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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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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천상병 - 귀천
2015년 12월 21일 01시 47분  조회:6070  추천:0  작성자: 죽림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최근 죽음에 관련된 얘기를 몇 편 쓰다 보니까 뜬금없이 천진무구한 시인 천상병의 [귀천]이 떠 올른다. 그는 살아 생전 만나는 사람마다 '천원만 달라'고 하여 막걸리를 사 먹었던 것으로 유명한데, 1930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마산중학교에서 [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에게 국어를 배웠고 서울대 상대를 중퇴했으며, [강물]이라는 시가 유치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학잡지인 [문예]에 실리게 되어 그때부터 그는 시인의 삶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많은 이야기 거리를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문학계의 기인 중 기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살아있는 시인이면서 '유고시집(遺稿詩集)'을 냈던 사람은 아마 세상에서 천상병 시인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1967년 당시 우리나라는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이라는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떠들썩 했다. 정부에서는 북한과 은밀히 연루되었다고 하여서 죄도 없는 예술인들이나 문인(文人)들을 대거 체포하여, 남산에서 그야말로 덮어놓고 고문부터 해서 사람 병신으로 만들어 더 이상 예술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이 자행되었다.

그 사건에 천상병 시인도 연루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모습은 고문 당시 얻은 휴유증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심한 질병을 얻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실체라는 것은 바로 이렇다.
당시에도 천진난만하고 순진했던 천상병 시인은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였던 강빈구(姜濱口)라는 사람과 친하게 어울렸는데, 그 강진구가 독일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평소 다른 문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천상병은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 또는 1천원씩 받아 썼다. 그런데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문은 이러하였다.

"강빈구는 간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천상병은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갖게 한 뒤,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문 이후로 몸은 만진창이가 되버린 천상병은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자주 다니던 명동이나 종로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가 나타나지 않자,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봤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결국 이야기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 '천상병이 죽었다!'라고 소문이 퍼졌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버렸다. 그때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서 시집은 무사히 발간될 수 있었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 시집출간 소식이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 들어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있었고 그 것을 사람들은 그를 그저 노숙자나 행려병자로 오인한 탓에 그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시켜 버렸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거짓말 같이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천상병 시인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귀천이라는 시의 미덕은 쉽다는 데 있다시라는 것이 괜히 어려워야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이 시는 쉬운 시가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각 연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시작한다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죽음을 뜻한다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두렵고그래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남겨 두고 가야만 하기 때문에또는 어떤 이유로든지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시인은 하늘로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돌아간다는 것은 시인이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시인은 죽음이란 원점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늘로 돌아갈 때 동행하는 것은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이나

 노을 같은 사물들이다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인가그것은 누구도 혼자서만 소유할 수 없고,그래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화자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또한 죽음을 소풍 끝내는 날로 여기고 있다.

 

이 시를 죽음을 달관한 모습으로만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듯싶다다시 말하면이 시를 이야기하면서 달관이나 초극’, ‘죽음을 관조적으로 수용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에 들어 있는 정서는 외로움이나 쓸쓸함괴로움 등일 것이다지나온 삶의 괴로운 파편들을 뒤적이면서그것을 아름답게 인식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쓸쓸하게 다스리는 데서 우리는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이승에서의 삶은 짧지만 즐거운 것, 즉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하늘에서 왔으니 생명이 다하면 다시 본원적인 공간인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죽음에 대한 달관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은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인 죽음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가장 두려운 존재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을 소풍으로 표현하면서 시인은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끝맺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삶은 어쩌면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같이 짧은 순간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일 수 있고 "노을 빛"처럼 소멸의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 모든 과정을 아름답다고 말하며 소풍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즘 이러한 철학은 여러 명상가, 철학자를 비롯해 스티브 잡스의 사생관과도 맥을 같이 한다. 즉, 천상병은 죽음의 철학을 일찍이 달관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누구에게나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힘겹고 어쩌면 추할 수 있도 있지만 끝내는 그 시간들도 돌아보면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일 수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런 점에서 시를 보는 많은 이들에게 반성과 감동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죽음 이후 저 세상에 가서 자신의 지난 생전의 시간을 아름다운 세상에서 보낸 소풍이었다라고 말할  있는 시인의 처연하면서도 소박한 삶에 대한 자세야 말로 이 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메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소풍을 끝내고 받게 된 몇 백만 원의 조의금은 천상병과 그의 가족들이 살아 생전 만져본 적이 없었던 큰 돈이었고 그것을 장모가 제일 안전한 곳에 두기 위해 아궁이에 감추어 두었다.

 

그런데 시인의 아내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재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코미디같기도 하고 오히려 단돈 천원밖에 모르던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폐부에 뜨겁게 각인시켜 준다. 살아서도 그렇게 돈을 멀리하더니 죽어 저 세상에서도 가장 순수한 시인이 되겠다는 어떤 영감같게도 느껴지니 말이다.

 

 

미망인 목순옥 여사는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다방을 경영하는데, 좁은 공간 때문에 인테리어가 독특해서 문인들은 물론 유명세를 타서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이 많고 옛날 다방식 소파에 나무등걸로 합석을 해도 되고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천상병님의 사진과 선물받은 그림 등등..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가 정감있는 곳이다.

 

 

노년에 목가적인 향수에 젖고 싶다면 한번쯤 들릴만한 곳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인사동길로 들어서 수도약국 방향으로 200미터 가량 가다 보면 달마도가 그려진 간판이 있는데, 그 골목에 있다. 분점도 있는데 수도약국을 끼고 좌회전하면 약간 큰 골목에 '귀천' 간판이 보인다.

 

 

천상병이 그토록 사랑했던 막거리에 대한 시를 읊으며 글을 끝내고자 한다.


막걸리/천상병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詩人 淸閑 

 

 


 

 

 

 

 


천상병(1930 ~ 1993) 시인.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상대 수학. 중학 5년 재학중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1951년 [문예]에 평론을 발표.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 생활에서 오는 영양 실조로 거리에 쓰러졌다.
이때 행려병자로 병원에 입원되어, 행방을 모르던 친우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고 시집 [새]를 발간하기도 했다.
가난, 무직, 방랑, 주벽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우주의 근원과 죽음의 피안(彼岸),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하여 큰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시집에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가 있고, 
동화집에[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가 있다.

1. -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2.<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3.<그날은>
ㅡ새
이젠 몇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사쓰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게 편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출신인가요?"

사진에서 그를 처음 봤을때 얼핏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까무잡잡하고 일그러진 얼굴인데

분명히 히죽 웃고 있었습니다.

 만약 웃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면 오래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천상병"

사실 시인이란 시부터 알게 되고 얼굴은 나중에 아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야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천상병의   '행복'-

 

그럴까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삶은 불행하기만 했습니다.. 억울하게 간첩사건에 연루되어서 전기 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습니다.그 후유증으로 행방불명이 되었고 애기도 낳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유고시집까지 냈습니다.

 의사로부터 일주일안에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1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떠들고 웃었습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웃으면서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억울한 고문을 당하고 가난했지만 그가 상처난 가슴에 훈장처럼 품고 있던 단어들입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이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든지 그는 웃었고 또 웃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웃었습니다.  그건 언제나 괜찮은 일이니까요.그를 고문하고 괄시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괜찮다"고하고 있겠지요.

아파트가 없어도 아파트 있는 사람보다 더 잘 웃던 사람, 자신을 억울하게 괴롭혔던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던 사람, 행복은 언제나 주관적이니까요.

내가 나를 행복하다고 하면 행복한 것이고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하면 불행한 것이니까요.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어도 다 용서하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문득 그리워집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던 존재 입니다. 그러니 지금 갖고 있는 것이란  덤일뿐입니다. 그걸 잃어봐야 본전인 셈입니다. 그런데 희안하게  우리는 뭔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웃음을 잃어버리고 삭막해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일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소풍 나왔다가 가서 참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근사한 인생 아닐까요?

없는 것 때문에 불행해지지않고, 있는 것 때문에 웃을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웃는 얼굴 중에 못생긴 얼굴은 없습니다.

그의 얼굴이 설명해줍니다.

오늘, 내 얼굴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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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에 대한 일화

 

1. 술에 관한 일화

 

#술에 취해 친구의 신혼 집에서 실례를 한 일

 

술에 취하여 친구와 함께 단칸방을 침입했다. 자다가 깨어보니 친구는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있는데 깔고 있던 요가 축축하지 않은가. 놀라서 일어났더니 이게 웬일인가? 두 사람 중 누가 쌌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으니.

 

# 한무숙 선생님 집에서 향수 병을 양주로 착각하고 원샷 한 일

 

소설가 한무숙 선생님 댁에 기거하고 있을때, 밤에 잠은 안오고 낮에 보았던 선생님 안방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양주병이 눈에 아른거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선생님 방에 몰래 들어가 양주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속에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며 속이 메스꺼워 견딜수가 없었다.

 

2. 천상병의 습관

 

#난 11시 아니면 밥 안 먹여요

 

일년 열두달, 항상 시계를 차고 다녔고 잠잘때도 차고 잠.

자기 시계는 항상 텔레비전 시간과 같은 정확함을 지녔다고 자랑하고 다님. 그 정확한 시계에 맞춰 일 분 일초도 어긋나지 않게 규칙적인 일과를 보내려고 신경을 곤두 세움.

예를 들어, 천상병의 시간표에 따르면 아침 식사는 정각 11시에 해야 옳다. 11시가 오면 장모님께 계속 시간을 알려 드렸다.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이

“엄마요, 15분 전입니다....”

“엄마요, 5분 전입니다...”

만약 2,3분전에 밥이 차려졌어도 기다렸다가 정확히 11시에 밥을 먹는다.

그리고 잠은 항상 12시 40분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아내가 밤 12시가 되면 텔레비전을 끄고 라디오를 켰다. 잠들기 전엔 항상 라디오를 듣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40분이 되면 라디오마저 끄고 불을 켜고 자는 남편을 위해 30촉 짜리 전구를 10촉 짜리로 바꿔 달았다.

 

#난 병맥 아니면 안 먹어요

 

 천상병 시인이 맥주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손님들이 캔맥주를 사들고 왔다. 그런데 천상병은 똑같은 내용물인데도 병맥주는 마시고 캔맥주는 기어이 못 먹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병맥주로 바꿔오라고 채근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장모님이 손님한테 그러는가 라고 민망한 제스처를 하면 천상병은

 

“ 아니, 안 먹어요. 안 먹요. 갖다가 버리세요. 그러면!”

이것이 바로 천상병식 고집이었다.

 

#. 안경 쓴 사람하고 빨간 옷 입는 사람이 싫어요.

 

천상병이 싫어하는 두가지 부류의 손님이 있다. 안경 쓴 남자와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가 그들이다. 아무리 얼굴이 잘나고 태도가 좋아도 이 두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싫어했다.

안경을 쓴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치는 않지만, 말에 따르면 책을 볼때 앞에다 바짝 대고 봐서 눈이 나빠졌다고, 바보같이 안경을 쓰게 됐다고 싫다는 것이다.

 또, 빨간 옷을 입었거나,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여성이 오면 계속 “문디 가시나 문디 가시나 문디...” 라고 중얼 거리곤 한다. 그러다 조금 친해지면 아가씨에게 “ 아가씨, 다음에 우리 집에 올 때는 빨간 거 입고 오지마세요. 빨간 것은 빨갱이들이 좋아하고 눈도 나빠지는데.” 라고 말을 꺼냈다.

 

3. 세금에 대한 일화

 

천상병의 세금거두기는 널리 알려진 대로 20대부터 시작된 생활수단이었다. 젊었을 때는 세금은 대부분 술값으로 쓰여졌지만, 목순옥과 결혼한 이후부터는 저금을 명목으로 세금을 거뒀다. 세금은 아는 이들에게는 2,3 천원씩 받았고, 친한친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 형편이 좋은 사람들에겐 꼭 만원을 달라고 했다.

 

#석면스님 한 번 면제받는 특혜를 누리다.

 

친하게 지내던 석면 스님은 천원짜리 세금을 주로 냈다. 하지만 장난을 잘쳐서 만나면 즉시 서로 천원을 달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에 만원짜리 밖에 없으니 팔천원 거슬러 달라는 석면 스님의 말에 내가 8천원이 어딨냐며 차 한 잔 외상으로 대접할테니 내놔라 하며 만원을 받은 일이있다. 이 일로 석면스님은 당당히 세금 1회 면제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은 상대의 호주머니를 봐 가면서 세금을 요구했는데, 돈을 많이번다 싶으면 많이 요구 하고, 적게 번다 싶으면 조금만 받았습니다. 그리고 싫은 사람은 아예 그 쪽에서 준다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돈이 없다고 하면 아, 그런가? 그러면 됐어. 됐어 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서울대 의대 출신이면서도 가깝게 지내던 정원식씨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조건을 달고 세금을 내주었다. 돈을 달라고 해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따라오라고 해서 평소 목욕을 싫어하는 친구에게 이발소에 데려가서 긴 머리카락이라도 정리 시켜준 후에 세금을 내주 었다.

 

세금을 거두는 천상병은 주객이 전도 된듯 언제나 스스럼없었고 떳떳해 보이기까지 했으며, 주변 친우들 조차 그의 세금 거두는 행위를 나쁘다 보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하고 암묵적으로 바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4. 문순옥 여사님과의 일화

 

# 그 남자의 첫 인상

 

시인 천상병은 인상이 좀 독특했다. 함께 있을수록 괴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못생기기도 했지만 행동도 우스웠다. 콧구멍을 후비면서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 깔깔깔 웃어대니 사춘기 여고생의 눈에 예쁘게 비칠 리가 없었다.

