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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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88) 조선의 3대 천재
2017년 03월 25일 09시 24분  조회:3721  추천:23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8)

김문학
 

조선의 3대 천재 
 
  1909년 11월, 일본에서 최남선은 홍명희의 주선으로 이광수와 초대면한다. 당시 최남선은 20세, 홍명희가 22세, 이광수가 18세. 모두 혈기왕성한 청년이였다. 이것이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린 최, 이, 홍의 3자의 첫 만남이였다.
 
  조선 근대사의 특기해야 할 력사적인 상봉이였다. 일설은 1906년 3자가 동경에서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3대 천재의 만남은 그뒤 전개되는 근대 조선의 문학, 언론, 출판, 독립운동, 친일 등 령역을 통털어 3자의 동시대적 련결성이 있는 활동에서 잘 로정되고있다.
 
  사실 1909년만 해도 18세의 이광수는 무명의 젊은 류학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듯이 최남선은 이광수와 첫 대면하면서 당장에서 조선문단의 첫손가락 꼽을수 있는 “천재”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당시 《소년》이란 한국 최초의 잡지를 창간한 최남선은 이광수와 홍명희에게 잡지를 같이 잘 운영해나가자고 기대를 건다. 1910년 3월호 《소년》에 글을 실어 최남선은 이광수와 홍명희가 금후 잡지발행에 참여하게 돼 《소년》의 전도는 광명이라고 흔연히 말한다.
 
  필자의 책상머리에는 지금 이 3대 천재의 사진이 놓여있다. 최남선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문인이기보다는 투박한 농군같은 질박한 사나이의 이미지가 앞선다. 이광수는 대단한 미남이다. 36세에 《무정》집필시기 한복차림의 얼굴사진이나 상해림시정부 《독립신문》의 사장으로 있을 때 여럿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도 이목구비가 단정한 그는 1930년대 남자배우 뺨치는 흰물가리의 미남이다. 필자의 속단이지만 조선 근대의 문화사에서 이광수를 따를 미남형은 없을것이다. 총명하고 두뇌명석한 그 빛발이 얼굴에서 뿜는듯 하다. 대조적으로 대머리에 안경을 쓴 홍명희는 로학구적인 수척형 지식인의 전형적 얼굴을 하고있다. 
 
   이들은 각기 대조적인 얼굴모습을 하고있는 대지식인, 문인이였으나 그들의 큰 공통점은 하나 있는바 바로 일본 류학과 생활체험이 있는 당시로서는 일본을 통해 서양의 최선진문물을 수용한 천재들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조선의 근대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근대의 천재 역시 일본이란 영향하에서 탄생, 활약하게 된다.
 
  최남선(1890~1957)과 이광수(1892~1950)는 필자가 최고로 추앙하는 근대 동포문인이다. 그중에서도 이광수에 대한 애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두분은 한국 신문학을 낳은 량대 거두로서 이들을 빼고 한국 근대문화사를 거론할수 없다.
 
  최남선은 근대 한국의 문화령역에서 거의 “최초”라는 모든 일을 휩쓴 인물이다. 근대시인, 시조시인, 력사학가, 사상가, 계몽가, 출판가, 수필가, 실업자, 이 앞에 모두 “최초”가 붙는다.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가일뿐만아니라 시, 수필, 평론, 희곡 모든 분야에서 길을 개척한 문인이다. 그리고 사상가, 계몽가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박람강기, 해박한 지식, 예리한 통찰력, 선진적인 예지력, 언어적 천부 이 모든것은 조선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 탁월한 재능과 애국심까지 가진 이광수에 당시 질투, 시기의 화살을 던진 자가 많은것은 당연할것이다. 그에 대해 가십거리로 씹을순 있어도 그를 정면에서 대처할 문인은 유감이지만 아직 없었다.
 
  춘원 이광수가 1922년 5월 《개벽》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은 최초로 조선인의 국민성의 결함을 분석한 명문으로서 우리 문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민족론이다. 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친일의 글로 매도하는 자는 다시 재독하기를 권유하고싶다.
 
  육당 최남선이 1928년 발표한 “력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 역시 조선인의 민족성의 약점을 분석한 글로서 오늘 읽어도 공명하는 부분이 대다수이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모두 해방후 “친일”의 죄로써 동족의 질타와 매도를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민족의 보존을 위해서였다”고 떳떳이 주장한다. 이 한마디 말에 이광수의 “친일”을 푸는 공식같은것이 들어있지만 그 말에 우리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있으니 안타깝다. 좀더 침착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분별해서 들어야 하며 이것이 이광수를 대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여야 한다.
 
  홍명희(1888~1968)는 1924년 최남선이 창간했던 《시대일보》를 인수받아 사장을 하면서 1928~1939년 조선일보에 유명한 장편소설 《림꺽정》을 련재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는 1945년 광복직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주요 책임자로 있었는데 월북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정권 수립에 참여하면서 부수상의 요직에 있었던것으로 알려지나 그뒤 1968년 80세를 일기로 숨진다.
 
  1950년 조선전쟁와중에 7월 12일 효자동자택에서 납북된 이광수는 지병이 있는 상태로 10월 25일 자강도 만포시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춘원의 3남인 이영근씨가 1991년 7월 하순 평양을 방문, 이광수의 특설묘지를 참배했다고 한다. 최남선도 1957년 67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서거한다.
 
  서울대의 교수 구인환은 “이광수의 몸은 갔어도 이광수는 이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살것이다”고 했다. 조선의 격동기를 주름잡던 3대 천재, 역시 같은 말로 그들은 “몸은 갔어도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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