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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2015년 09월 17일 20시 46분  조회:6541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장춘식

 

  1. 들어가면서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후 현재까지 윤동주와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300편을 넘는 윤동주 관련 론저1)들중에서도 이민문학적 시각에서 그의 문학을 조명한 론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조선족의 현대문학이 이민문학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민문학의 시각에서 윤동주의 문학을 재조명하는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서사문학과는 달리 시문학은 이민문학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윤동주의 경우는 물론 이민지인 룡정의 명동 출생으로 이민 2세가 되기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고 할수도 있다. 그의 작가적립장이 이민자인것은 물론이려니와 대부분의 인생체험 역시 이민지에서의 삶이 되기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그의 다수 작품은 이민체험에서 비롯되였고 이민자의 정서를 담고있거나 인류 공동의 정서를 담고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1917년 12월 30일 명동출생, 1931년 명동소학을 졸업, 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 공부를 1년 수학, 1932년 은진중학 입학, 1935년 3학년을 마칠즈음 평양 숭실중학 1년 재학, 1938-1942년 연희전문 4년, 1942-1943년 일본 닛교대학, 동지사대 영문과, 1943-1945년 후꼬오까 형무소, 옥사. 이런 리력을 년도순에 따라 계산해보면 이민지에서 출생했으나 평양과 서울에서 5년, 일본에서 3년 하여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모두 8년간2)이나 된다. 그것도 윤동주의 짧은 생애에서 사춘기와 성숙기의 대부분 시간을 한국이나 외국에서 보낸셈이다. 게다가 그의 다수 시들은 이 시기에 씌여졌다. 원래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중성을 가지기 마련인데다 이처럼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길기때문에 아무리 이민지 출생자라 해도 작품의 이민문학여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본고는 윤동주의 개별적 시작품의 이민문학여부를 확인하기 위한데 목적을 둔것이 아니라 이민작가로서 윤동주가 자신의 정체성인식을 어떻게 표현하였느냐를 밝히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최문식, 김동훈 편, 《윤동주유고집》(연변대학출판사, 1996)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다른 판본들도 참고하였다.

 

  2.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확인

 

  필자가 골라낸 관련 시작품들을 창작년대순으로 읽다보니 가장 만저 눈에 뜨인것이 《고향집-만주에서 부른》이라는 작품이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1936.1.6)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윤동주는 중국 룡정 명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민 2세가 될것인데, 따라서 그의 고향은 룡정 명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이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따뜻한 곳이다.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나》는 《헌 짚신짝 끄을고》 여기에 왔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라고 하는 화자는 시인 윤동주 자신은 아니며 어머니가 계신 남쪽 하늘 저 따뜻한 고향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온 이주민이다.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것은 현재 살고있는 곳이 북간도쯤이 된다는 말이다. 즉 시인은 이주민이라는 공동체의 립장에서 향수를 토로하고있다. 그것도 《왜 여기 왔노》라는 넋두리를 섞으면서 말이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인 자신의 립장이 아닌 화자를 등장시키고있다. 이는 객관적 혹은 공동체적화자를 리용한 공동체적정서의 표출을 념두에 둔 시작행위라 하겠다. 즉 이주민의 한 성원으로서 화자는 불특정개인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이 시를 쓸즈음 개인적인 감수성을 이주민이라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립장에까지 확장시켜 우리의 력사와 불행한 운명을 하소연하고 드러내고있는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주민 2세로서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보면서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있는것으로 사회적사명감을 드러낸것이 되기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민자의 정체성확인이 시적으로 표현된 형태이다. 두개의 차원에서 설명할수 있는데, 먼저 화자의 차원에서 보면 이민은 고통스러운 경력이다. 그래서 화자는 고향인 모국땅의 고향집을 그리워한다. 모국땅과 고향집을 그리워한다는것 자체가 이민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한 이주를 단행하였고 현재는 이민지에서 또다른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살려니 과거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고국땅의 고향집이 그리운것이다. 다음, 시인 윤동주는 룡정 명동이 고향이다. 그럼에도 남쪽 따뜻한 곳이 고향인 작중의 화자를 등장시켜 고향을 그리게 하고 그의 그리움을 동정한것은 무엇때문일까? 두말할것도 없이 동류의식때문일것이다. 여기에는 이민 1세인 부모와 친지들, 이웃들에게서 전수받은 고향의 기억들도 당연히 작용하였을것이나 그보다도 시인 자신이 이민자의 삶을 살아오면서 키워온 이민자의 동류의식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려는 욕구를 자극했을것이다.

