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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축구의 고향’ 라이프찌히 라이프찌히는 과거 동독에 속한 유서깊은 도시로 역사와 음악, 학문의 중심지. 독일축구협회가 1900년 이곳 라이프찌히에서 창립되었으니 이곳은 독일 축구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1903년에 첫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라이프찌히 팀이 우승을 했다. 라이프찌히 팀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속한 유일한 옛 동독 지역의 팀, ===================================================== 라이프찌히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는 1990년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 이곳에서는 1989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촛불집회가 열렸는데 이것이 독일 통일의 출발점이 되었다. 1년간의 촛불집회로 민주화 열기가 결집되어 결국에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통일이 된 것이다. 라이프찌히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와 함께 성 토마스 교회가 유명하다. 성 토마스 교회는 바하와 인연이 깊다. 바하는 이 교회에서 27년간 칸토르(음악 감독)로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수많은 오라토리오와 칸타타를 작곡했다. 이 당시만 해도 바하는 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하가 죽은 100년 후 멘델스존이 바하 음악의 위대함을 ‘발굴’해냄으로써 비로소 바하의 천재성이 인정되어, 오늘날 바하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하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2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9명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일찍 죽었다. 바하의 두 번째 부인은 말년에 극빈의 생활을 했는데 위대한 음악가 가족들의 비참한 생활은 가슴 아픈 일이다. 역사상 제일 위대했던 음악가가 그토록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바하의 무덤은 성 토마스 교회 안에 있다. 성직자가 아닌데도 교회 제단(altar room)에 묻혀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라이프찌히 시내에 있는 바하 박물관은 너무 소박(humble)했다. |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라이프찌히와 인연이 깊다. 그는 1519년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한달이 넘게 로마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들과 신앙 논쟁을 펼침으로써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루터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철학자 니체는 1844년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슈바이처는 25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2년간 성 니콜라스 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29세 때에는 성 토마스 교회에 딸린 신학교의 기숙사 사감을 1년간 하다가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종교와 예술의 향기가 짙은 도시 라이프찌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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