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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도 빨찌산의 노래 댓글:  조회:2071  추천:0  2013-03-20
         간도 빨찌산의 노래                                              [일본] 마끼무라 고(槙村 浩)   추억은 나를 고향으로 이끄노라 백두의 령을 넘어 이깔나무 숲을 지나 갈대뿌리 시꺼멓게 얼어붙은 소택지를 지나 저 멀리로 불그스름한 땅우에 거뭇거뭇한 오두막들이 이어지는 곳 고려꿩이 골짜기들에서 우는 함경의 마을이여   눈 녹은 오솔길을 따라서 지게를 지고 가랑잎 모으러 누나와 올랐던 뒷동산의 참나무 숲이여 산지기에게 쫓겨 돌들이 울퉁불퉁한 비탈길 내리닫는 둘의 어깨엔 짐바가 조여들어  얼마나 아팠던가 갈라터진 둘의 발뒤축에 슴배인 피는 찬 바람에 얼어붙는구나.   구름이 남쪽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열풍이 논뚝으로 흐르는데 산에서 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려 가는 마을 사람들속에 아버지가 멘 가래를 바라보면서 현기증 이는 허기진 배를 달래며 누나와 손잡고 넘어 갔던 그 아득한 고개길이여.   실버들가지가 휘늘어진 서당 뒤에 결핵병을 앓으면서 서울서 돌아온 젊은이의 이야기에 우리들 소년들에게 얼마나 즐거웠던지 젊은이는 열기를 띠자마자 금세 심한 기침을 하면서 암흑한 짜리 로씨야의 이야기를 들려줬어라. 크레물리궁에 피여오르는 폭탄연기와 안개 서린 네바강에 흐르는 피와 눈길 밟으며 씨비리로 정배가는 수인들의 무리와 그리고 시월의 새벽에 터져나온 노도와 같은 민중의 웨침소리에 짜리의 검은 독수리 산산이 부서지고 모스크바 하늘 높이 낫과 망치가 새겨진 붉은 깃발 날리던 그 날을 이야기했더라. 때론 말을 멈추고 기침을 깇는 그의 볼은 삽시에 붉어지고 각혈이 저고리의 소매를 새빨갛게 물들였던 최선생이라 부르는 그 젊은이는 그 우렁찬 함성이 조선을 진감하던 봄날도 보지 못한채 잿빛 하늘에 희망만 던지고 고향의 서당에서 숨졌어라. 하지만 자유의 나라 로씨야의 이야기는 얼마나 큰 동경과 함께, 내 가슴속에 스며들었던가 나는 북녘하늘가에 울린 장엄한 건설의 수레바퀴 소리에 고국 잃은 숨막힌 나의 식민지에서의 삶을 그려봤노라.   오, 짓밟혀 만신창이 된 민족의 자존심과, 침묵속에 끝없는 고뇌를 품은 고국땅이여! 그대의 땅을 두고 기아에 시달리는 그대의 아들딸들 쓰라린 굴욕과 울분을 삼킬 때- 그대의 따스한 품속을 잃고 떠나야만 했던 아들딸들 머리를 떨구고  묵묵히 국경선 넘을 때- 너의 땅 밑바닥에서 2천만의 민중을 뒤흔들 분노의 용암을 생각하라!   오오, 3월1일! 민족의 끓는 피 가슴에서 솟구치는 우리들중의 어느 누구인들 무한한 증오를 한 순간에 내동댕이친 우리들중의 어느 누구인들 1919년3월1일을 잊을 수 있으랴! 그 날 “대한독립만세!”소리 전 국토를 뒤흔들었고 짓밟혀진 일장기 대신 모국의 깃발은 집집의 대문가마다 나붓겼어라.   정녕, 가슴에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로 우린 그날을 떠올리노라. 반항의 우렁찬 함성은 고향의 마을에까지 전해졌고 자유의 노래는 함경의 봉우리 봉우리에 메아리쳤노라. 아아! 령마다 골짜기 마다 넘쳐났던 학대 받은 자들의 무수한 행렬이여! 앞장서 기발 들고 나아가는 젊은이들, 가슴 뻗치고 마음껏 만세 부르는 늙은이를, 눈물속에 옛 노래가락을 뽑아내는  녀성들을, 풀뿌리 씹으며 목청 다해 환호성 올리는 소년들을, 붉은 흙 무너지는 언덕우에서 목이 쉬도록 웨치는 부모형제들의 눈물을 보면서 나도 몰래 흘렸던 그 눈물을, 내 어이 잊을소냐!   오오, 우리들의 자유의 기쁨은 너무나도 짧았어라! 나는 보았노라, 저녘 무렵 나는 지평선 너머로 뽀얀 먼지속에 덮쳐드는 검은 무리를, 악마처럼 불을 던져 마을마다 불사르며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일본기병대를! 그러나 부락마다 집집을 불태워도 언덕마다에서 들리는 자지러진 총소리도, 우리는 두렵지 않았어라! 우리는 함경의 아들딸 착취자에 대한 반항의 력사를 쓰던 이 고향의 이름을 걸고 온 나라에 봉화를 지핀 몇 번의 봉기에 피를 적신 이 고향 땅을 내 걸고 진지를 고스란히 원쑤앞에 넘길소냐!   기발 내던지고 땅에 엎드린자 그 누구냐? 목숨 아껴 원쑤의 발톱아래 고향을 내던진 자 어느 놈이냐? 좋다, 세찬 불길 우리를 휩싸도 좋다, 총검 들고 야수같이 기마대 덮쳐도 떳떳이 머리 쳐든 우리 떳떳이 가슴으로 내밀고 나서서 노도 같은 기세로 령을 뒤흔드는 만세를 부르자! 진지 지켜선 우리의 함성이 울려퍼지는 곳에, “폭압의 검은 구름 햇빛 가리운” 조선의 심장 속에 우리의 고국은 살아 우리 겨레의 핏방울 높뛰거니 우리는 함경의 아들딸!   아, 피의 3월!-그 날을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누님에게 나는 영영 헤여졌어라. 포탄에 흩어진 모래알 속에 헤여진 세 사람의 그림자 하얀 옷을 피로 물들이고 들녘에 쓰러진 마을사람들 속으로 홍송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 사이로 총검과 기병대를 피해가면서 밤낮없이 찾아다녔노라.   서러운 고국이여! 차마 못보겠더라, 악취 풍기는 그대의 땅은! 총검으로 벌집 쑤시듯이 하여 산채로 불에 던져지는 남정네들! 강간끝에 ××도려내고 간 빼운 녀성들! 작은 손에 고국기발 쥔채 쓰러진 아이들! 오, 1만5천의 동지들은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우다 쓰러졌노라. 무덤에도 못 묻히고 관도 없이 갈가마귀들에게 뜯긴 시체 우에, 페허로 된 마을 우에, 망망한 잣나무 밀림 속에 몸 숨긴 화전민의 머리 우에, 북조선 광야의 무성한 들풀의 향기를 가득 싣고 불어라! 봄바람이여!  캄캄한 밤 깨우며 산에는 불길이 훨훨 솟는데 화전민들의 두레마을 상공에서 새들이 어지러이 날은다. 아침이다 나는 동트는 새벽에 원무를 추는듯  북녘의 창공에서 날아예는 두루미를 보았노라. 덩굴나무 숲을 헤가르고 울창한 림해를 넘어 무성한 숲을 날아 국경에로- 불처럼 붉은 구름을 헤치면서 곧추 날아가는 것을! 고국에 돌아가는 그 흰 대렬 속에 우리 열두 소년의 가슴도 높뛰였어라. 열이 올라 각혈하면서 최선생이 들려주었던 자유의 나라에로- 봄바람에 나래 퍼덕이며, 환호성 멀리멀리 울리며, 이제야 즐거이 나그네길에 오른 두루미떼! 나는 뜨거운 눈시울 비비며 손 저어 두루미에게 화답하였노라, 그 13년전의 감격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이 그려보며.   이른 봄 성에장 흘러 내리는 두만강 건너 국경을 넘어선지 어언 열세해 고난으로 가득찬 투쟁과 시련의 고비고비를 넘으면서 나는 장백의 광야에서 보냈노라. 운명은 나를 로씨야로부터 머나먼 엄혹한 간도땅에 몸을 두게 했거니 그러나 로씨야를 다는 몰라도 나는 살아생전에 그 땅에 가보지 못한 것 후회하지 않노라, 지금 내가 사는 고장이 바로 제2의 로씨야, 민족의 장벽을 허문 쏘베트가 아니냐! 들으라! 손에 총 들고, 깊은 밤 얼음판 건느며 해란의 여울물소리를, 함성소리 밀림에 메아리치는 왕청의 나무 그루마다에 깃든 피어린 고난과 건설의 이야기를!   바람이여, 분노 안고 백두의 눈사태 타고 불어오라! 물결이여, 격분의 물보라 두만강에 일게 하라! 오, 일장기 펄럭이는 강도놈들아! 부모와 누나와 동지들의 피 스민 땅, 고국 땅에서 나를 몰아내고 지금 또 칼 차고 간도에 기어드는 왜놈병사들아! 오, 네놈들 앞에 또 우리가 굴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껄이느냐? 뻔뻔스런 강도들을 대접할 줄 모를 우리들인 줄을 모른단 말이냐?   봄은 소리치면서 여울가에 흐르고 바람 따라 싸리나무 향기 짙게 풍기는데 이슬 젖은 잔디 우에 둘러 앉아 우리는 방금 전해온 희한한 삐라를 읽노라. 그것은 국경 너머 해방 위해 싸우는 동지들의 목소리, 그것은 총 겨누고 태연히 계급의 붉은기 높이 든 프로레타리아의 웨침소리, “재만일본혁명병사위원회”의 격문!   삐라를 주머니에 넣고 우리들은 또다시 총 잡고 몰래 걸어가노라. 눈석이 흘러내리는 계곡의 여울소리 우리의 진군을 축복하고 정든 수림은 반가이 우릴 맞아 주리니! 놈들아! 흔들리는 정권의 그늘밑에서 환성을 올릴 테면 올려보라 너덜거리는 신문의 호외소식으로 거짓 승전보 알릴테면 알려보라 우리는 불사조이다! 우리들은 몇 번인가 실패를 했고 총검과 말발굽은 우리들을 짓밟기도 했어라. 하지만 밀림에 숨은 열사람 백사람이 되여 일떠섰노라! 10리 물러선 우리들은 이번엔 20리를 전진했노라! “살아있는 한 해방 위해 몸바쳐 붉은기 아래에서 기꺼이 죽으리라!” “동방혁명군” 군기에 볼 비비며 한 그 맹세 내 어이 잊을소냐. 우린 간도빨찌산, 목숨바쳐 쏘베트 지키는 무쇠팔뚝, 생사를 붉은기와 함께하는 결사대! 오늘도 장백의 령을 넘고넘어 혁명의 진군가 온 누리에 울리거니 -바다도 우리 전진 막지 못하리, -자, 싸우자! 떨쳐 일어나자! -아, 인터나쑈날은 우리들의 것이여라!...   1932년3월13일 일본 《프로레타리아문학》림시증간
3    일본의 마키무라고에 비추어본 우리의 “저항시” 댓글:  조회:2841  추천:0  2013-03-05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우리 문학(3)   김정웅(연변대학교 일본어학과)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내용 및 간도에서의 전파와 수용     1932년3월13일 마키무라가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프롤레타리아문학》 임시증간호에 발표할 무렵 그의 나이는 겨우 19살이었다. 이 시는 전체가 15연 182행으로 구성된 서정서사시이다. 시의 내용에 따라 이 시를 크게 4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시의 첫 부분은 1연에서 3연까지 도합 19행이다. 이 부분은 시의 공간적 배경과 시적 화자의 가족에 대한 추억의 묘사로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4연에서 6연까지의40행이다. 이 부분은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적 축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혁명과 조선의 “3・1”만세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7연에서 11에 이르는 71행이다. 이 부분은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있으며 또 일제의 이런 만행에 굴하지 말고 떨쳐 일어나 항쟁해야 함을 쓰고 있다. 시의 네 번째 부분은 12연에서 15연까지의 52행이다. 