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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하이퍼 시집을 내면서> 김규화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의미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의미’라는 말은 ‘언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의미는 언어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물에 붙은 의미이고
그 의미는 관념으로 성장한다.
위의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언어 수의 한계가 모든 사물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학· 과학 기호도 생겼으며, 언어 예술인 시에서는 비유가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
과거 유아시절의 꿈 같은 아름다운 기억과 철학자의 심오한 사유 등은 언어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언어가 연결시켜 주지 못할 적에는 기억하거나 사유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
찍이 프로이트가 하였다.
언어는 언어 자체로는 홀로 설 수 없다. 어디까지나 사물에 꼭 붙어서야, 혹은 관계되어서야 비로소 선다. 세상
이 처음 열릴 때 사물이 있었고, 후에 언어가 있었다고 구약성서에서는 말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만들고 아담
이 언어로써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인간 세계에서 언어란 무엇일까. 20세기 전반의 초현실주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는 그의 시에서, “만약 낱말(즉
언어)이라는 것이 마치 봉투나 포장지에 붙은 우표처럼 사물에 붙은 딱지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먼지
와 몸짓 뿐이며 이 세상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고 읊었다. 사물에 붙은 ‘딱지’는 사물 자체도 아니고 사
물의 성질과도 일치할 수 없는 다분히 형식적이고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떼내버려도 되는 ‘먼지’나 ‘몸짓’ 같은
하찮은(?) 것이겠다.
먼지나 몸짓은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소리)으로 이루어진 기호이고 그러한 기호는 언어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 언어로써 시를 쓴다.
언어가 없는 시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언어의 두 요소 중의 하나인 시니피앙 즉 소리(청각
영상)를 너무 홀대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내 시는 무거운 의미로 뒤덮였었다. 가령 고독, 불안, 생명 같은 관념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가치한 관념의 압력이 너무 많다. 그러한 의미를 시에서 가급적 빼고 싶다. 사물의 본래적이고
적나라한 이미지는 언어라는 형식을 벗어나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음악의 선율이 아니고 미술의
선과 색채가 아니며 오직 언어일진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 나는 단지 그런 무의미의 상태를 동경하
는 것 만으로 나의 시작 태도는 성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 대만의 한 시낭송회에서 중국어 시 낭송을 들을 때, 뜻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소리의 사성인 평·상·거·
입성과 어조만으로도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가끔씩 틀어 놓고 귀에 익숙한 우리 말의 의미를 빼
버리고 소리만 듣는 시도를 해보거나 혹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어의 화면을 보면서 ‘소리’만 듣는 즐거움
도 맛본다.
나는 될 수만 있으면 모든 존재의 기표로 시를 쓰고 싶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하는 시니피앙, 즉 ‘소리 이미지’로 쓰고 싶다. 기표의 동일성 (예를 들어 ‘등’은 등불, 등꽃,
사람의 뒷등 등)의 연결은 하이퍼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성 없이 현실
세계와 상상(혹은 가상) 세계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리좀을 만들고 구절과 구절, 행과 행, 연과 연의
단위로 다층적 구성을 이루는 (나의) 하이퍼시가 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오늘날, 사람들은 아날로그적인 자연을 떠나 환상적인 가공세계의 마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인터넷이나 TV 등이 보여 주는 하이퍼적 세계에 모두 미혹되어 있다. 시도 하이퍼적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은 시대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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