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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名詩 공화국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
시인, 국문학자. 경북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낙화(落花)
이 시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살아가는 화자가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꽃이 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대자연의 섭리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동틀 무렵,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의 서러운 울음소리도 사라진 후에, 화자는 미닫이창에 은은히 붉게 비치는 꽃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꽃이 떨어지면서 드러내는 은은한 붉은빛은, 세상을 피해 꽃과 함께 살아가는 화자의 서글픔이 담겨 있는 빛깔이라고 할 수 있다. 낙화를 본 화자는 자신의 내면 상태로 시선을 돌린다. 세상을 피해 은둔자적 삶을 살아가는 화자는 꽃이 지는 광경을 통해 삶의 무상감과 절망감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한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완화삼(琓花衫) - 목월(木月)에게
이 시의 제목 ‘완화삼’은 ‘꽃을 완상하는 선비의 적삼’이라는 뜻으로 ‘꽃을 즐겨 구경하는 선비’를 말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완화삼’, 즉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그 선비는 구름과 물길처럼 흘러가는 유랑의 삶을 사는 나그네이다. 차가운 산길을 오르내리며 마을을 옮겨 다니는 나그네는 구슬픈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들른 강 마을에서 술 익는 냄새가 가득하고 저녁 노을빛이 눈에 어리는 가운데 ‘꽃잎에 젖어’ 잠시나마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시간은 순간일 뿐이고, 이 밤이 지나고 나면 꽃은 질 것이라는 점을 나그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 이라고 말하며 애상감에 젖어든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나그네의 한과 애상감은 시각, 후각, 청각 등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독문) 창비
고풍 의상
이 시는 전통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추는 여인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예스러운 어투로써 고전적 미감을 추구하는 시적 화자의 풍류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봄밤이고, 공간적 배경은 풍경 소리가 울리는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은은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여인은 회장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운혜와 당혜와 같은 전통적인 의상을 하고 있다. 이런 의상으로 추는 춤 사위는 저고리의 정적인 우아함과 치마의 동적인 아름다움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섬세하게 춤 사위를 묘사하면서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밝도소이다, 골라 보리니, 흔들어지이다’와 같은 예스러운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분위기를 한층 돋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와 같은 표현을 통해 고전미에 흠뻑 도취된 화자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배경이나 인물, 그리고 동작 등은 모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시인은 고전적인 우아미를 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수
이 시는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산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한시의 시상 전개 방식인 기승전결과 선경 후정(先景後情)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는 앞부분에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제시하고, 뒷부분에 가서 비애감에 젖어 있는 화자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있다.
첫째 문장에서는 벌레 먹은 기둥과 빛 낡은 단청, 새들이 둥우리를 친 추녀의 모습을 통해 무기력하게 망해 버린 왕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는 큰 나라(중국)를 섬기다 왕조가 거미줄을 쳤다(패망)는 진술을 통해 중국을 섬기던 과거 우리 나라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셋째~다 섯째 문장에서는 몰락한 왕궁에 서서 느끼는 화자의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봉황이 울어 본 적이 없다는 표현을 통해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면서, 이제는 나라의 주권마저 없는 현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살아갈 위치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여섯째 문장에서 화자는 망국의 현실에서 느끼는 자신의 슬픔을 봉황새에 감정 이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망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비애감을 봉황새라는 간접적인 대상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슬픔을 내면화하는 지사적인 품격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승무
이 시는 ‘승무(僧舞)’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인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4음보의 율격이나 소재면에서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9연의 이 시는 춤을 추는 동작의 순서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3연은 여승이 춤을 추기 직전의 모습을 ‘고깔 → 머리 → 볼’로 시선을 이동(위 → 아래)시키면서 묘사하고 있다. 4연은 춤의 시 ·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밤의 정적미를 드러내고 있다. 전체 구성면에서 볼 때, 가장 앞에 올 부분이다. 5~8연은 승무의 춤사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5연은 급박한 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6~7연은 춤사위 중 별을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을 통해 세속적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기원하는 여승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8연에서는 유장한 춤의 모습을 합장에 비유함으로써 승무에서 느껴지는 경건성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9연은 1연과의 수미 상관의 구조를 통해 시상을 마무리함으로써 정적미와 함께 승무의 계속되는 여운을 전해 주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하이얀, 감추오고, 모두오고, 감기우고’ 등의 시적 허용과 ‘이 밤사, 삼경’과 같은 예스러운 표현, 그리고 수미 상관의 구조 등은 이 작품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세속적 번뇌의 승화라는 주제 의식에 기여하고 있다.
