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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마키무라고에 비추어본 우리의 “저항시”
2013년 03월 05일 21시 44분  조회:2842  추천:0  작성자: 망향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우리 문학(3)
 
김정웅(연변대학교 일본어학과)
 

  1.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내용 및 간도에서의 전파와 수용
 
  1932년3월13일 마키무라가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프롤레타리아문학》 임시증간호에 발표할 무렵 그의 나이는 겨우 19살이었다. 이 시는 전체가 15연 182행으로 구성된 서정서사시이다. 시의 내용에 따라 이 시를 크게 4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시의 첫 부분은 1연에서 3연까지 도합 19행이다. 이 부분은 시의 공간적 배경과 시적 화자의 가족에 대한 추억의 묘사로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4연에서 6연까지의40행이다. 이 부분은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적 축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혁명과 조선의 “3・1”만세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7연에서 11에 이르는 71행이다. 이 부분은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있으며 또 일제의 이런 만행에 굴하지 말고 떨쳐 일어나 항쟁해야 함을 쓰고 있다. 시의 네 번째 부분은 12연에서 15연까지의 52행이다. 이 부분에서는 간도빨치산이 항일을 하면서 실패와 좌절도 있었지만 불사조마냥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일제를 타도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적인 공조를 희망하는 내용도 쓰고 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 첫 시작은 빨치산 대원인 서정시의 주인공이 고향-함경도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추억은 나를 고향으로 이끄노라
백두의 령을 넘어 이깔나무 숲을 지나
갈대뿌리 시꺼멓게 얼어붙은 소택지를 지나 저 멀리로
불그스름한 땅우에 거뭇거뭇한 오두막들이 이어지는 곳
고려꿩이 골짜기들에서 우는 함경의 마을이여
 
눈 녹은 오솔길을 따라서
지게를 지고 가랑잎 모으러
누나와 올랐던 뒷동산의 참나무 숲이여
산지기에게 쫓겨 돌들이 울퉁불퉁한 비탈길 내리닫는 둘의 어깨엔
짐바가 조여들어  얼마나 아팠던가
갈라터진 둘의 발뒤축에 슴배인 피는
찬 바람에 얼어붙는구나.
 
