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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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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조지훈 - 승무(僧舞)
2015년 12월 12일 00시 34분  조회:5142  추천:0  작성자: 죽림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

생애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
출생 경상북도 영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국문학자. 경북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작품

낙화(落花)
이 시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살아가는 화자가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꽃이 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대자연의 섭리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동틀 무렵,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의 서러운 울음소리도 사라진 후에, 화자는 미닫이창에 은은히 붉게 비치는 꽃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꽃이 떨어지면서 드러내는 은은한 붉은빛은, 세상을 피해 꽃과 함께 살아가는 화자의 서글픔이 담겨 있는 빛깔이라고 할 수 있다. 낙화를 본 화자는 자신의 내면 상태로 시선을 돌린다. 세상을 피해 은둔자적 삶을 살아가는 화자는 꽃이 지는 광경을 통해 삶의 무상감과 절망감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한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완화삼(琓花衫) - 목월(木月)에게
이 시의 제목 ‘완화삼’은 ‘꽃을 완상하는 선비의 적삼’이라는 뜻으로 ‘꽃을 즐겨 구경하는 선비’를 말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완화삼’, 즉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그 선비는 구름과 물길처럼 흘러가는 유랑의 삶을 사는 나그네이다. 차가운 산길을 오르내리며 마을을 옮겨 다니는 나그네는 구슬픈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들른 강 마을에서 술 익는 냄새가 가득하고 저녁 노을빛이 눈에 어리는 가운데 ‘꽃잎에 젖어’ 잠시나마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시간은 순간일 뿐이고, 이 밤이 지나고 나면 꽃은 질 것이라는 점을 나그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 이라고 말하며 애상감에 젖어든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나그네의 한과 애상감은 시각, 후각, 청각 등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독문) 창비

고풍 의상
이 시는 전통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추는 여인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예스러운 어투로써 고전적 미감을 추구하는 시적 화자의 풍류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봄밤이고, 공간적 배경은 풍경 소리가 울리는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은은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여인은 회장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운혜와 당혜와 같은 전통적인 의상을 하고 있다. 이런 의상으로 추는 춤 사위는 저고리의 정적인 우아함과 치마의 동적인 아름다움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섬세하게 춤 사위를 묘사하면서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밝도소이다, 골라 보리니, 흔들어지이다’와 같은 예스러운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분위기를 한층 돋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와 같은 표현을 통해 고전미에 흠뻑 도취된 화자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배경이나 인물, 그리고 동작 등은 모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시인은 고전적인 우아미를 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수
이 시는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산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한시의 시상 전개 방식인 기승전결과 선경 후정(先景後情)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는 앞부분에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제시하고, 뒷부분에 가서 비애감에 젖어 있는 화자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있다.
첫째 문장에서는 벌레 먹은 기둥과 빛 낡은 단청, 새들이 둥우리를 친 추녀의 모습을 통해 무기력하게 망해 버린 왕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는 큰 나라(중국)를 섬기다 왕조가 거미줄을 쳤다(패망)는 진술을 통해 중국을 섬기던 과거 우리 나라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셋째~다 섯째 문장에서는 몰락한 왕궁에 서서 느끼는 화자의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봉황이 울어 본 적이 없다는 표현을 통해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면서, 이제는 나라의 주권마저 없는 현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살아갈 위치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여섯째 문장에서 화자는 망국의 현실에서 느끼는 자신의 슬픔을 봉황새에 감정 이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망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비애감을 봉황새라는 간접적인 대상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슬픔을 내면화하는 지사적인 품격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승무
이 시는 ‘승무(僧舞)’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인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4음보의 율격이나 소재면에서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9연의 이 시는 춤을 추는 동작의 순서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3연은 여승이 춤을 추기 직전의 모습을 ‘고깔 → 머리 → 볼’로 시선을 이동(위 → 아래)시키면서 묘사하고 있다. 4연은 춤의 시 ·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밤의 정적미를 드러내고 있다. 전체 구성면에서 볼 때, 가장 앞에 올 부분이다. 5~8연은 승무의 춤사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5연은 급박한 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6~7연은 춤사위 중 별을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을 통해 세속적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기원하는 여승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8연에서는 유장한 춤의 모습을 합장에 비유함으로써 승무에서 느껴지는 경건성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9연은 1연과의 수미 상관의 구조를 통해 시상을 마무리함으로써 정적미와 함께 승무의 계속되는 여운을 전해 주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하이얀, 감추오고, 모두오고, 감기우고’ 등의 시적 허용과 ‘이 밤사, 삼경’과 같은 예스러운 표현, 그리고 수미 상관의 구조 등은 이 작품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세속적 번뇌의 승화라는 주제 의식에 기여하고 있다.

다부원에서
이 시는 6·25 전쟁 당시의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종군 작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창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이 주는 참혹함이 나타나 있지만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시인의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역을 휴머니즘의 시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3연은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고 한달 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 전쟁의 상처가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음을 제기하고 있다. 4, 5연에서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시적 화자는 6, 7연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군마와 적군의 시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있다. 8, 9연에서는 '한 하늘 아래 목숨받아' 태어난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워 이제는 시체가 되어 썩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간고등어 냄새'를 통해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10, 11연에서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인식이 없고 바람만 부는 모습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사와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산상의 노래
이 시는 광복을 맞이한 시적 화자의 기쁨을 비유적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시인은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민족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을 염원하고 있다. 광복 전의 화자의 모습을 '시들은 핏줄', '메마른 술' 등으로 표현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에 '종소리'와 '피'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광복을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또 다시 '높으디높은 산마루'에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고 있다. 과거처럼 울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는 선구자로서의 화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조론
중수필.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 비판하고 있는 수필이다. 또한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박혀 있는 지조의 개념을 다양한 일화와 속담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변절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한편 지조 있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우한용)

시의 비밀
수필. 이 글은 저명한 시인인 글쓴이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 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소재의 선정, 시상의 구상, 구상의 언어적 구현, 원하는 표현을 얻기 위한 노력, 창작의 고통, 개요 짜기, 퇴고 등 시 ‘승무’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순서에 따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글 전반에 걸쳐 예술에 대한 글쓴이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하고 치밀한 미적 감각, 표현 하나하나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 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어 글쓴이가 왜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멋 설
수필. 이 글은 ‘멋’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가을 달밤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글쓴이는 삶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친다. ‘멋’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소개하며 삶에 힘겨워 하는 이들과 복을 찾아다니느라 애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멋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멋으로 규정하고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 속에 있으며, 이러한 삶이야말로 멋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고풍스러운 말투와 다양한 수사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승무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군말

이 시는 민족적 정서전통의 아름다움불교적 선미(禪美)라는 조지훈의 초기 시 세계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소재가 되고 있는 승무란 승려가 붉은 가사에 장삼을 걸치고 고깔을 쓰고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추는 춤[독무(獨舞)]을 말한다. 1~3연에서는 승무의 모습그중에서도 머리 부분을 묘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나 뒤에 보이는 외씨보선’, ‘복사꽃 고운 뺨’ 등으로 미루어 승무를 추는 사람은 젊은 여승이라 짐작할 수 있다이 여승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로 감추고 있다그 고깔의 날아갈 듯 가벼운 움직임을 화자는 한 마리 나비와 같다고 말한다언뜻 보이는 여인의 볼에 흐르는 빛은 고와서 서럽고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무대에서 여인은 춤을 시작한다길고 넓은 소매를 휘어 감으며 돌아설 듯 날아가는 여인의 들린 발에 사뿐히 신겨진 외씨버선을 느꼈을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아진 여인의 까만 눈동자와 복사꽃 고운 뺨에 흐르는 두 방울이 클로즈업된다여인의 그 눈물로 인해 이 번뇌는 춤과 함께 밤하늘의 별빛으로 멀어진다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춤이 세사(世事)에 시달리며 겪은 번뇌를 이기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임을 알게 된다다시 춤이 이어진다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은 거룩한 합장(合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혼신의 몸짓이다밤은 깊어져 삼경(三更밤 12시 전후)인데 여인의 하얀 고깔은 나비처럼 날아갈 듯하다아니나비가 되어 번뇌와 함께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이 시는 승무를 추고 있는 여인의 외적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여인이 마음속의 번뇌를 춤으로 흩어 버리고자 하는 내면의 소망까지 그려 내고 있다.