다부원에서
이 시는 6·25 전쟁 당시의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종군 작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창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이 주는 참혹함이 나타나 있지만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시인의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역을 휴머니즘의 시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3연은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고 한달 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 전쟁의 상처가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음을 제기하고 있다. 4, 5연에서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시적 화자는 6, 7연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군마와 적군의 시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있다. 8, 9연에서는 '한 하늘 아래 목숨받아' 태어난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워 이제는 시체가 되어 썩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간고등어 냄새'를 통해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10, 11연에서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인식이 없고 바람만 부는 모습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사와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산상의 노래
이 시는 광복을 맞이한 시적 화자의 기쁨을 비유적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시인은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민족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을 염원하고 있다. 광복 전의 화자의 모습을 '시들은 핏줄', '메마른 술' 등으로 표현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에 '종소리'와 '피'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광복을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또 다시 '높으디높은 산마루'에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고 있다. 과거처럼 울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는 선구자로서의 화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조론
중수필.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 비판하고 있는 수필이다. 또한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박혀 있는 지조의 개념을 다양한 일화와 속담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변절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한편 지조 있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우한용)
시의 비밀
수필. 이 글은 저명한 시인인 글쓴이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 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소재의 선정, 시상의 구상, 구상의 언어적 구현, 원하는 표현을 얻기 위한 노력, 창작의 고통, 개요 짜기, 퇴고 등 시 ‘승무’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순서에 따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글 전반에 걸쳐 예술에 대한 글쓴이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하고 치밀한 미적 감각, 표현 하나하나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 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어 글쓴이가 왜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멋 설
수필. 이 글은 ‘멋’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가을 달밤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글쓴이는 삶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친다. ‘멋’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소개하며 삶에 힘겨워 하는 이들과 복을 찾아다니느라 애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멋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멋으로 규정하고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 속에 있으며, 이러한 삶이야말로 멋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고풍스러운 말투와 다양한 수사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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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군말】
이 시는 민족적 정서, 전통의 아름다움, 불교적 선미(禪美)라는 조지훈의 초기 시 세계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소재가 되고 있는 승무란 승려가 붉은 가사에 장삼을 걸치고 고깔을 쓰고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추는 춤[독무(獨舞)]을 말한다. 1~3연에서는 승무의 모습―그중에서도 머리 부분을 묘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나 뒤에 보이는 ‘외씨보선’, ‘복사꽃 고운 뺨’ 등으로 미루어 승무를 추는 사람은 젊은 여승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여승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로 감추고 있다. 그 고깔의 날아갈 듯 가벼운 움직임을 화자는 한 마리 나비와 같다고 말한다. 언뜻 보이는 여인의 볼에 흐르는 빛은 고와서 서럽고,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무대에서 여인은 춤을 시작한다. 길고 넓은 소매를 휘어 감으며 돌아설 듯 날아가는 여인의 들린 발에 사뿐히 신겨진 외씨버선을 느꼈을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아진 여인의 까만 눈동자와 복사꽃 고운 뺨에 흐르는 두 방울이 클로즈업된다. 여인의 그 눈물로 인해 이 번뇌는 춤과 함께 밤하늘의 별빛으로 멀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춤이 세사(世事)에 시달리며 겪은 번뇌를 이기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임을 알게 된다. 다시 춤이 이어진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은 거룩한 합장(合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혼신의 몸짓이다. 밤은 깊어져 삼경(三更, 밤 12시 전후)인데 여인의 하얀 고깔은 나비처럼 날아갈 듯하다. 아니, 나비가 되어 번뇌와 함께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시는 승무를 추고 있는 여인의 외적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여인이 마음속의 번뇌를 춤으로 흩어 버리고자 하는 내면의 소망까지 그려 내고 있다.
<참고>
「승무」의 창작 과정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靜止)하는 찰나의 명상(冥想)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官能)의 샘솟는 노출(복사꽃 고운 뺨)을 정화(淨化)(별빛)시킬 것, 그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翹翹)한 달빛과 동터 오는 빛으로써 끝맺을 것.
이것이 그때의 플랜(계획)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퇴고하는 데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 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요약하고 말았다.