(思い出はおれを故郷へ運ぶ
白頭の嶺を越え、落葉(から)松の林を越え
蘆の根の黒く凍る沼のかなた
赭ちゃけた地肌に黝(くろ)ずんだ小舎の続くところ
高麗雉子が谷に啼く咸鏡の村よ
雪溶けの小径を踏んで
チゲを負ひ、枯葉を集めに
姉と登った裏山の楢林よ
山番に追はれて石ころ道を駆け下りるふたりの肩に
背負(しょい)縄はいかにきびしく食い入ったか
ひゞわれたふたりの足に
吹く風はいかに血ごりを凍らせたか)
  우의 시문을 보면 마키무라가 함경도에 어떤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어떤 대표적인 동물들이 있는가 그리고 기후 등에 대해서도 아주 깊은 료해를 하고 이 시를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키무라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인 고치시는 일본의 시코쿠도(四国島) 동해안의 태평양에 면하여 있는 해변도시로서 연평균기온이 17℃이며 제일 추운 1월의 최저기온일지라도 영하까지는 내려가지 않는 곳이다. 중국의 동북의 열악한 겨울을 경험하지 못한 19살 일본청년이 어떻게 마치 눈으로 보는 듯이 조선의 함경도와 중국 동북의 상황을 그렸을까? 그리고 간도빨치산에 대한 정보는 어떤 도경으로 입수했을가, 이는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하나의 의혹으로 남을 것이다.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항일의 봉화가 훨훨 타오르던 1932년에 정의감 있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시인에 의하여 씌어진 서정서사시이다. 9.18사변 이후 열화처럼 일어나는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는바 그들의 어용신문들은 날마다 항일빨치산을 모독하는 각종 신문보도를 냈다. 이를테면 1930일6월2일 고치에서 출판되는 《도요신문(土陽新聞) 》은 “간도 불법 조선인 봉기, 학교를 불태우고 전선을 절단, 폭탄을 각 곳에 던져 방화, 그들의 전시 초토화계획 폭로” 등의 제목으로 간도지역에서 일어난 인민들의 항일무장투쟁상황을 왜곡하는 소식들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처럼 간도지역의 빨치산들을 “강도”,”살인범”이라 모독하고 있지만, 마키무라를 비롯한 일본의 진보적 청년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이런 왜곡된 보도를 통하여 간도빨치산의 영웅적 투쟁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932년1월 일본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한 열혈청년 마키무라는 간도빨치산투쟁의 진실한 상황을 일본독자들에게 알려주며 또 간도빨치산들에게 보내는 자기의 경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쓰기로 작정하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제일 큰 특성은 문학의 사회성과 사실주의 성격에 있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는 언제나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작품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대표작인 〈게잡이 공선(蟹工船) 〉은 치치부마루(秩父丸)조난사건과 하쿠아이마루(博愛丸)학대사건 같은 실제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하여 3년간이나 북빙양어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프로문학계에는 “북쪽에는 고바야시 다키지가 있고 남쪽에는 마키무라 고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마키무라 역시 “9・18”사변 이후 일본의 파시즘의 대두가 제일 큰 사회 및 국제적 문제로 되고 있을 때 〈살아있는 총칼〉과 〈간도빨치산의 노래〉 라는 반전시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작품화하였다. 마키무라는 이 시를 쓰기 위하여서는 우선 간도빨치산투쟁의 진실한 정황과 그곳의 지리환경들을 료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같이 부근 도서관에 다니면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였으며 당시 고치에 체류 중인 조선인 유학생과 조선인 로동자들을 방문하여 조선사람들의 생활습관들을 료해하였다고 한다.
  마키무라의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1932년2월 《대중의 벗(大衆の友) 》의 창간호에 발표된 〈살아있는 총갈〉에 이어서 동년 4월 《프롤레타리아문학》 임시증간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간도빨치산의 노래〉가 발표된  그 달의 4월21일 마키무라는 고치시에서 검거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파시즘의 확대와 더불어 일본의 대외침략전쟁을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간도빨치산의 노래〉에 대한 출판금지령이 내려져 이 시가 “일자일구(一字一句)”까지 전면적으로 금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번 검거에서 마키무라는 실형판결을 받고 투옥되어 3년 후인 1935년6월6일에 고치형무소를 출옥하게 된다. 출옥 후 마키무라는 자신의 시집을 내기 위하여 원고를 가지고 1935년12월에 동경으로 간다. 그는 동경에서 《문학안내(文学案内) 》를 경영하고 있는 다카시 산지(貴司山治)를 찾아가 출판을 부탁하지만,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작가동맹도 해체되고 전향이 유행되며 모든 것이 파시즘에 의하여 탄압되는 상황 속에서 반전과 혁명을 소리높이 찬양하는 프로문학가의 시집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일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세월이 되어버린 때였다. 하지만 다카시는 마키무라의 시집원고를 받아서 단지에 넣은 다음 자택의 뜰 안에 깊숙이 감추어두고 출판될 수 있을 그날을 기다렸다.
