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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도종환 -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2015년 12월 25일 02시 20분  조회:3617  추천:0  작성자: 죽림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 종 환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 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1986년>

 

                                                                ▲ 일러스트=이상진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좀 촌스럽다. 만남도 헤어짐도 '쿨해져 버린' 시대니까. 사랑에 빠진 직후라면 영원한 사랑 운운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도종환(54) 시인은 사랑에 막 빠졌을 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사랑의 영원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법, 예컨대 '사랑의 뒷심'이 세상의 나지막하고 소소한 뒷마당을 지켜가는 소중한 힘이 되기도 한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질 그날을 예비하며 헐벗은 벌판을 경작하는 시인의 어깨는 고단하다. 하지만 현실의 고단함을 기꺼이 짐 지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만나는 길임을 믿기에 시인은 '밭 갈고 땀 흘리며' 묵묵히 당신을 그리워한다. 도종환은 이별과 그리움과 눈물의 시인. 1986년 출간 이후 당대의 밀리언셀러였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이 시집의 놀라운 판매량은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상처로부터 출발한 암울한 시대의 중반에 인간의 근원적 상처인 삶과 죽음을 진정성 가득한 서정시로 빚어 올린 이 시집은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긴밀히 연결된 지점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시집을 보며 눈물 흘렸고 눈물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실제로 도종환 시인을 만나면 많이 울었던 사람의 눈빛과 마주친다. 그는 잘 웃는 편인데 그 웃음이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느낌일 때가 많다. 왜 아니랴. 당신이 사랑한 세상은 여전히 문제투성이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늘의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옥수수밭 옆에 묻은 당신을 끝내 붙잡아두고 싶었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게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므로. '(…)/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접시꽃 당신〉)

쓸쓸하게 버려진 세상의 뒷마당들에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인은 '공공 선(善)'이랄지 '희망' 같은 구닥다리 말들이 여전히 사랑을 지키는 근원 힘임을 알고 있다. 변방의 사람들을 향해 그가 내미는 노래들은 따뜻하고 순연하다. 그 노래들 속에 사랑의 푸른 빛들이 반짝인다. 영원한 사랑을 믿느냐고? 영원한 사랑은 있다. 내 안에 당신이 있는 방식으로, 혹은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만나는 방식으로. 아무리 세상이 낡고 슬픔이 많다 해도 사랑은 앞으로 나아간다.

【 김선우·시인 】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해설> 도종환 시인의 시집 [사랑의 마음에 꽃이 진다]에 실린 글이다.

 이 시는 평범한 자연 현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는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런 삶의 진실을 평이한 언어로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낸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은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방황, 고뇌, 고통, 슬픔 등은 우리가 부정하고,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 이 시에 담겨 있는 뜻이다.

 이 시는 반복과 변조를 통해 시적 의미를 강조하는 동시에 운율감을 조성하여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심어 주는 작품이다. 1연에서의 '흔들림'과 '사랑'이 2연에서 '젖음'과 '삶'으로 변조되어 있는데 각 시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동일하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부산시 범천1동 도종환 시비, 시제는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시인 "나는 들국화 같은 사람" ​

 도 시인은 목원대 교양교육원이 명사들을 초청해 진행하는 '르네상스 교양특강'의 첫 강사로 목원대를 방문해 자신을 '들국화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도 시인은 지난 2011년 출간한 열 번째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와 같은 제목의 시를 직접 낭송하며 "인생을 시간에 비유한다면 뜨겁게 살아온 30대인 낮 12시에서 1시 사이를 지나 지금 내 인생은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언덕에서 총을 겨누며 시민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경험 이후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며 뜨거운 30~40대를 보냈다. ‘분단시대' 동인 결성과 민족문학운동, 부인의 죽음, 해직 교사와 구속, 복직 등을 겪으며 심신의 피로로 쓰러진 뒤 교직을 그만두고 속리산에서 칩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굴곡진 시간들을 견뎌낸 도 시인은 "나를 일으켜 세운 힘은 좌절"이라며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인생은 이제 막 오전 9시를 지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때이니 소중한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아라"고 당부했다. (중략)