서울 남산 꽃동산 건너편에는 조지훈 시비가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 조지훈선생이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으로
한학을 공부했던 조지훈이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나와 한학과 불교, 현대문학을
어우르는 전통과 선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시인이다. '
파초우'는 조지훈이 스스로 '방랑시편'이라고 했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연을 떠돌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자로, 저녁에도 소리를 매개로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신을 성찰한다.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조지훈선생은 자연과 벗한다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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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문학관으로 가다...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노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 조지훈, 1958년 <신태양>에 발표한 ‘멋 설(說)’ 중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는다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 것 같다. 삶의 목적을 찾으려 했지만 아직 헤매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그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리라.
소란스러운 여름. 하필이면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이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며칠 미루었더니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은 몸이 간지러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괜스레 방을 뒤집고, 소설책을 넘겼다. 장마가 어느 정도 지나간 무렵 영양으로 향했다. 아직 가는 비가 내렸지만, 촉촉한 비 냄새와 회색의 하늘은 낭만적이기만 했다.
많이 아는 사실이지만, 영양의 고추 사랑은 엄청났다. 네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영양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로등에 달린 앙증맞은 빨간 고추는 흐린 하늘 덕분인지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영양군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해발이 가장 높은 곳으로, 경북 북부의 3대 오지 (봉화, 영양, 청송) 중 한 곳이다. 영양은 문학의 고향으로 불리는데, 조지훈 시인뿐 아니라, 시 「내 소녀」를 남긴 오일도(1901~1946) 시인과 소설가 이문열이 영양 출신이기 때문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약 20분을 달려 선바위에 도착했다. 문학관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선바위에 관한 설화를 읽었기에 그 정경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운룡지에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남이장군이 물리쳤다. 그는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고, 반란을 잠재웠다. 남이장군이 물길을 돌린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다.
선바위를 한참 바라보던 때, 엄마와 함께 온 듯한 여자아이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바위에 선이 많아서 선바위에요?” 엄마는 저 멀리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신선 바위라서 선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말했더니 곧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선바위로 향하며 생각 없이 내디딘 길은 ‘외씨버선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조지훈, 「승무」 중에서
길 이름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서 땄다. 전체 구간이 나와 있는 지도를 보면 언뜻 버선의 선 모양을 닮기도 했다.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영양까지 약 170km 정도이고, 총 13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선바위 관광지가 속해 있는 구간은 오일도 시인의 길이었고, 그 이후로 조지훈 문학길이 이어진다. 조지훈 문학길은 영양 전통시장에서 조지훈 문학관까지 총 13.7km다.
▲ 영양 서석지. 중요 민속문화재 제108호
지도를 따라 꽤 오랜 시간 걷다 보니 서석지에 도착했다. 서석지는 광해군 5년에 정영방 선생이 만든 연못으로, 담양의 소쇄원, 완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민간 연못 정원으로 선정되었다. 서석지 입구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기와집 한 채와 연못, 돌담이 전부였다.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못을 가득 덮고 있는 커다란 연잎과 분홍의 연꽃 위에는 빗방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택시에 올랐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네 시쯤 있었기 때문에 주실 마을까지 서둘러 가야 했다. 삼십 분가량 달렸더니 조지훈 문학관과 주실 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왔다. 주실 마을 입구에 있는 ‘주실쑤’에서 내렸다. 마을은 ‘시인의 숲’, 일명 ‘주실쑤’라 불리는 보호 숲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마을 길을 따라 주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동네였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추밭은 넓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대한 주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이전부터 남달랐다 한다. 마을엔 예로부터 마을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하나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주실이 배 모양의 지형이라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할 것이며, 우물을 파면 동네에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고, 50리나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한다.
▲ 지훈문학관의 현판은 그의 아내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
주실 마을에 있는 가장 큰 기와집으로 향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인 조지훈 시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문학관이었다. 문학관 내에 그의 대표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지훈의 학창 시절 모습과 장남 광렬이 그린 지훈의 모습(20대, 30대, 40대 초반, 40대 후반)
조지훈 시인의 본명은 조동탁으로, 1920년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창작해보기도 하고, 당시의 소년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팬』,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의 문화를 접했다. 지훈은 열한 살에 형 세림과 함께 <소년회>를 조직, 마을 소년의 중심이 되어 문집 『꽃탑』을 펴냈다. <소년회>는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북간도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처참하고 애절한 모습을 소인극으로 공연하는 등 항일의식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지훈 형제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는데, 시인은 당시를 ‘열여섯 살짜리와 열세 살짜리 어린 형제가 외가에 다니러 가도 경찰의 내방을 받던 웃지 못할 감시의 세월’이라고 기억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훈은 현실을 비통해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도왔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지훈은 또다시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지훈도 <조선문인보국회>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추천 시 몇 편 발표한 것이 무슨 시인이겠느냐는 태도로 입회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었다.