  마키무라의 시를 일본에서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1945년8월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여서부터 얼마간 지나서부터였다. 전시하 천황제국가권력에 의하여 압제되어 있던 문화와 문학에 자유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조류 속에서 발행금지되었던 작품을 끝내 공공연히 읽을 수 있게 되였다. 이 무렵 많은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1946년8월20일 고치에서 소책자 《본모습(素貌) 》이 창간되는데 여기에 마키무라의 〈간도빨치산의 노래〉가 재록된다. 모리 다케오(毛利孟夫)가 소지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문학》(1932년4월 림시증간호 )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1964년10월 다카시 산지(貴司山治)의 피타는 노력과 신일본출판사(新日本出版社)에 의하여 발행된 시집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마키무라가 자신의 시집 발행계획을 세워서부터 30년 가까이 지나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시집이었다. 그 후 마키무라의 시집은 타이틀을 바꾸어가며 여러 출판사에 의하여 다수 출판된다.
  프롤레타리아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혁명적 고양을 촉진시킬 수 있는 문학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이해시킬 것인가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간도빨치산의 노래》가 전쟁 당시 간도땅에 전해졌는가의 여부는 당시 목숨을 내걸고 이 시를 썼고 또 지금은 저 하늘나라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을 마키쿠라에게도 자못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마키무라가 쓴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연변지역에 있어서의 발자취를 끈질기게 쫓고 있는 사람으로 한국 서울에 있는 도다 이쿠코(戸田郁子)라는 일본인 여성작가를 들 수 있다. 그는 연변에서 5년간 체류한 경험도 있으며 연변에서의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다(中国朝鮮族を生きる) 》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 속에 “고치에서 간도를 노래한 시인(高知から間島を詠った詩人)”이란 타이틀로 전시《간도빨치산의 노래》가 간도지역에 전하여졌다는 내용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연변대학교 력사학부에서 오래 교수로 임직했던박창욱(1927~2011)교수는 소학시절 력사선생이 수업시간에 마키무라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조선어로  읊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박창욱선생이 소학교 4학년 첫 학기 때의 수업시간이었다고 한다. 박선생의 나이로 추정해 볼 때 아마 1938년 좌우일 것이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 마키무라가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발표한 것이 1932년4월에 발간된 《프롤레타리아문학》 전시증간호이다. 그리고 이 잡지는 발표되자마자 발매금지처분을 받았다. 이런 시가 어떻게 간도 시골의 조선인소학교에서 읽혀졌을까?!
그때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간도빨치산의 노래』를 읊어준 선생은 이선생이란 역사교원으로서 일본유학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소학교는 연길현 조양천에 있는 교동소학교(4년제)이다. 이 소학교는 조선총독부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교장은 일본인이고 수업은 조선어로 하였다고 한다.
  1938년이나 1939년에 간도의 시골소학교에서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번역문이 읽혀지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일본어 원문이 간도에 전하여진 것은 그보다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할 하의 소학교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일본정부에 의하여 발매금지를 당한 반전시를 낭송하여 준 이선생은 애국애족적인 사람일 것이다. 당시 이선생이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학생들 앞에서 읊은 다음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민을 나누어 생각합시다”, “일본에도 이 전쟁을 반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이선생의 이러한 가르침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각인되어 있다고 박창욱교수는 술회한 적있다.
  조선족의 력사대가로서 알려져 있는 박창욱교수라고 하지만 소학교 4학년생인 당시에는 “빨치산”이라든가 “유격대”라든가 하는 것은 처음 듣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를 읽어준 이 선생으로부터 “우리의 곁에는 독립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고 한다. 이 선생은 정확히 4개월 정도 그 학교에 있었고 그 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목숨을 내걸고 쓴 일본프로문학가의 반전시 《간도빨치산의 노래》가 전쟁 당시 간도에 전해져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는 간도 조선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를 통하여 선량한 일본인과 침략을 일삼는 일본제국주의를 구분하여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30년대에 나온 일본무산계급시가문학으로서는 상당한 예술수준에 도달한 작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서술한 서사적 성분이 있는가 하면 시인자신의 혁명격정을 토로하는 서정이 있으며 고향산천과 백두산밀림에 대한 절절한 서경묘사가 있는가 하면 일본침략자의 야수적 만행에 대한 분노의 성토도 있다. 시인 마키무라 고는 비록 이 시를 중국 “간도”땅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 고치에서 쓰고 있지만 조선북부 함경지방과 연변산천에 대산 서경묘사는 마치 그가 이곳에 와 실제 생활체험을 겪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하다.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50여년 전에 불과 20세밖에 되지 않는 한 일본의 진보적인 청년에 의해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의 선렬들이 민족의 존엄과 생존을 위하여 싸운 빛나는 과거를 다시금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주고 있다.
 
