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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의 현대시(現代詩)
문 덕 수 (文德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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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내용(內容)은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이다. 정서는 감화적(感化的) 요소(要所)로서, 유기체(有機體)의 전신적(全身的) 감각(感覺)이지만, 사상은 지각(知覺), 지식(知識), 신념(信念), 의견(意見)의 종합물(綜合物)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效用)이 궁극적(窮極的)으로는 감동(感動)과 쾌락(快樂)에 있으므로, 사상은 어디까지나 종속적(從屬的) 요소다. 그것은 언제나 정서와 융합(融合)이 되어 나타난다. 간혹 사상이 중시(重視)된 시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외다. 만약 사상 위주(思想爲主)의 시가 있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시의 형식(形式)을 빈 철학적(哲學的), 수상적(隨想的) 단편(斷片)일 것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시로서 족하다. 아무리 위대(偉大)하고 심원(深遠)한 사상일지라도, 정서와 융합된 것이라야 한다. ‘시는 사상의 정서적(情緖的) 등가물(等價物)’이라는 엘리어트의 말은 이 점에서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다.
시의 정서는 일정 불변(一定不變)의 것이 아니다. 정서의 차이(差異)는 한이 없다. 생리(生理)에 따라, 또 그 시가 생산(生産)된 당대(當代)의 여건(與件)에 따라 천차 만별(千差萬別)이다. 이것이 정서(情緖)의 주관성(主觀性)이다. 그리고, 시의 참신성(斬新性)과 독창성(獨創性)도 여기서 나타난다.
한국(韓國)의 현대시(現代詩)에서 그 정서가 가장 불건전(不健全)하고 병적(病的)인 것을 찾는다면, 1920년 전후의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시일 것이다. ‘폐허(廢墟)’와 ‘백조(白潮)’를 중심 무대(中心舞臺)로 대량 생산(大量生産)된 이 무렵의 정서는 감상주의(感傷主義) 바로 그것이다. 비애(悲哀), 눈물, 애수(哀愁), 울분(鬱憤), 탄식(歎息), 절망(絶望) 등이 그 당시(當時)의 정서의 목록(目錄)이다.
검은 옷을 해골(骸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톳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生命)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莊嚴)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敬虔)한 주토(朱土)의 거리
해골(骸骨)! 무언(無言)!
번쩍이는 진리(眞理)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박 종화(朴鍾和)의 ‘사(死)의 예찬(禮讚)’에서>
이러한 죽음의 예찬(禮讚)은 그 일례(一例)에 지나지 않는다. 박 영희(朴英熙)의 ‘유령(幽靈)의 나라’와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이 상화(李相和)의 ‘나의 침실(寢室)로’와 ‘이중(二重)의 사망(死亡)’, 그리고 홍 사용(洪思容)의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등은 이 무렵의 정서(情緖)의 극단(極端)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정(詩情)은 불가피(不可避)한 역사적(歷史的) 요청(要請)의 산물(産物)이었다. 3‧1 독립 운동(三一獨立運動)의 실패(失敗)로 인하여 조국(祖國)의 현실(現實)은 암담(暗澹)해졌다. 유럽의 낭만주의(浪漫主義)의 말기적(末期的) 증세(症勢)가 조수(潮水)처럼 밀려 왔다. 실의(失意)와 비탄(悲歎)에 잠긴 젊은 기질(氣質)은 그것들에 쉽게 동화(同化)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불행한 감상적(感傷的) 낭만주의의 포로(捕虜)가 되어 버렸다. 방법의 발견이나 사상의 확립(確立)을 위한 생(生)의 재인식(再認識)이 실행(實行)되지 못한 채 낭만적(浪漫的) 격정(激情)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이러한 낭만주의 시의 감상(感傷)과 대극적(對極的)인 것이 주지시(主知詩)의 정서다. 주지시는 낭만적 감정(感情)과 음악성(音樂性)을 배격(排擊)하고, 이미지와 지성(知性)을 중시(重視)한다. 이미지는 비유(譬喩)에 의하여 형성된 언어(言語)의 회화성(繪畫性)이다. 지성은 감정을 억제(抑制)하고 조절(調節)한다. 주지시의 무기(武器)는 정열(情熱)과 결부(結付)된 상상력(想像力)이 아니라, 지성과 결부된 ‘환상(幻想)’이다. 이것이 1930년대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이론(理論)이며, 그것은 그대로 흄, 파운드, 엘리어트 등의 영미(英美) 주지주의의 이론이기도 하다.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 정부(亡命政府)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急行列車)가 들을 달린다.
