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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마키무라 고와 그의《간도빨치산의 노래》
2013년 03월 05일 21시 40분  조회:5286  추천:0  작성자: 망향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우리 문학(2)
 

 
                                                                                                                                                        김정웅(연변대학교 일본어학과)
  1. 들어가면서
 
올해는 중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저명한 프롤레타리아 시인 마키무라 고(槙村 浩, 1912.6.1)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마키무라는 일본의 고치현(高知县) 고치시(高知市) 출신으로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서 활발한 반전운동을 벌림과 동시에 많지는 않지만 주옥 같은 반전시들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1930년대에 중국의 간도(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조선인 간도 빨치산부대를 격조 높이 노래한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 》가 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 》는 마키무라의 대표작으로서 전체가 15연 182행으로 구성된 서정서사시이며 1932년4월 일본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기관지인 《프롤레타리아문학》(림시증간)에 발표된 작품이다.
마키무라는 26세의 짧은 삶을 살았기에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광산당이 령도하였던 간도빨치산을 공개적으로 지지, 성원하면서 일본군국주의 대외침략전쟁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비판한 프롤레타리아작가이다.
중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지 이미 40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최근의 중일관계를 볼 때 한마디로 ‘정냉경열(政冷经热)’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중일국교정상화 40주년이란 뜻 깊은 한 해를 맞이하는 이때에 중일간에는 축복의 무드는 찾아 볼수가 없고 조어도령토분쟁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기에 전쟁이란 비상사태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파쑈의 대동아전쟁을 규탄하고 침략을 받고 있는 나라들에 따뜻한 성원을 보낸 일본의 프롤레타리아시인에 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최근 일본 고치시의 지역신문인 《고치신문》과 일본 프롤레타리아 관련 신문인 《아카하다(赤旗)》에는 마키무라의 《간도빨치산의 노래》와 더불어 일본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연길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올해 9월1~7일에는 고치시의 마카무라를 그리는 협회회원 40여명이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무대로 설정된 연변지역을 답사하고 연변대학의 사생들과 더불어 따뜻한 지역 간의 교류를 하였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중국의 변방지역인 연변과 일본의 고치현이 일본의 한 프롤레타리아 시인이 80년 전에 쓴 시로 하여 한 가닥의 뉴대로 이어지고 있다.
 
  1. 마키무라고의 생애
 
마키무라 고(槙村浩)는 필명으로서 본명은 요시다 도요미치(吉田丰道)이다. 그는 1912년6월1일 일본의 고치현 고치시(高知县高知市)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간호부인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때문에 마키무라의 성장에 있어서 아버지보다도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컸을 것이다.
마키무라의 어머니 우시에(丑惠)의 아버지인 노무라 다바네(野村束稻)는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자유민권운동가였다. 마키무라는 이러한 자유민권운동가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란 어머니로부터 자유민권사상, 즉 자유의 정신을 습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마키무라가 처음으로 소학교에 입학한 곳은 고치시(高知市) 제2소학교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하여 규슈(九州)에 있는 숙부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지만, 거기도 있기가 불편했던지 1920년에 고치시에  돌아와 제6소학교에 들어간다. 제6소학교에서 마키무라는 신동으로 불린다. 그는 두 살 때부터 글을 읽었고 세 살 때는 병원에서 의학잡지를 읽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는 기억력이 비상하여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 뒤 그가 한 일들을 돌이켜보면 천성적으로 비상한 총기와 재능을 가졌던 것 같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그는 당시 일본의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읽었으며 일부 서양의 고전문학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소학교를 다닐 때 쓴 동요, 동화들에서 그런 흔적을 다분히 볼 수 있다.