  보다시피 정판룡 선생은 마키무라 고의 《간도빨치산의 노래》에 대하여 절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문학 작품으로서의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으며 식민지인들의 반일운동에 대한 열정적인 성원의 마음이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서의 시인의 혁명적 사상으로 충만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사회성만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예술성도 뛰어나다. 하기에 마키무라 의 26년이란 짧은 생애에 남긴 26편의 시 가운데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그의 대표작으로 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특히는 1985년 정판룡선생이 〈마키무라 고와 그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라는 문학평론을 발표 후, 중국과 주변의 환경은 크게 변한다. 1991년에는 세계의 첫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붕괴됨과 아울러 동서냉전이 완전히 해소되며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간의 대립은 이데올로기가 대립의 초점이던 것이 점차 문화적 갈등이 대립이 초점으로 되여 가고 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화가 진척됨에 따라 지역과 지역간, 국가와 국가 간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더구나 정보산업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만 있으면 손쉽게 지구의 반대편의 사람들과 화상을 보면서 채팅을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되여 버렸고 외국의 영화와 소설들을 볼 수가 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정보량이 방대하게 불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부단히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머리 속에서 낡고 오래된 정보는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없어진다. 냉전체제의 해소 중국의 시장경제와 문호개방을 계기로 대량의 외국의 것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가치관념을 형성시키고 부단히 새로운 흥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80여년 전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잊혀진 한 구석으로 되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노르웨이의 삼림(ノルウェイの森)》이란 연애소설은 흥미롭게 보는 사람이 있어도 프로작가들의 작품은 그다지 읽는 사람이 없는 것이 중국 그리고 연변의 젊은 독자층의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일본의 상황은 중국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일본경제의 불황 속에서 일본에서는 전쟁전의 프롤레타리아문학 붐이 일고 있어,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소설 〈게 잡이 공선(蟹工船)〉가 2008년 1년간 사이에만 각 출판사의 책과 만화 등으로 루계 80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베스터셀러로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련애소설인 《노르웨이의 삼림》은 흥미 진지하게 보는 사람이 있어도 일본의 프롤레타리아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눈길을 돌리는 젊은 세대들은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마키무라의 고향인 고치현 고치시에는 평화자료관・쿠사노야(平和資料館・草の家)라는 것이 있으며 그 산하에 마키무라 고협회라는 것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마키무라의 시 낭송대회라든가 연구회를 연다고 한다. 올해 6월2일 마카무라 고협회가 주최하는 “마키무라 고의 탄생 100주년 기념 이벤트”가 있었는데 도다이쿠코(戸田郁子)가 〈마키무라 고가 그린 간도, 고치와 이어지는 연변(槙村浩が描いた間島、高知とつながる延辺)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200명 좌우의 청중들이 참가하여 성황리에 이벤트가 끝났다고 한다.
  올해 9월1일에는 마키무라 고협회 회원 40여명이 연길에 와서 연변대학 외국어학원등과 교류를 하고 또 《간도빨치산의 노래》의 배경으로 되는 연변지역에 대한 관광을 한다고 한다. 중국 10대 명산 중의 하나인 백두산, 그리고 해란강의 여울소리와 왕청의 빨치산 근거지, 시속의 주인공의 고향인 함경도를 강 건너에서 바라다볼 수 있는 도문강, 이 모든 것들이 9월 달에 오는 마키무라 고협회 회원들에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연변의 조선족들은 항일전쟁시기 민족의 해방과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간도빨치산에 경의와 성원을 보내준 일본의 프로시인 마키무라 고를 영원히 존경할 것이며 또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이러한 시인을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추모하고 그리는 고치시의 마키무라 고협회의 회원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연변과 고치현, 연길과 고치시, 원래 아무런 인연이 없을 정도로 바다를 사이 두고 멀리 떨어진 일본과 중국의 두 편벽한 지역이 80년 전의 일본프롤레타리아 시인이 목숨을 내걸고 쓴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에 의하여 아름다운 연줄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인연을 귀중히 여기면서 앞으로 고치현과 연변의 더 많은 우호 교류와 왕래가 이어질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2.《간도빨치산의 노래》에 비추어본 우리의 프로시나 저항시
 