▲ 지훈문학관 정경
그는 광복 이후에 시 창작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교육자로 사는 삶도 시작했다. 그러나 곧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났고, 그의 가족사에 시련이 닥쳤다. 할아버지는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고, 어머니는 전쟁 때 얻은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아버지와 매부는 납북되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익사하는 커다란 수난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참변은 그에게 시에 대한 열망을 앗아갔다. 그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는 작업보다는 이미 발표된 자신의 시들을 펜으로 정서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그 이후, 지훈의 육필시집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지훈은 지사로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돕는 등 민족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지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문장』지 추천시 모집에 응모하여 그 제1회로 「고풍의상」이 당선된 것은 1939년 봄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고풍의상」은 서구시를 모방하던 그 때까지의 나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이었으나 실상은 강의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은 것이 뽑힌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문화에 대한 나의 애착, 그중에서도 민속학 공부에 대한 나의 관심이 감성 안에서 절로 돌아 나온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나의 역정」(『고대문화』)중에서
조지훈 시인은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삼 회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고풍의상」 이후, 열한 달에 걸쳐 「승무」와 「봉황수」를 지었고,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 자주빛 호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 곡선을 이루는 곳 /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조지훈 「고풍의상」 중에서
▲왼쪽 사진, 왼쪽부터)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 오른쪽 사진) 청록집과 청록시선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광복 후 1946년, 합동 시집인 『청록집』을 냈다. 이를 계기로 이들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으로,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담은 시가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를 담고 있다.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은 매우 달랐다. 청록파 시인 셋이 걸어갈 때면 항상 지훈이 가운데서 걷고 두진과 목월이 양옆에서 걷곤 했는데, 지훈은 성큼성큼 걸어 앞섰으며, 두진은 매번 뒤처졌고 그 둘 사이엔 목월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걸을 때 모습을 보면, 지훈은 항상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걷고, 두진은 직선적인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채 걸었으며, 목월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걷는 모습이 다르듯이 이들의 성격이나 시 세계 또한 달랐다. 지훈은 고전미와 선미를 드러냈고, 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 『풀잎단장』 / 『창에 기대어』 / 『조지훈 시선』
『풀잎단장』은 조지훈 시인의 첫 개인 시집이다. 삐뚤빼뚤 쓰인 표지 글씨 ‘풀잎단장’은 당시 만 7세인 맏아들 광열이 크레용을 사용하여 쓴 것이다. 『창에 기대어』는 그의 첫 수상집으로,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수필, 감상문 등을 한자리에 모아서 펴낸 책이다. 『조지훈 시선』으로 지훈은 1956년에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조지훈 시선』이후 그의 시집에는 역사의식이 담겼다. 1959년 발간된 『역사 앞에서』는 광복 직전∙직후의 시편들이 함께 실려 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던 지훈이었지만,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의 증언자나 저항시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시편은 『여운』(1964년)에도 계속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정리하는 뜻에서, 그동안 빠졌던 시편을 함께 간추려 출판한 시집 『여운』은 지훈의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지훈은 긴 여운을 남긴 채 50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훈이 생전에 사용했던 여러 유품도 볼 수 있었다. 그가 30대 중반에 착용한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던 부채, 행사 때 주로 사용하던 넥타이와 안경 등을 보니, 그가 생전에 꽤 멋쟁이였을 것 같다. 한쪽 벽면에는 부인 김난희 여사가 서예와 회화로 남편의 시를 표현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힘찬 붓의 놀림과 섬세한 색감이 조지훈 시인의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오른쪽 그림) 지훈의 막내아들(조태열)이 고등학생 때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조지훈이 서재에서 집필할 때 쓰던 문갑과 서예도구 문학관에는 유독 지훈의 초상화가 많았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그린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감수성과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물려받아서였는지,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감각적이었다.
문학관의 끝, 한쪽 벽면에는 조지훈 시인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백 개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는 투병 중에 여동생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가 흘러나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볼 수 있다.
