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에 관한 시 모음> 홍수희의 '아, 진달래' 외
== 아, 진달래==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네
마음속에 자꾸 커 가는
이 짓붉은 사랑
무더기로 피어나 나를 흔드네
내 살아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리도 가슴 뛰는 일이네
내 살아 너를 훔쳐볼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숨막히는 슬픔이었네
파도치는 내 마음
감춘다는 건 다 말장난
아, 진달래
(홍수희·시인)
== 진달래꽃==
아리어라.
바람 끝에 바람으로
먼 하늘빛 그리움에
목이 타다
산자락 휘어잡고 文身을 새기듯
무더기 무더기 붉은 가슴
털어놓고 있는
춘삼월 진달래꽃.
긴 세월 앓고 앓던
뉘의 가슴
타는 눈물이런가.
大地는 온통
생명의 촉수 높은 부활로 출렁이고
회춘하는 봄은
사랑처럼 아름다운
환희로 다가온다.
(박송죽·시인, 1939-)
== 진달래==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네 가느단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 입은 나비의 눈매를 본 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너는 보았니
봄마다 앓아 눕는
우리들의 持病은 사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 점 흰 구름 스쳐가는 나의 창가에
왜 사랑의 빛은 이토록 선연한가
모질게 먹은 마음도
해 아래 부서지는 꽃가루인데
물이 피 되어 흐르는가
오늘도 다시 피는
눈물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진달래==
신작로
잘려나간
산자락에
그네에
매달린
아기처럼
피어 있는
진달래
초연(超然)한
연분홍
색깔 너머로
무거운
하늘을 이고
마음 저리도록
그리운
내 님
모습 같이
피어 있다
(김근이·어부 시인)
== 진달래==
꽃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삼각산을 오르다가
나목(裸木)들의 더미 속
가녀린 여인의 몸 같은
진달래 한 그루가
몇 송이 꽃을 피웠다
수줍은 새악시 볼 같은
연분홍 고운 빛 그 꽃들은
속삭이듯 말했지
봄이다!
너의 그 가냘픈 몸뚱이 하나로
온 산에 봄을 알리는
작은 너의 생명에서 뿜어 나오는
빛나는 생명이여
말없이
여림의 강함이여!
(정연복·시인, 1957-)
== 4월의 진달래 ==
봄을 피우는 진달래가
꽃만 피운 채
타고 또 타더니,
꽃이 모자라
봄이 멀까요?
제 몸 살라 불꽃
산불까지 내며
타고 또 탑니다
(목필균·시인)
== 진달래와 어머니 ==
진달래 숲길을 걷고 계신 어머니는
배고프던 옛날에 진달래를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고
하신다. 진달래 한 송이를 맛보시면서
앞산 진달래를 꺾어 와 부엌 벽 틈마다 꽂아두면,
컴컴하던 부엌이 환했다고 하신다.
진달래 맛이 옛맛 그대로라고 하신다.
얼핏 어머니의 눈빛을 살펴보니
어머니는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계셨다.
처녀 적 땋아 내린 긴 머리 여기저기에
진달래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빨간 풍선처럼 이 산 저 산을 마구 떠다니시는 듯했다.
(어머니, 너무 멀리 가지 마셔요.)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산에 피는 꽃이나 사람꽃이나 사람 홀리긴
매한가지라시며,
춘천을 오갈 때는 기차를 타라고 하신다.
일주일에 내가 이틀씩 다니는 경춘가도의
꽃길이,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다.
어머니 말씀이 제겐 詩로 들리네요
하니깐, 진달래 숲길에서 어머닌
진달래꽃 같은 웃음을 지으신다.
(설태수·시인, 1954-)
== 진달래 능선에서==
진달래 한 송이 지게에 달고
꽃 같은 마음이라야 하느니라 하시던
아버지 그 말씀......
아버지 생전에
지게발통 작대기 장단에
한을 노래 삼아 콧노래 부르시더니
저승 가시는 길에
가난의 한을 씻기라도 하시듯
배움의 한을 씻기라도 하시듯
허리 굽은 능선에 빨갛게
꽃으로 서 계시는 당신
오늘도
진달래 불타는 산 허리춤에
꽃가슴 활짝 열고 계시군요
생시처럼
아버지!
당신 계시는 음택(陰宅)
진달래 타는 불꽃에
가슴이 아려
꽃잎에 이슬이 내립니다
(이계윤·시인)
== 진달래와 아이들==
지금은 없어진 이 땅의 보릿고개
에베레스트 산보다도 높았다는.
밑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은
풀뿌리 나무껍질 따위로 연명했죠.
허기진 아이들은 산에 들에 만발한
진달래 따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다르데요.
어제 숲 속의 샘터로 가는데,
두 아이가 진달래 꽃가지를
흙을 파고 정성껏 심는 것을 보았어요.
물론 그들이 꺾은 것은 아니고,
누군가가 꺾어서 버린 걸 말예요.
나는 집에 돌아와서야 깨닫게 되었지요
그 진달래는 내 가슴속에도 심어졌다는 것을.
(박희진·시인, 193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벚꽃 시 모음> 오희정의 '벚꽃 축제' 외
== 벚꽃 축제 ==
여한 없이 핀 가지마다
눈이 즐겁고
반쯤 벙글어
손을 꼽게 하는 나무도 있구나
한두 송이 피우다
이내, 지우는 나무 아래 섰다
내 생은
어느 나무로 피고 있는가?