 그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중략>"로 시작하는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인용해 꽃과 인생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꽃은 누가 먼저 피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늦게 피더라도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려는 노력을 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한 도 시인은 "인생도 꽃과 같아 늦게 피어난다고 절망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을 ‘들국화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도 시인은 "이름 없는 산과 들 어디든 보는 사람 없어도 묵묵히 꽃을 피우는 게 들국화인데 이처럼 산비탈에 핀 꽃도 황량한 비탈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바꾼다는 데서 절대 그냥 피어나는 꽃은 없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디트 news 24. 목원대 '르네상스 '교양특강')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남해 유자의 향은 유난히 짙으면서도 은은합니다. 척박한 땅에서 세찬 해풍을 견디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아프면서 크는 나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향기가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도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고 가장 애틋한 사랑도 위태롭게 흔들리면서 깊어졌으니, 어디 빛나는 꽃과 사랑만 그런가요. 아주 작은 이슬에도 젖고 빗줄기에도 휘청거리는 우리 역시 비바람 속에서 더 따뜻한 잎을 피워올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딛고 재기한 사람도, 평생 외길을 걷는 장인도, 불모지에서 신산업을 일으킨 기업가도, 실패를 거듭하며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낸 과학자도 우리보다 더 흔들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고두현/문화부장·시인,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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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26 시와 숲길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1954. 9. 27 충북 청주~.

시인·작가.

도종환은 청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청주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3년 동안 원주고등학교에서 유학한 뒤 바로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1985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발간한 그의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는 이미 이때부터 깊숙한 자기 울림의 세계를 그려낸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에게 바친 시집 〈접시꽃 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이라는 2권의 시집은 그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도종환은 교사가 된 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수인의 몸으로 교육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을 발간했다. 그후 도종환은 전교조 충북지부장으로서, 또한 충북문화운동연합의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청주와 대구를 넘나들며 '분단시대'라는 동인 모임을 결성, 군부독재의 탄압에 맞서 동인지 간행을 주도했고(1984년 1집을 발간한 이후 5집까지 발간함) 그 문학적 열정과 업적을 인정받아 1990년 '신동엽 창작 기금'에 이어 제7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0년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과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 그리고 1998년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와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1998)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도종환은 1998년 9월 충청북도의 작은 시골 학교인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되었다. 그는 2004년 건강 문제로 교직을 떠났다. 그밖의 저서로는 시집 〈슬픔의 뿌리〉(2002)·〈해인으로 가는 길〉(2006), 산문집 〈모과〉(2000)·〈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04)·〈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2000), 동화 〈바다유리〉(2002)·〈나무야 안녕〉(2007) 등이 있다. 민족예술상(1997), 거창평화인권문학상(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예술상(2006) 등을 수상했다.

 

 

 
 

 

접시꽃 당신/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촟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읍니다

 

 

 

 

 

 

 

<해설> 시인 도종환의 제2시집 [접시꽃 당신]은 실천문학사에서 1985년 발간되었다.

 표제작인 <접시꽃 당신>은 암으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시어를 통해 절실하게 노래한 시이다. 이 시에서 아내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급속하게 생명력을 잃고 있는 존재이다. 작가는 이러한 아내의 모습에 대한 자신의 커다른 슬픔을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오고”와 같은 표현을 통해 숨기지 않고 표현하면서, “남은 하루 하루의 앞날은/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와 같이 아내를 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격정을 토로한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보잘 것 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내 마음의 모두를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아파해야 합니다”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고,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난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다는 아내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처럼 이 시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진솔하게 표현하면서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러한 슬픔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시적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시집 가운데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시인 도종환과 '접시꽃 당신'

 마흔 넘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1986년에 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과 시 《접시꽃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인은 ‘애절한 사랑’이라는 접시꽃의 꽃말답게 그 시집에서 아내와의 지순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암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아가는 아내를 간호하며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이 “우수수” 빠져나가는 아내의 여위어 가는 몸을 보며 아려 오는 가슴을 노래했다.

 그는 “먹장구름”처럼 시시각각 아내를 덮쳐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던 아내를 왜 데려가려느냐고 절규한다.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도 아내와 함께 베어 내야 하고, 남아 있는 “묵정밭”도 아내와 함께 갈아엎어야 한다고 애원한다. 한때 그 시집은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접시꽃 당신〉이 아내가 죽기 전의 애틋한 사랑 노래라면,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는 저세상으로 먼저 떠난 아내를 묻고 돌아온 뒤의 쓰라린 회한이 묻어 있는 노래이다. 그는 “살아 평생 옷 한 벌 못해 주고” 마지막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힌 아내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느끼고 용서를 구한다. 이어 이제는 만나기 힘든 아내와 자신을 1년에 겨우 한 번 만날 수 있는 견우직녀로 비유하며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토로한다.