 

# 우리 결혼 했어요

 

천상병과 목순옥 여사가 아직 결혼하기 전일때 천상병은 여사를 친동생 처럼 데리고 다녔다. 연극이나 영화표가 생기면 함께 구경 다녔고 빈털터리가 되면 차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은성이라는 술집에 외상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순옥 여사는 별감정이 없었다. 이후 동백림 사건이 터지고, 천상병을 간호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시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그래, 내가 도와드리자 라는 결심을 하게 되고, 72년 5월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식을 올리게 된다.

 

#남편의 무심함

 

셋방을 얻었던 집이 장마로 위험했던 적이 있다. 옆 방에 세든 부부와 목순옥 여사는 자꾸만 불어나는 물을 퍼내기 위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 시간씩 교대로 퍼내는 데 나중에는 지쳐 꼼짝할수 가 없었다. 끝날 것 같지 않는 이 일에 막막해진 심정으로 기도를 했을때, 기적같이 밭 한가운데가 무너져 도랑이 생겨 집으로 들어오는 물이 다 그리로 흘러가게 됐다. 이렇게 모두가 위기를 넘기고 있을 때, 천상병은 태연히 방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 한것이 “ 니가 죄가 많구나. 천둥속리에 그렇게 놀라는 거 보니까.”

 

#원칙주의자 남편

 

돈을 빌려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고,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러자, 돈을 빌려 쓴 달라 아줌마가 셋방으로 쳐들어와 난리를 치며 잠까지 자는 것이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모욕을 주자, 너무 화가나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 판국에 남편은 나를 욕하는 것이다.

“ 왜 돈을 안 갚습니까. 안 갚으니까 나쁘지요! 돈 안 갚으면 저거 경찰서에 데리고 가시오!” 나로써는 속 뒤집히는 일이었지만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원칙에 대고 이런저런 사정을 한들 상황이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럴때면 남편을 남편으로써가 아니라, 아이처럼 바라 보았다. 당연한 원칙을 잊고 사는 어른이 아니라 곧이곧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어린아이로.

 

문순옥 여사는 이처럼 남편이 어린아이 같은 막무가내와 순수함으로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그것이 즐거움이 될 수도, 맑은 거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일곱살짜리’ 라는 남편의 별명을 좋아했고 남편이 영원히 일곱 살 어린이로 남기를 원했다 라고 한다. 솔직히 보통의 여자였다면 이런 시인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날수도 있었지만, 천상병이라는 시인 기에,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이기에 이런 상황 조차도 이해할수 있고,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한 생활을 할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천생연분

 

누구에게나 다 그렇듯 천상병 내외도 그들만의 독특한 애정표현이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시인이 여사의 손을 느닷없이 무척 아프도록 꽈악 쥐어 주었다. 그건 단순명쾌한 시인의 시처럼 여사의 가슴에 와닿는 천상병식 애정표현이다. 아내가 사랑스러울 때, 예뻐 보일 때 그렇게 말없이 손을 꽈 쥐어 주는 그 행위는 애틋하기 그지없는 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제스처다.

 

 그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시의 한부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라는 시로 거기서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 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고백 시를 본 묵순옥 여사는  남편이 이런 고백시를 썼지만, 즐겨 서로의 사이를 물어봤답니다.

 

"마누라가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맙지, 고맙지, 마누라가 고맙지요. 저는 순전히 마누라 덕택에 살지요."

"마누라를 사랑해요?"

"사랑하지요, 사랑하지요."

"그런데요. 누구를 제일 사랑해요?"

"내 아내를 제일 사랑하지요."

"옛날부터 좋아하셧어요? 옛날부터?"

"물론이지요, 제가 옛날부터 마음 속에서 사랑했지요."

 

이렇게 그들은 남들은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느낌, 남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  두 사람만의 정감,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둘만의 내밀한 교류,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평생을 함께 할수 있었던 것 같다.

 

 
 
 
 
 
 
 
 

▶ "천상병 시인이 좋아하실 만한 진국만 모여서 마련한 잔치니 하늘나라 그분도 즐거워할 겁니다." 이외수씨는 전시 작품 앞에서"술 취해 흥얼흥얼…아직도 서럽게 울고 있노라"라는 천 시인을 위한 노래도 불렀다. 김경빈 기자

1980년대 한국 사회에 '도적놈' 셋이 있었다.
시 쓰는 천상병(1930~93),
그림으로 도닦는 중광스님(1934~2002),
소설가 이외수(59)씨
다.

기인열전(奇人列傳)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세 인물은 서로 외로운 것을 알아보고 함께 세월을 도적질하며 술병깨나 축내고 살았다. 12년 전 천 시인이 이승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3년 전 '걸레 스님' 중광 마저 "괜히 왔다 간다"며 붓을 접자 이외수씨는 먼저 간 두 사람을 그리워하며 홀로 놀았다.

"천 시인이 저를 각별하게 아껴주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도 챙겨주시네요." 천상병 예술제가 열리는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외수씨는 도인 같은 긴 머리에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천 시인이 남긴 작품에 그림을 붙인 시화와 묵화를 선보이는 특별전 '붓으로 낚아챈 영혼'을 준비하면서 그는 중광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고 했다. "글을 통해 도에 이른 이는 천상병밖에 없어. 100년 가도 그런 시인은 안 나올 거야. 전기 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하고도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한 사람 아닌가."

이씨는 천 시인의 시를 원고지 그림으로 풀었다. 나무 젓가락으로 투박하게 쓴 시 '귀천''갈대''국화꽃' 옆에 원고지를 갖가지 모양으로 오려 붙였다. 누렇게 바랜 원고지가 사람도 되고 나무도 되고 새도 되는 단출한 작품이다.

"컴퓨터 자판 시대라 누가 원고지를 돌아보나요. 글 쓰던 사람에게 원고지는 참 귀한 도구였는데. 원고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어쨌든 예술로 승화시켜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시화와 함께 이씨가 내놓은 묵화는 봉익필로 그려 눈길을 끈다. 봉익필이란 장닭의 꼬리털로 만든 붓이다. 계우 무심필(鷄羽 無心筆)이라고 한다. 삐죽삐죽 제멋대로인 털 때문에 심성이 거세고 먹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마음을 비우고 찰나에 붓을 놀려야 한다. 도 닦기 좋은 붓이요, 수양하기에 그만인 그림이다.

"기교나 재능보다 그리는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느냐에 따라 그림이 나오니 어디 숨을 수도 없이 발가벗는 작품입니다." 이씨는 번개를 잡아채듯 하나 해놓고 나면 정신이 상쾌해진다고 말했다.

이외수씨는 요즈음 장편소설 '장외인간'을 쓰느라 밤낮을 잊고 산다고 했다. 주류에서 삐딱하게 삐져 나와 사는 아웃사이더 얘기다. "견주고 따지고 그런 것이 어찌 예술 작품이 되겠습니까"라고 되묻는 그는 종이 속에 먹물 속에 몇 천 번 빠졌다 살아나온 그림과 소설로 세상의 진짜 도적놈이 되겠다고 했다.

정재숙 기자



 
김시종 시인
하늘은 천상병을 이 땅에 떨어뜨렸고,
그의 수호천사로 목순옥을 내려 보냈다.


천상병은 1930년 경남 창원에서 ‘응애’소리를 울렸고, 그의 천정배필 목순옥은 1935년 경북상주에서 생명을 시작했다. 천상병은 마산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선민(選民)이었다. 목순옥은 상주여고를 졸업한 얼굴보다 마음이 예쁜 걸어 다니는 천사였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만남인데, 천상병은 주간법률신문 기자인 목순옥의 오빠를 따라 목순옥의 집을 자주 찾아와 공짜 숙식을 늘상 하여, 친구 여동생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진짜 문학소녀였던 목순옥은 시인 천상병 오빠에게 별 부담감 없이 호감을 품게 되었고, 34세의 과년한 나이로 천상병 시인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애같이 단순한 천상병에게 왕년의 누이동생 같은 목순옥은 지상최고의 양처가 되어, 거리를 헤매던 천상병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안겨준 날개 없는 천사였다.천상병의 지적 능력은 천재에 가깝지만, 판단력은 너무 단순한 천치수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과대학 4학년 1학기때, 스스로 서울대를 자퇴했다. 세상에서 시인이 최고인데, 시인이 됐으면 됐지 서울대는 뭐 말라죽은 서울대냐 하는 식이었다. 천상병은 당시 월간잡지 ‘문예’에 평론추천을 받고, ‘현대문학’ 추천시인이 되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학업성적이 상위권 10%안에 들어, 졸업만 하면 한국은행 행원 특채가 약속된 복 받은 엘리트였다.

서울대를 졸업 1년도 안 남기고 자퇴한 천상병의 객기가 오판임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 하숙방을 전전하거나, 살림집을 기습하여 당혹케 하는 일이 잦았지만 대놓고 밀어내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천상병의 천진난만엔 친구들도 성 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호주머니엔 땡전 한 푼이 없어도, 술 고픈 것은 잘 참아내지 못하는 천상병이었다. 직장 없이 오래 지내다 보니 천상병은 푼돈 마련하는 노하우도 나름대로 있었다. 문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내 문인단골 다방과 종로에 있던 문인협회 사무국을 기습하여 ‘한 푼만!’ 하고 손을 내밀었다.

돈을 구걸(?)하지만 얼굴 표장이 밝고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문인 여러 명 중에 대표로 누가 돈을 쥐어주면, 쏜살같이 포장마차로 쫓아간다.

그 때가 1970~80년대라 보통 300원을 주면 히죽 한번 웃고, 천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면 ‘최고’라며 반색을 했다. 천상병의 기행(奇行)도 오래 못 간건, 현부인 목순옥 여사가 종로구 인사동 뒷골목에 제비 집 만 한 가건물을 세 얻어, 천상병의 시 대표작 ‘귀천(歸天)’을 옥호로 한 다방 ‘귀천’을 꾸렸다.

필자도 1980년대 후반에 다방 귀천에 들렸던 적이 있었다. 필자가 한국문인협회 문경시지부장을 맡으면서, 중견 도예가 도천 천한봉 선생에게 끈질기게 건의하여 제정한 ‘도천문학상’을 뇌졸중 을 앓으면서 초인적 투병을 하는 랑승만 중견시인에게 어느 해 주기로 전격 결정하고 지부장인 필자가 상경하여 드리기로 했다.

인천에 사시는 랑 시인께서 문경까지 오시겠다는 것을 불편한 몸(반신불수)임을 감안하여 필자가 서울로 가서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귀천 다방에서 시상을 했다.

필자가 군 복무시절 서울 육본에서 2년간 근무하여 서울 토박이 못지않게 서울거리를 톺았지만, 인사동 뒷골목의 ‘귀천’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는데, 김형! 하고 부르는 랑 시인을 발견했다.

귀천 다방은 허름한 집의 담에 붙여지은 두어 평도 못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손님이 다섯명 앉기에도 좁았다. 그 이름난 ‘귀천’이 하늘을 나는 제비만 한 쬐그만 공간이었다.

필자, 랑 시인, 황미숙 시인, 목순옥 여사 몫까지 필자가 모과차 네 잔을 시켰다. 도천문학상은 상패·다완1점·금일봉(당시15만원)이었다.

랑 시인은 상금은 안 받고 필자 차비로 주었지만, 그 돈을 받을 만큼 투미한 필자가 아니다. 그 때 랑 시인은 이 상을 다음해엔 천상병 시인에게 주자고 제의했다.

그렇게 되면 너무 매스컴에 오르내릴 것 같아 보류했지만, 몇 해 안 있어 1993년 천상병 시인이 작고하여 미룬 것이 내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천 시인 사후 목순옥 여사는 ‘날개 잃은 새의 짝이 되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펴내어, 한국 최고의 명 수필집이란 격찬을 듣게 되었다.

2010년 목순옥 여사도 천상병 시인의 뒤를 이어 천국시민이 되었다. 먼저 귀천한 천 시인이 부인 목순옥 여사와 천상재회를 하게 되었다.

다음 대화는 필자가 상상해 본 거다. 천상병 “니도 세상 소풍이 재미 있더노?” 목순옥 “말도 마소, 오빠야가 보고 싶어 목 빠질 뻔 했데이”.

천상병 시인의 시집 ‘귀천’과, 목순옥 여사의 수필집 ‘날개 잃은 새의 짝이 되어’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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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풍경과 상처>에서
천상병과 함께 요정에 갔던 경험을 서술한 것이 있다,


소제목은 "'천상병'이라는 풍경"이며

 

209쪽과 210쪽의 내용이다,

김훈은 요정이라는 곳이 천상병과 자신이 경험할 팔자가 아니라고 하자,

" 야, 요 놈아, 요정이 네 팔자에나 없지 왜 내 팔자에 없겠느냐? 있다! 있다! 있다!"

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요정이 평생 처음이라고 소리치는 천상병은, 그러나 한평생 요정에서 굴러먹은 자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호탕함으로 잘 놀았다."고 한다,

건강때문에 부인에게 허락받은 맥주 두 잔 밖에 마시지 않은 채 말이다,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들은 초장부터 천상병의 표정과 체취와 말투에 질려 있었다, 천상병은 침 버캐가 달린 입술을 내밀어 여자의 손등에 입맞추었다. 그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여자를 들여다 보았고, 그의 삭정이같은 손을 뻗어 요정 여자의 고데한 머리를 만졌다, 여자는 질겁을 하면서 엉덩이를 움츠려 물러났다, 천상병도 엉덩이를 움츠려 여자를 따라갔다, '요놈! 요놈! 요놈! 요 예쁜 놈!' 천상병은 여자를 들여다보면서 앙천대소하면서 그렇게 소리 질렀다,

'요놈! 요놈! 요놈! 요 예쁜 놈!' 이, 외마디 비명 세 토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것들 또는 무구한 것들, 스스로 저 자신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을 향해 내뱉는 천상병의 절규이다. 아 절규 앞에서 요정의 사회경제학과 자본주의의 부도덕은 함께 무너져야 싸리라,  천상병의'요놈! 요놈! 요놈! '은 세상이 앗, 할 사이도 주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정조준으로 겨누어 그대로 찍어버린다,"

 

자 이런 천상병의 겉모습에 질겁을 하는 여자들의 젊음을 향유하는 전상병의 노추를 영화에서 그리도 더러운 것으로 독해를 하는 것인가?

