 따라 인간소질도 좋아진것도 있지만 ,오히려 금전사상에 포로되여 더 나쁘게 추락된 면도 있습니다.그러니 나의 이 소책자 <추한 중국인>은 여전히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내책을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
 
김:대단히 유익한 말씀 감사합니다.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빌면서 다음 기회에 또 고견 듣고자 합니다.

백:네, 감사합니다.그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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