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시집 <새> 중에서 ‘나의 가난은’
생전의 천상병(1930~1993년)은 아내와 함께 서울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조그만 전통찻집을 운영했다. 돈을 폐지쯤으로 여기는 가난한 시인이 혹여 어렵사리 얻은 불쌍한 아내를 굶기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난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차려준 찻집이다. 그의 아내는 특히 모과차를 맛깔나게 끓여냈다. 누런 찻물이 깊게 우러난 이 모과차를 마실 때마다 천상병의 시가 떠올랐다. 달콤새큼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고 향이 입안에 짙게 퍼진다. 굴곡 많았던 천상병의 삶처럼 그의 아내가 끓여내는 모과차에는 인생에 스며드는 갖가지 후회와 기대가 애달프게 서려 있었다.
천상병은 서울대학교 상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스무살 약관의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한 천재였다. 젊은 날의 천상병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그의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순수하고 재능이 가득한 청춘에게 인생은 모진 쓴맛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혁명을 계획했다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다. 반년 후에야 무죄로 석방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되었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로 알코올중독이 되었다. 그의 빛나는 예술혼은 거리를 떠도는 행려병자가 되었다. 행방불명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천상병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이름 없는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때, 그는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약봉지에 시를 쓰고 있었다. 그 시는 달고, 또 한편으로는 맵고 서글펐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시집 <새> 중에서 ‘귀천(歸天)’
<새>는 천상병의 첫번째 시집이다. 행방불명된 천상병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시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발간한 유고시집(遺稿詩集)이다. 그 아픈 태생에도 불구하고 시집 <새>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무것도 감추고 꾸밀 것이 없다는 시인의 결백한 믿음이 슬프도록 가득하다.
천상병은 죽을 때까지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는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미치광이·불순분자·기인으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따져 묻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못난 시인의 곁을 지켜주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이들을 위한 동시를 썼고, 이 모질고 험난한 세상을 보듬고 사랑해주었다. 그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허망한 세월을 소풍 삼아, 그에게 상처만 가득 안겨준 인생을 놀이터 삼아 고통과 좌절과 슬픔을 딛고 한 세상 철없이 노래하며 떠나가는 아름다운 시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 생활의 걱정이 없다’던 그 찻집은 지금 없다. 2010년 시인 천상병이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 목순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병의 흔적과 문학세계는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천상병의 처조카인 목영선씨가 옛 찻집 주변에서 ‘귀천’을 운영하고 있는 덕분이다. 인사동 골목마다 서린 시인의 향기, 모과차처럼 달고 쌉싸래한 향내는 아마도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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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펜=최상진 기자]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대학시절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갓 언론사에 발을 디딜 때 ‘현장에서 기사를 만들어 오라’는 데스크 지시로 생전 한번 가본적 없는 인사동에 혼자 떨어졌다. 모바일 인터넷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PC방에서 인터넷으로 ‘인사동’을 검색하던 중 흥미로운 곳을 찾았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카페 귀천이었다.
귀천은 인사동 중심가에서 흔치 않았던 신식건물, 밖이 잘 보이지 않는 1층 한 구석에 있었다. 테이블은 고작 4~5개에 불과했다. 손님은 고작 한 팀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은 ‘천상병 시인 사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차를 내오던 목순옥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기자입니다”라는 얼떨떨한 소개에 특유의 포근한 미소를 건넸다.
▲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에서 만난 목순옥 여사
천상병의 시와 목여사의 사랑과 동백림 사건의 뒷 이야기 등 물어볼 것은 많았다. 그러나 고작해봐야 ‘귀천’과 인터넷에서 급히 검색한 수박 겉핥기식 지식만 가진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은 쉽사리 이야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바뀌는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물 흐르듯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페에 전화 한 통이 왔다. 5분쯤 흘렀을 때 목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0분쯤 흘렀을 때 그녀는 “감사하다. 다음에 꼭 한번 찾아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서해교전에 전사한 병사 아버지네요. 아들이 수양록 앞장에 ‘귀천’을 적어놨는데 다시 돌려보다 생각이 나 전화하셨대요”라며 “귀천이라는 시가 아직도 참 많은 사람들한테 힘이 되고 있나봐요”라고 웃어보였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수녀로 보였다.
회사로 돌아오는길 문득 ‘교과서에 실린 귀천을 본적 있느냐’는 질문에 “출판사 연락은 받았는데 본 적은 없다”는 목여사의 대답이 떠올랐다. 퇴근길 광화문 교보문고를 뒤져 교과서를 사다가 앞장에 “제대로 된 기자가 되면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퇴근길 다시 카페를 찾아 교과서를 선물했다. 그녀는 뛸 듯이 좋아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동백림사건의 피해자인 ‘이응노·윤이상·천상병 추모 문화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목여사는 두 손을 잡으며 “금방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라고 말했다. 손님이 많아 길게 인사는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엔 공부를 많이 해서 찾아갈게요”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0년 군대에서 한창 더위와 씨름하던 시절, 인터넷을 통해 목여사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슬프기보다는 서운했다. 아직 그녀와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직업기자가 되면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는지 서운했다.
