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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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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인 - 로버트 프로스트
2015년 03월 21일 21시 33분  조회:3294  추천:0  작성자: 죽림
노동, 꿈, 그리고 신비:

                         로버트 프로스트 시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시가 미국 독자들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0세였던 1914년에 와서였으나 일단 주목을 받게 되자 나머지 긴 생애 동안 그의 명성은 끊임없이 더해만 갔다. 1914년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사랑받았던 시인이었다. 1961년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가 취임식에 그를 초청하여 축시낭독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당시 미국문단에서 그의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시인으로서 프로스트의 성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교육받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리듬을 소네트, 2행형식, 무운시 같은 전통적인 형식에 접목시키고 동시에 언어에 활기를 불어넣어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둘째 그는, 자연에 밀착된 삶을 살아가는 뉴잉글랜드의 사려깊은 농민을 시의 화자로 일관되게 제시하여 개별 작품들을 결속시킴으로써 작품 전체를 보다 폭넓은 통일성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복잡한 현대세계에서 사람들은 시골생활이 보여줄 수 있는 특이한 비전을 열망한다고 생각한 그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열망에 맞춰 자신의 이미지를 창조해 나갔다. 

"자유시를 짓는 일은 네트 없이 테니스를 치는 것처럼 중구난방이 될 우려가 많다"고 단정지을 정도로 자유시에 대한 프로스트의 견해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에게 전통율격은 자신의 절박한 일상적 목소리와 우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감정의 추이와 순간적으로 가빠졌다가는 막혀버리곤 하는 고르지 못한 호흡의 공들을 정확하면서도 일관성 있게 받아넘기는 데 있어 어쩔 수 없이 요구되었던 기율이었다. 그는 또, "내 목구멍 속에 맴도는 어떤 야성의 소음들을 어느 누구도 나의 문장에서 놓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적고 싶었다"라고 하여, 그러한 소음들은 기존의 시형이나 리듬과의 긴장 속에 배치될 때 신랄한 맛과 묘미가 배가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첫 시집 {어느 소년의 의지}의 첫 시이자 프로스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결정판 시전집 맨 앞에 서시로 수록된 [목장](The Pasture)이란 시는 앞으로 그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잘 예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시에서 우리는 "going . . . only"의 [ou], "clean . . . leaves . . . clear"의 [kl], [l], [i:], "wait . . . watch . . . water"의 [w] 등으로 자음과 모음의 울림에서 유발된 전통시의 음악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쓰여진 이 시에서조차도 일상어의 극적인 억양과 가락에 의해 이러한 음악성은 이미 대치되거나 혼합되기 시작하였다. 첫 연 3행의 긴 호흡점과 일상 대화체에서조차도 어색해 보이는 문장구조라든지, 축약된 4행의 중간에 깊은 호흡점이 오기 직전 "gone long"에 연속적으로 두 개의 강세를 배치하여 호흡점을 길게 늘인다든지, 또 4행의 후반부 "You come too"에서 모음이 어울리는 세 개의 단음절어를 배치하여 상황의 절박성을 배가시킨다든지 하는 현상들은 처음부터 프로스트의 기교가 유감없이 발휘된 부분들이다. 

프로스트 시를 특징짓는 일상적 억양과 음악성의 결합은 단순히 시인의 목소리와 시의 리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비전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이야말로 노동이 아는 가장 달콤한 꿈이다"(The fact is the sweetest dream that labour knows: Two Tramps in Mud Time)라는 그의 유명한 진술 속에 암시된 역설적 비전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애송되는 [눈 내리는 어느 날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란 시를 통해 프로스트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다가가 보기로 하자. 

