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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89)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또다른 모습
2017년 04월 12일 17시 45분  조회:3707  추천:50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9)

김문학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또다른 모습
 

  필자가 소장한 동아시아 근대 명사(名士)의 친필유묵에는 손문, 리홍장, 원세개, 이등박문,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족자도 2점 들어있다.  

    이완용의 글씨는 과연 명필이다. “명필”이라는 말이 가장 실감나는 이완용의 글씨는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룡비봉무(龍飛鳳舞)”의 경지에 달하고있다.

  일제시기 명치천황도 그의 글씨에 매료되여 직접 본인에게 붓글씨를 써달라고 청했다는 일화는 또한 너무나 유명하다. 이런 희대의 명필가에게 또한 희대의 친일파 “매국노”라는 레테르가 붙어있다.

  오늘날까지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이다. 학계에서나 민간에서나 그의 업적을 조금이나마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 당사자는 무조건 격심한 지탄을 받아 사회적으로 매장할 기세로 물매를 맞게 된다.

  그런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1910년 8월 22일 당시의 총리로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선통감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위압으로 체결한 인물.

  이에 앞서 1905년 일한보호조약(즉 일사보호조약)을 체결할 때도 학부대신(교육부 장관)으로서의 이완용은 조약에 찬동하였다. 그와 같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다른 4명도 악명자자한 “을사오적”으로 불리고 있다.

  이완용의 “매국노”라는 고깔모자를 뒤집어보면 거기에는 또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이완용(1858~1926)은 자는 경덕, 호는 일당(一堂)으로 경기도 광주출신인데 유년시기부터 총명한 어린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10살 나던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여 이 집의 장손으로 된다. 1882년 특별 과거시험에 합격해 규장각, 사강원에서 관리로 있다가 1886년 신식학교 육영원에 입학하여 영어, 지리, 력사 등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부터 3년 동안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다. 1890 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거치며 관운이 형통해 189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된다. 1896년에는 외무대신 겸 농상공부대신의 요직에 앉는다. 그뒤 독립활동으로 좌천되였다가 1905년 다시 학부대신직을 복직하게 된다. 그해 11월 을사보호조약에 솔선 서명하여 앞서 진술한바와 같이 “을사오적”의 필두로 지목되였다.

  1907년 그는 통감 이토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된다. 1907년말 헤이그밀사사건이 터지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하여 이완용을 통해 고종의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일에 분노한 서민들이 이완용자택에 불을 지르며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의 습격으로 이완용은 부상을 입게 된다.

  이어서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일본의 강압하에서 한국병합조약을 체결한다.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 1920년에는 후작, 1927년 69세 때 이재명에게 습격당한 상처후유증으로 절명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완용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이며 그 인격은 대중들에게 흠모할바 많았는바 그의 사망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고 추모했다. 또한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후 최대의 규모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매국노”였던 그가 조선인민의 이같은 인기를 얻었다는것 자체는 어딘가 다른 무엇을 설명하는듯 하다. 이완용의 생애를 반추해보아 그가 지금껏 교과서에서까지 매도하는 “매국노”로 나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존재이다.

  우선 그가 한국병합조약에 서명한것은 “조선의 전제왕조가 끝까지 문명개화를 거부하고 과도한 사치로 극빈과 기아로 허덕이는 민족을 방치한 상황을 감안해서 일본의 협력으로나마 민족의 재흥을 기하려는데서였다.” 명지대 교수이며 현재 가야대학 객원교수인 최기호씨는 《력사재검증.일한합병》에서 이렇게 언급하고있다. “그들이 당시의 조선국내의 상황에서 하는수 없이 정치선택을 한것이지, 오히려 정권담당자의 책임으로서 당연한 행동을 했을것이다”고 최교수는 덧붙인다.

  필자가 섭렵한 력사자료에 따르면 친일파라는 이완용은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했으며 만족자존심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동양 최고의 명필로서 지금까지도 독립문이나 왕궁에 그의 필적이 남아있다. 그의 인격은 고매했으며 외무대신 재임중에도 로씨야의 조선병합정책을 중지시킨 공로를 세웠다.

  또한 관직에 있은 그는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늘 거리를 두고 활동했다. 1896년 미국망명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모임에서 만난후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897년 1월 23일자 《독립신문》에는 이완용의 독립평화활동에 대해 “자기 힘껏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이씨가 갈리게 되면 이씨보다 나은이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고 격찬한다. 서재필 역시 1897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에서 이완용의 애국에 대해 칭찬을 하고있다.

     1919년 3.1독립운동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였는데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것이라는 리유로 사양했다. 당시 이완용에 대해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선인에게 막대한 영향력과 존경을 받은 인물로 보인다. 그는 실력양성사상을 견지한 인물로서 계란에 돌 던지기식 무단행동을 삼가하자는 방침이였다.


  그의 장례식에 조선의 추모객이 10리가 넘게 이어졌으니 그의 위망과 인기를 보아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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