마카무라는 소학교에서 4년간 공부를 한 다음 두 학년을 뛰어넘어 도사중학교(土佐中学校)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신동인 마키무라의 도사중학교에서의 학습성적은 그다지 우수하지 못하였다. 그는 학교생활을 전폐하고 도서관에만 들어박혀서 중국 당송시기의 시들을 탐독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일기 시작하였다. 마키무라 고의 사상적 변화는 도사중학교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후 마키무라 고는 도사중학교를 그만두고 같은 시에 있는 현립난카이중학교(南海中学校) 3학년에 편입한다. 하지만 이 난카이중학교는 군인양성을 위한 학교였기에 자유민권사상에 물 젖어 있은 마키무라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는 이때부터 철저하게 천황제도를 반대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난카이중학교 정문에는 천황초상이 걸려 있었으며 등교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천황초상화 앞에서 경례를 해야만 교문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키무라는 그것이 싫어서 학교 뒤문으로 살그머니 학교를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천황이리고 부르지 않고 “히로히토”라는 천황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으로 천황에 대한 불경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면서 철저하게 일본의 천황제도에 저항하였다.
당시 일본의 남자중학교에서는 현역군관들이 와서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마키무라는 다른 일부 혁명적인 학생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일본중학교들에서 강행하는 파쑈교육에 대하여 염오를 느끼고 퇴학당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와 그의 재간을 아끼는 선생들의 알선으로 고향을 떠나 오카야마시(岡山市)의 사립간사이(関西)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931년3월 마키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오카야마중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인민혁명투쟁의 물결은 고치현(高知県)에까지 미치게 되였다. 1927년부터 고치현에서는 선후로 일본공상당과 일본공산주의청년회, 노동조합 등의 고치지방위원회가 성립되었으며 1931년에는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동맹, 작가동맹의 고치지방조직까지 나오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마키무라는 글을 쓰거나 번역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엄중한 경제위기에 처한 일본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1931년7월 그는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가입하여 이 동맹의 고치지부 성립준비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는 작가동맹에 가입한 때로부터 자기의 필명을 마키무라 고라고 하였으며 1932년 2월 《대중의 벗(大衆の友)》잡지의 창간호에 마키무라 고라는 이름으로 〈숨 쉬는 총칼—만주주둔군 병사들에게(生ける銃架-満州駐屯軍兵士達へ) 〉란 서정서사시를 발표한다. 이 무렵 마키무라는 문학활동 뿐만 아니라 지하당이 영도하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12월 하순에는 일본공산주의청년동맹의 지도성원의 한 사람으로 되었으며 고치현지방위원회의 선전교육 면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마키무라는 소학교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문학간행물에 정식으로 실린 것은 1932년2월에 쓴 〈숨 쉬는 총칼-만주주둔군 병사들에게〉이다. 이 시는 일제가 이른바 “9.18”사변이라는 명의 하에 중국에 대한 공공연한 침략전쟁을 발동하자 불과 몇 달 사이에 중국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여 싸운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일본군병사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숨 쉬는 총칼”로 될 것이 아니라 총부리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2년 초 원래 고치현에 주둔했던 일본군 보병 제44연대 병사들에게 반전사상을 선전할 목적으로 많은 선전삐라를 찍어 나누어주었다. 한번은 마키무라를 비롯한   공청고치지구위원회 성원들이 경계가 삼엄한 고치시 아사쿠라(朝倉) 보병 44연대 숙사내에 들어가 상해출병을 반대하는 “병사들이여 적이 누군가를 똑바로 보라!( 兵士よ敵をまちがえるな)”라는 선전삐라를 뿌렸다고 하는데 이로 하여 그들은 상급 당조직의 표창을 받았다. 이 삐라는 마키무라가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이런 노력으로 하여 보병 제44연대의 일부 일본병사들은 상해전선에서 중국의 제19로군 애국전사들과 싸울 것을 거절하였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키무라는 즉시 〈출정(出征) 〉, 〈1932.2.26—백색테러에  넘어진 44연대 혁명적 병사들에게〉 라는 두 수의 시를 써서 중국과 싸울 것을 거절한 일부 일본병사들의 반항투쟁을 찬양하였다. 1932년3월13일 마키무라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열화처럼 타오르는 항일유격전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찬양하는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지었다. 이 시에는 마키무라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특징의 하나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사상이 충분히 표현되었으며 또 그는 이 시로 하여 일본의 우수한 혁명적 시인이라는 영예를 지니게 되었다.