  동심이 짙게 드러난 《오줌싸개지도》 역시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잘 보여준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 초)

 

  이 작품 역시 앞의 《고향집》과 비슷한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적화자가 그 반대편인 고국의 고향땅에서 이민지인 만주땅을 떠올린다. 첫련은 동요나 동시의 립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될만한 소재를 다루고있다. 동생이 지난밤에 오줌을 싸놓은 요가 빨래줄에 걸려있는데 그것이 지도와도 같다고 했다. 그런다음 2련에 가서는 그에서 비롯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있다. 즉 그것이 엄마 계신 별나라의 지도일지도 모르며 아빠가 계신 만주땅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계시고 아빠는 돈을 벌어 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만주땅이라는 곳에 이민을 간것이다.

  여기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첫 상상은 쉽게 리해할수가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만주땅 출생인데 화자는 고국땅에서 만주땅에 돈벌러 간 아빠를 그리워한다. 화자의 공간적위치만 바뀌였을뿐 《고향집》과 같은 맥락이다. 민족공동체의 립장에서 만주이민의 문제를 인식하고있다 하겠다. 《고향집》의 정서와 맞물려 만주이민의 문제에 대한 시적상상력과 작가적 사명감 혹은 책임감이 동시에 발동한것이다.

 

  3. 이민자의 현재 삶에 대한 관조

 

  앞의 두 작품에서 정체성의 확인 욕구는 일종의 의식적인 행위로서 거기에는 력사적인 상상력이 많이 개입되여있다. 그에 비해 아래의 두 작품은 이민자의 현실적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먼저 《슬픈 족속》이라는 작품을 보도록 하자.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는 모두가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복식들이다. 특히 《흰 수건》과 《흰 고무신》은 남성들도 사용했던것이나 그것들을 포함하여 《흰 저고리》와 《흰 띠》는 대체로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었다. 조선족으로서 자기 민족의 특징을 시에 담은것은 당연히 정체성의 확인차원에서 리해할수 있다. 이국땅에서 사는 립장에서 민족동질성의 상실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그것은 시인의 정서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런 차림의 사람을 시인은 《슬픈 족속》이라 했을까? 첫행은 그냥 현상의 진술이라 하겠지만 제2행에서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웠다고 했다. 《거친 발》은 일차적으로 항상 맨발바람에 전야작업을 해야 하는 농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시어로 정제되였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농민의 고단한 삶을 느낄수가 있다. 다음은 《슬픈 몸집》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슬플수는 없다. 그러니 그 몸집, 즉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인간의 몸집이 시인에게 슬픈 모습으로 보였다는 말이 된다. 다시 《가는 허리》 역시 슬픔의 한 이미지가 되겠고 동시에 동정을 유발하는 불쌍한 모습의 이미지라 하겠다. 그러니까 《거친 발》과 《슬픈 몸집》, 그리고 《가는 허리》는 제목에 나타난 《슬픈 족속》의 재해석 혹은 심화가 되겠다. 다시 말하면 이국땅에 사는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한 슬픔이 쌓이게 된것은 더 말할것도 없이 이주민으로서의 고난과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의 암흑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그냥 우리 민족의 모습, 삶의 현실을 슬프게만 보고 손을 놓고있은것은 아니다. 마지막 행에서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고있다고 했다. 허리를 질끈 동인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일종의 자각이나 행동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삶이 고달프다고 해도 악착스레 생존해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과 투쟁하며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다.