첫 연에서부터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어조와 상상적 긴장이 나타나고 있다. 숲에 대한 화자의 반응은 "think"의 부드러운 강세와 "though"의 활기찬 구어적 말씨에서 느낄 수 있듯이 처음 3행의 이완된 대화적 언어와 4행의 꿈 꾸는 듯한 묘사적 디테일들을 상승시키는 최면적 언어 - "watch . . . woods", "his . . . fill . . . with" - 사이의 대비에 의해 그 이중성이 확립된다. 개척지와 황야, 법과 자유, 문명과 자연, 사실과 꿈 같은 정반대되는 현상들은 미국문학에서 일관되게 공명을 일으켜 왔다. 이 시에서 그것들은 시장과 시장을 연결짓고 공동체와 문화를 증진시키는 여행길과 세속의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 숲의 하얀 정적 사이의 조용하면서도 반어적인 대비 속에 나타나 있다. 또한 숲을 단순히 물질적 투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숲 주인과 그것을 영적, 미학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화자의 서로 다른 관점에 의해서도 그러한 대비가 포착되고 있다. 

사실적 관점과 낭만적 관점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두 상반된 태도는 2연과 3연에서도 이어진다. 눈 내리는 숲가에 서서 숲을 바라보는 화자에 대해 그의 말은 숲의 주인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화자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먹이와 보금자리가 있는 곳으로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화자는 저 너머에 존재하는 수면과 죽음의 신비에 매혹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언어적 표현의 내용과 함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즉 화자의 어조와 언어조직의 결과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3연의 처음 두 행 -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 의 목구멍 깊이에서 새어 나오는 후음(喉音) [g], [k]와 시행의 퉁명스런 운동은 말과 관련된 현실적 태도의 언어적 표현이며, 다음 두 행 -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 의 마찰음 [s], [z]와 시행의 부드러운 운동은 화자를 유혹하는 편안한 수면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언어적 등가물이다. "쓰여진 모든 글은 극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프로스트 자신의 말처럼 이 시에 사용된 단어 하나 하나는 일종의 연극배우와 같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전개된 갈등은 마지막 연에서 해소되기는커녕 보다 고조된 언어로 이어진다.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기도 하다 / 그러나" - 아름답고도 위험으로 가득한 숲의 매력에 찬사를 보낸 뒤 화자는 세속의 의무와 책임을 환기함으로써 숲의 매력을 떨쳐버리고 일상적 현실로 회귀하려 한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 두 번 반복된 마지막 2행은 표면적으로는 이행해야 할 현실적 약속과 끝까지 마무리 지어야 할 인생여정을 표현하고 있으나 동일한 구절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이상하리 만치 깊은 공명(共鳴)을 유발하고 있다. 인생여정은 짧고 가야할 길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으므로 가능할 때 신비를 탐구하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일까? 죽음의 잠 속으로 빠져들기까지에는 불과 몇 마일, 화자는 '죽음에 대한 싸늘한 의식'(memento mori)의 결과 이제까지 눈 내리는 숲가에 서서 죽음의 신비를 명상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자도 독자도 그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시란 생각을 일구어 나가는 행위"로서, 그것은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과정이며 단지 결과만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체험의 과정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눈 내리는 날 저녁 숲가에 서서]와 같은 시가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긴장의 상상적 해결은 갈등과 미해결의 요소들이 적절한 극적 표현과 균형에 도달했다는 느낌 이상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Gray, 132-3). 






표면에 노출된 주제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우주의 신비나 공허(空虛)에 대한 화자의 반응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앞의 시 이외에도 [멀리도 깊이도 아닌](Neither Out Far Nor In Deep), [들어오라](Come In), [단 한번, 그때, 그 무엇이 있었을 뿐](For Once, Then, Something), [신의 계획](Design) 등 프로스트 시의 일관된 특징인데, 우선 [멀리도 깊이도 아닌]이란 시를 읽어보자. 



