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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도시와 동아세아 교류
2011년 11월 18일 18시 57분  조회:2131  추천:0  작성자: 망향

일본의 고대도시와 동아세아 교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우노다카오
번역:김정웅

1 머리말

  일본열도에 있어서 동아세아 여러 지역과의 문물교류는 구석기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빈번하게 진행되어 왔고 그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되어 왔다. 문명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도시건설에 관해서도 같은 배경 속에서 추이했다.
  도시의 정의는 여러 가지 있지만 5~10헥타르 이상의 규모, 밀집한 거주 와 계획적인 배치, 해자(垓字)와 성벽과 같은 도시의 내외를 구분 짓는 시설의 존재 등을 지표라고 할 때 , 일본렬도에는 야요이(弥生)시대의 환호집락(環濠集落)에 고대도시의 단서가 있으며 후지하라꾜(藤原京)·헤이죠꾜(平城京)·헤이안꾜(平安京)라고 하는 일본율령국가의 수도가 그 완성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일본열도의 고대도시는 연속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고 야요이(弥生)시대의 환호집락(環濠集落)이 한번 두절 된 다음 부활하는 과정을 경과하였다. 이 현상도 동아세아 교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2 환호집락(環濠集落)의 형성과 쇠태

  일본열도의 야요이시대 초기, 규슈(九州)북부에서 환호집락(環濠集落)의 건설이 시작되고 신속하게 일본서부와 일본중부에 퍼져나갔다. 후쿠오카(福岡)현의 이타츠키유적(板付遺跡)을 비롯하는 야요이환호집락(弥生環濠集落)의 해자(垓字)는 지형에 맞추었기 때문에 고정된 형식이 없고 동시대의 중국의 성시에서 보여지는 판축(版築)에 이용한 성벽축조기술이 없었다.
  야요이환호집락(弥生環濠集落)의 먼 기원은 중국섬서성강새(姜塞)유적과 반파(半坡)유적과 같은 신석기시대전반기의 계보를 이어, 직접적으로는 동북아세아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특히는 한국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검단리유적과 같은 환호집락의 직접적인 영향 밑에서 성립한 것이라고 보인다.
  야요이환호집락(弥生環濠集落)은 규모가 크고 다중의 해자(垓字)를 가지고 있거나 지금까지 조선반도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특색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환호집락이 조선반도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하남성정주상성(河南省鄭州商城)을 비롯하여 전국시대의 성시에 이르기까지 외성과 내성 혹은 대성과 소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고, 조선반도를 통하여 야요이환호집락의 다중환호(다중해자)설계와 어떠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야요이시대의 환호집락은 야요이시대를 계속하여 존재했지만 야요이후기에는 수가 줄어 야요이시대말기에는 거의 멸종했다. 그 결과, 내성·소성에 상당하는 작은 구화(区画)가 거관(居館)으로 독립하고 외성과 대성의 거주자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여 분산적으로 살게 되었다.
  이것은 야요이시대의 전란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만지만, 본격적인 환호집락은 최초로 건설되고 그 밀집 지대이던 규슈(九州)북부의 후쿠오카(福岡)평원에 있어서 가장 빨리 환호집락이 쇠퇴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두고 싶다. 후쿠오카(福岡)평원에서는 기원1세기를 중심으로 하여 전한경(前漢鏡)을 수입할 즈음에는 벌써 환호주락이 없어졌다. 그것을 대신하여 후쿠오카평원에 범위가 넓게 직선도로가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는 중국정사(한서)에 왜인이 파견한 사절이 처음으로 기록된 때이며 그 대부분은 규슈북부의 유력자가 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그 경에 왜가 100여개 국가로 나뉘어 통합하는 과정이었고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생각하기에는 힘들다.
  기원전1세기에 왜인이 사절을 파견한 전한(前漢)의 장안성(長安城)을 보면 그것이 전국시대까지의 성시와 크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전한의 장안성은 대규모이지만 그 대다수가 궁전지구였다. 그리고 종전의 외성·대성에 거주하고 있던 상공업자를 비롯한 일반민중은 주로 능읍(陵邑)등에 분산 거주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장안성에 거주하는 관중평원(関中平野)에는 장안과 마찬가지로 직선도로가 설계·건설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의 일본열도에 있어서 가장 고도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후쿠오카평원에 노예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들은 전한제국(前漢帝国)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들의 지배영역에서 재현할려고 했던것이 형태가 불정형적인 해자를 가진 환호집락을 버린 유력한 배경이었다고 추정하여 두고 싶다. 환호집락의 쇠퇴경향은 이러한 한제국 도성 정보의 전파와 채용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중국에서는 삼국시대이후 이방(里坊)을 가진 도성이 부활하지만 일본에서는 고분(古墳)시대를 통하여 서력6세기까지 궁전·거관을 독립시켜 건설하는 방식이 계속되었다. 이 시대는 중국주변의 여러 세력이 강장 독자적인 특색이 있는 경영을 한 시대이며 왜도 그 일례로 될것이다.

