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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초기 연변대학은 사범, 의학, 농학 3개 부가 있었다. 사진은 연변대학 농학부 제1기 학생들.
조선민족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조선인들은 자기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에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을 세울 구상을 내놓아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호응을 얻었으며 인차 중공길림성위의 동의를 거쳐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받았다. 연변에 돌아온 림춘추는 연변대학창립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림민호, 김유훈, 박규찬 등과 함께 구체임무를 맡고 밤에 낮을 이어 동분서주하였다.
대학이 창립되기전에 “태아”의 이름을 “동북조선인민대학”이라고 지어두었다가 창립시에는 “연길대학”이라는 “아명”을 달았고 그후 “연변대학”이라고 정식 명명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시 쓰달린극장에서 성대한 개학식이 열리였다. 사회자 최채가 준비위원회를 대표하여 연변대학의 창립을 정중하게 선포하였다. 림춘추는 대회에서 “연변대학의 창립은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나는 체현”이라고 강조하고 나서 “대학의 전체 성원들은 공산당의 지도하에 한결같이 뭉쳐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라”고 호소하였다. 교원과 학생대표들은 한결같이 학교를 제집처럼 잘 꾸리겠다고 굳게 다졌다. 연변 각계 인사와 동북 각지에서 온 래빈들이 자기 가정의 경사처럼 기뻐하며 축사를 드렸다. 그 후 개교기념일을 4월 1일로 정하였다.
드디여 중국조선족최고학부 연변대학은 목청높이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여났다. 오래전부터 연변대학의 창건을 관심하여왔던 길림성정부 주석 주보중은 트럭, 피아노, 주단 등을 보내주었고 연변대학 창설에 가정 큰 공헌을 한 림춘추는 조선으로 나간후에도 늘 잊지 않고 재정면에서 도와주었으며 도서자료를 해결하여주었다. 동북 각지에 있는 조선인들은 구차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물심량면으로 성심성의로 지원하였다. 제1대 교장 주덕해, 부교장 림민호는 조선민족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다.
연변대학의 취지는 조선민족의 건설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학교로 하여금 점차 우리 나라의 조선민족건설인재를 육성하고 조선민족과학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 기지로 되게 하는것이였다.
창립당시에는 문학부, 리공학부, 의학부와 농업전문을 설치하였으나 1950년에는 원 문학부와 리공학부를 합병하여 사범학원으로, 의학부를 의학원으로 고쳤다. 1956년에 또 통신학부를 증설하였고 1957년에 원 농업전문을 농학원으로 고쳤다. 1958년 7월, 연변대학의 의학원과 농학원은 연변의학원과 연변농학원으로 분립되였다. 연변대학은 원 사범대학원을 기초로 조절하고 출실히 하여 조선인의 중등교육교원, 민족간부, 과학기술인재를 육성하는 종합적인 대학으로 되었다.
창립시기로부터 1958년 7월까지 연변대학은 줄곧 조선인학생만 모집하는 단일적인 민족대학이였으나 변강지구의 한족간부, 교원, 과학기술인재가 부족하고 또 원천이 없는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9년부터 부분적으로 한족과 기타 민족 학생도 모집하였다. 이리하여 연변대학은 조선민족의 건설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고 기타 민족인재의 육성을 돌보는 여러 민족이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대학으로 되었다.
연변일보 창간
1945년 8월 18일, 연길에서 민영조선문신문 “한민일보”가 창간되였다. 한민일보는 8절지에 2개 면의 일간지였다. 창시인은 광복전 조선의 “매일신문” 간도지시장이였던 최무였다. 그들은 괴뢰만주국 동만신문인쇄소와 연길천주교인쇄소를 합병하여 신문인쇄공장으로 삼고 대유학자로 불리우던 개산툰 서단훈장 한석기를 사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뚜렷한 정치적경향성을 띠고있지 못하고 자연주의적 색채들이 담겨져있었다. 한민일보는 보도에서 일본을 제한외에는 거의다 선전하였다. 이를테면 “한국림시정부 수령 김구씨 귀국전 장개석을 회견” 등 기사를 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이란 무엇인가?”, “맑스주의 자본론입문”, “10월혁명략전” 등 글을 싣고 중, 쏘, 한(조선)의 친선, 감조감식 등 글을 제창하였다. 1945년 11월 5일,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한민일보”를 접수한후 “연변민보”로 개칭, 재조직하여 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만들었다.