해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본다는 표면적 주제와 바라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내면적 주제 사이의 긴장은 시의 마지막 행에 와서야 비로소 분명해지고 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하는 행위는 단순히 "바라본다"(look)는 단어의 표면적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look"이란 단어는 주체의 바라봄을 나타내는 단어들 중 가장 중립적인 단어일 것이다. "gaze", "view", "stare", "see" 같은 단어는 주체의 의도나 목적 또는 행위의 강도를 수반함에 반하여 "look"은 "단지"(just)와 함께 사용되어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로서 그 의미가 최소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첫 연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는 행위가 어떤 목적이나 절실한 계기에서가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이 단순히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시 전편을 통해 "바라본다"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이 단어의 의미와 강도가 점차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첫 연에서의 무료한 바라봄의 느낌은 3연에 오면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야 어디에 있든"이란 구절이 암시하는 포괄적 인식의 문제와 결부됨으로써, 또 부분적으로는 주체의 시선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에 의해 바라봄은 또다른 차원으로 상승하게 된다. 파도가 해안에서 밀려갔다가는 다시 밀려오는 과정이 영원히 반복되듯이 인간이 바다를 바라보는 행위도 자연현상의 일부여서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마지막 연의 처음 두 행 - "그들은 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없다, / 그들은 저 깊이까지 바라볼 수 없다" - 은 어떤 포괄적 인식이나 우주의 실체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도 배제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무료한 상태에서 행하는 하릴없는 행위로 다음에는 환각상태에 행하는 것으로 비쳐졌던 바라봄의 행위는 이제 전혀 목적이 없지만은 않은 행위로 전환된다. 그래서 마지막 2행 -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응시에 / 어떤 장애가 된 적이 있었던가?" - 에 오면 이제까지 중립적이었던 "look"은 고도의 암시력을 발휘하는 "watch they keep"으로 대치되어 바라봄은 단순히 감각기관인 눈뿐만 심장과 마음까지도 작용하는 인식의 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지켜보다, 응시하다"는 의미의 "keep watch"는 대상에 대한 희망과 갈망, 또는 신비나 위험 등 다양한 암시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 관용어의 고어적 성격에 의해 장중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일상적이고도 방심한 듯 한 어구들 속에서 대위선율로 작용하는 이 관용어에 의해 사람들의 바라봄은 해안경비대의 응시나 양치기들이 베들레헴에서 빛나는 별을 보았던 경우처럼 어떤 중요한 사건을 고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육지가 바다보다 더 다양하고 따라서 사람들에게 보다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면 그들이 육지에 등을 돌리고 굳이 바다를 응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배나 축축한 모래 위에 반영된 갈매기처럼 바다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외로운 사물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갈망이나 본능적 욕구는 3연의 "진실"이란 단어에 의해 심리적, 미학적 차원을 넘어 보다 보편적이며 광대한 무엇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사람들이 바다의 광막한 공허(空虛)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시인은 아무런 해답도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본능처럼 따라다니는, 떨쳐버릴 수 없는 초월과 같은 그 무엇인가, 아니면 삶과 우주의 공허인가? 시인도 독자인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 수가 없고, 우주의 신비는 현실의 문맥 속에서 최소화된 상태로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Trilling, 132-4). 

우주의 신비에 대해 정통종교의 인습적인 해답이나 유토피아적 해결에 안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름 데로 자신만의 어떤 해결 전망에도 도달할 수 없었던 프로스트의 회의적 태도는 [단 한번, 그때, 그 무엇이 있었을 뿐](For Once, Then, Something)이란 시에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프로스트는 진리를 찾아 우물 속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전통적 관념을 희롱하고 있다. 어두운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한 번은 일순간 "분명치 않은 하얀 그 무엇"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일 뿐, 수면 위에 곧바로 파문이 일어 "그것을 흐려놓고, 지워버렸다." 시의 화자는 묻는다, "하얀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이 물음에 대한 화자의 해답은 확신에 찬 인간이 제시하는 조직적인 해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회의적인 인간이 주저하며 슬며시 선보이는 지극히 제한적이며 유보적인 성격의 것이다. "진리? 수정 조약돌? 단 한번, 그때, 그 무엇이 있었을 뿐." 프로스트의 그 무엇은 모든 것일 수도,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각 시행이 11음절로 이루어진 시행들의 휘돌아 감돌며 흘러가는 완만한 사색의 리듬을 타고 우주의 신비에 대한 탐색의 과정을 거쳐 이 시가 결국 도달한 것은 앎의 어려움을 더욱 강화시키는 일련의 물음들이다. 