 

"천상병의  '요놈! 요놈! 요놈! (요 예쁜 놈)'은 요정의 술판을 완전히 제패하고 있었다."

 

그래, 천상병이 요정여자랑 2차를 갔겠는가?

영화 <은교>를 비난하는 무지한 이들은 당연히 요정이니 2차를 갔을 것이다고 자신의 경험을 내뱉는 것이다,

술 먹는 것까지도 마누라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천상병이 2차를 갔겠는가?

 

가지 않았기에 김훈은 이렇게 떳떳이 고백하지 않은가?

영화라는 텍스트를 독해함에 있어 글로 드러낸 것은 결국 자신의 한계.

phallus적 인식의 무감성일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상선약수,를 말했던 것이다,

 

쪽팔리는 오독을 자행하는 통념을 공박할 뿐,

관객의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인식을 굳이 따지는 것은

의미의 노역을 하는 것임을 밝힌다,

 

밀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바의

"욕망...강한 충동은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에너지는 나쁜 목적에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것보다는 역동적인 것에서 언제나 더 많은 선이 도출되는 법이다, 자연스런 감정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야말로 그의 감정을 계발했을 때 언제나 가장 강렬한 정서로 승화시키는 법이다,"

<사회비평 1996년 제 16호> 22쪽에서 재인용

 

"종래의 철학자, 신학자들은 인간적 속성의 원자재를 잠재적 선보다는 잠재적 악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늘 경계하여 왔다. 따라서 이를 통제하고 세련화시킬 것을 언제나 강조하여 왔다, 또 미덕의 원천을 개인의 정열, 욕망, 충동, 감수성 등에서 찾지 않고 양심, 의지, 이성, 자기절제, 예지 등에서 찾았다,"-23쪽

"미풍양속의 침해는 타인에 대한 침해라는 등식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관점이 되어버린 것이다,"-24쪽

도덕적 엄숙주의의 1. 역사의 발전이라는 전망 2, 국가의 권위와 3. 가부장적 권위의 강조라는 세가지 측면으로서의 이성의 역사를 해체하는 것이 탈근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압니다,

해서 23쪽의 언급은 이러한 이성적 도덕의 강조이며, 이를 이미 낡은 관념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예술과 철학은 같은 것이다,는 도올의 말을 전하면서 이성과 대비되는 바의 감성이라는 근대의 서양적 이분법은 잘못이며 자연과 인체를 유기적으로 연관지어 이해하엿던 동양적 가치관이 육체와 정신의 통일된 '몸'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도올의 입장이라  봅니다,

해서 이처럼 영화의 이해에 있어 그 감성적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물신주의적, 남성적 phallus적 소비향략을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독을 할 수 있을만큼 훌륭한 영화라는 역설을 경험하시는 것이 요망됩니다,

 

밀이 말하였듯이 작품으로 승화된 사랑의 이적요에 대하여 '딱'이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은교>이다,

 

 

또 타임캡슐을 매설해두었는데 속에는 천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찻잔·집필원고 등,

시인의 유품 41종 203점을 모아 (타임캡슐에) 묻었다

 

이 타임캡술은 천 시인 탄생 200주년을 맞는 2130년 1월 29일 개봉될것이다

 

순수 시인 천상병님

의정부에 있던 생가를 그대로 옮겨 안면도 대야도에 복원이 되어있다...

의정부에서 먼 안면도에 복원이 되어있을까?

천상병 시인을 좋아하던 "시인의 섬" 펜션을 운영하시는 모종인님이...

재개발로 철거되는것이 너무나 안타까와 사재를 들여 옮겨 두셨다 한다

 

 

빗소리가 그대로 들릴듯한 슬레이트 지붕...

겨울이면 벽에서 바깥의 냉기가 그대로 느껴질것 같고.... 

사람하나 누우면 남는공간이 없을듯 초라한 이공간에서... 

내면의 순수함을 일깨워주는 위대한 시가 지어졌다니...

 

 

이 작은집에 반쪽은 세까지 주었다니...

 

 

 

 

천상병 시인이 주로 시를 집필하던 방이라 한다

 

 

 

천상병시인이 평소 애용했다는 의자

아주 조그만하여 작은아이 다니는 유치원의 의자같다... 

 

 

 

복원해둔 생가 바로 아래에 조성된 천상병문학관...

올 11월경에 오픈한다는데 시인섬 사장(모종인)님의 배려로 미리 둘러 볼 수있는...

잔잔한 음악을 깔고 아이들에게 시를 들려주는 풍요의 시간도 맛보았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안면도,
천상병 시인의 생가!
외로운.. 너무나 외로운 문학관에서
시인의 대표작 '귀천'을 읊조리다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다른 시인들의 문학관과 확연히 다른 문학관에서 시인과 더 가까워 진 것 같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비둘기 울음소리로 배웅하는 시인...
 

 

 


 

 

 


 

 

 

이곳을 관리하시던 분이 작년에 작고하셔서

관리가 전혀 안되고 있다는 태안군청 직원의 설명을 들었답니다..ㅜㅜ
 

 

 


 

 

 

이끼 낀 벤치가 너무 외롭다...


 

 

 


 

 

 

생가 옆 조그만 유리 건물 내부.

 

 

 

시낭송과 노래를 했던 문학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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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 - 마산의 만날고개 내 천상병 <새>시비 

 

 

 

 

 

 

 





글쓴이     印香
 
제  목     천상병 시비 건립 고사 축문
 


  

維歲次 壬午 二月 辛巳朔 初二日 壬午 한국시사랑협회 敢昭告于 
천하의 영봉이신 천왕신님과 지리산 산신님, 土地之神님, 구천을 떠도는 뭇 영혼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시인으로서 위대함을 갖추시고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천상병 시인의 추모 시비를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지리산 자락 이곳에 건립하게 되었음을 엎드려 알려 드립니다. 
천상병 시인님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평생토록 아름답고 맑은 시를 쓰시어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셨습니다. 
이에 이 분의 업적을 추모하고 문학성을 길이 보존하는 뜻에서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존경과 추모의 뜻을 담아 오늘 여기에 시비를 건립하고자 하오니 시비 건립 공사에 따른 모든 일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시비 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신님들의 음덕과 공덕을 바라옵니다. 아울러 우리 시사랑협회의 무궁한 발전이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차려 제향하는 뜻을 펴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敬伸奠獻尙 
響 




<<동백림>>사건과 천상병 / <<동백림>> 그 실체를 말한다.

'한심한 작태', '분노하는 정의'.

지난 67년 7월 국내 신문이 건국 이래 최대규모의 간첩단 사건을 두고
외국 언론은 비아냥거리는 제목을 아낌없이 썼다.
우리 정부가 독일, 프랑스 등에서 수많은 유학생, 광원, 예술가를 불법납치해 고문했다 이유에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럽에서 활동하던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
194명을 체포한 뒤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고,
검찰은 윤이상 등 6명에게 사형을. 이응로 등 4명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그러나 독일 등의 강려한 항의로 관련자들은 결국 한명도 남김 없이 모두 석방됐고,
윤이상 등은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고 이국에서 숨졌다.
19일 밤 11시 30분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수 있다>가 시리즈
두 번째로 '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을 방송했다.
제작진은 처음 이 사건이 얼마나 조작됐는지 그 실채를 밝히는 데 목적을 뒀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수'했던 핵심인물,
지금은 독일에서 살고 있지만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던 독일 파견 광원,
재판장, 변호사 등을 폭넓게 인터뷰한 뒤 고민의 방향이 달라졌다.
정부가 치밀한 계획 아래 납치작전을 벌이고, 엉터리 혐의로 천상병 시인 등을
고문해 폐인으로 만들고,
서울대의 합법적인 동아리를 간첩조직이라고 날조한 것 등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이수자 지음/창작과 비평사 일부가 동베를린에서 북한과 접촉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과 북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여기고 행동한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김학영 피디는 "일부가 북과 접촉은 했으나 간첩행위는 없었던 간첩단 사건"이라
며 "분단된 어느 한쪽의 눈에서 보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프로그램은 동백림사건의 진상과 함께 "고립된 섬"에서 살 것을 강요받아 온
우리의 시각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까지 가늠하게 한다.

보이는 진실은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6 8 부정 선거 등으로 민심을 잃고 곤혼스러운 시기였던 1967년 7월.
교수, 유학생, 음악가, 화가 등 약 2백 명이 검거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
이른바 '동백림 거점 공작단 사건'이 터졌다.
불법 납치로 인한 국제적 망신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공안 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동백림 사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MBC 특별 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지난 9월 19일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뤄 큰 관심을 모았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진실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경험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물이 아래로만 흐른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물이 아래로만 흐른다면 아마 바닥에 모두 모여서 지구는 온통 사막이 될 것이고,
비도 오지 않을 것이며,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물이 위로 갈 수도 있어야 ‘흐른다’는 말도 나올 것이고, '비'라는 말도 나올 수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틀림없는 진실이지만,
'물이 아래로만 흐른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간과한 틀린 말이 되고 만다.
30년도 지난 동백림 사건을 취재하면서 나는 보이는 진실과 보이지 않는 진실 사이를 많이도 오락가락했다.
방송을 마친 지금도 그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단지 사건 관련자들의 수많은 말들과 재판 기록, 당시 기사를 꼼꼼히 정리하면서,
‘눈에 보이는 진실’에 관해서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감정과 말하는 의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가진다.
증언 다큐멘터리의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다. 어떤 사실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것은 물론이고,
피해자 내부에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말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시청자에게 제시해야 하는
취재팀은 ‘말’이 갖는 위험성을 민감하게 느끼고 숙고해야만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거기다 시청자의 재미까지 염려해야 하는 방송 현실 때문에 고민의 무게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어찌보면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말하는 주체가 누군지-제목만 보면 MBC인지, 사건 관련자인지 알 수 없다.
제작팀은 사건 관련자가 주체라고 입장을 정 리했다-불분명하기도 한 이 제목의 프로그램은 지난 5월부터 준비됐다.
우선 기획(김윤영 부장)이 정해지고, 프로듀서(윤혁 차장, 이채훈·박노업 차장대우, 필자)가 선정된 후,
아이 템 선정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의혹과 미스터리가 남아있는,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사건 위주로 아이템을 찾았고,
제작팀이 종합 결정한 아 이템을 각 프로듀서들이 분배했다.
동백림 사건도 그 중 하나다.
1967년에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동베를린을 거 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된 이 사건은
구속자만 1백94명에 이른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공안 조작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중에는 세계적 예술가였던 작곡가 윤이상, 이 응로 화백 등이 연루돼 있어,
그들의 귀국 여부와 관련해 국내 언론으로부터 끊임없는 관 심의 초점이 되면서,
최근까지도 재조명을 촉구하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재조명해야 할 정황들은 많이 있었다.
우선 사건이 표면화된 1967년의 상황이 그랬다.
6월 8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부정 선거 시비 로 4·19 이후 최대 규모의 데모가 발생했고,
당시 여당은 여론에 밀려 공화당 당선자 중 몇 명을 당선 무효 처리하는 일까지 있었다.
거기다 당시 학생 데모의 주도 역할을 했던 서 울대학교 민족주의비교연구회 관련자들이 함께 검거된 것,
그리고 문단의 기인인 천상병 시 인까지 연루되어 치도곤 매를 맞은 것도 조작의 혐의를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었다.
또한 최 종 판결에서 두 명이나 사형이 선고됐음에도 불구하고 3년이 되기 전에 한 명도 남김없이 석방된 것도 그랬다.
취재팀은 우선 당시의 공판 기록을 구해 꼼꼼히 읽었다
. 수사 기록에 나타난 피의 사실을 확인한 후 피해자 섭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당시 동베를린에서 잡혀온 주요 피의자 들은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했다.
심지어 전화 통화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사람들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오히려 당시 판사, 중앙 정보부 수사과장 등은 쉽게 인터뷰에 응했고,
"사건 관련자들의 혐의는 사실이었고 재판 과 정도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관련자들이 스스로 원했던 명예 회복의 기회를, 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이 기 회를,
본인들은 왜 거부하는 것일까?’이러한 의문을 품은 채 독일 현지 취재를 떠났다.
그 곳에 가서야 인터뷰를 거부했던 관련자들의 심경을 알 수 있었다.
작고한 작곡가 윤이상 의 부인 이수자는
"남편은 단지 우리 민족을 사랑한 민족주의자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광부로 독일에 왔다가 사건에 연루된 박성옥은 "당시 중정 수사 기록은 대부분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의 인터뷰 도중 나온 ‘상선’‘점’‘포섭’ 같은 말들을 들으면서 조작 사건으로만 봤던 시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그가 말한 ‘최상선 포섭 책임자’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간 국내 언론에서는 L씨로 표기된 채 한번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은 인물,
대통령에게 직접 자수해 중정의 동백림 사건 수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
그는 국내 헤겔 철학의 거두로 자리잡은 임석진 교수였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카메라로 찍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모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 를 들을 수 있었다.
왜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접촉하고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지, 그는 조 심스럽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카메라 촬영은 완강히 거부했다.
취재팀이 내용 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화면에 담기지 않으면
시청자에게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근 한 달이 지난 후 가까스로 임석진 교수가 촬영에 응하면서 벽에 부딪혔던 취재는 풀려나갔다.
동베를린 북한대사관과 한국 유학생들의 접촉은
윤이상이 월북한 친구의 소식을 알아본 것을 시작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북으로 간 가족을 만나기 위해, 통일에 대한 젊은 열정으 로,
혹은 가벼운 호기심으로 갔던 것이 대부분의 이유였지만,
어려운 유학생의 주머니 사정 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았던 2백∼3백 달러의 여비와,
다른 유학생들을 대사관에
소개해준 일 등은 후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죄목이 되었다.
게다가 북한은 그들 중 일부를
북 한의 체제 선전을 위해 평양에 초청했고, 노동당 입당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6·25 후 10년 이 지난 무렵,
북한은 남한에 비해 월등한 발전을 했고, 그 국력을 바탕으로 한국 유학생에 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고인들의 혐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다만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과,
오로지 가족을 만나기 위해 또는 순진한 호기심으로 접촉했던 사람들,
그리고 통일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갖고 드나들었던 사람 등이,
소위 ‘동백림 간첩단’ 안에는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조작’과 ‘사실’ 사이에서 제작진을 방황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을 북한대사관에 소개했고, 평양 방문에 이어 노동당 입당까지 했던
임석 진은 여러 이유로 위기감을 느끼고 자수를 결심한 후, 당시 금융계의 유력 인사를 통해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털어놓았고, 대통령은 중정에 수사 지시를 내렸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중정 수사 요원이 독일과 프랑스에 가서 관련자들을
직접 체포해오는 명백한 불법 행위(상대국의 주권 침해)를 저지르면서
‘구속자들의 원상 복귀’를 종용하는 독일의 엄청난 압력이 시작됐고, 재판의 전과정을 감시당하고
‘남한은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까지 쓰는 등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한국’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광부와 간호원, 그리고 납치’라고 한다.
결국 체포 과정의 불법성 문제는 재판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고,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가 혹 행위(천상병의 전기 고문, 윤이상 물 고문, 김학준 구타) 등은 언급조차 없었다.
근본적인 불공정은 제기되지도 않은 채 재판은 ‘공평하게’ 진행되었고 끝났다.
단지, 독일의 압력에 대한 수용을 형집행 단계에서 반영해 사건이 터진
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두명의 사형수를 포함해
관련자 전원이 석방됐고, 공권력의 불법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명백 히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 되었다.
사건은 끝났지만 수사 과정의 가혹 행위는 피해자들의 기억 속에 끝나지 않았다.
천상병 시 인은 아내가 빨간 옷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윤이상도 10년 가까이 자다가도 일어나 감옥이 아닌 것을 확인하곤 했다.