“연변민보”는 창간호로부터 모택동의 “련합정부를 론합”이라는 글을 련재하면서 신문의 정치경향성을 보여주었다. 신문은 국내외 시사를 보도해주고 정치리론을 풀이해주기도 하였다.
1946년 1월 23일,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연길에 길동분성위, 길동전원공서, 길동군분구를 두기로 하였다. 하여 “연변민보”는 전원공서의 기관지로 되었다. 연변민보는 연변전원공서의 창립을 경축하여 “호외”를 내놓았고 1946년 4월 24일에는 동북에서의 쏘련붉은군대의 철퇴를 위하여 붉은 색으로 칠한 “붉은군대환송”특집을 내놓았다.
1946년 5월 1일, 길동군구 정치부에서 “연변민보”를 접수하여 “길돈일보”(조선문판)로 개칭, 길동군부구 정치부기관지로 만들고 유명선을 주필로 임명하였다. 이때로부터 신문은 신화통신을 싣기 시작하고 국민당을 질책하는 여론을 일으켰다.
1946년 9월, 중공길림성위기관이 연길로 옮겨옴에 따라 “길동일보”는 성당위의 기관지 “인민일보”와 합병되고 “인민일보”(조선문판)로 개칭되였다. 하여 길림성당위는 조한문기관지를 두게 되었다. “인민일보”(1947년 3월10일 “길림일보”로 개칭됨) 사장은 소림, 부사장은 손평, 주필은 장흔이였으며 부주필로는 석과, 림민호, 김평 등이였다. 림민호와 김평은 부사장을 겸하고 조선문판을 주관하였다.
“인민일보”(조선문판)는 민족성을 많이 띠고 조선반도에 대한 보도비중을 늘였다. 1946년 9월 9일은 “훈민정음”발표 500돐 기념일이였다. 연길에서 개최된 이 기념행사를 길림성민주련맹에서 주최하고 “인민일보”(조선문판)에서 후원하였다. 이 기념행사보도에서 기자는 “정음반포 5세기동안 봉건통치계급의 한글천시와 일제의 잔혹한 문화유린으로 하여 조선사람이면서도 저마다 제 말과 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제말과 글을 찾게 된 이 기쁨 조선 겨레치고 그 누구에겐들 없으랴!”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전선에서 보내온 자료로 “장관구(蔣管區)에서 울고 있는 조선민족동포”란 글을 련재함에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 3월 11일, 길림이 해방되자 성당위기관은 길림으로 옮겨갔다. 하여 연길에는 중공연변지위가 또다시 건립되였다. 연변지위는 4월 1일, 지위기관지 “연변일보”를 창간하기로 하였는데 그 편집원과 인쇄설비 및 인쇄공은 기본적으로 원 성당위기관지 “길림일보”(조선문판)의 설비와 인원들이였다. 중공연변지위 선전부장 최채가 사장을 겸임하고 석과가 부사장을 맡았다. 주필은 “길림일보”때 부주필이였던 림만호가 맡았다. “연변일보”는 공산당의 주장과 정책을 적극 선전하고 해방전쟁정세를 선전하며 연변 각지 인민들의 투쟁정황을 반영함으로써 공산당의 중요한 여론도구로 되었다.
신문사는 군사화하였다. 전방에서 하기공세와 추기공세가 발동되면 신문사도 거기에 발맞추어 립공운동을 벌리면서 신문간행을 다그쳤다. 편집, 기자와 인쇄공들은 “분초를 다투어가며 신문을 내놓는 것이 곧 국민당반동파의 가슴팍에 총칼을 찌르는 것이다”, “일체는 전선의 승리를 위하여!”란 구호를 내걸고 일하였다. 기자들은 이불짐을 메고 수십리길을 도보로 취재하러 다녔고 편집들은 합숙에서 쪽잠을 자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평판기를 돌리다가도 정전만 되면 기계바퀴에 바줄을 매고 인력으로 돌리면서 신문인쇄만은 절대적으로 보장하였다. 중요한 전파를 알리는 신화사전문이 급작스레 들어오면 인쇄에 교부했던 판면일지라도 새로 판을 조절하여 새 기사를 바꾸어넣어야 하였다. 이렇게 매일이다 싶이 신문판면을 뜯어고치며 밤과 낮이 따로없이 신고스레 일해도 낯을 찡그리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당시 연변일보의 발행부수는 8000여부에 달하였다.