"우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신비로 가득 스며 있는가?"(What mystery pervades a well!) 하고 탄성을 질렀던 19세기 후반기의 뉴잉글랜드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프로스트를 비교해보는 것이 이 시점에서 적절할 것 같다. 프로스트처럼 디킨슨도 자연의 신비를 탐색했으나 "자연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다"(nature is a stranger yet)고 그녀는 결론지었다. 디킨슨은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보았더라도 그것은 얼마 되지 않는 최소한의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 그녀가 "마법의 감옥"(magic prison)이라 불렀던 자연이라는 신비의 영역을 탐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디킨슨에게서 볼 수 있는, 극히 범위가 축소된 확신마저도 프로스트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깃을 치고 있는 자연이라는 감옥의 크기나 성격을 전혀 측정할 수가 없었음으로 우물 속에 자기가 본 그 무엇이 의미 있는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찮은 것인지조차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인식과 앎과 진리에의 접근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어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던 프로스트에게 무기력하고도 자신감 없는 아이러니의 방식에 의존하는 길 이외에 다른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Gray, 135) 






프로스트가 사물과 세계에 대해 분명하고도 적극적인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거나 유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회의적인 태도는 그 당시 미국사회의 전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이 왜소해지고 의미를 상실해가는 20세기 전반기 미국적 상황에서 "축소되어 버린 사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What to make of a diminished thing)를 고민해야 했던 프로스트는(PRF, 120) [풀베기]에서 "사실(事實)은 노동이 아는 가장 달콤한 꿈이다"(The fact is the sweetest dream that labor knows)라고 대단히 알쏭달쏭한 표현을 하였다. 프로스트에 의하면 시란 "혼란을 저지하는 순간적인 멈춤"으로서 "기쁨에서 시작되어 지혜로 끝이 난다." 이때 사물에 대한 인식과 지혜에 도달하는 데는 은유의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순간적으로나마 혼란을 제압하고 균형에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프로스트는 생각하였다. 


비유는 사랑할 때와 같다. 그것은 기쁨에서 시작되어 지혜로 끝난다. . . 그것은 기쁨에서 시작되어 충동을 지향하고, 쓰여진 첫 행에서 방향을 잡은 뒤, 행운으로 가득한 사건들의 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삶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 분파와 숭배를 구축하는 극명성(克明性)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혼란을 저지하는 순간의 멈춤으로 끝이 난다 (SP, 18). 

그렇다면 프로스트에게 시를 쓰는 행위나 풀을 베는 행위나 사과 따는 현실적인 행위들은 모두가 현실과 노동과 꿈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상태, 즉 프로스트적 비전에 도달하는 데 있어 필요조건들이다. 이때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실한 마음과 열성과 몰입인데,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도 창작의 결과보다 창작과정 자체를 중요시하였다. 왜냐하면 쁘와리에가 '인식'(knowing)이라 표현했던 비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집중과 몰입의 상태에서 가능하며, 그러한 몰입의 상태에서 갈등의 요소들은 신비한 통합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이츠나 스티븐스나 로렌스와는 달리 프로스트는 결코 일상적 현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에서 이탈하여 그의 비전이 추상으로 나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 못지 않게 그도 위대한 것이, 어떤 시들을 조직함에 있어 ... 에머슨이 과거에 열망했듯이 프로스트도 서로 갈등하는 현실들이 언어 자체의 신비한 속성 속에서 해소되는 그런 상황들을 창안해내었다 (Poirier, 175). 