이 부분에서는 간도빨치산이 항일을 하면서 실패와 좌절도 있었지만 불사조마냥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일제를 타도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적인 공조를 희망하는 내용도 쓰고 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 첫 시작은 빨치산 대원인 서정시의 주인공이 고향-함경도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추억은 나를 고향으로 이끄노라 백두의 령을 넘어 이깔나무 숲을 지나 갈대뿌리 시꺼멓게 얼어붙은 소택지를 지나 저 멀리로 불그스름한 땅우에 거뭇거뭇한 오두막들이 이어지는 곳 고려꿩이 골짜기들에서 우는 함경의 마을이여   눈 녹은 오솔길을 따라서 지게를 지고 가랑잎 모으러 누나와 올랐던 뒷동산의 참나무 숲이여 산지기에게 쫓겨 돌들이 울퉁불퉁한 비탈길 내리닫는 둘의 어깨엔 짐바가 조여들어  얼마나 아팠던가 갈라터진 둘의 발뒤축에 슴배인 피는 찬 바람에 얼어붙는구나.   (思い出はおれを故郷へ運ぶ 白頭の嶺を越え、落葉(から)松の林を越え 蘆の根の黒く凍る沼のかなた 赭ちゃけた地肌に黝(くろ)ずんだ小舎の続くところ 高麗雉子が谷に啼く咸鏡の村よ 雪溶けの小径を踏んで チゲを負ひ、枯葉を集めに 姉と登った裏山の楢林よ 山番に追はれて石ころ道を駆け下りるふたりの肩に 背負(しょい)縄はいかにきびしく食い入ったか ひゞわれたふたりの足に 吹く風はいかに血ごりを凍らせたか)   우의 시문을 보면 마키무라가 함경도에 어떤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어떤 대표적인 동물들이 있는가 그리고 기후 등에 대해서도 아주 깊은 료해를 하고 이 시를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키무라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인 고치시는 일본의 시코쿠도(四国島) 동해안의 태평양에 면하여 있는 해변도시로서 연평균기온이 17℃이며 제일 추운 1월의 최저기온일지라도 영하까지는 내려가지 않는 곳이다. 중국의 동북의 열악한 겨울을 경험하지 못한 19살 일본청년이 어떻게 마치 눈으로 보는 듯이 조선의 함경도와 중국 동북의 상황을 그렸을까? 그리고 간도빨치산에 대한 정보는 어떤 도경으로 입수했을가, 이는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하나의 의혹으로 남을 것이다.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항일의 봉화가 훨훨 타오르던 1932년에 정의감 있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시인에 의하여 씌어진 서정서사시이다. 9.18사변 이후 열화처럼 일어나는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는바 그들의 어용신문들은 날마다 항일빨치산을 모독하는 각종 신문보도를 냈다. 이를테면 1930일6월2일 고치에서 출판되는 《도요신문(土陽新聞) 》은 “간도 불법 조선인 봉기, 학교를 불태우고 전선을 절단, 폭탄을 각 곳에 던져 방화, 그들의 전시 초토화계획 폭로” 등의 제목으로 간도지역에서 일어난 인민들의 항일무장투쟁상황을 왜곡하는 소식들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처럼 간도지역의 빨치산들을 “강도”,”살인범”이라 모독하고 있지만, 마키무라를 비롯한 일본의 진보적 청년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이런 왜곡된 보도를 통하여 간도빨치산의 영웅적 투쟁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932년1월 일본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한 열혈청년 마키무라는 간도빨치산투쟁의 진실한 상황을 일본독자들에게 알려주며 또 간도빨치산들에게 보내는 자기의 경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쓰기로 작정하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제일 큰 특성은 문학의 사회성과 사실주의 성격에 있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는 언제나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작품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대표작인 〈게잡이 공선(蟹工船) 〉은 치치부마루(秩父丸)조난사건과 하쿠아이마루(博愛丸)학대사건 같은 실제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하여 3년간이나 북빙양어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프로문학계에는 “북쪽에는 고바야시 다키지가 있고 남쪽에는 마키무라 고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마키무라 역시 “9・18”사변 이후 일본의 파시즘의 대두가 제일 큰 사회 및 국제적 문제로 되고 있을 때 〈살아있는 총칼〉과 〈간도빨치산의 노래〉 라는 반전시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작품화하였다. 마키무라는 이 시를 쓰기 위하여서는 우선 간도빨치산투쟁의 진실한 정황과 그곳의 지리환경들을 료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같이 부근 도서관에 다니면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였으며 당시 고치에 체류 중인 조선인 유학생과 조선인 로동자들을 방문하여 조선사람들의 생활습관들을 료해하였다고 한다.   마키무라의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1932년2월 《대중의 벗(大衆の友) 》의 창간호에 발표된 〈살아있는 총갈〉에 이어서 동년 4월 《프롤레타리아문학》 임시증간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간도빨치산의 노래〉가 발표된  그 달의 4월21일 마키무라는 고치시에서 검거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파시즘의 확대와 더불어 일본의 대외침략전쟁을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간도빨치산의 노래〉에 대한 출판금지령이 내려져 이 시가 “일자일구(一字一句)”까지 전면적으로 금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번 검거에서 마키무라는 실형판결을 받고 투옥되어 3년 후인 1935년6월6일에 고치형무소를 출옥하게 된다. 출옥 후 마키무라는 자신의 시집을 내기 위하여 원고를 가지고 1935년12월에 동경으로 간다. 그는 동경에서 《문학안내(文学案内) 》를 경영하고 있는 다카시 산지(貴司山治)를 찾아가 출판을 부탁하지만,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작가동맹도 해체되고 전향이 유행되며 모든 것이 파시즘에 의하여 탄압되는 상황 속에서 반전과 혁명을 소리높이 찬양하는 프로문학가의 시집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일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세월이 되어버린 때였다. 하지만 다카시는 마키무라의 시집원고를 받아서 단지에 넣은 다음 자택의 뜰 안에 깊숙이 감추어두고 출판될 수 있을 그날을 기다렸다.   마키무라의 시를 일본에서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1945년8월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여서부터 얼마간 지나서부터였다. 전시하 천황제국가권력에 의하여 압제되어 있던 문화와 문학에 자유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조류 속에서 발행금지되었던 작품을 끝내 공공연히 읽을 수 있게 되였다. 이 무렵 많은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1946년8월20일 고치에서 소책자 《본모습(素貌) 》이 창간되는데 여기에 마키무라의 〈간도빨치산의 노래〉가 재록된다. 모리 다케오(毛利孟夫)가 소지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문학》(1932년4월 림시증간호 )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1964년10월 다카시 산지(貴司山治)의 피타는 노력과 신일본출판사(新日本出版社)에 의하여 발행된 시집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마키무라가 자신의 시집 발행계획을 세워서부터 30년 가까이 지나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시집이었다. 그 후 마키무라의 시집은 타이틀을 바꾸어가며 여러 출판사에 의하여 다수 출판된다.   프롤레타리아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혁명적 고양을 촉진시킬 수 있는 문학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이해시킬 것인가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간도빨치산의 노래》가 전쟁 당시 간도땅에 전해졌는가의 여부는 당시 목숨을 내걸고 이 시를 썼고 또 지금은 저 하늘나라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을 마키쿠라에게도 자못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마키무라가 쓴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연변지역에 있어서의 발자취를 끈질기게 쫓고 있는 사람으로 한국 서울에 있는 도다 이쿠코(戸田郁子)라는 일본인 여성작가를 들 수 있다. 그는 연변에서 5년간 체류한 경험도 있으며 연변에서의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다(中国朝鮮族を生きる) 》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 속에 “고치에서 간도를 노래한 시인(高知から間島を詠った詩人)”이란 타이틀로 전시《간도빨치산의 노래》가 간도지역에 전하여졌다는 내용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연변대학교 력사학부에서 오래 교수로 임직했던박창욱(1927~2011)교수는 소학시절 력사선생이 수업시간에 마키무라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조선어로  읊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박창욱선생이 소학교 4학년 첫 학기 때의 수업시간이었다고 한다. 