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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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토 히로부미와 무술변법 (김문학)
2010년 08월 18일 16시 38분  조회:5393  추천:23  작성자: 김문학

<장련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1)

 

이토 히로부미와 무술변법

 


김문학



1898
9 21.

이날은 어떤 날인가?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흑했던 하루, 무술변법이란 유신혁명이 서태후를 위수로 한 수구파 세력에 의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날이다.

 

무술변법으로 칭하는 이 혁명은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유신이었다. 이 역시 또한 1895년 청일갑오전쟁에서 대패를 당한 청국의 부득불한 유신이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과 싸워 이기자고 외치던 주전파 관료들도 전쟁의 패북으로 그 청나라적 대국의 오만한 사고양식을 전환시킬 계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독서인(지식인)들이 이미 양무운동의 실패에서 얻어낸 교훈을 정치지배시스템을 개혁하고 일본식의 국민국가로 변신하지 않았기에 서양은 물론, 작은 동양의 섬나라에게도 여지없이 완패하는 망신을 당했다는 점이다.

 

남방 해남의 고양파 대가로 명성을 날린 지도자 강유위는 일찍 1888년 《일본변정고》를 집필하여 일본명치유신에 따라배우자고 광서황제에게 상서하지만 보수파 관료들에게 각하당하고 만다. 그러던 1895 4마관조약” (일청강화조약)체결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에서 과거시험을 보려던 강유위와 전국에서 운집해온 거인들 603명을 소집하여 연명으로 유명한 공거상서를 감행한다. “공거상서는 과거수험생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헌상하는것으로써 명치유신을 따라배워 청국을 부국강병으로 이끌자는 개혁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약관 27세의 광서황제는 명치천황과 같이 실권이 없었고 서태후 등 수구파를 움직일 력량도 결여했다. 1884년 조선의 젊은 개화파의 리더가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듯 무술유신도 기껏해야 백일천하로 막을 거둔다.

 

명치유신과 무술변법 그리고 조선의 갑신정변 이 삼자를 비교해보면 유독 명치유신이 왜 성공할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은 색출해낼수 있다. 무술변법이나 갑신정변은 주위의 인재,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유연성이 결필했으나 명치유신은 그것이 확보돼 있는 유연구조, 명치천황과 그 주위의 영재들인 오오쿠보(大久保),기도(木戶) 가츠()등이 가변성과 다의성을 갖고 동일한 행동을 보였기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유신은 상하의 유연성 있는 연합이 결여했고 강경한 구조로 일방통행으로 감행됐기에 꼭 목 잘리고 피흘리는 비극으로 종말짓기 마련이다.

 

두나라의 유신패자들이 다 같이 일본으로 망명한 것 역시 일본은 동아시아 혁명의 중심이었다는 유연한 구조의 땅이었다는것을 설명해준다.

 

당시 중국이 무술유신에서 성공할 찬스는 있었다. 그런데 그 찬스를 중국은 스스로 잃어버렸다.

 

베일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 하나를 이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역사를 읽는 묘미의 하나가 바로 베일에 가려졌던 모르던 역사의 장면을 캣치해 내는 그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무술변법의 특징은 곧 1868년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것인바, 명치유신으로 국민국가를 완성시키고 일본 최초의 근대헌법을 제정한 최초의 총리대신 이토히로부미는 그때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젊은 유신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정치가이기도 했다.

 

마침 무술변법이 한창 백열화로 진행중인 1898 6월 이토는 제3차 이토내각을 사임하고 일청전쟁후 3국정세를 알고보고자 7월 조선을 거쳐 9 14일에 북경에 이르렀다. 그런 동아시아의 유명 정치가인만큼 이토는 유신파 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때 신문보도를 보아도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어 이토의 지도를 받고자 면회를 요망했다.

 

더우기 강유위의 발안으로 이토를 청국정부의 수상 (또는 정부 최초 정치고문)으로 초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가 확실이 응했는지는 기록에 없어서 불투명하다.

 

그무렵 이토는 적극적으로 유신파들과 만나 많은 조언을 주었다.

 

성급하게 표면적인 개혁을 피하고 계획있게 점차적으로 진행하도록 농..상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선 교육을 정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토는 또 9 15일 총리아문을 방문하여 이 나라 대신, 관료들이 나라 정치보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황제에게 솔직한 진언을 못하는것이 안타깝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9 20일 광서황제를 배알한 이토에게 황제가 개혁의 순서나 방법에 대해 총리아문의 5대신들에게 지도해주십소하는 요망에 귀국을 위해서라면 성심 성의를 다 하겠나이다 이토가 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21, 서태후 등 보수파들은 이토까지 가세했다는것을 눈치채고 무술유신을 일거에 짓부순다.

 

만약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란 전제가 금물이지만) 이토가 청국유신의 최고 고문으로서 혁명을 지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무척 흥미로운 가설이다. 가설이긴 하나, 이토의 방법대로 순조롭게 유신변법이 추진됐다면 근대사의 새 페이지를 썻을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그뒤 이토가 일본공사관에 머므르고 있을때 서태후의 쿠테타를 피하여 비호를 요구하여 뛰어든 양계초를 이토가 보호해주었다. 이토는 일본공사관 직원에게 양계초같은 유능한 인물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부탁하여 마침내 강유위와 함께 일본의 배에 타고 망명에 성공한다.

 

그들이 일본을 제2의 혁명근거지로 맹활약하게 된것도 이토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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