1932년4월초 마키무라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마키무라는 당에 가입한 후에도 여전히 공청조직과 작가동맹에서 일하였다. 1932년4월21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문화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본군경들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이른바 제3차 총검거를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고치현의 당원, 공청원, 협동조합 성원, 프로문화동맹 성원들 대부분이 이날 저녁에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었다. 마키무라도 그 이튿날 새벽 고치시 자택에서 체포되어 다카오카쵸(高丘町)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게 되었다. 마키무라는 일본군경의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혁명가로서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함께 체포된 적지 않은 “동지”들은 일본군경의 고문에 못이겨 이른바 사상전향성명에 서명하였지만 마키무라를 비롯한 몇몇 진정한 공산당원들은 죽을지언정 자기의 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거듭 언명하였다. 혹독한 고문으로 하여 한때는 식사도 입으로 하지 못하였으며 후에는 정신분열증까지 걸렸다. 그러나 그의 혁명정신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1933년4월28일 마키무라는  비법적인 좌익문화조직의 책임자이며 글로 “일본제국을 모독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3년 유기도형을 받게 된다.
마키무라는 옥중에서도 시 창작에 정진하였다. 사상전향성명을 접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여 그에게만은 종이나 연필 같은 것을 일체 주지 않았다. 그는 머리 속에 시를 구상한 뒤 그것을 몇 번이고 읽어 외우군 하였다. 그리하여 1935년6월 출옥한 뒤에 그것을 다시 종이에 올려 세상에 내놓았다. 옥중에서 쓴 시에는 헌시(獻詩) 〈청춘(青春) 〉, 따따르해협 이남인 북해도감옥에 갇히운 동지를 그리면서 쓴 시 〈따따르해협(ダッタン海峡) 〉, 옥중에서 국외 노동계급의 혁명활동을 성원한 시 〈옥중에서 독일동지를 생각하여 부는 노래(獄内にてドイツの同志を思う歌) 〉,〈중국의 시인들에게(異郷なる中国の詩人たちに)〉, 〈옥중에서 꼼뮨전사들을 생각하노라(獄中のコンミューンの戦士の詩を憶つて)〉 등이다. 제목 자체가 분명히 보여주듯이 옥중에서 쓴 그의 시들은 모두 프롤레탈리아 국제주의, 동지애, 적의 그 어떤 강압적인 수단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절개를 지키려는 그의 굳센 형명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옥중에서 소위 정치범들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감방마다에 배치해놓은 불교경전과 유교경전들을 모조리 읽었다고 한다. 출옥 후 그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아세아적생산에 기초한 정치, 경제, 문화비판》이라는 저작 한 권을 써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불교경전과 중국고전의 인용문들은 모두 감옥 안에서 기억한 것을 그대로 쓴 것이라고 한다.
1935년6월 감옥에서 나온 마키무라는 주로 집에서 요양하면서 주로 시를 쓰거나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 당시 고치현에서는 진압당한 혁명조직을 재건하는 사업이 맹렬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또 새로운 인민전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은 때였다. 그러나 동지들은 마카무라의 건강을 고려하여 위험한 지하활동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1936년12월5일 마키무라는 “인민전선사건” 때문에 검거되어 또 다시 투옥되지만, 이듬해 1월16일 중병으로 하여 석방되어 고치시내에 있는 도사뇌병원(土佐脳病院)에 입원한다. 하지만 마키무라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938년9월3일 일본의 불요불굴의 혁명가이며 시인이었던 미키무라고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도사뇌병원에서 자기의 전투적인 일생을 끝마쳤다.
 
  1. 마키무라 고우의 반전시 산생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콘텍스트
 
일본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이란 1920~30년대에 관동대지진과 경제공황 등 사회적 불안을 배경으로 나타나 사회혁명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던 일련의 문학운동을 말한다.
1923년9월1일 일본시간으로 11시58분에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가미(相模)만의 서북쪽에서 80㎞ 떨어진 해역을 진원으로 하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매그니튜드(magnitude) 7.9인 이 대지진은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치바현(千葉県)・이바라기현(茨城県)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즈오카현(静岡県)에 이르는 내륙과 연안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는 일본의 자연재해역사상 최대급의 피해였다. 이 대지진으로 하여 19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10만5천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0만9천 세대의 가옥이 파손되고 21만2000세대의 가옥이 불에 탔다. 특히 일본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동경의 피해는 더욱 막심했다.