  《양지쪽》은 《슬픈 족속》보다는 2년 먼저 씌여진 작품으로 어쩌면 아직도 동심이 짙게 묻어나고있다 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 리면의 사상이나 정서는 오히려 섬찍할 정도로 강하고 깊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첫련 두행은 중국땅 북방의 봄풍경을 그리고있다. 한시에서의 《비흥(比興)》이라는 표현기교중 《비》에 해당하는것으로 여기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과 《호인의 물레바퀴》는 화자가 체험하고있는 지역, 즉 간도땅 봄의 이미지가 될것이다. 다음 두번째련의 두행도 봄의 풍경묘사에 속하지만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표현은 《흥(興)》에 해당되는것으로 이른바 《7.7사변》이라 불리는 중일전쟁 1년전 식민지 백성, 그것도 이주민 백성의 어두운 심리적상황을 은근히 내비친것이라 하겠다.

  세번째련과 네번째련 역시 《비흥》의 관계로 해석할수 있지만 앞의 상징적 혹은 암시적표현을 보다 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표현하고있다. 즉 지도째기놀음이라고 하는 애들의 일상적유희의 특징, 즉 땅따먹기의 확장지향적성향과 일본의 령토야심과 그에 저항하고있는 중국의 대결을 은유적으로 련관시키고있는것이다. 마지막련의 《가뜩이나 엷은 평화》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수가 있다. 표면적으로 《아서라!》라는 표현은 지도째기놀음을 하고있는 두 아이의 《령토야심》을 저지하는 말이지만 사실상 그 표현의 대상은 평화를 깨뜨리려는 제국주의자들이 된다 하겠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어떤 측면에서는 윤동주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강한 저항성을 보여준다고 볼수도 있다. 다만 당시 시대적상황과 시적인 표현을 련관시켰을뿐 윤동주가 당시의 시대적상황에 대해, 특히 중국 전국토를 삼키고자 호시탐탐 노리며 준비하고있던 일제의 야심에 대해 어떻게 리해하고있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그러한 작품의 성향을 자신있게 말할수 없을뿐이다.

  《슬픈 족속》에서는 민족의 슬픈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러한 렬악하고 슬픈 현실에서도 악착스레 생존하려는 이주민의 의지를 보여주고있다. 이것도 정체성 확인의 한 방식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그에 비에 《양지쪽》에서는 스스로가 중국땅에서 사는 조선인 이민자임을 전제하여 위기의식을 표출하고있다. 이민 2세의 정체성인식을 드러낸 경우다. 그러니까 이 두 작품은 조선인 이주민의 이중적정체성을 드러내고있다 하겠다.

 

  상기 네 작품중 세편은 1936년의 작품이고 한편은 1938년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각각 19세때와 21세때에 쓴것이 된다. 약관의 나이에 개인적인 관심을 넘어 민족공동체, 이민자의 공동체적 문제에 주목하였다는것은 시적인 감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시인의 의식이 얼마나 조숙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그리고 이주민의 정체성인식을 보여준 시작품이 지극히 적은 상황에서 이 네 작품은 매우 가치있는것이라 생각된다.

 

  4. 향수와 그 승화

 

  향수는 시작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소재이다. 고향이 인간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하며 따라서 고향을 떠났을 때의 감수가 그만큼 절실하고 강렬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주민 시인에게 있어, 특히 윤동주에게 있어 향수는 일반적인 향수의 의미를 초월하여 이주민의 신분확인을 드러내는 소재이고 감수가 된다. 먼저 윤동주가 처음 평양 숭실중학에 류학을 갔을 때 쓴 작품 《황혼》을 보자. 1936년 3월말에 귀국했다고 하니 아마 이제 막 귀국하게 될즈음 쓴것으로 보인다.

 

  해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싶다.