<김 광균(金光均)의 ‘추일 서정(秋日抒情)’에서>
‘낙엽’이 죽음이나 인생에 비유(譬喩)되지 않고, ‘망명 정부의 지폐’에 비유되었다. ‘길’과 ‘넥타이’의 유추(類推)도 참신(斬新)하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浪漫主義)와는 이질적(異質的)인 신선(新鮮)한 감각(感覺)을 느낄 수 있다. 시각적(視覺的) 이미지의 효과(效果)를 거두고 있다. 감정의 대량 방출(大量放出)도 억제(抑制)되고, 사물(事物)을 보는 태도(態度)도 다소 객관적(客觀的)이다. 김 광균(金光均)의 ‘외인촌(外人村)’에는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소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는 직유(直喩)와 은유(隱喩)가 겹쳐 있고,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사상이 스며들 여지(餘地)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주지시는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처지(處地)에서 ‘방법의 지각(知覺)’을 가지려 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劃期的)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基礎)가 되는 인생관(人生觀)과 세계관(世界觀)에 대한 인식(認識)이 없었다. 고전주의적(古典主義的)인 생(生)의 자각(自覺)이 없었다. 방법의 발견과 생의 자각은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동일(同一)한 것이다. 이것이 분리(分離)되어 강조(强調)될 때 기형(畸形)이 탄생(誕生)한다. 기형은 미숙(未熟)을 의미(意味)한다. 그리고, 시의 회화성(繪畫性)을 주장(主張)하면서도 시가 ‘언어(言語)의 예술(藝術)’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회화성이 한계(限界)에 부딪혔을 때 또 다른 감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의 주지시는 부분적 성과(成果)밖에 가두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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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언어는 음성(音聲)과 의미(意味)의 결합체(結合體)다. 또, 의미에는 형상(形象)이 있다. 음성은 음악(音樂)으로 통하고, 의미, 즉 개념(槪念)은 철학(哲學)으로, 형상은 그림으로 접근(接近)한다. 음성만을 강조할 때 순수시(純粹詩)가 되고, 형상만을 강조할 때 순수(純粹)한 회화시(繪畵詩)가 된다. 그리고, 개념만을 강조할 때 철학시(哲學詩)나 관념시(觀念詩)가 된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므로, 이 세 부분은 종합(綜合)되어야 한다. 만약 극단적(極端的)으로 분리되어 강조된다면, 시 자체의 본질(本質)에서 멀어지게 된다.
개념을 강조하는 시는 목적 의식(目的意識)을 가지기 쉽다. 그런 시는 자칫하면 선전(宣傳)이나 계몽(啓蒙)의 수단(手段)으로 타락(墮落)하기 쉽다. 감화적 요소인 정서(情緖)는 종속적(從屬的)인 것이 되거나 사상의 의상(衣裳)밖에 되지 않는다. 1925년 무렵의, 생경(生硬)하고도 조잡(粗雜)한 목적시(目的詩)가 그 표본(標本)이다. 6‧25 이후의 참여시(參與詩)도 그런 함정에 빠질 위험성(危險性)이 있었다.
조국이 외세(外勢)의 말굽 아래 신음(呻吟)할 때, 시가 애국 운동(愛國運動)에 참여(參與)함은 역사적(歷史的) 요청이다. 또, 시인이 그 시대에 대한 책임감(責任感)을 통절(痛切)히 느낄 때, 시가 사회에 참여함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 경우(境遇)에도 시는 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범(平凡)한 사실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시를 택할 것이냐, 조국을 택할 것이냐 하는 물음은 우문(愚問)에 불과하다. 문제는 애국적(愛國的) 정열과 사회적(社會的) 책임감이 시정(詩情)으로 승화(昇華)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데 있다. 시정이 영역(領域)은 한이 없다 애국적 정열과 사회적 책임감도 고귀(高貴)한 정서(情緖)다. 시정의 고상(高尙)한 영역에 속한다. 시의 사회적 참여에는 한계(限界)가 잇는 것이다.