 

 

<참고

승무의 창작 과정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그다음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그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靜止)하는 찰나의 명상(冥想)의 정서를 그릴 것관능(官能)의 샘솟는 노출(복사꽃 고운 뺨)을 정화(淨化)(별빛)시킬 것그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翹翹)한 달빛과 동터 오는 빛으로써 끝맺을 것.

이것이 그때의 플랜(계획)이었으니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퇴고하는 데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 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요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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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꽃동산 건너편에는 조지훈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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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 조지훈선생이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으로 
한학을 공부했던 조지훈이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나와 한학과 불교, 현대문학을 

어우르는 전통과 선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시인이다.  '

 

파초우'는 조지훈이 스스로 '방랑시편'이라고 했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연을 떠돌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자로, 저녁에도 소리를 매개로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신을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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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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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선생은 자연과 벗한다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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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시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앞, 문과대학 뒤)

 

 

 

[조지훈(趙芝薰) 시비 -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는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 밤사 뀌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선생의 삶]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선생은 1920년 12월 3일(음)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조헌영(趙憲泳) 공과 유노미(柳魯尾) 여사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전통적인 유학 집안에서 성장한 선생은 「고풍의상」(1939. 4), 「승무」(1939.12), 봉황수」(1940.12)가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3월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낙향하여 향리에서 은거하였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 시인과 함께 「청록집」을 출간하여 광복이후 한국 현대시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7년 10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의 시집과 「시의 원리」「한국문화사 서설」「한국민족 운동사」등의 논저를 간행하였다. 시인이자 논객으로 폭넓은 사회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1968년 5월 17일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2006년 9월 29일

조지훈시비건립추진위원회

시비 제호와 전면의 시 글씨 이 동 익, 조각 전 항 섭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義憤)이 터져

노도(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 모르고 연구실(硏究室) 창턱에 기대앉아

먼 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午後) 2시(二時)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議事堂)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이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氣槪)가 없다고

병든 선배(先輩)의 썩은 풍습(風習)을 배워 불의(不義)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을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淸明)한 하늘같은 머리를 나무램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侵略)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우로(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민족만대(民族萬代)의 맥맥(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現實)에 눈감은 학문(學問)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너희 선배(先輩)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氣槪)가 없었던 것이다.

매사(每事)에 쉬쉬하며 바른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순수(純粹)의 탓, 어찌 가책(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한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 . . .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行)하기는 옳게 행(行)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 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중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하늘도 경건(敬虔)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自由)를, 정의(正義)를, 진리(眞理)를 염원(念願)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永遠)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1960. 4. 20.

 

 

 

 

[건립 취지문]

 

조지훈 선생 시비 건립은 고대인의 오랜 소망이었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제자들은 30여년 전부터 안암의 언덕에 선생의 시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한국 인문학의 요람이요, 지성의 산실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과 국어국문학과 설립 60주년을 계기로 마침내 이를 실현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우회, 민족문화연구원, 고대신문 동인회 그리고 고려대학교 재직 국어국문학 전공 교수 등을 비롯하여 여러 문인 및 독지가들의 정성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제 선생의 초기 대표작 「僧舞」(「조지훈시선」수록본)와 제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를 돌에 새겨 비를 세우니 고대인은 물론 고려대학교 교정을 찾는 젊은 세대에게 선생의 섬세한 서정과 개결한 정신이 생생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조지훈문학관으로 가다...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노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 조지훈, 1958년 <신태양>에 발표한 ‘멋 설(說)’ 중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는다면 우물쭈물다가 결국, 입을 다물 것 같다. 삶의 목적을 찾으려 했지만 아직 헤매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그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리라. 

 

소란스러운 여름. 하필이면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이 비 오는 날이다. 하는 수 없이 며칠 미루었더니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은 몸이 간지러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괜스레 방을 뒤집고, 소설책을 넘겼다. 장마가 어느 정도 지나간 무렵 영양으로 향했다. 아직 가는 비가 내렸지만, 촉촉한 비 냄새와 회색의 하늘은 낭만적이기만 했다. 

 

 

 

많이 아는 사실이지만, 영양의 고추 사랑은 엄청났다. 네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영양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로등에 달린 앙증맞은 빨간 고추는 흐린 하늘 덕분인지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영양군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해발이 가장 높은 곳으로, 경북 북부의 3대 오지 (봉화, 영양, 청송) 중 한 곳이다. 영양은 문학의 고향으로 불리는데, 조지훈 시인뿐 아니라, 시 「내 소녀」를 남긴 오일도(1901~1946) 시인과 소설가 이문열이 영양 출신이기 때문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약 20분을 달려 선바위에 도착했다. 문학관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선바위에 관한 설화를 읽었기에 그 정경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운룡지에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남이장군이 물리쳤다. 그는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고, 반란을 잠재웠다. 남이장군이 물길을 돌린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다. 

 

선바위를 한참 바라보던 때, 엄마와 함께 온 듯한 여자아이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바위에 선이 많아서 선바위에요?” 엄마는 저 멀리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신선 바위라서 선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말했더니 곧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선바위로 향하며 생각 없이 내디딘 길은 ‘외씨버선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조지훈, 「승무」 중에서  

길 이름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서 땄다. 전체 구간이 나와 있는 지도를 보면 언뜻 버선의 선 모양을 닮기도 했다.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영양까지 약 170km 정도이고, 총 13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선바위 관광지가 속해 있는 구간은 오일도 시인의 길이었고, 그 이후로 조지훈 문학길이 이어진다. 조지훈 문학길은 영양 전통시장에서 조지훈 문학관까지 총 13.7km다. 

 

 

▲ 영양 서석지. 중요 민속문화재 제108호  



지도를 따라 꽤 오랜 시간 걷다 보니 서석지에 도착했다. 서석지는 광해군 5년에 정영방 선생이 만든 연못으로, 담양의 소쇄원, 완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민간 연못 정원으로 선정되었다. 서석지 입구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기와집 한 채와 연못, 돌담이 전부였다.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못을 가득 덮고 있는 커다란 연잎과 분홍의 연꽃 위에는 빗방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택시에 올랐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네 시쯤 있었기 때문에 주실 마을까지 서둘러 가야 했다. 삼십 분가량 달렸더니 조지훈 문학관과 주실 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왔다. 주실 마을 입구에 있는 ‘주실쑤’에서 내렸다. 마을은 ‘시인의 숲’, 일명 ‘주실쑤’라 불리는 보호 숲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마을 길을 따라 주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동네였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추밭은 넓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대한 주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이전부터 남달랐다 한다. 마을엔 예로부터 마을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하나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주실이 배 모양의 지형이라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할 것이며, 우물을 파면 동네에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고, 50리나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한다.   





 

▲ 지훈문학관의 현판은 그의 아내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  

 

주실 마을에 있는 가장 큰 기와집으로 향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인 조지훈 시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문학관이었다. 문학관 내에 그의 대표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지훈의 학창 시절 모습과 장남 광렬이 그린 지훈의 모습(20대, 30대, 40대 초반, 40대 후반)  

 

조지훈 시인의 본명은 조동탁으로, 1920년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창작해보기도 하고, 당시의 소년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팬』,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의 문화를 접했다. 지훈은 열한 살에 형 세림과 함께 <소년회>를 조직, 마을 소년의 중심이 되어 문집 『꽃탑』을 펴냈다. <소년회>는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북간도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처참하고 애절한 모습을 소인극으로 공연하는 등 항일의식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지훈 형제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는데, 시인은 당시를 ‘열여섯 살짜리와 열세 살짜리 어린 형제가 외가에 다니러 가도 경찰의 내방을 받던 웃지 못할 감시의 세월’이라고 기억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훈은 현실을 비통해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도왔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지훈은 또다시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지훈도 <조선문인보국회>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추천 시 몇 편 발표한 것이 무슨 시인이겠느냐는 태도로 입회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었다.