박선생의 나이로 추정해 볼 때 아마 1938년 좌우일 것이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 마키무라가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발표한 것이 1932년4월에 발간된 《프롤레타리아문학》 전시증간호이다. 그리고 이 잡지는 발표되자마자 발매금지처분을 받았다. 이런 시가 어떻게 간도 시골의 조선인소학교에서 읽혀졌을까?! 그때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읊어준 선생은 이선생이란 역사교원으로서 일본유학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소학교는 연길현 조양천에 있는 교동소학교(4년제)이다. 이 소학교는 조선총독부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교장은 일본인이고 수업은 조선어로 하였다고 한다.   1938년이나 1939년에 간도의 시골소학교에서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번역문이 읽혀지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일본어 원문이 간도에 전하여진 것은 그보다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할 하의 소학교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일본정부에 의하여 발매금지를 당한 반전시를 낭송하여 준 이선생은 애국애족적인 사람일 것이다. 당시 이선생이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학생들 앞에서 읊은 다음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민을 나누어 생각합시다”, “일본에도 이 전쟁을 반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이선생의 이러한 가르침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각인되어 있다고 박창욱교수는 술회한 적있다.   조선족의 력사대가로서 알려져 있는 박창욱교수라고 하지만 소학교 4학년생인 당시에는 “빨치산”이라든가 “유격대”라든가 하는 것은 처음 듣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를 읽어준 이 선생으로부터 “우리의 곁에는 독립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고 한다. 이 선생은 정확히 4개월 정도 그 학교에 있었고 그 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목숨을 내걸고 쓴 일본프로문학가의 반전시 《간도빨치산의 노래》가 전쟁 당시 간도에 전해져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는 간도 조선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를 통하여 선량한 일본인과 침략을 일삼는 일본제국주의를 구분하여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30년대에 나온 일본무산계급시가문학으로서는 상당한 예술수준에 도달한 작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서술한 서사적 성분이 있는가 하면 시인자신의 혁명격정을 토로하는 서정이 있으며 고향산천과 백두산밀림에 대한 절절한 서경묘사가 있는가 하면 일본침략자의 야수적 만행에 대한 분노의 성토도 있다. 시인 마키무라 고는 비록 이 시를 중국 “간도”땅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 고치에서 쓰고 있지만 조선북부 함경지방과 연변산천에 대산 서경묘사는 마치 그가 이곳에 와 실제 생활체험을 겪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하다.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50여년 전에 불과 20세밖에 되지 않는 한 일본의 진보적인 청년에 의해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의 선렬들이 민족의 존엄과 생존을 위하여 싸운 빛나는 과거를 다시금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주고 있다.     보다시피 정판룡 선생은 마키무라 고의 《간도빨치산의 노래》에 대하여 절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문학 작품으로서의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으며 식민지인들의 반일운동에 대한 열정적인 성원의 마음이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서의 시인의 혁명적 사상으로 충만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사회성만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예술성도 뛰어나다. 하기에 마키무라 의 26년이란 짧은 생애에 남긴 26편의 시 가운데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그의 대표작으로 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특히는 1985년 정판룡선생이 〈마키무라 고와 그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라는 문학평론을 발표 후, 중국과 주변의 환경은 크게 변한다. 1991년에는 세계의 첫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붕괴됨과 아울러 동서냉전이 완전히 해소되며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간의 대립은 이데올로기가 대립의 초점이던 것이 점차 문화적 갈등이 대립이 초점으로 되여 가고 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화가 진척됨에 따라 지역과 지역간, 국가와 국가 간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더구나 정보산업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만 있으면 손쉽게 지구의 반대편의 사람들과 화상을 보면서 채팅을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되여 버렸고 외국의 영화와 소설들을 볼 수가 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정보량이 방대하게 불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부단히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머리 속에서 낡고 오래된 정보는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없어진다. 냉전체제의 해소 중국의 시장경제와 문호개방을 계기로 대량의 외국의 것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가치관념을 형성시키고 부단히 새로운 흥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80여년 전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잊혀진 한 구석으로 되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노르웨이의 삼림(ノルウェイの森)》이란 연애소설은 흥미롭게 보는 사람이 있어도 프로작가들의 작품은 그다지 읽는 사람이 없는 것이 중국 그리고 연변의 젊은 독자층의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일본의 상황은 중국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일본경제의 불황 속에서 일본에서는 전쟁전의 프롤레타리아문학 붐이 일고 있어,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소설 〈게 잡이 공선(蟹工船)〉가 2008년 1년간 사이에만 각 출판사의 책과 만화 등으로 루계 80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베스터셀러로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련애소설인 《노르웨이의 삼림》은 흥미 진지하게 보는 사람이 있어도 일본의 프롤레타리아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눈길을 돌리는 젊은 세대들은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마키무라의 고향인 고치현 고치시에는 평화자료관・쿠사노야(平和資料館・草の家)라는 것이 있으며 그 산하에 마키무라 고협회라는 것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마키무라의 시 낭송대회라든가 연구회를 연다고 한다. 올해 6월2일 마카무라 고협회가 주최하는 “마키무라 고의 탄생 100주년 기념 이벤트”가 있었는데 도다이쿠코(戸田郁子)가 〈마키무라 고가 그린 간도, 고치와 이어지는 연변(槙村浩が描いた間島、高知とつながる延辺)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200명 좌우의 청중들이 참가하여 성황리에 이벤트가 끝났다고 한다.   올해 9월1일에는 마키무라 고협회 회원 40여명이 연길에 와서 연변대학 외국어학원등과 교류를 하고 또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배경으로 되는 연변지역에 대한 관광을 한다고 한다. 중국 10대 명산 중의 하나인 백두산, 그리고 해란강의 여울소리와 왕청의 빨치산 근거지, 시속의 주인공의 고향인 함경도를 강 건너에서 바라다볼 수 있는 도문강, 이 모든 것들이 9월 달에 오는 마키무라 고협회 회원들에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연변의 조선족들은 항일전쟁시기 민족의 해방과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간도빨치산에 경의와 성원을 보내준 일본의 프로시인 마키무라 고를 영원히 존경할 것이며 또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이러한 시인을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추모하고 그리는 고치시의 마키무라 고협회의 회원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연변과 고치현, 연길과 고치시, 원래 아무런 인연이 없을 정도로 바다를 사이 두고 멀리 떨어진 일본과 중국의 두 편벽한 지역이 80년 전의 일본프롤레타리아 시인이 목숨을 내걸고 쓴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에 의하여 아름다운 연줄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인연을 귀중히 여기면서 앞으로 고치현과 연변의 더 많은 우호 교류와 왕래가 이어질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2.