  (1936.3.25. 평양에서)

 

  첫련 《해살은 미닫이 틈으로/길쭉한 일자를 쓰고… 지우고…》는 그냥 방안에 비쳐들어온 저녁해살의 모습을 그린것처럼 보이지만 꼼꼼히 따지고보면 이제 하루해가 서산에 기우는 시각 어떤 마음의 움직임을 암시한것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다음련에서 까마귀떼가 지붕우으로 날아지나간다고 했다. 왜 이런 그림이 화자의 관심을 끌었을까? 두말할것도 없이 까마귀가 날아간 북쪽에 고향이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핵심은 《둘, 둘, 셋, 네, 자꾸 날아 지난다》라는 구절이다. 까마귀 하나쯤 날아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냥 덤덤히 지나치고말았을지도 모른다. 여럿이 자꾸 날아지나가기때문에 도무지 마음을 걷잡을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행의 《쑥쑥, 꿈틀꿈틀》이라는 강조된 표현이 튀여나온것이다. 향수의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하고있음을 화자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고있다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련 《내사…/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싶다》는 표현으로 참을길 없는 향수의 심정을 폭발시키고만다. 간절한 고향생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간은 고향에서 향수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타향이나, 특히 이국땅에 몸담고있을 때면 고향의 모든것이 아름다워보이고 그리워진다. 그래서 윤동주는 룡정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되는것이다. 이 시의 가치는 타향에서 느끼는 간절한 향수를 해저물녘의 자연이미지에 기탁하여 점층적으로 드러내고있다는데 있을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까마귀의 이미지는 까마귀가 상징하는 흉조로 제시된것 같지는 않으나 그러한 까마귀의 이미지때문에 좀더 암울해지고 간절해짐은 부정할수 없을것 같다.

  이 시는 그냥 순수한 향수시일뿐이다. 그러나 《별세는 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전문 인용하고싶지만 너무 길어서 인용은 피한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을 몇달 앞둔 시기에 쓴것이다.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는 표현에서 볼 때 이 시의 화자는 북간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타향에 있다는 말이 된다. 년표를 살펴보면 이때 윤동주는 서울에 있었던것으로 되여있다. 그리고 가을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가 이 작품의 첫련이다. 그리고 별 하나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며 헤인다. 여기서 《사랑》과 《동경》 그리고 《시》는 화자의 미래에 대한 기대나 동경을 표현한 이미지들이 되겠지만 《추억》과 《쓸쓸함》 그리고 《어머니》는 향수를 드러낸것임에 분명하다. 시인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룡정이기때문에 류학을 위해 서울에 체류중인 시인에게 있어서 서울은 타향이다. 이것을 향수의 정서라 표현할수 있겠다.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 불러봅니다.》라고 한다음 화자가 불러본 말들은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시인들을 빼고는 전부가 고향의 이미지들이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 《벌써 애기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등이 이에 속한다. 이는 앞의 《추억》이라는 표현과도 관련되는 이미지들로서 고향의 경험에서 비롯된것들이다. 비둘기 등 동물의 이름도 여기서는 고향에서 보았던, 혹은 경험했던 동물들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별이 아슬히 멀듯이》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고 북받치는 향수를 털어놓는다.

  이주민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고향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이제 이민 3세, 4세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현재까지도 우리가 고향을 말할 때 항상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디냐를 따지고있는것도 그러한 복잡한 고향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것이다. 고향에 대한 인식이 복잡한만큼 향수의 정서나 감정도 복잡하지 않을수 없다. 이 작품의 경우 비록 향수의 정서는 여느 향수시와 별 다름이 없어보이지만 중국땅 자신이 태여난 곳을 고향이라 인식하고 짙은 향수의 정서를 드러낸것 자체가 이민시인의 이중적정체성을 보여준것이 된다. 현재 몸담고있는 서울은 모국이고 부조의 고향이지만 그것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국땅을 고향으로 인식할수밖에 없는것이 이주민의 처지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국땅 일본에서 느낀 향수는 어떤것일까?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여진 시》 등 세 작품은 모두 윤동주가 일본 동경에서 류학을 시작한 첫해의 작품이다. 1942년 5월 12일, 13일과 6월 3일에 각각 쓴것으로, 윤동주가 그해 봄(날자미상)에 일본에 건너가 4월 2일 동경 립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고 하니 이제 막 일본땅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류학공부를 시작한후에 씌여진 시라 하겠다.

  세 작품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이나 타국에서 사는 외로움, 울적함, 향수가 기본적인 정서이다.