  


▲ 지훈문학관 정경

 

그는 광복 이후에 시 창작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교육자로 사는 삶도 시작했다. 그러나 곧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났고, 그의 가족사에 시련이 닥쳤다. 할아버지는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고, 어머니는 전쟁 때 얻은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아버지와 매부는 납북되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익사하는 커다란 수난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참변은 그에게 시에 대한 열망을 앗아갔다. 그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는 작업보다는 이미 발표된 자신의 시들을 펜으로 정서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그 이후, 지훈의 육필시집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지훈은 지사로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돕는 등 민족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지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문장』지 추천시 모집에 응모하여 그 제1회로 「고풍의상」이 당선된 것은 1939년 봄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고풍의상」은 서구시를 모방하던 그 때까지의 나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이었으나 실상은 강의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은 것이 뽑힌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문화에 대한 나의 애착, 그중에서도 민속학 공부에 대한 나의 관심이 감성 안에서 절로 돌아 나온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나의 역정」(『고대문화』)중에서

  

조지훈 시인은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삼 회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고풍의상」 이후, 열한 달에 걸쳐 「승무」와 「봉황수」를 지었고,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 자주빛 호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 곡선을 이루는 곳 /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조지훈 「고풍의상」 중에서 



 

▲왼쪽 사진, 왼쪽부터)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 오른쪽 사진) 청록집과 청록시선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광복 후 1946년, 합동 시집인 『청록집』을 냈다. 이를 계기로 이들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으로,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담은 시가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를 담고 있다.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은 매우 달랐다. 청록파 시인 셋이 걸어갈 때면 항상 지훈이 가운데서 걷고 두진과 목월이 양옆에서 걷곤 했는데, 지훈은 성큼성큼 걸어 앞섰으며, 두진은 매번 뒤처졌고 그 둘 사이엔 목월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걸을 때 모습을 보면, 지훈은 항상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걷고, 두진은 직선적인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채 걸었으며, 목월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걷는 모습이 다르듯이 이들의 성격이나 시 세계 또한 달랐다. 지훈은 고전미와 선미를 드러냈고, 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 『풀잎단장』 / 『창에 기대어』 / 『조지훈 시선』  

 

 

『풀잎단장』은 조지훈 시인의 첫 개인 시집이다. 삐뚤빼뚤 쓰인 표지 글씨 ‘풀잎단장’은 당시 만 7세인 맏아들 광열이 크레용을 사용하여 쓴 것이다. 『창에 기대어』는 그의 첫 수상집으로,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수필, 감상문 등을 한자리에 모아서 펴낸 책이다. 『조지훈 시선』으로 지훈은 1956년에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조지훈 시선』이후 그의 시집에는 역사의식이 담겼다. 1959년 발간된 『역사 앞에서』는 광복 직전∙직후의 시편들이 함께 실려 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던 지훈이었지만,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의 증언자나 저항시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시편은 『여운』(1964년)에도 계속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정리하는 뜻에서, 그동안 빠졌던 시편을 함께 간추려 출판한 시집 『여운』은 지훈의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지훈은 긴 여운을 남긴 채 50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훈이 생전에 사용했던 여러 유품도 볼 수 있었다. 그가 30대 중반에 착용한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던 부채, 행사 때 주로 사용하던 넥타이와 안경 등을 보니, 그가 생전에 꽤 멋쟁이였을 것 같다. 한쪽 벽면에는 부인 김난희 여사가 서예와 회화로 남편의 시를 표현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힘찬 붓의 놀림과 섬세한 색감이 조지훈 시인의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오른쪽 그림) 지훈의 막내아들(조태열)이 고등학생 때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조지훈이 서재에서 집필할 때 쓰던 문갑과 서예도구 문학관에는 유독 지훈의 초상화가 많았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그린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감수성과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물려받아서였는지,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감각적이었다. 

 

 

 

  

문학관의 끝, 한쪽 벽면에는 조지훈 시인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백 개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는 투병 중에 여동생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가 흘러나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볼 수 있다.  

 

 

 

▲ 호은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밖으로 나오니 멈췄던 비가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간지러운 빗방울이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조지훈 시인이 태어난 호은종택으로 향했다. 호은공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 집은 주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일부 불탄 것을 1967년 복구하였으며, 경북 북부 지방의 일반적인 반가 형식인 ‘ㅁ자형’ 몸채에 ‘ㅡ자형’ 대문채가 결합한 형태다.

 

 

 

어디선가 빗방울 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물이 고인 석조가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개구리가 생물인지 조형물인지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나 내게 뛰어오를까 봐 발걸음 하나 뗄 때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은종택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삼불차’가 있다. 이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첫째는 재불차(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 둘째는 인불차(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셋째는 문불차(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다. 이러한 삼불의 정신은 수백 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 씨들로 하여금 언제나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 지훈시공원

 

호은종택과 문학관 뒤편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산골짜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한 공원에는 지훈의 동상과 함께 시비 27편이 세워져 있다. 한 작품씩 감상하며 나무계단을 따라가다 보니 쉴 수 있는 쉼터와 자그마한 공연장이 있었다. 

 

 

▲ 정자에서 바라본 조지훈 시인의 동상과 승무 시비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빈 臺(대)에 황촉 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 梧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번뇌)는 별빛이라 //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합장)인양 하고 //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삼경)인데 /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조지훈, 「승무」  

 


▲ 월록서당. 경북유형문화재 제172호 
(현판의 글씨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이 직접 쓴 것)  

 

주실 마을을 뒤로하니 입구였던 마을 길이 출구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월록서당이었다. 지훈은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영양보통학교에 몇 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의 교육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지훈이 선대의 가학을 이어받아 가문을 지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학∙조선어∙수신∙역사 등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월록서당은 늘 머릿속으로 생각해오던 서당의 모습이었다. 계단과 대청마루 사이에 턱이 높아, 올라가려면 다리에 힘을 많이 주고 펄쩍 뛰어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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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꽃 - 조지훈(趙芝薰)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 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趙芝薰) / 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경북 영양에서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한 후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 전문 강원의 강사를 지냈으며, 광복 후 조선 문화 건설 협회 회원 및 명륜 전문 강사를 거쳐 사망 때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9년에 <문장>지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에 동기생인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여 이후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초기 시는 민족적 정서와 자연 등을 소재로 삼았고, 후기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1957년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 문화사 대계>를 기획, <한국 문화사 시설> <신라 가요 연구 논고> <한국 민족 운동사>등의 논조를 남겼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등과 수필, 평론집으로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돌의 미학>, 역서로 <채담>이 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건립되었다.

 

조지훈시인의 주도 18 단계를 아시나요? 조지훈 선생님은 '신출 귀몰의 주선' 혹은 '행동형의 주걸'이라고 불리셨다고 합니다.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하셔도 절대 자세를 흐트리는 법이 없으셨다고해요.

 

이런 선생님께서 술을 마시는 격조, 품격, 스타일 그리고 주량 등을 따져 만드신 선생님만의 주도 18 단계중에 여러분은 어떤 단계이신가요?

<참고>-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마시지는 않으나 안 마시는 사람 (9급)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8급)
3. 민주(憫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겁내는 사람 (7급)
4. 은주(隱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홀로 숨어 마시는 사람 (6급)
5. 상주(商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지만 무슨 잇속이 있어야만 술값을 내는 사람 (5급)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 (4급)
7. 수주(睡酒):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3급)
8. 반주(飯酒): 밥맛을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2급)
9. 학주(學酒): 술의 진경(珍景)을 배우면서 마시는 사람. 주졸(酒卒) (1급)
10. 애주(愛酒):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단≫
11. 기주(嗜酒): 술의 참맛에 반한 사람. 주객(酒喀) ≪2단≫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을 터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13. 폭주(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함께 유유자적 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17. 관주(關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게 된 사람. 주종(酒宗) ≪8단≫
18. 폐주(廢酒):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열반주(涅槃酒)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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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시인을 찾아가다

 

                  法門 박태원 시인

 

 

 북한강문학비 건립과 북한강문학제 추진계획의 일환으로 남양주시의 문화유산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남양주시는 중앙에 솟아있는 천마산(해발 810m)을 축으로 하여 시청사가 위치하는 금곡동과 평내동,호평동,오남읍,화도읍,조안면,와부읍,양정동,진접읍이 빙둘러 안주하고 있다.