동경시내의 건축물 피해 상황을 본다면, 동경의 아사쿠사(浅草)에 있는 12층짜리 탑인 능운각(凌雲鶴)이 무너지고 건설 중에 있던 마루노우치(丸の内)의 내외빌딩이 붕괴되어 노동자 300여명이 깔려 죽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또 대장성, 문부성,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 관공청사의 건물과 제국극장, 미츠코시니혼바시본점(三越日本橋本店) 등 많은 문화와 상업시설들이 불에 탔다. 그 외에도 동경제국대학 도서관과 마츠네야분코(松廼舎文庫)와 같은 장서시설이 소각되어 많은 귀중한 서적들이 소실되었다.
자연재해로 인한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의 불안정 속에서 이러한 사회적 불안정 요소들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재일조선인들에게 없는 죄명을 들씌워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화들을 다른데 전가시킬 필요가 생겨났다. 따라 일본사회에서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재일조선인들이 “폭도”로 되여 “우물에 독약을 넣고 또 불을 지르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유언비어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매스컴도 여기에 동참하여 9월2일부터 9월6일에 이르는 사이에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 《하북신문(河北新聞) 》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도하였다. 오오사카신문에서는 9월3일 조간(朝刊)에서 “어떤 빈민들이 흉기를 들고 폭행, 요코하마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는 정보가 있음」 라는 타이틀로 “요코하마 지역에서 이런 기회를 엿보는 불순한 조선인들에 대하여 경계를 높여야 한다는 엄중한 정보가 왔다”고 보도하였으며 3일(날자는 4일로 되어 있음) 석간(夕刊)에서는 “각지에서 경계를 하라고 경보국에서 각 곳에 무전을 치다” 라는 타이틀로 “믿을 수 없는 조선인 무리들이 아무 곳에서나 봉기를 일으킬 조짐이 있음…」라는 경보국에 의한 전보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또 3일 호외(號外)신문에서는 동경 아사히신문사의 직원 고후(甲府)의 특전으로 “조선인 폭도들이 요코하마와 가나가와를 지나 하치오지를 향하면서 불을 질러대는 것을 보았다”는 기자의 목격정보를 기재하였다.
일본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와 매스컴의 근거 없는 보도로 하여 많은 일본사람들이 조선인들에게 적대감과 분노를 가지고 길거리에서 조선인을 보는 족족 때려죽이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반인류적인 만행이 자행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어 단어의 어두에 있는 탁음이 잘 발음되지 않는 점을 이용하여 길가는 행인에게 “쥬고엔고쥿센(十五円五十銭)”이거나 “가기구게고(ガギグゲゴ)”와 같은 것을 발음시켜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판정하고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조선인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기 위하여 일본국가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 무고하게 살해된 조선인에 대한 인수는 복수의 기록과 보고서가 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 의론이 다르다. 당시 정부의 조사로서는 233명으로 되어 있고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조사에 의하면 2613명으로 되어 있으며 최고로는 사망자가 6661명이 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하여 곤경에 빠진 상태에 관동대지진까지 겹쳐 일본사회는 더욱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기업이 파괴됨으로 하여 실업자가 급증하고 더욱이 지진에 의한 피해로 하여 결재곤난(決裁困難)에 빠지는 약속어음이 막대한 액수로 불러났다. 이러한 금융상태의 불온한 현상은 쇼와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을 일으키게 된다.
1920년대로부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사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전례 없이 전파되었으며 여러 분야에 걸쳐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당시 아시아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운동의 활발한 전개는 다음과 같은 국내외의 사회적 배경과 갈라놓을 수 없다. 우선 국외적으로는 1917년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여 지구상에 첫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다음으로 1929년 아메리카의 월가(Wall Street)로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하고 일본도 이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 국내에는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쌀값 폭등과 같은 물가상승과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보통선거와 사회보장 등의 실시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요구 때문에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20년대는 일본 당국의 사상적 통제가 완화되던 이른바 “다이쇼데모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시대였기에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였다.