3 고대도성의 건설과 동아세아교류

일본열도에서는 서력7세기말에 이르러 본격적인 도성건설이 개시되었지만, 거기에는 동아세아교류 혹은 강대화한 수당제국을 축으로 하는 국제적인 긴장관계라는 배경이 존재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때까지의 일본열도의 유력자의 지배거점은 호족(豪族)의 거점이고, 그 정점에 대왕의 궁전이 있다. 그리고 대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궁전을 건설하는 것이 기본이었다(역대의 천궁). 이러한 존재방식을 일조일석에 고쳐서 도성을 건설하는 것은 당시의 지배층에 있어서는 어려운 일이 였고 비조(飛鳥)시대(서력6세기말~7세기)가 견수사(遣隋使)파견을 계기로 하는 중요한 준비기간이였다.
  비조시대의 최대의 변혁은 일시적인 오오사카·난파관(難波宮)에로의 이전을 예외로 하여, 궁전을 나라현(奈良県)남부·비조의 작은 공간에 고정한 것에 있다. 그 중요한 계기는 서력588년에 백제·고구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능하게 된 비조사(飛鳥寺)의 건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원래부터 인도·중국을 경유하여 동북아세아에 전파된 것이지만, 그 사회적인 위치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던 것 같다. 대당제국에 있어서는 불교가 중시되었던 시기도 있었는가하면 불교를 페기한 시기도 있었던 것에 비하여, 일본율령국가에서는 대개 일관하게 불교는 중요하게 여겨왔다. 또 발견된 사원과 사당의 수도 천개에 가깝고 국토의 크기에 비교하여 비상히 많은 수가 운영되었다. 이 것의 한가지 원인으로서, 비조사 건립이 율법국가건설의 기점의 하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조사는 백제 도래인 기술자가 주도하여 건설되었지만, 그 방위는 정방위이였을 가능성이 높고, 일본에서 최초로 되는 천문관측에 의한 정방위 사당 건설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조지역에는 이전부터 사행(斜行)하는 토지분할법이 있었지만, 7세기전반에는 정방위로 토지를 분할하는 궁전·사원을 정연히 배치했다. 이 것은 비조에 멈추지 않고 나라분지전체를 종단·횡단하는 정방위의 직선도로건설에 이어지고 그 후 도시건설의 기준선으로 되었다.
  690년에 착공하여 694년에 천도한 후지하라꾜(藤原京)는, 일본의 처음으로 되는 본격적인 도성이다. 후지하라꾜(藤原京)에 대한 조사가 친전된 결과, 과거의 복원안이 부정되였으며, 그것은 헤이죠꾜·헤이안꾜를 초과하는 크기의 정방형이며, 동서·남북 각각 아홉 갈래의 대로로 10×10의 지구로 분할하여 중앙에 궁을 배치하고 있다.
  후지하라꾜는 당나라의 장안성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동아세아 율령국가는 도성을 건설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하지만, 후지하라꾜와 같은 설계를 하는 것은 그 일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일본과 당나라·신라는 군사적인 대립상태에 있고, 견당사의 파견이 중단되여 있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장안성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중국의 고전인 ‘주례(周礼)’에 그려져 있는 이상의 도시를 기준으로 설계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후지하라꾜는 일본이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패한 후, 내란을 거쳐 정치권력의 통일이 실현되는 중에 건설한 것이다. 그것은 동아세아 여러 세력이 수당제국에 대항하여 가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사회체제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율령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나는 당시 장안성의 정보가 결핍한 것이 아니라, 당의 책봉체제 밖에 있는 나라소서 독자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한, 하나의 상징인 의미로서 후지하라꾜를 설계·시공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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