외곽으로는 축령산(879m),서리산,주금산,불암산(508m),수락산(638m),예봉산(683m),운길산(610m),문안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고, 남쪽으로는 북한강이 산과 산사이의 협곡을 도도히 흐르고 있어서 산과 계곡, 강의 풍광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전원도시이다.

 현재 남양주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문화축제로는 세계야외공연축제, 다산문화제, 퇴계원산대놀이, 남양주청소년백일장, 도곡도예전, 남양주합창제, 실학축전(경기도), 몽골문화촌, 국악공연, 무용공연 등이 있다.

 북한강문학제가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문학축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문학창작과 감상의 즐거움을 작가와 독자가 서로 향수(香受)하며 올바른 비평으로 문학적 심미안을 열어주고 한국문학사상과 정서의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

 창작 능력의 고양을 위해서는 문학 이론과 문학 예술의 전형성을 습득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서와 사상을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문화의 세기인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사이버문학이 작가와 독자를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결하는 문학의 마당이 되어 있으므로 전체 사이버 문학클럽이 하나로서 네트워크될 수 있도록 조치하면 각 클럽의 개성을 발전시키면서 전체인 한국문학의 발전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야외문학제에서는 시, 수필, 단편소설을 낭송하거나 시화전, 시사전을 열어 발표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현장에서 여러 가지 테마의 문학투어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강 야외예술공연장 인근에 있는 금남산 등산코스, 두물머리 다산기념관, 모란미술관, 금남유원지 나루터, 남양주 영화촬영소, 운길산 수종사 등이 문학예술기행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세미나를 개최하여 강연과 토론을 통하여 문학사상의 비젼을 넓혀야 하겠다.

 남양주시에 연고가 있는 문인, 지사, 선비들의 유적과 작품을 발굴하고 정리 연구하여 발표하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우선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묘소(위치:마석우리 심석고등학교.마석교회 뒤)를 탐방하고 선생의 삶과 사상,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감상하기로 한다.

 

 조지훈 시인의 묘소는 천마산 봉화산 송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양지바른 기슭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모친(全州 柳씨)의 분묘 앞에 나란히 누워있다.

1920년 경북 영양군에서 출생한 조지훈 시인은 지병으로 인하여 48세인 1968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천하셨다. 형은 젊은 나이에 돌아 가시고, 어린 자신에게 한학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할아버지(趙寅錫:구한말 서헌부 대간)는 1950년 7월에 자결하셨다. 아버지(趙憲永 :한의사,초대.2대 국회의원)도 6.25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셨으니 육친을 別離한 고통이 심하셨을 것이다.

 

절망의 일기

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다//아침밥이 모래같다/국물을 마셔도 냉수를 마셔도/밥알은 영 넘어가지 않는다//마음이 이렇게도/육체를 규정하는 힘이 있는가//마포에서 인도교 다시 서빙고 광나루로/몰려나온 사람들 몇 십만이냐//붉은 깃발과 붉은 노래와 탱크와/그리고 사면초가 이 속에 앉아//넋없이 피우는 담배도 떨어졌는데/나룻배는 다섯척 바랄 수도 없다//아 나의 가족과 벗들도 이 속에 있으련만/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마침내 숨어 앉은 절벽에서/한 척의 배를 향해 뛰어내린다//헤엄도 칠 줄 모르는/이 절대의 투신//비오던 날은 개고 하늘이 너무 밝아 차라리/한강의 저 언덕에서 절망이 떠오른다 처참한데//아 죽음의 한순간 延期

 

 선생은 20세 되던 해에 김난희씨와 결혼하여 3남1여를 슬하에 두었으며, 묘비명은 청록파 시우인 박두진 시인이 쓰셨다. 선생은 19세의 약관(若冠)의 나이에 “고풍의상”,“승무”,“봉황수”로 시단에 나왔고, 일제 강점하의 이차대전말기의 암울과 강개를 오직 시와 학문과 참선으로 오대산 깊숙이 숨어서 달래었다. 선생은 학문과 詩, 志氣가 鼎足의 균형을 이루어 당대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순수한 良心의 문사이며 대쪽같은 선비셨다.

시집으로 “풀잎단장”(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앞에서”(1959), “여운”(1964)을 발간 하였고, “한국민족문화사 서설”,“한국민족운동사”를 저술하였다.

조지훈 시인은 21세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방한암(초대 종정)선사께서 주석하시는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불교외전 강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詩禪一如를 모색했으며 시어의 압축과 상징을 얻었다.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해방 후에는 문화전선의 전위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산상(山上)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6.25 골육상쟁의 비통함을 목도하고 “다부원에서“를, 4.19혁명의 파도치는 감격을 노래하는 ”혁명“을 남겼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묻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혁명

아 그것은 洪水였다./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喊聲/백성을 暗默 속으로 몰아넣는//양심과 純情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푸른 샘물이 넘쳐 흐르는/쓰레기를 걸레 쪽을 구더기를 그/罪惡의 구덩이를 씻어내리는/아 그것은 波濤였다./東大門에서 鐘路로 世宗路로 西大門으로/逆流하는 激情은 바른 民心의 새로운 물길,/피와 눈물의 꽃波濤/東大門에서 大韓門으로 世宗路로 景武臺로/넘쳐흐르는/이것은 義擧 이것은 革命 이것은/안으로 안으로만 닫혔던 憤怒//온 長安이 출렁이는 이 激流 앞에/웃다가 외치다가 울다가 쓰러지다가/끝내 흩어지지 않는 피로 물들인/온 民族의 이름이여/일어선 자여//그것은 海溢이었다./바위를 물어뜯고 왈칼 넘치는/不退轉의 意志였다. 고귀한 피값이었다.//正義가 이기는 것을 눈 앞에 본 것은/우리 평생 처음이 아니냐/아 눈물겨운 것/그것은 天理였다./그저 터졌을 뿐 터지지 않을수 /없었을 뿐/愛國이란 이름조차 차라리/붙이기 송구스러운/이 빛나는 波濤여/海溢이여!

 

조지훈 시인의 시의 편력은 심미주의, 禪의 미학, 방랑시, 생명에의 향수, 애정, 사회시로 변천하는데, 이는 묘사시에서 상징시, 실제시(實際詩)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전적 우아미를 무용(승무), 의상(고풍의상), 건축(봉황수), 도자기(향문)에서 발견하였고, 감정과 생각을 초탈하여 자연을 직관으로 관조하는 선의 적적한 美(마을,고사,산방)를 구현하고, 나아가 格外의 본성은 생명에의 경외심으로 발현되어 자연의 생명과 동화되어(흙을 만지며,화체개현,밤,창) 역사의 질곡에서 고통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됐다.(패강무정,다부원에서,혁명)

1948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민족의 사상과 정서의 미학을 연구하여 정리하였다. 한국민족의 사상의 뿌리를 하,은,주 이전의 東夷文化圈인 고대국가 배달국,단군조선에서 찾았다. 천인합일의 샤머니즘적인 사상과 정서가 한국민족의 마음 근저에 은근히 흐르고 외래의 사상,종교,문화의 알맹이를 융섭하여 한국전통의 문화를 이어왔다고 밝혔다.단군시대의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三一철학과 天地人합일사상은 원효,의상,퇴계,이이,정약용,최제우로 이어져 내려 왔으며, 원융무애한 격외의 멋이 한국민족정서의 미학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지조론을 저술하여 일관되게 순수한 一心을 지키는 것이 선비의 지조이며, 역사는 혼탁한 세사의 와류에 흔들리지 않는 지사에 의하여 관조된다고 하여 문인의 道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조지훈 지조론