《간도빨치산의 노래》에 비추어본 우리의 프로시나 저항시     마키무라 고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한 간도빨치산 대원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30년대 일제와 싸운 우리 연변조선족인민의 영웅적군상을 창조하였다. 물론 서정적 주인공은 함경도 출신 또는 조선반도 출신의 사람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수도 있다. 연변은 조선족인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반수 이상이 조선북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당시 간도의 항일운동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망라된다. 말하자면 북측 출신의 빨치산성원 뿐만 아니라 남측 계통의 사람들도 있었고 양정우를 사령으로 하는 중국공산당계통의 항일유격대도 있었다. 하지만 마키무라 고가 쓰고 있는 빨치산유격대가 어느 유격대인가 하는 것은 구태어 제기할 필요가 없다. 시인 자신도 이 시에서 간도빨치산 전사들은 “동방혁명군” 군기에 볼을 비비며 선서를 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시에서 말하는 “간도빨치산”은 국가와  민족의 계선을 초월한 오직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는 항일무장대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마키무라 고의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무산계급국제주의와 혁명정신으로 충만되고 있다.   마키무라 고의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일본의 식민지인에게 있어서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성원을 얻을 수 있는 우렁찬 노래였고 비정의적인 대동아 전쟁을 통하여 주변국가에 아픔과 고통을 안겨준 일제에게 있어서는 한 자루의 비수 같은 것이었다. 하기에 일본당국은 1932년부터 시작하여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강행하였고 마키무라 고는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발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투옥되며 옥중고문으로 당하여 결국 26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조선반도 남북의 문학사와 중국조선문학사를 통괄하여 보아도 마키무라 고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비교적 큰 편폭으로 연변지역의 조선족인민들의 항일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 성원하고 긍정적인 반일혁명투사의 시적형상을 부각한 작품은 없다. 이를테면 조선반도 이북에서는 일제가 패망한 뒤인 광복 이후에야 비로소 조기천의 《백두산》같은 서사시가 나타났다. 이런 각도에서 볼때 마키무라 고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은 동아세아 무산계급문학에서 반드시 대서특필하여야 할 작품임이 틀림없다.   이상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서정서사시《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비롯한 마키무라 고의 일련의 반전시들은 아주 공개적으로, 또 아주 직설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면서 그에 항거해 나서 싸우는 간도 빨치산을 정면적 서정서사적인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부각하였다. 공산주의사상중의 무산계급국제주의에 철저히 립각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민족과 국가를 배반하고 목숨을 걸고 식민지인민들의 반일투쟁을 구가하고 일제의 대외침략전쟁을 비판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등 일련의 시작들에서 보여준 저항정신은 아주 대단하다고 평가해야 할것이다.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나아가서는 전반 조선반도 식민지시대 문학에서의 저항시를 비추어 보는 하나의 선명한 거울로 될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저항시 전반이 아니라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중요한 저항시인이라고 할수 있는 윤동주를 마키무라 고라는 이 거울에 비추어 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간도지방에서 1930년대 초반부터 항일대오내서 불려졌던 민중들의 〈적기가〉,〈반일전가〉등 수많은 항일가요나〈혈해지창〉같은 항일연극 같은데서는 반일정서, 사상, 주장 등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출되였다. 그러나 일제의 엄혹한 언론, 문자검열 제도하에서 공개적인 언론매체를 통한 반일정서, 사상, 주장 등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출한 가능성이 없는 상황하에서 시를 포함한 거의 절대 부분의 메타포나 상징이나 해 암시적으로 표현되었을 따름이였다. 이를테면 한룡운의 〈님의 침묵〉(1926)같은 데서는 그의 조국애와 불굴의 반일독립정신이 불교적인 명상의 상징적수법을 통해 암묵적으로 표현되였다. 그리고 저항시인이라고 평가를 받 받기도 한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의 많은 작품도 많은 경우에 식민지시대의 한 지식청년의 고독하고 우울한 정서를 암묵적으로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에서 표현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정항정신과는 궤를 달리한다. 윤동주의 전반 시에서는 저항이라기보다는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력사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정신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이 명렬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고 평가를 할수 있다. 이는 마키무라 고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윤동주의 시집은《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의 많은 시작들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잠재창작의 형태를 취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공개출판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시작들이다. 이런 시작들에도 윤동주는 반일의 정서, 사상, 주장 같은 것을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시대라는 특정한 상황속에서의 윤동주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인 문제들에 관련 지음으로써 인간들의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건드려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윤동주의 시들은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에서와 같은 치렬한 저항정신에는 닿지 못했으나 미적인 완성도를 보다 높혔다는 점에서 역시 높이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3.일본공산당원 이타 스케오를 통해 본 공산주의의 매력     국제주의 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 마키무라 고가 《간도 빨치산의 노래》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필로 일제와 싸우고 간도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지, 성원했다면 다른 한 일본의 국제주의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인 이타 스케오(伊田助男)는 전쟁터에서 직접 총탄으로  싸우는 간도빨치산을 돕다가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마키무라 고우가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발표한지 1년 뒤인 1933년 3월, 일본침략군은 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왕청 반일유격근거지를 미친듯이 진공하였다. 왕청유격대와 항일구국군은 서로 배합하여 첨자산과 마반산 일대에서 일본을 매복습격하여 소왕청항일근거지를 건립한 뒤 첫 승전고를 울렸다. 이 전투에서 왕청의 항일군민들은 국제주의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인 이타 스케오(伊田助男)의 지원을 받았다. 항일유격대 전사들이 전장터에서 전리품들을 수습하다가 일본군대의 군용차 한대를 발견하였는데, 이 차에서 멀지않은 강변에서 일본 병사의 시체와 유서를 찾아냈다. 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었다.   친애하는 중국 유격대 동지들:   나는 당신이 산골짜기에 뿌린 삐라와 선전품들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들은 공산당의 유격대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주의자들이며 동시에 국제주의전사들입니다. 