1921년7월 중국 상해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주도하에 진독수, 이대소,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을 창건했고 그 이듬해 7월에는 일본공산당이 창건되었다. 1925년에는 일제통치하의 서울에서 조선공상당이 결성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공산주의 사상이 고조되고 공산단체의 결성과 함께 일본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성행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이란 1920년대로부터 193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유행한 문학으로서 개인주의적 문학을 부정하고 사회주의사상과 공산주의사상과 연관된 문학이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선두적인 존재는 191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다이쇼(大正)인데 이 운동 중에서 노동현장체험을 가진 일군의 작가들이 출현한다. 그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는 미야지마 모토오(宮島資夫)의 《갱부(坑夫) 》와 미야지 가로쿠(宮地嘉六)의 《방랑자 도미조(放浪者富蔵) 》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계층의 사람들도 노동자들의 상황을 문학에서 표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마키 오우미(小牧近江)와 가네코 히로후미(金子洋文) 등은 잡지 《씨 뿌리는 사람(種蒔く人)》을 발간하여 사회에 대한 개혁과 연관된 문학을 시도한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전주곡 속에서 1924년에 잡지 《문예전선》이 창간된다. 이것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중심적인 잡지로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일파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일파 간의 갈등과 대립이 정치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문학진영 내에서도 발생하여 1927년에는 로농예술가련맹,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日本プロレタリア芸術連盟), 전위예술가동맹(前衛芸術家同盟)이란 세 단체로 분립하는 상태에 이른다.
1928년 구라하라(蔵原)는 이러한 사태를 타개하려고 기존의 조직을 그대로 두는 상태에서 연합체의 결성을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에 노농예술가연맹이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3월13일에 일본좌익문예가총연합(日本左翼文芸家総連合)이 결성된다. 1928년3월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과 전위예술가동맹은 조직적으로 통합되어 새로운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ippona Artista Proleta Federacio, NAPF,약칭 낫프)을 결성하고 《전기(戦旗) 》를 기관지로 한다. 낫프의 권위 있는 신진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는 《1928년3월15일(一九二八年三月十五日) 》과 《게 잡이 공선(蟹工船) 》라는 중편소설을 연이어 발표하고 도쿠나가 스나오(徳永直)는 장편소설 『태양이 없는 거리(太陽のない街)』를 연재함으로써 《전기(戦旗) 》를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적인 잡지로 만든다.
1931년11월 소련의 영향하에 문학조직을 대중화하려고 하는 구라하라(蔵原) 등의 노력으로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Federacio de Proletaj Kultur Organizoj Japanaj, KOPF, 약칭 곳프)이 결성된다.
일본식민치하의 조선반도에 있어서 일본은 서양의 근대적인 문명을 수용하는 통로였고 중국과 만주는 일본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을 하는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한합병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고 이러한 유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에 동참하였다. 특히 김증생은 일본 프로문학의 개막을 알리는 잡지인 《씨 뿌리는 사람》의 창간호부터 시작하여 〈무산자와 유산자〉(1921년2월), 〈제3인터네셔날에의 투쟁〉(1921년4월) 등 평론을 투고하여 재일조선인으로서는 일본의 프로문학 잡지에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이다. 그 후 정연규도 일본프로문학에 등장하여 생활고와 사회현실에 번민하는 젊은이의 갈등을 그린 일본어 장편소설 《정처없는 하늘가(さそらいの空) 》(1923년2월)와 《생의 번민(生の悶) 》(1923년6월) 등을 발표하여 조선의 소설가로 인정을 받고 일본의 프로작가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 후에도 많은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의 프로문학과 인연을 맺고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1925년에는 조선에서 공산당이 결성되자 일월회와 재동경조선노동회 등의 단체가 설립되고 일본 사상단체와 연대하는 사회주의 운동이 성행하게 되였다.
1930년대 초기에 들어서 일본의 파시즘의 대두와 더불어 치안유지법과 특별고등경찰에 의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시작된다. 1932년에 노농예술가연맹이 해산을 하고 이어서 1934년2월에는 곳프에 속한 프로문학조직이었던 일본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낫프)이 해산을 표명한다. 그리고 1933년2월20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의 핵심 성원인 고바야시 다키지가 경찰서에서 옥사를 하고 공산당원들이 연이어 전향을 하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문학도 서서히 쇠퇴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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