"현실의 갈등이 해소되는 경우"를 보여주는 시로서 우선 [풀베기](Mowing)를 읽어보기로 하자. 




현실 속에서 실제로 발생한 적이 있거나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fact)이 "꿈"(dream) 또는 환상과 동일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또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꿈이 가장 감미로운 것은 왜 그런가?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나 이 마을에서 저 마을까지의 거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꿈을 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가? 더구나 어떻게 "노동"(labor)이 사실이나 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루벤 브라우어와 리처드 쁘와리에는 프로스트의 [풀베기]나 [사과따기를 끝낸 후]와 같은 시에서 꿈같은 사실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꿈은 모두가 노동행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Brower, 23-7). 앞에서 읽은 [멀리도 깊이도 아닌]이나 [단 한번, 그리고, 그 무엇이 있었을 뿐]과 같은 시들은 어느 특이한 순간에 비전을 약속하는 듯 하다가 결국 말을 아끼거나 유보적인 태도로 선회하여 신비의 영역 - 그것은 인간에게 이로울 수도 적대적일 수도 있다 - 을 감질나게 암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의 영역은 눈부신 빛으로 우리를 압도하지 못하고 반어적 표현의 이면에 수줍은 듯 머뭇거리는 상태로 숨겨져 있다. 그렇다고 프로스트에게 상상적 통찰이나 인간과 그를 에워싼 자연 사이의 진정한 유대가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풀베기], [사과따기를 끝낸 후], [자작나무 숲](Birches)처럼 꿈과 일상의 진지하고도 열렬한 행위들을 보여주는 시에서 진리와 인식과 사랑은 매우 암시적이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풀베기]에서 구체적인 사실과 노동과 꿈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그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처음부터 이 시는 노동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이 어떤 중요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숲가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하나." 과연 그것은 사실이었을까? 숲가에서는 풀 베는 소리 이외에도 바람소리, 풀이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풀 베는 소리 이외의 소리들이 "never"라는 부정어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는 것으로 보아 자연의 음향들은 화자의 의식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는 모든 자연의 음향에 전적으로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는 워즈워스의 화자나 또는 모든 무미건조한 사실들을 "영혼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에머슨의 화자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프로스트에게 어떤 음향이 의미있는 음향으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인간적 동인"(human agency)을 포함해야 하는데, 화자의 풀베기 행위를 시 창조 행위로 유추해석 할 수 있는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Poirier, 286). 