나는 몹시 당신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당신들과 손잡고 공동의 적을 쳐부수고 십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파쇼놈들에게 포위되였습니다. 더는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내가 운송해온 10만발의 탄알을 귀군에 넘겨줍니다. 이 탄약들은 북쪽의 송림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이 탄알을 가지고 파쑈놈들을 조준하여 사격하십시오. 나의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은 영원히 살아있을 겁니다. 신성한 공산주의사업이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관동군 간도 일본 차중대               일본공산당원 이타스케오                1933년 3월 30일      1933년 4월, 이 국제주의전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소왕청 항일근거지에서는 이 마촌의 학교를 “이전(伊田)학교”라고 이름을 고쳤다.국제주의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인 이타 스케오가 희생된 유적지는 지금 왕청현 동광진 동립촌 동남쪽으로 약 4리 떨어진 동림하 남안의 평지이다. 그리고 “이전(伊田)학교” 유적징의 지리적위치는 지금의 왕청현 동광진 동림촌 동남쪽으로부터 약 4리 떨어진 판석산 동쪽의 밭 복판에 있다. 1994년 6월 14일 왕청현 동림소학교를 다시 “이전소학교”라고 개칭하게 되였다. 2004년 저수지를 수축하게 되면서 이 “이전소학교”가 왕청현 동광진중심소학교에 편입되여 들어가게 되면서 동광진중심소학교는 “이전소학교”라고 개칭하게 되였다.   4. 나가는 말          마키무라 고와 이타 스케오 같이 자신이 속해 있는 민족과 국가를 배반하고 목숨을 걸고 식민지인민들의 반일투쟁을 구가하고 일제의 대외침략전쟁을 비판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인들 속에도 마키무라 고와 이타 스케오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하여 할 것이며 미상불 앞으로 이들의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난세기 30년대 마키무라 고와 이타 스케오 같은 일본공산당원들의 고매한 국제주의 정신을 리상과 신념이라는 이 령혼의 혼불이 경제와 돈이라는 이 강풍 앞에서 꺼질듯 말듯하는 위태로은 지경에 놓여있는 오늘날의 현실속에서 한번 쯤은 뒤돌아 보고 한번 쯤은 곱씹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2013년 1월 10일 연길에서 김정웅(연변대학교 일본어학과)      
2    일본의 마키무라 고와 그의《간도빨치산의 노래》 댓글:  조회:5285  추천:0  2013-03-05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우리 문학(2)                                                                                                                                                             김정웅(연변대학교 일본어학과) 들어가면서   올해는 중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저명한 프롤레타리아 시인 마키무라 고(槙村 浩, 1912.6.1)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마키무라는 일본의 고치현(高知县) 고치시(高知市) 출신으로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서 활발한 반전운동을 벌림과 동시에 많지는 않지만 주옥 같은 반전시들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1930년대에 중국의 간도(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조선인 간도 빨치산부대를 격조 높이 노래한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 》가 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 》는 마키무라의 대표작으로서 전체가 15연 182행으로 구성된 서정서사시이며 1932년4월 일본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기관지인 《프롤레타리아문학》(림시증간)에 발표된 작품이다. 마키무라는 26세의 짧은 삶을 살았기에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광산당이 령도하였던 간도빨치산을 공개적으로 지지, 성원하면서 일본군국주의 대외침략전쟁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비판한 프롤레타리아작가이다. 중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지 이미 40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최근의 중일관계를 볼 때 한마디로 ‘정냉경열(政冷经热)’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중일국교정상화 40주년이란 뜻 깊은 한 해를 맞이하는 이때에 중일간에는 축복의 무드는 찾아 볼수가 없고 조어도령토분쟁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기에 전쟁이란 비상사태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파쑈의 대동아전쟁을 규탄하고 침략을 받고 있는 나라들에 따뜻한 성원을 보낸 일본의 프롤레타리아시인에 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최근 일본 고치시의 지역신문인 《고치신문》과 일본 프롤레타리아 관련 신문인 《아카하다(赤旗)》에는 마키무라의 《간도빨치산의 노래》와 더불어 일본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연길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올해 9월1~7일에는 고치시의 마카무라를 그리는 협회회원 40여명이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무대로 설정된 연변지역을 답사하고 연변대학의 사생들과 더불어 따뜻한 지역 간의 교류를 하였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중국의 변방지역인 연변과 일본의 고치현이 일본의 한 프롤레타리아 시인이 80년 전에 쓴 시로 하여 한 가닥의 뉴대로 이어지고 있다.   마키무라고의 생애   마키무라 고(槙村浩)는 필명으로서 본명은 요시다 도요미치(吉田丰道)이다. 그는 1912년6월1일 일본의 고치현 고치시(高知县高知市)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간호부인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때문에 마키무라의 성장에 있어서 아버지보다도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컸을 것이다. 마키무라의 어머니 우시에(丑惠)의 아버지인 노무라 다바네(野村束稻)는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자유민권운동가였다. 마키무라는 이러한 자유민권운동가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란 어머니로부터 자유민권사상, 즉 자유의 정신을 습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마키무라가 처음으로 소학교에 입학한 곳은 고치시(高知市) 제2소학교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하여 규슈(九州)에 있는 숙부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지만, 거기도 있기가 불편했던지 1920년에 고치시에  돌아와 제6소학교에 들어간다. 제6소학교에서 마키무라는 신동으로 불린다. 그는 두 살 때부터 글을 읽었고 세 살 때는 병원에서 의학잡지를 읽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는 기억력이 비상하여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 뒤 그가 한 일들을 돌이켜보면 천성적으로 비상한 총기와 재능을 가졌던 것 같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그는 당시 일본의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읽었으며 일부 서양의 고전문학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소학교를 다닐 때 쓴 동요, 동화들에서 그런 흔적을 다분히 볼 수 있다. 마카무라는 소학교에서 4년간 공부를 한 다음 두 학년을 뛰어넘어 도사중학교(土佐中学校)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신동인 마키무라의 도사중학교에서의 학습성적은 그다지 우수하지 못하였다. 그는 학교생활을 전폐하고 도서관에만 들어박혀서 중국 당송시기의 시들을 탐독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일기 시작하였다. 마키무라 고의 사상적 변화는 도사중학교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후 마키무라 고는 도사중학교를 그만두고 같은 시에 있는 현립난카이중학교(南海中学校) 3학년에 편입한다. 하지만 이 난카이중학교는 군인양성을 위한 학교였기에 자유민권사상에 물 젖어 있은 마키무라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는 이때부터 철저하게 천황제도를 반대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난카이중학교 정문에는 천황초상이 걸려 있었으며 등교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천황초상화 앞에서 경례를 해야만 교문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키무라는 그것이 싫어서 학교 뒤문으로 살그머니 학교를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천황이리고 부르지 않고 “히로히토”라는 천황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으로 천황에 대한 불경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면서 철저하게 일본의 천황제도에 저항하였다. 