1949년 4월 1일,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거쳐 “연변일보”, 북만(할빈)의 “민주일보”, 남만(통화)의 “단결일보”등 세 개의 조선문신문을 합병하여 “동북조선인민보”로 개칭, 연길에서 발간식을 하였다. 신문은 중공연변지위의 기관지였지만 전 동북경내의 조선인을 독자대상으로 삼았다. 사장은 최채였고, 부사장은 리욱성이였다. 할빈에서 온 김동구와 통화에서 온 백남표가 주필, 부주필을 맡았다. 동북조선인민보사에서는 남만과 북만에 주재기자를 파견하고 조선인집거구에 자체의 통신보도망을 두었다. 신문은 자기의 사설에서 종합성, 민족성, 지방성, 대중성을 신문의 특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신문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조선문신문이였다. 3개 신문사일군들이 한곳에 모이니 종업원총수는 177명, 그 가운데는 편집과 기자들이 84명이였다. 신문발행부수는 1만5400부에 달하였다.
그후 “동북조선인민보”는 또 “연변일보”로 개칭되였다.
연변인민방송국 창설
연변의 방송사업은 비교적 일찍 발전하였다. 1937년 4월, 괴뢰만주국은 연길에 방송국을 세웠다. 이 방송국은 1945년 해방될 때 쏘련홍군과 당지인민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비교적 원상태를 보전하고있었다. 1946년 8월 17일,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연길에 옮겨오면서 이 방송국을 회복시키고 성당위에서 직접 령도하였다. 방송국명칭은 “연길신화방송국”이였다. 이 방송국은 “연안신화방송국” 후에 해방구에 비교적 일찍 세워진 방송국의 하나였다. 방송국은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과 배합하여 방송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는데 대내로는 전력을 다하여 전선을 지원하도록 민중들을 동원고무하였고 대외로는 적을 폭로하고 와해시키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8년 3월 10일, 중공길림성위와 성정부가 길림시로 옮겨간후 연길신화방국을 기초로 하여 11일 1일, 연길인민방송국이 세워졌다. 연변지위 선전부 부장 최채가 국장을 겸임하고 얼마후에는 류수림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였다.
연길인민방송국은 중앙방송국 전국중계종목 외의 6시간을 완전히 조선어로 시사종목과 지방종목을 방송하였다. 송신공률은 1킬로와트였는데 모든 록음, 중음, 송신 등 방송설비는 일제가 남기고 간것들이였다. 청취범위는 연길, 룡정, 도문 일대였다.
방송국에는 편집조, 방송조, 기무조 등 세 개의 정식기구가 있는 외에 전문일군 1명이 서무를 맡아보았다. 방송국 전체 종업원은 15~20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연길인민방송국의 조선말방송은 중국에서의 우리 겨레의 유일한 조선말방송이였으며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방송이였다. 연길인민방송국의 사업방침은 “지방성, 민족성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조선민족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여러 계층을 돌보는것”이였다. 그러다가 1951년 4월 연길인민방송국을 “연변인민방송국”으로 고쳤다. 연변인민방송국은 상기의 사업방침의 지도하에 5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뉴스”, “지방소식”, “시사해설”, “음악방송”, “소설련속랑독” 등 방송종목을 이어왔으며 대상성방송종목들로는 “종업원방송”, “청년학생방송”, “부녀방송”, “소년아동방송”같은것이였다. 초창기이지만 방송프로가 비교적 소박하면서도 다양하게 꾸려졌었다. 또한 급변하는 정치정세에 발맞추어 여러차례의 전역성보도를 조직함으로써 방송의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민족인민들에게 계속 줄기차게 혁명하며 끝까지 혁명하여야 한다는 사상의식을 부어넣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나라에서 국내해방전쟁이 계속되던 나날에 나어린 연변인민방송국은 장강남북에서 벌어지고있는 전쟁형세와 중국인민해방군의 승리의 소식을 제때에 널리 보도하여 연변청중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동시에 전선지원소식도 제때에 보도하여 연변청중들의 전선지원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연변인민방송국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장엄하게 선포하는 실황을 실패없이 중계하여 연변청중들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게 하였고 개국축전의 성대한 실황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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