이어서 풀 베는 소리의 초월적 성격을 부정하거나 유보하는 프로스트 특유의 어법들이 이어진다. 풀 베는 소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분명히 말하지 않고 다만 들릴 듯 말 듯 속삭일 뿐이다. "아마도 . . . 였겠지. . . / 어쩌면 . . . 일지도 몰라." 처음 8행에는 전통적으로 초월의 세계에 속했던 신비와 힘겨루기를 하는 정신의 치열함이 나타나 있으나, 신비는 예기치 않은 순간 구체적 사실과 현실적 노력의 세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프로스트는 "꿈속에서나 얻을 수 있는 선물"이나 "손쉽게 손에 넣은 황금", 즉 다른 작가들이 확립해 놓은 기존의 이론에 안주할 수 없다. "진리보다 더한 그 무엇"은 단지 외부적으로 주어진 교리나 이론일 뿐이므로 꽃나무 가시와 초록의 뱀조차도 아우르는 노동의 행위인 "열렬한 사랑"에 비하면 그것은 허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과정 속에서 열렬한 사랑에 의해 사실과 꿈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은 가지런히 베인 풀들이 햇볕을 받으며 어느덧 저절로 건초가 되듯이 자연의 운행과정의 일부가 되어 현실 속에 견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사과따기를 끝낸 후](After Apple-Picking)에서 노동과 보상, 현실과 꿈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용해되고 있는 것일까? 로버트 펜 워른이 "동원된 디테일들이 대단히 섬세하고도 긴밀하게 짜여져 있는 균형잡힌 시"라고 극찬했던 이 시에서(Warren, 440) 노동과 꿈, 현실과 이상의 관계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이 시는 사과나무 줄기, 거기에 걸쳐놓은 사다리, 나무에 달려 있는 수많은 사과들, 홈통물받이, 거기에서 때어낸 얼음조각, 다람쥐 등 현실의 메아리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물들의 존재의미에 대해 완곡하게 논평을 가하는 듯 하다. [눈 내리는 날 저녁 숲가에 서서]와 같은 시는 표면에 노출된 의미 - 함박눈 내리는 날 마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눈 쌓인 숲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언제까지나 그 광경을 감상하고 싶었으나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길을 재촉해야만 한다 - 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였다. 그러나 [사과따기를 끝낸 후]에서 사물들 사이의 표면적 일관성은 꿈의 세계 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처음에는 사과따기라는 노동의 현실이 일관되게 진행되다가 화자는 대낮인 데도 어느덧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잠에 빠져드는 순간 시야에 어른거리는 것은 홈통에서 걷어낸 얼음조각을 눈에 대고 바깥세상을 바라볼 때의 생소하고 야릇한 광경인데, 이것은 마치 중첩기법으로 전혀 이질적인 두 광경을 포개어 놓은 사진처럼 현실과 꿈의 세계가 서로 녹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 이 시에서 꿈의 세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띄고 있으며 또 꿈과 현실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처음 6행에서 화자는 방심한 듯 한 어조로 사과나무 줄기에 걸쳐놓은 사다리 모습을 "sticking"이라는 구어적 어휘로 표현하거나, 압운을 사용하면서도 시종일관 이월시행으로 처리하여 압운이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다가 노동의 완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지막 6행에서는 압운을 부각시킨다. 또한 "is"를 축약된 형태로 반복 사용하면서 동시에 길고 짧은 등위절들을 나열하는 구어적 구문을 통해 프로스트가 "느낌의 울림"(sound of sense) 또는 "의미의 어조"(tone of meaning)이라 불렀던, 일상대화의 어조를 창조한다 (Perkins, 236). 그러나 시의 나머지 부분과 관련지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 6행에서도 꿈과 이상의 세계가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과나무 줄기에 단단히 받혀 기대어 놓은 사다리는 "이직도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어"(toward heaven still) 그것은 노동을 끝낸 후 화자가 가기를 열망하는 꿈의 세계를 암시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시행들에서 현실의 디테일들은 꿈속에서 보다 분명히 부각되고, 그 결과 노동과 노동의 보상, 세속과 천국이라는 이원적 세계의 긴장과 갈등이 해소된다. 수확하지 못한 몇 개의 사과들이 아직도 나무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삶의 과정에서 못다이룬 어떤 일들을 조금은 아쉬워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사과가 다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고, 그 결과 성취감에 도취된 상태에서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노동의 세계는 안개에 감싸여 있는 듯이 보이는 꿈의 세계, 즉 현실과 꿈, 노동과 이상이 하나가 된 세계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노동이 아는 가장 달콤한 꿈"이라는 [풀베기] 일 절의 의미는 행위와 보상, 현실과 꿈이 분리될 수 없고, 인간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실현해 가는 자아 구원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쁘와리에는 이 시뿐 아니라 노동을 다룬 프로스트의 모든 시에서 노동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요구되는 것은 힘겨운 일과 노동, 무엇인가를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육체와 정신의 행사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은 '타락'의 불행한 결과들 중의 하나이자 그 결과들을 극복하고 그것들을 행운의 결과들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노동을 다룬 프로스트의 시에서 "노동이 아는" "꿈"이 종종 달콤한 것은 그것이 자주 자아의 탄생과 재생의 이미지들, 즉 현실을 추수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Poirier, 293). 