간첩에 대한 논란은 당시 재판에서 중요한 쟁점이었다.
윤이상은 최후 진술에서 "다른 죄는 주셔도 간첩죄만은 빼달라"고 간청했다
. 자신의 작품이 간첩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걸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다른 피의자도 마찬가지였다.
난수 표를 국내로 가져온 사람도 사용한 적이 없고, 사용할 의도도 없었으니 간첩이 아니라고 주 장했다.
심지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 다녀온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강력히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외국에서 잡혀온 유학생들은 국내 소식을 접하지도 못하는 외국에서,
어 떻게 북한에 정보를 제공하는 간첩일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이용택은 "난수표는 사용 방법을 모르면 전혀 의미 없는 종이에 불과하다.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남파돼서도 가만히만 있으면 간첩이 아니라는 주장과 같다"라며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양측의 견해는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외국에서 한반도 전체를 그리워하고 통일을 보고자 했던 유학생의 시각과,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분단의 한쪽편에 서서 그 한쪽을 지켜야 하는 시각은 명확히 달랐던 것이다.
학생들의 순수한 의도를 이용하고자 했던 북한 정권의 불순한 의도를 빼면,
당시 유학생들이 찾고자 했던 통일에 대한 의욕과 모색을 비난할 수는 없다.
또 정권 안보 차원에서 동백 림 사건을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저지른 공권력의 불법 행위를 빼면,
당시 공안당국이 선택 한 방식 또한 비난할 수 없다.
결국 공안당국이나 동백림 사건 피의자 모두 각자의 위치에 서 보이는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었다.
동백림 사건의 진정한 해결은 대립하고 있는 이 분단의 상황을 해소할 때에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분단된 조국 저쪽의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동백림 사건의 진실에 온전히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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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복

 

 

                     -천 상 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1945년 가족과 함께 귀국한 그는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한다. 그의 첫 작품은 그가 아직 학생이었던 1949년 월간 문예지에 실린 "강물"이었다. 1952년경에 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기성 시인의 대접을 받았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부산에서 일을 하였다.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동백린사건>>에 연류되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간다. 그 곳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고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1971년 실종된다. 여러 달 동안 친구와 친척들은 수소문했지만 결국 그가 죽은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다. 그가 살아있다는, 거리에서 쓰러져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는 소식이 느닷없이 왔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한 여인의 방 문 이후 병세는 호전되었다. 1972년 천상병은 그 여인과 결혼, 고난과 어려움 을 겪으며 20년을 같이 한다. 그는 살아서 자신의 유고시집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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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의 그 작가 그 작품
ㅡ시인 천상병의 시집 ‘새’

떫은 삶 뒤에 가려진 깊은 향내를 느끼다

서울대학교 입학한 수재였던 시인
‘동백림 사건’ 연루 감옥 갔다 무죄 석방…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
정신병원서 노숙자로 발견됐을때 해맑은 미소 지으며 시 쓰고 있어
‘새’는 첫번째 시집…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의 마음 고스란히
포토뉴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시집 <새> 중에서 ‘나의 가난은’

 

 생전의 천상병(1930~1993년)은 아내와 함께 서울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조그만 전통찻집을 운영했다. 돈을 폐지쯤으로 여기는 가난한 시인이 혹여 어렵사리 얻은 불쌍한 아내를 굶기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난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차려준 찻집이다. 그의 아내는 특히 모과차를 맛깔나게 끓여냈다. 누런 찻물이 깊게 우러난 이 모과차를 마실 때마다 천상병의 시가 떠올랐다. 달콤새큼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고 향이 입안에 짙게 퍼진다. 굴곡 많았던 천상병의 삶처럼 그의 아내가 끓여내는 모과차에는 인생에 스며드는 갖가지 후회와 기대가 애달프게 서려 있었다.

 천상병은 서울대학교 상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스무살 약관의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한 천재였다. 젊은 날의 천상병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그의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순수하고 재능이 가득한 청춘에게 인생은 모진 쓴맛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혁명을 계획했다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다. 반년 후에야 무죄로 석방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되었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로 알코올중독이 되었다. 그의 빛나는 예술혼은 거리를 떠도는 행려병자가 되었다. 행방불명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천상병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이름 없는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때, 그는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약봉지에 시를 쓰고 있었다. 그 시는 달고, 또 한편으로는 맵고 서글펐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시집 <새> 중에서 ‘귀천(歸天)’



 <새>는 천상병의 첫번째 시집이다. 행방불명된 천상병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시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발간한 유고시집(遺稿詩集)이다. 그 아픈 태생에도 불구하고 시집 <새>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무것도 감추고 꾸밀 것이 없다는 시인의 결백한 믿음이 슬프도록 가득하다. 

 천상병은 죽을 때까지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는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미치광이·불순분자·기인으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따져 묻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못난 시인의 곁을 지켜주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이들을 위한 동시를 썼고, 이 모질고 험난한 세상을 보듬고 사랑해주었다. 그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허망한 세월을 소풍 삼아, 그에게 상처만 가득 안겨준 인생을 놀이터 삼아 고통과 좌절과 슬픔을 딛고 한 세상 철없이 노래하며 떠나가는 아름다운 시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 생활의 걱정이 없다’던 그 찻집은 지금 없다. 2010년 시인 천상병이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 목순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병의 흔적과 문학세계는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천상병의 처조카인 목영선씨가 옛 찻집 주변에서 ‘귀천’을 운영하고 있는 덕분이다. 인사동 골목마다 서린 시인의 향기, 모과차처럼 달고 쌉싸래한 향내는 아마도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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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펜=최상진 기자]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대학시절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갓 언론사에 발을 디딜 때 ‘현장에서 기사를 만들어 오라’는 데스크 지시로 생전 한번 가본적 없는 인사동에 혼자 떨어졌다. 모바일 인터넷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PC방에서 인터넷으로 ‘인사동’을 검색하던 중 흥미로운 곳을 찾았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카페 귀천이었다.

 

귀천은 인사동 중심가에서 흔치 않았던 신식건물, 밖이 잘 보이지 않는 1층 한 구석에 있었다. 테이블은 고작 4~5개에 불과했다. 손님은 고작 한 팀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은 ‘천상병 시인 사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차를 내오던 목순옥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기자입니다”라는 얼떨떨한 소개에 특유의 포근한 미소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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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에서 만난 목순옥 여사 

 

천상병의 시와 목여사의 사랑과 동백림 사건의 뒷 이야기 등 물어볼 것은 많았다. 그러나 고작해봐야 ‘귀천’과 인터넷에서 급히 검색한 수박 겉핥기식 지식만 가진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은 쉽사리 이야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바뀌는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물 흐르듯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페에 전화 한 통이 왔다. 5분쯤 흘렀을 때 목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0분쯤 흘렀을 때 그녀는 “감사하다. 다음에 꼭 한번 찾아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서해교전에 전사한 병사 아버지네요. 아들이 수양록 앞장에 ‘귀천’을 적어놨는데 다시 돌려보다 생각이 나 전화하셨대요”라며 “귀천이라는 시가 아직도 참 많은 사람들한테 힘이 되고 있나봐요”라고 웃어보였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수녀로 보였다.

 

회사로 돌아오는길 문득 ‘교과서에 실린 귀천을 본적 있느냐’는 질문에 “출판사 연락은 받았는데 본 적은 없다”는 목여사의 대답이 떠올랐다. 퇴근길 광화문 교보문고를 뒤져 교과서를 사다가 앞장에 “제대로 된 기자가 되면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퇴근길 다시 카페를 찾아 교과서를 선물했다. 그녀는 뛸 듯이 좋아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동백림사건의 피해자인 ‘이응노·윤이상·천상병 추모 문화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목여사는 두 손을 잡으며 “금방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라고 말했다. 손님이 많아 길게 인사는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엔 공부를 많이 해서 찾아갈게요”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0년 군대에서 한창 더위와 씨름하던 시절, 인터넷을 통해 목여사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슬프기보다는 서운했다. 아직 그녀와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직업기자가 되면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는지 서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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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 

 

그래서였을까 직업기자가 된 이후 인사동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인사동 부근으로 회사를 옮긴 올해서야 그때 귀천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이미 카페는 사라진지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날씨는 추운데 그녀가 직접 담갔다는 모과차가 그리운데 정작 그녀는 없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회사로 돌아오던 길 우연치 않게 수운회관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화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죄인이 된 것 같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민한 끝에서야 무거워진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길 수 있었다.

 

경운동 수운회관 13층, 조심스럽게 찾은 유카리 화랑은 조그마했다. 과거 목여사의 찻집과 비교해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창문으로 스미는 햇살이 천상병 시인의 웃음에 미치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다. 10년 전 목 여사가 건넸던 모과차의 향기처럼.

 

전시 관계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며 23명의 미술작가 5명의 사진작가가 힘을 모아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전시회 기간도 당초 6일까지에서 17일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길, 시인 천상병과 평생 그를 보듬은 목순옥이 걸었을 인사동 거리를 오랜만에 다시 걸었다. 코끝 찡한 추위 사이 어딘가에서 전설로 남은 시인과 그의 아내가 소탈하게 웃으며 반겨줄 것만 같았다. 천상병의 해맑은 미소와 목순옥의 따뜻한 차 한잔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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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스타를 넘어서다 <제12편>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편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시인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 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출처]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작성자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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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조선인 소설가 유순호씨 <귀천> 찾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라는 시로 유명한 한국의 천상병(1930∼1993)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느덧 1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평소 오래동안 그를 숭배해왔던 필자가 처음 방한하였던 1999년 천상병 시인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필자에게 처음 천상병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천상병시인과는 서울상대 동문이었고 역시 시인이며 학자였던 이중 총장님(전 연변과기대부총장, 한국숭실대총장)  매년 서울을 찾을때마다 들려가군 했던 인사동골목의 낯익은 다방들을 모조리 제쳐두고 8월9일 오후, 천상병시인의 그 맑디 맑은 영혼과 함께 생전 모습을 실감케 하는 '귀천'부터 찾았다.
   
   앞에서 먼저 안을 들여다보던 이중 총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천상병시인의 아내 목여사와 만날수 있게 되었네."라고 말하며 얼굴에 희색을 띄었다.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목순옥 여사는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이중총장님과 함께 필자에 대해서도 일면여구한 소박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죽는 날까지 <귀천>을 지키렵니다

   그동안 바쁜 일정 때문에 오래동안 다방을 찾지못했다는 이중 총장님의 인사말 뒤끝에 "건강은 어떠합니까?"는 물음에 목순옥 여사는 찻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보다시피 괜찮아요. 건강해야지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여기 인사동 골목 끝자락에 '천상병기념관'을 세울 예정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의정부시에도 '천상병문학관'이 세워질 것 같아요. 건강해야 그 모든 일들이 마무리 되는 걸 지켜볼 수 있잖아요. 매일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인사동에 나온답니다. 하루 종일 서성이며 손님맞이하는 일까지, 힘은 들지만 그래도 조카가 도와주고 있답니다."