  먼저 《사랑스런 추억》에서는 일본에 체류중인 화자가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의 추억을 되살려낸다. 고향을 떠나 오랜 시간 타향을 전전하는 류학생의 허전한 마음과 외로움이 잘 그려지고있다. 특히 담배연기라는 이미지가 그러한 정서를 절실하게 다가오게 한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담배연기처럼 표류하는 마음을 달래야 했던 서울의 삶이였으나 《동경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생각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리워한다》는 점이다. 서울류학도 타향살이이지만 동경은 더구나 이국땅이여서 화자가 느끼는 외로움이나 허전함의 정도가 훨씬 강함을 알수 있게 해준다. 즉, 오늘 화자가 처한 이국땅에서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서성거릴 게다.》라는 지난 서울류학때 겪었던 타향의 설움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리워진다고 표현함으로써 오늘 삶의 허전함과 외로움, 서러움을 보다 절실하게 드러낸것이다.

  《흐르는 거리》는 그러한 이국땅에서 겪는 향수를 옛날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현한다. 보다 직설적인 표현이 되겠으나 《괴롭다, 슬프다, 외롭다》 라는 표현을 《그리움》이라는 표현 뒤에 숨겨두고있다. 시적인 절제의 미학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시인은 그러한 타향살이의 슬픔을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등의 이미지를 통하여 암시하고있을뿐이다.

  이제 그러한 이국땅에서의 감정을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에서 터쳐낸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륙첩방은 남의 나라,》 이 련을 시인은 행을 뒤바꾸어 다시 반복한다. 그만큼 강조하고있다는 얘기가 될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중심이미지는 《밤비》와 《눈물》이다. 그만큼 외로움의 정도가 강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사탕처럼 입속에서 녹이며 《침전》해버리지는 않는다.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는 외로움에, 슬픔에 빠져버리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발견만 하고 그만둔다면 그것은 역시 《침전》이 될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작품 후반부의 4련이다. 여기서 시인은 그렇게 《침전》하려는 자신을 반성한다. 부끄러움은 윤동주 특유의 자성방식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자성만이 능사는 아닐것이다. 뭔가 앞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이나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단다. 여기서 《시대처럼 올 아침》이라는 표현은 여느 비유와는 조금 다르다. 《아침》이라는 시간개념을 《시대》라는 좀더 큰 시간개념 즉 사회적시간개념에 등치시키고있다. 새로운 시대를 기다린다는 말이 되겠다. 윤동주의 시에서 자신의 신념과 리상을 가장 명징히 밝혀놓은 시구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3편의 시를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가 허전하고 외롭고 슬픈 타향살이, 이국살이를 하는것은 위기에 처한 민족을 위해, 암흑의 시대에 《등불을 밝》히기 위한데 목적이 있음을 고백하고있는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 부르는것이다. 직설적으로 현실을 비판한것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력설한것도 아니지만 그를 저항시인이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처럼 지극히 시적인 방법으로 흙탕물로 범벅이 된 현실사회에서 항상 부끄럼을 느끼며 자성할뿐만아니라 그 어두운 시대에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면서 아침처럼 올 시대를 기다린것이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에 한정된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자신이 이주민이라는 점,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향수를 달래면서 참고 견뎌여야만 한것은 한 개인을 위한것만이 아닌, 사회에 《등불을 밝》히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향수라는 애절한 표현속에 드러내고있는것이다.

 

  5. 결 론

 

  윤동주는 우리 시인이지만 한국에서 먼저 발견되여 각광을 받아왔다. 범민족적인 문학의 차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때문에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은 여태까지 론의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상기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가 간도이주민의 후예라는 신분인식, 즉 정체성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이점은 이민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보여준 시에서도 드러나지만 룡정 명동을 자신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그 고향에 대한 향수를 애절하게 표현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그는 그러한 향수의 정서에다가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내몰려는 의지와 리상을 담음으로써 단순한 자연인의 립장에서만이 아니라 시대의 사명을 지닌 지성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윤동주가 우리 조선족시인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주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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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毅洙, 尹東柱 詩의 解體論的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1쪽.

2) 물론 연희전문 4년동안 여름과 겨울 두 방학에는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고, 일본류학기간에도 고향에 다녀갔다고 하니 이 8년중 시간적으로 대략 1년반 정도는 고향에서 보냈다고 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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