[사과따기를 끝낸 후]는 일종의 '몽유록'(dream vision)과 같은 인식의 시이다. 왜냐하면 도입부에서부터 이 시는 사물의 본질을 투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의 노동행위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 사물에 대한 인식이 행해질 때 지금까지 견고하게 굳어져 있던 사물들은 사실은 꿈의 일부이며 인식의 주체는 신화와 관계하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노동의 이러한 투시력은 사과따기 같은 육체노동만이 아니라 시를 창작하는 행위나 시를 읽는 행위에도 똑 같이 해당되며, 이때 사과와 그것을 에워싼 주변 사물들은 영혼의 상징으로 전환된다. "두 가닥 나의 긴 사다리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엉겨 붙어"에서 화자의 진술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의 구체적 사물에서 신화적, 상징적 진술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행, "아직도 하늘을 향하고 있어"에서 "하늘"이란 단어를 단순히 "sky"가 아닌 "heaven"으로 처리하는 데서도 이어지며, 또한 "still"은 일단은 "아직도"의 의미이나 "heaven"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고요한"이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Heaven"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는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목적지에 대한 의식의 일부로 작용할 뿐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시가 쓰여진지 20여년이 흐른 후 프로스트는, 인간의 의식은 어쩔 수 없이 은유적 성격을 띌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사다리를 오르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90년대처럼 아직도 우리는 대학생들에게 생각하라고 요구하지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법이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이것과 저것을 결합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가르치지 않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것의 문맥에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일 따름이다. 학생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면 우리는 꼭지가 하늘을 향하게 하여 받쳐놓은 사다리 발바침에 그들의 발을 올려놓는 샘이 될 것이다 (SP, 41). 

노동의 체험이 완만하게 펼쳐지는 몽환적 상태에서 화자는 시인이 깨어 있는 의식의 상태에서 발언하게 될 내용을 그보다 훨씬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사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의 사물들이 화자와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 사다리는 불특정 사물이 아닌 "나의" 사다리이며, 두 가닥 평행으로 뻗어나간 사다리는 "이 문맥에서 다른 것을 말하는" 은유적 사유방식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개념적 틀은 체험의 문맥에서 꿈이 진술되고 꿈의 문맥에서 체험이 진술되는 방식에 의해 조성된다. 다시 말해서 꿈과 깨어있음의 구별이 잠정적으로 유보되는 은유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예긴데, 동사의 시제들조차도 이러한 유보적 상태를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마지막 날 사과따기를 하기도 전 깨어 있는 동안에 화자는 "내 꿈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알 수 있었고," 이윽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사물 하나 하나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화자는 사과따기를 하는 낮 동안 내내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현실과 꿈, 노동과 보상, 필요와 사랑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과정으로서의 시학의 의미를 프로스트는 [진흙탕 계절의 두 뜨내기 일꾼](Two Tramps in Mud Time)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렇다면 노동과 꿈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녹아 있다가 일반적 진술로 이행하여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마지막 6행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화자가 백일몽의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체험한 내용을 의식적으로 일반화하려 할 때 우리는 프로스트의 시에서 언제나 혼란의 뒤엉킴과 마주치게 된다. 프로스트의 시가 의식적 일반화의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에 한하여 성공적이라는 사실은 프로스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측면이다. 사과따기를 끝낸 화자는 다람쥐의 긴 동면처럼 꿈꾸지 않는 잠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열매를 따먹은 후 숙명적으로 인간을 따라 다니면서 타락과 함께 구원까지도 담보하는 인간의 잠을 원하는 것일까? 세계의 신비에 직면하여 거기에 깊이 몰입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발을 빼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는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당혹감에 사로잡힌 화자의 머뭇거리며 진행되는 구어적 구문 속에 프로스트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고 하겠다. 