▲ 호은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밖으로 나오니 멈췄던 비가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간지러운 빗방울이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조지훈 시인이 태어난 호은종택으로 향했다. 호은공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 집은 주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일부 불탄 것을 1967년 복구하였으며, 경북 북부 지방의 일반적인 반가 형식인 ‘ㅁ자형’ 몸채에 ‘ㅡ자형’ 대문채가 결합한 형태다.
어디선가 빗방울 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물이 고인 석조가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개구리가 생물인지 조형물인지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나 내게 뛰어오를까 봐 발걸음 하나 뗄 때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은종택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삼불차’가 있다. 이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첫째는 재불차(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 둘째는 인불차(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셋째는 문불차(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다. 이러한 삼불의 정신은 수백 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 씨들로 하여금 언제나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 지훈시공원
호은종택과 문학관 뒤편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산골짜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한 공원에는 지훈의 동상과 함께 시비 27편이 세워져 있다. 한 작품씩 감상하며 나무계단을 따라가다 보니 쉴 수 있는 쉼터와 자그마한 공연장이 있었다.
▲ 정자에서 바라본 조지훈 시인의 동상과 승무 시비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빈 臺(대)에 황촉 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 梧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번뇌)는 별빛이라 //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합장)인양 하고 //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삼경)인데 /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조지훈, 「승무」
▲ 월록서당. 경북유형문화재 제172호
(현판의 글씨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이 직접 쓴 것)
주실 마을을 뒤로하니 입구였던 마을 길이 출구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월록서당이었다. 지훈은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영양보통학교에 몇 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의 교육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지훈이 선대의 가학을 이어받아 가문을 지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학∙조선어∙수신∙역사 등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월록서당은 늘 머릿속으로 생각해오던 서당의 모습이었다. 계단과 대청마루 사이에 턱이 높아, 올라가려면 다리에 힘을 많이 주고 펄쩍 뛰어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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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꽃 - 조지훈(趙芝薰)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 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趙芝薰) / 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경북 영양에서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한 후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 전문 강원의 강사를 지냈으며, 광복 후 조선 문화 건설 협회 회원 및 명륜 전문 강사를 거쳐 사망 때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9년에 <문장>지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에 동기생인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여 이후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초기 시는 민족적 정서와 자연 등을 소재로 삼았고, 후기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1957년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 문화사 대계>를 기획, <한국 문화사 시설> <신라 가요 연구 논고> <한국 민족 운동사>등의 논조를 남겼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등과 수필, 평론집으로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돌의 미학>, 역서로 <채담>이 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건립되었다.
조지훈시인의 주도 18 단계를 아시나요? 조지훈 선생님은 '신출 귀몰의 주선' 혹은 '행동형의 주걸'이라고 불리셨다고 합니다.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하셔도 절대 자세를 흐트리는 법이 없으셨다고해요.
이런 선생님께서 술을 마시는 격조, 품격, 스타일 그리고 주량 등을 따져 만드신 선생님만의 주도 18 단계중에 여러분은 어떤 단계이신가요?
<참고>-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마시지는 않으나 안 마시는 사람 (9급)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8급)
3. 민주(憫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겁내는 사람 (7급)
4. 은주(隱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홀로 숨어 마시는 사람 (6급)
5. 상주(商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지만 무슨 잇속이 있어야만 술값을 내는 사람 (5급)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 (4급)
7. 수주(睡酒):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3급)
8. 반주(飯酒): 밥맛을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2급)
9. 학주(學酒): 술의 진경(珍景)을 배우면서 마시는 사람. 주졸(酒卒) (1급)
10. 애주(愛酒):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단≫
11. 기주(嗜酒): 술의 참맛에 반한 사람. 주객(酒喀) ≪2단≫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을 터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13. 폭주(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함께 유유자적 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17. 관주(關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게 된 사람. 주종(酒宗) ≪8단≫
18. 폐주(廢酒):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열반주(涅槃酒)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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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을 찾아가다
法門 박태원 시인
북한강문학비 건립과 북한강문학제 추진계획의 일환으로 남양주시의 문화유산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남양주시는 중앙에 솟아있는 천마산(해발 810m)을 축으로 하여 시청사가 위치하는 금곡동과 평내동,호평동,오남읍,화도읍,조안면,와부읍,양정동,진접읍이 빙둘러 안주하고 있다.
외곽으로는 축령산(879m),서리산,주금산,불암산(508m),수락산(638m),예봉산(683m),운길산(610m),문안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고, 남쪽으로는 북한강이 산과 산사이의 협곡을 도도히 흐르고 있어서 산과 계곡, 강의 풍광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전원도시이다.
