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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 13주기를 맞으며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떠났다며, 선생의 영전 앞에서 울먹이며 조사를 읽으셨습니다.
그 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자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은
사람에겐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원주의 그 잡초가 무성한 집은 군부독재 하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지친 동지들이
찾아가는 오아시스였고, 선생님은 언제나 상처받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의 손이셨습니다." 자신을 다스리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 선생이 저희 곁을 떠난지가 벌써 13년이 되기에,
선생께서 남기신 난초 그림들을 통해 선생의 가르치심을 돌이켜봅니다.
선생은 1928년 원주시 평원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전에 여러가지 호를 사용하셨으나, 가장 알려진 호는 70년대에 사용한 '무위당'과 80년대에 사용한 좁쌀 한 알
('일속자, 一粟子')입니다.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40년 원주초교를 마치고 배제고·경성공전(현 서울공대)에 입학했지만, 해방 후 미군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됐습니다. 난을 치며 마음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원주가 '7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되는
산파 역을 묵묵히 수행하셨습니다. 기억합니다. 그리고 80년대에 광주가 있었듯 70년대에는 원주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신독재 시절에 있었던 천주교 원주교구의 선구적 저항, 가톨릭농민회의 민중운동을
선생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유인태·이철 등이 공산주의 단체로 부터 공작비를 받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내가 학생 단체에 돈을 줬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활동 자금이었다, 공산주의 단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공산주의라니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여론이 들끓었고, 유신정권은 학생들을 먼저 석방하고 며칠 후 지학순 주교도 석방했습니다. 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지 주교님이 나서주 셔야겠습니다'라며 눈물로 호소했고, 지 주교는 선생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감옥으로
갔습니다.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면서, 6월항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생명운동의 창시자이십니다. 그러나 선생의 생명사상은 혁명론에서 출발합니다. 폭력으로 상대방을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니다. 그래서 선생에게 난치는 마음을 배우고 생명사상을 배운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 '남'에서 "혁명은 보듬는 것, 혁명은 생명을 한없이 보듬는 것" 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챙기시고, 그들의 기쁘고 슬픈 일을 모두 들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당하자 주신 작품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밥집하는 아주머니가 한문을 잘 모르실 것 같아 다른 종이에 해설을 써주셨고, 이영순이라는 분은 용기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선생의 섬세함과 자상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자식이고 동생이었습니다. 아는 아주머니 돈을 훔친 소매치기를 찾아 돈을 돌려
주게 하고는, 영업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밥과 술을 사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당 난'의 특징이고 선생의 마음입니다. 난으로 되게 해서, 시나브로 난이 사람의 얼굴로 되다가 이윽고는 그리고 부처와 보살의
얼굴로 되게끔 쳐보는 게 내 꿈일세." - 무위당 장일순 어록 중에서
치셨고, 글의 내용도 받을 사람에게 어울리는 내용을 써주셨습니다.
선생은 말년에 노자에 심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자적인 그림과 경귀를 많이 쓰셨고,
노자에 대한 책도 출판하셨습니다. 이런 선생의 모습을 리영희 교수는 이렇게 회상하셨습니다.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은 인간도 자연의 현상이지 자연과 대립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성찰에 따라 자연과 무한으로 합일하고 살아가는 아주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지극히 어려운 것을 체현한 삶이지요." - 리영희·<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소식지 제2호에서(2001년 11월 1일) 그래서 선생의 집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이 작품은 혜선보살이라는
분에게 국화주 한잔 마시고 그려주셨습니다.
온 몸으로 받아 실천하여 온 독가였던 선생은, 무엇보다도 진인이었다." - 김성동(소설가) 성기의 모습을 만들며 "광주 민주화 세력이 원주보다 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께서도 손으로 여자 성기의 모습을 만들며, "이보게, 여기에 이것이 들어가면 어느 것 하나 살아나
올 수 없어. 뭔 소리하는 거여?"라며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 작품의 화제는 '날마다 날마다 세 가지 반성하면서 마음을 씻는구나'입니다. 그래서 난의 모습도 반성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선생은 난이나 글씨를 파신 적이 없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반가워 그려주시고, 써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이 찾아와 운동자금 마련하려 한다고 부탁드리면 몇 장이라도
흔쾌히 그려주시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서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고, 매해 추모행사를 열며 선생의 가르침을 회상합니다. 올해 5월 22일에도 어김없이 추모행사가 열리고, 행사 후에는 문화행사도 곁들입니다.
다시 한번 무위당 장일순 성생님의 영전에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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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문스크랩] 그가 그린 건 '난'이 아닌 '사람'|작성자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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