*【해설】
조지훈의 교훈적 중수필. 1960년 3월 [새벽]지에 발표. 1962년 같은 표제의 수필집이 발행되었다.
<지조론>은 1950년대 자유당 말기의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 지도자들 마저 어떤 신념이나 지조도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조를 적절한 예시와 속담, 일화 등을 통해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1950년대의 부정과 부패로 일관한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 정권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는 이들을 단죄함으로써 민족사의 새로운 자각과 지평을 열어 나가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개관】
▶작자 : 조지훈
▶갈래 : 중수필, 교훈적 수필
▶성격 : 논리적, 사회적, 공적(公的), 경세적(警世的), 교훈적, 설득적
▶문체 : 한문투의 강건체, 의고체(擬古體)
▶특징 :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법과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
▶구성 : 서론 본론 결론의 3단 구성
▶제재 : 지조(志操)
▶주제 : 
-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지조 강조 
- 지조를 지키는 삶의 중요성
▶출전 : [새벽](1960. 3)
*【표현상 특징】
다양한 일화를 제시하여 지조와 변절의 의미를 이해시킴. 정치인의 옳지 못한 행태를 준열하게 비판함. 변절을 고정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범한 범절이나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는 그 변절이 용서될 수 있다는 열린 시각을 취함.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교와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했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어휘·어구 풀이】
<확집(確執)> :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지켜 나감
<위의(威儀)> : 위엄이 있는 엄숙한 차림새
<곤고(困苦)> : 곤란하고 고통스러움
<경성(警醒)> : 타일러 깨우침
<정상(政商)> : 정권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
<권모술수(權謀術數)> : 권모와 술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인정이나 도덕도 없이 권세와 중상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쓰는 술책.
<염결공정> : 청렴하고 결백하며 공평하고 정대함
<청백강의> : 청렴하고 결백하며 강직하고 씩씩함.
<타매> : 침을 뱉고 욕을 마구 퍼부음
<음부적(淫婦的)> : 음탕한 여인과 같은
<환부> : 홀아비
<속현> : 아내를 여읜 뒤 아내를 다시 맞음
<본능고> : 본능적 욕구에 의해 발생되는 고통
<분반> :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음
<자시> : 무슨 일이 그러려니 하고 저 혼자 속으로 믿고 겉에 드러냄
<교지(狡智)> : 간사한 재주와 지혜
<욕인> : 남을 욕함.
<황음> :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
<화간> :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합의하여 육체적으로 관계함
<만근> : 몇 해 전으로부터 지금까지. 근래
<동궤> : 같은 궤도. 같은 선상에 있음
<율하지> : 다스리지
<정부(貞婦)> : 현철하고 정조가 곧은 아내.
<지사시인> : 지사인 시인
<정탈(定奪)> : 임금의 재결. 옳고 그름을 가리어 결정함
<매천 필하 무완인> : 매천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소인기(少忍飢)하라> : 배고픔을 좀 참으라
<난정> : 어지러운 정치
<적빈이 여세라> :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 심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음.
<지조의 매운∼지녔던 것이다> : 지조를 지닌 분들은 생활의 모습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여, 지조를 지키는 일이 범상(凡常)치 않음을 강조한 표현.
<이와 같이 생각하는∼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이 글을 쓰는 이유, 즉 정치가들이 지조를 지키며 올바른 정치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 부분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변절의 낙인밖에 없을 것이다> : 변절자들은 나름대로의 핑계거리를 돌려대지만, 그 결과는 오욕(汚辱)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다.
<좌옹(佐翁), 씻을 수 없었다> : '국민 총력 연맹 조선어 학회 지부'라는 어용 단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킨다는 민족적인 일을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비난받지 않는 것과는 달리, 민족을 위한 아무런 업적이 없이 변신(變身)만을 한 이들은 변절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매천 필하 무 완인> : 매천의 붓에 한 번 오르면, 이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 평생 의를 위해 지조를 지킨 황매천 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난 표현으로, 그의 필봉 또한 매우 날카롭고 비판적이어서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가의 부녀가∼자위할지 모른다> : 현 세태의 보편적 분위기를 일러주고 있다. 지조를 지키기 어려운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전문】 
조지훈 지조론


『- 변절자를 위하여 -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
,깨우침의 각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정치가와 경제활동하는 상인의 결합)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떠다님)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청렴과 결백),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굳고 의연함)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침뱉고 꾸짖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웃음이 터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기이한 성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 단(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교활한 슬기)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침을 뱉음)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년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 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이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배고픔을 조금 참다)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아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씻은 듯하다)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고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 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쏠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小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
.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全文)  


*【감상】

이 글은 1960년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상 모습을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지조란 역사의 개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그것을 초지일관(初志一貫) 밀고 나가는 것이다. 또한 세태에 따라 다소 태도를 바꾸더라도 개과천선(改過遷善)으로서의 변절(變節)일 때는 도리어 지조를 찾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변절은 단순하게 '절개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가며,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민충정공,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지조론>의 전반부에서는 지조의 정의와 가치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이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개진하고 지조에 관한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개진하고 지조에 관한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지사와 정치가는 다른 것임을 유연하게 인정하면서도 난국의 지도자는 직업 정치인보다도 지사적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수필은 정치적 혼란기에, 권력에 야합하면서 스스로 신의를 저버린 정치 지도자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변절자를 겨냥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하다. 자기 생활의 기록으로서의 수필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과 관련되어 있다.
작가는 정치 지도자를 일반 민중과 구별한다. 일반 민중은 지조를 꺾고 살아도 되지만, 정치 지도자만큼은 변절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작가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위해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만큼, 그만한 책임도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에게 지조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지조는 우국지사의 충성심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정직성, 신의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일반 민중에게는 지조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말은 일반 민중의 인격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치 지도자에게 지조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생각을 바꾸면

                         /박 완 서--- 

그들은 그런 대로 재미가 있을지 몰라도 당하는 쪽에선 고문과 같았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느네들한테 노래할 자유가 있는데 나한테는 왜 안 할 자유가 없냐?고 외치고 말았다. 너무 진지하게 외쳤던지 나름대로 흥청거리던 분위기 일순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아지는 게 아니었다. 
(중략 : 유신 시절 남들이 자유를 외칠 때 이를 남의 일인 듯이 외면하고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져 나온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데서 자유를 찾는 자신의 모습이 더 부끄럽다는 진술이 담겨 있다.) 
나는 나의 유치함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7,80년대를 끽소리 한 마디 못 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씩이나,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런 자기 혐오는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는 열등감으로 이어져 온종일 우울했다. 그러고 있는데 고등 학교 동창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왜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먼저 이쪽의 우울증을 짚어 내기에 나는 왜 노래도 못 할까? 하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구는 딱하다는 듯이 네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허게, 라고 말하는 게 하닌가. 나는 그 한 마디를 뛸 듯이 반기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기분이 담박 맑아졌다. 노래도 못 한다고 생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無用之物)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10년 전 참척(慘慽)을 당하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는 원망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거였다. 원망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까지 겹쳤다. 저 여자는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 수군거리면서 손가락질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나만 보고 흉보는 것 같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어도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슬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게 원망과 치욕감이었다. 하늘도 부끄럽고 땅도 부끄러웠고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피할 곳이 없으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때 만난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한 마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조지훈 묘역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 -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풀잎 단장>(1952)-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사색적, 선(禪)적, 산문적

 표현 : 그윽한 어조와 서술적 이미지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단장 → '짧은 시가나 문장'이란 의미로,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글을 가리킨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겸손의 표현

   * 무너진 성터 ~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

       → 화자가 현재 서 있는 시적 공간으로,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이 있는 언덕에 화자는 서 있다. 바람은 강한 성도 무너뜨리고, 단단한 바위도 깎아 버리는 큰 힘을 지닌 것으로, 화자가 현재 있는 언덕은 이 같은 바람이 지금도 불고 있음을 떠가는 구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

        '조찰히'는 '깨끗하다'의 의미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만 볼 때 바람은 풀잎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긍정적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다르게 접근해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풀잎은 현재 성과 바위에 비해 연약한 존재이면서 그것들과는 달리 시련(=바람)을 참고 견디며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풀잎과 화자가 서로 동화(同化)되는 모습을 형상화함.

   * 우리들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풀잎과 화자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공동체 의식이나 동질감을 드러낼 때 쓰이는 표현이다. 전반부에서 화자와 풀잎은 서로 구분된 관계였지만, 3행과 4행을 거치며 화자는 풀잎과 동화됨을 느끼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너와 나는 '우리'로 보다 가까워지게 됨.