당시 일본의 남자중학교에서는 현역군관들이 와서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마키무라는 다른 일부 혁명적인 학생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일본중학교들에서 강행하는 파쑈교육에 대하여 염오를 느끼고 퇴학당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와 그의 재간을 아끼는 선생들의 알선으로 고향을 떠나 오카야마시(岡山市)의 사립간사이(関西)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931년3월 마키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오카야마중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인민혁명투쟁의 물결은 고치현(高知県)에까지 미치게 되였다. 1927년부터 고치현에서는 선후로 일본공상당과 일본공산주의청년회, 노동조합 등의 고치지방위원회가 성립되었으며 1931년에는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동맹, 작가동맹의 고치지방조직까지 나오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마키무라는 글을 쓰거나 번역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엄중한 경제위기에 처한 일본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1931년7월 그는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가입하여 이 동맹의 고치지부 성립준비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는 작가동맹에 가입한 때로부터 자기의 필명을 마키무라 고라고 하였으며 1932년 2월 《대중의 벗(大衆の友)》잡지의 창간호에 마키무라 고라는 이름으로 〈숨 쉬는 총칼—만주주둔군 병사들에게(生ける銃架-満州駐屯軍兵士達へ) 〉란 서정서사시를 발표한다. 이 무렵 마키무라는 문학활동 뿐만 아니라 지하당이 영도하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12월 하순에는 일본공산주의청년동맹의 지도성원의 한 사람으로 되었으며 고치현지방위원회의 선전교육 면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마키무라는 소학교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문학간행물에 정식으로 실린 것은 1932년2월에 쓴 〈숨 쉬는 총칼-만주주둔군 병사들에게〉이다. 이 시는 일제가 이른바 “9.18”사변이라는 명의 하에 중국에 대한 공공연한 침략전쟁을 발동하자 불과 몇 달 사이에 중국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여 싸운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일본군병사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숨 쉬는 총칼”로 될 것이 아니라 총부리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2년 초 원래 고치현에 주둔했던 일본군 보병 제44연대 병사들에게 반전사상을 선전할 목적으로 많은 선전삐라를 찍어 나누어주었다. 한번은 마키무라를 비롯한   공청고치지구위원회 성원들이 경계가 삼엄한 고치시 아사쿠라(朝倉) 보병 44연대 숙사내에 들어가 상해출병을 반대하는 “병사들이여 적이 누군가를 똑바로 보라!( 兵士よ敵をまちがえるな)”라는 선전삐라를 뿌렸다고 하는데 이로 하여 그들은 상급 당조직의 표창을 받았다. 이 삐라는 마키무라가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이런 노력으로 하여 보병 제44연대의 일부 일본병사들은 상해전선에서 중국의 제19로군 애국전사들과 싸울 것을 거절하였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키무라는 즉시 〈출정(出征) 〉, 〈1932.2.26—백색테러에  넘어진 44연대 혁명적 병사들에게〉 라는 두 수의 시를 써서 중국과 싸울 것을 거절한 일부 일본병사들의 반항투쟁을 찬양하였다. 1932년3월13일 마키무라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열화처럼 타오르는 항일유격전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찬양하는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지었다. 이 시에는 마키무라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특징의 하나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사상이 충분히 표현되었으며 또 그는 이 시로 하여 일본의 우수한 혁명적 시인이라는 영예를 지니게 되었다. 1932년4월초 마키무라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마키무라는 당에 가입한 후에도 여전히 공청조직과 작가동맹에서 일하였다. 1932년4월21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문화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본군경들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이른바 제3차 총검거를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고치현의 당원, 공청원, 협동조합 성원, 프로문화동맹 성원들 대부분이 이날 저녁에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었다. 마키무라도 그 이튿날 새벽 고치시 자택에서 체포되어 다카오카쵸(高丘町)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게 되었다. 마키무라는 일본군경의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혁명가로서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함께 체포된 적지 않은 “동지”들은 일본군경의 고문에 못이겨 이른바 사상전향성명에 서명하였지만 마키무라를 비롯한 몇몇 진정한 공산당원들은 죽을지언정 자기의 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거듭 언명하였다. 혹독한 고문으로 하여 한때는 식사도 입으로 하지 못하였으며 후에는 정신분열증까지 걸렸다. 그러나 그의 혁명정신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1933년4월28일 마키무라는  비법적인 좌익문화조직의 책임자이며 글로 “일본제국을 모독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3년 유기도형을 받게 된다. 마키무라는 옥중에서도 시 창작에 정진하였다. 사상전향성명을 접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여 그에게만은 종이나 연필 같은 것을 일체 주지 않았다. 그는 머리 속에 시를 구상한 뒤 그것을 몇 번이고 읽어 외우군 하였다. 그리하여 1935년6월 출옥한 뒤에 그것을 다시 종이에 올려 세상에 내놓았다. 옥중에서 쓴 시에는 헌시(獻詩) 〈청춘(青春) 〉, 따따르해협 이남인 북해도감옥에 갇히운 동지를 그리면서 쓴 시 〈따따르해협(ダッタン海峡) 〉, 옥중에서 국외 노동계급의 혁명활동을 성원한 시 〈옥중에서 독일동지를 생각하여 부는 노래(獄内にてドイツの同志を思う歌) 〉,〈중국의 시인들에게(異郷なる中国の詩人たちに)〉, 〈옥중에서 꼼뮨전사들을 생각하노라(獄中のコンミューンの戦士の詩を憶つて)〉 등이다. 제목 자체가 분명히 보여주듯이 옥중에서 쓴 그의 시들은 모두 프롤레탈리아 국제주의, 동지애, 적의 그 어떤 강압적인 수단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절개를 지키려는 그의 굳센 형명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옥중에서 소위 정치범들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감방마다에 배치해놓은 불교경전과 유교경전들을 모조리 읽었다고 한다. 출옥 후 그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아세아적생산에 기초한 정치, 경제, 문화비판》이라는 저작 한 권을 써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불교경전과 중국고전의 인용문들은 모두 감옥 안에서 기억한 것을 그대로 쓴 것이라고 한다. 1935년6월 감옥에서 나온 마키무라는 주로 집에서 요양하면서 주로 시를 쓰거나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 당시 고치현에서는 진압당한 혁명조직을 재건하는 사업이 맹렬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또 새로운 인민전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은 때였다. 그러나 동지들은 마카무라의 건강을 고려하여 위험한 지하활동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1936년12월5일 마키무라는 “인민전선사건” 때문에 검거되어 또 다시 투옥되지만, 이듬해 1월16일 중병으로 하여 석방되어 고치시내에 있는 도사뇌병원(土佐脳病院)에 입원한다. 하지만 마키무라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938년9월3일 일본의 불요불굴의 혁명가이며 시인이었던 미키무라고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도사뇌병원에서 자기의 전투적인 일생을 끝마쳤다.   마키무라 고우의 반전시 산생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콘텍스트   일본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이란 1920~30년대에 관동대지진과 경제공황 등 사회적 불안을 배경으로 나타나 사회혁명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던 일련의 문학운동을 말한다. 1923년9월1일 일본시간으로 11시58분에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가미(相模)만의 서북쪽에서 80㎞ 떨어진 해역을 진원으로 하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매그니튜드(magnitude) 7.9인 이 대지진은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치바현(千葉県)・이바라기현(茨城県)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즈오카현(静岡県)에 이르는 내륙과 연안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는 일본의 자연재해역사상 최대급의 피해였다. 