   지금의 '귀천'은 옛날 천상병 시인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있었던 '귀천'이 아니라고 한다. 간판만은 그대로 달고 다시 문 열었다. 옛날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아프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했다.

   "옛날 찻집이 참 좋았는데…, 나가라니 힘없이 물러났지요. 어쩌겠어요? 정이야 담뿍 들었지만…, 그래도 인사동에 이렇게 다시 문 열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과 미국에서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뉴욕에서 온 필자 외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소문 듣고 찾아온 재미 교포 2명이 있었다. 아담하다 보니 열댓 명 앉으니 꽉 찰 듯싶다. 목순옥 여사를 뵈러 온 사람들이 여럿이지만 다행히도 필자와 함께 간 이중 총장님과 친숙한 사이라 목여사는 줄곧 필자를 상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주었다.

    "오늘이 마침 수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아요. 인사동 장거리는 수요일부터 그 다음주 월요일까지 오픈한답니다. 뉴욕에 가신지는 언제 되셨습니까? 2003년도에 플러싱의 '금강산'에서 천상병을 사랑하는 뉴욕 사람들의 10주기 기념모임이 열렸댔어요."

   필자는 잠시, 목순옥 여사가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숨을 한 땀 고르며 찻잔을 들었다. 필자의 귀에 익은 문인들 이름과 최근 소식을 듣고 있자니 뉴욕에서 친하게 지내는 박종호 영화감독이 들려주던 천상병 시인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천상병은 시를 썼기 때문에 천상병입니다. 시만 내놓으면 천상병은 천상병이 아닙니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들 때 인사동에 자주 놀러가군 했어요. 뻐스에서 내리기만 하면 천상병에게 손목 잡히는데 무작정 '1천원만 내.'하고 소리칩니다. 그에게만 손목을 잡히면 무조건 커피값 1천원부터 빼앗기고 봐야합니다. 더 주면 거절합니다. 딱 1천원, 커피 한잔이면 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중 총장님에게서도 들었다.

   "실은 천상병은 서울상대 다닐때 나의 선배였어요. 동백림사건때 억울하게 몰려 중앙정보부에 잡혀들어갔지요. 그때 매를 맞고 거의 반주검이 되어 놓여나왔는데 하루는 갑자기 실종된거야요. 친구들은 그가 죽은줄 알고 유고시집까지 냈었지요. 그런데 글쎄 하루는 정신병원에서 나타난거예요."

   그것은 1971년에 있었던 일이다.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고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1971년 실종된다. 

   여러 달 동안 친구와 친척들은 수소문했지만 결국 그가 죽은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살아있다는, 거리에서 쓰러져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 느닷없이 왔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한 여인의 방문 이후 병세는 호전되었다. 1972년 천상병은 그 여인과 결혼,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을 같이 한다. 바로 목순옥 여사였다.

   오늘 시인은 이미 하늘로 돌아간지 13년이 되었지만 필자가 찾아간 시인이 사랑했던 찻집과 시인이 사랑했던 사람과 그윽한 차 향기 그대로 남아 있는 '귀천'에서 '귀천'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시를 읊조려보았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니 왔나!'

지금도 귀에 선한 그 목소리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의 말이다.

가끔 인사동에 있는 찻집 귀천에 들르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목 여사는 바로 옆동네 안동이 고향인 나를 보고 

아예 고향 동생 취급을 하셨다. 

나는 천상병과 목여사를 선배님, 누님 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 상대 재학시절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자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다.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날개를 달 수 있었지만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며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천상병과 목여사가 만난 것은 목여사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친오빠가 천상병 시인과 대학 동기여서

서울에 왔다가 명동 돌채 다방에서 함께 만나 아는 사이가 되었다.

1967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서울상대 학생 강빈구 등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천상병도 여기에 걸려들었다.

이유는 강빈구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돈도 빌렸다는 혐의였다. 

그 돈이 '공작금'의 일부가 아니냐는 닥달이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목여사는 1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천상병은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아 거의 패인이 되어 출소했다.

그 총명하던 재주도 언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부산 출신의 김종해 시인이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했다.

거의 사회활동을 못하게 된 천상병을 보호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은

목여사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목여사에게는 일생의 형극이 되었다.

두 사람은 수락산 자락 단칸방에 신방을 차렸다.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천상병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신문 잡지에 짜투리 글을 가끔 쓰기는 했지만 그걸로 생활이 될 리 없었다.

목여사는 수를 놓아 팔아서 근근이 생활을 했다.

덥친격으로 천상병 시인의 정신병이 재발하여 병원비까지 목여사를 얽어맸다.

그러던 중 천상병의 친구 강태열 시인이 목여사에게 3백 만 원을 건넸다.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이었다.

무언가 먹고 살 궁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목여사는 그 돈으로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차렸다.

6평짜리 콧구멍 가게였다.

목여사는 의정부에서 차를 3번씩 갈아타고 인사동으로 출근했다.

여기서 비밀 아닌 비밀을 밝히자면,

천상병 시인은 그 당시 이미 시(詩)를 쓸 정도로 정신이 맑지 못했다.

시인의 후반기 시들은 천상병의 낙서같은 글들을 목여사가 시(詩)로 쓴 것들이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열살은 늙어보였던 여사였다.

참...

고생도 많이 한 분...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나라로 돌아가거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하고선

눈을 감았다.

천상병 시인이 죽자 부의금이 7백 만원 들어왔다.

갑자기 큰 몫돈을 본 목여사는 보관할 장소를 몰라 하다가

신문지에 싸서 재래식 부엌 재속에 묻어 두었다.

장례라도 끝나면 은행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친척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바람에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천상병 시인의 천국 노자돈이라고 말했다. 

그 목순옥 여사가 어제(2010년 8월 26일) 타계했다는 소식이다.

비교적 가까이에서 여사를 지켜본 사람으로 할 말을 잊는다.

천국에서나마 고된 날개 접으시고 편히 쉬시기를 빌 뿐이다.

'니 왔나!'

하면서 반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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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 모음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갈매기 천상병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이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강 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한가지 소원(所願)

천상병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걸래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나는 행복합니다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 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젼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랄병(炳)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봄을 위하여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월 4월 그리고 5월의 실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는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약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을 가도 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밤에 천상병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같은 詩 다른 노래] 귀천(歸天)
- 詩: 천상병, 노래: 홍순관,김원중,이동원,오현명,박흥우,서울 바로크 싱어즈


 




천상병 시인의 삶


귀천(歸天) - 천상병(千祥炳)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Back to Heaven - Chon Sang Pyong

- translated by Brother Anthon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Hand in hand with the dew
that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With the dusk, together, just we two,
at a sign from a cloud after playing on the slopes

I'll go back to heaven again.
At the end of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
I'll go back and say : It was beautiful.....




천상시인 천상병을 낭독하다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한경수, 노래 : 홍순관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유종화, 노래 : 김원중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신병하, 노래 : 이동원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변훈, 노래 : 베이스 바리톤 오현명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정덕기, 노래 : 바리톤 박흥우, 피아노 : 조영선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정덕기, 노래 : 서울 바로크 싱어즈






다시 없을 순수 영혼 나의 남편 천상병 - 목순옥

나의 남편 천상병 시인은 한마디로 남편이라기 보다 늘 일곱 살짜리 같다는 별명을 붙일 만큼 아기 같은 심성을 가진 남편이다. 때로는 깔깔 웃다가 마음에 안 들면 "문디 가시나"(본인은 애칭이라 함)라고 말을 뱉곤 했다.

남편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빠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명동 '갈채다방'에서 그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으로 시작됐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 '갈채다방'에 더욱 자주 들르게 됐다. 그때 많은 문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서정주 선생님을 비롯해서 김동리·손소회·박기원·황금찬·박재삼·이근배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계셨다. 오빠는 '금문다방' '은성다방' 등 여러 곳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오빠 친구들이 동생처럼 아껴주시고 귀여워해주셨기에 천상병 시인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오빠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연극도, 대폿집도, 자연스럽게 다녔다. 그때 나의 눈에는, 많은 문인들의 모습이 순수 그 자체처럼 보였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돌이켜 생각해본다.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으로, 잘 견디어낸 나 자신에 감사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이 나의 남편이 되기 전의 일이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가 7개월 만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시립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의 입원 사실을 모른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며 걱정하던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연락이 없자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만들기로 했다. 성춘복·민영·박재삼 선생들께서 흩어져 있던 그의 시들을 모았다. 민영 선생님이 원고를 정리하시고 성춘복 선생님이 돈을 마련하셔서 유고시집《새》가 나왔다. 김구용 선생님이 쓰신 <내 말이 들리는가>라는 서문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집 발간 이후 천상병 시인은 시립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니까《새》는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된 셈이고, 그것은 천상병 시인만이 가진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나는 정신병원을 찾아가 그를 면회했고, 병원에서 그를 보살펴주던 김종해 박사님의 권유로 그를 퇴원시켜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종로5가 동원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수락산 밑 초가집 문간방 하나를 얻어놓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이면 일어나 수락산 입구까지 산책하고 돌아와 아침을 먹고, 소꿉놀이하듯 그렇게 시작한 신혼생활은 상상을 초월한 생활이었다. 그 사이 또 한 번의 정신병원 입원 등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꿈이라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결혼생활 20년, 참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살앗다. 남편을 두고 기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남편은 결코 기인이 아니라 순수한 삶을 살다 간 아이 같은 심성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런 순수한 마음의 사람은 앞으로 다시 없을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거듭 말하곤 한다. 그를 오십년 동안 거울 안 같이 들여다 본 나이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30년(13년인데 표기가 잘못된 듯 합니다. 김승규). 올해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천상병예술제가 열린다. 앞으로 남은 내 생도 남편을 위해 쓰고 싶다. 소풍 끝내는 날 가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월간 문학사상 2006년 4월호



천상병 생각 - 이승하

인사동 거리 걸어갈 때 마주치는 찻집
내 그대 살아 생전의 얼굴 본 적은 없네
그대 반평생 제정신으로 살다
반평생 넋 나가 살았다는 얘기며
술잔만큼의 웃음과
담배 개비만큼의 구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
나 2000년에
시인으로 살아가기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歸天’ 간판 못 본 듯 발걸음 옮기네
천상의 시인이었으면 무엇하나
지상의 병든 몸이었던 것을
그대 애꿎게 당한 세 차례의 전기 고문과
생전의 유고 시집 『새』 이후
황폐한 나날에 쓴 시들이 쨍그랑!
내 혼을 깨뜨리네
아프고 또 아픈 몸으로
소풍 나온 아이처럼 웃고 또 웃다가
하늘로 돌아간 그대 생각에
나 부끄러워 그 집 앞
얼른 지나쳐 가네.




귀천(歸天) 2 - 안희선

시인의 모습은 여전했다
한 잔 술에 불콰해진 얼굴이 고왔다

이제, 편안하십니까?
홀로 이승에 남은 부인이 그립다 했다
저승에서도 차마 놓지 못한 사랑

지상에서의 그의 삶은
너무 고된 질곡의 삶이었다 한다

시인에게 물었다
그럼, 아름다운 소풍길은 뭡니까?
살아가는 동안 꿈이라도 고와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지극히 단순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진실한 시를 쓰고 싶으면,
네 영혼에서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
고뇌는 말하지 말라고

부끄러워서, 빨리 꿈을 깨고 싶었다
시인이 말했다

아, 이 사람아
술이나 한 잔 하고 가

여기 하늘나라는
맛좋은 술이 모두 공짜야




카페 귀천에서 - 손희락

인사동 갤러리 타블로 건물
10평 남짓,
새롭게 문을 연 카페 귀천을 찾았을 때
천상병 시인을 만났다
차를 끓이는
단발머리 아내를 도와
주문받은
뜨거운 찻잔을 나르고 있었다

왜 다시 왔냐고 물었더니
매일 타던 용돈도 떨어지고
목줄 타고 흐르는 막걸리도 먹고 싶고
아내가 걱정이 되어서 돌아 왔다는 것

언제 갈 것이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가
아내가 하늘가는 날
함께 갈 것이라고 대답을 한다

저승도 시인에게는 특별 휴가를 주나 보다
어둠을 밟으며 돌아오는 길
종각쯤에서 뒤돌아보니
은행나무 밑 그가 서서 웃고 있었다




찻집 '귀천' … 누구나 하늘로 가는 길, 쉬어 가면 어떠리

이택희/중앙일보 기자

모과차 맛이 특별한 이 찻집을 시인은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라고 노래했다.

내 아내가 경영하는 카페
그 이름은 '귀천(歸天)'이라 하고
앉을 의자가 열다섯 석밖에 없는
세계에서도
제일 작은 카페
그런데도
하루에 손님이
평균 60여명이 온다는
너무나 작은 카페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접촉점에 있는
문화의 찻집이기도 하고
예술의 카페인 '귀천(歸天)'에 복 있으라.


인사동의 찻집 '귀천'이다. 이 찻집은 이미 인사동이 아니라 서울의 명소다. 찻집 이름은 시인의 대표작 제목을 빌어다 쓴 것이다.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찻집을 경영하는 사람은 시인의 아내다. 목순옥(睦順玉·67) 여사.
그리고 시를 쓴 사람은 천상병(1930.1.29~1993.4.28) 시인이다. 시인이 하늘로 돌아간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시인은 살아서는 睦여사의 선생님이고 남편이었으나 피보호자였고, 귀천해서는 睦여사의 신앙이 된 행복한 사람이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문화의 찻집, 예술의 카페-귀천은 이름으로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만 실제로 인사동에 가서 찾자면 좀 헷갈린다. 한자로 <歸天>이라고 쓴 예서체 같은 글씨의 간판이 골목을 달리해 세 곳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한 시인을 위해 한 사람이 마련해 놓은 집이다.