  마키무라 고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한 간도빨치산 대원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30년대 일제와 싸운 우리 연변조선족인민의 영웅적군상을 창조하였다. 물론 서정적 주인공은 함경도 출신 또는 조선반도 출신의 사람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수도 있다. 연변은 조선족인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반수 이상이 조선북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당시 간도의 항일운동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망라된다. 말하자면 북측 출신의 빨치산성원 뿐만 아니라 남측 계통의 사람들도 있었고 양정우를 사령으로 하는 중국공산당계통의 항일유격대도 있었다. 하지만 마키무라 고가 쓰고 있는 빨치산유격대가 어느 유격대인가 하는 것은 구태어 제기할 필요가 없다. 시인 자신도 이 시에서 간도빨치산 전사들은 “동방혁명군” 군기에 볼을 비비며 선서를 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시에서 말하는 “간도빨치산”은 국가와  민족의 계선을 초월한 오직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는 항일무장대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마키무라 고의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무산계급국제주의와 혁명정신으로 충만되고 있다.
  마키무라 고의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일본의 식민지인에게 있어서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성원을 얻을 수 있는 우렁찬 노래였고 비정의적인 대동아 전쟁을 통하여 주변국가에 아픔과 고통을 안겨준 일제에게 있어서는 한 자루의 비수 같은 것이었다. 하기에 일본당국은 1932년부터 시작하여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강행하였고 마키무라 고는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발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투옥되며 옥중고문으로 당하여 결국 26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조선반도 남북의 문학사와 중국조선문학사를 통괄하여 보아도 마키무라 고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는 비교적 큰 편폭으로 연변지역의 조선족인민들의 항일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 성원하고 긍정적인 반일혁명투사의 시적형상을 부각한 작품은 없다. 이를테면 조선반도 이북에서는 일제가 패망한 뒤인 광복 이후에야 비로소 조기천의 《백두산》같은 서사시가 나타났다. 이런 각도에서 볼때 마키무라 고의 서정서사시 《간도빨치산의 노래》은 동아세아 무산계급문학에서 반드시 대서특필하여야 할 작품임이 틀림없다.
  이상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서정서사시《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비롯한 마키무라 고의 일련의 반전시들은 아주 공개적으로, 또 아주 직설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면서 그에 항거해 나서 싸우는 간도 빨치산을 정면적 서정서사적인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부각하였다. 공산주의사상중의 무산계급국제주의에 철저히 립각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민족과 국가를 배반하고 목숨을 걸고 식민지인민들의 반일투쟁을 구가하고 일제의 대외침략전쟁을 비판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등 일련의 시작들에서 보여준 저항정신은 아주 대단하다고 평가해야 할것이다.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나아가서는 전반 조선반도 식민지시대 문학에서의 저항시를 비추어 보는 하나의 선명한 거울로 될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저항시 전반이 아니라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중요한 저항시인이라고 할수 있는 윤동주를 마키무라 고라는 이 거울에 비추어 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간도지방에서 1930년대 초반부터 항일대오내서 불려졌던 민중들의 〈적기가〉,〈반일전가〉등 수많은 항일가요나〈혈해지창〉같은 항일연극 같은데서는 반일정서, 사상, 주장 등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출되였다. 그러나 일제의 엄혹한 언론, 문자검열 제도하에서 공개적인 언론매체를 통한 반일정서, 사상, 주장 등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출한 가능성이 없는 상황하에서 시를 포함한 거의 절대 부분의 메타포나 상징이나 해 암시적으로 표현되었을 따름이였다. 이를테면 한룡운의 〈님의 침묵〉(1926)같은 데서는 그의 조국애와 불굴의 반일독립정신이 불교적인 명상의 상징적수법을 통해 암묵적으로 표현되였다. 그리고 저항시인이라고 평가를 받 받기도 한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의 많은 작품도 많은 경우에 식민지시대의 한 지식청년의 고독하고 우울한 정서를 암묵적으로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에서 표현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정항정신과는 궤를 달리한다. 윤동주의 전반 시에서는 저항이라기보다는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력사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정신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이 명렬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고 평가를 할수 있다. 이는 마키무라 고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윤동주의 시집은《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중의 많은 시작들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잠재창작의 형태를 취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공개출판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시작들이다. 이런 시작들에도 윤동주는 반일의 정서, 사상, 주장 같은 것을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시대라는 특정한 상황속에서의 윤동주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인 문제들에 관련 지음으로써 인간들의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건드려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윤동주의 시들은 마키무라 고의《간도빨치산의 노래》에서와 같은 치렬한 저항정신에는 닿지 못했으나 미적인 완성도를 보다 높혔다는 점에서 역시 높이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3.일본공산당원 이타 스케오를 통해 본 공산주의의 매력
 