▲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
그래서였을까 직업기자가 된 이후 인사동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인사동 부근으로 회사를 옮긴 올해서야 그때 귀천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이미 카페는 사라진지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날씨는 추운데 그녀가 직접 담갔다는 모과차가 그리운데 정작 그녀는 없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회사로 돌아오던 길 우연치 않게 수운회관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화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죄인이 된 것 같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민한 끝에서야 무거워진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길 수 있었다.
경운동 수운회관 13층, 조심스럽게 찾은 유카리 화랑은 조그마했다. 과거 목여사의 찻집과 비교해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창문으로 스미는 햇살이 천상병 시인의 웃음에 미치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다. 10년 전 목 여사가 건넸던 모과차의 향기처럼.
전시 관계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며 23명의 미술작가 5명의 사진작가가 힘을 모아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전시회 기간도 당초 6일까지에서 17일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길, 시인 천상병과 평생 그를 보듬은 목순옥이 걸었을 인사동 거리를 오랜만에 다시 걸었다. 코끝 찡한 추위 사이 어딘가에서 전설로 남은 시인과 그의 아내가 소탈하게 웃으며 반겨줄 것만 같았다. 천상병의 해맑은 미소와 목순옥의 따뜻한 차 한잔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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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스타를 넘어서다 <제12편>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편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시인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 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출처]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작성자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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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조선인 소설가 유순호씨 <귀천>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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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왔나!' 지금도 귀에 선한 그 목소리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의 말이다. 가끔 인사동에 있는 찻집 귀천에 들르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목 여사는 바로 옆동네 안동이 고향인 나를 보고 아예 고향 동생 취급을 하셨다. 나는 천상병과 목여사를 선배님, 누님 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 상대 재학시절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자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다.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날개를 달 수 있었지만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며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천상병과 목여사가 만난 것은 목여사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친오빠가 천상병 시인과 대학 동기여서 서울에 왔다가 명동 돌채 다방에서 함께 만나 아는 사이가 되었다. 1967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서울상대 학생 강빈구 등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천상병도 여기에 걸려들었다. 이유는 강빈구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돈도 빌렸다는 혐의였다. 그 돈이 '공작금'의 일부가 아니냐는 닥달이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목여사는 1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천상병은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아 거의 패인이 되어 출소했다. 그 총명하던 재주도 언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부산 출신의 김종해 시인이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했다. 거의 사회활동을 못하게 된 천상병을 보호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은 목여사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목여사에게는 일생의 형극이 되었다. 두 사람은 수락산 자락 단칸방에 신방을 차렸다.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천상병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신문 잡지에 짜투리 글을 가끔 쓰기는 했지만 그걸로 생활이 될 리 없었다. 목여사는 수를 놓아 팔아서 근근이 생활을 했다. 덥친격으로 천상병 시인의 정신병이 재발하여 병원비까지 목여사를 얽어맸다. 그러던 중 천상병의 친구 강태열 시인이 목여사에게 3백 만 원을 건넸다.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이었다. 무언가 먹고 살 궁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목여사는 그 돈으로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차렸다. 6평짜리 콧구멍 가게였다. 목여사는 의정부에서 차를 3번씩 갈아타고 인사동으로 출근했다. 여기서 비밀 아닌 비밀을 밝히자면, 천상병 시인은 그 당시 이미 시(詩)를 쓸 정도로 정신이 맑지 못했다. 천 시인의 후반기 시들은 천상병의 낙서같은 글들을 목여사가 시(詩)로 쓴 것들이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열살은 늙어보였던 여사였다. 참... 고생도 많이 한 분...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나라로 돌아가거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하고선 눈을 감았다. 천상병 시인이 죽자 부의금이 7백 만원 들어왔다. 갑자기 큰 몫돈을 본 목여사는 보관할 장소를 몰라 하다가 신문지에 싸서 재래식 부엌 재속에 묻어 두었다. 장례라도 끝나면 은행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친척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바람에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천상병 시인의 천국 노자돈이라고 말했다. 그 목순옥 여사가 어제(2010년 8월 26일) 타계했다는 소식이다. 비교적 가까이에서 여사를 지켜본 사람으로 할 말을 잊는다. 천국에서나마 고된 날개 접으시고 편히 쉬시기를 빌 뿐이다. '니 왔나!' 하면서 반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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