 도종환 시인은 1991년, 대학 강사와 재혼했다. 많은 독자들이 실망감을 표시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내가 죽은 뒤 전교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투옥되었다. 그는 그 당시 재혼 배경에 대해 투옥된 뒤 아이들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어쨌든 그가 재혼을 했다고 해서 시집 《접시꽃 당신》의 의미가 퇴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와는 독자적으로 작품 자체로서 존재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김원익/신화연구가, '신화, 인간을 말하다')

 

 

 

 

 

 

 

 

 

 

 

 

 

 

 

 

 

 

 

 

 

 

 

 

 

 

 

 

 

 

 

 

 

                         <도종환(都鍾煥): 1954 - >

 

 

 

*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주성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 1977년 청산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 1980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마을에서>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

*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해직되고 투옥되었으며,

* 1998년 복직되어 2004년까지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 재직했다.

*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16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중이다.

* 첫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 [접시꽃 당신](1986),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 2000년대 이후에는 [슬픔의 뿌리](2002), [해인으로 가는 길](2006)을 출간하였다.

*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상(1990), 제22회 정지용 문학상(2009),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대상(2010), 제13회 백석문학상(2011), 제20회 공초문학상(2012) 등을 수상하였다.

◇ 국회의원 도종환​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이 국회의원이 된다.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인 16번을 배정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정치인이기 보다 시골 마을에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순수 시인이기를 바랬다. 그도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이 되면서 "국회의원에는 절대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위의 강력한 추천과 충북 출신 민주통합당 국회의원들의 노력으로 당선 안정권 순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에세이집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에서 "가난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과 방황과 소외와 고난과 눈물과 두려움으로부터 내 문학은 시작되었다"고 썼다. 그는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강둑에 쪼그려 앉아 울어야 했고 국물 수제비를 먹으며 학찰 시절을 보냈다고도 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에서도 국어 선생님의 꿈을 키워 시골 중학교 교사가 된후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을 출간, 베스트 셀러 작가로 우뚝 섰다. 
 '접시꽃 당신'은 암 진단을 받은 아내가 낳은지 네달 된 딸과 세살 된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자 그 과정에서 쓴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접시꽃 당신', '병실에서', '암병동' 등을 묶어 시집을 낸 것이다. 당시 전국 일간지는 도 시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 왔고 그의 인기는 시간이 갈수록 식을 줄을 몰랐다. 지금도 도 시인의 접시꽃 당신은 문학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가을비' 등은 교과서에도 실려 많은 학생들의 암송시가 되기도 했다.
 도 시인은 전교조 출범 초기 충북지부장을 맡아 일하다 감옥살이도 했다. 그가 포승줄에 묶여 구치소로 들어가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왜 저 사람이 잡혀가야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충북 국정감사에서 도 시인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시국 상황은 쉽게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해직 10년 만에 그는 다시 시골의 중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그 답게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기도 했다.
 도 시인은 "명성이 계속 수입으로 이어지게 슬픈 얼굴을 한 시를 쓸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치열하되 거칠지 않은 시, 진지하되 엄숙하지 않은 시, 아름답되 허약하지 않은 시, 진정성이 살아 있되 거창하거나 훌륭한 말을 늘어놓지 않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진정한 서정 시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느 시골 마을에서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텃밭을 가꾸며 산과 강과 하늘과 산새 소리를 시로 쓰며 촌노처럼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살아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조용히 살기를 원한 그를 정치판이 그냥 두지 않았다. 결국 연막탄이 터지는 진흙탕 국회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동안 유명 작가 중에 소설가 김홍신씨, 김한길씨 등이 국회의원을 지냈다. 처음에는 왕성한 활동으로 박수를 받았으나 결국 흐지브지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은 그들이 작가도, 정치인도 아닌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도 시인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접시꽃 당신의 순수한 이미지가 혹시 연막탄 정치판에서 눈물, 콧물에 젖어 끌려 나오고 결국은 시인으로써도 정치인으로써도 잊혀진 사람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도 시인은 상임위 활동을 '문방위'에서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한류를 대중문화가 이끌고 있지만 앞으론 본류 문화가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다"고 말했다. 또 "경제 민주화 실현은 물론, 보편적 복지 달성과 불안한 남북관계를 극복해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일조하고 싶다"고도 했다. 
 시 쓰는 일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정치다. 접시꽃 당신이 국회의 문을 나올때 정치인으로써도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시인으로 다시 돌아와 더욱 성숙하고 감동적인 시를 쓰기를 기대한다. (조무주/논설실장, 충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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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1954. 9. 27 충북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도종환은 청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청주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3년 동안 원주고등학교에서 유학한 뒤 바로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시 <고두미 마을에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85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발간한 그의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는 이미 이때부터 깊숙한 자기 울림의 세계를 그려낸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에게 바친 시집 〈접시꽃 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이라는 2권의 시집은 그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도종환은 교사가 된 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수인의 몸으로 교육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을 발간했다. 그후 도종환은 전교조 충북지부장으로서, 또한 충북문화운동연합의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청주와 대구를 넘나들며 '분단시대'라는 동인 모임을 결성, 군부독재의 탄압에 맞서 동인지 간행을 주도했고(1984년 1집을 발간한 이후 5집까지 발간함) 그 문학적 열정과 업적을 인정받아 1990년 '신동엽 창작 기금'에 이어 제7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0년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과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 그리고 1998년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와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1998)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도종환은 1998년 9월 충청북도의 작은 시골 학교인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되었다. 그는 2004년 건강 문제로 교직을 떠났다. 그밖의 저서로는 시집 〈슬픔의 뿌리〉(2002)·〈해인으로 가는 길〉(2006), 산문집 〈모과〉(2000)·〈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04)·〈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2000), 동화 〈바다유리〉(2002)·〈나무야 안녕〉(2007) 등이 있다. 민족예술상(1997), 거창평화인권문학상(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예술상(2006) 등을 수상했다