현재 남양주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문화축제로는 세계야외공연축제, 다산문화제, 퇴계원산대놀이, 남양주청소년백일장, 도곡도예전, 남양주합창제, 실학축전(경기도), 몽골문화촌, 국악공연, 무용공연 등이 있다.
북한강문학제가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문학축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문학창작과 감상의 즐거움을 작가와 독자가 서로 향수(香受)하며 올바른 비평으로 문학적 심미안을 열어주고 한국문학사상과 정서의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
창작 능력의 고양을 위해서는 문학 이론과 문학 예술의 전형성을 습득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서와 사상을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문화의 세기인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사이버문학이 작가와 독자를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결하는 문학의 마당이 되어 있으므로 전체 사이버 문학클럽이 하나로서 네트워크될 수 있도록 조치하면 각 클럽의 개성을 발전시키면서 전체인 한국문학의 발전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야외문학제에서는 시, 수필, 단편소설을 낭송하거나 시화전, 시사전을 열어 발표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현장에서 여러 가지 테마의 문학투어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강 야외예술공연장 인근에 있는 금남산 등산코스, 두물머리 다산기념관, 모란미술관, 금남유원지 나루터, 남양주 영화촬영소, 운길산 수종사 등이 문학예술기행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세미나를 개최하여 강연과 토론을 통하여 문학사상의 비젼을 넓혀야 하겠다.
남양주시에 연고가 있는 문인, 지사, 선비들의 유적과 작품을 발굴하고 정리 연구하여 발표하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우선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묘소(위치:마석우리 심석고등학교.마석교회 뒤)를 탐방하고 선생의 삶과 사상,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감상하기로 한다.
조지훈 시인의 묘소는 천마산 봉화산 송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양지바른 기슭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모친(全州 柳씨)의 분묘 앞에 나란히 누워있다.
1920년 경북 영양군에서 출생한 조지훈 시인은 지병으로 인하여 48세인 1968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천하셨다. 형은 젊은 나이에 돌아 가시고, 어린 자신에게 한학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할아버지(趙寅錫:구한말 서헌부 대간)는 1950년 7월에 자결하셨다. 아버지(趙憲永 :한의사,초대.2대 국회의원)도 6.25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셨으니 육친을 別離한 고통이 심하셨을 것이다.
절망의 일기
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다//아침밥이 모래같다/국물을 마셔도 냉수를 마셔도/밥알은 영 넘어가지 않는다//마음이 이렇게도/육체를 규정하는 힘이 있는가//마포에서 인도교 다시 서빙고 광나루로/몰려나온 사람들 몇 십만이냐//붉은 깃발과 붉은 노래와 탱크와/그리고 사면초가 이 속에 앉아//넋없이 피우는 담배도 떨어졌는데/나룻배는 다섯척 바랄 수도 없다//아 나의 가족과 벗들도 이 속에 있으련만/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마침내 숨어 앉은 절벽에서/한 척의 배를 향해 뛰어내린다//헤엄도 칠 줄 모르는/이 절대의 투신//비오던 날은 개고 하늘이 너무 밝아 차라리/한강의 저 언덕에서 절망이 떠오른다 처참한데//아 죽음의 한순간 延期
선생은 20세 되던 해에 김난희씨와 결혼하여 3남1여를 슬하에 두었으며, 묘비명은 청록파 시우인 박두진 시인이 쓰셨다. 선생은 19세의 약관(若冠)의 나이에 “고풍의상”,“승무”,“봉황수”로 시단에 나왔고, 일제 강점하의 이차대전말기의 암울과 강개를 오직 시와 학문과 참선으로 오대산 깊숙이 숨어서 달래었다. 선생은 학문과 詩, 志氣가 鼎足의 균형을 이루어 당대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순수한 良心의 문사이며 대쪽같은 선비셨다.
시집으로 “풀잎단장”(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앞에서”(1959), “여운”(1964)을 발간 하였고, “한국민족문화사 서설”,“한국민족운동사”를 저술하였다.