첫째는 인사동 골목 한 복판, 해정병원 맞은편 골목에 있는 귀천이다. 주방을 포함해 7평 넓이에 테이블은 4개뿐이다. 벽을 따라 빙 돌아가며 의자를 놓고, 탁자들 사이에도 이동식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 집에는 네 자리 내 자리가 없다. 엉덩이 댈 자리만 있으면 모르는 사람도 무릎을 맞대고 어울려 앉는다. 누구도 어색해 하지 않는다. 귀천을 찾아온 사람이면 그 정도의 정서적 공감은 기본이다. 그래서 좁은 집이지만 최고 22명까지 앉아 봤다고 한다. 1985년 3월에 문을 열어 그 자리에서 만 18년 넘도록 변함없이 '문화와 예술의 인사동'을 지키고 있다.

벽에는 그림이 가득 걸려 있다. 들여다보면 문외한이라도 알만한 화가들의 그림이다. 한쪽 벽에는 千시인의 시집들과 손때 묻은 문예지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시인의 사진도 몇 장 걸려 있다. 시인과 부인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앞의 자리는 시인의 자리다. 千시인은 생시에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의정부 장암동 집에서 나와 귀천의 이 자리에 앉아 차도 마시고 사람도 만났다. 무엇보다 생화(=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벌이) 때문에 함께 있는 시간이 적은 '아내의 그늘'을 즐겼다. 시인의 자리는 이제 주인을 잃고 사진만 남아 활짝 웃고 있다.

"아직도 선생님이 귀천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나뿐 아니라 선생님과 친분 있던 사람들도 가게에 오면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인사를 해요. '안녕하십니까. 저 왔습니다' 그러면서 생시에 늘 앉던 사진 아래 자리를 보며 선생님을 생각하시지요."



두번째 귀천은 올 2월21일에 문을 열었다. 귀천에 시의 한 구절인 '아름다운 이 세상'이란 부제를 달았다. 12평이니 아주 넓지는 못해도 원조 귀천보다는 훨씬 넓다. 원조 귀천이 너무 좁아 많은 손님들을 헛걸음시켜 미안하던 차에 계기가 생겨 2호점을 열었다. 주인이 건물을 팔려고 내놨기 때문이다. 새 주인이 혹시 가게를 비우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를 한 것이다.

새로 꾸며 그렇기도 하겠지만 분위기가 첫째 집보다 밝고 깔끔하다. 길가 쪽 벽에는 큰 유리창을 두고, 나무판에 시 '귀천'을 어느 서예가의 글씨로 새겨 걸었다. 그 아래 유리창틀 턱에는 꽃다발을 늘 한 아름씩 안고 있는 항아리 꽃병이 지키고 있다. 시 '귀천'을 받드는 신단(神壇)이라는 생각이 드는 광경이다.

찻집 귀천의 대표차는 모과차다. 모과차는 睦여사가 직접 만든다. 매년 11월 말 15㎏ 한 상자에 25~27개 들이 1백50박스쯤 담근다. 모과가 서리를 맞아야 과일 맛이 깊게 완숙하기 때문에 된서리 내린 다음에 담근다.



睦여사가 모과차 만드는 과정은 통상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씻은 모과의 껍질을 모두 깎는다. 껍질이 들어가면 맛이 떫고 시다. 생모와 千시인과 함께 살아 온 의정부시 장암동 동네 아주머니들 손을 빌려 깎은 모과는 우표딱지 크기로 얇게 저민다. 모과차를 담글 때 대개는 저민 모과의 과육과 백설탕을 켜켜이 쟁여 담는데 睦여사는 다르다. 황설탕 시럽을 만들어 모과 저민 것과 섞어 숙성시킨다. 보통은 2~3개월, 길면 6개월쯤 익혀 고인 모과청으로 차를 끓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귀천에서는 1년이 안되면 모과차 축에 못 낀다. 귀천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부터 19년째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청(淸)이란 궁중음식 용어로 꿀을 이르던 말이다. 과일을 설탕에 절여 과일 향과 맛을 우려낸 시럽을 표현할 우리말이 마땅찮아 그 말을 빌어 쓰자면 모과차를 만드는 원액 시럽을 모과청이라 할 수 있다. 睦여사가 1년을 숙성시켜 뽑아 낸 모과청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모과차가 된다. 끓는 물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섞지 않는다. 더울 때 냉모과차를 만들기 위해 얼음을 넣을 뿐이다. 귀천 모과차의 깊은 맛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모과는 호흡기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날씨가 쌀쌀해지면 이 집에 종종 간다. 갈 때마다 모과차를 마시는데 맛이 진해 마시다가 꼭 재탕을 부탁한다. 물만 갖다 부어주면 될 텐데 그러는 법이 없다. 모과청을 조금 더 넣고 물을 채워 준다. 이 인정과 배려가 또한 귀천의 매력이다.

모과차 말고도 귀천의 차는 睦여사사 손수 만드는 것들이다. 그래서 차 맛이 소박하지만 진하고 깊다. 유자차는 한해 1백 박스쯤 담근다. 대추차는 매일 집에서 한약처럼 다려 가지고 와서 차로 낸다. 찾는 손님이 별로 없지만 구색으로 차림판에 올린 커피(3천5백원)와 녹차만 기성품을 쓴다. 팔리기는 모과차가 으뜸이고, 유자차, 대추차가 그 뒤를 따른다. 차 값은 작년까지 3천5백원을 받다가 올해부터 4천원으로 올렸다. 올릴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 유사 업소들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올렸단다.

귀천이 '문화 예술의 찻집'인 것은 그 집에서 앉아 있으면 마주치게 되는 문화 예술인들이 증명한다. 문인들만 해도 신경림, 신봉승, 강민, 민영, 황명걸, 윤후명, 이근배, 남정현, 성춘복 등 문단의 어른들을 무시로 볼 수 있다. 생시에 千시인과 형제의 연을 맺은 이외수도 가끔 들르며, 함께 형제의 연을 맺은 중광 스님은 벽에 걸린 그림에 담겨 이승의 인연을 지켜보고 있다. 내가 찾아간 4월 24일에는 시인 정진규 선생이 문하생들과 다담을 즐기고 있었다.



평생 천상병 시인의 보호자였던 睦여사는 남편 千시인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결혼 전 15년, 부부로 20년, 타계 후 10년, 함께 한 세월 45년을 한결같이 그래왔다. 거기엔 신앙에 가까운 믿음과 존경과 사랑이 녹아 있다. 睦여사는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시인의 10주기(4월 28일)를 보내며 반세기 시업(詩業)을 마무르는 일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다양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4월21~30일, 5월 12~31일에는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소장 미술품·유품전시회가 계속된다. 전시작품은 천상병문학회 기금 마련을 위해 판매도 한다. 지난 주말(27일)에는 장사익, 이동원 등이 출연한 시낭송회와 추모 공연이 성황리에 열리기도 했다. 5월 첫 주말(3~4일)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는 '귀천'시비(詩碑) 앞에서 제1회 천상병문학제가 열린다. 문학제를 주관하는 시사랑문인협회(02-720-2604)는 천상병문학상 첫 수상자로 문정희 시인을 선정했다. 6월에는 뉴욕 교포 문인들이 10주기 추모행사를 하며 극단 '즐거운 사람들'에서는 추모 뮤지컬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전국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단구에 고희 가까운 할머니가 그 와중에도 찻집 두 곳을 경영하는 분주함이 안쓰러워 물어보았다.
"이제 선생님 술 사 드릴 일도 없는데 이렇게 열심히 돈 벌어 어디 쓰시게요?"
천상병기념관, 천상병문학상… 睦여사 가슴에는 자금이 필요한 '천상병사업'들이 가득했다.
준비 중인 '천상병기념관'은 인사동에 사 놓은 13평짜리 한옥을 개조해 유품과 사진, 시비 등을 전시할 예정이다. 개관하려면 2∼3년은 더 있어야 한다. 자금이 달려서다. 개관은 안 했지만 여기 '歸天'이라는 간판이 이미 달려 있다. 세번째 귀천이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길 초입 대성산업 정문 맞은편 골목 안에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업(詩業)을 완성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을까, '여천사 같은' 장한 아내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잠모습 아내

어이없게 어이없게 깊게 짙게
영! 영! 여천사 같구나야!
시간 어이없게 이른 새벽!
8월 19일 2시 15분이니
모름지기 이러리라 짐작되지만
목순옥 아내는
다만 혼자서 아주 형편없이 조그만
찻집 귀천을 경영하면서
다달이 이십만원 안팎의 순이익(純利益)올려서
충분히 우리 부부와 동거하고 있는
어머니(사실은 장모님)와 조카
스무살짜리 귀엽기 짝없는 목영진
애기 아가씨와
합계 네사람 생활, 보장해 주고
또 다달이 약 오만원 가량
다달이 저금하니

…(중략)…

소설가인 이외수(李外秀)씨와 이름 잊은 제수씨가 퇴원 때
집에 와서
한달 동안 자기들 집에서 머물러 달라고 부부끼리 간청했지만……
다 무시하고
어머니와 영진이가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직귀(直歸)했습니다!
아내야 아내야 잠자는 아내야!
그렇잖니 그렇잖니.




* 전       화 : ① 02-734-2828 ② 02-3210-2288
* 주       소 : 귀천① 서울 종로구 관훈동 24번지, 귀천② 관훈동 83번지
* 위       치 : ①인사동길 한복판 해정병원 맞은편 세모화랑 옆 골목 철문 안에.
                    ②인사동관광안내센터 맞은편 인사동3길 학고재(공사중) 골목안 60m쯤
* 주  메  뉴 : 모과차, 대추차, 유자차, 생강차, 금귤차, 녹차 각 4천원
* 좌       석 : ①최대 20명 ②30석
* 주  차  장 : 종로경찰서 옆이나 낙원상가 뒤 유료주차장 이용
* 영업 시간 : 연중무휴 오전 11시~오후 10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詩 
 천상병 시인의
                  귀천, 새

 

 

 

귀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전문

 

 

Back to Heaven*

 

 

I'll go back to heaven again.

Hand in hand with the dew

that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With the dusk, together, just we two,

at a sign from a cloud after playing on the slopes

 

I'll go back to heaven again.

At the end of my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

I'll go back and say: It was beautiful...

 

 

*The title of this poem, the Chinese characters Kwi(return) and

 Chon(Heaven), gave its name to the tiny cafe in Seoul's Insadong neighborhood run by Mok Sun Ok, the poet's wife.

("The smallest cafe in the world", the poet claims in a poem not

included in this selection.)

This is the poet's best-known poem,

it has several times been set to music.

 

 

 

 

천상병 시인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아름다운 시인, 가장 천진난만한 시인,

가장 즐겁게 살다가간 시인, 아니면 가장 불행했던 시인.

어떤 수식어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시인이 바로 천상병이다.

 

시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는 분명 아름답게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누가 그를 가리켜 아름답고,

즐겁게, 천진난만하게 살다가 간 시인이라고 선 듯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시의 요지는 나를 부르는 그 날 세상에 대한 아무 미련 없이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매 연마다 첫 행에서 반복되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와

「귀천」이라는 제목에서 이러한 정신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우리를 부르는 그 날 어떠한 자세로 돌아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시의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는 각연의 주된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이슬’, ‘노을’, ‘소풍’의 시어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시 속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슬’은 빛이 닿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즉 이슬은 새벽 시간에만 잠시 존재할 뿐이다.

노을 역시 마찬가지다.

저녁 무렵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소풍’ 역시 아주 짧은 시간을 상징하는 시어이다.

 

슬픈 드라마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힘들었던

천상병 시인의 삶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아름답게 읽힐 수 있는 것은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묘사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시인의 모습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세상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시의 독특한 기법을 고려할 때 마지막 행에 나오는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를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이해하는 데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역설법이라는 기법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 속에 나오는 ‘이슬’, ‘노을’이 가지는 숨은 의미 역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에는 욕심 없는 시인의 마음이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세상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기도 하다.

 

2008년 11월 1일 KBS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 특집

 '시인만세' 가 실시한 대국민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에서

 이 시는 5위를 기록했다.

국민들이 이 시를 그토록 애송하는 것은 시 속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정서 때문일 것이다.

 

3연으로 되어 있는 짧은 시지만 시 속에 깃들여 있는 이야기는

몇 날 밤을 새워가며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에 천상병의 시집 『귀천』에 실린

그의 삶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적어본다.

 

천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은 오래 전에 예행 연습이 끝난 죽음이었다.

그가 처음 세상을 떠난 것은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그를 끌고 갔을 때였다.

 

그는 거기서 물 고문과,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전기 고문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상병은 여섯 달을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자백을 강요받았으나 친구가 여럿 있다는 사실 말고는

자백할 것이 없었다.

이때의 전기 고문으로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930년 일본 땅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가 아직 학생이던 1949년 월간 잡지 <<문예>>에

그의 첫 작품 ‘강물’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잠시 부산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는 한편으로 문학평론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평론 활동도 그의 작가로서의 생활을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번 ‘죽음’을 맞게 된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을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은 여러 달 동안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여러 차례의 죽음으로 점철된 것이 천상병의 생애라면,

그의 삶은 또한 여러 겹의 부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기억이 그의 생명의 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대학 때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이 도움이 되며

모든 것이 잘 되면 한두 달 뒤에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목순옥은 오빠의 친구를 매일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고 어린애처럼 약했다.

