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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서울 성북구가 미아리고개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려고 움직였던 일이 있다. 당시 구청장은 "비극과 평화가 공존하는 미아리고개는 세계와 공유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미아리에는 6·25 때의 '눈물의 이별 고개'를 증언할 자취가 남아 있는 게 없다. 교전(交戰)의 흔적, 납북자가 끌려가던 황톳길, 피란민 움막집…. 무얼 갖고 신청하고 무얼 보존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이 일자 슬그머니 꼬리를 숨겼다.
▶그해 유네스코는 일본이 신청한 '가마쿠라(鎌倉) 역사 지구'를 탈락시켰다. 800년 역사를 가진 가마쿠라는 교토·나라와 함께 일본이 50년 전부터 특별법을 만들어 보호해온 유서 깊은 도시다. 1992년 세계유산조약 가입 이후 첫 탈락이라 일본인들의 실망이 컸다. 유네스코는 "일본을 뛰어넘는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고 탈락 이유를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제도는 1972년 시작했다. 1960년대 말 이집트 정부가 나일강에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면서 찬란한 고대 유적이 물에 잠기게 됐다. 세계적인 보존 운동이 일어나 아부심벨 신전을 해체·이전하는 열매를 맺었다. 이를 계기로 멸실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 목록을 만들어 인류 공동의 보호 노력을 기울이자는 협약이 맺어졌다. 어떻게 보면 목록에 많이 올린 나라일수록 문화재 보호에 취약한 나라가 되는 셈이다.
▶물론 현실적으론 그렇지 않다. 문화유산 등재는 나라끼리 자부심을 겨루는 마당같이 됐다. 일단 지정이 되면 관광 수익이 늘어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를 올린 이후 지금까지 열한 건을 등재했다. 비교적 높은 출루율(出壘率)이다. 그런데 이번에 벽에 부딪혔다. 올해 등재 신청한 '한국의 서원(書院)'이 낙제에 해당하는 '반려(Defer)' 판정을 받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유산 가운데 서원은 그나마 보존이 잘돼 있는 편이다. 여행을 하다 서원에 들르면 빼어난 풍광과 건축미,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세계가 담뿍 느껴진다. 이런 유산을 내놓아 '탁월 하고 보편적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면 준비와 전략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등재 유산이 1000개를 넘기면서 유네스코의 심사도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한 건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 문화와 후손을 위하는 쪽으로 발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봄빛이 완연한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라 낙동강에 비친 산 그림자를 보고 싶다.