이 대지진으로 하여 19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10만5천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0만9천 세대의 가옥이 파손되고 21만2000세대의 가옥이 불에 탔다. 특히 일본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동경의 피해는 더욱 막심했다. 동경시내의 건축물 피해 상황을 본다면, 동경의 아사쿠사(浅草)에 있는 12층짜리 탑인 능운각(凌雲鶴)이 무너지고 건설 중에 있던 마루노우치(丸の内)의 내외빌딩이 붕괴되어 노동자 300여명이 깔려 죽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또 대장성, 문부성,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 관공청사의 건물과 제국극장, 미츠코시니혼바시본점(三越日本橋本店) 등 많은 문화와 상업시설들이 불에 탔다. 그 외에도 동경제국대학 도서관과 마츠네야분코(松廼舎文庫)와 같은 장서시설이 소각되어 많은 귀중한 서적들이 소실되었다. 자연재해로 인한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의 불안정 속에서 이러한 사회적 불안정 요소들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재일조선인들에게 없는 죄명을 들씌워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화들을 다른데 전가시킬 필요가 생겨났다. 따라 일본사회에서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재일조선인들이 “폭도”로 되여 “우물에 독약을 넣고 또 불을 지르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유언비어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매스컴도 여기에 동참하여 9월2일부터 9월6일에 이르는 사이에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 《하북신문(河北新聞) 》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도하였다. 오오사카신문에서는 9월3일 조간(朝刊)에서 “어떤 빈민들이 흉기를 들고 폭행, 요코하마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는 정보가 있음」 라는 타이틀로 “요코하마 지역에서 이런 기회를 엿보는 불순한 조선인들에 대하여 경계를 높여야 한다는 엄중한 정보가 왔다”고 보도하였으며 3일(날자는 4일로 되어 있음) 석간(夕刊)에서는 “각지에서 경계를 하라고 경보국에서 각 곳에 무전을 치다” 라는 타이틀로 “믿을 수 없는 조선인 무리들이 아무 곳에서나 봉기를 일으킬 조짐이 있음…」라는 경보국에 의한 전보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또 3일 호외(號外)신문에서는 동경 아사히신문사의 직원 고후(甲府)의 특전으로 “조선인 폭도들이 요코하마와 가나가와를 지나 하치오지를 향하면서 불을 질러대는 것을 보았다”는 기자의 목격정보를 기재하였다. 일본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와 매스컴의 근거 없는 보도로 하여 많은 일본사람들이 조선인들에게 적대감과 분노를 가지고 길거리에서 조선인을 보는 족족 때려죽이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반인류적인 만행이 자행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어 단어의 어두에 있는 탁음이 잘 발음되지 않는 점을 이용하여 길가는 행인에게 “쥬고엔고쥿센(十五円五十銭)”이거나 “가기구게고(ガギグゲゴ)”와 같은 것을 발음시켜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판정하고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조선인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기 위하여 일본국가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 무고하게 살해된 조선인에 대한 인수는 복수의 기록과 보고서가 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 의론이 다르다. 당시 정부의 조사로서는 233명으로 되어 있고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조사에 의하면 2613명으로 되어 있으며 최고로는 사망자가 6661명이 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하여 곤경에 빠진 상태에 관동대지진까지 겹쳐 일본사회는 더욱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기업이 파괴됨으로 하여 실업자가 급증하고 더욱이 지진에 의한 피해로 하여 결재곤난(決裁困難)에 빠지는 약속어음이 막대한 액수로 불러났다. 이러한 금융상태의 불온한 현상은 쇼와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을 일으키게 된다. 1920년대로부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사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전례 없이 전파되었으며 여러 분야에 걸쳐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당시 아시아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운동의 활발한 전개는 다음과 같은 국내외의 사회적 배경과 갈라놓을 수 없다. 우선 국외적으로는 1917년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여 지구상에 첫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다음으로 1929년 아메리카의 월가(Wall Street)로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하고 일본도 이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 국내에는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쌀값 폭등과 같은 물가상승과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보통선거와 사회보장 등의 실시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요구 때문에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20년대는 일본 당국의 사상적 통제가 완화되던 이른바 “다이쇼데모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시대였기에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였다. 1921년7월 중국 상해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주도하에 진독수, 이대소,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을 창건했고 그 이듬해 7월에는 일본공산당이 창건되었다. 1925년에는 일제통치하의 서울에서 조선공상당이 결성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공산주의 사상이 고조되고 공산단체의 결성과 함께 일본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성행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이란 1920년대로부터 193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유행한 문학으로서 개인주의적 문학을 부정하고 사회주의사상과 공산주의사상과 연관된 문학이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선두적인 존재는 191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다이쇼(大正)인데 이 운동 중에서 노동현장체험을 가진 일군의 작가들이 출현한다. 그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는 미야지마 모토오(宮島資夫)의 《갱부(坑夫) 》와 미야지 가로쿠(宮地嘉六)의 《방랑자 도미조(放浪者富蔵) 》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계층의 사람들도 노동자들의 상황을 문학에서 표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마키 오우미(小牧近江)와 가네코 히로후미(金子洋文) 등은 잡지 《씨 뿌리는 사람(種蒔く人)》을 발간하여 사회에 대한 개혁과 연관된 문학을 시도한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전주곡 속에서 1924년에 잡지 《문예전선》이 창간된다. 이것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중심적인 잡지로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일파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일파 간의 갈등과 대립이 정치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문학진영 내에서도 발생하여 1927년에는 로농예술가련맹,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日本プロレタリア芸術連盟), 전위예술가동맹(前衛芸術家同盟)이란 세 단체로 분립하는 상태에 이른다. 1928년 구라하라(蔵原)는 이러한 사태를 타개하려고 기존의 조직을 그대로 두는 상태에서 연합체의 결성을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에 노농예술가연맹이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3월13일에 일본좌익문예가총연합(日本左翼文芸家総連合)이 결성된다. 1928년3월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과 전위예술가동맹은 조직적으로 통합되어 새로운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ippona Artista Proleta Federacio, NAPF,약칭 낫프)을 결성하고 《전기(戦旗) 》를 기관지로 한다. 