   * 아름다운 분신

        '우리'와 의미상 유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분신이란 풀잎에 대한 화자의 동질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고달픈 얼굴'은 화자와 풀잎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화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고달픈 얼굴이라는 주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고, 동시에 이 표현을 통해 화자의 처지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다. 화자 또한 풀잎처럼 세상의 힘겨움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내는 풀잎을 보며 '웃으며 얘기하노니'라 하여 교감(=동병상련)과 함께 풀잎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

       → 시적 공간인 언덕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때의 흐름'은 의미상 바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한 떨기 영혼 →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풀잎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유를 통해 화자의 경회감을 드러내고 있다.

   

 제재 : 풀잎

 주제 고달픈 삶의 체험과 생명에의 외경감

           운명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화자가 서 있는 언덕의 풍경(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

◆ 3~4행 : 풀잎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

◆ 5~6행 :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

◆     7행 : 화자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다부원에서>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이 시의 시상 전개를 살펴보자.

  → 1행에서는 풀잎이 피어 있는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고 있다.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는 풀잎의 생명력이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2~4행에서는 허무하고 뜬구름 같은 인생을 관조하면서 한 줄기 바람에 산뜻하고 깨끗하게 온갖 고뇌를 씻어 버리는 것 같은 풀잎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5~6행에서는 영탄적 어조로 바뀌면서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된다. 작자의 인간관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의 시선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 행에서는 시적 자아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이 드러난다. 풀잎을 통해서 대자연의 질서를 느끼고 있다.

 

2. 이 시의 시상 전개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은 우주의 조화와 생명 감각을 형상화한 시로, 자연의 위대성에 대한 자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3. 이 시에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행을 찾아보자.

  → 5행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된다.

 

4. 시적 화자가 생명 현상에 대해 경건한 동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5. 이 작품에 드러난 '풀잎'의 자세를 생각해보자.

  → 풀잎은 주어진 숙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혀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6. 이 시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살펴보자.

  → 의연함, 담담함, 고고함, 경건함

 

7. 이 시에서 '풀잎'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 이 시의 '풀잎'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자재(自在)하는 존재로, 이 시에서 '풀잎'은 단순한 자연물도 아니고 어떤 사회 정치적 함의를 지닌 상징물도 아닌,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담고 있는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은 무한한 우주와 자연에 비해 볼 때 아주 미미하고 연약하고 유한하지만, 그와 같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겸허하게 수용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풀잎'은 지고지순한 존재로 고양된다. 이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풀잎'이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혹은 조지훈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임은 말할 것도 없다.

 

8. 이 시에서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시어를 찾아보자.

  → 바위, 구름 : 풍설에 깎여 왔지만 한 곳을 지키고 있는 '바위'는 변하지 않는 자연이며, 아득히 손짓하며 더가는 '구름'은 늘상 변화하는 자연이다. 이 둘의 대조는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9. '고달픈 얼굴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에 나타난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생각해 보자.

  → 세속적 삶의 어려움을 자연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화해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는 어느 새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작은 존재로 축소된다. 즉 '나'는 '풀잎'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대자연의 일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자연)'과 고달픈 삶을 사는 '나(인간)'는 친화와 교감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세속적 삶의 어려움을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화해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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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연구'로 사학도 소리를 듣다 

종국이 <한국근대인물백인선>의 ‘이상편’에서 쓴 바에 따르면, 이상은 생전에 단편 9편, 수필 약 20편, 그리고 시 99편을 남겼다고 돼 있다. 제2권(시집)에 실린 작품을 일별해보자. 먼저 ‘척각(隻脚)’ 등 미발표 유고 9편, 오감도(烏瞰圖) ‘시(詩) 제1호’부터 ‘시(詩) 제15호’까지 15편, 다시 ‘오감도’ 편의 8편, ‘무제’ 편의 13편, ‘이상한 가역반응’ 편의 7편, ‘이단(易斷)’ 편의 5편, ‘3차각설계도’ 편의 7편, ‘위독(危篤)’ 편의 12편, ‘건축무한육면각체’ 편의 7편 등 모두 83편이 실려 있다. 말미의 부록편에는 일어로 쓰여진 미발표 유고 9편 등의 일어 원문을 실었다. 

본문에 앞서 일문 시 역자인 유정씨의 한 마디에 이어 ‘미발표 유고’ 9편을 직접 번역한 종국의 한 마디도 언급돼 있다. 이어진 ‘소개의 말’에서는 그가 미발표 유고 9편을 입수한 경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상이 도쿄에서 작고했을 때 그의 미망인이 도쿄에서 가지고 나온 고인(이상)의 사진첩 속에 밀봉돼 있던 것을 그 후 20년간 유족(부인)-모친-누이동생 손을 거치면서도 사진첩으로 여기고 보관해 오다가 이번 <이상전집> 간행을 계기로 우연히 발견해 입수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으나 지질 등을 미루어 볼 때 이상이 도쿄 시절에 쓴 것이라는 것이 종국의 평가다. 종국은 자신의 눈앞에서 그 밀봉된 것을 뜯고 작품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고인의 많은 말인 양 감개무량했다”고 적었다. 

마지막 제3권은 수필 18편을 싣고 있다. 부록으로 이상 연구, 이상 약력, 작품연보, 관계문헌일람 등을 실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대목은 부록편이다. ‘이상 연구’는 앞서 밝혔듯이 1년 전(1955년) 12월에 <고대문화>에 ‘이상론 1’로 발표한 글을 독립된 형식으로 수정, 개작한 것이다. 그의 첫 ‘이상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지는 “스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가 되어버린 이 ‘비극의 담당자’는, 절대자의 폐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속도적 사건-절망, 부정, 불안, 허무, 자의식 과잉, 데카단, 항거 등 일체의 정신상의 경향-을 그의 문학에다 반영함으로서, 실로 보기 드문 혼돈, 무질서상(相)을 일신에 구현하고 만 것이었다”에 압축돼 있다고 본다. ‘이상 약력’ 항목의 끝에서 ‘본 약력은 <이상선집>의 기록을 실지조사에 의하여 정정보필(訂正補筆)한 것임’이라고 밝힌 걸로 봐 ‘선집’에서 오류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연보’ 항목에서도 ‘본 연보는 실지조사로서 확인함 것임’이라고 밝혀 편찬 과정에서 꼼꼼한 현장조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3권 말미에 ‘발(跋)’, 즉 발문이 실려 있는데 본문만큼이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직 그는 문단에 얼굴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한 형편인데 문인을 거쳐 벌써 ‘사학도’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R형(兄)’이라는 사람한테서 ‘형! 형은 그만 사학도가 되셨구먼요’라는 얘길 들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는 그간 ‘사이비 사학도’가 겪은 고통, 어려움 등을 마치 작심했다는 듯이 털어놓고 있다. 

“단 한 항(項)의 약력을 확인하고저 어떤 경우에는 5, 6개소(個所)를 찾고, 7, 8종-20여 권-의 문헌을 뒤적였으니 그런 나를 ‘사학도’라 한 R형(兄)의 말에 조금도 과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도 일자 미상(未詳)이 태반인 ‘약전(略傳)’ 밖에 쓸 수 없을 때, 참 20년이라는 세월의 무서움이 통감되었다. 출판을 위해서만 그 막대한 원고를 10독(讀)했음을 고백하며, 그 외의 일은 속상하던 말과 고심담(苦心談)은 차라리 잠잫고(잠자코) 말기로 한다...” 

그가 발문 첫 줄에서 “이 전집은 ‘젊은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드리는 정성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앞의 ‘젊은 세대’는 누구이며, 또 뒤의 ‘젊은 세대’는 누구인가? 나는 앞의 ‘젊은 세대’는 종국 자신과 같은 또래의 세대이며, 뒤의 ‘젊은 세대’는 그보다는 조금 어린 세대를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 <이상전집>을 엮어낼 당시 종국은 27세였다. 그러니 아직은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그보다 너댓 살만 어려도 상당한 세대차이가 있다. 즉 1945년 해방 당시 종국은 16세로, 경성농업학교 3학년을 마칠 때였다. 일반학교로 치면 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다. 종국의 경우 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너댓 살 아래인 아우뻘들은 일어가 자유롭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일제시대의 사안을 일제시대를 경험한 선배 세대들이 후배들에게 ‘서비스’하겠다는 그런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선물’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 증좌인 셈이다. 