목적시나 참여시의 대극(對極)에 순수시(純粹詩)가 있다. 순수시는 개념(槪念)까지 거세(去勢)하지는 않으나, 정치적(政治的) 목적 의식(目的意識)은 반대한다. 시는 언어의 예술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주옥(珠玉) 같은 언어의 조탁(彫琢), 청징(淸澄)하고 섬세(纖細)한 정서(情緖)의 순화(純化), 미묘(微妙)한 음악 등은 시를 예술의 위치(位置)에 올려 놓은 것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뗘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 윤식(金允植)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정치적 목적 의식(目的意識)은 전연 없다. 정서의 투명(透明)한 순화와 언어의 본연(本然)의 미감(美感)이 반짝일 뿐이다. 윤 선도(尹善道) 이후 잠시 가라앉았던 한국의 시정이 여기서 다시 발흥(發興)한 셈이다. 순수시(純粹詩)는 정서의 진수(眞髓)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력(魅力) 있는 정서의 결정(結晶)임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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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발전은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기대(期待)할 수는 없다. 돌연 변이(突然變異)는 희귀(稀貴)한 예외다. 의식적(意識的)이건 무의식적(無意識的)이건 간에 전통(傳統)에 접맥(接脈)되어서 비로소 가능(可能)하다. 아직도 한국시(韓國詩)의 주류(主流)는 전통적(傳統的)인 시에 있다고 하겠다.
김 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은 고려 속요(高麗俗謠)인 ‘가시리’에 접맥(接脈)되어 있다. ‘가시리’에 담겨 있는 차원(次元) 높은 이별(離別)의 정한(情恨)은 ‘진달래꽃’에 와서 극한 상황(極限狀況)을 보여 준다. 설움, 눈물, 이별, 사랑 등의 정한은 민족의 보편적(普遍的) 정서(情緖)에 닿아 있다. 그러나, 그의 정서는 건강(健康)한 것이 못 된다. 감상의 색조(色調)를 띠고 있다. 또, 소극적(消極的)이다. 어떻게 냉혹(冷酷)한 이 현대(現代)를 감당(勘當)해 나갈지 의문(疑問)이다. 그리고, 그의 율조(律調)는 민요조(民謠調)이며, 사상적(思想的) 기반(基盤)은 유교적(儒敎的) 휴머니즘이다. ‘산유화(山有花)’에서조차 완전한 자연 귀의(自然歸依)를 성취(成就)하지 못했다. 그는 이 백(李白)에게보다 두 보(杜甫) 쪽에 더 접근(接近)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불행하였다.
전통에 접맥된 일군(一群)의 시인으로서 세칭(世稱) 생명파(生命派)와 청록파(靑鹿派)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40년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시사상(韓國詩史上)의 2대 산맥(二大山脈)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에게 오면 정서와 사상이 일체(一體)가 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편협성(偏狹性)이 적다. 한국시의 원숙(圓熟)한 일면을 보게 되는 기쁨이 있다.
생명파의 두 시인은 유 치환(柳致環)과 서 정주(徐廷柱)다. 이 둘은 초기(初期)에는 다 같이 니이체와 보들레르의 문전(門前)에 열심히 드나들었다. 이리하여, 이 둘의 기조(基調)는 우연(偶然)히도 생명 의식(生命意識)의 앙양(昻揚)이라는 점에서 일치(一致)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共通的)인 출발점(出發點)은 낭만주의(浪漫主義)다. 유 치환의 초기 시는 문명(文明) 이전의 건강(健康)한 원시적(原始的) 생명(生命)의 희구(希求)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다가, 동양적(東洋的)인 무위(無爲)와 허정(虛靜)의 세계를 거쳐 간다. 그는 한국 현대시(韓國現代詩)의 허무(虛無)와 의지(意志)라는 새로운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였다. 니이체보다는 보들레르에 더 심취(心醉)된 서 정주는 원죄(原罪)의 업고(業苦)를 짊어진 육성(肉聲)의 몸부림을 쳤고, 그것을 한동안 겪자 동양(東洋)의 숲 속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후(最後)로 안착(安着)한 곳이 불교(佛敎)와 신라(新羅)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春香)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서 정주(徐廷柱)의 ‘춘향 유문(春香遺文)’에서>
이 시의 소재(素材)와 동기(動機)는 물론 우리의 고전(古典)이지만, 그 사상은 불교다. 특히, 불교의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정은 불교라는 종교 사상(宗敎思想)과 융합(融合)되어, 새로운 서정(抒情)의 변경(邊境)을 개척(開拓)하고 있다. 그는 ‘꽃밭의 독백(獨白)’이라는 작품에서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 앞에 섰을 뿐이다.”하고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바로 우리 시의 한 지평선(地平線)을 열고 있는 그 지난(至難)한 몸짓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현대시에 푸르고 아스라한 고도(高度)와 몸서리치는 유현(幽玄)한 심도(深度)를 더하고 있다.