(오희정·시인)
== 벚꽃 ==
어떤 감미로운 속삭임으로
자릿자릿 구워삶았기에
춘정이 떼로 발동했을까
튀밥 튀듯 폭발한 하얀 오르가슴 쫓아
겨우내 오금이 쑤시던 꿀벌들
실속 차리느라 살판난 강가
꽃샘이 끼어들도록 방관하더니
본분 잃지 않고 서두르는 걸 보면
봄바람아, 너 정말 오지랖 넓다
화끈한 누드쇼 이끌고 방방곡곡
사람사태 나도록 쏘삭거리는 일
참말로 잘하는 짓이다
(권오범·시인)
== 산벚꽃나무 ==
뒤로 물러서려다가
기우뚱
벼랑 위에 까치발
재겨 딛고
어렵사리 산벚꽃나무
몸을 열었다
알몸에 연분홍빛
홑치마 저고리 차림
바람에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나태주·시인, 1945-)
== 벚꽃이 필 때 ==
꽃봉오리가
봄 문을
살짝 열고
수줍은 모습을 보이더니
봄비에 젖고
따사로운 햇살을 견디다 못해
춤사위를 추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봄소식을 전하고자
향기를 내뿜더니
깔깔깔 웃어 제치는 소리가
온 하늘에 가득하다
나는 봄마다
사랑을
표현할 수 없거늘
너는 어찌
봄마다
더욱더 화려하게
사랑에 몸을 던져
빠져버릴 수가 있는가
신바람 나게 피어나는
벚꽃들 속에
스며 나오는 사랑의 고백
나도 사랑하면 안 될까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벚꽃 ==
봄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꽃잎을 들어 보이며
내가 하는 말
단 한마디 말
올해도 알아듣고
마주 웃어주는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한 채
펼쳤던 자리를
거두고 돌아가니
빈 꽃자리마다 눈물 어린다
세물나루
십릿길
깊어가는 봄
(이몽희·시인)
== 벚꽃잎이==
벚꽃잎이 머얼리서 하늘하늘 떨리었다
떨다가 하필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 눈길이 내 앞을 운명처럼 막았다
가슴이 막히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흐느끼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었다
벚꽃잎은 계속 지고 있었다
(이향아·시인, 1938-)
== 벚나무는 건달같이 ==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여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
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가네
(안도현·시인, 1941-)
== 벚꽃 ==
벚꽃나무의 영혼이
꽃으로 부활하여
가지 위를 맴돌다
홀연히 사라진다.
꽃다움의 극치는
원죄가 없어서일까
흠도 티도 없는
꽃의 원조로구나
탐욕과 이기를 버리면
얼굴에 꽃이 피고
미움만 버려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리.
해맑음과 눈부심이
강하게 刺戟할 때
꽃과 마주한 나는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박인걸·목사 시인)
== 벚꽃이 질 때 ==
벚꽃잎 사이로
환한 햇살이 쏟아질 때마다
그대는 속삭인다.
당신의 눈길은 참 아름답다고
벚꽃 나룻길 너머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대는 속삭인다.
당신의 손짓이 그리울 거라고
강물 위에 벚꽃잎 질 때마다
흔들리는 몸짓으로
그대는 나즉이 속삭인다.
다시 올 때까지
내 향기 가슴에 담아두라고
(이남일·시인, 전북 남원 출생)
== 벚꽃 유감 ==
어제 봤던 벚꽃
밤 내내 내린 비에
후드득 떨어져 버렸다
나 보기 싫다
눈물도 보이기 싫다
아침에 눈물 싹싹 훔치고
봄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기다려 달라는 소리도
눈길 주지도 못했다
봄빛은 등을 두드리며
길 떠나라 따갑게 때린다
(이국헌·시인)
== 벚꽃, 그녀에게==
누군가를 저렇게 간절히 원하다가
상사병으로 밤새 앓아 누워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적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원망하다가
눈물 하루종일 가득 흘려
깊은 강물 되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목 빼고 기다리다가
검은머리 한 세월
파뿌리 흰머리가 되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못 잊어 그리워하다가
붉은 목숨 내놓고
앞만 보고 행진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찾아다니며
사막의 빙하의 길
오래 걸어 신 다 닳아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단 며칠이라도 얼굴 보여주려고
이 세상 태어나기를 원한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몸 눕혀 불길로 공양해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목숨 바쳐
순교자의 흰 피를 뿌려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말없는 눈빛으로 다가가
속 깊은 우물이 되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천년 만년 바람 불고 눈비가 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절대적인 꿈과 희망이 되어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전율이 감도는
노래와 춤이 되어 본 적이 있느냐
어제 벚꽃, 그녀에게
숨김없이 옷을 다 벗고
사랑한다고 고백해 본 적이 있느냐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벚꽃처럼 져내려도==
남녀가 같이 있는 것만큼 기쁜 일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기만 한다면 달도 해도 맘대로 방 안에서 띄우고 저물게 할 것입니다.
서로 그리워만 한다면 함께 누운 곳마다 수풀 생기고
산과 계곡이 낳아지고 냇물과 강이 분만된 새 세상이 매일 아침처럼 돋고
저녁처럼 지는 것을 함께 볼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사랑으로만 살기 원했듯 사랑만으로 죽는 것도 좋습니다.
벚꽃처럼 화려한 절정에서 한꺼번에 이 세상 모든 게 져내려도 좋습니다.
함께 있어서 좋은 관계만큼 아름다운 꽃나무도 없고 향기롭게 설레는 일은 도무지 없습니다.
(김하인·시인,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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