 

 

도종환 시 모음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읍니다

 

 

 

 저녁숲
-스콧니어링을 그리며

모란꽃도 천천히 몸을 닫는 저녁입니다
같은 소리로 우는 새들이 서로 부르며
나뭇가지에 깃드는 걸 보며 도끼질을 멈춥니다
숲도 오늘은 여기쯤에서
마지막 향기를 거두어들이는 시간엔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어제 심은 강낭콩과 감자에게도
다람쥐와 고라니에게도 편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
흩어진 장작을 추녀 밑에 가지런히 쌓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주류사회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난 뒤
버몬트 숲 속으로 들어갈 때는
진보에 대한 희망도 길도 잃었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그 대신 거대한 광기와 파괴와 황폐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마를 씻고 
바위 위에 앉아 생각해 보니
당신처럼 오늘 하루 노동하고 읽고 쓰고 
자연과 사람의 좋은 만남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무토막과 잔가지들을 
차곡차곡 쌓듯 내 삶도 이제는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가 잡힐 것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그리고 간소하게 저녁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둠이 숲과 계곡을 덮어오자 
땅 위에 있는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별을 향해
손을 모읍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가족이며
크고 완전하고 넓은 우주의 품에 들어
넉넉하고 평온해지기를 소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밤은 아직 구름에 가린 별들이 많고
내 마음에도 밤안개 다 걷히지 않았지만
점차 간결한 삶의 단순성에 익숙해지고
일관성을 잃지 않으며
내 눈동자가 우주의 빛을 되찾으면
별들이 이 골짜기에 가득가득 몰려올 것임을 믿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것들 중에
빠져나갈 것은 빠져나가고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은 돌아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얼굴도 웃음도 제 본래 모습을 되찾고
의로움도 선함도 몸속에서 원융하여
당신처럼 균형 잡힌 인격이 되어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여름 산도 가을 숲도 다 기뻐할 것입니다
생의 후반에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생사의 바다를 건넌 곳에서도 편안하시길 빕니다
숲 속에서도 별 밭에서도 늘
완성을 향해 가고 있을 당신을 그리며

 

 


