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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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피로물든 장암동
2014년 02월 07일 09시 40분  조회:1986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장암동마을 앞장대에 세워진 <장암동참안>유적비(2004년 취재시 사진)

하루 아침사이에 마을은 불바다로 변하고
무고한 조선인백성 무참히 두벌죽음 당해

평화로운 노루바위골

잡풀이 뒤덮힌 산자락에 소수레길이 가리마처럼 뻗어있었다. 내려다보니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온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모습이 번득번득 눈에 비쳐오는데 어데선가 들려오는 뻐꾹새의 울음소리가 귀맛 당긴다. “통통통...” 마을에서 울려오는 뜨락또르의 동음에 섞여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가 작은 합창을 이룬다. 정오의 햇볕을 이고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이 멀리서 동화처럼 읽혀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장암동의 풍경이다.

오면서 여러 마을에 들려 “장암동”이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사람마다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말로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댔다고 하던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 생각나서 “노루바위골”이 어디인가고 물으니 사람마다 안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세전벌 동남쪽 뉘연한 한전밭 중간에 난 수레길을 따라 들어가니 우리가 애타게 찾던 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이였다. 다시 골연을 파면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노루바위골 즉 장암동이라고 했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노루는 보이지 않고 꿩우는 소리가 이 골 저 숲에서 다정스럽게 들려올뿐이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가 바라보니 산자락에 큼직한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자연석으로 세운 장암동유적비였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 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
에 용납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 6月 30日

산새들이 지저귀고 풀벌레가 울어대는 인적없는 산길을 얼마간 더 접어가니 길옆에 금방 본 유적비보다 작은 석비가 자리하고있었는데 쑥대에 묻혀 얼핏 알리지 않았다. 석비정면에는 “一九二0年 十月 三十日 日軍의 間獐巖慘殺事件犧牲者三十人追念碑”라고 새겨져있었다. 왼쪽 면에는 “一九九四年 七月”이라는 석비를 세운 년월이, 오른쪽 면에는 “犧牲者遺家族代表 故 金京三의 子 金基柱建”이라는 세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니 묵은 뙈기밭 한자리가 있었다. 농부의 손길이 닫지 않은 밭에서 잡풀이 곡식을 대신하고있었다. 어찌보면 집앞 뙈개밭으로 보이기도 하는 아담한 밭이였다. 아마 여기가 1909년에 조선족농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원 장암동마을 옛터자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개울과 나란히 뻗은 수레길을 따라가며 보니 마을이 들어앉았음직한 곳이 여러곳 있었다.

1920년 참안당시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였으며 이들 다수가 반일운동에 적극 투신하는 열성자들이였다고 한다. 린근에서 장암동마을을 “예수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永信)이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반일교육의 요람으로 소문난 명동학교가 있었다. “3.13”운동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직원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1920년 10월에는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여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였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동부지방 총회장 량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련계를 갖고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악마들의 살인현장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일본국학자료원에서 출판한 두툼한 “현대사자료”집에서 장암동사건에 관련된 페지를 찾아 펼친후 그대로 번역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보병장교 스스끼대위 이하 72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은 후방련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장암령부근의 불령단을 소탕할 임무를 맡고 30일 0시 룡정촌 병찬부에 집합하여 29일에 억류된 5명의 조선인을 안내자로 장암촌으로 향했는데 이들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도망을 기도했기에 죽여버린후 남양평을 향해 진군했다. 남양평에서 조선사람 1명을 안내자로 세우고 장암동에 도착하여 오전 6시30분부터 포위토벌을 시작했는데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적 30여명이 동산촌방향으로 종대를 지어 퇴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격을 명령했는데 11명의 살상을 냈다...”

1920년 10월 30일 새벽 0시 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하고 마을주민들을 강박하여 교회당마당에 집결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을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불속에 던져넣군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룡정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 말틴은 자기의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있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룡정촌에서도 보였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녀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여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심여추는 “연변조사실록”에서 장암동참안을 이렇게 쓰고있다.

일본군은 10여리에 산재해있는 장암동마을을 단꺼번에 불태워 페허로 만들었는데 마우계견(馬牛鷄犬)같은 짐승도 한 마리 남지 않았다.

가슴치며 통곡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가슴에서 아직도 피눈물이 흐르고있는데 악마같은 일본군은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간악한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했다.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이 토벌에서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이며 반일련합부대의 군무청장인 량도헌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의 시체인지 알수 없어 유골들을 한데 모아놓고 합장하였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집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고 제좋은 소리를 줴치면서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장암동참살사건은 일본군이 감행한 ‘경신년대학살사건’ 가운데서 저지른 수많은 사건중 한 토막의 만행에 불과합니다. 일본군 기무라대장은 자기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 ‘무릇 경유하는 부락마다에서 불령단같은자나 도망치는자를 보기만 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총살하였다’고 썼습니다. 일본침략자는 가는곳마다에서 야만적인 파쏘본질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무고한 백성을 마음대로 학살하여 연변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력사를 잊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박창욱교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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