이런 나 나름의 해석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도 얼핏 그런, 즉 나와 비슷한 생각(?)을 암시하고 있어 반가웠다. 그는 <한국 전후문학과 세대>(향연, 2003)에서 “1929년생 임종국, 1932년생 고석규, 1934년생 이어령, 1936년생 김윤식 가운데 이렇게 언어를 넘어 현실과 역사로 직접 육박해 들어간 것은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 1956)을 쓴 임종국 뿐이었다”고 썼다. 

김윤식은 8월 초 전화인터뷰에서 “임 선생 세대가 일본말을 배운 마지막 세대다. 임 선생은 일본책을 볼 줄 알고, 또 일본말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1936년생인 나는 일본말을 배워서 공부했다. 이상 연구나 친일문학 연구는 그들 세대가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5년’을 시봉(侍奉)한 김대기(1955년생, 전 ‘지평서원’ 대표, 경북 포항 거주)에게 “언어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변하는 것이어서 옛날 용어를 지금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힘들다”며 자신이 생전에 직접 그런 것들을 처리(연구)하려 했다고 김대기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짚고 넘어 갈 게 하나 있다. <이상전집>은 실질적인 편자가 임종국이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판권란의 ‘편자’ 항목에는 엄연히 ‘임종국’ 석 자가 박혀있다. 그런데 스파인(책등)이나 판권란 박스 하단에는 이와는 별도로 ‘고대문학회 편’이라고 박혀 있다. 그러면 대체 고대문학회의 실체는 무엇이며, 또 <이상전집> 출간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당시 고대문학회 회원이자 종국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몇 들어보자.
 

고대문학회 주최 '문학의 오후' 행사에서 특강을 하는 조지훈(사진-박노준 제공)

시인 인태성에 따르면, 고대문학회는 조지훈을 따르는 고려대 내의 문학도 모임이었다고 한다. 회원은 10여 명 정도. 여기서 <고대문화>를 발행했는데 이 매체는 고대 출신 문학도들의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터전이 되었다. 종국이 ‘이상론’을 여기에 발표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박희진(1931년생, 서울 수유리 거주)에 따르면, 당시 조지훈은 고대출신 모든 문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종국이 이상 연구를 시작한 것도 조지훈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당시 조지훈은 국문과 교수였는데, 이들은 국문과 학생들은 아니었지만 (종국-정치학과, 인태성․박희진-영문과) 조지훈을 따랐다. 이들은 나중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대개 문단에 데뷔했다. 종국이 나중에 신구문화사에 취직할 때도 조지훈의 추천으로 들어갔을 정도로 조지훈은 이들의 ‘후견인’ 같은 존재였다. <이상전집>을 ‘고대문학회 편’으로 한 것은 이런 전후 사정 속에서 하나의 ‘공동작업’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 같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태성은 실지로 종국의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 이들보다는 후배이자 역시 고대문학회 회원 출신인 박노준(1938년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전 한양대 인문대 교수)은 1956년 4월에 입학했는데 신입생들에게 <고대문화> 제1집을 무료로 나눠주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제2집을 내지 못하자 고대문학회는 동호인 모임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이들은 출판활동 대신 1년에 두 세 차례 문학발표회를 가졌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서울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종로의 YMCA 건물도 파괴된 채 그대로였다. 이들은 일부 성한 YMCA 건물을 빌려 행사를 갖기도 하고 더러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 꼭대기에 있던 ‘음악궁전’을 빌려 ‘문학의 오후’ 행사를 갖곤 했다. 조지훈이 연사로 나와 특강을 하기도 했는데 전후 폐허에서 문화에 굶주린 청년들에겐 단비 같은 행사였고, 그래서 인기도 대단했다. 한동안 후속호를 못내던 <고대문화>는 1960년 2학기 초 무렵 학교측의 제작비 지원(절반)으로 제2집을 발행하게 됐다) 

- 조지훈과 고대문학회 

한편 당시 조지훈은 <고대신문>의 ‘주간교수’를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 이들이 글을 쓸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종국도 <고대신문>에도 더러 글을 기고했었다. 인태성은 종국이 <고대신문>에 ‘이상시론’을 쓴 걸 보고 찾아가서 만났다고 했다. 또 법학과 학생으로 당시 <고대신문>의 기자(나중에 편집국장 역임)로 활동하고 있던 신근재(1929년생, 서울 수유리 거주, 전 동국대 일문과 교수)는 “임종국이 <고대신문>에 투고할 글을 가지고 자주 신문사 출입을 해서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종국의 첫 부인이 된 이선숙도 이곳에 소설을 연재했다.(신근재 증언) (* <고대신문>은 국내 대학신문의 효시로, 초창기에는 부정기적으로 간행됐다. 창간초기 편집, 광고를 모두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했었다. 서울대의 <대학신문>의 경우 전시연합대학 시절 창간된 것으로, ‘범(汎)대학신문’ 성격을 띄고 있다. 제호에 ‘서울대’라는 특정학교 교명을 못박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지훈의 화신’(신근재 증언)이라고 불린 박희진은 조지훈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종국, 인태성(이상 모두 52년 입학)보다 2년 앞서 1950년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박희진은 피난 시절인 1952년 대구 임시교사에서 조지훈을 처음 만났다. (* 종국은 박희진이 두 살 아래였지만 대학 입학이 2년 빨라서 선배 대접을 했었다) 

당시 조지훈은 ‘공초 오상순’을 강의하고 있었다. 조지훈의 첫 인상은 큰 키에 머리는 장발이었고 얼굴은 하얗고 수즙은 표정이었다고 박희진은 기억하고 있다. 박희진은 그간 써놓은 시 몇 편을 조지훈 앞에 꺼내놓으며, 작품평을 감히 부탁했다. 시를 훑어본 조지훈은 “이만하면 수준작이다. 신문에 발표해도 되겠다. 내가 알선해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였다. 이후 박희진은 조지훈을 따르게 됐고, 그런 인연으로 성북동 조지훈의 댁으로 자주 놀러가기도 했었다. 
 

종국을 아끼고 물심양면으로 지도해줬던 조지훈 선생

종국과 조지훈가(家)와의 인연을 한 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번 일로 지훈의 부인 김난희(1922년생, 서울 미아리 거주) 여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직도 전화 속에서 들려온 김 여사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마치 옛 연인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종국에 대해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 여사의 회고담. 

“지훈 선생님은 종국씨의 정신 사상, 즉 반일사상 같은 것을 좋아해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셨다.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이 성북동 집으로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종국씨도 더러 왔었다. 언젠가(그가 타계하던 1989년 가을임) 선생님 생각이 나서 왔다며 밤을 한 자루를 가지고 집(성북동에서 압구정동으로 이사함)으로 찾아왔었다. 동행이 한 명 있었는데 그때 호흡하는 게 안좋아 보였다. 들어오시라고 해서 겨우 차 한 잔 대접했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식사도 한 끼 차려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가시게 한 게 못내 마음이 아프다. 참으로 순박하고 좋은 분이셨는데 너무 일찍 가셔서 안타깝다. 내 마음에 가장 잊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분이 바로 그 분이다” 