퇴계의 편지


일찍이 저보邸報를 보고서
고비皐比를 걷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믐께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정했다니
축하할 일입니다
저는 지난 해 돌아와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 받지 못했습니다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글을 올려 
이 소원 이루어지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지며
글은 더욱 맛나고 가난은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 깨끗하고자 의리를 어지럽혀선 안 되지만
의를 잊고 벼슬만 좇아서도 안 된다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때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몸을 깨끗이 하고 의를 행할 뿐이지 
화복은 논할 바 아닙니다
다만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데 용감했던 것이 실패한 까닭이니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니고
담금질해 발뒤꿈치 땅에 단단히 붙어
허명과 이익과 위세에 넘어가지 않길 바랍니다
원컨대 밝은 덕 높이는 노력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하기로 약속합시다
삼가 편지를 올려 이별을 대신합니다
경오 맹춘 스무 나흘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 고비를 걷었다는 건 스승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성균관 대사성의 직분에서 물러났음을 가리킨다.
* 경오년은 157이문재 시인은 이 시집의 발문에서 모든 시집에는 문이 있으며 이 시 「산경」이 바로 그 일주문이라고 했다.

이 서시는 매우 단정하며 ‘뼈의 언어’가 범종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산 아래 낡은 언어, 오래된 언어, 병든 언어를 내려놓자, 자연이 ‘나’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

낡고, 오래되고, 병든 언어가 곧 도종환 시의 “뼈의 언어”가 아니던가. 여기서 “뼈의 언어” 언표가 되어야 옳다.

이 “뼈의 언어”는 단지 침묵의 형식을 통하여 말의 시위를 자연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에서 뼈의 언어는 무엇일까?0년 선조 3년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고봉 기대승에게 쓴 편지이며 황은 퇴계선생 자신의 이름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 개 햇살을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빨래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머물던
비구름이 몸을 풀어 올라갔다가는 다시
산허리를 감싸 안고 낮게 내려오길 이레 째
선방 뒤를 돌아 개울물이 소리치며 흘러간다
먹물 묻은 손을 씻어 낸 뒤
옷가지를 물에 담가 헹군다
동백꽃 붉은 꽃송이가 머리 째 툭 떨어진다
아직 고운 자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꽃이
땟물과 섞여 떠내려간다
내가 지은 업이 물에 씻겨 가길 바라며
비누칠을 하다가 아름답던 날들까지도
흘려보내야 함을 안다
선업도 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자만과 욕심과 허영의 얼굴이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속옷을 빨아 다시 향기롭기를 바라기보다
선업도 악업도 햇빛에 다 날아간 뒤
그저 물 마른 냄새만 남길 바란다
다만 지워지고 씻기어 텅 빈 우주의 흔적이
거기 와 머문다면 좋겠다
나마저도 씻겨 내려가
마음자리에 허공만 남는다면
고요히 비어 있는 충만 가운데 
바람소리 물소리 소리 없이 스민다면

 

 

 

종이배 사랑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을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낮선 섬의 
감탕받에 묶여 있는 시간이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 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처처불상

 

수펑나무 뿌리가 석굴을 덮으며
천천히 폐허가 되어 버린
따프롬 사원 무너진 회랑 한 귀퉁이에
잘려진 돌부처의 발 두 개를 주워다 놓고
발 아래 촛불과 향을 피워 놓은 채
늙은 보살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처처불상