"대가는 무엇보다도 범위를 설정하는 행위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In der Beschränkung zeigt sich erst der Meister)는 괴테의 말처럼 프로스트는 처음부터 뉴잉글랜드 지역 농민들의 소박한 삶과 언어라는, 엄격하게 구획된 자신의 영역 이상을 넘보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세계는 이 지역 농장과 숲과 날씨와 주민들로 이루어진 협소한 세계였고, 그의 언어는 농민의 어휘와 양키 억양이 뒤섞인 교육받은 미국 동부인의 구어적 언어였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음향이나 촘촘하게 들어찬 비유들로 이루어진 전통시의 장대한 가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뉴잉글랜드 농민들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프로스트는 그것들을 가급적 축소시키거나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였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축소시켜버린 결과 시적 효과 면에서 그의 시는 예이츠나 엘리어트의 다양성과 강렬함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퍼킨스가 지적했듯이 "시적 효과의 축소는 현실성의 증대로 보상받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시적인 것 - 당시에 시적인 것은 흔히 낭만적인 것과 동일시되었다 - 을 배격하고 현실적인 것을 선호했던 1910년대 문단의 전반적인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Perkins, 227-8). 따라서 프로스트의 시는 본질적으로 낭만적 전통 속에서 쓰여졌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기말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기존의 낭만주의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프로스트와 낭만주의 시인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로서 우리는 낭만주의 시인들의 경우 아이러니의 부재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에게서도 때로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까지는 수사학적 표현방식의 하나로 간주되어 오던 반어적 양식을 그들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즉 "영적 상태"(spiritual state)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인들은 그러한 반어적 상태를 궁극적인 상태라고 보지 않았다. 예이츠의 경우 모든 진리는 대극적 긴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 진리를 인식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반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블레이크나 셸리에게 육체와 영혼, 시간과 영원 같은 대극적 실체들은 보다 깊은 통일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그들은 반어적 상황을 인간의 한계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상상력을 통해 인간이 궁극적 실재를 포착하게 되는, 고도로 긴장된 통찰의 순간에 인간의 마음은 반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스트가 낭만주의자들의 그러한 신념과 확신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프로스트적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며, 또 우리가 그를 반낭만주의자로 분류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프로스트에게 시란 영원이나 무한, 또는 신과 같은 절대와의 교감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삶의 사소한 국면들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족한 일종의 비유이다. 그것은 또한 "생명을 담보로 한 놀이"(play for mortal stakes)이자 "표면상으로는 이것을 말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저것을 의미하는 은유"(metaphor, saying one thing and meaning another)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프로스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 정말로 그가 본심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또 그의 말의 이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아할 때가 많다. 프로스트의 그런 기질과 표현방식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프로스트처럼 그것을 균형잡힌 정신 또는 지혜라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그런 점을 싫어하는 독자들은 와이버 윈터스와 함께 그를 "영혼의 표류자"(spiritual drifter)로 규정해도 좋을 것이다 (Winters, 157-88). 왜냐하면 프로스트적 아이러니에는 현실과 초월의 영역 양쪽에 발을 하나씩 올려놓고는 어정쩡한 태도로 "아마도"와 "글쎄"를 연발하는 기회주의자의 회피와 자기보호 심리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시가 모더니스트들의 다양성과 강렬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신비와 공포를 탐색하는 작업은 미국문학의 오랜 전통이 되어왔다. 19세기 작가로는 포, 멜빌, 호오손, 제임스, 그리고 20세기에 와서는 헤밍웨이, 포오크너 등 위대한 작가들 모두가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인간의 황량한 내면을 탐색하였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경우에는 가장 훌륭한 서정시에서조차도 개똥지빠귀 울음 우는 어스름에(PRF, 334), 혹은 함박눈이 소복이 쌓이는 저녁에 숲가에 잠시 멈춰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면 대신에 휘트먼이나 도스 패서스(Dos Passos)처럼 자연과 사회의 다양한 국면들을 포괄적으로 개관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프로스트 문학은 급격한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골출신 도시인들의 향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맬컴 카울리의 지적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Cowley, 44-5). (경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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