(* 김 여사는 전화통화 내내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스승 지훈 만큼이나 스승의 아내도 그를 아꼈던 것 같다. 1989년 종국이 타계하자 김 여사는 그의 빈소를 찾아가 유가족들을 위로했다.(박노준 ․ 김대기 증언) 그러나 이번 전화통화에서 김 여사는 자신이 문상을 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연세가 82세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면서도 종국의 아내 근황을 물으며 만나보고 싶다고 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김 여사는 미아리 원룸에서 둘째아들의 손녀와 같이 살고 있는데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늙은이 사는 집에 보여줄게 없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종국의 이상(李箱) 관련 대목은 이 정도에서 서서히 마무리를 해야겠다. 다만 두 가지만 짚어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그의 이상 연구에 대한 총평, 그리고 그가 엮어낸 <이상전집>에 오류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간행사에서 그는 “종래의 전재된 작품-<선집> 등 기타-에서 허다한 미스가 발견될 때 편자는 극히 불쾌하였다. 이 점 ‘미스의 전무(全無)’를 위하여 주의를 특히 거듭했으니 대과(大過)는 없으리라 자부 하겠다”고 쓴 바 있다. 상당히 자신 있어 하는 인상을 풍긴다. 물론 ‘10독(讀)’을 했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완벽이란 없다. 그런 전제에서 보면 그의 작업 성과에도 무지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자료의 한계에서 비롯됐든 오류는 필시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위 두 가지 사항을 동시에 짚어주는, 똑떨어지는 연구논문이 한 편 있다. ‘오류’를 지적한 대목에서는 예시도 많고, 아주 꼼꼼하게 지적해 놓았다. 조해옥씨(한남대 강사)가 쓴 <임종국의 ‘이상전집’과 ‘이상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상리뷰> 제2호, 2003. 1, 이상문학회)가 그것이다. 아마 종국이 생존해 이 논문을 보았다면 필시 조해옥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먼저 총평부터 보자. 

조해옥은 종국의 이상 문학 연구가 갖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이후로 이상 문학에서 논의될 수 있는 영역들을 골고루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꼽았다. 요약하면 이상 연구의 선구자이자, 기초를 닦았다는 얘기다. 특히 종국이 이상의 개인 이력이나 개인적 편견으로 이상의 작품들을 재단하지 않고 객관적 시각으로 작품 자체를 해석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이상연구’는 작품분석에서 충분한 근거를 통해 이상 문학의 특질을 찾아내는 데는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즉 “그는 이상문학적 특질로 ‘절망’을 제시하고, 그 부산물로 부정과 허무와 불안을 들고 있지만 외부적 정치현실과 내부적 의식으로만 절망의 원인을 밝히고 있을 뿐 좀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표피적인 원인 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점이다. 

- <이상전집>의 오류들 

다음은 <이상전집>의 오류 부분. 먼저 조해옥은 “이상의 작품집을 처음 집대성한 임종국의 작업은 이상 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상 문학 연구를 활발하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상 문학작품 원전을 임종국이 수정하고 정리하면서 원전의 의미가 명확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집대성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행하였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가 <이상전집>에서 범한 오류는 후대에서 제대로 바로잡히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원전을 확인하는 노력 없이 임종국의 이상전집을 그대로 텍스트로 삼는 연구행태와 전집 발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인 걸 보면 그렇다. 그에 따르면, 종국의 <이상전집> 이후 발간된 이어령판(<이상시전작집>, 갑인출판사, 1978), 이승훈판(<이상문학전집1권>, 문학사상사, 1989)에서도 원전의 원전을 오기한 부분은 수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임종국판보다 원전에서 더 멀어진 경우도 있단다. 

그러면 조해옥 등이 찾아낸 구체적인 오류 실태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선 <이상선집>과 임종국의 <이상전집>에서 동일하게 범한 오류로, ‘시(詩)제8호 해부(解剖)’의 “진실(眞實)”이 “진공(眞空)”으로 바뀐 것, ‘정식(正式)III’의 “시간을”의 “을”이 빠진 것, ‘소영위제(素榮爲題)’의 “네거짓말네농담(弄談)”에서 “말”이 빠진 것 등이 발표 당시의 이상의 시 원문과 다르게 표기된 부분들이다. 이어 ‘시(詩)제5호’에서 “모후(某後)”의 “모(某)가 임종국 전집과 이어령 전집, 이승훈 전집에서 “전(前)”으로 바뀌어 표기돼 있다. 또 ‘아츰’의 “유췌(惟悴)한”이 그간의 이상전집들(김승희판 전집을 제외한 임종국, 이어령, 이승훈판 전집)은 모두 “초췌(焦悴)한”으로 바뀌었다. 

놀랄 만한 사실도 있다. 역시 조해옥의 논문에 나오는 얘기다. 종국이 이상의 일문시를 번역하면서 외래어에는 음절마다 모두 방점을 찍어 놓았는데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런 방점이 찍힌 상태를 그대로 이상의 시 텍스트로 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는 후학들이 원전을 전혀 안찾아 봤다는 얘기다. 하나 더. 조선건축회가 펴낸 <조선과 건축>의 1931 8월호에는 <조감도(鳥瞰圖)>하는 큰 제목 아래 ‘2인(二人)....1....’, ‘2인(二人....2....’ 등을 시작으로 총 8편의 일문시가 실려 있다. 

그런데 임종국 전집에서 <조감도(鳥瞰圖)> 대신 <오감도(烏瞰圖)>라는 큰 제목이 붙어 있다. 이상이 <오감도(烏瞰圖)>라는 큰 제목을 붙인 것은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7월 24일부터 그해 8월 8일까지 게재했던 국문시 ‘시(詩) 제1호’부터 ‘시(詩) 제15호’를 실으면서 붙였던 큰 제목인 것이다. 임종국 전집 이후에 간행된 이상전집류에서 이것이 수정된 적은 없다. (* 종국은 1966년에 간행한 개정판에서는 이를 바로 잡았다) 

한편 종국은 1956년 <이상전집>(전 3권) 출간(태성사)한 지 10년 뒤인 1966년 출판사를 바꿔 문성사에서 단행본 한 권으로 개정판을 냈다. 조용만의 서문은 그대로 실렸으나(제목은 ‘初版 序’), 달라진 것은 종국의 초판의 간행사 대신 ‘개정판 서(序)’와 ‘범례’가 별도로 추가된 점이다. 그런데 추가된 두 곳에 참고할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초판 간행 이후 10년간에 벌어진 일들이 더러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초판은 반년이 안 돼 매진됐으나, 1959년 12월, 즉 초판이 3년 뒤 3판 발행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절판됐다고 한다. 그러나 첫 출판사와의 신의 때문에 그 사이 추가 출판 수요가 있었음에도 출판사를 옮기지 못하다가 최종적으로 태성사에서 더 이상 출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게 됐다는 것. 

눈여겨 볼 대목은 <이상전집> 간행 후 문학계와 출판계의 변화상이다. 초판 발행 후 이를 바탕으로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재검토가 이상 문학의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자평했다. 또 하나는 출판계에 전집물 발행이 유행처럼 번져갔다는 것. 이를 두고 종국은 “4×6판 전 3권, 총 2천여 면(쪽)의 이상전집이 반년 미만에 매진되자 출판계에 전집 붐이 일어나면서 무슨 전집, 무슨 전집… 형형색색의 기획 출판물이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그 초판이 발간될 당시만 해도 많은 출판사들은 그 계획을 냉소했으며, 덕분에 편자가 원고 보따리를 싸들고 우왕좌왕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편자는 감히-자화자찬이라고 냉소할 분도 없잖겠지만-이상전집의 간행은 문학사상 또는 출판사상 아울러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범례’는 전반부는 초판의 간행사와 유사하다. 다만 초판의 부록은 그대로 살리되 ‘이상 문학의 난해성에 비추어, 또 대중의 이해에 자(資)하기 위해서’ 부록을 대폭 보강했다. ‘제5부 해성과 감상’이 그것이다. 이밖에 일문 작품은 원문과 역문 2종을 같이 수록하면서 역자 및 작품명도 공개했다. 

즉 유정(柳呈)은 일문시 ‘오감도’의 8편과 ‘이상한가역반응’의 6편, 김수영(金洙暎)은 유고집 중 ‘유고(遺稿)1’ 이하의 전부(단 ‘유고4’ 및 ‘회한의 장(章)’은 제외), 김윤성(金潤成)은 ‘유고4’, 그리고 편자 임종국은 ‘3차각설계도’의 7편, ‘건축무한육면각체’의 7편, 유고집 중 ‘집각(集脚)’~‘최후(最後)’의 9편과 ‘청령’(蜻蛉), ‘한개(個)의밤’ 및 ‘회한의 장’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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