발목도 그녀에겐
부처의 전부인 것이다
무너진 절 틈에서 걸음을 멈춘 채
오랜 적멸에 들어 있던 부처의
발을 주워 가슴에 안고
보살은 얼마나 간절하였을 것인가
사랑하면 부처 아닌 게 없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빈 방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먼 산이 어둠을 천천히 빨아들이는 것이 보일 때
저녁 하늘이 어둠의 빛깔을 몸 가득 머금는 것이 보일 때
늘 가던 길에서 내려 샛길로 들고 싶다
어디 종일 저 혼자 있던 빈 방이 나를 좀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면 좋겠다
적막함이 낯설음을 말없이 받아주는 방
적막의 서늘한 무릎을 베고
잠시 누워 있게 해주면 좋겠다
그동안 살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였으므로
말없이 입을 닫고 있어도 불편해 하지 않고
먼저 지쳐 쓰러진 적이 있던 그가
오늘 지친 모습으로 들어온 하루치의 목숨을 위해
물 끓이는 소리를 들려주면 좋겠다
처음엔 모두들 이렇게 어색한 얼굴로
쭈뼛거리기도 하다가 사랑을 알아 가는 것이므로
문 밖으로 천천히 내려오던 어둠이 
멋쩍어 하는 우리의 얼굴을 잠깐씩 가려주기도 하고
우리가 늘 타향을 전전하며 살고 있으므로
고향을 너무 멀리 떠나왔으므로
고향이 어딘지 묻는 것만으로도 말문이 트이고
비슷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 하나 추억처럼
꺼내놓아도 서로를 즐겁게 긍정하고 
내 몸을 꽁꽁 묶으며 나를 긴장시키는 게 일이던
끈들을 느슨하게 풀고
비슷한 사투리만으로도 익숙한 입맛을 만나는 저녁시간
몇 잔의 편안함이 술 향기로 번져오는
순간 순간을 나누어 마시며
웃음이 번져 가는 사람 하나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어둠 속에서 만나는 객창감이 좋고
낯선 시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른 팔로 팔베개를 하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면
잠시 사라수나무 그림자 몸에 와 일렁이고
내 겉옷을 들어 잠든 나를 덮어주는
이름 모르는 사람 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비둘기

 

양식을 하늘에서 찾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광장의 돌바닥 위에 먹이가 뿌려지면
새들은 일제히 날개를 펴고 지상으로 날아든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먹이는 푸석푸석하고 따듯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긴장과 저항도 없고
씨앗을 지키는 떫고 시큼한 과육도 없는
밋밋한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부리를 쪼아대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깊이 배었다
부피는 작지 않지만 허기를 메꾸기엔 부족한
지상의 양식들을 입안에 넣었다가 목이 메어
뱉어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순간들을 자주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발갛게 언 발로 땅을 차곤 하지만
그것이 날아오르기 위한 발돋움은 아니다
오늘도 상가 옥상에 재푸른 몸을 기대고 있거나
가등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지만
날개는 오르는 일보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비행에
길들여져 있다 하늘을 다 잊은 건 아니라고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어 보지만
비대해진 몸은 지상에 던져지는 먹이를 향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의 건물 아래쪽 허공만을 제 영토로 축소시킨 채
크고 푸른 하늘은 접어버린 비둘기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 비둘기떼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여도
내 가슴속에 비가 내리고 있는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지
금방 알아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노랫소리를 듣고는
내가 아파하고 있는지
흥겨워하고 있는지
금방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 마음의 음색과 빛깔과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내 안의 시인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 소리 
풀잎 위로 뛰어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끌려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려가던
맑은 귀를 가진 시인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소리에 묻혀 사는가
바알갛게 물든 감잎 하나를 못 버리고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 두던 고운 사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 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속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 1행, 18-19행은 S. Freud가 한 말을 인용한 것임

 

 

전 재산

-김군자 할머니 말씀

 

 

 

외로운 거 그게 제일 힘들지 뭐

어려서 부모 잃고 열일곱 살 때 일본 군대 끌려가

악몽 같은 삼 년을 위안소에서 보냈지

행인지 불행인지 사랑한다는 사내 하나 있더니

저 먼저 목을 매고 딸은 다섯 해를 살다가 죽고

술집 식모살이 막일 단추 끼우기

그렇게 살았어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뼈 마디마디가 저려오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살이 시리고 힘이 드는지

나만 힘든 건지

남들도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픈지

 

 

돈을 왜 다 내어놓느냐고?

나도 그애들처럼 고아였잖아

정선에서 장사할 때 모은 돈하고

지원금.....

안 쓰고 모은 건데

나무 적은 돈이라 미안해

전 재산이랄 게 있나

요란 떨 거 없어

 

 

지금도 아프지 별 차도가 없어

시간도 얼마 안 남은 것 같고

 

 

.............혼자 살았으니까

외로운 거 그게 제일 힘들었지 뭐

 

 

 

자작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못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별

 

새벽하늘에 들어가지 못한 

별 하나 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가장 고요해지는 때를 기다려

우리들 가장 가까운 곳까지 내려온 별인지도 모르지요

오손도손 사랑하고 가슴 아파도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다

모두들 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돌아갈 때에

너무도 가까이 내려와 오래오래 혼자 눈물짓다가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진 별인지도 모르지요

남들보다 늦게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던 마음인지도 모르지요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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