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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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흑백사진(외8수)
2018년 08월 30일 11시 52분  조회:1111  추천:0  작성자: 김철호
흑백사진(외8수)

김철호


 
과거로 가는 길은 색갈을 지우는 일이다
 
분홍립스틱을 지우고
금빛 머리카락 지우면
검은 것과 흰 것만 남는다
50년 전, 100년 전이 탄생한다
 
두 가지 새갈만 있었던 세월
눈 감으면 검고 눈 뜨면 하얗던 세월
밤은 검기만 하고 낮은 하얗기만 하던 세월
흰 것과 검은 것 외엔 다른 색갈이 필요없었던 세월…
 
희고 먼 하늘,
검은 이파리의 떡갈나무,
검은 눈동자엔 흰 눈빛이 반짝인다
흰 미소가 입가에 배달려있고
검은 분노가 가슴에 엉켜있다…
 
그러나 눈 감고 색갈들을 살살 지우면
찬란히 환생하는 흑백의 세계,
거기서 우리의 과거가 웃고 있다
그 어떤 칼라로도 가리울 수 없는 우리의 과거가
검은 파도 흰 파도로 출렁인다
 
 
같은 맛
 
바다의 맛과 눈물의 맛은 같다
그러니 눈물을 흘릴 때 바다가 흐르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아픔이래도
보잘 것 없는 슬픔이래도
바다다
 
눈물의 맛과 바다의 맛은 같다
그러니 바다가 출렁거릴 때 눈물이 출렁거리는 것이다
그것이 큰 파도래도
하늘 같은 통곡이래도
눈물이다
 
 
저고리
 
잔디를 다 덮고
하늘을 다 감싸
뿌리 깊은 나무 숨겨주고도
남는 품
 
욕심 많은 저 작은 가슴에서
뜬 별 얼마일가
새버린 해 달 얼마일가
 
노을 물 묻혀 쓴
천년의 이력서에는 꽃씨의 숨
 
고름줄을 쥐고 주춤거리는 짐승을 밀쳐라
흰 달덩이는 하늘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이 죽음 보고 말한다
 
넌 왜 이렇게 곁에 딱 붙어서서 떠날념 안하는거니? 조금만 한눈 팔면 앞에 나서려 하니 괘씸하구나
 
죽음이 대답한다
 
참 답답하다 우린 쌍둥이로 태여난 친형제란다 네가 딱 막아서서 앞에 나서지 못하지만 암 때건 너를 져쳐버릴 것이다
 
삶이 다시 말한다
 
우리를 쌍둥이로 낳은 하느님이 원통하구나 난 니가 정말 질색이다 싫어 못 살겠다 너를 피하느라 갖은 고생이다만 세월 갈 수록 네 힘에 밀리우는구나
 
죽음이 다시 말한다
 
네가 앞에 있대서 내가 없어지는게 아니구 내가 앞선대서 니가 없어지는게 아니다 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니가 있다
 
삶이 돌아서며 죽음의 어깨를 잡자
죽음도 삶의 어깨를 잡으며 웃는다
 
그래, 우리는 친형제지!
그렇다, 우리는 한몸이다!
 
 
해골
 
눈동자가 없는
빈 눈집
코바루가 없는
빈 코집
 
아ㅡ사람의 입은
아궁이였구나
 
입술로 곁치례만 안했더면
한솥의 밥 단숨에 들어갈
굴 같은 아궁이였구나
 
 

 
나비야, 넌
파란 하늘 작은 뭍
가닿을 수 없는 먼 눈빛
놓쳐버린 예쁜 자리
 
못난이는 자신의 둥지
항상 스스로 빼앗긴다
 
날아가는 나비를
쫓지 말어라
나비는
바람 따라 가는 숨 아니다
 
나무
 
나무는 참으로 먼 곳에서 오래 온 것 같다
한번 쉬기 시작하니 떠날 생각을 안한다
밟아본 기분인 듯 늘 하늘 한 자락 쓰고 있다
아무리 가는 바람이래도 나무에게 들키면
꼼짝 못하고 예쁜 심음(心音)을 보인다
동서남북상하를 향한 푸른 입들은 늘 벌려져 있고
별이며 달이며 구름이며 태양이며 이슬이며를 끝없이 탐식한다
하나의 커다란 날개를 만드느라
서서히 오래오래 머물며 꿈을 익히는 망(网),
자취 없는 나래질 소리를 념(念)하는 깊은 숨을 아무도 모른다
 
푸득! 나무는 오늘도 나래의 힘을 가늠해본다
 
 
뿌리
 
칼퀴손이
땅을 꽉 붙잡고 있다
 
날개 굳은 커다란 새
날기 위해 키워온 힘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날가말가, 날가말가
퍼덕인다
 
오늘도 동이 트는 하늘
빨간 불덩이 향해 윽벼르더니
어둠의 그물에 걸려
어깨 내린 새
 
태공을 날 꿈 잊지 않고
백년을 버티는 억센 갈퀴손
땅에 꽉 박고 떤다
 
 
차(茶)
ㅡ물의 고백
 
당신을 맘껏 피워주기 위해
나 한껏 끓으리
 
당신의 몸에서 노란 향기 우러나
내 속에서 춤 출 때
한 모금 꿈으로 설레리
 
끓어, 팔팔 끓어
내가 통째로 당신으로 꽉 찰제
당신은 온통 나로 넘실거리려니
당신과 나는 드디어 한 몸 되여
하늘에 가 구름과 비의 만남을 보리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숨 속에 들어있는
당신은 차(茶),
나는 물!
 
(2018년 "도라지"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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