천상병과 목순옥은 1972년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의 결혼생활은 때로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 간 계속된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그냥 아무나 믿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는

그의 성품으로는 신혼부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 골목에 작은 찻집을 열었고,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단골 손님이 되었다.

천상병 시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이 찻집의 옥호를 ‘歸天’이라 불렀다.

이들 부부는 서울 북쪽 교외로 나가 의정부에 있는 낡은 가옥의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술에 곯은 시인의 간장이 성할 리가 없었다.

1988년 목순옥은 의사로부터 남편의 시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결코 회복할 가망이 없으니 불가피한 임종에 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춘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인 친구가 그들을 돕기로 했다.

천상병은 곧 입원했고 목순옥은 그 뒤 여러 달 동안 버스를 타고

춘천까지 달려가 매일 저녁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매일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적고 있다.

“하느님! 아직은 안 됩니다. 그에게 5년만 더 주십시오.

제발 빕니다. 5년만 더요.”

 

놀랍게도 그는 원기를 되찾았고, 그 뒤 퇴원하여

그럭저럭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년 동안이었다.

이 유예의 기간 중에 그의 새로운 시집들과 에세이집들이 출간되었고,

1993년 4월 28일 그는 마지막 귀천 길에 올랐다.

이제 인사동 찻집 문을 열어도,

늘 그가 앉던 자리에서 들려오던 시인의 꺼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열다섯 명만 들어와도 꽉 차는 그곳이 만월일 때에도 그는 말했다.

“어서 와요,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요!”

 

천상병은 되살아나서 자신의 유고 시집의 출판을 목격하는

진귀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첫 유고 시집

이후에 몇 권의 시집을 더 출판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유고 시집, 이번에는 진짜인 유고 시집이

간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출처:

도 서 명: 귀천, 지은이: 천상병, 펴낸이: 一庚 張少任

출판사: 도서출판 답게, 출판년도: 2002년 6월 1일 13쇄

귀천

작가
천상병
출판
답게
발매
200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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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계곡 / 천상병 공원 / 귀천정(歸天亭)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1930~ 1993)을 기리는 공원이

천 시인이 생전에 살았던 수락산 인근에

'시인 천상병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시비(詩碑), 육필 원고를 새긴 의자,

정자, 천 시인의 등신상(等身像·사람 크기의 조각품)등

 

사진을 찍을 공간이 마련돼있고,

1.4m 높이 청동 등신상엔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석재 시비엔 시 '귀천'이 음각됐고 버튼을 누르면

시 낭송이 흘러나오는 음성 시비엔 '귀천' '피리' '새' '변두리' 같은

천 시인의 대표작 20편이 녹음됐다.

 

또 타임캡슐를 매설해두었는데 타임캡슐에는

천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찻잔·집필원고 같은

시인의 유품 41종 203점을 모아 (타임캡슐에) 묻었다

 

타임캡술은 천 시인 탄생 200주년을 맞는

2130년 1월 29일 개봉될것이다

 

 

>

 

 흐르는 곡/귀천/김원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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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무한한 욕망을 드러내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몇십 년을 버티지 못하고 우리 모두는 저세상으로 갑니다.

가끔은 산에 올라 무수히 많은 집들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 올리며 백년 후에 살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누구나 한 세상을 살다가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해서 외우고 있는 ‘시’ 중 한 편으로

천상병 시인의 ‘귀천’입니다.

 

이 시를 음미하다 보면 무겁고 우울한 죽음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죽음의 길을 볕 좋은 어느 봄날 소풍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를 감상해 보고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음울한 죽음을 소재로 하면서 마치 어릴 적 고향집 양지바른 기슭에서

소꿉장난하는 장면을 떠 올리게 합니다.

죽음이 맑고 영롱한 이슬과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노을빛과 더불어 노닐다가 구름이 손짓하면은 가겠노라고 합니다.

가서 소풍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이승과 저승을 소풍을 나왔다 가는 그런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이렇게 소풍을 왔다 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단순한 삶을 살았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의 언행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인으로 보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의 밑바닥에는 왠지 모를 삶에 대한 애착과 한숨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슬은 맑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빛이 닿으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니다.

저녁노을은 아름답지만 곧 어둠이 닥쳐 올 것을 예견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동화 속의 그림을 연상시키지만

곧 닥칠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어 비장한 아름다움이 묻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허무나 절망을 슬프고 우울하게 표현하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채색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에 있는 시비

 

 

 

그러나 정작 천상병 시인은 자신은 천주교 신자로서 독실한 신앙심을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시인은 1993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인은 글을 써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지만

술을 좋아해서 생활인으로서는 낙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서는

몸도 성하지 못하여서, 72년에 결혼한 목순옥 여사가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열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귀천’은 문인들의 휴식처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2010년 8월 목여사가 별세하면서 문을 닫고,

그분의 조카가 운영하는 귀천 2호점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인사동 찻집 '귀천'에서 천상병 시인과 목순옥 여사

 

 

 

우리는 시를 보면 그분의 품성이나 됨됨이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때 묻지 않은 여린 심성이 서정적인 시를 쓰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과 저승을 노래한 시가 한 편 더 있어서 내친김에 소개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노래한 ‘새’라는 시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이승에서 저승을 날아 다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지에서 가지로

나무에서 나무로

저 하늘에서

이 하늘로,

 

아니 저승에서 이승으로

 

새들은 즐거이 날아오른다.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대자대비(大慈大悲)처럼

가지 끝에서

하늘 끝에서......

 

저것 보아라

오늘따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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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시인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고 있는
서강대 안선재 교수 



▲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 
 

 

 

천상병공원에 세워진 소개비

 

 

 

천상병 시인의 시를 봐도 잘 아시겠지만

그가 이 곳 상계동 수락산변에서 살면서 수락산을 노래한 시도 적지 않지요

그래서 그를 기리는 공원과 시비등...기념을 하는 것들이 이렇듯 세워져 있습니다

한참전에는 의정부에 그의 기념관을 세운다는 계획이 있었다는데....

시장이 바뀌면서 그 계획이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는 아쉬운 소식이 ....

 

수락산 물소리쉼터부근에 특히 이런 시가 많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십오 번, 십팔 번 버스종점. 그 당시 상계동은 아마 지금처럼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쭉쭉 늘어선 때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상계동 일부에는 무허가 허름한 집이 반대쪽 수락산변에 질서없이 서 있는 곳이 있고

중계동에도 6~7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그런 동네가 있습니다

골목 골목에는 연탄재가 쌓여있고, 좁은 골목길이 여기저기로 이어져 있는....

판자집의 그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개발의 문턱을 넘을 때도 됬건만...주민들과 행정당국과의 이해타산이 맞지 않아 개발이 요원한 상태로 남아 있다네요

그 곳에 천시인이 살면서 삶의 고달픔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니..그의 평소 삶의 태도를 보는 듯 합니다

 

이렇게 밝은 가로등을 만나게 되기도 하지만 ...

가로등 뒤에는 검은 길에 유령이 나를 기다리기도 했고....^&^

 

 

 

 

 

산길과 산과의 경계선이 이렇듯 허술합니다

그저 사람의 접근을 막는 의미이지만...내게는 지금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어두움의 경계일 뿐...

 

 

 

 

이 어두움 속을 걷는 시간들....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밝은 것만 익숙하고, 밝은 것만 추구하는 우리네...

눈감고 길을 걸어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항상 같은 길을 가는 일상사를 탈피하고 새로움을 얻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니 왔나!'-
천상병 부인 목순옥 여사의 타계
201년 10월 26일

 

그 깊은 맛이 배어나던 모과차

이젠 맛 볼수 없나요...?

 

향년 75세.

아이와 같은 순수한 삶을 살었던 천상병 선생님을 평생 뒷바라지하며,

누구나 일부로나마 한 번 들렸을 법한

인사동골목 한 귀퉁이에서 찻집 '귀천(歸天)' 을 운영,

끝내 노환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돼

천상병 선생님께서 계신 저 하늘로 소풍을 떠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부디 맑고 푸른 저 하늘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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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마지막 순수한사랑 목순옥 여사...알려진바 대로, 시인 천상병 님 은,  동백림 간첩사건 조작에 휘말려, 극심한 고문끝에, 성불구가 됐고, 일부 정신적인 혼돈 까지 그 후유증은 실로 한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행려병자로 헤메다가, 입원, 당시 간호사 였던 목여사는, 아무것도 없는 시인 천상병의 "사람" 과 "글" 이 좋아서 사랑했고, 평생의 반려자가 됐다... 척박한 세상사는 이분들의 사랑이 아마도 마지막 순수함 으로 기억 될듯 싶다.....

 

...필자는  천 시인 님을 여러번 뵌적이 있다...처음 만난것은, 예전에 명동에는 "필 하모니" 라는 크래식 전문 감상실이 있었다..그곳에서 80년 가을, 시 낭송 판 을 벌렸는데, 주인공이 천 시인님 이었다...어눌한 말투로 세번씩 반복하는 특이한 어법... 당시 발표한 시 는 그다지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박정희 를 이기고, 우뚝선 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수는 있었다....박정희 의 복사판 전두환의 집권으로 또다른 동백림 사건들이 출몰 하겠지. 이 우려는 이미 현실이었던 당시 였다....

 

....감상실 에서도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 나는 한동안 , 목여사 님을 이해하지 못했다...혹자들은, 천시인 님의 인세 운운 하는데, 단행본 으로 시집이 팔려나가면 당연히 수입이 동반 하지만, 천시인 님의 "귀천" 은 여러 시 들과 묻어 나가는 경우가 태반 이다보니.. 사실상  시집에 의한 수입은 거의 없다....목여사가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 을 꾸리는게 생계수단 이었다....

 

....대표작 귀천 을 놓고 나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 왜 하늘로 돌아가느냐.. 땅 이래야 그나마 맞는것 아니냐 "는
다소 "시" 를 이해 못하는 억지를 그분과의 술자리에서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르고 필자도 나이가 들어가자
"돈" 과 "섹스" 없이도 남녀가  사랑할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인정할수 있었고,.,
그런 사실을 온몸으로 일깨워 주신분이 바로 목순옥 여사님 이시다....

 

....향년 75세...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보내셨다....오로지 천 시인님..
아니 어쩌면  인간 천상병 이 아니고, 그분의 "시" 를 사랑 하시다 떠나신......

 

....천 시인님은 저승길 노잣돈으로 현금 400만원을 가지고 가셨다.
( 목여사의 어머니가,방이 차갑다며,사위 의 시신이  누어있는 방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목여사가 그곳에 부조금 400만원을 넣어 논 바람에 불타 버린 일이 있다...) 

 

....영안실을 나서면서,
천 시인님께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노잣돈 으로는 아마 한국최대 의 액수를 지녔으니,

목 여사님은 궂이 현금 없어도 되겠지? 라는 되먹지 않은 상상을 해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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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천상병 시인의 처조카 목영선씨가 자인이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 전통찻집 '귀천'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 명예욕도 충분하고 예쁜 아내니 여자 생각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지난 93년 4월 28일 작고한 천상병 시인의 ‘행복’이란 시이다. 

19주기를 맞는 천재 고 천상병 시인은 생전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 생활이 걱정 없다'는 그 찻집이 서울 종로구 관훈동 24번지에 있는 ‘귀천’이다. '귀천'은 소위 문학인들의 인사동 찻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귀천(歸天)은 천상병 시인의 대표적 시다. 85년 3월 문을 연 찻집 ‘귀천’의 주인은 천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씨였다. 

아내 목씨도 이른 네 살의 일기로 지난 2010년 8월 26일 남편인 천 시인에게로 갔다. 천 시인이 살아 있을 당시 종로구 관훈동 24번지에 있던 ‘귀천’의 흔적은 건물 공사로 사라지고, 천 시인의 처 조카인 목영선(48)씨가 맥을 잇고 있다. 목씨는 현재 옛 찻집 주변 관훈동 83번지에 ‘귀천’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후 4시 고 천 시인의 아내 오빠의 딸인 조카 목영선씨가 운영하는 ‘귀천’에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담배 한 값 막걸리 두 대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던 고 천상병 시인. 아내 목씨가 운영하는 찻집 ‘귀천’은 인사동을 들린 문학인이라면 한번쯤은 찾는 곳이었다. 조카 목씨는 고모(천상병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씨)와 함께 귀천을 운영했다. 그래서 고모님의 생활상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전 고모님은 돌아가신 고모부(천상병 시인)의 일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찻집을 운영하며, 시간을 내 연극, 백일장, 음악회, 예술제, 세미나 등 고모부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행사라면 빵이며 음식을 준비해 어디든지 갔다. 고모부가 살아 있을 때도 잘했지만 영면한 후에도 지성이었다.”
   
 
  ▲ 91년 생전 촬영한 고 천상병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 여사  
   
 
  ▲ '귀천'이란 시가 찻집 벽에 걸려 있다.  
 

생전 고모는 된장, 고추장, 김치 등 토속음식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8월 건강했던 고모가 갑자기 대장파열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대장파열을 모르고 2~3일을 견디었다. 그래서 복막염도 생기고 폐혈증도 나타났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나흘 만에 이른 네 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돌아가시기 전인 그해 3월에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고모부 천 시인에 대해서도 생전 기억을 되살렸다. “고모부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 넘는 천재 시인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고모부는 기억력도 좋았고, 욕심 없이 살았다. 어떤 말을 해도 수용하고 받아 드렸다. 시에도 그렸듯이 담배 한 값 막걸리 두 대면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목씨는 고모부에 대한 말을 계속 이었다. “...지난 67년 고모부가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바로 윤이상 씨도 함께 관계된 ‘동백림’사건이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술을 좋아해 술값을 받은 것이 간첩에게 공작자금을 받았다고 구속시킨 사건이다. 전기 고문을 3번 정도 받았다고 들었다. 협박과 고문에도 술값을 받았다는 것 외에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 과거 천 시인의 아내 목순옥씨가 운영했던 찻집 귀천의 내부모습이 판화에 담겨 있다.  
 

