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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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82) 근대 구중국은 일궁이백이였나?
2016년 10월 21일 08시 01분  조회:3422  추천:16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2)

근대 구중국은 일궁이백이였나?

김문학

 
  중국 현대인 특유의 과거 “암흑사관”과 함께 병행하여온 고루한 인식패턴에는 근대 낡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이전)의 사회는 무조건 “일궁이백(一窮二白)”론으로 밀어붙이는것이 있다.

  필자가 유년시절 중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 신중국의 오늘날과 종적비교를 하여 구사회는 “암흑”하였고 “반동적”이였으며 경제면에서는 “일궁이백”이라는 관념적교육을 늘 받아왔다. “억고사첨(憶苦思甛)”이란 신 사자숙어가 정착될만큼 오늘날의 행복한 생활을 옛날 구사회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회억하면서 대조적효과를 노린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막연한 관념교육만큼 구사회, 근대사회가 “일궁이백”의 말이 허용하는 상황이였을가?

  력사를 재독하면서 재발견되는 력사는 이 관념적인 구호를 일소하기에 충분한 소재들이 도처에서 쉽게 건져낼수 있다. 필자는 우선 아래 데이터적인 수치와 사실을 렬거하기로 하겠다.

  1866년 12월 양무운동에서 탄생된 중국 최초의 기계조선공장, 마위조선공장에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1864년 중국 근대 최초의 천톤급 륜선을 제조했다.

  1871년에는 중국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제작 탄생된다.

  1882년에는 중국 최대급 철근 목조병선이 제조된다.

  1889년에는 중국 최초의 철갑군함이 제조된다.

  그리고 1907년 미위조선공장에서는 외국인 기사를 사퇴시키고 자체의 력량으로 목, 철 조합구조의 선박을 제조할수 있었는바 극동아시아에서는 최대규모의 조선기지라 한다.

  1919년에는 중국 최초의 쌍익수상비행기를 제조하였다.

  유명한 한양병기공장은 1890년 6월 저명한 개명파 관료, 지식인 장지동이 건설했다. 철공장에 이어 총과 포를 제조하는 병기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895년 여름부터 소규모생산을 하다가 88식 모젤권총을 생산하여 1896년에는 1,300정, 1901년에는 2,500정, 기병총 316정을 생산했다.

  1904년 호북병기공장으로 개칭한 이곳에서는 매일 보총 생산량이 50정에 탄환 12,000발이였다. 1907년에는 년도 보총 생산량이 9,000정으로 늘었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구중국은 일궁이백하여 서양의 성냥, 서양 못을 사용할수밖에 없었다”고 늘 기술해왔는바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였다.

  일찍 1879년 광동성 불산현에 중국인 자체로 경영하는 교명(巧明)성냥공장이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성냥공장은 백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1920년 상해에서 설립한 류홍생(劉鴻生)의 “홍생성냥공사”가 유명했다.

  세멘트공장을 보면 1906년 주학희(周學熙)가 창설한 “계신양회공사(啓新洋灰公司)”가 유명했다. 질좋은 세멘트를 생산했기때문에 계신공사에서는 전국 중대 건축공정에 대량의 세멘트를 공급했다.

  회하철도교량, 화하대교, 경한철도의 대교들, 그리고 위해, 하문, 청도, 연태 등 부두건설과 북경도서관, 연경대학, 상해우전국 등 유명건축물은 모두 앞다투어 계신공사의 세멘트를 사용했다.

  항일전쟁시기까지 계신공사는 중국의 세멘트시장을 14년이나 독점했으며 그 판매량이 전국 세멘트 총판매량의 92%나 독차지했다.

  조선, 증기기관차, 자동차, 비행기, 각종 기계 등 분야를 살펴보아도 중국이 “일궁이백”하였다는 평가절하는 도무지 어불성설임을 알수 있다.

  상해 강남조선공장에서는 1918년에 미국의 수주로 만톤급 화물선을 4척이나 생산했으며 그 우량한 질로 인해 미국정부는 매우 흡족해했다. 
          
  아래 중국 생산의 데이터를 종 더 라렬해 본다.

  1862년 중국 최초의 증기기계가 안경군계소에 의해 생산된다.

  1865년 중국 최초의 륜선 “황호”호가 역시 안경군계소에서 생산된다.

  1867년 중국 최초의 선반(車床)이 강남제조국에서 생산된다.

  1868년 중국 최초의 근대 군함이 강남제조국에서 생산된다.

  1906년 중국 최초의 대형군함이 복주선정국에서 생산된다.

  “석유가 구중국에서는 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근대사에서 중국의 석유채굴은 1896년 연장(延長)유광이 탄생되였으며 중국석유공업의 어머니라 불렸다. 1907년 4월 2일 채굴을 시작하여 일당 생산량이 1.5톤이였다. 이때 이미 중국대륙에 석유가 없다는 정설을 뒤엎은것이다.

  재봉미싱을 보면 1898년 미국에서 “NEWHOMO”미싱을 청국으로 수입하게 되는바 1910년에 미국의 재봉미싱이 상해, 광주, 천진 등을 통해 대량으로 수입되였다. 1928년 상해에서 최초의 국산재봉미싱이 생산되였는데 그뒤 거룡패 등으로 해방후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하게 된다.

  이상 데이터는 “자유중국론단”에서 발취한것인바 이 단순한 경제적데이터에서 “사실은 만마디 웅변을 릉가한다”는 말과 같이 근대 구중국이 결코 현대인의 관념속에 박힌 “일궁이백”의 정설과는 반대로 오히려 경제능력이 나름대로 강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될것이다. “일궁”은 있어도 절대 “이백”은 아닐것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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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7 ]

7   작성자 : 회령
날자:2016-10-25 16:00:01
보충: 백성이 "이충얼바이"이면 나라도 "이충얼바이"란 말을 들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6   작성자 : 회령
날자:2016-10-22 18:09:09
보충: 백성이 궁하면 나라가 궁한것 아닙니까?
5   작성자 : 회령
날자:2016-10-22 12:38:07
문학선생: "이충얼바이'란 말이 얼마전까지도 중국실정에 맞는 말로 사용된것 같습니다만... 이 말은 대다수 중국백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까? 청나라경제가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는 확실히 "일궁이백"이 아니였지만 중국백성은 "일궁이백"이였든것 같은데... 고견을 더 말씀해 주시면 많이 학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작성자 : 동명
날자:2016-10-22 07:34:24
사실은 만마디 웅변을 능가하는 역사의 진실을 잘 말했다.청말의 중국은 경제적 으로 GDP세계 제일의 나라였으나
국민국가로 탈바꿈 하지 못한 이유로 세계 열강의 식민지 대상으로 추락된 것은 비극이였다.
지디피 추구만 열중하는 폐단을 시정해야 중국의 미래가 밝을수 이다.역사의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3   작성자 : 경희
날자:2016-10-21 16:18:07
신문장.
ㅎㅎ 정정합니다용
2   작성자 : 경희
날자:2016-10-21 16:16:21
아,김교수님 역사론 신무장 잘 읽고 새로운 지식 또 배우게 됐네요.
교수님 글은 학식과 신정보가 있어서 좋아용!
잘 배우고 갑니다.ㅎㅎㅎ
1   작성자 : 갈매기
날자:2016-10-21 15:46:35
근대재발견은 백년전 중일한 역사적 진실을 까밝히는데 매우 의의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고 유력한 통계수자와 비교문화학자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독자들이 미처 모르던

역사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재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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