낫프의 권위 있는 신진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는 《1928년3월15일(一九二八年三月十五日) 》과 《게 잡이 공선(蟹工船) 》라는 중편소설을 연이어 발표하고 도쿠나가 스나오(徳永直)는 장편소설 『태양이 없는 거리(太陽のない街)』를 연재함으로써 《전기(戦旗) 》를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적인 잡지로 만든다. 1931년11월 소련의 영향하에 문학조직을 대중화하려고 하는 구라하라(蔵原) 등의 노력으로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Federacio de Proletaj Kultur Organizoj Japanaj, KOPF, 약칭 곳프)이 결성된다. 일본식민치하의 조선반도에 있어서 일본은 서양의 근대적인 문명을 수용하는 통로였고 중국과 만주는 일본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을 하는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한합병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고 이러한 유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에 동참하였다. 특히 김증생은 일본 프로문학의 개막을 알리는 잡지인 《씨 뿌리는 사람》의 창간호부터 시작하여 〈무산자와 유산자〉(1921년2월), 〈제3인터네셔날에의 투쟁〉(1921년4월) 등 평론을 투고하여 재일조선인으로서는 일본의 프로문학 잡지에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이다. 그 후 정연규도 일본프로문학에 등장하여 생활고와 사회현실에 번민하는 젊은이의 갈등을 그린 일본어 장편소설 《정처없는 하늘가(さそらいの空) 》(1923년2월)와 《생의 번민(生の悶) 》(1923년6월) 등을 발표하여 조선의 소설가로 인정을 받고 일본의 프로작가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 후에도 많은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의 프로문학과 인연을 맺고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1925년에는 조선에서 공산당이 결성되자 일월회와 재동경조선노동회 등의 단체가 설립되고 일본 사상단체와 연대하는 사회주의 운동이 성행하게 되였다. 1930년대 초기에 들어서 일본의 파시즘의 대두와 더불어 치안유지법과 특별고등경찰에 의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시작된다. 1932년에 노농예술가연맹이 해산을 하고 이어서 1934년2월에는 곳프에 속한 프로문학조직이었던 일본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낫프)이 해산을 표명한다. 그리고 1933년2월20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의 핵심 성원인 고바야시 다키지가 경찰서에서 옥사를 하고 공산당원들이 연이어 전향을 하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문학도 서서히 쇠퇴되어 갔던 것이다.  
1    연변과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 마키무라 고(槇村 浩) 댓글:  조회:1650  추천:0  2012-06-25
間島パルチザンの歌                                            槙村 浩 思い出はおれを故郷へ運ぶ 白頭の嶺を越え、落葉(から)松の林を越え 蘆の根の黒く凍る沼のかなた 赭ちゃけた地肌に黝(くろ)ずんだ小舎の続くところ 高麗雉子が谷に啼く咸鏡の村よ 雪溶けの小径を踏んで チゲを負ひ、枯葉を集めに 姉と登った裏山の楢林よ 山番に追はれて石ころ道を駆け下りるふたりの肩に 背負(しょい)縄はいかにきびしく食い入ったか ひゞわれたふたりの足に 吹く風はいかに血ごりを凍らせたか 雲は南にちぎれ 熱風は田のくろに流れる 山から山に雨乞ひに行く村びとの中に 父のかついだ鍬先を凝視(みつ)めながら 目暈(めま)ひのする空き腹をこらへて 姉と手をつないで越えて行った あの長い坂路よ えぞ柳の煙る書堂の蔭に 胸を病み、都から帰って来たわかものゝ話は 少年のおれたちにどんなに楽しかったか わかものは熱するとすぐ咳をした はげしく咳入りながら 彼はツァールの暗いロシアを語った クレムリンに燻(くすぶ)った爆弾と ネヴァ河の霧に流れた血のしぶきと 雪を踏んでシベリアに行く囚人の群れと そして十月の朝早く 津波のやうに街に雪崩れた民衆のどよめきを ツァールの黒鷲が引き裂かれ モスコーの空高く鎌と槌(ハンマー)の赤旗が翻ったその日のことを 話し止んで口笛を吹く彼の横顔には痛々しい紅潮が流れ 血が繻衣(チョゴリ)の袖を真赤に染めた 崔先生と呼ばれたそのわかものは あのすさまじいどよめきが朝鮮を揺るがした春も見ずに 灰色の雪空に希望を投げて故郷の書堂に逝った だが、自由の国ロシアの話は いかに深いあこがれと共に、おれの胸に泌み入ったか おれは北の空に響く素晴らしい建設の轍(わだち)の音を聞き 故国を持たぬおれたちの暗い殖民地の生活を思った おゝ 蔑まれ、不具(かたわ)にまで傷づけられた民族の誇りと 声なき無数の苦悩を載せる故国の土地! そのお前の土を 飢えたお前の子らが 苦い屈辱と忿懣(ふんまん)をこめて嚥(の)み下すとき?? お前の暖かい胸から無理強ひにもぎ取られたお前の子らが うなだれ、押し黙って国境を越えて行くとき?? お前の土のどん底から 二千万の民衆を揺り動かす激憤の熔岩を思へ! おゝ三月一日 民族の血潮が胸を搏(う)つおれたちのどのひとりが 無限の憎悪を一瞬にたゝきつけたおれたちのどのひとりが 一九一九年三月一日を忘れようぞ! その日 「大韓独立万歳!」の声は全土をゆるがし 踏み躙られた××(日章)旗に代へて 母国の旗は家々の戸ごとに翻った 胸に迫る熱い涙をもっておれはその日を思ひ出す! 反抗のどよめきは故郷の村にまで伝はり 自由の歌は咸鏡の嶺々に谺(こだま)した おゝ、山から山、谷から谷に溢れ出た虐げられたものらの無数の列よ! 先頭に旗をかざして進む若者と 胸一ぱいに万歳をはるかの屋根に呼び交はす老人と 眼に涙を浮べて古い民衆の謡(うた)をうたふ女らと 草の根を噛りながら、腹の底からの嬉しさに歓呼の声を振りしぼる少年たち! 赭土(あかつち)の崩れる峠の上で 声を涸らして父母と姉弟が叫びながら、こみ上げてくる熱いものに我知らず流した涙を おれは決して忘れない! おゝ おれたちの自由の歓びはあまりにも短かゝった! 夕暮おれは地平の涯に 煙を揚げて突き進んでくる黒い塊を見た 悪魔のやうに炬火を投げ、村々を焔の×に浸しながら、喊(かん)声をあげて突貫する日本騎馬隊を! だが×(焼)け×(崩)れる部落の家々も 丘から丘に炸裂する銃弾の音も、おれたちにとって何であらう おれたちは咸鏡の男と女 搾取者への反抗に歴史を×ったこの故郷の名にかけて 全韓に狼煙を揚げたいくたびかの蜂起に×を滴らせたこの故郷の土にかけて 首うなだれ、おめおめと陣地を敵に渡せようか 旗を捲き、地に伏す者は誰だ? 部署を捨て、敵の鉄蹄(てつてい)に故郷を委せようとするのはどいつだ? よし、焔がおれたちを包まうと よし、銃剣を構へた騎馬隊が野獣のやうにおれたちに襲ひ掛からうと おれたちは高く頭を挙げ 昂然と胸を張って 怒濤のやうに嶺をゆるがす万歳を叫ばう! おれたちが陣地を棄てず、おれたちの歓声が響くところ 「暴圧の雲光を覆ふ」朝鮮の片隅に おれたちの故国は生き おれたちの民族の血は脈々と搏(う)つ! おれたちは咸鏡の男と女! おう血の三月!??その日を限りとして 父母と姉におれは永久に訣(わか)れた 砲弾に崩れた砂の中に見失った三人の姿を 白衣を血に染めて野に倒れた村びとの間に 紅松へ逆さに掛った屍の間に 銃剣と騎馬隊に隠れながら 夜も昼もおれは探し歩いた あはれな故国よ! お前の上に立ちさまよふ屍臭はあまりにも傷々しい 銃剣に蜂の巣のやうに×き×され、生きながら火中に投げ込まれた男たち! 強×され、×を刳(えぐ)られ、臓腑まで引きずり出された女たち! 石ころを手にしたまゝ絞め××(殺さ)れた老人ら! 小さい手に母国の旗を握りしめて俯伏した子供たち! おゝ君ら、先がけて解放の戦さに斃れた一万五千の同志らの 棺(ひつぎ)にも蔵められず、腐屍を兀鷲(はげわし)の餌食に曝す躯(むくろ)の上を 荒れすさんだ村々の上を 茫々たる杉松の密林に身を潜める火田民(かでんみん)の上を 北鮮の曠野に萠える野の草の薫りを籠めて 吹け!春風よ! 夜中、山はぼうぼうと燃え 火田を囲む群落(むら)の上を、鳥は群れを乱して散った 朝 おれは夜明けの空に 渦を描いて北に飛ぶ鶴を見た ツルチェクの林を分け 鬱蒼たる樹海を越えて 国境へ?? 火のやうに紅い雲の波を貫いて、真直ぐに飛んで行くもの! その故国に帰る白い列に おれ、十二の少年の胸は躍った 熱し、咳き込みながら崔先生の語った自由の国へ 春風に翼(はね)を搏(う)たせ 歓びの声をはるかに揚げて いま楽しい旅をゆくもの! おれは頬を火照らし 手をあげて鶴に応へた その十三年前の感激をおれは今なまなましいく想ひ出す 氷塊が河床に砕ける早春の豆満江を渡り 国境を越えてはや十三年 苦い闘争と試練の時期を おれは長白の平原で過ごした 気まぐれな「時」をおれはロシアから隔て 厳しい生活の鎖は間島におれを繋いだ だが かつてロシアを見ず 生まれてロシアの土を踏まなかったことを、おれは決して悔いない いまおれの棲むは第二のロシア 民族の墻(かき)を撤したソヴェート! 聞け!銃を手に 深夜結氷を越えた海蘭(ハイラン)の河瀬の音に 密林の夜襲の声を谺した汪清(ワンシン)の樹々のひとつひとつに ×(血)ぬられた苦難と建設の譚を! 風よ、憤懣の響きを籠めて白頭から雪崩れてこい! 濤よ、激憤の沫(しぶ)きを揚げて豆満江に迸(ほとばし)れ! おゝ、××(日章)旗を飜す強盗ども! 父母と姉と同志の血を地に灑(そそ)ぎ 故国からおれを追ひ いま剣をかざして間島に迫る××(日本)の兵匪! おゝ、お前らの前におれたちがまた屈従せねばならぬと言ふのか 太てぶてしい強盗どもを待遇する途をおれたちが知らぬといふのか 春は音を立てゝ河瀬に流れ 風は木犀の香を伝へてくる 露を帯びた芝草に車座になり おれたちはいま送られた素晴らしいビラを読み上げる それは国境を越えて解放のために闘ふ同志の声 撃鉄を前に、悠然と階級の赤旗を掲げるプロレタリアートの叫び 「在満日本××(革命)兵士委員会」の檄! ビラをポケットに おれたちはまた銃を取って忍んで行かう 雪溶けのせゝらぎはおれたちの進軍を伝へ 見覚えのある合歓(ねむ)の林は喜んでおれたちを迎へるだらう やつら!蒼ざめた執政の蔭に 購はれた歓声を挙げるなら挙げるがいゝ 疲れ切った号外売りに 嘘っぱちの勝利を告げるなら告げさせろ おれたちは不死身だ! おれたちはいくたびか敗けはした 銃剣と馬蹄はおれたちを蹴散らしもした だが 密林に潜んだ十人は百人となって現はれなんだか! 十里退却したおれたちは、今度は二十里の前進をせなんだか! 「生くる日の限り解放のために身を献げ 赤旗のもとに喜んで死なう!」 「東方××(革命)軍」の軍旗に唇を触れ、宣誓したあの言葉をおれが忘れようか おれたちは間島のパルチザン。身をもってソヴェートを護る鉄の腕。生死を赤旗と共にする決死隊 いま長白の嶺を越えて 革命の進軍歌を全世界に響かせる -海 隔てつわれら腕(かいな)結びゆく -いざ戦はんいざ、奮い立ていざ -あゝインターナショナルわれらがもの・・・・・・ 一九三二・三・一三 (原文は『プロレタリア文学』臨時増刊、四・一六、第五回大会紀念号掲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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