생명파와 가까우면서도 조금 먼 듯이 보이는 일군(一群)의 시인은 청록파다. 박 목월(朴木月), 박 두진(朴斗鎭), 조 지훈(趙芝薰)은 모두 자연(自然)에 귀의(歸依)해서 각기 특색(特色)이 있는 산수도(山水圖)를 그려 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자연파(自然派)라고도 한다. 박 목월의 향토색(鄕土色)이 짙은 순수(純粹)한 산수(山水)의 서경(敍景), 박 두진의 기독교적(基督敎的)인 정결(淨潔)한 갈망(渴望)이 착색(着色)된 청산(靑山), 조 지훈의 선미(禪味)가 깃들인 고아(古雅)한 풍류(風流)는 가히 당대의 일품(逸品)이라 할 만하다. 지금까지 우리 시사(詩史)에는 자연 그 자체를 노래한 시는 없었다. 반드시 인생과 관계(關係)되어 표현되었다. 그런데, 청록파에 와서 비로소 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서 독립(獨立)된 의미(意味)와 정서(情緖)를 가지고 표현된 것이다. 한국의 신문학사(新文學史)를 통해서, 한국의 ‘자연’이 실재(實在) 그 자체로서 부각(浮刻)된 것은 청록파의 공로(功勞)라 하겠다. 이 밖에도 신 석정(辛夕汀), 김 용호(金容浩), 신 석초(申石艸), 박 남수(朴南秀), 김 현승(金顯承) 등의 작품에는 각기 특이(特異)한 시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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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현대시의 한 분수령(分水嶺)이었다. 사변(事變)을 계기(契機)로 하여 현대시는 참여시(參與詩), 순수시(純粹詩), 전통시(傳統詩), 주지시(主知詩) 등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시의 구조면(構造面)에서도 큰 변혁(變革)이 일어났다.
참여시란, 시의 사회 참여(社會參與)를 조장(助長)하는 현실주의 시(現實主義詩)를 말한다. 시인도 사회에 적극(積極) 참여하여, 사회적(社會的) 책임(責任)을 지고 시대의 증인(證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여시는 현실(現實)에 대한 비판(批判), 저항(抵抗), 고발(告發)의 내용을 담게 된다. 참여시와는 대극에 서는 것이 순수시(純粹詩)다. 이에는 객관적(客觀的) 순수시와 주관적(主觀的) 순수시가 있다 객관적 순수시는 낭만적(浪漫的) 주정(主情)을 배제(排除)하고, 참신(斬新)하고 선명(鮮明)한 이미지를 중시한다. 1934년부터 일어난 이 땅의 주지주의를 계승(繼承)한 것이다. 주관적 순수시는 심층 심리(深層心理)의 이미지를 포착(捕捉)하는 데 주력(注力)한다. 이상(李箱) 이후의 또 다른 내면 세계(內面世界)의 미학(美學)이 대두(擡頭)된 것이다. 객관적 공간(空間)과 객관적 시간(時間)의 질서(秩序)를 뒤엎고 내면 세계의 질서를 창조(創造)하는 것이다. 목적 의식이나 개념(槪念)을 배제하려고 하는 점에서 객관적 순수시와 같다.
전통시는 김 소월 서 정주, 박 목월 등의 정서(情緖)를 이어받고 있다. 멀리 고려 속요(高麗俗謠)와 향가(鄕歌)에까지 닿는다. 전통적 정서가 어떻게 현대화(現代化)하느냐가 큰 문제가 된다. 이와 상반(相反)되는 곳에 주지시가 있다. 영미(英美) 주지주의를 도입(導入)한 새 경향(傾向)이다. 기지(機智), 의식(意識)의 흐름, 패러디 등의 다양(多樣)한 방법이 실험(實驗)되고 있다.
6‧25 사변 이후의 특이한 현상(現象)은 시 구조(詩構造)의 변혁(變革)이다. 종래(從來)의 평면적(平面的)인 시가 입체적(立體的)인 시로 변화했다. 또, 종래의 무시간적(無時間的)인 것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가 공존(共存)하는 시간성(時間性)으로 변했다. 장시(長詩)도 많이 생산되었다. 시 속에 이야기 줄거리도 도입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현대시를 갈망(渴望)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내용을 요구한다. 방법과 내용의 혁신(革新)이 없이 새로운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의 창조는 과거의 시에 대한 반역(反逆)이요 모험(冒險)이다. 미래에 대한 창조적(創造的) 정열에 의거(依據)한 부정 정신(否定精神)이 필요한 소이(所以)다.
[출처] 한국(韓國)의 현대시(現代詩)/문덕수|작성자 진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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