  국제주의 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 마키무라 고가 《간도 빨치산의 노래》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필로 일제와 싸우고 간도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지, 성원했다면 다른 한 일본의 국제주의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인 이타 스케오(伊田助男)는 전쟁터에서 직접 총탄으로  싸우는 간도빨치산을 돕다가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마키무라 고우가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발표한지 1년 뒤인 1933년 3월, 일본침략군은 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왕청 반일유격근거지를 미친듯이 진공하였다. 왕청유격대와 항일구국군은 서로 배합하여 첨자산과 마반산 일대에서 일본을 매복습격하여 소왕청항일근거지를 건립한 뒤 첫 승전고를 울렸다. 이 전투에서 왕청의 항일군민들은 국제주의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인 이타 스케오(伊田助男)의 지원을 받았다. 항일유격대 전사들이 전장터에서 전리품들을 수습하다가 일본군대의 군용차 한대를 발견하였는데, 이 차에서 멀지않은 강변에서 일본 병사의 시체와 유서를 찾아냈다. 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었다.
 
친애하는 중국 유격대 동지들:
  나는 당신이 산골짜기에 뿌린 삐라와 선전품들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들은 공산당의 유격대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주의자들이며 동시에 국제주의전사들입니다. 나는 몹시 당신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당신들과 손잡고 공동의 적을 쳐부수고 십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파쇼놈들에게 포위되였습니다. 더는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내가 운송해온 10만발의 탄알을 귀군에 넘겨줍니다. 이 탄약들은 북쪽의 송림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이 탄알을 가지고 파쑈놈들을 조준하여 사격하십시오. 나의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은 영원히 살아있을 겁니다. 신성한 공산주의사업이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관동군 간도 일본 차중대
              일본공산당원 이타스케오
               1933년 3월 30일 
 
  1933년 4월, 이 국제주의전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소왕청 항일근거지에서는 이 마촌의 학교를 “이전(伊田)학교”라고 이름을 고쳤다.국제주의전사이며 일본공산당원인 이타 스케오가 희생된 유적지는 지금 왕청현 동광진 동립촌 동남쪽으로 약 4리 떨어진 동림하 남안의 평지이다. 그리고 “이전(伊田)학교” 유적징의 지리적위치는 지금의 왕청현 동광진 동림촌 동남쪽으로부터 약 4리 떨어진 판석산 동쪽의 밭 복판에 있다. 1994년 6월 14일 왕청현 동림소학교를 다시 “이전소학교”라고 개칭하게 되였다. 2004년 저수지를 수축하게 되면서 이 “이전소학교”가 왕청현 동광진중심소학교에 편입되여 들어가게 되면서 동광진중심소학교는 “이전소학교”라고 개칭하게 되였다.
 
4. 나가는 말
 
       마키무라 고와 이타 스케오 같이 자신이 속해 있는 민족과 국가를 배반하고 목숨을 걸고 식민지인민들의 반일투쟁을 구가하고 일제의 대외침략전쟁을 비판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인들 속에도 마키무라 고와 이타 스케오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하여 할 것이며 미상불 앞으로 이들의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난세기 30년대 마키무라 고와 이타 스케오 같은 일본공산당원들의 고매한 국제주의 정신을 리상과 신념이라는 이 령혼의 혼불이 경제와 돈이라는 이 강풍 앞에서 꺼질듯 말듯하는 위태로은 지경에 놓여있는 오늘날의 현실속에서 한번 쯤은 뒤돌아 보고 한번 쯤은 곱씹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2013년 1월 10일 연길에서
김정웅(연변대학교 일본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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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망향
날자:2013-03-20 00:01:32
곧 《간도빨치산의 노래》전문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연변문학 2013년 제2기와 제3기에 실렸던 글입니다.
연변문학 2기에 조선글로 된 원문이 실려있습니다.
1   작성자 : 궁금
날자:2013-03-06 09:33:4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간도빨치산의 노래》전문은 어디에서 볼수 있습니까?
읽어보고 싶은데요.그때 상황도 더 료해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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