그는 천 시인과 아버지 고 목순복 선생은 절친한 친구였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친구 동생인 일곱 살 밑인 고모(고 목순옥씨)를 천 시인에게 시집을 보냈다. 고모부가 지난 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러 출옥을 했는데도 몸이 좋지 않아, 길거리를 헤매다가 70년대 행려(行旅)병자로 청량리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 때 죽은 줄 알고 동인들이 ‘새’라는 유고 시집을 내기도 했다. 당시 병원에 근무한 고 김종해(의사) 박사가 ‘살아 있다’고 해, 당시 처녀였던 고모가 문병을 갔다. 친구 딸인 고모를 고모부도 좋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 김종해 박사가 고모에게 천재 시인이 너를 좋아하니 결혼을 하라고 재촉했다. 음악, 시, 그림 등 모르는 것이 없는 천재 시인이 이렇게 죽기는 불쌍하니 고모가 결혼해 함께 하면 몸도 좋아지고 시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일곱 살 연상인 고모부(천 시인)과 결혼을 하게 됐다.” 
   
 
  ▲ 천상병 시인의 '행복'이란 시에 그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다.  
 


당시 처녀인 고모는 결혼 전까지 천에 수를 놓은 ‘자수’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고모와 결혼한 고모부인 천 시인은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베여있었다고도 했다. “고모부는 항상 시계를 봤다. 담배를 피울 때도 시간에 맞춰 피웠고, 술을 마실 때도 정확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문동이 자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마음이 올곧은 사람이었다. 현재 각종 비리, 부정 부패 등 정치인들의 행태를 봤으면 욕을 많이 했을 것이다.” 

고모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처 조카인 목영선씨는 천 시인이 유난히 초록색과 파란색을 좋아했다고도 했다. “왠지 빨간색은 싫어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받아 빨간색을 싫어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초록색과 파란색은 너무 좋아했다. 이 색을 보면 눈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했다. 빨간 립스틱, 빨간 옷 입고 가면 혼이 났다.” 

고 천상병 시인을 그리며 찻집 '귀천'을 운영했던 아내 고 목순옥씨도 세상을 떠났다. 현재 고 천 시인의 처쪽 조카인 목순영씨가 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고모부 ‘천 시인’의 문학세계를 알리고 있다. 그에게 앞으로 찻집을 그만두면 누구에게 맥을 이어갈 것이냐고 묻자 “집안에서 이어가도록 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찻집 ‘귀천’은 오미자, 모과자, 매실차, 수정과, 뽕잎차, 쌍화차 등을 위주로 판 전통 찻집이다. '귀천'에는 천상병 시인이 생전 아내와 파안대소한 사진과 귀천, 행복 등의 대표시가 자연스레 눈에 끌렸다. 특히 지난 천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씨가 운영했던 찻집 내부를 그린 판화가 옛 추억을 되새기게 했다. 판화에는 생전 천 시인과 아내의 다정했던 사진, 아내 문순옥씨가 펴낸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등이 새겨져 있다. 
   
 
  ▲ 이외수 소설가와 함께 한 고 천상병 시인  
 


한편, 일 년에 한번 열리는 ‘천상병 예술제’가 지난 4월 21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올해로 9회째인 예술제는 가수 최백호, 신형원 씨가 참석해 노래를 불렀고, 강희근 경상대 명예교수의 ‘천 시인의 문학상’에 대해 강연을 했다. 천 시인의 19주기 기일인 4월 28일은 백일장, 음악회, 문학상 시상식 등의 행사가 치러졌다. 

이쯤해서 고 천상병 시인의 대표시로 잘 알려진 ‘귀천(歸天)’을 되새겨 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과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과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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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특종]

귀천(歸天)시인 천상병의 일기·편지 발견


ㅡ"돋보기 살 돈 2만원만 꿔주세요" 
ㅡ"3.1절 아침에 만세 세번 불렀다"

 

▲ 생전의 천상병 시인(오른쪽)과 부인 목순옥 여사.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1980년대 초반에 직접 쓴 일기 일부와 편지가 발견됐다.

편지는 1981년 국회의원 고(故) 정상구씨에게 2만원을 꾸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형님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 그러나 이 편지들은 보내지지는 않았다. 일기는 1983년 2~3월 쓴 것으로, 3·1절에 집에서 만세를 세 번 불렀으며 연동교회 김형국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부인 목 여사는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신 직후에 유고들을 정리했는데 그때 누락된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 발견된 유고에 대해 천 시인의 친구였던 학술원 회원이자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의 생활상과 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역시 친구였던 강민 시인도 “처음 보는 것들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천상병은 사후에 날이 갈수록 애독자가 늘고 있는 시인이다. ‘천상병 문학제’에 참여하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대표작인 ‘귀천(歸天)’은 도처에 시비(詩碑)가 세워졌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대중가요로도 여러 가수가 불렀다. 문단에서는 “의정부에 있는 천 시인의 묘소에는 떡이 굳는 날이 없고 꽃이 시드는 날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천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주 찾는다는 말이다. 새로 발견된 유고를 소개한다.

◎ 편지

정상구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3매로 돼 있다. 그 중 주요 내용은 안경값 2만원만 꾸어달라는 내용.

“…아내가 몇 달 전에 실직(失職)을 해서 요새는 밥도 못 해먹고 근처의 처가집에서 얻어먹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밥문제는 아니고 내가 수일 전에 돋보기 안경을 잘못 취급해서 못쓰게 되었는데 돋보기가 없으면 적은 활자는 읽을 수가 없어서 요새 가을인데 책을 못 읽어서 답답하기 그지 없어서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아내에게 물으니 한 2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데 좀 봐주십시오, 내년 4월이나 5월이면 본인의 책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글도 못 쓸 지경이니 어찌합니까. 책이 나오면 그 인세로 2만원 기어코 갚겠습니다. 선생님 딱 한번만 봐 주십시오.”

 

▲ 정상구씨에게 쓴 편지

 

천상병 시인은 원래 가난을 즐겼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부자에게 손을 내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단지 오며가며 만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장난삼아 손바닥을 내밀고 500원, 1000원을 얻어 막걸리를 마셨다. 돈을 적게 주던 사람이 갑자기 많이 주면 거스름돈을 주기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에 쓴 그의 시 ‘나의 가난함’을 보자.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는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가난이 행복’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권력 가진 정치인에게 단돈 2만원만 빌려달라고 한 사정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아내의 실직’에 대해.

천 시인의 부인인 목순옥 여사는 1977년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친구와 함께 12평짜리 고가구점을 열었다. 워낙 가난한 부부였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문화인이 즐겨찾는 민화나 고가구 등을 파는 가게를 열었던 것. 목 여사는 1년 후에 가게를 독립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고리채를 쓰다보니 빚만 늘어갔다. 게다가 당시 금당(金堂)사건으로 알려진, 골동품 가게 주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다음부터는 골동품 거래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에게 꾸어준 돈을 떼였다. 천 시인이 어쩌다 쓰는 시의 원고료는 편당 3000~5000원에 불과했다. 한 달에 2만5000원 하는 방세도 세 달씩 밀리게 됐다. 목 여사는 마침내 1981년 가게를 정리했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빚쟁이들은 목 여사에게 “돈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부부가 자는 방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살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천 시인은 “마누라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야단이었다고 목 여사는 말했다. 목 여사는 “이때가 경제적으로 생활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바로 이때 천 시인은 돋보기 안경을 깨뜨렸다.

천 시인은 누워있을 때 안경을 꼭 어깨 밑에다 놓았다고 한다. 잠이라도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안경이 깨지기 십상이다. 몇 번이나 “다른 곳에 안경을 놓고 자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 해서 테가 부러지면 테이프로 붙이고, 또 붙이고 해서 잠시 쓰지만 끝내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안경을 살 돈조차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상구 의원에게 2만원이라도 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목 여사는 추측했다.

당시 야당인 민한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정상구씨는 부산여대를 운영하고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천상병 시인과 정상구씨가 특별히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정씨가 문단에서 어려운 작가들을 돕는 인물로 소문난 것도 아니었다. 정씨의 아들인 정영호 교수(부산여대)는 “부친이 가깝게 지내던 김춘수 시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른 시인을 도왔다는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김춘수 시인은 천상병 시인을 시단에 등단시킨 고교 은사이기도 하다. 정 교수는 그러나 “부친이 부산에서 가끔 가까운 시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여비를 주었다는 말은 들었다”고 전했다. 정상구 의원 앞으로 쓴 편지는 결국 보내지지 않았다.

목순옥 여사는 1982년 친지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목기 코너를 열어 쌀과 연탄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천 시인도 새로 돋보기 안경을 갖게 돼 다시 책을 볼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 형님에게 쓴 편지
비슷한 시기에 형님에게 쓴 편지에서 천상병 시인은 핵가족제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요새 세상은 핵가족이라고 하여 장남이 장가들면 딴 집에 살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요 이 핵가족제가 영 싫어 죽겠습니다. 키운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장남이 돈을 벌어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형님은 핵가족이다 하지 말고 같은 집에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보면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이 보수주의자”라고 단언하며 가족과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천 시인은 1960년대에 신혼이던 신씨의 전셋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던 당시 천 시인은 매일 밤 11시59분에 집을 찾았다. 그래서 신씨가 “야, 집주인한테 미안하다. 좀 일찍 들어와라”고 하면 천 시인은 “너 같으면 일찍 들어올 수 있겠냐”고 반문하더라는 것. 남에게 더부살이하는 주제에 일찍 들어와 집안차지를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또 한번은 천 시인이 밤에 술을 마신다고 마신 것이 알고 보니 스킨로션을 반 병이나 마셨다. 그래서 신씨가 하루 종일 걱정했는데 그날은 밤 10시30분에 나타나더니 동네 동장집에 문상을 갔다오는 길이라고 하더라는 것. 천 시인은 걱정하는 신씨에게 “동네에서 흉사(凶事)가 있으면 문상을 가야지 혼자 살려고 하냐”고 말하더라는 것. 신씨는 이러한 시인의 언동이 다소 우습긴하지만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 일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1983년 2~3월 씌어진 것이다. 이전에 발견된 일기는 1989년 8월에 쓴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기 서두에 “오늘 비로소 아내한테서 일기책을 구했다”고 돼 있다. 천 시인은 이때부터 처음으로 일기를 쓰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그보다 6년 전에 쓴 것들이다.

이번에 발견된 일기를 쓸 때는 부인 목 여사가 인사동에서 친지의 권유로 천 시인의 대표시 이름을 딴 카페 ‘귀천’을 운영하기 시작해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일기에는 천 시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2월 21일 천상병 시인은 아치방(당시 카페 이름)에 가서 이호종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크리스처니즘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말이 “너무나 놀라운 해석이지만 원시인에게도 하나님은 성령을 베푸셨지 않을까. 일단은 수긍이 갈 만한 말로 들었다”고 한다. 목 여사에 따르면 이호종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불승(佛僧)이 됐다.

 

 
▲ 일기

 

2월 27일 일요일에 천 시인은 교회에서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다. 천 시인이 찾은 교회는 연동교회다. 천 시인은 원래는 가톨릭이다. 그런데 1981년 기독교 방송을 통해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연동교회를 나가게 됐다는 것. 처음 나가는 날 천 시인은 김 목사를 찾아가 큰 소리로 “목사님, 저는 가톨릭입니다.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설교가 좋아서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이러한 입장을 ‘연동교회’라는 시로 썼다.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은

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서

그동안 두번 설교를 하셔서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

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

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

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

명동 천주 성당에 나갔으나

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

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

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천 시인이 김 목사의 설교를 좋아하게 된 데 대해 목 여사는 “김 목사님의 설교가 당시 다른 목사님들과는 달리 매우 조리있고 차분했었기 때문에 천 시인이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최근 “내 신학이 가톨릭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며 신부들과의 교제도 스스럼없이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대라서 민주화와 인간화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천 시인은 “부활 예수님은 반드시 한국에서 나실 것”이라는 김 목사의 설교에 충격을 받는다. 천 시인은 일기에서 “3월 1일 아침에 3·1절 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썼다. 그리고 감동적인 마음으로 한국일보의 3·1절 특집기사를 죄다 읽었다.

천 시인 부부는 연동교회에서 늘 예배당 내부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교회 3층 제일 앞줄 한가운데 좌석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예배를 보는 동안에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예배를 본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자주 “하나님 용서해주이소. 용서하이소”라고 말했다고 목 여사는 전했다. 천 시인은 예배 마지막 순서인 축도가 시작되면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간다. 김 목사와 먼저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김 목사는 당시의 천 시인에 대해 “교회에 잘 나왔으며 만나면 늘 인사하는 정상인이며 밖에서 말하는 것 같은 이상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천 시인이 “존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천 시인은 3월 7일 ‘막걸리’라는 시를 썼다. 천상병의 시 중에는 ‘막걸리’라는 제목의 시가 모두 3편이 있다. 이 중 두 편은 1984년에 발표된 것이다. 목 여사는 당시 문학지에 발표되지 않은 다음의 시가 1983년에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가지 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우태영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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