조지훈 시인은 21세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방한암(초대 종정)선사께서 주석하시는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불교외전 강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詩禪一如를 모색했으며 시어의 압축과 상징을 얻었다.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해방 후에는 문화전선의 전위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산상(山上)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6.25 골육상쟁의 비통함을 목도하고 “다부원에서“를, 4.19혁명의 파도치는 감격을 노래하는 ”혁명“을 남겼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묻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혁명
아 그것은 洪水였다./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喊聲/백성을 暗默 속으로 몰아넣는//양심과 純情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푸른 샘물이 넘쳐 흐르는/쓰레기를 걸레 쪽을 구더기를 그/罪惡의 구덩이를 씻어내리는/아 그것은 波濤였다./東大門에서 鐘路로 世宗路로 西大門으로/逆流하는 激情은 바른 民心의 새로운 물길,/피와 눈물의 꽃波濤/東大門에서 大韓門으로 世宗路로 景武臺로/넘쳐흐르는/이것은 義擧 이것은 革命 이것은/안으로 안으로만 닫혔던 憤怒//온 長安이 출렁이는 이 激流 앞에/웃다가 외치다가 울다가 쓰러지다가/끝내 흩어지지 않는 피로 물들인/온 民族의 이름이여/일어선 자여//그것은 海溢이었다./바위를 물어뜯고 왈칼 넘치는/不退轉의 意志였다. 고귀한 피값이었다.//正義가 이기는 것을 눈 앞에 본 것은/우리 평생 처음이 아니냐/아 눈물겨운 것/그것은 天理였다./그저 터졌을 뿐 터지지 않을수 /없었을 뿐/愛國이란 이름조차 차라리/붙이기 송구스러운/이 빛나는 波濤여/海溢이여!
조지훈 시인의 시의 편력은 심미주의, 禪의 미학, 방랑시, 생명에의 향수, 애정, 사회시로 변천하는데, 이는 묘사시에서 상징시, 실제시(實際詩)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전적 우아미를 무용(승무), 의상(고풍의상), 건축(봉황수), 도자기(향문)에서 발견하였고, 감정과 생각을 초탈하여 자연을 직관으로 관조하는 선의 적적한 美(마을,고사,산방)를 구현하고, 나아가 格外의 본성은 생명에의 경외심으로 발현되어 자연의 생명과 동화되어(흙을 만지며,화체개현,밤,창) 역사의 질곡에서 고통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됐다.(패강무정,다부원에서,혁명)
1948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민족의 사상과 정서의 미학을 연구하여 정리하였다. 한국민족의 사상의 뿌리를 하,은,주 이전의 東夷文化圈인 고대국가 배달국,단군조선에서 찾았다. 천인합일의 샤머니즘적인 사상과 정서가 한국민족의 마음 근저에 은근히 흐르고 외래의 사상,종교,문화의 알맹이를 융섭하여 한국전통의 문화를 이어왔다고 밝혔다.단군시대의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三一철학과 天地人합일사상은 원효,의상,퇴계,이이,정약용,최제우로 이어져 내려 왔으며, 원융무애한 격외의 멋이 한국민족정서의 미학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지조론을 저술하여 일관되게 순수한 一心을 지키는 것이 선비의 지조이며, 역사는 혼탁한 세사의 와류에 흔들리지 않는 지사에 의하여 관조된다고 하여 문인의 道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조지훈 지조론
*【해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정치가와 경제활동하는 상인의 결합)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떠다님)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청렴과 결백),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굳고 의연함)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침뱉고 꾸짖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웃음이 터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기이한 성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 단재(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교활한 슬기)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침을 뱉음)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배고픔을 조금 참다)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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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단장(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해
[개관 정리]
◆ 성격 : 사색적, 선(禪)적, 산문적
◆ 표현 : 그윽한 어조와 서술적 이미지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제재 : 풀잎
◆ 주제 :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화자가 서 있는 언덕의 풍경(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
◆ 3~4행 : 풀잎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
◆ 5~6행 :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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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다부원에서>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이 시의 시상 전개를 살펴보자.
2. 이 시의 시상 전개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3. 이 시에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행을 찾아보자.
4. 시적 화자가 생명 현상에 대해 경건한 동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
5. 이 작품에 드러난 '풀잎'의 자세를 생각해보자.
6. 이 시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살펴보자.
7. 이 시에서 '풀잎'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8. 이 시에서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시어를 찾아보자.
9. '고달픈 얼굴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에 나타난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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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연구'로 사학도 소리를 듣다
고대문학회 주최 '문학의 오후' 행사에서 특강을 하는 조지훈(사진-박노준 제공)
종국을 아끼고 물심양면으로 지도해줬던 조지훈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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