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全景)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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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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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잎의 여자(女子) 1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女子),
그 한 잎의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
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여자(女子)만을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女子), 눈물 같은 여자(女子), 슬픔 같은 여자(女子), 병신(病
身) 같은 여자(女子), 시집(詩集) 같은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
는 여자(女子), 그래서 불행한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女子).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버스정거장에서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새
커튼 한쪽의 쇠고리를 털털털 왼쪽으로 잡아당긴다 세계의 일부가 차단된
다 그 세계의 일부가 방 안의 光度를 가져가버린다 액자속에 담아놓은 세계
의 그림도 명징성을 박탈당한다 내 안이 반쯤 닫힌다 닫힌 커튼의 하복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다른 한쪽 커튼을 쥐고 있는 내 손이 아직 닫히지 않
고 열려 있는 세계에 노출되어 있다 그 세계에 사는 맞은편의 사람들이 보
이지 않는다 집의 門들이 닫혀 있다 열린 세계의 닫힌 창이 하늘을 내 앞으
로 반사한다 태양이 없는 파란 공간이다 그래도 눈부시다 낯선 새 한 마리
가 울지 않고 다리를 숨기고 그곳에 묻힌다 봉분 없는 하늘이 아름답다
거리의 시간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사내가
간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의 모가지 하나가
여러 사내 어깨 사이에 끼인다
급히 여자가 자기의 모가지를 남의 몸에
붙인다 두 발짝 가더니 다시
사람들을 비키며 제자리에 붙인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여자의
핸드백과 한 여자의 아랫도리 사이
하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주전자가 올라붙는다 마리아의 한쪽 가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놀란 여자 하나
그 자리에 멈춘다 아스팔트가 꿈틀한다
꾹꾹 아스팔트를 제압하며 승용차가
간다 또 한 대 두 대의 트럭이
이런 사내와 저런 여자들을 썩썩 뭉개며
간다 사내와 여자들이 뭉개지며 감동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든다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이 시대의 순수시
자유에 관해서라면 나는 칸트주의자입니다. 아시겠지만, 서로의 자유를 방
해하 지 않는 한도 안에서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
기 위해 남몰래(이 점이 중요합니다.)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법은 나는 사
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자유를 사랑하므로, 세상의 모든 자유도 나의 품 속에서 나를
사랑 합니다. 사랑으로 얻은 나의 자유. 나는 사랑을 많이 했으므로 참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자유,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자유, 금주의 운세를 믿는 자유, 운세가 나쁘면 안 믿는 자유, 사기를
치고는 술 먹는 자유, 술 먹고 웃어 버리는 자유, 오입하고 빨리 잊어 버리
는 자유.
나의 사랑스런 자유는 종류도 많습니다. 걸어다니는 자유, 앉아다니는 자
유(택시 타고 말입니다). 월급 도둑질 상사들 모르게 하는 자유, 들키면 뒤
에서 욕질하 는 자유, 술로 적당히 하는 자유, 지각 안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봉급 봉투 털 어 기세 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자유, 찰칵찰칵 택시
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자유,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남
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자유.
이 세상은 나의 자유투성이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팔아서 공순이의 옷을
벗기는 자유, 시대라는 말을 팔아서 여대생의 옷을 벗기는 자유, 꿈을 팔아
서 편안을 사 는 자유, 편한 것이 좋아 편한 것을 좋아하는 자유, 쓴 것보다
달콤한 게 역시 달 콤한 자유, 쓴 것도 커피 정도면 알맞게 맛있는 맛의 자
유.
세상에는 사랑스런 자유가 참 많습니다. 당신도 혹 자유를 사랑하신다면
좀 드 릴 수는 있습니다만.
밖에는 비가 옵니다.
시대의 순수시가 음흉하게 불순해지듯
우리의 장난, 우리의 언어가 음흉하게 불순해지듯
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미망(미망), 무의미한 순결의 뭄뚱이, 비의
몸뚱이들……
조심하시기를
무식하지도 못한 저 수많은 순결의 몸뚱이들.
호수와 나무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와
귀는 접고 눈은 뜨고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개 한 마리
물가에 앉아 있다
사내는 턱을 허공에 박고
개는 사내의 그림자에 코를 박고
건너편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는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하늘과 두께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허공과 구멍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새가 지붕에 앉으면 새의 속도의 끝이 됩니다 허공은 새가 앉은 지붕이 됩
니다
지붕 밑의 거미가 됩니다 거미줄에 날개 한쪽만 남은 잠자리가 됩니다
지붕 밑에 창이 있으면 허공은 창이 있는 집이 됩니다
방 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남자의 발바닥이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
가 됩니다
침대 위의 벽에 시계가 있으면 시계가 되고 멈춘 시계의 시간이 되기도 합
니다
사람이 죽으면 허공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 들어갈 관이 되고 뚜껑이 꽝 닫히는 소리가 되고 땅속이 되고
땅속에 묻혀서는 봉분이 됩니다
인부들이 일손을 털고 돌아가면 허공은 돌아가는 인부가 되어 뿔뿔이 흩어
집니다
상주가 봉분을 떠나면 모지를 떠나는 상주가 됩니다
흩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페트병과 신문지와 누구의 주머니에서 잘못 나온
구겨진 천원짜리와 부서진 각목과 함께 비로소 혼자만의 오롯한 봉분이 됩
니다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틈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허
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강과 둑
강과 둑 사이 강의 물과 둑의 길 사이 강의 물과 강의 물소리 사이 그림자
를 내려놓고 서 있는 미루나무와 미루나무의 그림자를 몸에 붙이고 누워있
는 둑 사이 미루나무에 붙어서 강으로 가는 길을 보고 있는 한 사내와 강물
을 밟고서 강 건너의 길을 보고 있는 망아지 사이 망아지와 낭미초 사이 낭
미초와 들찔레 사이 들찔레 위의 허공과 물 위의 허공 사이 그림자가 먼저
가 있는 강 건너를 향해 퍼득퍼득 날고 있는 새 두 마리와 허덕허덕 강을 건
너오는 나비 한 마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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